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임없는 전장의 메아리에 대해가 흔들린다.

폭음, 비명, 포성...

당장이라도 의식이 날아갈 것만 같은 격한 감각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으윽..."


온 몸이 만신창이가 된 세이렌이 대파되어 폐허처럼 변한 함선의 갑판 위에 쓰러져 있다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와 함께 세이렌에게 장착되어 있는 함포와 대공포의 무장 장비도 비틀거리며 떠올랐다. 세이렌의 옷은 엉망진창으로 그슬렸고, 부상을 입은 몸 곳곳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바다 위의 광경은 참혹하기 짝이 없었다. 무수한 수의 함선들이 불타며 가라앉고 있었고, 하늘에는 검은 구름처럼 보일 정도로 많은 비행형 철충들이 날아다니며 아군을 유린하고 있었다. 살아남아 저항을 하는 함선들이 몇몇 있었지만 거의 모든 무장이 망가진 상태였고, 그 중 일부는 철충의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함체가 폭발하며 다른 함선들과 운명을 함께하고 있었다.


꿈이기를 바랄 만큼 절망적인 모습.


감기려고 하는 눈을 겨우 뜬 세이렌은 자신의 눈 앞에 펼쳐져있는 광경에 작은 얼굴을 공포로 일그러뜨리며 겁에 질린 듯이 중얼거렸다.


"싫어... 거짓말이지? 네레이드, 운디네, 모두들..."


세이렌이 절뚝거리며 갑판의 선수 쪽으로 걸어가던 그 때, 옆쪽에 불타고 있는 엄청난 크기의 함포의 포신이 세이렌이 지나가자 포탑에서 부러지듯이 떨어졌다. 


"으윽!"


지진이라도 일어난 격렬한 충격에 세이렌은 균형을 잃고 넘어졌다. 무장에 부착되어 있던 무전기에서 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잡음이 뒤섞인 누군가의 무전음이 흘러나왔다.


<...복합니다. 반복합니다. 전 [치직...]함대는 신속히 후퇴해 주십시오. [칙... 지직...]더 이상의 작전 수행[치지직...]은 불가능합니다. 아무도 없습니까? 제발...[칙...] 누구라도 이걸 듣는다면[지직...] 최대한 빨리 그 자리를 벗어나- >


<[ㅡㅡㅡㅡ!!!]> 


"꺄악!"


무전음이 이어지던 중 무전기의 소리가 나오는 부분을 찢어발길 것 같은 폭발음이 났다. 놀란 세이렌은 무전기를 손에서 떨어뜨렸고, 더 이상 무전기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떨어진 무전기를 내려다본 세이렌은 잠시 후 그 무전음의 목소리가 누구였는지 깨닫고 안색이 새파래졌다.


착각이라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틀림없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바로 자신의 것과 똑같은 목소리였다.


"설마, 방금 그건..."


세이렌은 무전기의 무전음 너머에서 벌어졌을 상황을 짐작했다. 자신과 같지만 또다른 세이렌은 함선에 탑승한 채 전투를 이끌던 중 전황이 완전히 나빠진 것을 깨닫고 퇴각 명령을 전달하려다가 함선이 대파되어 그와 함께 묻혀버린 것이다. 


흔적도 남기지 않고.


세이렌이 그것을 파악하는 찰나, 위쪽에서 무언가가 다가왔다.


칠흑의 색에, 붉은 안광을 흘리고 있는 그것은-


<키이이.>


"철충...!"


괴이한 무늬가 새겨진 커다란 날개와 기형적인 모습을 한 연결체 철충, 레이더가 시선을 이쪽으로 향하자 세이렌은 다급히 자신의 무장을 전개했다. 하지만 이미 심각하게 파손되어버린 세이렌의 무장은 삐걱거리기만 할 뿐 움직이지 않았다. 


세이렌은 다급하게 위태롭게 깜빡거리고 있는 홀로그램 조종간을 울먹이며 필사적으로 조작했지만 무장은 침묵만을 지킬 뿐이었다.


"흐흑... 제발 움직여! 움직이란 말이야!!"


<키이이익!!>


"아...!"


레이더가 포효하자 세이렌은 순간 자신의 등골이 싸늘하게 식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공중에 떠 있던 무장이 동력을 상실하고 바닥에 떨어지며 부서져버렸다. 갸냘프게 떨면서 레이더를 올려다보는 세이렌의 눈동자가 손가락만큼 작게 줄어들고, 레이더가 떨어지듯이 수직강하하여 세이렌에게 날아들었다.


어째서 이렇게 된 거야...?


나는... 나는 분명...


레이더에게 공격당하기 일보 직전, 세이렌은 마음속으로 단말마를 내지르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세이렌."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세이렌은 잠에서 깨어나며 비명을 질렀다.


"꺄아악!"


"우왓! 놀래라."


"어... 어라? 사령관님?"


책상에 엎드린 채 잠들어 있던 세이렌은 눈을 게슴츠레 떠 언제 왔는지 모를 사령관을 보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세이렌이 비명을 지르는 바람에 깜짝 놀란 사령관이 걱정된다는 듯 살짝 초조하게 말했다.


"또 서고에서 자고 있길래 깨웠더니... 되게 심한 악몽을 꿨나나 보네."


"...!"


