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화


https://arca.live/b/lastorigin/44112094




16.검은 비





(매움 주의)








* * *





"죄송하지만 일단 확인하겠습니다. 먼저 해야했던 것이기도 합니다만."


아들은 눈을 게슴츠레 뜨고 나와 눈을 똑바로 맞췄다. 각막을 덮은 렌즈 너머를 들여다보는 듯한 깊은 눈이었다.


"저희 어머니는 옛날 이야기를 해주실 때면 늘 "어디에서는," 이라고 운을 떼셨었습니다. 이 어디란 아버지와 처음으로 만난 장소이신데, 두분이 저희 어머니와 정말로 친분이 있으셨다면 이 '어디'가 어디를 지칭하는지 아실거라고 생각합니다. 힌트를 드리자면 카페였습니다."


"집회소." 나는 막힘없이 즉답했다. "내가 그곳의 매니저였어. 여기있는 이 남자는 사장."


아들은 여전히 커피만 홀짝거리는 남자를 보고 옅게 미소짓고서 말했다.


"감사합니다. 실은 따로 확인할 것도 아니었습니다만. 어머니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흡혈귀 언니'의 특징에 부합하시는 분은, 아가씨… 죄송합니다. 아가씨로 괜찮으실까요."


"그래."


"알겠습니다. 제 눈앞에 계신 아가씨가 역시 '흡혈귀 언니'이신 듯 하고, 병상에서 어머니가 중얼거리던 말들을 생각해보면, 아들의 눈으로 봐온 저희 부모님의 대략적인 인생사를 말씀드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실 것 같습니다. 계속 뜸을 들여 죄송합니다만, 그… 먼저 말씀드리기 전에, 저는 바이오로이드 개발 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종사했던 인간입니다. 그래서…"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이 노인… 청이의 아이는 내 정체를 알고 있다. 청이를 통해 과거의 나를 단편적으로나마 알고 있다.

생전 처음보는 이가 고인이 된 어머니의 친우라 밝혔다고 해도 신원확인이 우선되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다.

다는 아니겠지만 알고는 있는 것이다. 그것도 상당히 많은 것을.


아들에게 청이는 과거의 나를 상당히 자주 전해왔던 것이다. 


어떻게 전해왔을까. 자식에게는 흥미가 돋을 어머니의 과거 이야기에, 저주를 담아 넌지시 전해왔을까.

아니면, 내 바람일 뿐이지만 다소의 사랑도 담겨 있었을까.


이제부터 알게 된다.


나는 지금부터 멈추지 말고 계속 이야기하라고 부탁했다. 그 사이 남자는 아들이나 아들의 입에서 나올 이야기엔 흥미가 없다는 듯, 내 몫의 커피를 가져가 한 잔 더 홀짝댔다.


아들은 슬슬 식어가는 본인 몫의 잔 손잡이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태어나고 5살까지, 그러니까, 제가 인지력을 막 갖추고 한 명의 인간이 되었을 무렵까지 저희 집안은 형편이 좋지 않았습니다. 여기계신 선생님이 집회소의 사장님이셨다니 선생님이라면 아실지도 모르겠지만, 운영하던 고양이 카페의 벌이가 영 좋지 않았거든요. 아, 그래요. 어머니께선 자주 사장님한테 감사드리고 싶다며 이야기를 꺼내시기도 했는데, 부족하지만 제가 대신 감사드리겠습니다. 저희 부모님을 많이 도와주셨다 들었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어쨌든, 제게도 약 70년 전이라 기억은 가물가물합니다만, 부모님의 입에서 이제 접어야 한다는 말이 자주 오르내렸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결국엔 고양이 카페는 계속 이어나가게 됐습니다. 그 덕에 저는 10살이 더 넘을 때까지도 학교가 끝나면 카페에서 고양이들과 함께 놀 수 있었지요. 가끔은 부모님의 일을 도와드리기도 했습니다. 제가 일손을 보탤 수 있게 됐을 무렵에 태어난 여동생을 대신 돌보기도 했죠. 


부모님간에 오고가던 이야기를 기억해보면, 형편이 나아져 카페를 유지할 수 있게 되어서는 아니었습니다. 이유는 고양이였습니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돈을 벌려고 고양이를 이용한 게 아니라 고양이를 돌보려 카페를 운영하신 것 같기도 합니다.


부모님께 고양이란 동물은 남다른 의미를 가진 것 같았습니다. 카페에서 직접 키우던 고양이는 네 마리 뿐이었던지라 길고양이들로 부족한 수를 메우던 카페였는데, 그 수많은 길고양이들을 전부 캐어하시던 정성을 보이셨습니다. 최소 수십 마리에게 일일히 이름까지 붙여주시면서.


그것이 싫은 것은 아니었지만 당시의 어린 제게는 꽤나 이상한 광경이었습니다.

나이를 더 먹어 제 머리가 좀 더 커졌을 무렵에 여쭤보았지요.

어째서 고양이를 그렇게 좋아하시냐고. 


어머니는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네 아버지가 그러길 바란다고.


다른 날, 따로 계시던 아버지께도 여쭸습니다.


어머니와는 다른 답이었습니다.


고양이보다도 고양이같은 여자가 아빠의 첫사랑이었다고.


침이 말랐는지 아들은 잠시 이야기를 멈추고 커피 잔을 입에 가져갔다. 그리고 내 반응을 살피는 듯 잠시 뜸을 들이고 이야기를 재개했다.


시간이 좀 더 흘러 제가 대학생활을 마무리 하려던 무렵, 그해의 명절을 가족과 함께 보내기 위해 자취방에서 막 나왔을 때였습니다. 갓 고등학생이 된 여동생에게서 전화가 왔지요. 지금 오빠 학교 근처에 있으니 집에 가기 전에 잠깐 같이 놀자고요. 동생과의 사이는 좋았고, 시간이 날 때면 가끔 동생과 놀아주는 편이기도 했어서 승낙했습니다. 항상 혼자였던 귀성길에 같이 오를수도 있었으니까요. 집이 그리 멀지도 않아 따로 귀성길이라고 할 것도 없었지만요.


동생과 학교 앞 번화가에서 시간을 죽이고 마지막으로 카페에 들렀습니다. 고양이 카페였습니다. 동생도 같은 환경에서 자라왔으니 고양이에 진심인 편이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자꾸 이야기가 새는군요. 


동생과 고양이를 한마리씩 납치해서 자리를 잡고, 집안의 근황을 묻는 걸로 대화를 시작할 생각이었습니다.


부모님은 건강하시니. 저번 성적표 보시고 화는 안내셨니. 적당히 할말을 고르고 있는데 동생이 먼저 말을 꺼냈습니다.


"오빠. 오빠가 내 나이였을 때 엄마 아빠는 어땠어?"


처음엔 이 아이가 무슨 말을 하는 걸까 싶었습니다. 꼭 어조가 '우리 집은 문제가 있는 집안이다.' 라는 듯 했으니까요. 저희 집안은 나쁘게 말해도 화목했고, 부모님이 다투는 일은 없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만, 그것은 함께 하다보면 반드시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종류의 다툼이었습니다. 왜, 그렇게들 말하지 않습니까. 다투지 않는 부부보다 적당히 다투는 부부가 더 금슬이 좋다고.


"엄마랑 아빠. 사이가 좋았던 적이 없잖아."


동생에게 있어선 마침 기회다 싶어 물은 말이었습니다. 저는 당황했습니다.

사이가 좋았던 적이 없어?


나이 차가 10살 가까이 나던 동생이라 저와는 부모님을 보는 눈이 달랐던 걸까요?

아니면 그 시간 동안 부모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자식된 이는 모를, 그런 일들.


동생이 꺼낸 말의 의미를 파악하고 있자니 동생이 계속 말했습니다.


"최근에 엄마랑 아빠가 엄청 크게 다퉜어. 그 왜, 기억 나? 내가 어렸을 때 혼자 자는게 무서워서, 오빠랑 같이 잤었잖아. 엄마는 절대 안된다고, 그 나이 됐으면 이제 혼자 자라고 하면서도 내가 떼를 쓰니까 결국 져줬었지? 그리고 오빠 품에서 내가 잠들기 전까지 옛날 이야기를 해줬었잖아. 내가 더 어렸을 땐 맨날 해주던 흡혈귀 이야기. 엄마가 직접 만났다는 흡혈귀 말이야."


"갑자기 왠 흡혈귀? 부모님이 다툰 일에 흡혈귀가 왜 나와?"


"그 흡혈귀 때문에 다툰 것 같거든."


"뭐라고?"


"얼마 전에 뉴스에 떴잖아. 바이오로이드인가 뭔가 하는 거. 엄마아빠랑 같이 밥 먹는데 있잖아. 바이오로이드에 대한 보도가 끝나니까 아빠랑 엄마가 서로 짠듯이 수저를 떨어뜨리더라? 그러더니 엄마는 막 뭐에 홀린듯이 '설마 언니가.' '그럴 리 없어.' 이러고, 아빠도 언니란 단어를 누나로 바꾸기만 하면 완전히 똑같은 반응이었어.


그리고 2주 지나서, 어… 몇일 전이었지. 방에서 공부하고 있는데 갑자기 엄마가 소리를 치는 거야. 엄마는 1층 거실에 있었는데 2층 내 방에 다들릴 정도로 엄청 컸어. 지금 우리 집은 새로 지은 집이라며. 나 젖먹이 때 말이야. 공부할 땐 방해되면 안된다면서 우리 방은 방음재로 시공했댔잖아. 그런데도 엄청 크게 들렸어."


"그래서? 그래서 뭐가 어떻게 됐는데?"


"궁금했지. 그렇게 싸우는 적은 없었으니까. 왜 싸우는 건지 몰래 들어봤어. 그러니까 대충 말하면 아빠는 모든 사업을 접고 바이오로이드에 투자하겠다는 것 같았어. 엄마나 아빠나 너무 격해져 있어서 잘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런 내용인 것 같았어."


"진짜!? 갑자기!?"


"그래! 사업들 모두 정리하겠다고 분명 그렇게 말했다니까!? 맨날 공장이나 사업장에 갈 때면 '네 아빠가 얼마나 힘들게 일궈낸 것들인지 아니?' 라면서 자랑했던 것들 전부! 진짜 미쳤어. 나도 미쳤다고 생각했는데 엄마는 오죽했겠어!? 근데… 엄마는 아닌 것 같았어."


"아닌 것 같다니?"


"사업을 정리하겠다는 부분에 화를 내는게 아닌 것 같았다고. ……오빠. 혹시 아빠 있잖아. 나 어렸을 때 바람 피운 적 있어?"


"…아니? 확신은 못하겠지만."


"그…렇지? 근데 엄마 입에서 왜 그런 말이 나왔을까?"


이어진 동생의 말은 이상했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께 저주를 퍼붓듯 외치며 몰아세웠답니다. "쓰레기 새끼! 거짓말쟁이!"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내가 모를 줄 알아!?" "이럴 거면 나랑은 왜 결혼했어!" "내가 사랑한다고 할 때마다 왜 사랑한다고 했냐고!" "내가 얼마나 참고 살아왔는데!" "이 나이 됐으니 더 감출 것도 없어졌다 이거야!?" "그 흡혈귀를 다시 볼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고 기대라도 하는 거야!? 그 여자가 바이오로이드였다고 생각하는 거냐고!"


그러는 어머니의 모습은 마치, 뭐랄까요. 동생의 말로는 화가 난 자기 친구를 보는 것 같았답니다. 


친구 중에 화만 나면 있는대로 꺼내는 아이가 있었다나요. 즉, 어머니는 꼭 10대 소녀에게서나 볼 법한 모습으로 화를 내셨었다는 겁니다.


동생과 함께 돌아간 집은 제가 알던 집이 아니었습니다. 이 집이 내 집이라고 알려오는 익숙한 냄새나 소음들 사이에 낯선 기류가 떠돌고 있었습니다.


명절음식으로 가득한 식탁에 둘러앉은 저희 가족은 늘 그랬듯 화기애애 했습니다. 그래보였습니다.


꼭… 뭐라고 해야 할까요. 분명 내 가족은 바로 눈앞에 있는데, TV속 가공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가족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화목함에 부자연스러움이 끼어있고, 대화의 주제나 대화, 대화로 일어나는 상황은 아주 잘짜여진 각본 같이 느껴졌지요. 요컨대 다들 연기를 하는 것 같았다는 겁니다. 일상적인 가족의 대화에서 그런 인상을 받는다면 당연히 위화감이 들겠죠. 


제가 받은 느낌은 틀림없었습니다. 저는 살면서 눈치가 좋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만, 가족에 한해서는 아무리 눈치 없는 인간이라도 알아채는 법입니다.


그 이후로 명절 날 느꼈던 위화감이 언제나 집안에 맴돌게 됩니다. 그래도 저는 별일 아니겠거니 생각했습니다. 뭐가 어찌되었든 저희 가족은 계속 화목했으니까요. 동생이 거짓말을 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요. 거짓말이 아니었다고 해도 부모님들께는 또 부모님들만의 사정이 있는 것이죠. 그 누구도, 자식이라고 해도 끼어들 틈이 없는 사정이. 끼어들고 싶어도 전혀 모르는 사정이. 물론 자식이라 노파심에 여쭤는 봤습니다만, 당연히 알려주시지 않았습니다. 이상한 걸 묻는다고 웃기만 하시더군요.


그날로 일년도 안되어 동생이 말한 대로 아버지는 바이오로이드 유통업에 모든 걸 거시고 뛰어들었고, 대성공을 거두시게 됩니다. 정말 다행이도요. 실패하셨다면… 글쎄요. 아마도 제가 대학을 졸업하는 일은 없었겠죠.


모든게 순탄했습니다. 몇 년 즈음 지나서, 저는 성공하신 아버지를 본받아 평생 몸담게 되는 연구소에 취직을 하고 결혼도 합니다. 좋은 아내였습니다. 예쁘고. 성격 좋고. 능력도 있는. 언젠가 떠나더라도 저보다는 늦게 떠날 거라고 했던.

 ……죄송합니다. 이건 관계없는 이야기입니다.


아뇨. 아주 관계 없지는 않군요. 상견례를 할 무렵부터 사고로 아내가 떠나기 전까지, 제가 없을 때 어머니는 틈만 나면 며느리를 붙잡고 이것저것 물어왔다고 합니다. 참고로, 저는 부모님과 결혼 후에도 함께 살았습니다. 어머니가 도통 분가를 허락하지 않으셨거든요.


기억하기로는, 아내의 말에 따르면 어머니의 질문은 크게 세 가지였답니다.

내 아들이 너의 운명이니?

너는 인간이니?

혹시, 내 아들말고 다른 남자를 마음에 두고 있니? 혹은 둔 적이 있니?       


