페어리 섹스


리제, 문 좀 열어봐”

복도를 울리는 온화한 목소리, 그렇지만 그 안에는 약간의 우울감과 걱정이 섞여 있었다. 풍성한 머리카락과 큰 키를 가진 페어리 시리즈의 맏언니, 오베로니아 레아였다.

왜”

성의 없는 짧은 단답, 그나마도 목소리가 작아서 듣지 못할 뻔 했다. 한참을 문 앞에서 씨름하다가 드디어 무슨 목소리라도 들은 레아에게는 그나마도 희소식이었다. 하지만 굳게 닫힌 문이 열리기까진 앞으로도 수 많은 소통의 장애가 있을 것이 뻔했다. 속에서 끓어오르는 역겨움과 증오를 꾹꾹 누른 채로 따라온 한 사람이 말을 거든다.

그 년 때문이야? 원한다면, 죽일 수도 있어”

레아와 같은 목소리, 하지만 말투는 천지차이다. 서릿발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티타니아가 답답한 레아를 대신해 질문한다.

아니”

그러면”

그냥, 나가 제발”

차라리 평소처럼 눈을 희번득 하게 뜨고 누구와 싸움이라도 했으면 속이 편할 듯 했다. 하지 않던 행동, 하지 않던 반응을 보이니 레아로써는 미칠 노릇이었다.

리제, 마음 바뀌면 바로 언니한테 와, 가볼게”

대답은 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결국 그대로야?”

네”

사령관실에서 보고를 받는 사령관도 표정이 그리 편해보이진 않는다. 오르카호 내에서 가장 불안정한 바이오로이드이긴 했지만, 그래도 최근엔 이상한 낌새도, 과격행동도 보이지 않았는데, 왜 갑자기 그런 행동을 했을까, 의문이었다.

사건의 발달은 하루 전이었다. 식당에서 리리스와 리제가 평소처럼 투닥이고 있었고, 언제나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리제가 칼을 꺼내들기 전까진

갑작스런 무기의 등장, 주변에 있던 바이오로이드들이 제압을 했지만 식사 분위기는 그대로 난장판이 되어버렸다. 그 리리스 마저 예상을 못했던 일이었던 듯 놀란 눈치였던걸 보면, 리제의 반응이 얼마나 의외였는지 알 수 있었다.

이후 사령관은 리리스를 불러 이야기를 들어보았지만, 평소와 비슷한 대화, 서로 티격태격 하긴 했지만 이전에도 정실이니 첩이니 흔히 하곤 했던 대화라는걸 리리스, 그리고 다른 바이오로이드들의 증언으로 확인 할 수 있었다.

근신처분, 무기를 꺼내들었지만 공격의 의사는 없었고 본인도 반성하고 있으니 일단은 그런 징계로 그치기로 했다. 물론 말이 좋아 징계지 머리 좀 식히란 뜻이었다. 사령관이 리제의 상황을 파악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하기도 했다.

그리고 사령관을 미치게 하는 이유가 바로 그곳에 있었다.

하아…”

커피 한 모금을 들이킨 사령관이 뜨거운 입김, 아니면 한숨을 내뱉는다.

차라리 예전처럼 ‘그년보다 자기가 낫지 않냐’ 뭐 이런 말이라도 했으면 낫겠는데 말이지”

그러게요”

잘못 한 사람 치고 황당한 반응을 기대하는 사령관의 넋두리에 레아까지 동의한다. 레아도, 사령관도 차라리 그런 예전의 반응이면 똑같이 타이르고 달래보았겠지만, 고개를 푹 숙인채로 잘못했다고 말하는 리제의 반응에 무어라 할 말이 없어졌다. 오죽하면 피해자인 리리스도 그 소식을 듣고 당황했으니 말이다.

널 어떻게 해야 좋겠니…”

사령관의 혼잣말이 레아의 가슴을 후벼판다.

주인님”

응?”

리리스 양에게선…”

잠깐 숨을 고른다.

아무 이상도 없는게 확실한거죠?”

이상이라고 하면…”

뭐 부상이라던가, 아니면, 리제랑 대화하면서 다른 무언가를 자극했다던가…”

리제의 영향 탓일까, 어제오늘 레아의 분위기마저 조금 심상치 않다. 사령관은 언젠가 책에서 읽은 내용을 떠올린다. 가족 구성원 중 누군가에게 변화가 생긴다면 그것이 다시 다른 가족 구성원에게 영향을 주는 것이 모든 가족 구성원에게 반복 된다는 것이 요지였다.

