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통증에 남자는 눈을 떴다.


사방이 어두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기에 본능적인 두려움이 몰려왔으나 무언가 말할 수 없는 포근함이 몰려와 그를 감싸 진정시켰다. 이윽고 수마가 다시 그를 집어삼킨다. 집어 삼키려했다. 그러나 그는 잠에 들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까.


의식이 완전히 돌아왔지만 몸은 그렇지 않았다. 다리를 살짝 움직여본다. 아주 오랜만에 움직이는 듯한 굉장히 뻣뻣한 느낌에 이어 격렬한 저림이 다리를 감싸온다.


" 웃..!"


자기도 모르게 신음을 뱉어내며 남자는 더욱 몸을 움직이려 애쓴다. 두 팔과 다리를 마구 허둥거려보지만 뜻대로 움직이지 않고 엄청나게 저릴 뿐이었다.


도대체 무슨..? 


등 뒤에 전해지는 따뜻한 느낌과 주기적인 상하운동으로 인한 흔들림이 전해지고서야 남자는 자신이 누군가에게 끌어안겨져 있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눈치챌 수 있었다. 그러나 고개를 돌려 자신을 안고 있는 것의 정체를 확인할 순 없었다. 머리를 돌리고 싶어도 돌릴 수가 없었다. 무언가 딱딱한 벽이 그의 머리의 움직임을 크게 제한하고 있었다.


꾸르륵-하는 무언가 불쾌한 소리와 함께 남자의 가슴팍이 뜨뜻해졌다. 그리고 무언가가 흘러들어왔다. 굉장히 낯선 느낌이었지만 통증은 없었고 오히려 굉장히 편안한 느낌이었다. 그덕인지 마구잡이로 저리던 팔과 다리는 어느새 진정되었고 의식은 몽롱해졌다.


' 가슴팍에 뭔가 있잖아..'


남자는 잘 움직이지 않는 손을 움직여가며 자신의 가슴팍에 붙어있는 차가운 무언가를 움켜쥐었다.


그 순간, 그의 뒤에서 느껴졌던 규칙적인 상하운동이 완전히 멎었다. 


" 주인님..? "


조용하고 감정없는 듯한 목소리. 하지만 그 속에는 커다란 애정이 담겨 있었다. 그제서야 남자는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 도박이 성공한 모양이군. 이터니티. 날 관 밖으로 꺼내줘. "


" 네 주인님. "


물기 맺힌 듯한 목소리와 함께 그들을 감싸고 있던 관의 뚜껑이 천천히 열렸다. 희뿌연 빛이 남자의 생환을 축복하듯 그를 감쌌다.


" 이터니티, 바로 실전 투입이 가능한가? "


" 언제든지 가능합니다. "


" 좋아. 나도 어느정도는 가능할 것 같아. "


익숙한 전경이다. 철충 습격에 대비해서 철두철미하게 건설한 방공호. 하지만 결코 사용하고 싶지 않았던 최후의 도박장. 그곳에서 남자는 씁쓸한 기분으로 몸을 일으켰다. 가벼운 현기증이 그를 다시 주저앉게 만들었다.


" 괜찮으신가요? "


걱정이 묻어나오는 목소리였지만 이터니티는 결코 남자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않았다.


" 괜찮아. 그것보다 팔 다리가 다시 저려오는군. 뛸 수 있을지나 모르겠어. "


푸념하며 남자는 자신의 가슴팍에 붙어있던 호스 여러개를 떼어냈다. 가슴팍에 무심하게 뚫린 세 개의 구멍에서 피가 줄줄 새어나왔지만 별 일 아니라는 듯 녹이 슬대로 슬은 철제 선반에 다가갔다.


" 가장 가까운 연구소가 어디지? "


" 이곳에서 20km 떨어진 곳으로 확인됩니다. "


" 그렇군. "


짧게 대답하며 남자는 철제 선반에 놓여있는 냉장고의 문을 열었다. 냉장고 안에는 연두색, 하늘색, 보라색 액체가 담겨져 있는 주사기가 빽뺵하게 놓여 있었다.