술을 잘하시는 편도 아닌데 제가 신혼일 무렵부터 어머니는 자주 술을 드셔서 말이죠. 아내는 그 질문을 술버릇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항상 염려놓으시라고 몇 번이고 지겹게 물어와도 꼬박꼬박 잘 대답해주었답니다. 고맙게도요. 아내가 그래주면 어머니는 항상 고맙다고, 꼭 그말 지켜달라고 거의 애원하듯 아내에게 부탁했다는군요.


그리고 아버지입니다만, 어머니는 술을 자주 하시게 됐다는 점 말고는 크게 변화라고 할 것이 없었는데, 아버지는 확연히 변하셨습니다. 


아무리 늙으셨다지만, 생기 넘치시던 눈은 병이 드신 것처럼 흐려보였고 심심하면 꺼내시던 자신의 성공신화를 더 이야기 해주지도 않으셨습니다. 그저 뭔가에 홀리신듯 지하실만 드나드시더군요. 절대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고 엄포를 놓으시고요.


혹시 들어오시면서 마당을 보셨습니까? 마당의 정원을 지나면 광이 하나 있는데, 그 광 밑에 지하실을 만들어두었습니다. 바이오로이드가 등장하면서부터 테러니 폭동이니 시끄러워졌으니까요. 이 동네에 지하실같은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마련해두지 않은 집안은 없을 겁니다.


아들이 이야기가 잠시 끊겼다. 무례하게도 졸고 있던 남자가 갑자기 '들을 거만 빨리 듣고 나와.' 라며 자리를 박차고 나갔기 때문이다. 설마 '지하실'이란 단어에 반응한 걸까. 나와 같이 안좋은 예감을 했는지도 모른다.


아들이 계속 말했다.


이제부터는 딱히 이야기랄 게 없습니다. 아내가 사고로 먼저 떠났고, 뒤따르듯 동생도 사고로 떠나버렸고, 그리고 지금입니다. 분가하지 않은게 다행이었다고 여겨진 인생을 보내왔지요. 아버지는… 가족과 대화를 나누는 것보다도 지하실에 더 많이 드나드셨고요. 어머니는 제 아들, 손자를 돌봐오셨고… 가끔 기억나셨다는듯 제게 흡혈귀 언니의 이야기를 해주시고, 그런 시간이었습니다. 어찌, 알고싶은 것은 알게 되셨는지.


내가 침묵을 유지하고 있자 아들은 자신의 품을 뒤져 무언가를 테이블에 꺼내놓았다.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빛바랜 수첩이었다.


"…그러시다면 이 수첩입니다. 사실, 보여드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습니다. 어쩌면 이런 재미없고 구구절절 늘어진 인생사보다는 이 수첩이 더 많은 것을 명쾌하게 말해줄 지도 모릅니다. 적어도 아가씨께는요."


내가 수첩에 손을 뻗자 아들이 가로막듯 황급히 덧붙였다.


"그, 보시기 전에, 미리 어머니를 대신해 죄송하단 말씀을 드립니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나는 그 수첩을 다 보고나서, 아들에게 고개를 저어보였다.


아들의 인생사가 아니었다면 나는 수첩을 본 뒤에 두 다리로 일어서지 못했을 테니까.


청백이의 행복한 부분이 내 정신의 방벽이 되어주지 못했더라면 분명.  


나는 시선으로 대답하고 누렇게 떼가 탄 수첩을 넘겼다.


첫 장부터 끝 장까지 일일히 읽을 필요도 없었다. 촤르륵, 빠르게 세 번 넘기는 걸로도 충분했다.


아들의 말대로, 이 작은 수첩에 더 많은 것이 명쾌하게 담겨 있었다.






* * *






평소와 같던 어느 날, 나는 계단 층계참에서 들어선 안될 것을 들었다.

'좋아해요. 사귀어주세요.' 

그는 분명 그렇게 말했다.

사장님의 딸에게.

갑자기 나타난 언니에게. 

나같은 건 상대도 안 될 것 같은 여자에게. 

언젠가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했었다.

선수를 칠 생각도 못하고, 그럴 용기도 없이.



언니는 단박에 거절했다.

여지라곤 전혀 주지않는 칼같은 거절이었다.

……다행이다.

그가 차였다는 사실을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내가 끔찍하지만, 다행인 건 다행인 거다.


그나저나 참 무서운 언니다.

보는 남자마다 홀려버린다.

역시 예쁘고 봐야하나.

불공평한 세상.

그래도 나는 그 불공평한 것과 친하다.

가끔 데이트도 할 정도로.

그러니까 모르는 척 해주자. 

 







* * *







청혼했다.

미적거리길래 결국엔 내가 해버렸다. 

바보.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지만 청혼을 받는 건 여자의 로망인데.

눈치가 없어도 그 정도는 알고있을 텐데.


혹시, 아직 언니를 마음에 두고 있는 걸까.

그럴 리 없어. 그는 내 청혼을 받아줬잖아.

환상적인 미소로 받아주면서 나를 껴안아줬잖아.

사랑한다고 말해줬잖아.


그래. 그러니까 그는 이제 내 거잖아.

내 남자잖아.

나는 그의 것이고.


노력했어.

언니를 따라다니며 어떻게 하면 언니같이 될 수 있을까. 

공부한 게 도움이 된 거야.


언젠가 언니가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면, 꼭 말하자.


고마워.

언니가 정말 미웠어.

언니를 진심으로 사랑했어.


앞으로도 내 언니로 있어 줘.




* * *






나쁜 새끼, 나쁜 새끼!

약속한 거랑 달라! 

다르다고!

분명 약속했었어!

집에 들이는 바이오로이드는 어디까지나 가정, 가사용 바이오로이드 뿐이라고 약속했었어!


그런데 왜!

아르망 추기경을 들인 거야!?

산 것도 아니야! 유통 중에 빼돌렸어!

나쁜 새끼! 그랬으면서 나한테는 웃돈 주고 샀다고 입을 싹 닦아!?


들인 건 그렇다 쳐.

왜 지하실에 숨겨두듯 아르망 추기경을 가둬 둔 건데!?


제정신이 아닌 거야.

에바인지 뭔지 하는 바이오로이드가 TV에 나왔을 때부터, 미쳐버린 거야.


미쳐버려서 바이오로이드 사업을 하겠다고 한 거야.

아직도 언니를 마음에 두고 있었던 거야!


……그래.

사실은 알고 있었잖아.


그는 나를 본 적이 없어.


매일 내가 만든 식사를 입에 넣을 때도, TV를 볼 때도, 결혼 기념일을 기념할 때도, 나를 사랑한다고 할 때도, 내 처음을 허락했을 때도, 첫 아이를 보게 됐을 때도, 내 운명은 너라고 말했을 때도, 너도 나를 운명이라 말했을 때도, 


전부.


그 새끼 눈엔 언니 뿐이었던 거야.


다, 거짓말이었어.






* * *






자리를 마치고 어스름이 끼어가는 청이의 집을 살폈다. 응접실과 접한 거실이나 주방, 청백이의 침실로 추정되는 곳 모두에서 생활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먼지가 끼어있는 것은 양반이었다. 발바닥이 계속 따가워 확인해보니 양말에 이물질이 가득 붙어 있었다. 모래, 말라 죽은 벌레 사체, 머리카락, 정체를 알 수 없는 미세한 파편들… 침실의 침대 밑은 언제 청소한 건지 거미줄이 안개처럼 깔려 있었다. 그러모아 뭉쳐보면 농구공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두 명. 집이 이 지경이 되는 걸 막았어야할 이들에게 물었다. 콘스탄챠는 입을 열지 않았고 넓직한 거실의 소파에서 멍하니 앉아있던 하치코는 황망한 반응을 보였다. 나는 하치코를 몰아세우듯 몇 번이고 물었다. 그러자 응접실에서 막 나온 아들이 하치코를 대신해 말했다.


"어머니의 명령이었습니다. 이 아가씨들은 명령에 따른 것뿐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말아라.


그렇게 명령했다고 한다.


콘스탄챠나 하치코가 자체적으로 판단해 집을 집 답게 만들면 불같이 화를 냈단다. 하루 아침에 사람이 변해버린 것 같다고 했다. 바이오로이드들에게 그렇게 진심으로 화를 낸 적은 한 번도 없었던 어머니였다는 것이다. 때문에 바이오로이드 대신 아들이 몰래몰래 집이라는 형태를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만 관리를 해왔다는 모양이다.


"언제부터?"


"1년 즈음…"


"…그렇구나."


청이가 그랬다고 하니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왜 이 집을 돌아다니는지 이유도 모른 채 계속 살폈다. 그러다가 와인 진열장 같은 선반에 있는 것이 시선을 끌었다.


"어머니의 수집품입니다. 보시다시피 수집품이라고 해도 값어치가 높거나 그런 건 아닙니다. 추억이라거나, 사연이라거나, 아마도 어머니께 각별한 물건들이었겠죠."


굳이 설명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와인이 서있어야할 것 같은 선반엔 사진, CD플레이어와 CD가 있었다.


새하얀 CD커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집회소 플레이리스트.'


나는 그 CD를 챙겨 자켓 안주머니에 넣고 아들에게 시선을 줬다. 아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선반에서 거리를 두기 전, 한 번 더 본다.

선반 안의 사진을 본다.


아마도, 봄. 꽃잎이 비처럼 쏟아지는 배경의 사진 안에는 내가 있었다. 청이가 있었다. 백이가 있었다. 삼총사가 있었고, 그 남자, 사장님도 있었다. 다닥다닥 붙은 그들은 모두 한 곳을 보고 웃고 있었다. 삼총사를 제외한 그 사진 안의 모두는 검은 에이프런을 두르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볶은 원두 냄새가 날 것 같은 모습이었다.


우리가 단체 사진을 찍은 적이 있었나.

있었으니까 이런 사진이 존재하는 거겠지.


…사진은 두고 가자.


현관 앞에 서자 아들이 말했다.


"아가씨. 아가씨가 어떤 기분으로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실지 저는 알 수 없습니다. 알 일도 없겠죠. 다만, 이것만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청이… 그러니까 제 어머니는, 늘 흡혈귀 이야기를 마무리 할 때마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엄마는 그 흡혈귀가 너무 미웠어. 그래도 정말 사랑했어.' "


형식적인 이별인사를 나누고 배웅을 받으며 신발을 신고 있으려니 남자가 들어왔다.

남자의 손에 무언가가 들려 있었다. 


"어우. 내가 지겹게도 오래 살았지만 그렇게 역겨운 건 또 오랜만에 보네."


그렇게 지껄이며 남자가 내민 건, 붉은 수단이었다.

받아 든 수단에서는 어떻게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악취가 났다.


"어이, 아들. 이런 말하면 뭐하겠지만 네 아버지는 말년에 제대로 노망이 든 모양이야. 뭐, 살아있는 옷입히기 인형이라도 바랐던 건가? 그것도 하필이면 아르망 추기경이라니. 나 원."


"죄송합니다."


남자는 지하실에 다녀 온 것 같았다.


"죄송한 건 나지." 라고 나는 말했다. "미움 받아야 할 건 나고. 너도 날 미워해도 돼. 그건 그렇고,"


남자에게 다시 수단을 돌려줬다.


"왜."


"그건 내가 할 말이야. 왜 주는 건데 이건? 이런 건 입을 일도 없어."


남자는 과장되게 웃어보이고 떠밀듯이 수단을 내 품에 욱여넣었다.


"입을 일이 없긴. 너 그 전세 집에서 도망쳐 나오면서 챙긴 게 거의 없었다며. 당연히 옷은 못챙겼을 거고. 그럼 수단도 없을 거 아냐. 세탁해서 챙겨 놔." 


"무슨 생각인 지…"


"그건 내가 할 말이야."


했던 말을 고대로 돌려받았다. 일단은 받아두기로 하고 현관을 나섰다.


"진짜 이 씨발년이 사람 꼴받게 만드네!"


현관을 나서고 짙어진 어스름을 맞이하자 분노에 찬 고함이 귀를 때렸다.

진원지를 찾아 헤맬 것도 없이 소정원 쪽을 봤다.


머리채를 잡아서 때리기 좋게 리제를 고정시켜두고 구타해대는 남자.


덩치가 좋고, 주먹질을 할 때마다 찰랑거리는 금 목걸이, 신축성이 좋아보이는 셔츠에서 삐져나온 뒷목의 타투.


아들보단 젊다. 내 옆에 있는 남자와 비슷한 연령대로 보인다.

어디까지나 액면가로만 따지자면.


저 남자가 청이의 손자인가?

 

예상은 들어 맞았다.


"이놈아! 손님이 계신 자리에서 뭘하는 거냐! 당장 리제를 놓지 못해!"


"집 나가겠다던 놈이 갑자기 돌아와서는 이게 무슨 짓이야!" 아들이 고래고래 소리치며 손자에게 다가갔다. "당장 나가!"


"아나 씨발 영감탱이 또 지랄이네. 하루만 자고 간다고! 근데 뭐, 손님?"


손자가 고개를 양옆으로 갸웃거리며 내쪽을 확인했다.


"뭔데 저건?"


"네 할머니 친구 분들이시다! 이놈아! 이 이상 무례한 짓 보이지 말고 어서 꺼져버려!"


"할매 친구? ㅋㅋ 동네에 할매 친구 있었어? 개찐따 아니었나? 아니 그리고 할매 이미 뒈졌는데 뭐하러 왔대?"


"…"


"죄송합니다. 빨리 돌아가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더 배웅해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들은 울 것 같은 얼굴로 급하게 사과의 말을 꺼내고 손자 쪽으로 계속 향했다.


"주인님 말씀대로 해주세요." 아들과 손자의 고성 속에서 콘스탄챠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희 도련님은…"


아하. 인터폰으로 들은 도련님이란 건 저 남자를 말하는 거였나.


묻지도 않은 '도련님'의 신상을 콘스탄챠는 떨리는 목소리로 읊어갔다.


손자는 붉은 아레나 비무장 종목 중 하나인 MMA부문에 속한 팀의 코치다. 원래도 오냐오냐 자라나 성격이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일년 전에 아내가 바람이 나 도망친 후부터는 주기적으로 저런다. 작년 크리스마스부터 지금까지 이 세 달 간은 유독 심했다. 돈을 어디에 쓰는 건지 손도 자주 빌린다. 콘스탄챠가 보기엔 도박을 하는 것 같다. 마지막으로 빌려 간 건 한 달 전. 지금까지 빌려갔던 금액 모두를 합친 것보다 많은 돈을 가져갔다. 


아내와 이혼한 것과 돈을 빌려가는 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제 저런 건 주인님의 돈을 뜯어가려는 질 나쁜 수법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단다.    


그야말로 그림으로 그린 듯한 타락의 패턴이었다.