가족 같은 분위기의 부대는 많다. 배틀메이드, 컴패니언, 실제 가족은 아니지만 몽구스팀이라던가 이런 부대들 말이다. 그러나 저런 부대와 페어리는 근본적으로 다른 부분이 있다.

배틀메이드, 컴패니언, 몽구스팀 모두 다른 바이오로이드들 처럼 안정되어있는 고리를 갖고 있다. 딱히 모난 성격의 누가 있는 것도 아니고 제어하기 힘든 요소가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페어리는 다르다. 바이오로이드 모두가 불안정한 요소를 갖고 있다. 바이오로이드는 모두의 생산 목적에 맞추어 성격을 설계했다는데, 그 때문에 티타니아는 태생이 증오와 고통으로 가득 찬 삶을 살고 있고, 인간을 살려야한다는 맹목적인 목적 때문에 드리아드는 주인에게 버려지는 걸 극도로 기피하며, 리제는 정원관리라는 목적 때문에 주인의 적에 극도로 공격적인 성향을 띄고 주인에게 집착한다. 그나마 안정적인 다프네 역시 사령관이 그런 낌새를 느낀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그나마 어린 아쿠아와 모두를 포용하는 성격인 레아만이 어느정도 안정적이었으나, 이젠 그것마저 확신 할 수 없었을 듯 했다.

레아의 앞치마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게 보인다.

주인님”

응?”

이런 말 해도 될까요?”

레아 답지 않게, 괜히 뜸을 들인다.

물론이지”

괜히 평소와 다른 레아의 반응에 사령관도 의자를 돌려 가벼운 미소와 함께 레아를 마주본다.

리제가 치는 사고 정도는 레아가 분명 커버할 수 있었다. 그러나 티타니아가 오면서 많은 게 변해버렸다. 여차 하면 다른 바이오로이드, 아니 지역째로 박살 내버릴 수 있는 막강한 화력, 리제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의 불안정한 심리, 그리고 자신에게 보이는 끝없는 증오심, 다른 동생들을 신경쓰면서 그런 거대한 짐을 진 레아의 부담감이 위험수위에 오를 거란 건, 사령관도 짐작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레아의 부담감은 고요하고 아름답게 터져나온다. 자신의 주인에게마저 부담감을 넘기기 싫다는 듯,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눈물을 떨군다. 눈물마저, 그녀의 앞치마폭에 소리없이 내린다.

사령관은 그런 레아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긴다. 잠시, 레아가 모든 눈물과 부담을 쏟아낼 수 있게, 사령관은 조용히 의자에 앉아있는다.

저, 정말…최선을 다한 것 같은데…왜…”

최선을 다했단 말로 그녀의 노력을 포장 할 수 있을까, 알아서 척척 잘하는 다른 부대원들에 비해, 언제 사고를 칠지 모르고, 오르카호를 넘어 주둔지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는 사령관을 끊임없이 곤란하게 하는 리제, 드리아드 등을 관리하며 다른 부대에 뒤처지지 않게 성과를 올려서 자매들을 케어하려는 노력, 심지어 자신을 죽이려들고 끝 없이 증오하는 티타니아까지, 본인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되살려낸 어떤 이기적인 인간 때문에 신경써야하는 나날이 무려 1년이었다. 차녀의 역할을 해 줄 사람 마저 없는 고독한 언니의 부담감을, 너무 늦게 알아차린건 아닌가 싶다.

레아 답지않다. 울고있는 그녀의 모습은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었다.

한참을 쏟아낸 탓에, 사령관의 셔츠까지 눈물범벅이 되었다. 눈주변이 푹 젖은 레아의 표정은 한결 가벼워진듯 살짝 미소짓고 있었다. 저러다 다시 쓰러지지나 않으려나 싶지만, 최소한 사령관 앞에서는 감정에 솔직했던 레아니까, 괜찮을 듯 했다.

리리스 양은 똑똑한 사람이니까요. 리제랑 문제가 있진 않았겠죠. 아까는 혹시나 했지만…”

결국 언니는 언니구나, 사고 친 자기 동생보다도 상대방을 먼저 의심 할 수 밖에 없는 그 마음이, 왠지 나쁘지만은 않게 느껴진다.

못 볼 꼴을 보여드렸네요”

아니야, 귀여웠어”

장난은…”

가벼운 농담으로 분위기를 환기시켜보려 했지만, 결국 근본적인 문제는 바뀌지 않는다.

