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팬텀의 보고가 올라오지 않자 사령관은 조금씩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분명 리마토르를 ‘신뢰할 수 있다’라고 판단했을 터인데, 다른 이도 아니고 신중한 성격의 팬텀이 반란모의가 있는 것 같다고 보고했으니 그 믿음에 금이 갈 수밖에 없었다.

 

“아르망, 리마토르가 반란 모의를 할 가능성은?”

 

연락을 보내도 답이 돌아오지 않는 팬텀 대신 그는 아르망에게 답을 구했다. 아르망은 몇 초 뒤 바로 입을 열었다.

 

“폐하, 그가 보여준 행동에서 구 인류와는 다르다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그가 폐하의 자리를 빼앗기 위한 반란을 모의할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그래? 그럼 너무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다만.”

 

거의 예지능력에 가깝다는 평을 듣는 아르망의 분석을 들은 사령관은 그녀의 능력을 신뢰하며 걱정을 내려놓으려고 했으나,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 한 마디에 다시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가 오르카호 내부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키우려는 가능성이라고 한다면 배제할 수 없는 수준입니다. 에밀리 양과 네오딤, 하르페이아 양이 그의 편으로 가고 현재 팬텀 양까지 이동의 여지가 있다는 가정 하에서 순수하게 그가 쥐게 될 영향력은 머릿수보다 클 거라고 봅니다.”

 

“...방금 전에 반란 가능성은 없다고 하지 않았나?”

 

“그가 반란을 일으키지는 않을 것으로 사료되어집니다. 하지만 폐하, 그가 만약 폐하와 목표하는 바가 달라질 경우 자신의 영향력 하에 있는 바이오로이드를 선동한다면 오르카호가 둘로 쪼개질 가능성은 존재한다고 봐야합니다.”

 

“아르망, 다시 묻도록 하지. 그게 반란과 다른 점이 뭐야?”

 

“그는 자신이 1인자가 될 야망이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권력의 곁으로 갈수록 위험이 도사린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거죠. 그렇기에 본인이 권력을 쥐는 선택지보다 오르카호에서 자신의 지분을 확장해 폐하의 결정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선택지를 택한 것으로 보입니다.

 

반란과는 다르게 폐하에게는 확실한 거부권이 있습니다. 명목상이든 실목적상이든 확고한 1인자는 폐하이기 때문에 리마토르님을 마음만 먹으면 숙청하실 수도 있습니다.”

 

“흐음...”

 

아르망의 말을 들은 사령관은 고심에 빠졌다. 본인이 권력을 쥐지 않더라도 오르카호 운영에 있어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은, 사령관 자신이 쥐고 있는 절대 권력에 금이 간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는 절대 권력을 깨는데 찬성했다. 바이오로이드의 자유를 보장해야한다는 그의 입장에서, 인간에게 종속되도록 하는 족쇄를 풀어 그녀들이 스스로 절대 권력을 무너뜨린다는 것은 쌍수를 들고 환영해마지 않을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또 다른 인간에 의해 이뤄진다면? 그것도 단 한 명에 의한 것이라면? 

 

그가 추구한 것과는 달리 바이오로이드들은 여전히 인간의 명령권에 매여 있을 것이며, 그녀들이 다양한 의견을 내는 민주주의보다 자신과 다른 인간의 1대1 권력싸움 구도로 흘러갈 것이다.

 

리마토르와의 면담과 수차례의 자문, 감시망을 통해 그가 자신과 생각하는 방향이 일치하며 직접적인 권력욕도 없다고 판단하여 안심했던 사령관이었으나, 리리스를 필두로 컴패니언에서는 그를 제거해야한다는 말이 나오고 신중한 성격의 팬텀한테서까지 반란 모의가 의심된다는 말이 들려오자 자신이 일전에 내린 결론을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르망.”

 

“네, 폐하.”

 

고심 끝에 아르망을 부른 그는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리마토르와 가졌던 만찬으로 인해 오르카호 내부에 찌라시가 돌았지. 여기서 착안하여, 오르카호 전체가 리마토르와 디너쇼를 갖는다면 어떨까?

 

저녁 식사동안 단상 위에서 내가 사회자를 맡고, 다른 인원들은 리마토르와 질의응답을 반복하면서 그의 의중을 다시금 확인함과 동시에 내 지위를 명확히 하는 거야.”

 

“폐하, 그런 대중조작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여러 준비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준비야 얼마든지 할 수 있잖아? 내가 네게 묻는 건 실효성이야.”

 

“폐하께서 스스로의 지위를 확고히 한다는 각본대로만 흘러가면 리마토르님의 영향력이 감소하는데 성공할 것입니다.”