" 대충 2주일 정도 버틸 수 있겠군. 이터니티, 위성에 접속할 수 있나. "


" 현재 작동하는 위성은 있습니다만 제 능력으로는 접근할 수 없습니다. "


" 좋군. 위성이 아직 돌아간단 말이지. "


남자는 연두색-하늘색-보라색 순으로 주사기를 꺼내 지체없이 자신의 경정맥에 연달아 찔러넣었다.


" 서둘러야겠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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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울창한 숲 속에서 신선한 공기를 만끽하고 있었다. 그의 뒤에서는 완전히 무장을 마친 이터니티가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그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 용케 핵전쟁은 안했군. 멸망의 메이 모델들이 열일을 해줬나보네? "


" 기록을 찾아볼까요? "


" 큭, 그럴 필요는 없어. "


남자는 단말을 들어 표시해두었던 연구소의 위치를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단말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연구소는 도시를 가로질러 가야 했다. 잘하면 그곳에서 운송수단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철충의 위험성은 남자도 인지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뒤를 따르는 바이오로이드의 성능은 그의 상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명기 중의 명기였다. 


" .......... "


'긴 잠'에 빠져들기 전에 저것의 활약이 없었다면 결코 그는 지금 신선한 공기를 만끽하며 숲길을 걸어갈 수 없었을테니까.


얼마나 걸었을까,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 아래로는 푸른 바다가 넘실거렸고 눈부신 해변가가 드러났다.


" 뭐지? 이런 절벽은 없었는데? "


의문을 표하며 단말을 조작해보는 남자였지만 단말은 여전히 절벽 아래를 가리키고 있었다.


" 이게 뭔.. 이터니티, 나를 안아줘야겠는데? "


" 알겠습니다. 준비하겠습니다. "


말이 끝남과 동시에 이터니티는 자신이 들고 있던 거대한 관을 땅바닥에 조심스럽게 내려놓고는 옷을 슥슥 벗기 시작했다. 뜯어낸다는 표현이 어울릴정도로 거칠게.


" 아니아니, 말 그대로 안아달라고. 여길 뛰어내려야할 것 같은데, 아니면 관 안에 같이 들어가서 몸을 던져야하나? "


"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관을 들고 뛰더라도 주인님은 털끝하나 다치지 않으실거에요. "


" 그런가, 잘 됐네. "


저기서 떨어진 다음에는 어떻게하나.. 고민하면서 남자는 이터니티의 푹신한 가슴팍에 안겼다. 한 손에는 성인 남자를, 한 손에는 거대한 관을 든 괴물 바이오로이드는 그대로 절벽에서 다이빙을 하려 했으나,


상공에서 매끄러운 기체의 기동음이 들림과 동시에 이터니티는 그대로 관에서 미니건을 꺼내 마구잡이로 사격하기 시작했다.


" 내 귀!!!!!!!!!!! 멈춰, 이터니티! "


" ! "


남자의 명령과 동시에 이터니티의 난사가 즉각 종료되었고 미친듯이 회피기동을 하던 AGS 와처 MQ-20은 덜덜덜덜 떨며 지면에 내려앉았다.


" 귀 떨어지는 줄 알았잖아!! "


" 죄송합니다. 다음부터는 말씀드리고 사격하겠습니다. "


" 뭐라고!? "


" .......... "


어, 진짜 안들리네? 남자는 허둥지둥 품 속에서 초록색 주사기를 꺼내 자신의 경동맥에다 냅다 꽃았다. 


오리진 더스트가 몸 속에 퍼짐과 동시에 강렬한 직감이 그를 감쌌다. 저 AGS에 타고 있는 누군가는 지금 이 답답한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수단을 갖고 있을 것이다.


