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더는 못걸어... 힘들어... 다리도 부었어..."


"인간님... 조금만 쉬었다 가요..."


계속된 행군에 난민들이 피로를 호소하기 시작했다. 역시 하루종일 걷는다는 건 무리였다. 이 상태로 걸음을 재촉했다간 역효과가 날 것이 분명했기에 피난을 멈추고 잠시 쉬었다 가기로 했다. 밥은 못먹었지만 그나마 수통엔 물이 조금 남아있어서 다행이었다.

정정한다, 방금 막 물도 바닥났다 제길.


"히루메, 그 쪽은 어때? 아직 추격대는 안보여?"


"으음... 아직까진 괜찮은 것 같은데..."


뒤쪽만 쳐다보던 히루메가 눈길도 안주고 대답했다.

아무래도 당장 쉴 시간은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이래서는 추격대가 도착하기 전에 탈진해서 쓰러지게 생겼다.


'오르카호의 원군은 아직 멀었나... 곧 해가 질텐데, 내일 도착할 셈인가...'


꼴보기 싫은 오메가년 거하게 뒤통수 갈기고 바이오로이드 빼온 것까진 좋았지만 이 다음이 문제다.

리리스를 먼저 보낸지 꽤 됐으니 별 일 없었다면 이미 오르카호에 도착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직접 사람을 보내는 것 외에 연락 수단이 없으니 답답하기만 하다. 설마 가던 중에 무슨 사고라도 생겼나? 철충이나 펙스의 복병과 마주쳐서 당한건가? 트레저는 무사히 도착했을까?


계속 생각을 이어가기 힘들 정도로 피곤하다. 어제 밤부터 계속 움직였으니 졸릴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오르카호에 도착하기 전까진 잠들어선 안된다. 

바이크에서 내려 억지로 스트레칭을 하며 잠을 깨려 노력했다. 애니가 나를 유심히 지켜보더니 가까이 다가와 말을 건넸다.


"보스, 아직까진 견딜만해?"


"나야 괜찮지. 계속 네 바이크에 타고 있었으니 힘들 게..."


"그거 말고, 잠 말이야... 옛날에 봐서 알아, 휩노스 병으로 잠들면 억지로 깨울 수가 없었어. 보스가 여기서 잠들어버렸다간 보스도 우리도 살아남기 힘들어질거야."


"...잠들지 않도록 노력해볼게."


"휴우, 오메가의 본거지에서 바이오로이드들을 무사히 데리고 나오기만 하면 어떻게든 될 줄 알았는데..."


"그, 그대여...!"


계속 후방에서 경계를 서던 히루메의 꼬리털이 빳빳하게 섰다. 그녀는 고개만 내 쪽으로 돌린 채 검지로 저 뒤편, 동쪽 방향을 가리켰다. 멀리서 AGS 대군이 접근하고 있는 게 육안으로도 보였다. 이번엔 아군일 가능성이 없는 진짜 위기상황이다.

선봉에 선 건 기간테스 커스텀, 셀주크 커스텀, 폴른 커스텀... 그나마 바퀴달린 게 아닌 발로 걸어다니는 놈들이라 진군속도가 느리긴 했지만 저쪽은 원거리 공격이 가능한 이상 멀리 떨어져 있어도 위험하다.

저쪽도 우리를 발견한 건지 진군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여기있는 바이오로이드들이 만전의 상태였다면 저항이라도 해봤겠지만 당장 실질적으로 전투가 가능한 건 히루메 한 명 뿐이니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다들 움직여! 적이 가까이 오기 전에 도망친다, 서둘러!"


적의 접근 소식에 놀란 난민들이 다시 납덩이같이 무거운 몸을 움직여 조금 빠른 속도로 걷기 시작했다. 무리를 해서라도 이대로 거리를 유지한 채 계속 앞으로 나아가면 안전하게 도망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했었다.

하늘에서 공습형 인터셉터가 날아오는 걸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인터셉터가 난민들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발칸포를 난사했다. 매서운 총소리에 겁먹은 난민들이 도망치다 넘어지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애니가 패닉에 빠진 난민들을 진정시키며 피난을 돕는 동안 히루메가 부적을 꺼내 넓게 보호막을 펼쳐 어떻게든 1차 공습은 막아냈다. 인터셉터는 우릴 지나쳐 저멀리 날아가나 싶더니 아니나 다를까 U턴해서 도로 우리쪽을 향해 날아왔다.


"네이놈...! 첩을 얕보지 말거라!"

