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세탁실에서 할 일이라고 해봐야 각 층에서 나온 빨랫감들을 가져오는 바이오로이드들에게 받아 재질이나 특성에 맞추어 세탁하고, 건조하고, 그걸 개어 다시 트레이에 올려놓으면, 다시 담당하는 바이오로이드가 각 층, 내지는 생활관으로 가져다두는 방식이었다. 물론 오르카호 내에 상주하는 인원이 적은 수는 아니었지만 사람이 아닌 바이오로이드라면 체력적으로 무리일리도 없었고 실수 같은 걸 할 리도 없었다. 제일 큰 단점인 지루함은 바이오로이드에게도 매한가지여서 보통 이런 당번은 하루, 길어봐야 이틀 간격으로 교대를 돌기 마련이었다.

다만 지금의 리제는 근신처분을 받은 상태였고 남은 기간인 13일간 이 세탁실 안에 있어야 한다 해도 별 다른 변명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의자에 앉아있는 리제의 모습은 변명을 하려는 의지마저도 느낄 수 없었다.

세탁실의 세탁기가 내는 소음도 진동을 동반하긴 하지만 집중해야 들을 수 있는 수준이었고, 지하층은 대부분이 창고나 저장고였기 때문에 찾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렇기에 누군가가 내려온다면 지하층 어디에 있던 그 기척을 쉽게 눈치 챌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열리는 소리, 그리고 무거운 바퀴가 끌리는 소리가 들린다. 토로록 하는 바퀴소리가 잠시 멈추자 미닫이 문을 열고 누군가가 들어온다. 붉은 머리를 양쪽으로 올려 묶은 포티아였다. 뒤에는 꽤나 많은 양의 빨랫감이 들어있는 커다란 바구니가 보인다. 문을 열고 들어온 포티아에게 슬쩍 눈을 마주친 리제의 무표정한 얼굴에 비해 포티아는 순간 놀란 듯 눈이 동그래지는게 보인다. 생기 없는 얼굴에 제멋대로 퍼진 머리카락, 그녀의 진한 자주색 눈동자가 아니었다면 누군지도 모를 비참한 몰골의 바이오로이드가 리제라는 걸 알아 차릴 수 없었을 것이다. 포티아와 리제 모두, 사령관이 오르카호를 찾았을 때부터 있던 바이오로이드였기에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확인 할 수 있었다.

아, 리제…씨”

평소라면 지나가듯 인사했을 포티아도 리제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말 끝을 흐린다. 리제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제가 좀 도와드릴까요?”

세탁 바구니를 받아서 빨랫감의 재질, 색, 오염도에 따라 각각 커다란 은색 세탁기의 입에 집어넣고있는 리제를 보고 포티아가 묻는다. 이상하리만치 과묵한 분위기가 불편해서, 그리고 도저히 정상으로는 보이지 않는 리제의 모습이 처량해서 그랬을 것이다. 포티아는 상냥한 바이오로이드니까, 리제도 그녀의 호의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네”

리제의 목소리, 입을 오래 다물고 있었는지 목소리가 갈라졌지만 리제가 콜록거리며 자신의 목을 가다듬는다. 그나마 정상적인 모습이 보이자 포티아도 그제서야 답답했던 마음이 개운해지는 듯 했다.

물론 리제의 입이 트였다고 그게 무언가 극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었다. 두 사람은 조용히 바구니에서 빨래를 분류해 집어넣고만 있었다.

몇 층에서 가져오신거에요?”

네? 아, 4층이에요. 애니웨어, 배틀메이드, 골든 워커즈 이렇게…”

평소엔, 주방에서 일하시죠?”

그렇죠, 예전엔 같이 전투에도 나가고 그랬는데”

그랬던 기억이 난다. 사령관이 오르카호에 오고 난 직후의 상황, 지금 같은 체계나 규모가 없던, 정말 최후의 인간을 살리기 위해 모두가 분투하던 날들이었다. 리제는 물론이거니와 주방용 바이오로이드였던 포티아나 다른 목적의 바이오로이드들 모두가 철충과 싸우던 시기였다.

리제는 지금도 특유의 공격성 때문에 전투에 채용되는 편이었지만 안정화가 되고 나서 포티아는 전투에선 완전히 배제되었다. 포티아도 그 편을 편하게 여기곤 했다. 그래서인지 오래 알고 지냈는데도 이렇게 둘이 얼굴을 마주한 건 꽤나 오랜만이었다.

주방일은 힘들다거나 그러지 않아요?”

