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https://arca.live/b/lastorigin/43735411




그래, 에바는 지금 지구 전체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지금 라비아타와 마리, 용에게 남은 것은 이 자그마한 지하도시 하나와, 하루하루를 겨우 살아가는 빈약한 바이오로이드들밖에 없다. 나에게 선택지는 하나였다. 이 바닥에서 그래도 잘 싸울만한 사람들을 이곳으로 모으는 곳이였다. 다행히 지하 도시에는 숨어있는 전쟁의 고수들이 존재한다. 뛰어난 포격대장 아스널, 아머드 메이든의 대장인 블러디 팬서, 그리고 가장 중요한 멸망전 생존개체인 칸까지. 우리 편으로 합세해주면 든든하고, 승리할 수 있는 사람들이 이 도시의 지하에 숨어있다.


시간이 별로 없었던 우리는 지금 당장 움직여야 했다. 꽤나 많은 영입대상에서, 나는 가장 어려운 존재인 신속의 칸을 선택했다.


“...? 저기… 인간님, 칸 대장님은 전쟁에 대해 가장 부정적인 의견을 가지고 계신 분인데… 그 분이랑 엮이게 되면 꽤나 많은 시간을 허비할 겁니다.”


“가장 어려운 사람이니, 영입에 성공하면 나머지는 식은 죽 먹기일거 아냐, 그리고… 생존 개체라면서? 우리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야. 꿈속에서도 내 곁을 든든하게 지켜줬어. 우선 칸부터 만나봐야겠는데.”


“...알겠습니다. 지금 만나러 가실 건가요?”


“하루니 이틀이니 계속 시간이 지체되면 에바가 나에 대해 대비할 시간이 늘어날 거야. 지금 당장 움직이자고. 칸은 지금 어딨어?”


“도시 쪽에 있는 자그마한 복싱장을 운영하니, 글로 가면 될것이오.”


무적의 용이 앞장서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어두컴컴하고 누런 나트륨등이 반짝이는 계단을 지나 의회를 나온 우리는 빠른 걸음으로 도시를 나돌아 당겼다. 전에 말했듯, 도시의 규모가 꽤 컸기에 가는 동안 많은 생각이 든 나는 약간의 이상한 느낌이 들었었다.


이 곳의 바이오로이드들은 내가 인간이 아닌 것처럼 행동을 하고 있다. 아니, 인간이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르는 눈치였다. 하지만, 지금 이 지휘관 급 개체들과 그 에바라는 작자의 부하들은 더치걸의 집에서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누구는 나를 인간이라 인식하고, 누구는 나를 인간이라 인식하지를 않는다. 뭐가 어떻게 되는 것인지 궁금한 나는 라비아타에게 질문을 던졌다.


“...라비아타?”


“...?”


“너랑 무적의 용, 불굴의 마리는 날 인간이라 인식하잖아? 근데 왜 다른 바이오로이드들은 날 인간으로 보질 않는거지?”


“...에바는 이 지구상의 모든 인간을 죽이기로 결심해서 철충을 만들었고, 바이오로이드들이 철충을 쉽게 죽일 수 없도록 그것들이 인간이 내뿜는 뇌파와 비슷한 파장을 보내게 만들었어요. 그렇게 되니, 저희같이 철충과 인간을 구분할 수 있는 고급 바이오로이드들을 제외하고, 인간님들은 대부분의 바이오로이드들의 모듈을 갈아엎기 시작했죠. 철충 박멸이 우선이였던 멸망직전의 사람들은 그 뇌파인식 모듈을 아예 뜯어버렸고, 그렇게 해서 더이상 대부분의 바이오로이드들은 인간을 인간이라 인식하지 않았죠. 지금은 저희같은 지휘관급 개체들과 에바의 특수군인들만 인간을 인식하는 모듈을 장착하고 있어요.”


“...그렇게 된 거구만…”


라비아타의 설명은 자세하면서도, 이해하기 쉬웠다. 그렇게 셋을 따라 좁은 골목길을 지나가고, 마침내 세 명의 바이오로이드들이 어느 건물 앞에 우뚝 섰다. 곧게 서있는 건물, 그리고 한 층의 창문은 하얀 스티커로 아예 막혀 있었고, 붉은 글씨로 ‘복싱장, 다이어터 모집, 호신용 복싱’이라는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꿈 속에서 칸은 처음엔 무뚝뚝한 성격이였는데, 그녀가 꾸민 창문을 보자 꿈과 현실은 다를 게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멈춰 무슨 생각을 하던 그들은 문을 열고 들어가기 시작했고, 나 역시 마찬가지로 그들을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건물 안은 꽤나 음침하고, 무서울 정도로 계단에 빛이 들어오지 않았다. 마침내 우리는 칸의 복싱장이 있는 층까지 올리왔지만, 불굴의 마리는 그 곳에서 들어가길 주저하는 듯 쉽게 출입문을 잡아당기질 못했다.