그 순간, 세이렌의 머릿속에 꿈의 한 장면이 점멸하듯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식은땀까지 흘리고, 정말 괜찮은 거 맞아?"


"괘, 괜찮아요."


"흠,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얼버무리는 듯한 세이렌을 보며 사령관은 턱을 슥슥 만지작거렸다. 무언가 중요한 것을 짐작했을 때 으레 나오는 그의 버릇이었다. 사령관은 어느정도 눈치를 챈 듯 했지만, 모른척하며 슬쩍 화제를 돌렸다.


"네가 책을 좋아한다는 건 알지만 모처럼의 축제인데 좀 즐기는게 어때? 네레이드랑 운디네도 초콜릿 만드느라 여념이 없던데. 난 발렌타인에 대해 잘 모르지만, 다들 즐거워하니 흐뭇하더라고."


"아, 발렌타인..."


세이렌은 얼마 전 네레이드에게서 발렌타인에 대해 들었던 것이 기억났다. 멸망 이전에 있었던 세계적인 축제일. 초콜릿이라고 하는 단 간식을 연인들끼리 주고받으며 사랑을 꽃피우는 특별한 날이었다. 굳이 연인끼리가 아니더라도 초콜릿을 주는 것에는 상관이 없었고,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르카 호의 바이오로이드들이 정신없이 초콜릿을 만드느라 서로 난리도 아니라고 운디네가 말했던 것을 세이렌은 어렴풋이 떠올렸다. 자신은 발렌타인에 대해 별 생각이 없었지만, 오르카의 바이오로이드들은 철충으로 가득한 현재의 삭막한 세상에서 즐길 만한 축제일이 있다는 것 만으로도 들떠있었다.


세이렌도 축제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세이렌은 아직까지 멸망 이전의 과거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동료들과 소중한 사람들이 무력하게 쓰러져갔던 전란의 시대...


악몽이 다시 흐릿하게 떠오른 세이렌은 살짝 고개를 떨어뜨렸다.


"...괜찮아요."


세이렌은 약간 떨리는, 그러면서 어딘가 슬퍼보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령관은 아무 말 없이 세이렌을 바라보았다. 두 다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고, 두 손은 주먹이 쥐어져 있었다.


"저에게는 지켜야 할 동료들, 그리고 무엇보다 마지막 인류이신 사령관님이 있어요. 동료들과 사령관님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저는 편안한 상태로 있을 수 없어요. 그 날을 잊어서는 안 돼요. 그래야만... 그래야만..."


아파보이면서도 슬픈 표정으로 세이렌이 고개를 들어 말하자, 눈에서 한 줄기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런 일을, 다시는 겪지 않을 테니까..."


"세이렌..."


사령관은 눈물을 흘리는 세이렌을 보며 가슴이 아파왔다. 여린 감성을 지닌 세이렌에게 부하들을 이끌고 전쟁을 수행하는 것은 무척이나 버거운 일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멸망 이전의 철충과의 전쟁은 승산이 없는, 패배할 수밖에 없었던 마지막 저항에 불과했다. 스스로를 억누른 채 무리해서까지 싸운 세이렌이었지만 그 끝에 기다리고 있던 것은 처절한 상실밖에 없었다. 


다른 사령관 타입 바이오로이드들에게는 없는, 섬세하고 미성숙한 감성을 가진 세이렌에게 그것은 너무나 큰 비극이었다.


그렇기에 모든 일이 끝난 지금까지도 그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흐흑... 죄송해요, 사령관님... 저는... 저는..."


세이렌은 흐르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울면서 눈물을 닦았다. 평소에는 잘 참아왔는데, 어째서인지 이번에는 북받쳐오듯이 감정이 터져나왔다.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라 세이렌은 말을 잇지 못한 채 더듬었다.


그러자-


"괜찮아, 세이렌."


"...!"


어느새 세이렌 앞으로 다가온 사령관이 부드럽게 세이렌을 끌어안았다.


"세이렌, 이미 그 때는 지나갔어. 너는 새로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어. 이제는 숨길 필요도 없고, 무리하지 않아도 돼. 내가 있고 모두가 있지 않니? 네가 우리를 지켜내고 싶어하듯이, 우리에게도 너는 너무나 소중하단다."


"으흑...! 흑! 사령관님..."


"울어도 돼. 어리광 부려도 괜찮아. 할 수 없었던 것들을 누리자고, 세이렌. 지금은 그 때와 다르니까."


"으아아앙!!"


"그래, 세이렌..."


사령관은 세이렌을 품에 안고 울음을 터뜨리자 부드럽게 등을 토닥여주었다. 그것만으로 세이렌은 자신을 옭아매고 있던 무언가가 에게서 자유로워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울고 있지만, 온 몸이 뜨겁지만 어째서인지 너무나도 편안했다. 그걸 좀 더 느끼기 위해, 보다 선명하게 기억하기 위해 세이렌은 사령관을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어찌할 줄 몰라 쩔쩔맸던, 누구에게도 드러내지 못했던 무언가가 사라지고 있었다. 너무나 색다른 감각이었다. 


그것은 분명, 이전에는 꿈만 같았던, 바라기만 할 뿐 이루어지지 못할 거라고 믿었던...


"고마워요, 사령관님..."


자신과 모두가 그토록 바래왔던 따스한 평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