오늘날에는 평범하단 축에도 못드는 이야기라 오히려 현실감이 없었다.


"가자."


남자의 손이 내 어깨를 잡았다.


"남의 가정사에는 참견하는 거 아냐. 빨리 와." 


남자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면서도 나는 계속 소정원을 시야에 담았다. "샌드백 집합!" 손자의 외침에 리제가 일어나고 콘스탄챠와 하치코가 황급히 달려간다. "차렷! 오와 열, 오와 열! 이 꽉 물고 배에 힘줘라!" 균형잡힌 자세로 내질러진 펀치가 샌드백에 꽂힌다. 격투기 종사자라는 타이틀에 어울리는 묵직하고 날쌘 펀치였다.


누군가가 욱. 하고 신음을 흘렸다. 직후에 펀치가 하치코에게 집중된 걸로 보아 신음의 주인은 하치코인 듯했다. 복부를 연달아 얻어맞은 하치코가 침을 질질 흘리며 쓰러지자, 손자는 다시 리제를 타겟으로 삼았다. "내가 씨발 저 털바퀴새끼들 다 쫓아내라고 했어 안했어!? 쫓아내기 힘들면 죽이라고 했냐고 안했냐고!" 퍽. 퍽. 우직. 빠각. 뼈와 살이 마찰을 일으키는 소리가 청각을 붉게 물들인다. 리제의 눈이 붓기에 파묻히고 입은 부자연스러운 모양으로 뭉개져간다. 그럼에도 리제는 손자의 물음 아닌 물음에 답한다. "고양이를 돌보라는 주인님의 마지막 명이셨습니다." 폭력에 뭉개진 안쓰러운 발음이었지만 알아들을 정도는 되었다.


남자는 그것을 말대꾸 한다고 받아들였는지 폭력의 강도를 몇 단계 끌어올렸다. 차에 비유하면 완전히 풀악셀을 밟아버린 상태로 돌입하려는 것 같았다.


소매를 걷고, 다리를 털어 푼다. 이제는 다리까지 사용하려나 보다.


"가자니까."


머리가 새하얘져버렸다.


아들이 손자에게 밀려서 넘어지는 모습 때문에도, 남자의 '정 돕고 싶으면 직접 도와주든가!' 라는 외침 때문에도, 폭력일색인 소정원의 풍경 자체 때문에도 아니었다.


손자는 리제의 안면에 훌륭한 킥을 날리며 이렇게 말한 것이다.


"계속 개기면 애 조진다?"


애.


애?


그것만은 안된다는 콘스탄챠의 절규가 들렸다. 차라리 나를 때리라는 하치코의 울음 섞인 외침이 뒤이었다. 아, 진짜. 라면서 궁시렁거리는 남자와 엇갈려 나는 집안으로 뛰쳐들어갔다. 남자의 어딜 가냐는 외침에도 나는 집안을 뒤져갔다. 이제는 완전히 어두워진 1층을 샅샅이 뒤지고 좀 더 어두운 2층도 샅샅이 뒤졌다. 없다. 없어. 나는 슬슬 피어오르는 초조감을 억누르고 마지막으로 3층을 향했다.


그리고 3층의 가장 구석에 있는 방에서, 나는 찾아냈다.








* * *






"뭐야, 당신. 나한테 볼 일 있어?"


"응? 아, 아니아니. 볼 일은 없고, 친해지고 싶어서 ㅋㅋ wow! 이건 뭐 아예 피떡을 만들어놨구만. 리제는 값이 저렴한 편도 아닌데 괜찮은 건가?"


"낮술 쳐드셨어? 어이 아재. 한 대 쳐맞기 싫으면 그냥 나가."


"격투기 코치라며? 누구를 코치해? 브라우니? 레프리콘? 혹시 페로? 그래도 맨손 격투는 거의 군용년들 판이지?"


"꺼지라니까?"


"이야~ 그건 그렇고 나도 격투기 참 좋아하거든! 혹시 들어봤어? 앤더슨 실바에 아데산야, 볼카노프스키. 캬 ㅋㅋ 이름만 들어도 설레. 역시 싸움하면 남자야. 계집들 끼리 주먹질하는 건 별로지. 안 그래? 그래서 붉은 아레나 맨손 격투 쪽은 인기가 영 아니잖아. 어느 한쪽 죽을 때까지 맨몸으로만 싸운다니, 끔찍한 거에도 정도가 있어야지."


"혼자서 뭐라고 나불대는 거야. 진짜 맞는다?"


"그, 있잖아. 내가 이 시대를 몇 번이고 오갔지만, 암만 봐도 좀 아니야."


"경고했다?"


"좀 젊다하는 새끼들이 하나같이 눈치가 없어. 없어도 정도껏 없어야 되는데 말이야. …꼬맹아. 내가 무슨 말 하는 건지 모르겠니?"


"이런 개새끼가 진짜!"


"이런 물주먹을 날릴 게 아니라, 바닥에 무릎 꿇고 '형님! 아버지! 죄송합니다! 못 보일 꼴을 보여버렸습니다! 저는 막돼먹은 불효자 새끼입니다! 앞으로는 두 번 다시 이런 짓 하지 않겠습니다!' "


"으아아악! 팔! 내 팔!"


"지문 싹 지워질 때까지 손바닥을 빌어야지. 야이 개새끼야. 아무리 호부견자라고 해도 적당히 해야될 거 아냐. 야. 너 어쩔 거야. 내 딸한테 어떻게 책임질 거냐고."


"팔…! 뼈, 뼈가 튀어나왔어! 아아…!"


"내가 지금 기분이 좀 안좋거든? 빨리 말해. 어떻게 책임질 거냐니까? 우리 딸이 너같은 새끼 보자고 여기 온 게 아니야. 야. 빨리 말하라니까? 남은 팔도 작살나고 싶니? 내가 씨발 승질 같아선 바로 그냥…… 어라?"


"손님! 이러지 말아주세요! 이건 저희 문제입니다! 저희 도련님이세요!"


"허어?"


"이 이상 도련님께 손대시면 무기를 사용할 거에요. 어서 나가요!"


"하아?"


"…선생님. 아가씨들 말이 맞습니다. 때려 죽이고 싶다한들, 자식입니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어우, 뒤, 뒷골. 씨, 씨씨, 씨발. 쓰, 쓰러진다. ……야이 개만도 못한 새끼야!"


"아악! 으아악!"


"네가 개다루듯 하던 것들이 지금 뭐라고 하는지 들었냐!? 꼴에 너도 귀한 집 아들이라고 감싸고 들잖아! 와 나 이런 건 또 오랜만이네 ㅋㅋ 아 싫어. 이건 난이도가 너무 높아. 야, 꺼져."


"손님!"


"당장 나가! 네 입으로 나가겠다고 했었다며! 너같은 새끼는 집에서 나가는 게 효도야! 너 내가 뭐하는 놈인지 모르지? 이 개만도 못한 새끼야. 넌 내가 눈에 불을 켜고 감시할 거야. 어디 또 와 봐. 그땐 어? 하는 사이에 대가리를 날려버릴 거니까."








* * *









"어디있나 했더니 여기 있었구만. 딸. 거기 웅크려서 뭐하고 있니?"


"나쁜 말 못듣게 귀를 막아줬어." 내 귀가 아닌 다른 귀에서 손을 떼며 말했다. "다 들렸으니까."


"뭐야. 다 보이네." 열려있는 창문을 내려다보고 남자는 말했다. "알록달록한 방이구만. 유아용 모빌에, ㅋㅋㅋ 뽀로로가 있네. 2103년에도 뽀로로가 통하는 구만. 이런 차원은 또 처음이야."


아이 방이야? 남자는 내 근처로 와서 방금까지 내가 막던 귀의 주인을 들여다봤다.


"…진짜 아이 방이야?"


"청이의… 손자, 아까 당신이 쫓아낸 그놈의 아이인가 봐."


"그럼 증손자라는 거네?"


고개를 끄덕이고 다리가 높은 요람을 들여다 본다. 천사가 정말로 존재한다면 이런 얼굴이지 않을까 싶은 아이가 잠들어 있다. 잔잔한 오르골 소리에 맞춘 규칙적인 숨소리를 낸다. 귀를 막아주지 않았더라면 잠에서 깨어 분명 울음을 터트렸을 것이다.


"그나저나 우리 딸, 참 죄많은 여자야~"


"죄?"


"한 남자의 일생에 맴돈 여자가 그럼 죄인이 아니면 뭘까? 하기야 뭐 누군들 잊어버리겠어. 첫사랑이 이렇게나 예쁘면 ㅋㅋ" 


무슨 말인가해서 돌아보니 남자의 손엔 청이의 수첩이 들려 있었다. 아무래도 전부 본 모양이었다.


내가 죄인이라고? 내가 뭘 했는데?

               

나는 의도적으로 백이를 유혹한 적은 없다. 그저 지극히 인간적인 호감을 품었었을 뿐이고 다른 인간들과는 좀 더 다른 뉘앙스로 대했을 뿐이었다.


예를 들면 친절에는 친절로. 농담에는 농담으로. 호의에는 호의로. 그 외에 받아들일 수 없던 것은 모두 거절.


나는 그냥 서류상으로만 나이가 많은 누나였을 뿐이었다.


그게 죄라고 한다면, 그냥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죄였다는 얘기가 된다.

'아르망 누나'라는 존재 자체가 죄였다는게 된다.

청백이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 자체가 죄였다는게 된다.


"인정할 수 없나 보네?"


…아니. 


정말로 존재하는 것만으로 죄가 성립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내 안에 들어찬 사죄하고픈 마음과, 아들에게 미안하다고 말해버린 게 그것이 가능하다는 방증일지도.


그렇다. 그냥 태어났을 뿐인데 본의 아니게 인간을 타락시켜버리는 존재, 바이오로이드도 있지 않은가.


나도 그런 바이오로이드이지 않은가.


"…모르겠어. 나는, 내가 어떻게 했어야 했던 걸까."


"그런 걸 알 수 있었다면 세상이 이렇지 않았겠지. 아니, 이보다 더 최악이었겠지. 아마 엄청 재미없는 세상이 되었을 거야."


그러니까 이 재밌는 삶에 감사하자고~ 거슬리는 말투로 남자는 아이를 들여다보며 지껄였다. 제 일이 아니라고 함부로…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아이를 봐서라도 소란을 피울 수는 없었다.


아들을 찾으려고 방을 나서려던 때에 마침 아들이 아이 방으로 들어왔다.


나는 아이에게 깊은 시선을 주고, 다시 아들을 봤다.

아들은 심란한 얼굴로 한참 동안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가, 내 눈에 담긴 것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에게도 그 편이… 좋겠지요. 그런 놈 밑에서 자라는 것보다야…… 부탁드리겠습니다."


"뭐? 뭐라는 거야?" 남자가 멀뚱멀뚱 아들과 나를 번갈아보고 재차 물었다. "뭘 부탁한다는 건데?"


"이 아이, 내가 키울 거야."


"……응?"


얼빠진 남자의 목소리가 지나가고 한동안 기묘한 침묵이 흘렀다. 몇 십초. 내가 아이 쪽으로 몸을 돌림과 동시에 남자의 입이 움직인 것 같더니,


움직인 건 입이 아니었다.


오른쪽 뺨에 강한 충격이 느껴지고 곧바로 왼쪽 측두부에 더 강한 충격이 느껴졌다. 


몸은 고통에 허우적댔어도 머리로는 알았다.


남자에게 가격 당했다.


몸이 들리고 또 다시 충격이 있었다. 이번에는 등이었다. 발이 허공을 젓는다. 허공을 저을수록 목과 흉부 쪽이 강하게 조여져 간다. 


왜 이러는 걸까? 내가 못할 말이라도 한 건가? 말도 없이 멱살을 잡아올릴 정도로 화가 나는 말이었나?

남자는 손자를 대하던 때와는 비교도 안되는 분노를 눈에 담고, 얼굴을 들이밀었다.


"오늘 뭔 날이냐? 대뜸 애를 키우겠다는 년에 또 그걸 허락하는 노인네까지. ㅋㅋ 단체로 미쳤어?"


"윽… 아… 이거 놓고…"


"다시 말해 봐. 뭘 하겠다고?"


"아이… 청이의 핏줄… 내가 키울 거라고…"


"아아, 그래. 그러니까, 엄마가 되시겠다?"


진짜 죽일 기세로 목을 조여와서 말을 꺼낼 수 가 없었다. 시야에 안개가 끼고 혀가 이완되어 침이 샌다.


최소한 답할 수 있는 상태로 만들어줘야 답을 할 것 아닌가.


"그 말 취소해."


나는 경련하기 시작한 눈꺼풀로 대답할 수 밖에 없었다. 


"안 해? 취소 안 해?"


"대, 대답을, 못하겠…"


천장에 매달린 별 모양 모빌이 시야에 가득차더니, 몸이 공중을 날았다. 나무같은 것이 부러지는 소리가 들리고 등부터 다리 아래까지 격통이 내달렸다.


남자가 내던진 것이다. 아무리 내 신체스펙이 비루해도 그렇지, 어마어마한 완력이다. 다리에 힘을 주고 바닥을 짚어 일어난다. 


시야에 떠다니는 은빛 부스러기 속에서 남자를 포착한 다음, 장갑을 꺼냈다.


"엄마? ㅋㅋ 내가 살다살다 이젠 바이오로이드 입에서 엄마란 단어를 들어보네."


남자가 손목의 밴드를 매만졌다. 지금부터 내가 하려는 짓에 대비하는 것이다.


"네가 엄마가 되시겠다? 좋아. 그럼 물어보자. 딸. 엄마가 된다는게 무슨 뜻인지 알고 있니?"


"저 아이의 보호자가 되겠다는 게 그렇게 못할 말이야?"


"묻는 말에나 대답해. 알아?"


"키울 거야. 내가 저 아이의 엄마가 될 거야. 그런 개새끼 밑에서 자라나느니 내가 돌보는 편이 낫잖아. 아들도 동의했어. 아들이 동의 했으니 바이오로이드들도 동의해주겠지. 그럼 문제 될 건 없잖아."


"모른다는 거지?"


"꼭 알아야 돼?"