 

그녀가 지팡이를 휘둘러 방울소리가 울리자, 삼족오의 형상과 함께 거대한 불길이 확 솟아올라 하늘을 뒤덮었다. 화염 폭풍에 휩쓸린 인터셉터는 균형을 잃고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가다 그대로 추락해버렸다.


하지만 히루메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긴장을 풀기엔 시기상조였다. 더 많은 공습형 인터셉터가 날아오고 있었는데다 먼저 온 그 인터셉터를 상대하느라 지체한 사이 추격대 본대도 사정거리 안에 든건지 셀주크가 포격을 개시했고 기간테스와 폴른 또한 기관포를 쏘며 다가오고 있었다.


히루메가 가진 부적도 다 떨어졌다. 난민들이 하나둘 총탄이나 부숴진 건물 파편에 맞으며 부상자가 속출했다. 히루메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녀는 결국 손에서 지팡이를 놓친 채 피흘리는 어깨를 부여잡고 쓰러져버렸다.



비명소리가 주변을 휘감았다, 난민들의 공포심이 겉잡을 수 없이 커져갔다. 마치 휩노스 병의 악몽이 눈앞에서 재생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렇게 실패하는 건가, 결국 이렇게 죽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며 발을 떼지도 못하고 있던 와중 인터셉터에서 미사일이 발사되었다, 똑바로 나를 향해 일직선상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주저앉아있는 히루메가 뭐라고 소리치는 것 같은데 지금 귀가 먹먹해서 잘 안들린다. 아마 피하라고 하는 것 같은데.


어, 아냐? 뒤? 뒤에 뭐?


"이걸로 또 저한테 빚 진 거에요?"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고 생각한 순간 눈앞에 푸른 보호막이 생겨나 미사일을 막아냈다. 폭발의 연기가 걷히자 격추된 인터셉터가 추락하는 모습과 그 너머로 다수의 전투기가 편대 비행으로 적군을 향해 날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가만, 전투기라기엔 좀 작은데, 사람?

...스카이 나이츠?


고개를 돌려보니 내 뒤엔 풀무장 블랙 리리스가 고고히 서있었고, 그녀의 뒤에선 수많은 장갑차와 수송 트럭이 달려와 멈춰섰다.




"난민 여러분, 이제 안심하십시오! 구하러 왔습니다!"


마침내 지원군이 도착했다.

확성기를 통해 쩌렁쩌렁 울려퍼지는 레드후드의 목소리에 군중의 혼란이 빠르게 가라앉았다. 차에선 물밀듯이 쏟아져나온 스틸라인 부대원들이 진형을 갖추는 한편 신속히 난민들을 차량에 태웠다.

오르카 저항군이 반격을 가하기 시작하자 펙스 추격대의 기세가 점차 꺾여갔다.


"제 때 온건가요?"


"...늦었잖아."


"후훗, 죄송해요. 이 정도는 봐주세요."


시니컬하게 받아쳤는데도 리리스는 대수롭지 않게 웃으며 넘겼다. 더이상 그녀의 표정엔 의심이나 적대심이 남아있지 않았다.


"두번째 인간님."


리리스 다음으로 날 찾아온 건 불굴의 마리였다.


"허, 마리 소장님까지 오셨구만. 대충 열흘만인가? 또 내가 밀항하지 못하게 감시하러 왔나?"


"모시러 왔습니다."


"...진심이냐? 니가 왠일로?"


"응당 했어야 할 일을 하는 것일 뿐입니다."


"빨리 따라오세요, 설마 다리가 얼어붙어서 못걷겠다는 건 아니겠죠?"


"난 두 다리 다 멀쩡해. 나보다 먼저 쟤부터 도와주지 그래."


엄지를 내 어깨 뒤로넘겨 애니에게 부축받아 간신히 서있는 히루메를 가리키자 리리스는 그녀의 상태를 보더니 군말없이 다가가 응급처치를 하고선 애니와 같이 그녀를 부축해줬다.


"그... 고맙구나. 그대여, 첩은 먼저 가보겠노라..."


"당신도 빨리 따라오세요. 주인님께서 당신이 오기를 학수고대하고 계십니다."


리리스, 애니, 히루메가 자리를 뜨고 그곳에 남아있는 건 마리와 나 뿐이었다.


"그런데... 굳이 너까지 현장에 나온 이유가 뭐냐?"


"제 오랜 전우와 약속했습니다, 당신을 직접 모셔오겠다고 말입니다."


"지금 말한 그 전우가 브라우니 007이고?"


