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가 딸아이들을 무릎에 올려두고 쓰다듬던 중이었다. 간식을 가져온 파티셰 아우로라가 문득 손뼉을 쳤다.


"참, 사령관. 이번 발렌타인에도 초콜릿 대량 주문할 거지?"


"아, 까먹을 뻔했네. 그렇게 해."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자, 딸아이가 올려다보며 묻는다.


"발렌타인이 뭐예요?"


"발렌타인 데이? 응, 좋아하는 사람들한테 초콜릿을 주는 날이야."


인류가 멸망한 지금도 오르카호에선 자체적으로 각종 기념일을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네 엄마는 예전에 8m짜리 초콜릿 조각상을 선물하기도 했었지. 남자가 웃으며 말하자, 근처에서 호위 중이던 블랙 리리스도 씩 웃었다. 그런 일도 있었죠.


어머니를 꼭 닮은 딸 - 미니 블랙 리리스는 무언가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럼, 미니도 아빠 좋으니까 초콜릿 줘요?"


"애옹."


아직 말을 잘 하지 못하는 그녀의 동생들도 남자를 바라보았다.


이에 남자는 물론 아우로라도, 리리스도 빙그레 웃었다. 어디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여운 아이들이다.


"꼭 줘야 하는건 아니야. 그냥 주고 싶은 사람한테 주는 거지. 원래는 여자가 남자한테 주는 날이지만, 오르카에서는 달라."


"리리쮸도 아빠한테 주고 싶어요."


"미또빠이 드려요?"


"음, 주면 고맙지. ……그런데 얘들아. 너희는 아빠만 좋아하는 건 아니잖니? 엄마들도 좋아하고, 유모 언니도, 다른 언니들도 좋아하잖아."


응응. 아이들은 진지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이번엔 다른 언니들한테도 초콜릿을 주지 않을래? 그럼 아빠가 무척 즐거울 텐데. 어때?"


미니와 아이들은 서로 마주보더니, 곧 흔쾌히 대답했다.


"네!"


그리하여 발렌타인 데이가 밝자, 미니 리리스는 동생들을 모았다. 맏이답게 으레 리더를 맡곤 하는 그녀였다.


"자. 이제부터 이 언니랑 함께 모두에게 초콜릿을 전달하는 거야. 아랏찌?"


네- 동생들도 저마다 손을 들었다. 모계 쪽 유전자로 인해 동물귀와 꼬리를 가진 아이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의 계획엔 한가지 장애물이 있었다. 


주방에서 초콜릿을 만들어 주긴 했지만, 그걸 나눠 주는 일은 알아서 하라고 전해 온 것이다.


유모 이터니티로선 난감한 일이었다. 아무리 팔팔한 아이들이라도 탈것 없이는 오르카호를 돌아다니기란 쉽지 않았다. 보통 인간은 걸어다니다 지칠 만큼 오르카호는 광대했던 것이다.


이터니티가 그 문제로 고민하고 있는데, 마침 곁에 있던 해체자 아자즈가 웃으며 말했다.


"초콜릿 운반은…… 이터니티 양의 관을 개조해서 간이 트럭으로 만들면 되겠네요. 일명 페퍼포그. 어때요?"


"네? 하지만 이 관은."


이터니티는 주무장인 개틀링 건이 든 커다란 관을 항상 가지고 다녔다. 그녀의 꿈은 자신이 모시는 미니 아가씨와 그 관에서 영면하는 것이었다.


"걱정 마세요. 별로 닳는 것도 아니고, 일이 끝나면 다시 원상복구 시켜드릴 테니까."


이터니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돼요."


"예?"


"저는 언제든지 아씨와 이 관에서 영면할 준비를 해야 돼요. 아씨께서 들어가시면 모를까, 관을 함부로 개조하는 건 용납할 수 없어요."


아자즈는 이해할 수 없단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터니티 2호도 자신의 친구인 1호 못지 않은 괴짜 아가씨라고 생각했다.


그러는 동안 아이들은 외출 준비를 마치고 이터니티만 바라보고 있었다.


"유모 언니. 출발해도 돼요?"


"잠깐만요. 군수를 해결해야 해요."


"?"


이때, 주변을 둘러보던 아자즈의 눈에 딱 알맞은 소재가 보였다.


"아. 저분께 부탁드리면 되겠어요."


"정말이네요."


아자즈와 이터니티는 하필 그 옆을 지나가던 AGS 라인리터를 가로막았다.