그래서 리제는 왜…”

그러게요”

입에 공기를 한가득 머금은 사령관이 결국 대책이라고 하기엔 너무 초라한 방안을 하나 내놓는다.

리제한테, 근신기간동안 세탁실 당번을 봐달라고 해줘, 때 되면 내가 직접 찾아가볼게”

주인님이요? 리제 기절하는 거 보고싶으세요?”

아니, 그건 아니지만…”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는 말은 속으로만 삼킨다.

그 뭐라 해야하나…지금 리제라면, 왠지 내가 가도 다른 반응을 보일 것만 같아. 지금까지랑은 너무…다른 바이오로이드 같다고 해야하나”

그런데 왜 세탁실이에요? 다른 당번도 많을텐데”

일단 세탁실은 지하에 있으니까 다른 바이오로이드들과 마주칠 일도 적고, 세탁실로 가는 바이오로이드라고 해봐야 포티아, 콘스탄챠, 그리고 사령관실 당번인 애들…뭐 이런 얌전한 애들이니까 오히려 마음을 좀 놓지 않을까 싶어서, 내 방 당번도 당분간은 리제랑은 별로 마찰이 없을 애들 밖에 없거든, 그리고 내가 언제 한 번 찾아가도 다른 바이오로이드들이 있으면 리제가 부담을 많이 느낄 것 같기도 하고…하다못해 내가 세탁실 문을 틀어막으면 숨거나 도망가지도 못하겠지”

뭔가 일이 엄청 심각해지네요…리제랑 사령관님이 만나는데 그런 의미로 도망치는 걸 걱정해야하는 날이 오다니…”

그러게”

그러면, 그렇게 전할게요. 나가볼게요”

응, 부탁해”

잠깐의 면담이 끝나고 레아는 다시 리제의 방으로 향한다. 침대에 누워있는 리제 역시, 단단한 방문과 방벽 안에서도 그녀의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오감이 아닌, 자매간의 특이한 감각일지도 모른다.

리제, 듣고있니”

벌써 저녁이다. 경비와 당번 외에는 대부분이 휴식시간인 오르카호 내에서 지금이라면 다들 자유롭게 식사를 할 시간이었지만, 하루종일 방 안에 틀어박혀있는 리제라면 자기도 모르게 잠을 자고 있을지도 몰랐다.

주인님 명령이야. 근신처분동안 세탁실 당번 하라는”

주인님?”

답지않게 갈라지는 목소리가 들린다. 물도 안마시고 하루 종일 틀어박혀 있던 걸까, 근신기간 동안 먹고 마시지 않아도 바이오로이드가 죽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다.

응, 나와봐”

하루 꼬박을 굳게 닫혀있던 리제의 방문이 처음 열린다. 리제의 모습을 하루만에 마주한 레아는 다시금 터져나오려던 눈물을 간신히 참는다.

평소의 생기가 넘치다 못해 희번득하기까지 한 눈은 초점을 잃고 흐릿해졌고, 자기 못지 않게 긴 머리는 산발이 되어있었다. 옷도 평소 작업복과는 다른 아무렇게나 걸친 차림이었다. 문제가 많긴 했어도 활발했던 자기 동생이 갑자기 이런 몰골이 됐는데 이유조차 모른다니, 가슴이 답답해도 어찌 할 도리가 없었다.

아니면, 주인님한테 직접 물어볼래?”

아니, 됐어”

세탁실로 걸어가는 리제를 레아가 따라간다. 평소엔 사고 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라면, 이번엔 정말로 픽 쓰러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었다.

그리고,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틀리지 않는다.

뭐야? 불쌍한 척?”

숙소에서 지하층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망가진 몰골의 리제를 비꼬듯 누군가 나타난다. 대부분이 말을 잘 듣는 얌전한 부대인 컴패니언에서 유일하게 예측이 불가능한 바이오로이드, 포이였다.

리제의 몰골이, 그녀가 봐도 정상은 아닌듯 했지만 그렇다고 동정심 같은 걸 느낄 위인도 아니었다. 그도 그럴것이 바로 어제 리리스에게 무기를 든건 리제였으니 말이다.

포이양, 내가 사과할 테니까 지금은…”

겨우 사과로 끝날 일이라고 생각하는거야?”

레아의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온다. 포이라면 차라리 혼자서 어떻게 막아보겠지만, 복도에서 들리는 또다른 걸음소리가 그녀의 신경을 곤두서게 한다.