원래 주방용 바이오로이드였으니까요. 주둔지가 많이 생겨서 다양한 재료가 수급되니까 많은 요리도 할 수 있고…아우로라씨나 소완 주방장님도 많이 도와줘서 편해요”

아…”

리제가 들은 평범하고 당연한 한 문장이, 그녀의 가슴을 깊게 찌른다. 그녀가 빨랫감을 쥐던 손에 힘이 들어간다. 아무렇지 않게 빨랫감을 집어넣던 포티아가 아무리 눈치가 없다고 한들, 리제의 반응을 눈치채지 않을 수 없었다.

리제씨…?”

포티아의 부름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리제가 천천히 포티아쪽을 돌아본다. 정리되지 않은 머리카락과 리제의 섬뜩한 눈동자, 그리고 감정이란게 휘발해버린 소름끼치는 표정에 포티아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크게 들이쉰다.

포티아씨, 나가주세요…”

네?”

리제는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닫는다. 다만 포티아 쪽으로 한 걸음 다가갈 뿐이었다. 포티아의 반응이 없자 다시 한 걸음, 두 사람의 간격이 단 두 걸음만에 상당히 좁혀들어간다. 리제의 모습에 느껴지는 감정을 단 하나로 정의 할 수는 없지만 포티아는 그것 하나만은 확신 할 수 있었다.

제 정신이 아니다’

무장은 해제했지만, 정말 여차하면 자신이 죽을 지도 모른다는 위압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포티아의 이성이 아닌 본성이 그녀의 발을 한 걸음 뒤로 뺀다. 그럼에도 리제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는다.

아, 알았어요. 수, 수고하세요 리제씨!”

리제의 한 걸음에 포티아가 급하게 세탁실을 뛰쳐나간다. 단 다섯 걸음이었지만 리제가 문 앞까지 쫓아오듯 걸어감에 포티아는 정말 죽음을 각오하고 문 밖으로 뛰어나갔다. 다행이라 해야할지, 문이 닫히자 리제의 발걸음도 그대로 멎는다.

세탁실 안쪽에서 미닫이 문의 손잡이를 강하게 쥐고있던 리제의 손가락이 붉게, 그리고 손끝이 하얗게 물든다.

정신을 유지 할 수가 없었다. 포티아의 말을 듣는 순간,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듯한 감정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여차하면 리리스에게 그랬던 것 처럼 칼을, 아니 맨손으로라도 포티아를 죽였을지도 모른다. 그것만이 자신의 존재를, 가치를 확인 할 수 있는 일이었다면 분명히 그렇게 했을 것이다.

리제의 손이, 그리고 어깨가, 이윽고 몸 전체가 급하게 떨린다. 필요하다. 자신이 살아있다는 증거가

리제가 급하게 눈을 돌린다. 무거운 기계가 벽을 대신 장식한 세탁실 안에서 자신이 살아있다는 증거를 어떻게 확인 할 수 있을까, 다행히도 그걸 가능하게 하는 방식이 단 하나 방에 남아있었다.

레아가 가져온 바구니에서 리제가 먹을 걸 주워 먹는다. 아니 거의 고개를 쳐박고 손에 집히는 건 닥치는대로 입에 집어넣고 있었다. 그녀가 가져온 음식이 무엇인지 확인할 겨를도,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단지 무언가를 입에 넣고 씹고 삼키고 소화할 수만 있다면 상관 없었다.

손에 음식의 재료가, 묽은 소스가 묻어나지만 개의치 않는다. 바구니에 든 음식을 모두 비우고 목이 틀어막혀 가슴이 짓눌리고 기도가 졸리는 감각이 들 때 까지 입에 채워넣었다.

손에 잡히는 물병을 열고 안에 든 물병을 모두 입 안으로 들이킨다. 평범한 병 입구에서 쏟아져 나온 물이 리제의 입 안으로 쏟아부어진다. 그녀의 얼굴, 옷 그리고 바닥까지 적시던 물이 그치고 나서야 리제가 숨을 몰아쉰다.

우욱, 크엑, 케흑…흐으으윽, 우에엑”

제대로 씹지도 않고 급하게 들이킨 다량의 음식과 물이 섞이자 그것들이 고스란히 줄어들었던 위를 조르고 메인 가슴을 터뜨릴 듯 날뛰기 시작한다. 방금 먹은 걸 모두 쏟아낼 듯 헛구역질을 하던 리제가 허리를 완전히 숙이고 바구니를 틀어쥐고 한참이 지나서야 구역질이 멈춘다. 폐에 있는 모든 걸 쏟아낸 탓에 다시 숨을 크게 들이쉬고 그걸 다시 고스란히 내뱉고 하는 과정을 몇 번 반복한다.