4족 군마 형태로 걸어가던 라인리터가 머리를 들었다. 그는 경전차와 군마 모드로 변신할 수 있는 AI 로봇이었다.


"라인리터 씨. 저희 부탁을 들어주세요."


- 무슨 일입니까? 전 순찰 임무 중입니다.


"그게……."


아이들의 선물을 옮기는 걸 도와달라 하자, 라인리터는 바로 거절했다.


- 그건 곤란합니다. 그런 사소한 일 때문에…….


이터니티가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사소한 일이 아닙니다. 이건 작은 주인님들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 나는 명예로운 기사입니다. 이벤트 정도에 동원될 순 없습니다. 사령관의 명령이라면 모를까.


"사령관님도 원하실 거예요. 그리고 이것도 충분히 명예로운 일 아닐까요? 대원들에게 봉사하는 거니까요."


아자즈가 웃으며 말하자, 이터니티도 거들었다.


"기사라면 레이디를 돕는 것이 예의이자 명예이지 않습니까."


- …….


이터니티의 말에 라인리터는 한참 대답이 없더니, 이윽고 전차 모드로 변신했다.


- 유모. 그대의 말이 옳습니다. 그럼, 오늘만은 아가씨들의 초콜릿 운반을 돕겠…… 자, 잠깐. 그렇게 격렬하게 하면!


아자즈는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기쁜 얼굴로 냅다 라인리터를 개조하기 시작했다.


"참는 건 몸에 좋지 않아요~ 후후."


세계 제일의 엔지니어란 명성이 무색하지 않게, 아자즈의 손 아래서 라인리터는 순식간에 초콜릿 수송 장갑차로 변했다. 긴 주포 대신 아이들을 태울 수 있는 좌석과 넉넉한 적재 공간을 가지게 된 것이다.


- 이, 이거…… 다시 원래 모습으로 바꿀 수는 있는 겁니까.


"걱정 마세요."


아자즈는 라인리터의 불안을 가볍게 넘겼다.


그 동안, 이터니티는 초콜릿들을 옮기고 아가씨들도 라인리터에 태웠다. 라인리터의 외장 역시 미리 준비해 둔 발렌타인 기념 장식품으로 꾸몄다.


"다녀오세요-"


라인리터가 출발하자, 아자즈는 웃으며 일행을 배웅했다.


아이들이 오르카호 여행(?)을 떠나게 되어 들뜬 가운데, 이터니티는 공손하게 행선지를 알렸다.


"여러분. 칸 대장님께 먼저 들르겠습니다."


신기해 하는 대원들의 시선을 모으며 일행은 오르카호를 누볐다.


이것이 정말 강철 전차, 기사의 길인가. 아이들이 웃고 떠들며 즐기는 동안 라인리터는 부끄러움이란 감정을 처음으로 느꼈다.


잠시 뒤 신속의 칸은 뜻밖의 방문을 받고 놀라워했다. 특수부대의 대장인 그녀는 부하들과 달리 발렌타인 데이엔 별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안녕하세요, 칸 대장님."


미니와 동생들은 라인리터에서 초콜릿을 꺼내다 칸과 부하들에게 나눠주었다.


"늘 감사함미다."


미니 리리스의 지휘에 맞춰 아이들이 공손하게 인사했다.


 "……으음, 고맙구나."


언제나 침착한 칸의 눈이 흔들렸다. 백여 년을 넘게 살아왔지만, 사령관인 남자나 부하들이 아닌 사람에게 이런 선물을 받은 적은 또 처음이었다.


부하들이 휘파람을 불며 장난스럽게 응원했다.


"휘유- 이거, 대장이 빨리 '미니'해야 우리도 초콜릿을 받을 텐데."


"그런 의미에서 대장님- 사령관님하고 발렌타인 데이용 비디오 어떻게 안될까요? 허브에 올리고 싶은데……."


칸이 쓴웃음을 짓는 가운데, 군기 반장인 퀵 카멜이 나섰다.


"야, 야. 잡소리들 그만 하고, 아가씨들께 고맙다고나 해."


정말 고맙구나. 특수부대답게 전장에서 이골이 난 그녀들도 아이들을 보니 하나같이 미소가 떠나지 않는 것이었다.


이어서 다음으로 향한 곳은 포병대인 캐노니어의 구역이었다.


포병대장 로열 아스널은 미니 자매의 초콜릿을 받고 껄껄 웃었다.


"음. 아가씨들한테 받는 초콜릿도 각별하지! 내 자식도 나중에 이랬으면 좋겠구만."