와처의 탑승구가 열리더니 푸른색 머릿결을 가진 바이오로이드가 비틀거리며 천천히 내려왔다. 검은색 정장과 단정한 단발 머리가 인상적이었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남자는 무심코 머리카락을 긁적였다.


" 처음 뵙겠습니다. 커넥터 유미라고 합니다. 마지막 인간님. "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바이오로이드를 보며 남자는 고개를 갸우뚱 했다.


' 뭐라는거야? '


" 쏘겠습니다. 주인님. "


툭, 던지는 무심한 통보를 끝으로 이터니티의 미니건이 와처를 벌집으로 만들었다. 탑승구를 내린 시점에서 회피기동이고 뭐고 와처는 이터니티의 무수한 게틀링포 세례에 데굴데굴 굴러 절벽에서 떨어져 장렬하게 폭발했다.


" .........? "


남자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이터니티를 바라보았고, 이터니티는 공손하게 두 손으로 드레스를 올려 꾸벅 인사를 했다.


' 그래 뭐.. '


" 뭐라고 했지? 내가 귀가 잘 안들려서 말이야. "


" ...... 저를 쏘실 건가요? "


" 그건 너하기 나름이지. "


남자는 냉정하게 말하며 이터니티에게 손짓해 총구를 내리게 했다. 죽일 생각은 없다. 


아직은.


" 모델명이 뭐지? 어디서 본 것 같긴한데 도저히 모르겠어. "


" 커넥터 유미입니다. "


" 이터니티, 쏴버려. "


" 알겠습니다. 주인님. "


" 자, 잠깐만요! 정말입니다! "


" 정말이라고? "


남자는 손을 재차 들어 이터니티의 사격을 제지했다. 마구잡이로 돌아가며 예열을 시작했던 게틀링 포가 다시 잠잠해졌다.


" 네 소속을 말해, 명령이야. "


" 저는 철충의 침공 이후 생존한 바이오로이드들이 결집하여 만든 공동체 소속입니다. 임시로 이전의 제 소속이었던 PECS 콘소시엄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


" 너의 상관은 누구지? "


" 공동체이기 떄문에 상관은 없.. "


남자는 유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왼 손을 든 채 그녀의 앞에 한 발자국씩 서서히 다가갔다. 거의 얼굴을 맞댈 정도로 가까워지자 이터니티의 총구 또한 서서히 그에 맞춰 올라갔다.


" 너의 상관은 누구지? "


" 다시 말씀드리지만.. 제가 소속되어 있는 곳은 바이오로이드들로 이루어져 있는 공동체입니다. 모두가 평등한 위치에 있기에 상관은 없습니다. "


남자는 커넥터 유미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겁에 질리긴 했지만 결연한 의지로 가득찬 두 눈이 인상깊었다. 그는 독심술사가 아니다. 두 눈 따윌 본다고 저 바이오로이드의 심리를 알 수 있을리가 있나. 애초에 명령을 내렸을 때 대답이 술술 나온 시점에서 남자의 두 번의 물음은 이미 아웃이었다.


" 그렇군, 미안해, 보다시피 내가 겁이 좀 많거든. 내 뒤에 서 있는 이터니티 모델도 그렇게 '세팅' 했어.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대응 사격이 나온 거니까 너가 이해해줬으면 좋겠는데. "


" 물론입니다. 오히려 먼저 연락을 드리지 않고 찾아온 저의 잘못입니다. "


" 음, 그래, 이해해줘서 고마워 유미. 그런데 날 왜 찾아왔지? PECS의 회장님이 날 스카웃하길 원하시나? "


" 아니요, 마지막 인간님께서 저희 공동체를 이끌어주시기를 바라기에 찾아 온 것입니다. " 


뭐?


" 마지막 뭐..?  "


" 철충에 의해 인류는 멸망했습니다. 지금 여기 계신 인간님이 마지막 인간님이십니다. "


그 순간, 남자의 두 눈이 번뜩였다. 유미는 저도 모르게 한 발자국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그녀의 상관인 레모네이드 오메가에게서도 느낄 수 없었던 공포 그 이상의 감정이 유미의 온 몸을 뱀처럼 휘감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섬뜩한 느낌은 오래가지 않았다. 어느새 남자는 원래대로의 무표정으로 돌아와있었다. 기분탓이었나?