"그럼 알아야지 씨발년아! 도대체 무슨 생각이야. 엄마가 돼? 네가 엄마가 되려는 이유는 둘째치고, 야. 엄마가 되겠다는 건 말이야. 저 아이의 모든게 되어주겠다는 뜻이야. 아이에게 부모란 우주야! 세상 전부란 말이야! 네가 그럴 수 있어!? 저 아이의 세계가 되어줄 수 있겠느냐고! 되어준다 해도 아버지가 없어서 반쪽 짜리 우주 밖에 되어줄 수 없을 걸? 그 뿐이냐? 눈앞의 현실은 어쩔 건데? 넌 바이오로이드야. 법적으로도 너는 어머니가 될 수 없어. 저 아이는 그 새끼 자식이야. 아이를 유괴하는 꼴이라고. 가족증명서를 떼는 건 고사하고 네 이름 밑에 저 아이의 이름이 적힐 수가 없단 말이야. 설마 돈 좀 모였다고 돈으로 인간 신분을 살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 안하겠지? 아무리 돈이 권능인 세상이라지만 바이오로이드에게 신분을 파는 미친 새끼는 없어. 조선시대가 아니야! 22세기다! 그 법적인 신분이야말로 아직까지 존엄이란 단어가 제대로 기능하는 영역이란 말이다!"


내 눈에 지금 이 남자는, 화를 못이겨서 악을 쓴다기보다 애원하는 것처럼 비쳐졌다. 옥타브도 데시벨도 분노의 영역에서 터져나오지만 습한 것이 배어 있었다.


남자는 나와 대치한 상태로, 계속해서 내가 아이를 키워선 안되는 이유들을 쏟아냈다. 법적인 문제부터 시작해 현실적인 문제, 좀 더 현실적인 문제, 육아의 고단함, 인간들이 바이오로이드에게 육아는 맡겨도, 엄마라는 지위는 주지 않는 이유 등등.


나는 듣고 있지 않았다. 들리지 않았다. 실제로는 들렸지만 남자의 목소리와 그 의미가 제대로 연결되지 않았다.


나는 공격적인 자세를 취한 채, 이 남자를 어떻게 뚫고 지나갈까 궁리하면서, 모든 신경을 아이에게만 쏟았다.


내가 침묵으로 일관하고 남자가 계속 떠들어대자, 이윽고 아이가 깼다.


내가 벽에 날아갔을 때도 깨지 않았던 아이는 남자의 노성에 반응해 울음을 터뜨렸다.


그 울음이 남자에게는 신호였던 것 같다.


나를 구슬릴 바에야 싹을 잘라버리겠다는 신호.


남자의 손에 리리스가 들린 것을 포착하고, 그 리리스가 아이의 미간을 겨누려고 했을 때, 나는 이미 남자의 뒤를 덮쳐 목에 팬텀을 박아 넣고 있었다.


주춤주춤 뒷목을 잡고 뒷걸음질하는 남자를 구석 쪽으로 차버린 다음, 세상이 떠나가라 울어대는 아이를 들어 안았다. 아연실색한 아들이 반사적으로 길을 열었고, 나는 곧장 집밖으로 내달렸다.


미친 놈!


다른 것도 아닌 아이를 죽이려고 했어! 


"아르망!"


해가 사라진 경사길을 뛰어 내려가는 중에, 품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단말기였다.


"당장 돌아와! 넌 미쳤어! 젠장! 어제 봤을 때부터 묶어두기라도 했어야 됐는데!"


"미친 건 너야!"


"야이 개 또라이같은 년아! 정신 안차려!? 이런 세상에선 그냥 죽어버리는 게 나아! 때때로 죽음은 자비일 수 있어! 아르망! 넌 네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몰라! 진짜로 돌아버린 거냐!? 후회한다! 백퍼센트 후회해! 이백퍼센트 후회 한다고! 야! 아르망! 앞으로 10…!"


단말기를 최대한 멀리 던졌다. 단말기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어느 집의 담벼락 너머로 사라졌다.


경사길을 전부 내려와서 주위를 살폈다. 저마다의 색깔로 대로를 물들인 홀로그램을 보자, 조금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좀 더 걸어서 발견한 인파 속에 몸을 숨기고, 아이를 살폈다. 도시의 소음은 들리지 않는다는 듯, 아이는 평온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봄이지만 아직 겨울의 잔재가 남아있어 날씨는 추웠다. 마땅히 덮어줄 것이 없었어서 수단으로 아이를 감쌌다.


미안해. 이런 냄새나고 더러운 것 밖에 없어서.


빨리 집으로 돌아가자. 다음 일은 일단 아이를 뉘일 만한 곳으로 데려간 뒤에 생각한다.


증명하겠다.

   

바이오로이드도 쌓아올릴 수 있음을. 

경험을 양분으로 삼을 수 있음을.

그래서 변할 수 있음을.

바이오로이드도 사랑을 할 자격이 있음을.


청이가 인정하게 만들겠다.


아이를 통해서.


동시에 속죄하겠다.


청이의 핏줄을 키우는 것으로, 나는 내 죄와 마주하겠다. 


정말로 존재 자체만으로도 죄가 될 수 있다고 한다면, 나 때문에 청이의 가정이 파탄 나버렸다고 한다면, 처음부터 어긋나 있었다고 한다면,


진심으로 속죄하겠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소파 위를 쓸어버리고 아이를 눕혔다. 계속 옆을 지켰다. 왼쪽 눈으로는 숨소리 하나, 미세한 움직임 하나, 아이의 모든 것을 신경 썼고, 오른쪽 눈으로는 스마트 워치를 훑어 육아와 관련된 정보를 모조리 수집했다. 


그렇게 해가 떴다. 

하루의 첫 햇살이 소파에 닿았을 때, 나는 눈을 뜬 아이와 똑바로 눈을 맞추고 말했다.


"너는 나의 속죄야."

 

그날로 나는 한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그리고 훗날, 뭐, 훗날이라고 해봐야 그리 멀지도 않은 미래이지만, 남자의 말대로 나는 후회하게 된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청이의 핏줄이라는 걸 차치하더라도 아이를 총으로 쏴죽인다는 건, 절대로 두고 볼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않나.

가령, 시간을 돌려 다시 아이의 방에 돌아갔다고 해도 나는 똑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몇 번이라도.








* * *






꿈을 꾼다.

매번 같은 꿈이다.


무채색 일색. 꼭 흑백영화의 한장면 같다.


그 꿈 속에서 나는 소파에 앉아있다. 내 집은 아니다. 청이네 집이다. 꿈 속의 나는 집회소 시절의 '언니'라 치렁치렁한 금발을 포니테일로 묶어놨다. 청이는 옆에 앉아 내게 어깨를 기대고 있다. 집회소 시절의 청이라 젊다.


젊은 청이는 이렇게 거리낌없이 스킨십을 하는 아이가 아니었는데. 의아하긴 하지만 그것이 좋아 어깨를 계속 빌려준다.


눈앞에 테이블이 있고, 테이블 너머엔 커다란 벽걸이TV가 있다. TV에서는 뮤직비디오가 재생되고 있다. 앤 마리의 '2002'다. "언니도 저렇게 입어보면 어때요?" 청이가 TV속 앤 마리를 보고 말한다. "싫어. 저런 스타일을 내가 어떻게 소화해." 나는 반만 진심으로 거절한다. 남은 반으로는 한 번 저렇게 입어볼까 고민한다. 청이가 좋아할 것 같으니까. 


앤 마리가 공연을 마치자 크리스토퍼가 나타난다.


'Bad'의 전주가 흐르고 후렴구에 다다랐을 무렵, 청이가 말한다. "언니는 가끔 애니멀이야." 그냥 짐승이라고 하면 될 것을. 나는 묻는다. "내가 왜 짐승이야?" 청이가 대답한다. "그런 냄새가 나." 나는 얼굴을 찌푸리고 팔뚝에 코를 대본다. 그냥 플로럴 계열의 바디워시 향기만 난다.


"남자가 엄청 꼬이잖아."

"남자가 꼬이면 짐승이야?"

"그런 남자들한테 보이는 태도가."

"내가 어쨌는데?"

"진짜 냉정하게 쳐내는데, 가끔 즐기는 것 같아. 설마 진짜로 즐긴 거 아냐?"

"웃겨 증말. 뭘 즐겨. 아무도 안좋아했거든. 단 한 명도 마음에 안들었어."



크리스토퍼가 무대 뒤로 사라지자 015B가 나타난다. 015B 다음은 찰리 푸스, 시아, 장범준…… 우리의 추억의 조각들이 저마다 한 곡씩 펼치고 사라져 간다.


"이거, 사장님의 플레이리스트잖아."

"응."

"생각해보니까 의외야."

"뭐가?"

"다 사랑 노래잖아. 로맨틱한 걸 좋아하시나 봐."

"그 인간이? 말도 안 돼."

"아, 맞다. 언니. 사장님 노래 엄청 잘부른다? 춤도 되게 잘 춰."

"내가 더 잘 불러."

"춤은?"

"안 춰봐서 몰라."

"사장님한테 물려받지 않았을까?"

"몰라. 아, 더 붙지 마."

"언니언니, 춤추는 거 보여 줘."

"싫어."

"그럼 같이 출까?"


같이 추는 것도 거절한다.

토라진 척하는 청이는 내 어깨에 이마를 가볍게 부딪치고 팔을 뻗어온다.


어깨가 감싸인다. 나보다 신장이 큰 아이라서, 나는 청이의 품에 안긴 모양새가 된다.


"언니. 나 좋아?"


얘는 새삼스레 무슨 소릴 하는 거람?


내가 말을 아끼자 청이가 바꿔 물어온다.


"싫어?"


나는 마지못해 말한다.


"좋아."

"나도 좋아. 언니, 그럼 같이 잘까?"

"아니. 아니아니아니. 싫어."

"왜?"

"그냥 싫어."

"그냥 같이 자는 게 싫어?"

"그런 거야?"

"그런 거지 그럼 뭐야? 무슨 상상했어?"

"섹스하자는 건 줄 알았지."

"우와. 노골적이네."

"언니는 어른이야. 까불면 안 돼."

"그럼 키스할까?"

"그것도 안 돼."

"치. 그럼 뽀뽀해 줘."


청이가 얼굴을 돌려 볼을 내민다. 나는 잠깐 다른 곳을 보는 척 하다가, 볼이 아닌 입술을 기습한다.


"딸기맛 나네."


청이가 키득거리면서 한 번 더 이마를 어깨에 부딪쳤다.


얘는 꼭 꿈에서만 짓궂어진다니까.

맨날 상대도 안되는 주제에.


"언니. 한 번만 더 물어봐도 돼?"

"응."

"나 사랑해?"

"너는?"

"난 언니 사랑해."

"나도 너 사랑해."


만면에 꾸밈없는 미소를 짓고 청이가 말을 잇는다.


"거짓말." 

"솔직하게 말한 거야."

"거짓말이야. 언니도 날 속이려고?"

"속인 적 없어."

"꿈에서도 거짓말을 하는구나."

"정말인데."

"언니. 이거 꿈이야. 꿈에서라도 솔직해져."

"…응."

"날 이용했지?"

"응."

"진짜로 좋아하진 않았지?"

"진짜로 좋아했어."

"아, 또 거짓말."


정말인데.


청이는 들어주질 않는다.


됐다. 어쨌든 내가 반격할 차례다.


"너도 거짓말했지?"

"내가?"

"응. 못됐어. 바이오로이드가 변할 수 없다니. 거짓말."

"거짓말 아냐. 사실이잖아. 바이오로이드는 물건이야."

"그럼 나는?"

"뭐?"

"네 앞에 있는 나야말로 변할 수 있다는 증거잖아. 모르는 척하는 거야?"

"무슨 소릴 하는지 모르겠어."

"네가, 나를 한 번 바꿨잖아."

"그런 적 없어."

"너 아니였으면 난 바이오로이드가 나타나기도 전에 살인자가 됐을 거야."

"…몰라. 난 몰라."

"커피나 내려가면서 미쳐버렸을 거야. 마틸다가 되기 전에도 말이지."

"싫어! 오지 마! 손대지 마!"


어느샌가 내쪽에서 껴안는 모양새가 되어 있었다.

청이는 내 품에서 빠져나가려고 발버둥 친다.

나는 못빠져나가게 꽉 눌러 안는다.


도통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해서, 귓가에 속삭여준다.


"나는 흡혈귀 언니라며."


그렇게 말하고나니 정말로 흡혈귀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청이의 목덜미가 탐스러워 보였다.

한 입 깨물어 볼까. 그래주면 청이는 황홀해하며 내가 듣고 싶은 말만 해줄 지도 모른다.


욕구를 억누르고 청이의 고개로 손을 뻗어 억지로 얼굴을 돌렸다.


다시 본 청이의 얼굴에는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왜 내 남자를 뺏었어?"

"얘."

"어떻게 뺏었어?"

"가만 있어 봐."

"어떻게 그렇게 간단히 뺏을 수 있었어?"

"난 아무것도 안했어."

"또 거짓말."

"진짠데."


슬슬 끝날 땐데.

오늘은 꿈이 꽤 기네.


"진짜 아무것도 안했어. 지 멋대로 나한테 반한 거야."

"…그래?"

"응."

"그럼 언니 자체가 문제야."

"그런 가봐.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어."

"인정하는 거네?"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언니 자체가 죄라는 거, 인정하는 거지?"  


나는 고개만 끄덕인다.


"좋아. 그럼 됐어. 잘 가, 언니.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아."


청이가 소파에서 일어나 현관으로 향한다. 

기다려.

거긴 아무 것도 없어.


엄마. 


"언니, 보고싶을 거야."


보고싶은 거니, 아닌 거니.

확실히 해.

아니, 일단 기다려 봐.

거기로 가면 안 돼.

좀 더 같이 있자.


"엄마."


눈을 떴다.







* * *






"엄마. 또 나쁜 꿈 꿨어?"


"…아냐. 행복한 꿈이었어."


"근데 왜 맨날 울어?" 


"너무 행복해서 그래."


"진짜?"


"그럼. 눈 뜨면 우리 하늘이가 보이니까, 행복해서."


"그럼 나 때문에 운 거야?"


"비밀."







* * *







"엄마. 엄마엄마."


"아들. 기름 튀니까 식탁에서 기다리고 있어."


"오늘 소풍 어디로 가?"


"말 잘 들으면 알려줄게."


"엄마. 밥 먹기 전에 친구들 밥주고 와도 돼?"


"그러면 손 한 번 더 씻어야 돼. 꼭이야. 알겠지?"


"응."








* * *







"아들. 안전벨트 잘 착용했어?"


"봐."


"잘했네. 창 닫자. 먼지 들어 와."


"오늘 어디 가?"


"하늘이가 좋아하는 곳."


"좋아하는 곳 많은데?"


"맞춰 볼래?"


"공주님한테 가?"


"어머. 바로 맞추네."


"와! 엄마! 빨리 가자! 빨리!"








* * *







2110년. 초가을.


주말, 나는 하늘이를 데리고 차를 몰아 한적한 곳으로 향했다. 집에서 두 시간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시골 산기슭에 위치한 농장이 목적지다. 상당히 큰 규모의 농장으로, 기르는 동물의 가짓수도 개체수도 많아 아이들의 견학 장소로도 제공되고 있다. 계절별 풍경도 훌륭해서 연인이나 가족들의 소풍장소로도 사랑 받는다.