“...인간님, 신속의 칸은… 사람을 패죽인 전적이 있는 인물입니다. 인간에 대해 증오감이 강한 바이오로이드죠… 절대 이 앞으로 나서서 설득에 앞장서지는 않았으면 합니다, 잘못하면 인간님도… 크흠, 말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마리는 헛기침을 한번 하고, 어깨에 걸친 코트를 정리하고는 문을 열어재꼈다. 안에서는 주먹소리가 오갔고, 자그마한 복싱링, 서너명이 운동할 만한 면적, 그리고 책상 하나와 컴퓨터 한대, 마지막으로 책상 옆에 라커룸과 샤워실만이 존재했다. 한 쪽 벽은 완전히 거울로 되어 있었고, 복싱장을 운영하는 최소한의 공간과 물건만이 위치해 있었다. 브라우니 하나는 땀을 뻘뻘 흘리며 줄넘기를 하고 있었고, 레프리콘은 복싱링에서 누군가와 스파링을 하는듯 보였다. 그리고, 그 스파링의 상대는 갈색 머리카락을 길게 내려놓고는 가벼운 스텝으로 레프리콘을 공략하는 칸이 있었다.


주먹소리는 문을 열자마자 멎어버렸고, 칸은 우리를 보는듯 고개를 약간 돌려 눈으로 우리를 흘겨보고는 순식간에 다시 복싱을 이어갔다. 우리는 그렇게 칸이 싸우는 것을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너무나도 빠르게 움직이고, 빠르게 레프리콘을 때렸다. 레프리콘은 맞으면서도 절때 쓰러지거나 중심을 잃지 않았다. 눈에는 비장함이 느껴지고, 손의 가드는 매우 단단해 보였다. 시간이 조금 지나, 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땡!’


“커흑!”


레프리콘은 그제서야 자리에 쓰러져서는 거친 기침을 이어나갔고, 매섭게 공격하던 칸은 이젠 다정하게 그녀에게 물을 주고, 수건으로 땀을 닦아줬다.


“수고 많았다. 맷집이 꽤 강해졌군.”


“이렇게 강하게 대하시면… 사람이 안오지 않나요?”


“그대도 있고, 다른 회원들도 많다. 그리고 난 약한 놈들은 애초에 키우고 싶지 않아.”


“쿨럭! 어윽… 칸님 주먹은… 언제 맞아도 적응이 안돼요…”


“많이 맞아서 그정도 버티는 거다. 오늘은 손님도 왔고, 더이상 몸이 못버텨줄 것 같으니 오늘은 씻고 다음에 다시 하도록 하지.”


“ㄴ, 네…”


“수고 많았다.”


칸은 그녀의 등을 몇번 두들기고는 이젠 몸을 돌려 우리를 정면으로 마주봤다. 하지만 그녀의 다정한 표정은 없어지고, 험악한 얼굴로 라비아타를 바라봤다. 라비아타는 무슨 말을 꺼내고 싶어했지만, 열지 못하는듯 입을 우물거렸다. 나는 그 곳에서 예상은 했지만 꽤나 험난한 시간이 될 거라 확신했다.


칸은 눈을 몇번 껌뻑이고는 링에서 내려와, 마침내 라비아타 앞에섰다. 그리고 역시나 말이 없었다.


“...”


“...”


그러나, 이상하게도 칸은 그런 라비아타를 노려보듯 쳐다보면서도 먼저 손을 내밀었다.


“...오랫만이군. 운동이라도 하러 온 건가?”


“아닌 것 알고 계시잖아요, 칸 대장님.”


“뭐, 그렇기도 하지.”


라비아타와 칸은 그렇게 손을 마주잡고, 천천히 흔들어댔다. 둘의 사이에서 한랭한 기류가 흘렀고, 곧 이어서 칸의 시선은 점점 돌려져 내게로 향하게 되었다. 그녀의 비어있는 듯한 동공을 보니, 온 몸에 소름이 쫘악 돋아올랐고, 무적의 용도 뭔가 심상치 않다는 느낌을 받은듯 옆에 차고 있던 칼의 손잡이를 잡아챘다. 하지만, 칸은 그런 행동을 보고는, 헛웃음과 함께 입을 열었다.


“하, 내가 무슨 인간만 보면 죽일 거라고 생각하는가? 그랬다면 당신들이 들어오기 전에 이미 뇌파 파악하고 들어오자마자 죽였겠지.”


“...”


“난 나와 적 관계의 놈들만 죽인다. 그러니까 그런 섣부른 판단은 하지 말아주길 바라는데?”


용은 계속 그녀를 노려보다가는 결국 칼을 내려놓았고, 칸은 다시 라비아타에게 말을 걸었다.


“대장급 사람들은 다 데리고 오셨군. 복싱하러 온 건 아닌것 같은데…?”


“칸 대장님… 저흰 칸 대장님이 필요해서 찾아온 겁니다.”


“그 이야긴 6개월 전에 다 끝난 줄 알았는데? 난 확답을 전달했고, 라비아타 총사령관께서도 알겠다고 한 다음 가지 않았나?”


“지금은 이야기가 다릅니다! 인간님께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구요!”