" 위성은 잘 작동하던데..? "


" PECS사에 소속된 오비탈 와쳐에서 관리하고 있는 위성들입니다. 저희 공동체와 꾸준하게 연락을 주고 받고 있습니다. "


" 솔직히 말해서 유미, 난 너를 믿질 못하겠어. 너희들은 살아남았는데 인류는 모조리 죽어버렸다고? 그게 가능한 일인가? "


" 철충은 철저하게 인간님들만을 노렸습니다. 저희 바이오로이드는 철충으로부터 공격을 받지 않았기에 가능합니다. "


" 그런가. 그래서 나에게 원하는게 뭐지? "


" 저희 공동체를 이끌어 주세요! 자매들은 인간님께서 이끌어 주실 날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


그러면서 유미는 왼손을 자신의 가슴팍을 향해 서서히 올리고 있었다. 정장 왼쪽 안 주머니에 있는 단말의 퀵 버튼만 몇번 조작해도 오메가에게 마지막 인간을 찾았다는 사실을 전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와처가 파괴된 이 시점에서 오메가는 틀림없이 이변을 눈치채고 자신의 위치를 향해 지원 병력을 투입했을 것이다. 위성으로 살펴본다면 더욱 좋다. 마지막 인간을 찾은 것만으로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것이니까.


이터니티 모델은 상대하기 굉장히 까다로웠지만 그래봤자 지킬 대상이 없으면 굉장히 약해진다. 인간을 빼돌린 다음 얼마든지 찍어낼 수 있는 AGS의 물량공세를 몰아친다면 언젠간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 너의 절절한 마음, 너무나 잘 알곘어. "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유미의 왼손을 움켜잡아 자신에게 잡아당겨 그대로 끌어안았다.


" 많이 힘들었지? "


" 저, 저기.. "


갑작스러운 돌발상황, 처음 안겨보는 남성의 품은 그 성질 더러운 레모네이드 오메가 밑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유미일지라도 순간적으로 이성이 날아가기엔 충분했다.


거기에 남자는 한술 더 떠서 유미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 꺄앗!? "


" 하지만 나도 지금 많이 혼란스러운 상태라서.. 너 말을 그대로 믿기엔 여러모로 부담이 있어. 조금만 기다려주지 않을래? "


얼굴이 새빨개진 유미는 자신이 점점 절벽쪽으로 몰리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멸망 전 인류의 드라마에서나 볼법한 일이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다는 생경함과 이유 모를 황홀함, 난생 처음 느껴보는 사랑이라는 감정이 그녀를 철저하게 현혹시켰다.


" 하, 하지만.. "


" 하지만? 뭔가 걸리는게 있는거야? "


" 주인님! "


긴급한 이터니티의 외침과 동시에 쐐액-하는 소리와 함께 와처 여러대가 상공에 나타났다. 남자는 혀를 차고는 유미의 두 손을 잡고 있던 손을 놓고는 뒤로 물러났다.


" 공동체치고는 굉장히 민첩한 대응이네, 어쩄든 너의 의견은 잘 들었어 유미! "


남자는 몸을 날려 이터니티의 품에 안겼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터니티가 모를 리 없었다.


" 저건 내버려두고 AGS만 쓸어버려. 그리고 바로 다이브. 오케이? "


" 알겠습니다 주인님. 걱정하지 마세요. "


남자는 재빨리 두 손을 들어 귀를 막았다. 그래봤자 날아갈 청력이었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낫겠지.


어쩔줄 몰라하는 유미를 두고 이터니티의 총구가 불을 뿜었다.


와처 여러대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격추됨과 동시에 이터니티는 절벽으로 몸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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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의식의 흐름대로 쓰는 소설.


2화는 몰?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