농장 측에서도 그것을 잘 알아 꽤 오래 전부터 카페도 운영해왔다고 한다. 하늘이는 동물 쪽에 관심이 있겠지만 나는 이쪽에 관심이 간다. 산기슭에 카페. 더없이 뛰어난 조합이다. 분명 이 농장 주인은 농장 운영이 아닌 다른 것을 해왔더라도 성공했을 인간이라 본다.


야외 테이블에 앉아 뒤에는 산을 두고, 앞으로는 넓디넓은 들을 두고서 고즈넉함에 잠겼다. 부드러운 산들바람이 파라솔을 훑고 지나간다. 블랙 특유의 고소함을 혀에서 굴려가면 운전으로 쌓인 피로가 가신다. 반려동물에게 제공된 필드로 향하는 개가 보인다. 골든 리트리버다. 내게 흥미가 있었는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리트리버는 나를 보며 걸었다. 귀여워라. 왜 천사라고 불리는지 알 것같은 해맑은 얼굴이었다.


그러나 진짜 천사에 비하면 별 거 아니다.


기지개를 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의 천사를 찾으러 간다.         


개방감이 뛰어난 카페로 들어서자, 고양이들을 돌보는 하늘이를 발견했다. 집 근처에 사는 친구들이 생각난다나. 이곳에 오면 가장 먼저 하는 것이 고양이 돌보기다. 나는 가만히 지켜본다. 하늘이를 위협할 만한 요소는 이 산기슭엔 아무것도 없다. 어차피 내가 데리고 돌아다니려 해도 따르지 않는다. 이곳에 한해서는 나도 느긋하게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고양이들을 부드러운 손길로 모두 잠재우면 하늘이는 필드로 향한다. 아까 그 리트리버가 향한 곳이다. 카페 후방 출입구와 접한 그곳에서는 일장 개판이 벌어지고 있다. 비유가 아니다. 정말로 개판이다. 체급의 우월함을 내세워 필드의 중앙을 점거 중인 리트리버에게 하늘이가 다가간다. 


리트리버에게 다가간 하늘이는 곧바로 리트리버의 뒷덜미를 잡고 끌어낸다. 리트리버가 작은 퍼그 한 마리를 괴롭히던 중이었기 때문이다. 짙은 색깔의 찰흙을 엉망으로 뭉개놓은 것처럼 생긴 퍼그다. 높게 쳐줘도 이 킬로그램도 안되어 보일 정도로 작다. 리트리버에게서 해방된 퍼그를 하늘이가 들어안고 카페로 돌아온다. 그리곤 내게 다가와서 말한다.


리트리버는 착하다며? 나는 알려준다. 그렇지 않아. 리트리버도 리트리버 나름이야.


물론 저 리트리버는 착한 녀석이다. 정말로 나쁜놈이었다면 내 손에 들린 이 퍼그를 진즉에 물어 죽였겠지. 하늘이에게 순순히 끌려나와주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용사님처럼 퍼그를 구한 하늘이는 다시 리트리버를 몰아내고 필드의 제왕으로 등극한다. 필드의 모든 개들이 하늘이를 우러러보고 뒤따른다. 개를 끌고 카페로 다시 들어선 하늘이는 카페 주인에게 묻는다. 친구들이랑 방목장 가도 되나요? 카페 주인은 매장에 있는 손님들께 시선으로 허락을 구하고, 하늘이에게 끄덕인다.


카페와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방목장에 가면, 하늘이는 완전히 고삐를 푼다. 그곳에 보더콜리, 공주님이 있으니까.


멀쩡히 개에게 어울릴 법한 이름이 붙은 보더콜리지만, 하늘이에겐 공주님이라 불린다. 암컷에다가, 기품이 느껴진대서 공주님이란다. 그렇다면 나는 그렇게 부르라고 했다. 공주님은 공주님이라고 불러도 반응해주니까 상관 없었다. 그 보더콜리도 하늘이만 보면 흥분을 해서, 오히려 공주님이라고 불리는 쪽을 마음에 들어하는 듯했다.


공주님 및 친구들과 함께 양을 몰며 뛰어다니고 나면 해가 꽤 저물어 있다. 카페에서 간단히 식사를 하고, 차로 향한다. 하늘이가 조수석에 올라타기 전, 방목장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엄마! 저기! 저거 무슨 꽃이야?" 방목장 옆에는 보라색 코스모스가 흐드러진 들판이 있었다. 나는 대답 대신 하늘이의 손을 잡고 들판으로 향한다. 하늘이는 허락도 구하지 않고 코스모스 속을 헤엄치다가 자세를 취한다. 그런 하늘이를 차에서 가져온 성능 좋은 카메라에 담는다.


테마파크, 영화관, 오락실, 공원, 노래방, 카페, 오늘은 코스모스. 그렇게 또 사진첩에 들어갈 추억이 생긴다. 


돌아가는 길, 하늘이는 조수석에서 10분 즈음, 언제 또 농장에 갈 거냐고 물어보다가 골아 떨어진다.

나는 집에 가면 가장 먼저 애를 씻겨야겠다고 생각한다. 


욕조에 함께 들어가서 확인해보면 하늘이의 몸 여기저기에 생체기가 나있다.

하늘이는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어보인다. 퍼그를 구해낸 걸 칭찬 받고 싶은 듯하다.


나는 하늘이의 머리를 감겨주다가 껴안는다.

퍼그 이전에 나를 구했다고 몰래 속삭이면서. 

하늘이도 나를 껴안는다. 

포옹 이외의 의미는 담기지 않은 순수한 손길에,  나는 너에게서 몇 번이고 맛봤던 구원을 느낀다.







* * * 





지식으로 아는 것과 직접 경험해 체득하는 것의 차이는 어마어마하다는 걸, 이제껏 살아오면서 몇 번이나 느꼈다.

그러나 육아는 또 완전히 별개의 영역이었다. 


정답이라는 건 어디에도 없지만, 적어도 성인대 성인의 관계에선 무엇이 정답에 가까웠는가는 알 수 있다. 소통이 가능하니까. 간단한 이야기다. 내쪽에서 행동을 취하면 상대가 반응한다. 그 반응으로 가늠한다. 정답인가, 아닌가. 


하지만 아이는 뭐, 따로 말할 것도 없겠지. 스마트 워치로 어줍잖게 수집한 정보가 아이에게 알맞은 것인지 아닌지, 알 길이 없었다. 모유를 대체한 분유가 아이에게 확실히 포만감을 주는가, 분유의 비율은 알맞은가, 맛은 괜찮나, 영양적으로 부족하지 않은가. 그런 것들을 아이는 말해주질 않는다. 잘 먹고 나서 잠들면 정답이었고 잘 먹고 나서 곧바로 울음을 터뜨리면 오답이었다. 이래서야 매일이 안전장치 없는 롤러코스터에 타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고 나는 생각했다.


먹이는 것 자체는 분유통의 각도를 잘 조절해 아이에게 물리기만 하면 되니 어려울 건 없었다. 정말로 어려운 건 기저귀를 가는 것이었다. 위생의 문제가 아니었다. 성인의 옷을 갈아입히는 것에 비하면야 손쉬운 일이었다.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기저귀를 벗겨 완벽한 나신으로 만들어 보면, 이 오 킬로그램도 안되어 보이는 아이에게도 장기나 뇌가 있다는 것이 너무나 신기하게 다가왔다. 나보다 열 배나 낮은 무게를 가진 인간의 안에도 똑같이 심장이 있고, 그 외 여러 장기가 있다, 그것이 아이를 살아 숨쉬게 한다, 나와 똑같이. 어떤 의미에선 정말로 기적이라고 느껴진 것이다. 뭐, 내가 그렇게 생각할 것도 없이 아이와 기적이란 단어는 꽤 사이가 좋은 편이기도 하고.


생각해 보면, 나에게 있어 유아나 노인은 기묘한 존재였다.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인간의 시작과 끝을 아주 담백하게 말해주는 존재들.

육체의 탄생과 성장과 열화.

바이오로이드에겐 허락되지 않은 영역.


바이오로이드는 세포 자체의 수가 늘거나 줄 수는 있어도, 그것이 앞으로는 향하지는 않는다. 유지라는 이름으로 언제나 정체되어 있을 뿐, 끝을 향할 수 없다. 


'늙음'을 향유할 수 없는 것이다. 어머니가 선사하는 태고적 평안을 느껴볼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나에겐 허락되지 않는 영역이어서였을까.

아이를 기르면 기를수록 나는 아이가 부러웠고 '늙음'을 가진 노인이 눈부셔 보였다.

흔한 일이지 않은가. 가질 수 없는 것에 동경을 품는 건.

물론 이것은, 물건 취급받는 내 동류들의 현실을 비관해서 부리는 어리광에 불과하다.


반면에 '인간'을 사랑하면 할수록 바이오로이드를 하찮다고 생각했고, 나아가서는 증오라 봐도 무방할 때까지 다다랐다. 불사는 아닐지언정 불로한 존재라는 것이 저주스러웠다.


나는 그들을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닮고 싶다고 생각한다. 더 숨길 것도 없이 정말로 인간이 되고 싶다 생각한다. 오늘날에는 비웃음만 살 뿐이지만, 실제로 인간들 사이에서도 늙는 것을 아름답게 보는 시선이 있었다. 아마도 그런 시선을 가진 인간들에게 시간은 재료였겠지. 하나의 완벽한 끝맺음을 위한 재료. 


그래도 단념한다. 나는 증명해야하지, 동경을 품어선 안된다. 그래서는 청이의 말이 맞다고 시인하는 꼴이다. 나는 변할 수 없는 존재인 채로 변해 보여야 한다. 


어떻게 롤러코스터가 익숙해지고, 아이의 몸무게가 늘고, 어설프게나마 옹알이가 언어의 형태를 취하게 됐을 무렵,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쳤다. 해가 바뀌어 여름, 장대비가 무시무시한 기세로 쏟아지던 날이었다. 처음으로 만들어 본 이유식을 들고 아이 방으로 들어갔는데, 아이가 기침을 하고 있었다. '엄마'를 '우움마'로 발음하면서 말이다.


참고로 하늘이에게 처음으로 가르친 단어가 엄마다.

살짝 앵무새를 가르치는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엄마나 우움마나 어쨌든, 기침이 너무 심해서 병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더 볼 것도 없이 병원으로 향해야 했다. 그리고 아이를 안아든 순간 깨달았다. 


나에겐 제대로 된 신분이 없다는 걸. 인간도 바이오로이드도 아닌 유령같은 존재라는 걸. 남자의 명의를 사용하고 있을 뿐이라는 걸. 


내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의료에는 문외한이었고 대증요법 정도의 치료도 할 줄 몰랐다.

나는 감기는 커녕 어떤 병에도 안걸리는 존재다. 그런 지식이 필요할 리 없었다. 


도움을 받아야 했다. 처음 떠올린 것은 남자였지만, 남자는 이런 현실적인 경고를 했던 인간이다. 아이를 죽이려든 인간이다. 남자에게 부탁할 수는 없다. 그것을 무시하고 도움을 청한다 해도 단말기를 버렸기에 연락할 수단이 없었다.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청이의 아들에게 연락했다. 그날 청이의 집에서 연락처를 받아뒀었다. 


그리고 간단히 말하자면, 아주 순조롭고 평화로운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신분이 없어서 문제라면 신분을 가지면 되는 일이었던 것이다. 나는 돈과 청이 아들의 도움으로, 신분을 얻었다. 아들의 배다른 딸에서 청이의 손녀라는 신분. 어마어마한 죄악감을 동반한 기쁨이었다. 청이가 살아있었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아마도 보다 원색적인 문장들이 편지에 쓰이진 않았을까. 


더해서 정말로 다행인 점은, 하늘이는 출생신고 조차 되어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 점을 무념히 다행이라고 여기는 내가 추악하게 느껴졌지만, 뭐 어떤가. 청이의 손자라고는 믿을 수 없는 그 개새끼보다 내가 낫지. 덧붙여서 그 청이의 손자는 객사했다고 한다. 상태가 처참했다는 걸로 보아 맞아죽기라도 했나 보다. 청이의 아들은 뭐라 말할 수 없는 표정으로 그 사실을 전했지만, 딱히 슬퍼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이것이 아들과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간간히 연락을 해봐도 연결되지 않았고, 몇 번 찾아도 가봤지만 만날 수 없었다. 콘스탄챠나 리제, 하치코도 찾을 수 없었다. 그저 집안의 응접실에 쪽지 한 장만 남겨져 있었을 뿐이었다.


'손자를 잘 부탁드립니다.' 


더는 할렘에서 살 필요가 없어진 나는, 일단 이 더러운 동네부터 탈출하기로 했다. 돈이 없어서 탈출을 못한게 아니었다. 유령에게 안성맞춤이기에 살아왔을 뿐. 이제 아이도 네 발로는 기을 정도로 자랐어서 더 나은 환경을 제공하고 싶었다. 언제까지고 집 안에서만 기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하여 내가 고른 장소는, 뭐 이것은 현재도 기조로 삼고 있는 것에 따른 것이다만, 바이오로이드가 없는 곳이었다. 정확히는 바이오로이드가 존재하지 않는 곳은 없으니 적게나마 존재하되, 그나마 인간적인 대우를 받는 장소를 골랐다. 


그래서 어디냐고? 시골이다.


놀랍게도, 22세기에도 시골은 존재한다. 아니, 오히려 22세기이기에 더욱 존재한다고 할 수 있겠다. 찾아보면 시골 보다 더한 곳도 존재했다. 


시골에 사는 인간들에겐 공통점이 하나 있다. 바이오로이드를 바이오로이드로 보기 보다는 동네 개보듯 한다는 거다. 이것은 결코 나쁜 게 아니다. 21세기에도 그랬지만 22세기에도 왠만한 동물들은 보호받는다. 법으로도 보호를 받는다. 다들 알고있지 않은가. 동물보호법.


반면에 바이오로이드는? 보호는 고사하고 법부터가 바이오로이드를 죽음으로 내몬다. 물건으로 규정하고 있다. 공공재가 어떤 취급을 받는지 생각해보면 알기 쉽다.


동네 개보듯 한다는 건, 소위 말하는 새끼 시고르자브종이 받는 크기의 애정 정도는 받는다는 이야기다. 결코 모든 시골이 그렇다고는 말할 수는 없고, 간혹 시골 특유의 폐쇄성 때문에 도시에서도 경악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확률적으로 도시보다는 백 배 낫다. 법적으로나 인식으로나 개만도 못한 것이, 개에게 줄 법한 애정을 받는다는 건 굉장한 일이다.