레아는 몰라도, 내 동생한테 손끝이라도 대면 너도 죽여버릴거야”

티타니아, 아마 리제의 방문이 열린 걸 눈치 챘을 것이다. 레아의 입속에서 제발, 제발이라는 말이 계속 멤돈다. 여기서 다른 사고라도 터졌다간 그땐 진짜 자신의 평정심도 유지하지 못할 것 같았다.

자기 감정도 제대로 컨트롤 못하는 멍청이들 답네, 나까지 죽이겠다고? 가능하기나 해?”

못할 거 같아?”

일순간 주변이 소름끼치는 한기로 들어차는게 느껴진다. 곧바로 공기가 얼어붙는 불길한 소리와 함께 티타니아의 주변에 두꺼운 얼음창이 굳어간다. 그를 본 포이 역시 손을 살짝 흔들자 날카로운 단분자 클로가 소매에서 튀어나온다.

그만해! 티타니아!”

포이!”

엘리베이터 앞에서 날카로운 두 목소리가 울린다. 포이는 목소리의 주인 때문에 무기를 거두지만 티타니아는 역시나 전투태세를 준비한 레아의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다 창을 거둔다.

여왕은, 너는 죽던 말던 신경 안써…하지만 내 동생을 건드리면 가만 안둬”

티타니아와 레아는 근본적으로 같은 기체다. 레아가 느끼는 감정을 티타니아가 느끼는 것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싸늘한 경고를 남기고 티타니아는 사라진다.

잠깐만! 페로!”

내가 사고치지 말랬죠”

눈을 희번득하게 뜬 페로가 포이를 들여다본다. 방금 전까지 득의양양하던 포이의 태도는 그대로 눈을 크게 뜨며 한 번 봐달라는 애교로 변한다.

리리스한테 칼을 들이댔…”

제발 아무것도 모르면 가만히라도 있어요! 따라와요”

그나마 리리스와 리제의 복잡한 관계를 오래 알고있던 페로가 포이를 제압한다.

하아…번거롭게 해서 미안해요. 페로양”

아니에요, 이번엔 리제씨가 잘못했다곤 해도 우리 언니가 잘못했던 적도 많으니까…”

리리스씨는…”

자기도 충격 받았나봐요. 리제씨가 칼을 들이밀어도 자기가 당할일은 없지만, 뭐라고 해야하나…그 반응 자체에 좀 충격을 받은 것 같아요”

하아…리리스양 한테 한번 찾아가겠다고 전해주겠어요?”

그땐 저년이 꼭 사과…”

포이, 닥쳐요. 제발”

사태가 일단락되고 나서야 레아가 숨을 고른다. 엘리베이터 소리에 이미 눈치는 챘지만, 리제는 사라지고 없었다. 굳이 그 상태로 다른 곳에 갈리는 없을 테니, 레아도 세탁실로 곧장 내려간다.

불이 꺼진 복도에 웅웅대는 묵직한 기계음이 연신 들리는 방 하나가 있다. 문을 열자 작은 의자에 멍하니 앉아있는 리제가 보인다.

왜”

리제, 하나만 얘기해둘게”

레아는 무릎을 살짝 굽히고 의자에 앉아있는 리제를 끌어안는다. 마치 나무인형같은 딱딱한 감각, 납득을 할 수 없을 정도이다.

언니는 무조건 네 편이야. 힘든 일이던 곤란한 일이던, 언제든 네 편이니까, 언제라도 무슨 일인지 언니한테 얘기해줘, 언제까지고 기다려 줄 테니까”

리제는 레아의 말에도 그저 고개를 숙인 채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물이랑 먹을 거 좀 받아왔어, 당번이지만 잠자거나 해도 딱히 뭐라 할 사람 없을거고…정말 힘들면 언니한테 말해, 주인님한테 얘기 해줄게”

살짝이지만, 리제의 고개가 끄덕여진다.

가볼게”

레아가 나가고 문을 닫자 다시금 복도에 문틈새로 새어나온느 얇은 빛 말고는 칠흑이 드리워진다. 세탁기와 건조기가 무겁게 돌아가는 소리만이 세탁실을 채운다.


반갑습니다.

라오갤 초기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했고 반년정도 라오 접고 안썼습니다.

뭐 사실 그때도 남들 다 념글갈때 내 글은 한 이틀 사흘 있어야 가던거 보면 사실 보는 사람 별로 없고 지금도 별로 없을거같긴 한데

혹여나 누구 하나는 읽던 사람이 있을 수도 있으니 인사 올립니다.


페어리 스토리는 언제나 써도 재밌는 소재라고 생각, 특히 리제와 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