 

“좋아, 그럼 지금부터 준비해야겠어. 

 

콘스탄챠, 들어와봐!”

 

그가 호출벨을 누르고 말하자 옆방에서 대기하고 있던 콘스탄챠가 들어왔다. 사령관은 오늘 저녁에 디너쇼를 열 예정이라며 그녀에게 준비사항의 전달을 부탁했다.

 

“식당에 가서 오늘 저녁에는 디너쇼를 할 예정이니 뷔페 형식으로 준비해달라고 전달해줘. 부족한 인원은 차출해서 쓸 수 있도록 사후 결재식으로 권한을 위임할게.

 

탈론 페더를 불러서 녹화를 중계하고, 모모와 뽀끄루, 샬럿을 불러서 무대 구성을 도와달라고 해줘. 사용될 음악은 뮤즈에게 적당히 골라달라고 하고.”

 

“네, 주인님.”

 

“아, 잠깐만.”

 

콘스탄챠가 그의 명령을 수행하려 밖으로 나가기 전, 사령관은 잠시 그녀를 다시 불러세웠다.

 

“네가 고생하는데 요새 해줄게 많이 없네. 미안.”

 

그렇게 말한 뒤 그는 콘스탄챠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개었다. 비밀의 방에서 나누는 키스처럼 진하지 않고 가벼운 입맞춤이었지만, 콘스탄챠는 볼을 붉게 물들이고 방을 나섰다.

 

“나중에 동침 일정에서 우선 적용을 해둬야겠어.”

 

사령관은 그렇게 중얼거린 뒤 디너쇼를 기다리며 다시 업무로 눈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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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각, 리마토르는 마지막 남은 한 권을 설명하기 전에 그녀들에게 앞에서 설명한 <총균쇠>와 <사피엔스>를 훑어볼 시간을 주었다.

 

“꼼꼼하게 전부 읽는 건 나중에 해도 되니, 지금은 마지막 책을 이해하기 위한 사전작업이라고 생각하고 복습해주세요.”

 

독서가 취미인 하르페이아는 그의 말에도 책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고, 네오딤은 생각보다 어려운 내용에 쩔쩔맸지만 그가 한 단원의 처음과 끝부분만 읽는 식으로 훑어보라고 조언하자 이내 자신만의 흐름을 탄 것처럼 보였다.

 

그 틈을 타서 휴식을 취하던 리마토르는 팬텀에게도 휴식을 권했다. 그러나 앞에서 그가 했던 강의를 천천히 되짚어보느라 골몰한 그녀에게는 이미 그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30분 정도를 보낸 리마토르는 다시 강단에 섰다.

 

“좋아요, 긴 시간동안 고생 많았습니다. 오늘의 마지막 책인 <호모 데우스>를 보도록 하죠.”

 

벌써 4시간이 넘은 강의에 하르페이아와 네오딤이 지친 기색이 보이자 그는 최대한 빨리 간결하면서도 정확하게 전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보드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호모 데우스>는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가 쓴 <사피엔스>의 후속작으로, <사피엔스>가 인류가 진화해온 과정을 살펴봤다면 <호모 데우스>에서는 과학혁명으로 새로운 진화를 이룩한 인류가 목도할 미래상이 어떤지를 짚어봅니다.

 

제목인 ‘호모 데우스 (Homo Deus)’부터 한 번 볼까요? ‘호모(Homo)’는 하르페이아가 앞에서 말해준대로 인간의 학명이며, ‘데우스 (Deus)’는 라틴어로 신을 뜻합니다. 신에 가까운 존재를 가리켜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라고 칭하는 표현을 들어본 적이 있을 건데, 거기 있는 데우스와 같은 말입니다. 즉, 제목을 직역하면 ‘신이 된 인간’이란 거죠.

 

신이란 무엇일까요? 신에 대한 논증을 시작하면 오늘 여러분은 여기서 다음 날 아침을 맞으서야 할 것 같으니 이 부분은 간단히 넘어가도록 합시다. 흔히 신에게는 불멸과 창조의 능력이 있는 걸로 여겨집니다. 모든 것의 시작이자 끝이며,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있는 것이죠.