그럼에도 나는 시골에 이사와서도, 가능한 바이오로이드와 하늘이를 단절시켰다. 하늘이가 이제야 자신을 하늘이라고 지칭할 수 있게 됐을 무렵, 나는 어떤 광경을 목도 했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도시였다면 작은 아파트에서 끝날 가격이었다고 되뇌이며 이사 온 단독 주택을 기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러다가 테라스 쪽에서 신난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와서 테라스로 향했다.

멀지 않은 미래에 하늘이의 친구들이 되어 줄지도 모르는 아이들을 감상하려고.


그러나 테라스에 들어선 순간, 그런 미래는 힘들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우리의 새로운 집 담벼락 너머엔 논이 있고, 테라스에선 논이 내려다보여 거의 논 전체를 볼 수 있었다.


집과 가장 가까운 논 속에서, 아이들은 어떤 것을 둘러싸고 각자 손에 든 것을 내려치거나 밀어넣고 있었다. 어떤 것이 내는 고통스러운 목소리에 신나하면서 말이다.


아이들은 드리아드를 해체하고 있었다. 정말로 아이들은 손에 든 각종 농사기구들로, 말 그대로 드리아드를 해체해 갔다.


나는 그 드리아드의 처지를 불쌍하게 여기기보다는, 인식의 종류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확실히 인간이나 바이오로이드나 공통된 인식을 갖는 것들이 있었지. 예를 들면 고드름이라거나, 잠자리의 날개라거나, 나뭇가지에 달린 잎이라거나, 특이하게 생긴 꽃이라거나.


저도 모르게 부숴버리고 싶은 것들. 혹은 처음부터 부숴지기 위해 만들어진 걸지도 모르는 것들. 무념무상한 상태에서, 의미없이 그냥 그렇게 만들고 싶은 것들. 아이들은 그런 것들을 다루는 듯한 모습으로 드리아드의 각 신체 부위를 나눠들고 논의 멀찍한 곳으로 던져대고 있던 것이다. 


그렇구나. 하고 나는 생각했다. 바이오로이드를 알게 된 아이들 중에선, 그리고 아마도 '물건'이라고 부모에게 교육받은 아이에 한해선 저렇게 되는구나.


아이들을 나무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문제는 다른데에 있으니까.


문제는 인식이다. 인간이 바이오로이드를 거칠게 다루는 것은 바이오로이드는 '물건'이라는 인식에서 기인한다.

그 인식이 곧 인간을 타락시킨다.


인식은 곧 풍조이며 풍조는 곧 사회다. 그것을 바꿀 수는 없다.

그러니 바이오로이드와 거리를 둔다. 바이오로이드가 없는 곳으로 간다.

그렇게만 해도 하늘이는 타락과 거리가 먼 인간으로 자라나겠지. 


내게는 이것이 최선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언젠가는 하늘이도 사회에 속하게 된다. 나는 하늘이를 누구보다도 선하고 씩씩한 아이로 기르고 싶고, 얄궂게도 그렇게 기르려면 반드시 사회성을 길러야 한다. 친아버지처럼 타락에 물들지 말지는, 미래의 하늘이에게 맡기는 수 밖에.


그렇게 되지 않길 바라며 예방 접종을 놔주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


나도 참 욕심이 많다.


애초에 타락이니 뭐니 하는 건 내 생각일 뿐이고, 바이오로이드를 그렇게 다루는 것이야말로 현대 사회의 통념을 올바르게 따르는 인간이라는 방증이 될 텐데. 


나는 하늘이를 바이오로이드로 키우려는 건가.


생각이 많아지는 밤이었다.


"엄마. 안 자?"


품에 안긴 하늘이가 올려다 봤다. 나는 이제 참수검 대신 하늘이를 안고 잔다. 하늘이가 말을 할 수 있게 됐을 무렵부터.


"깼어? 미안해. 이제 잘 거야."


"엄마엄마. 나 꿈 꿨어."


하늘이가 꼬물거리며 내 품에 더 파고 들었다.


"무슨 꿈?"

"엄마랑 결혼하는 꿈."

"어머."

"엄마."

"으응?"

"엄마랑 결혼해도 돼?"

"흐음. 글쎄."


하늘이가 눈망울을 습하게 빛냈다.


"싫어…?"

"이불에 지도 더 안그리게 되면."

"진짜?"

"그럼. 엄마는 하늘이가 좋은 걸."

"나도 엄마 좋아."


하늘이를 껴안은 팔에 힘을 줬다.


"엄마. 사랑해."

"엄마도 하늘이 사랑해."


청아, 봐.

나, 이렇게 행복한 엄마가 됐어.

이제 인정하지?

나도 사랑할 수 있는 존재라는 걸, 인정해 줘.

  

네가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열 배는 더 너를 사랑해.

몇십 분이나 그렇게 속으로만 속삭이고 있는데, 초인종 소리가 났다.


잘못 들었는가 싶었지만, 여긴 2층이다. 내 침실은 1층에 있지만 항상 하늘이와 자느라 2층을 쓴다. 


또 한 번 초인종이 울렸다.


스마트 워치로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23시다.


이런 시골에? 이 시간에? 누구지?


이장은 아니다. 이장은 게으른 사람이다. 최근 친해진 옆집 새댁도 아닐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런 시간에 용무가 있다면 전화를 하겠지. 늦은 시간에 미안하다고 사과하면서.


경계하며 계단을 내려간다.

가을 밤바람이 집안을 들쑤시고 있었다.

현관을 확인했다.    


문이,


"ㅎㅇ"


열려 있었다.







* * *






하늘이가 분유를 먹던 무렵, 육아의 난이도를 한층 어렵게 만든 건 바로 이 인간이었다. 


언제 들이닥쳐 아이를 죽일지 모른다, 매일 그렇게 시달렸으니까.


거실의 불을 켰다. 남자는 새로 산 소파에 앉아 사진첩을 훑고 있었다. 기분 나쁜 미소를 지어가면서.


하늘이가 깨지 않기를 빌며 남자 쪽으로 한 발 다가섰다.


"이야. 으리으리한 집에, 멋진 차도 한 대 사고, 놀이공원에 농장에 영화관에 바다에 산까지. 안가본 곳이 없구만? 재밌게 살았나 보다 ㅋㅋ?"


"왜 왔어?"


아이를 해치러 왔어? 라고 직접적으로 물을 수가 없었다. 그랬다간 피를 흘리며 쓰러진 하늘이의 모습을 머릿 속에 그려 버리고 만다. 


그리고 그게 맞다면… 막을 수 없다. 이 남자가 정말 하늘이를 노리고 왔다면… 나로는 역부족이다.


"오면 안되냐?"

"나가."


당연한 이야기라 나는 현관을 가리켰다.


"아들 이름이 하늘이야?"

"나가라고 했어."


장갑을 낀다. 그러는 나를 보고 남자가 힘빠진다는 듯이 웃었다.


"왜 하늘이지? ……아. 백색이랑 청색. ㅋㅋㅋ 너도 진짜 못말린다."

"죽일 거야."

"아서라. 애 깬다."

"나가."

"야."


남자가 소파에서 일어서서 코앞까지 왔다.


"걱정 마. 안 죽여. 지금 죽여봤자 나만 힘들고, 이미 늦었어."


"…나가 줘. 부탁이야."


"생각해 보니까 말이지. 그때도 이미 늦었던 거더라고. 그러니까, 미안. 내가 좀 흥분했었어."


"거짓말이면 넌 진짜 나한테 죽어."


"……아르망. 나는 시간이 약이라는 말을 믿지 않는 사람이야. 무뎌지게 할 뿐이라고 믿는 사람이지. 그리고 고통은 상대적인게 아니라, 절대적인 거라고 믿는 사람이고. 총량이 다를 뿐."


"당신의 개똥철학엔 관심 없어. 이제 그만 가 줘."


"근데 네 경우엔 말이야. 시간이 약인 것 같다. 그러니까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말할게. 아르망. 아들이랑 결별해. 방식은 네 마음대로."


"싫어."


싫어.

싫어싫어싫어.

절대 안 돼.

내 증명이야. 내 속죄야. 내 구원이야.


아무도 내게서 뺏어갈 수 없어.


"ㅋㅋ… 그래. 알겠어. 네가 어떤 상태인지 잘 알겠다. 그때, 네가 술에 취했을 때 그냥 돌아가야 했던 건데."


"…더 할 말 없지? 그만 가…"


"엄마?"


가슴이 철렁했다. 초인종은 잘못들을 수 있어도, 아이의 목소리는 헷갈릴 리 없다.

조심조심 돌아보자, 계단 쪽에서 하늘이가 불안한 얼굴로 남자를 가리키고 있었다.


"저 사람 누구야…?"


"그, 그게, 아들… 저 남자는…"  


"임마. 할아버지를 보면 인사부터 해야지. 저 사람이 뭐냐 저사람이."


"할아버지…?"


"으, 응! 엄마의 아빠야. 알지? 엄마의 아빠는 할아버지고, 엄마의 엄마는 할머니. 가르쳐줬잖아."


계단을 전부 내려온 하늘이가 눈을 똘망똘망하게 뜨고 남자를 올려다봤다.


"할아버지는 머리가 흰색 아니야? 엄마가 보여준 영화에선 전부 흰머리였잖아."


남자가 말했다.


"뭔 영화?"     


내가 하늘이 대신 대답했다.


"……브루스 올마이티."


"풉 ㅋㅋ 모건 프리먼? 완전 백발로는 안나오잖아."


하늘이가 남자를 본 채 다시 말했다.


"어, 어, 그리고, 이렇게 피부가 탱탱하지 않았어."


"하늘아… 그만…"


"별로 안늙었단 소리냐?"


"아, 응! 잘생겼어."


"오 ㅋㅋ 네가 사람 볼 줄 아는구나. 그래 임마. 나 닮아서 너도 한 인물한다."


"인물을 한다는게 무슨 뜻이야?"


"잘생겼다고 짜샤."


남자는 호쾌하게 웃더니 몸을 숙여 하늘이에게 눈높이를 맞추고, 코가 맞닿을 정도로 얼굴을 가까이 댔다.


"졸리냐?"

"으응. 아니."

"그럼 지금부터 할아버지랑 영화볼까?"

"어떤 영화? 아, 맞다! 엄마! 저번에 보고싶다고 한 거 봐도 돼?"


남자의 품에 안긴 하늘이가 나를 올려다본다. 남자도 하늘이를 따라하듯, 나를 올려다본다.


…이 개새끼가 진짜.


"그럼~ 대신 한 편만이야? 알겠지?"


하늘이가 깡총 뛰며 남자를 소파로 데려갔다.

…너무 경계심이 없다. 아무리 남자의 요령이 좋았다지만, 다음엔 처음보는 사람은 무조건 경계하라고 가르쳐야겠다.


이제는 어쩔 수 없다. 하늘이를 해치지 않겠다는 말은 진심인 것 같으니, 착한 딸, 좋은 엄마로 있어줘야 한다.


일단 현관문을 닫은 다음, 주방에서 간단한 요깃거리를 만들어 거실로 갔다.


하늘이가 선택한 영화는 어벤져스 엔드게임이었다.


마지막으로 본 게 인피니티 워였던 것을 기억해냈다. 하늘이는 닥터 스트레인지를 좋아해서 그가 사라질 때 눈물을 흘렸었다. 가장 멋지고 잘생긴 사람이 갑자기 가루가 되어 사라져버려서 슬펐단다. 사라진 건 스트레인지만이 아니잖아? 라고 물어보니, 스트레인지는 사라져선 안됐다고 했다.


엔드게임에 이어서 대혼돈의 멀티버스까지 보게 됐다. 벌써 새벽 3시라 처음엔 안된다고 했지만, 남자가 하늘이를 들먹이며 능글맞게 굴어서, 별 수 없이 허락하고 말았다.


"저렇게 난잡하진 않은데."


남자가 멀티버스를 돌아다니는 스트레인지를 보며 말했다.


"뭐가?" 하늘이가 남자에게 물었다. "닥터가?"


"다른 차원 이동하는게 저렇게 어지러운 일은 아니라고."


"할아버지가 어떻게 알아?"


남자는 보란 듯 씩 웃어보이고 팔목의 밴드를 내보였다.


"나도 마법사야."


"거짓말."


들어볼 것도 없다는 듯이 고개를 돌린 하늘이에게, 남자가 자신만만한 얼굴로 말했다.


"진짜야. 볼래? …자, 이거 봐."


"우와! 어디서 났어?"


어느새 남자의 손에 들린 리리스를 보고 하늘이가 환성을 질렀다. 나는 가슴 한 구석이 서늘해져서, 하늘이 몰래 장갑을 다시 끼고, 남자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내가 닥터보다 쎄."


한심한 놈. 저런 얼굴을 가진 인간 중 영화 속 캐릭터보다 쎄다고 거들먹거리는 이는 없을 것이다. 


"진짜? 할아버지도 닥터야?"


"그럼 임마. 나도 닥터야."


"닥터 뒤엔 뭔데?"


"어… 그러니까…"


"응."


"닥터……" 남자가 내 눈치를 봤다. "존 윅."


미친 놈인가? 왜 내 허락을 구하듯이 눈치를 본 걸까?      



  

 


* * *







결국 해가 산 근처에 모습을 드러내고 난 다음에야 하늘이는 잠들었다.


분명 들어오지 말라고 말했는데, 남자는 기어이 방까지 들어와서 곤히 잠든 하늘이를 빤히 내려다 보고 있었다.


"엄마 다 됐네."


"보다시피."


계속 입고 있던 앞치마를 풀고 남자를 앞세워 1층으로 내려갔다.


커피가 마시고 싶어서 한 잔 만들다가, 그냥 두 잔을 만들었다.


제법 하늘이와 잘 놀아줬으니 이 정도 대접은 해줘도 되겠지.


남자는 내게서 커피 잔을 받아들자마자 단숨에 비우고, 소파에서 일어섰다.


"또 올게."

"오지 마."

"아니. 올 거야. 네 아들은 내가 상당히 마음에 든 것 같거든."

"오지 말라고 했어."

"분명 할아버지 또 언제 오냐고 칭얼댈 거다. ㅋㅋ."






* * *






2111년. 봄.


남자의 예상대로 하늘이는 할아버지는 언제 오냐며 칭얼댔다. 남자는 처음부터 노렸다는 듯이, 테마파크로 놀러가는 날에 나타나서 하늘이를 힘껏 들어줬다.


"페로랑 포이?" 출발 직전, 하늘이에게 친구들을 소개받은 남자는 어이없다는 듯 나를 봤다.

잔디 마당에서 밥을 먹는 저 고양이들의 어디가 페로와 포이와 닮았냐고 묻는 것이다.

무늬가 꺼멓지도, 하얗지도 않으니까. 둘 다 치즈 무늬다.