언제나 호탕한 그녀는, 기분이 좋았는지 아예 하복부까지 팡팡 두드리며 외칠 지경이었다.


"야, 이 철충 놈들아. 각오해라! 앞으로도 여기서 인간들이 계속 나올 거다. 우리 아가씨들 같이 예쁜 아이들이!"


"대장님!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십니까?"


급히 달려온 부관이 얼굴을 붉혔다.


"뭐 어때. 틀린 말도 아니잖나?"


"그게 문제가 아니지요! 에밀리가 배울까봐 무섭습니다. ……이미 늦었나 싶지만."


초콜릿을 받은 포병대원들은 꼬마들이 귀엽다고 가슴에 꼭 껴안아 주었다.


물론 포병대의 마스코트이자 '최종 병기'인 에밀리도 신기하단 표정으로 초콜릿을 받았다.


"발렌타인 데이에 여자가, 여자한테 초콜릿 줘도 되는 거야?"


"네. 어제 아빠가 그랬어요. 좋아하는 사람한테 주는 거래요." 미니 리리스가 씩씩하게 말했다.


"그렇구나. 나도 사령관이 아빠 해줬으면 좋겠다. 고마워, 초콜릿."


미니는 에밀리의 말을 알쏭달쏭한 표정으로 듣기만 했다.


일행은 초콜릿의 보답으로 아스널과 에밀리가 태워 주는 무등을 즐기고, 다시 길에 올랐다.


이렇듯 대원들은 초콜릿을 받자 다들 기뻐했다. 아이들이 주는 사소한 선물도 그녀들에게 적잖은 감동을 주었던 것이다.


특히, 인류 멸망 전을 기억하는 이들에겐 더욱 감개가 무량한 일이었다. 과거의 그녀들은 말하는 도구와 같은 노예 계급이었으니까.


이처럼 열심히 초콜릿을 나눠주던 미니 일행이 아르망 추기경을 찾아갔을 때였다.


이번에는 아르망이 한발 먼저 아이들을 맞아들였다. 그녀는 탁월한 예지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남자의 일등 참모를 톡톡히 해내고 있었다.


"아가씨들께서 이번에 저를 찾아 오실 줄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어어?"


어떻게 안 걸까. 미니 자매는 다들 어리둥절했다. 아르망은 신기해 하는 아이들을 보며 빙긋이 웃었다. 언제나 오르카호의 거의 모든 데이터는 내 손아귀에 들어 있다고 자신하는 그녀였다.


마침 아르망과 같이 차를 마시던 엘리 퀵핸드도 흥미롭단 얼굴로 애들을 지켜보았다.


"여러분이 제게 드릴 초콜릿은…… 음, 십자가 모양일 테지요? 여기 엘리 양한테는 달걀 모양을 드릴 거고요."


"맞아용-"


미니 하치코가 신기한 얼굴로 말한다.


후후, 폐하의 속마음도 알아 맞추는 제게 이 정도쯤은 아무것도 아니죠. 아르망은 아이들의 신기해 하는 눈빛을 즐겼다. 명석한 참모인 그녀도 아직은 어린 면이 남아 있는 것이다.


"초콜릿을 받았으니 답례를 드려야겠지요. 음…… 아무거나 물어 보세요. 아르망 선생님은 뭐든지 알아요."


아이들이 물어보는 거야 뻔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러자 미니 하치코가 손을 들어 불쑥 물었다.


"언니. 언니는 아이 언제 생겨용?"


"……넷?"


아르망은 순간 멍해지고, 엘리도 차를 뱉을 뻔했다.


"언니도 동생 더 만들어 주세요. 아빠가 만들어 줄 거에오."


"압바랑 그거 언제 해써? 그거."


"찌찌 왜 작아요?"


"파국이다."


아이들은 일부러인지 아닌지 천연덕스럽게 물어댔다.


이에 아르망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애들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하나같이 그녀의 예지력을 뛰어넘는 질문들만 하는 것이었다.


그 순수하고도 호기심 어린 눈빛들을 이기지 못한 그녀는, 마침내 빨개진 얼굴로 몸을 수그렸다.


"그, 그런 건…… 폐하와 제가 상의할 문제라……."


신기묘산의 아르망도 아이들의 순수함만은 좀처럼 예측할 수 없었다. 그녀는 예지 능력을 과신한 걸 잠깐이나마 후회했다.


이후, 어떻게 미니 자매들을 보내고 난 뒤, 아르망은 차를 마시며 달아오른 얼굴을 겨우 진정시켰다.


"휴. 정말 뜻밖이었어요. 아이들이란 참."