“고작 인간 하나 다시 나타났다고 세상이 달라지나? 당신도 알잖아. 인간 하나 나오면 우리가 승리하나? 에바 그 년의 감시만 삼엄하진다고!”


“그래도 이제, 상징적인 존재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어요. 병사들의 사기는 높아지고, 에바측 사람들은 당황해서 실수를 할 것이 분명합니다, 이건 기회라구요!”


두 사람의 말의 시끄러웠는지, 방 안에서 누군가가 문을 열고 나왔다. 워울프가 숟가락을 입에 문 채로 황당한듯 얼굴만 빼꼼 내밀었다.


“뭐야, 뭔 일이여?”


그녀는 우리를 보자마자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고, 칸은 그런 워울프를 불러냈다.


“워울프, 애들 불러서 오늘은 복싱장 여기까지 하자. 운동할 상황이 아닌거 같군. 남은 회원님들 다 보내.”


“...? 뭐… 알겠어. 다 나와 오늘 장사 여기까지 한데!”


워울프가 방 안으로 들어가 소리를 버럭 지르자 곧바로 호드 부대원들이 궁시렁 거리며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고, 청소와 함께 회원들을 내보내기 시작했다.


“...쯧, 오늘 장사는 끝났군.”


칸은 고개를 돌려 혀를 찼고, 자리를 옮겨 테이블 쪽으로 다가갔다.


“...앉아 보세요. 이야기는 들어봐야겠으니.”


우리는 잠시 주저하다가 


“방해했다면 미안해요, 칸. 하지만… 저흰 칸 대장님이 정말로 필요해서 그런 겁니다…”


“...내가 인간을 혐오한다는 거, 에바에게 넘어갈려다가 여기로 도망쳐 온 건 알고 계실텐데?”


“...”


‘쾅!’


칸이 책상을 강하게 내리치면서, 복싱장 전체가 울렸다. 난 화들짝 놀라 의자에서 한번 펄쩍 뛰어 올랐다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가쁜 숨을 쉬던 칸은 조곤조곤 입을 열었다.


“내가… 내가 무슨 일을 당했는지 아시는 분들이… 나한테 이러는 겁니까?”


“...”


“수백년 전… 알고 계시잖아요? 나는… 그 빌어쳐먹을 인간새끼 때문에 구할 수 있는 내 동료들을 눈앞에서 잃었어! 살려달라는 울부짖음을 들었고, 도와주고 싶었는데 그 씨발새끼들이 뭐라고 했는지 알아? ‘그냥 도망쳐 나와’라고 했어, 아직까지 꿈속에서 그 새끼 목소리가 나오고, 그새끼 얼굴이 튀어나와서 자살하고 싶었을 때도 몇번이나 있었다고!”


“...”


“아직… 아직도!”


칸은 검지손가락으로 자신의 머리를 콕콕 두들겼다.


“이 빌어쳐먹을 머릿속에서 동료들의 울부짖음이 울린다구요…”


“...이게 어디서 총사령관한테 소리를 질러!”


불굴의 마리가 다시 한번 소리를 질렀고, 주변을 정리하던 퀵 카멜이 빠르게 달려와 둘을 중재했다.


“아이… 두분 다 복싱장에서 이러시지 마세요… 대장… 조금만 화좀 가라앉혀…”


“내가 군대에 속해 있었더라면 소리 지르는 거 자체를 안했겠지. 하지만, 난 이제 민간인이야.  더이상 군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다시 전쟁이 일어나서, 내 동료들을 잃고 싶지 않으니까… 그렇게 알고 다 나가줬으면 좋겠다.”


“...”


라비아타는 말없이 자리에 일어났고, 천천히 문을 향해 걸어갔다. 나, 마리와 용은 당황해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는데, 그녀는 따라오라는듯 우리에게 눈치를 주었고, 나는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향해 달려가듯 쫓았다. 마리와 용도 칸을 잠시동안 째려보더니, 자신의 짐들을 챙기고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출구로 향했다. 모두가 라비아타 곁으로 모이자, 그녀는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그런 일을 당했던 것에 대해 정말 유감이에요. 하지만… 칸 대장님께서도 알듯 에바는 저급 바이오로이드들을 노예화, 기계화 시키며 기득권들을 향한 권력세뇌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들만의 힘으로 에바에게 대항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


“저희는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에바와 다르게, 계속해서 칸 대장님을 설득할 것이고, 칸 대장님의 동료분들을 헤치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그러니… 나중에 생각이 바뀌면 의회로 찾아와 주세요. 언젠가는 우리도 저 하늘을 바라보며 생활해야하지 않겠어요? 그럼…”


문을 굳게 잡고있던 라비아타는 그제서야 문을 열어제꼈고, 우리는 빠르게 복싱장을 빠져나왔다. 싸늘했던 분위기에 지리지 않았던 나에게 칭찬을 스스로 하면서 말이다.


복싱장을 빠져나오며 계단 통로에는, 나에게는 그러지 않았던 칸이 자신의 호드 부대원들과 어깨동무를 하며


활짝 웃고 있었다.



짬뽕 먹고 싶드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