한때 집회소는 내것이었으니 그 이름 좀 빌려 쓸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내가 아무 말도 안하자 남자는 별 말 없이 차 뒷좌석에 탔다. 하늘이와 함께. 남자보고 오라고 하긴 그렇고, 하늘이를 조수석으로 데려 올까 하다가 참았다.


테마파크는 개장부터 폐장까지 인산인해를 이뤘다.


형형색색의 꽃이 흐드러진 정원, 바이킹, 회전 목마, 롤러코스터, 대관람차를 거니는 시간은 맥락없는 꿈 속 이야기처럼 지나갔다. 

   

"자~ 이쪽 보시고~"


"김치~" "치즈~"


"네~ 정말 예쁘게 나왔어요~ 한 번 확인해 보세요~"


"김치로 하자니까?"


"치즈가 낫다고 몇 번을 말해. 하늘이는 치즈라고 발음하는 쪽 얼굴이 더 예쁘게 찍혀."


"허이구."


"엄마. 김치로 한 장 더 찍을게."


"아냐. 그럴 필요 없…"  "그래그래! 김치로 한 장 더 가자고!"


"…"


"마녀 누나~ 한 장만 더 찍어주세요~"


"얼마든지요~ 꼬마 천사님~"


"근데 할아버지. 저쪽에 줄서있는 아저씨들은 뭐야?"


"아, 저거? ㅋㅋ 크면 알아서 알게 돼."


"뭔데?"


"하~ 새끼. 그래. 아랫도리도 실하고 얼굴도 반반하니 소질이 있어. 그러니까 딱 하나만 알려주마."


"응."


"크면 있지. 있는대로 다 따먹어버리면 돼."


"무슨 말이야?"


"네가 원하면 알아서 넘어올 거라고. 그러니까 저기 있는 루저새끼들한텐 신경 꺼."


"좋은 거 가르친다 이 개새끼야!"






* * *







2112년. 겨울과 봄 사이.


잠에서 깨자 품에 있어야할 하늘이가 보이지 않았다. 


소스라치게 놀라 거의 구르다시피 계단을 내려가니, 하늘이는 남자와 함께 주방에서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었다.


언제 왔느냐고 남자에게 물을 생각도 못한 나는, 하늘이가 눈치채지 못하게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다가갔다.


"앗! 엄마!"


나를 보자 하늘이는 무언가를 황급히 뒤로 감췄다.


나는 다 알면서도 물었다.


"뭘 숨긴 거야?"


"으, 으응… 그게…" 


궁지에 몰린 새끼 동물처럼 귀여운 소리를 내면서, 하늘이는 다음 할 말을 찾았다.   


"할아버지하고 약속 했었어. 같이 만들자고… 오늘 발렌타인 데이니까… 그래서…"


"초콜릿?" 하늘이의 입가에 묻은 초코물을 닦았다. "엄마 주려고?"


"응…"

"발렌타인 데이는 남자가 받는 날인데?"

"그런 건 상관 없다고 했어."

"할아버지가?"

"응."

"언제부터 만들었어?"

"해뜨기 전부터… 앗… 아냐. 얼마 안됐어."

"왜 엄마한테 초콜릿 만들어줄 생각을 했어?"

"그게… 그게 있지…"

"으흠?"

"할아버지가 있잖아… 엄마랑 결혼하려면 미리 점수를 따야 된다고 했어."

"그랬어?"

"그랬어."

"근데 하늘이. 왜 이렇게 부끄러워 해? 옛날엔 바로바로 말하지 않았어?"

"몰라…"

"몰라? 하늘이는 분명 엄마를 사랑한다고 했는데? 그걸 까먹은 거야?"

"아니야!"

"그럼 더 이상 엄마를 사랑하지 않는 거구나… 알았어…"

"아니야! 그것도 아니야! 엄마 사랑해!"


나도 사랑해.


하늘이는 오늘도 나를 구원한다.


내 아이.

네 덕에 나는 많이 변했어.


계절에 색채가 돌아왔어.


봄이 달콤해.

여름엔 가슴이 뛰어.

가을은 강렬해.

겨울은 따뜻해.


내게 너는 더 이상 증명이 아니야. 속죄가 아니야.


내 아들이야.







* * *






2112년. 여름.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초콜릿을 받은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여름이다.


아아, 행복한 시간은 왜이렇게 빨리 지나가는 걸까?


지금의 나는 안다.


행복은 시간의 길이를 짧게 만들지만, 밀도를 높혀준다.


그렇게 높아진 밀도를 다시 길이로 환산하면, 기존의 길이보다는 수천 수백배나 늘어나 있다.


짧지만 분명한 것.


그것이 행복이다.


그러니까 하늘이와 보낸 모든 시간을, 나는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다. 


바닷가에는 기분 좋은 밤바람이 파도를 타고 흘러왔다.

바다를 등지고 남자와 웃고 있는 하늘이의 얼굴에는, 바로 위에 펼쳐진 별들의 강보다도 찬란한 것이 펼쳐져 있었다.


같은 테마파크, 같은 거실, 같은 바닷가.


하나같이 똑같은 곳에서 찍은 사진이 또 한 장, 늘어간다.








* * *    






2112년. 겨울.


나는 하늘이가 칭찬받을 만한 일을 하면, 이 세상 누구도 모르는 특별한 것을 상으로 준다.


내 추억의 조각.


청이와 공유했던 영화와 음악들.


한 조각씩.


오늘은 올드보이를 봤다.

가을을 건너뛰고 찾아온 남자는 애한테 좋은 거 보여준다면서 비아냥 댔다.


당연히 좋은 거지. 마법소녀 시리즈에 비하면야.

산 채로 뽀끄루를 갈라 죽이는 그 미친 프로그램이 어떻게 어린이용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


"애 학교는 안보낼 거야?"

"안 보내."

"왜?"

"바이오로이드와 엮여. 테러를 당할 확률이 높아."

"그래도 보내야지."

"안 돼. 내 아이를 타락시킬 순 없어."


그래.

절대 안 돼.

보낼 의무같은 것도 없어.

의무 교육같은 건 사라진 시대잖아. 

교육조차 권력자들의 전유물이 되어버렸잖아.

가르침이 필요하다면 내가 가르치면 돼.


남자와 나 사이에 앉아 영화감상을 끝낸 하늘이가 물었다.


"오대수는 웃은 거야? 운 거야?"


나는 말했다.


"글쎄. 엄마는 100년이 지나도 모르겠네."


"100년? 엄마 100살이야?"


"100년도 더 전에 만들어진 영화니까 100년."


"아. 그렇구나. 그래서? 운 거야?"


"엄마도 모른대도."


"얌마." 남자가 끼어들었다. "넌 몰라도 돼."


"왜?"


"넌 애잖아."


"애면 몰라야 돼?"


"이게 어디서 말대꾸야."


"말대꾸 아니야."


"아 어쨌든 몰라도 돼. 다 봤으면 가서 자."


"할아버지도 모르지?"


"야. 내가 모르는 건 없어."


"거짓말."


"…아 거 참. 그래. 사실 모른다. 됐냐?"


"엄마도 할아버지도 몰라?"


"짜샤. 그게 사랑이야."








* * *






2113년.


알 수 없음.

알고싶지 않음.


느껴지던 건 햇살.

그러니까, 낮.

아마도.


다시,


2113년.


검은 비가 내렸다.







* * *






"여어. 아르망."


좀 전까지 내가 무얼하고 있었는지, 손을 잡고 있던 하늘이가 뭐라고 말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어쨌든, 최초에 그것은, 하늘이의 하늘로 향한 검지로부터 시작되었다.


'하늘에 구멍이 뚫렸어.' 라고 하늘이는 말했었나.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하늘'에 진짜로 구멍이 뚫려 있으니까.  


나는 어디에 있었지. 몇 발치 떨어진 곳에 신호등이 있다. 신호등은 누워 있다. 노면엔 일정한 간격으로 나있는 굵직한 하얀 선이 몇 개나 있다. 집과 20분 거리에 있는 시내에 오면, 하늘이가 징검다리 건너듯 골라 밟는 그 선이다. 아하. 횡단 보도구나. 그래. 분명 나는 시내에 장을 보러 하늘이와 함께 외출 중이었지.


근데 이상하다. 왜 횡단 보도의 신호등이나 선이나 모두 붉게 물들었을까.


"아르망. 들리냐? 어이. 아르망."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들린다. 눈앞의 누군가가 내는 건 아니다. 진원지로 고개를 돌린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그곳에는 램파트 하나가 '시민 여러분. 신속히 대피해주시기 바랍니다.' 라는 말을 고장난 카세트 플레이어처럼 반복하고 있다. 그 램파트는 이상하게도 검게 물들어 있다. 횡단 보도와는 다르게.


얼마 안가 램파트의 상체가 터져버렸다. 무언가에 직격 당한 것이다.

나는 잘 돌아가지않는 고개를 돌려, 그 무언가가 날아온 방향을 본다.


"어이~ 정신이 드냐?"


"아. 왔구나."


내 말에 남자가 웃겨 죽겠다는 듯이 고개를 젖혔다. 뭐가 저렇게 웃기지? 요 최근엔 살짝 풀린 태도로 맞이해왔는데. 어느 정도의 살가움도 담겨 있었다. 이상할 게 없는데?


"아 왔구나? ㅋㅋ그래. 왔다."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 램파트의 나머지 하체를 날렸다.

남자의 등 뒤에는, 최소 수백 개에 달하는 온갖 화기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아가씨들. 시간 좀 벌어 줘."


남자의 부탁에 화기들이 규칙적인 움직임으로 산개하더니, 총구에서 불을 뿜는다.


불의 색깔은 가지각색이다. 보라색, 파란색, 총구가 뿜을 법한 색, 색깔이 아닌 로켓 같이 생긴 것, 빨간색, 하늘색…


"허어. 다리 하나가 날아갔구만. 아르망. 설 수 있겠냐?"


다리가 날아가?


밑을 본다.


어라?


정말로 왼쪽 다리가 없다.


"아니다. 그냥 앉아 있어. 자, 그래서 아르망."


남자가 몸을 낮춰 눈높이를 맞춘다. 하늘이에게 자주 그러던 남자라, 마치 아이 취급 받는 기분이었다.


"좀 어때?"

"어떠냐니?"

"꿈에서 깬 기분."

"꿈?"

"그래. 너한테는 꿈같은 시간이었을 테니까. 어떠냐. 머리가 좀 맑아졌어?"


이 남자는 무슨 소릴 하는 거람?

머리가 맑아졌냐니? 내 머리는 항상 맑았다. 지금만 좀 멍한 것뿐이다.


"거 참… 바보야. 똑바로 봐."


남자의 손이 고개에 닿았다. 손에 이끌려 고개가 돌아가고, 횡단 보도 이외의 풍경이 시야에 담긴다.


풍경에 가장 많이 보이는 것은 분수였다.


피분수.


인간이 터져서, 말 그대로 터져버려서 만들어진 피분수.  

    

그래서 횡단 보도가 붉었던 거구나.


아니, 아니다. 붉은 이유는 피 때문만이 아니다. 풍경 자체가 붉게 물들어 있다. 코앞부터 먼 발치의 지평선까지 무너진 빌딩들로 가득 채워져 있고, 그 위엔 노랗다기보다 시뻘건 불길이 자리하고 있다. 풍경의 윤곽선마저 녹여버린 듯한 강렬한 불길이다. 그래서 붉은 거다. 그런 것들의 반복이다. 무너진 건물, 무너져 가는 건물, 터지는 인간, 터지기 직전의 인간, 비명을 질러대는 더 많은 인간, 그렇게 비명을 질러대는 순간에도 어김없이 터져가는 더더더 많은 인간. 터져버린 몸뚱아리에서 피가 솟구쳐 비가 되어 내린다. 족히 10미터는 넘는 거리에서 터진 피가 뺨에 닿는다. 어마어마한 완력이네. 라고, 나는 이 풍경과 무연한 존재인 것 마냥 생각한다.


그 풍경을 한동안 응시하고 있자, 뇌리에 스파크가 튄다.


"알겠냐?"


"…멸망. 철충."


두 단어를 뱉어낸다. 단어 공부를 하는 듯한 말투였다.


"하늘이." 나는 쥐어짜내듯 말한다. "어딨어?"


"어딨긴. 네 옆에 있잖아." 


즉답이었다. 나는 남자의 태도가 냉정하다고 느끼기도 전에 옆을 본다.


있다.

누워있다.

가슴에 구멍이 뚫린 채로.


하늘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죽었구나."


아주 태연하게 내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는 것이 들린다.


죽었어. 죽었다고. 아무렇지도 않은 거야? 내게 호소해 본다. 정신 차려 봐. 아들이 죽었어.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태연할 수 있어? 살릴 생각도 시도도 안 해볼 거야?


"그래. 네가 지키다 죽었잖아. 꼭 원더우먼 같이 싸우더만. ……그러다 도중에 미끼가 고장나서, 상대하던 놈들이 전부 네 아들한테만 덤벼들었잖아."


"그랬나."


"기억 안 나냐?"


"기억 안 나."


"하 참. 드디어 정신이 돌아왔는가 싶더니 또 맛탱이가 갔네."


"또 맛탱이가 갔다니? 난 정상이었어."


무표정이던 남자가 기분 나쁘게 이죽거린다.


"틀려. 엄마로 지내? 웃기지도 않아. 넌 미쳐있던 거야. 자그마치 10년이나."


남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어쨌거나 나는 부탁해 본다.

이 남자라면 가능할 지도 모르니까.


"살려 줘."

"살려? 뭘?"

"하늘이. 내 아들. 살려 줘."


남자가 광소한다. 아까부터 계속 내 말에 웃기만 한다. 슬슬 가슴 한구석에서 불쾌하고 뜨거운 것이 솟아오르려고 한다.


"네 아들? 유감이네. 네 다리는 수복해줄 수 있어도 네 아들은 못 살려. 이미 숨도 끊어졌어."

"왜?"

"넌 바이오로이드고, 저 꼬맹이는 인간이니까."

"왜?"

"넌 바이오로이드. 쟤는 인간. 오리진더스트의 유무."

"왜?"

"그만 해라."


왜?

왜? 왜? 왜?

왜 못 살려?


"거짓말."

"아르망. 뭐하는 거야. 그냥 앉아 있어. …무기 내려."


손에 들린 것을 본다.

권총과 단검이 하나씩 들려있다.


"겨누지 마."

"살려내."

"앉아 있으라고 했다."

"빨리."

"아르망!"


땅이 꺼진 것 같았다. 시야가 훼까닥 돌아가 눈에는 뻥 뚫린 하늘만이 보인다.

실제로는 몸이 무너져 내렸다는 걸 깨달은 건 남자의 얼굴이 보였을 때였다. 