"앞으로는 본인을 리디아라고 불러달라고 하더군요."


상황이 호전되어서인지, 당장 도망가지 않고 한가롭게 잡담이나 나눌 여유가 생긴 건 같았다.

긴장이 풀리고 나른해지기 시작했다. 누적된 피로가 이제야 몰려오는 것 같았다.


"이제 슬슬 출발하시죠. 차로 안내하겠습니다, 따라와 주십시오."


마리가 공중에 둥둥 떠 날아가는데 뒤따라갈 수가 없었다. 피곤하다. 도저히 졸음을 참을 수가 없다. 

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던 거 같은데... 아 망할, 또 시작이네...


"...? 두번째 인간님?"


앞장서서 날아가던 마리는 내가 냉큼 따라오지 않자 이상하게 여기며 뒤돌아봤다. 미안한데 내가 지금 그럴 처지가 못되거든.

휩노스 병이 강제로 나를 꿈나라로 끌고가고 있단 말이다...


그 때 주변에 왠 포탄이 떨어지면서 폭발이 일어났다. 적 셀주크의 포격이 여기까지 닿고 있었다.


"두번째 인간님, 빨리 여기서...! 왜그러십니까!?"


다리에 힘이 안들어가 몸이 앞으로 넘어지려는 걸 한손으로 땅을 짚은 채 한쪽 무릎 꿇고 앉는 걸로 겨우 막았다. 다른 사람이 들으면 웃길지도 모르겠는데 지금 미친듯이 졸려서 당장 여기서 엎어져 잠들 것 같거든? 나도 누가 좀 부축해줬으면 좋겠는데 마리는 지 구체 드론에서 빔 쏴서 셀주크 잡느라 바빠보였다.


계속 가만히 있다보니 타겟팅되기 쉬운건지 또 내 머리 위로 셀주크의 곡사포가 떨어지고 있었다. 망할 리리스도 갔는데.

이번엔 진짜 끝인가 싶었던 순간 누군가가 나를 피탄 범위 밖으로 밀쳤다. 아슬아슬하게 나는 살아남았으나, 나를 구해준 이는 그렇지 못했다.



"...트레저...?"


"형... 님... 무사하심까..."


내 앞에 쓰러져있는 트레저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일순간 잠기운이 확 달아날 수 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하반신이 사라져있었으니까.


"형님... 저... 는..."


"그만! 더이상 말하지마!"


"동생이라... 불러... 준 게... 진짜... 기뻤슴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트레저가 의식을 잃고 고개를 툭 떨군 걸 보게 된 순간, 나 또한 더이상 의식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나는 휩노스 병의 꿈 속으로 빠져들었다.



*



꿈을 꾸었다.

심연 속에 떨어지기라도 한 것 마냥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 아니다. 뭔가 보이기 시작한다. 별의 아이네 저거.


...근데 별로 안무섭다. 저번에 꾼 꿈에선 패시브로 공포 디버프 걸더만 지금은 똑바로 쳐다봐도 별 느낌 안든다.

거 있잖아 크툴루가 설정상 눈만 마주쳐도 미쳐버린다 해도 그건 소설 속 설정이지, 현실세계의 독자가 소설책에 그려진 문어괴물 삽화 본다고 으악 무서워 이러진 않잖아. 지금이 그런 느낌이다. 인게임 일러에서 본 별참피 걔구나 하는 생각만 들지.


계속 쳐다보니까 별참피가 점점 흐릿해지는 것처럼 보이더니 이번엔 어디서 핑거스냅이라도 한 것 마냥 저 거대한 별참피의 몸뚱아리가 미숫가루가 되어 사라져가고 있었다. 별참피가 사라지고 그것이 가리고 있던 태양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빛이 어둠을 걷어내고 내 주변을 감쌌다. 빛이 점점 세지고 있었ㄷ 너무 쎄잖아 시벌 눈부셔 뒤지겠네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가 빛이 약해진 것 같기에 슬쩍 눈을 떠봤다.


내 눈앞에 있는 건 낯선 천장... 이 아니라, 어디서 본 적 있는데 뭐였더라... 아 그래. 오르카호 수복실 천장이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지금 내가 병상에 누워있는 상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형님...?"


문득 날 부르는 그리운 목소리에 옆으로 시선을 돌리니 오래 전 헤어졌었던 동료가 앉아있었다.


"...리디아..."


나지막히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그녀는 안어울리게 울상을 짓더니 천천히 다가와 내 목을 끌어안았다.


"무사히 돌아와줘서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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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화가 엔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