허억…허억…흐읏…하…하아…하윽…흐윽…흑…”

바깥의 시간으로 따지면 3분도 안됐을 짧은 시간에 비상식적인 행동을 모두 끝마친 리제가 간신히 확인 할 수 있는 자신의 감정마저도 그다지 상쾌한 것이 아니었다. 눈물, 그마저도 마음 가장 밑바닥에서 끌어낸 우울과 슬픔을 동반한 눈물이었다. 점점 몸을 웅크리고 손에 집히는 바구니를 자신의 가슴으로 끌어당기고 눈물과 울음만을 내보낸다.

자기 자신을 숨이 졸리는 죽음에 가까이 몰아넣고 리제가 확인 할 수 있는 자신이 살아있는 증거는, 그것 뿐이었다.

 

알았어, 언니”

군부대가 아닌 페어리의 회의실이라고 해봐야 자매들이 앉을 수 있는 책상과 의자가 있는 작은 디지털 테이블이 놓인 방 한 칸이었다. 평소라면 간식을 먹거나, 사령관이나 주변 일을 얘기하는 도란도란한 곳이지만 오늘 만큼은 분위기가 무겁다. 평소에 아무 자리에나 앉는 걸 선호하는 레아도 간만에 상석에 앉았고, 명목상이긴 했지만 정해져있던 자리에 다프네와 드리아드가 앉아있었다. 둘의 표정도 그다지 밝아보이진 않는다.

리제가 이유는 몰라도 많이 힘든 것 같으니까”

저러다 예전처럼 괜찮아지면 좋겠지만…”

뭐 어쨌던 간에, 당분간은 너희들은 리제 근처에 가진 마, 리리스 씨도 공격했고…”

레아가 말을 흐린다. 상상도 하기 싫지만 리제가 자신의 자매들을 해친다면, 그 자체만으로 페어리는 완전히 붕괴할 것이다. 자신이 아무리 지탱하려 해도 그 때에는 모든 것이 무너질 것이 분명했다. 레아의 말을 십분 이해한 다프네가 고개를 끄덕인다.

아쿠아도 못가게 하고”

왜, 그러는 건진…언니도 모르는거에요?”

레아가 고개를 끄덕인다. 끄덕일 수 밖에 없는 자신의 모습이 한심스럽지만, 그렇다고 거짓말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애초에 그런 거짓말로 넘어갈 상대였으면 여기 부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당분간 리제가 해야 할 일은 너희 둘이 좀 맡아줘, 늦었는데 빨리 가서 자”

알았어요”

언니는?”

응, 나도 곧 잘거야”

레아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다프네에게 웃어보인다. 레아의 속을 완전히 알 수는 없었지만, 최소한 그녀의 반응을 부정 할 수는 없었기에, 다프네와 드리아드는 모두 회의실 밖으로 나가 각자의 방으로 간다.

다프네에겐 금방 잔다고 했지만, 레아 역시 어제부터 거의 하루를 꼬박 지새웠다. 눈이 감기지도 않았고 사태를 수습하고 이유를 알아내느라 자신이 받을 수 있는 모든 자료란 자료는 다 뒤져보고 있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리제의 불안정성 때문에 행동을 기록한 자료나 함 내에서 리제가 포착된 카메라 영상은 공식적인 루트던 탈론페더의 비공식 루트던 전부 모아놨다. 오늘도 아마 이걸 다 확인하고 나서야 잠깐 눈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공식적인 취침시간이 되자 오르카호 내 복도의 불이 대부분 꺼진다. 오르카호 모두가 잠드는 것은 아니지만, 오늘만큼은 예외로 페어리의 회의실 까지 그 불이 켜져 있었다.



내가 라오갤 - 챈을 통틀어서 글을 쓴게 19년 6월 쯤 부터니까 대략 2년 반이 됐는데

글을 쓰고 댓글이 열개 이상 달린게 진짜 근 2년만에 처음이었던거같다.

아마 옛날에 다크엘븐 소설 썼을때가 마지막이었을거야, 그때가 세인트오르카 할 때였는데

분명 라오챈 넘어오고 나선 남들 다 념글갈때 못가고 댓글 한개 두개 달리고 그랬는데 갑자기 반응이 존나 터져서 부담이 졸라된다.


뭐 쨌든

내가 라오 접기전에도 분명 뭘 쓰다가 때려치고 갔었는데

그게 뭐였나 하고 확인해보니까 레아랑 리제 얘기였음

그거 쓰다 접어놓고 돌아와서 다시 리제와 레아 소설을 쓰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