"그러네요. 품위 유지에 문제가 되겠는걸요."


엘리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받은 달걀 초콜릿을 내려다 보다가 조용히 웃었다.


"그래도, 저렇게 천사 같은 분들이라면…… 참된 귀족이 될 수 있을지도 몰라요."


엘리는 멸망한 이 세계에서도 진정한 귀족을 찾고 싶었다. 그녀에겐 귀족을 찾아서 안전히 모시는 사명이 있었던 것이다.


후훗, 저도 그렇게 생각한답니다. 아르망도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폐하 뿐만 아니라 저 분들을 올바르게 이끄는 것 또한 저희의 역할이겠지요."


미니와 동생들이야말로 인류가 멸망한 이 세상에서 새로운 인류의 역사를 써나갈, 아담과 이브들일 테니.


많은 대원들한테 손수 초콜릿을 돌리다 보니 어느덧 오후도 저물어 가고 있었다.


졸려요. 팔팔 뛰어다니던 아이들도 이제는 피곤한 눈치로 하나둘 보채었다. 아무리 편하게 개조했어도 라인리터는 원래가 기갑 차량이었다. 유아들이 온종일 장갑차를 타고 다니기란 쉽지 않은 것이었다.


"유모 언니. 아빠 어디 있어요? 아빠한테 초콜릿 드릴래요."


"네. 이제 큰 주인님께 가고 있어요."


이터니티는 미소를 띠고 미니들을 쓰다듬어 주었다.


거침없이 통로를 가로지른 라인리터는 얼마 가지 않아서 사령실 앞에 도착했다.


"자, 다 왔습니다."


아이들은 아빠를 만난다는 생각에 다시 기운을 되찾고 냉큼 내려왔다.


이어 사령실 도어가 열리자마자 아이들은 부리나케 뛰어갔다. 발렌타인 데이에도 일하느라 바빴던 아버지와 어머니들이 모두 기다리고 있었다.


"아빠! 초콜릿 다 주고 왔어요!"


"그래, 어서 오렴."


남자도 두 팔을 벌려 아이들을 맞이했다.


"다들, 오늘 정말 수고했단다. 정말로…… 잘 했어, 모두."


그는 흡족한 얼굴이었다. 사실, 그는 바쁜 와중에도 아이들의 이날 활약을 드론으로 몰래 지켜봤던 것이었다.


"아바, 쪼꼬!" 아직 말을 잘 못하는 미니 페로가 초콜릿을 내밀었다.


"파이 드세여!" 미니 하치코도 초콜릿이 올려진 파이를 내밀었다.


남자는 웃으며 초콜릿을 받아든 다음, 모두를 따뜻하게 안고 쓰다듬어 주었다.


피곤했던 아이들은 비로소 아버지의 손길을 느끼며 배시시 웃었다.


그렇게 아이들을 안아주던 남자는 문득 고개를 들어 이터니티와 라인리터를 바라보았다.


"이터니티, 라인리터도 수고했어."


"모든 것은 주인님들을 위해서." 이터니티가 치맛자락을 살짝 잡고 고개를 숙였다.


- 기사로서 명예를 지켰을 뿐입니다. 그보다 아자즈 양에게 빨리 돌아가고 싶군요.


"하하, 그럼 같이 돌아가자고."


남자는 웃으며, 모두와 함께 라인리터에 올랐다.


돌아가는 길, 아이들은 어느새 남자와 어머니들의 품에서 하나둘 잠들어 갔다.


쌔근거리는 미니를 살펴보던 리리스가 슬며시 미소지었다.


"정말로 사랑스런 아이들이에요. 그렇죠?"


"다 우릴 닮아서 그래요. 히힛."


남자에게 착 달라 붙어 있던 포이가 어깨를 으쓱한다.


추근대는 쌍둥이를 흘겨 보던 페로는, 문득 살짝 얼굴을 굳혔다.


"애들이 혹시 대원 분들한테 실례를 저지르진 않았겠죠?"


"실례요?"


"막, 이상한 질문을 한다던지."


"아. 페로는 걱정이 너무 심하다니까요. 다들 저흴 닮아서 예의 바르게 행동했을 거예요."


하치코가 스스럼없이 웃자, 자매들과 남자도 따라 웃었다. 별일은 없었어, 별일은.


오르카호의 조금 특이한 발렌타인 데이가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아무리 상술로 만들어진 기념일이라고 해도, 오르카호의 모두한테는 - 정말로 성스러운 날로 기억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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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렌타인 데이 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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