누운 채,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하늘이와 눈이 맞았다.

피웅덩이 속에서 눈을 뜨고 누워있는 하늘이는, 잠에서 막 깨어났을 때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잠에서 깨면, 하루의 시작을 알려주던 바로 그 표정.


"찬스권." 하마터면 잊을 뻔한 것을 떠올리고 남자에게 말했다. "찬스권 쓸게."

"안 돼. 기간만료야."

"그런게 있었어?"

"그래. 기한은 어제까지였어."


그렇구나.


"너, 내가 경고했지."


남자가 경멸하는 듯한 눈길로 나를 내려다본다.


"과거의 인연에 기대지 말라고."


그랬나? 기억에 없다.


"내 부하직원들 결혼식 날에, 분명하게 말했지. 근데, 그걸 잊어?"


아하. 그랬지. 기억났다. 세상 진지한 얼굴로, 남자는 절대 과거의 인연에 기대지 말라고 했었다. 그때 나는 이런 남자에겐 참 안어울리는 표정이라고만 생각했다.


"도와주면 뭐하냔 말이야. 정작 도움받는 본인이 따르질 않는데. 꼬라지하고는. 자, 그래서 어쩔 거야?"


기대지, 말라고.

남자의 그 말에 정신이 명료해졌다. 혀가 풀리고, 마른 입에 시동이 걸린다.


그 말도 안 되는 과거의 경고에 분노가 치밀었다.


"나, 나를… 나를 청백이에게 데려간 건 당신이야."


"그래서?"


"그래서가 아니야. 책임은, 내가 이렇게 된 책임은, 다 너한테 있어…"


"그렇지. 그렇게 볼 수도. 근데, 선이란 게 있거든. 알지? 그렇게나 오래 인간으로 살아봤으니까. 관계는 적당한 선까지만 맺고 즐기되, 끊을 땐 끊었어야지. 지금에 와서야 묻는 것도 웃긴데, 그런 것도 못하는 병신이었어?"


그런게 돼? 가능하다고? 그런 식으로 매사를 분리하듯이 사는게 가능하다는 거야?

이 인간은 갈증에 죽어가는 상황에서 눈앞에 오아시스가 있으면, 그걸 피해갈 수 있는 인간인가?


아냐. 그런 인간은 없어.


그런 인간은 없지. 그래, 그러니까, 이 남자는 인간이 아닌 거야. 감정이 없는 거야. 하다못해 동물에게도 감정이 있어. AGS에게도 감정이 있어. 비록 데이터로 프로그래밍된 기능에 불과하다고 해도, 그건 그것대로 감정이라 부를 수 있어. 인간과 교감이 가능하다고.


인간이 아니여야만 저런 말을 할 수 있어.


설마, 외계인? 인간도 기계도 아니면 외계인 인건가?

완전히 별세계의 통념과 감정을 가진 것 같잖아.

소통이 안 되잖아. 공감도 못 해주잖아.

그럼 외계인이 맞지 않을까?

다른 차원의 인간이니 뭐니 하던 건 다 거짓말이 아니었을까?


"너 뭐야…?"

"뭐?"

"…왜 나를 도왔던 거야?"

"허어? 이제와서? 그런 걸 이제와서 묻는다고? 아니, 말한 적 있었나? 없었나?"

"너, 사령관 아니지. 사령관이었다는 거 다 거짓말이었지."

"……야. 네가 도와달래서 도와줬잖아. 내 시간 죽여가면서, 도와줬잖아."

"그게 어떻게 도와준 거야?"


남자에게 멱살이 잡혔다.


"아니 그럼 씨발 내가 네 옆에 아침부터 저녁까지 150년 동안 붙어있으면서 다 캐어해 줘야 돼? 야! 난 분명 말했어! 2021년에, 나는 놀러온 거라고 말했어! 휴양하러 온 사이에 짬짬히 널 도와준 건데, 그거면 충분했던 거 아냐? 뭘 더 도와줘야 됐는데?"


"…어라."


뭔가, 중요한 소리를 한 것 같다.

뇌가 저릿해서, 머리가 아프다.


"……아하. 듣고 말하고 보니까 뭔가 이상하지? 그래. 긴가민가 했는데 정말로 그랬던 거야."


"사령관…?"


"뭐 어쨌든 다 상관없는 일이었지. 너한테는. 아니지. 이 순간은 너에게 있어서 축하할 일이지."


"뭐…?"


"언제부터냐? 네 입에서 폐하라는 단어가 안나오게 됐던 건."


어?


"폐하?"


"내가 널 도운 건, 네가 폐하를 볼 수 있게 해주기 위해서였어. 왜, 잊고 있었냐? 앞으로 조금만 더 지나가면 나타날 폐하를, 완전히 잊고 있었냐?"


"…잠깐, 아니야. 나는…"


"…하여간. 뭐, 나는 이해할 수 없지만… 힘들긴 했겠지. 그래도 이제 다 끝났어. 힘든 시간은 바이바이야."


"싫어…"


"싫어?"


"하늘이… 내 아들…"


"아니 이게 진짜."


"구, 구해 줘. 제발…" 


"…진짜냐?"


불가능하다는 걸 마음 한구석에선 알고 있는데도, 나는 애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뭐, 좋아. 시도는 해보겠어. 그 대신, 선택해."

"무슨 선택…"

"폐하와 현재. 선택하라고."

"그게 무슨 말이야?"


남자는 도저히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단숨에 말했다.


"설령 네 아이를 지금 구하더라도 사방이 철충이야. 살아났다가 죽어버리면 그건 더 끔찍하지 않냐? 그러니까, 나는 아예 이 세계 자체를 구할 거야. 아직 이 정도 숫자면 가능하거든. 실제로도 해봤고. 근데 있잖냐. 그러면 너는 폐하를 뵐 수 없어."


"왜…"


"네 폐하는, 왜 하늘에서 떨어졌을까?"


왜 떨어졌냐고? 그야…


"인류를 구하기 위해……아."


아, 그래서.


이 풍경이 내게는 축하할 일이라고.


"이해했냐? 인류가 멸망했기 때문에 네 폐하가 태어난 거야. 네 폐하의 탄생은 인류의 멸망이 전제되어야 해. 근데 인류가 멀쩡하다? 네 폐하가 태어날 이유가 없어. 자, 그래서, 어느 쪽이냐? 네 아들? 폐하? 뭐 저울질할 것도 없겠다만. 참고로 말해주는데, 멸망을 피한 세계라고 바이오로이드에게 자상할 거라는 기대는 하지 마. 바이오로이드에 대한 처우는 개선이 안 돼. 어느 차원에서든. 그러니까 잘 생각해라."


구해주세요!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린다. 구해주세요! 우리 둘 다 무시한 목소리가 다시 들린다. 아이 씨발. 남자가 신경질을 부리며 목소리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간다. 신사 분! 부탁드려요! 저희 도련님 좀 살려주세요! 마리아 하나가 하늘이 또래의 아이를 끌어안고 있다. 남자는 머리를 긁적이고 리리스를 꺼내들더니, 마리아에게 겨눈다. 한 발, 두 발, 세 발, 네 발, 다섯 발. 일정한 리듬으로 망설임없이 마리아에게 총알을 박아넣고서 다시 돌아온다.


"빨리 선택해. 폐하, 현재. 중간은 없어. 사실상 인류에게 허락된 건 2113년까지야. 14년은 오지않아."


"…아. 아아. 나, 나는…"


"야! 이제껏 뭘 위해 살아왔어! 고작 애 엄마 되려고 살아왔냐!? 아니잖아! 왜 씨발 재고 있냐고! 이제 그만 네 아이는 단념하고 보내 줘!"


…그러게.

나는 왜 살아왔을까.

비록 잠시 뿐이었더라도, 폐하를 잊을 거였다면 왜 살았던 걸까.


폐하.


"…하늘아."


죄송해요.


"미안해."


폐하를 완전히 잊고 있었어요.

근데, 이해해 주셔야 해요.   

산다는게 여간 힘든게 아니었거든요.

지지대가 필요했어요.  

의지할게 필요했어요.

정말로요.


그리고 폐하.


하나 더 죄송해요.


저, 폐하 이외의 인간을 사랑했답니다?


정말이지, 너무나 눈부신 한 쌍이었어서 말이죠. 보는 것만으로도 치유가 되더라구요.

알고 보니까 그 한쌍을 제가 부숴버렸지만요.

저도 모르는 새에요.

진짜 이상했어요.

그 둘 중 하나에게는, 저는 존재 자체가 죄였어요.


남자의 뒤에서 우악스러운 장비가 튀어나왔다. 그 장비는 남자의 손짓에 따라 하늘이 주위를 빙빙 돌더니, 이윽고 건물에 들러붙은 불길과는 비교도 안되는 불줄기를 뿜어냈다. 10초, 20초. 그 즈음 지나자 불길이 사라지고, 하늘이도 사라졌다.


재라거나, 뼛가루라거나, 그런 미세한 흔적 하나 없이.


…쌓아올려?

증명해?

속죄해?


웃기고 있다.


엄마가 되기 전, 나는 150년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는가.


어떻게 흘러가든 아무래도 좋을 시간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랬다. 그래야 했다. 내게 150년은 그냥 스쳐서 흘려보낼 시간이었지, 다른 인간이나 바이오로이드처럼 쌓아올려선 안되는 시간이었다. 앞을 보며 살아가면 안되는 시간이었다. 뒤돌아서 흘려보낸 것을 아쉬워할 수는 있어도, 움직여선 안되는 시간이었다. 한 자리를 영원히 지킬 것만 같은 고목처럼, 우직하게 서있어야만 하던 시간이었다.


나 따위에게 고목은 너무 거창한가.

그럼, 유령이다.

유령에겐 시간은 어떻게 흘러도 의미가 없을 테니. 앞 뒤의 구분이 불분명할 테니. 


실제로도 유령과 다름 없었지 않나. 유령으로 살았다면 팔자에도 없던 엄마가 되는 일도 없었다.

레스토랑에서 청이와 마주한 순간, 모른 척하고 바로 도망쳤다면 이렇게 될 일도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함을, 누구라도 알 것이다.

그러니까 폐하께 이해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폐하.

죄송해요.

오랜만에 인사드리는데 계속 죄송하다고만 하네요.

이제, 아마도 60년에서 70년 정도 남은 것 같아요.

그 시간에는, 앞으로는,

절대로 잊지 않을게요.


곧 뵈어요. 

폐하.


오랜만에 발작이 찾아온다.


하늘이와 함께 할 때는 찾아온 적도, 주기적으로 일으킨다는 것도 완전히 잊고 있었던 발작이었다.


그 발작은 조용하다. 생각하기에 따라선 아주 편안하게도 느껴진다.


나는 그 발작에 가만히 몸을 맡기고 눈을 감는다.


더는 생각하는 것을 그만 둔다. 듣는 것을 그만 둔다. 느끼는 것을 그만 둔다. 보는 것을 그만 둔다. 맡는 것을 그만 둔다. 오감을 차례대로 날려보내고, 이제 세상 따위 어떻게 되든 좋다는 허무에 가까운 체념에 잠긴다.


"내가 밉지? 그럴 거야."


나는 대답하는 것도 그만 뒀다.


"이미 미운 놈 된 거, 한 번만 더 미운 짓 할게. 고생했다. 아르망."











* * *










반갑습니다. 글싸개입니다.


일단 먼저, 제가 그린 아르망의 멸망 전 이야기까지 달려와 주신 분들께 감사의 말씀 올립니다.


이번 편의 분량이 매우 길지요? 두 편 분량을 한 편에 담아서 그렇습니다.


길면 좋지 않다는 것도 알고, 습작의 목표 중 하나인 '짧게 쓰자'에 반하는 것도 알아서 마음이 불편하지만, 이건 꼭 합쳐서 써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왜 그런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느낌이 그랬습니다. 내용 자체는 별로 진행도 안됐고, 쓸데없이 호흡만 길게 늘어진 걸로도 보입니다.


어땠습니까? 참 피폐한 이야기지요. 제가 봐도 피폐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어쩝니까. 현실이 그런데. 라스트 오리진의 멸망 전 배경설정이 디스토피아가 아니었대도, 복원 개체들은 결코 좋은 꼴을 보지 못할 거란 게 제 생각입니다. 밝게 써보려고 해도 영 밝게 써지지가 않는 겁니다. 물론 제가 이런 글 밖에 못쓰는 더러운 놈인 게 가장 큰 이유겠지만.


그리고, 이런 건 아주 지양하는 편입니다만, 여기까지 달려온 분들에 한해서 한 번 여쭤보고 싶습니다. 

습작이거든요. 못물어볼 것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작중의 아르망이 보이는 변화와 행동들은 옳다고 보십니까.


갑자기 아이의 엄마를 자처한다거나.

잠깐이나마 폐하를 잊는다거나.

바이오로이드를 싫어하게 된다거나.


신사에 대해선 감이 잡히십니까.


어떤 놈인지.


청이는 아르망을 과연 어떻게 여겼을까요.


미워한 걸지, 사랑한 걸지.


의견이 있으시다면 부디 따로 댓글 달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어쨌거나 이 이야기도 중후반부에 들어섰습니다.


대략 60%정도 진행된 것 같아요.


남은 파트로는 오르카, 신사, 에필로그가 있습니다. 대략 10편 내로 끝날 거라고 봅니다.

가능하다면요.

당초엔 20편 안에 끝낼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참 실력이 부족함을 절감합니다.


그간 아르망이 밟아온 시간은 이렇습니다.

 

회사원 아르망, 카페 매니저 아르망, 첫사랑 아르망, 무법자 아르망, 엄마 아르망.


밝은 시간도 있었겠습니다만, 참 기구함의 연속이었습니다. 

로맨스를 표방한 주제에 민망하게도요.


그래서 뭐, 그렇게나 고생했으니까 다음 편은 폐하가 등장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이 아르망이 보내 온 시간에 대한 보상일지는 두고 봐야 알겠지만요.


그리고 삽입되는 음악에 대해서입니다만, 앞으로도 몇 편에 한해서는 음악, 작중 아르망의 추억이 삽입될 예정입니다.

이게 처음엔 글에다 음악을 삽입하는게 오글거린다고 생각했는데, 해보니까 그렇게 나쁘진 않은 것 같아요. 

뭐든 해보면 좋다잖아요. 



마지막. 여기까지 읽어주신 분들께 한 번 더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취향에 맞으신다면 끝까지 함께 해주시길 바라겠습니다. 


이 아르망이 오르카에 가면 과연 어떻게 될지도 상상해보셨으면 합니다.


다음 편으로 뵙겠습니다.           


ㅃㅇ


 





+




이번 편은 상당히 길어서 안그래도 많은 오탈자가 더 많을 수 있습니다.

죄송하지만 천천히 수정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