 

30만 년의 역사 속에서 진화해온 인류는 과학혁명을 통해 스스로를 멸망시킬 수 있는 힘까지 손에 넣었습니다. 창조에 수반되는 파괴의 힘을 쥐게 된 인류는, 신의 영역으로 한 발 더 내딛고 싶었기에 창조의 힘에도 손을 뻗었습니다. 이 부분이 유발 하라리가 <호모 데우스>에서 중점적으로 다룬 부분입니다. 과학혁명 이전까지, 어쩌면 이후에도 인류를 괴롭히던 ‘기아, 역병, 전쟁’을 무릎 꿇린 뒤, 창조의 영역에까지 발을 담가 여지껏 신의 영역이라 여겨지던 ‘불멸, 행복, 신성’의 영역으로 다가갔던 것이죠. 

 

그 속도는 멈추기에는 너무 빠르고, 그 물결은 그 자리에서 견뎌내기에는 너무 거세서 힘으로는 막을 수 없게 되었죠. 유발 하라리는 그 시점에서 인류가 진지하게 ‘무엇을 인간이라고 할 것인지, 어디까지 타협하고 어디까지 나아갈 것인지’의 문제를 종의 차원에서 논의해야 할 상황을 목도했다고 이 책에서 주장했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말한 게 이 책의 본편에 앞서 나오는 프롤로그입니다. 프롤로그에서 본 바와 같이, 인류는 불멸과 신성, 행복을 두고 신의 권좌에 앉을 길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죠. 이제 책 내용을 들여다봅시다. 전작인 <사피엔스>가 총 4개의 주제로 이루어져 있었다면, 이번 작은 3개의 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호모 사피엔스가 세계를 정복하고,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고, 지배력을 잃는다는 거죠.

 

1부부터 봅시다. 여기에서는 ‘인류가 뭐가 특별해서 지구의 정복자가 되었는가?’라는 주제를 철학과 사회과학, 생명과학과 같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분석하고 비판합니다. <사피엔스>의 인지혁명 부분과 상당히 겹치니 그 부분을 다시 보고 오는 게 읽기 편할 테죠. 제가 설명한 책들을 한 번 훑어보라고 한 이유였습니다.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무언가’ 에 대한 논의는 아주 오래전부터 지속되어왔습니다. 인간을 제외한 동물들이 만물의 영장에 오르지 못한 이유, 그것은 대체 어떤 차이에서 기인한 걸까요? 여러분이 어떻게 생각하실지는 모르겠으나, 구 인류는 꽤 많은 예측을 내놓았습니다.

 

인간만이 의식을 갖고 있어서 그렇다, 인간만이 감정 및 고등한 생각을 할 수 있어서 그렇다, 인간만이 이성을 갖고 있어서 그렇다...

 

유발 하라리는 이 모든 주장을 잘못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인류가 가지고 있었던 특성은 조직적으로 협력하는 능력, 다시 말해 인지혁명이라고 주장했죠. 어떤 의제가 설정되면 그것을 공동의 목적으로 삼아 머리를 맞대면서 무리를 꾸리고, 사회를 건설했다는 겁니다. 늑대나 사자처럼 무리 생활을 하는 동물과 유사한 지점이지만 차이점이 있다면 인간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믿었다는 것이죠.

 

이후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로 ‘현 세계의 관념’에 대한 것이죠. 십자군이나 다에시처럼 종교를 내걸고 벌어진 군벌의 준동이 현 시점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죠. 굳이 종교를 이유로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싶을 정도니까요. 하지만 그걸 믿었던 이들은 ‘내가 종교를 위해 죽으면 천국으로 가는 문이 열릴 거다’라는 확고한 정신적 기반이 있었기에 그런 짓을 할 수 있었죠.

 

종교가 중시되었던 중세 시대 이후, 이성이 태동한 근대를 지나 1945년 이후부터는 자유와 평화가 중시되었습니다. 그 시기에 한 청년이 난민을 보호하러 국제기구에 가입하고 시리아로 가려 한다면 모두들 그를 영웅 취급했죠. 이는 인류가 멸망한 현 시점에서도 유효할 것입니다. 그러나 중세 시대에 난민을 구하러 분쟁 현장으로 간다고 하면 ‘신의 뜻에 왜 거스르려는 거냐?’라는 반문을 들으며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았을 겁니다.

 

이와 같이 미래에는 현재 중시되는 자유, 평등을 지금 우리가 종교전쟁을 바라보듯이 대할 수도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앞서 말한 것처럼, 인지혁명을 통해 사람들이 믿게 된 가치가 바뀌게 되어서입니다. 이렇게 실재하지는 않지만 많은 사람들이 믿으면 실재처럼 보이는 것을 ‘상호 주관적 지표’라고 합니다. 


많은 이들이 객관적 지표와 주관적 지표, 이 2가지만 존재한다고 착각해서 이분법적인 발상을 갖게 되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로는 객관적 지표가 주관적 지표에 영향을 받기도 하고 그 반대 또한 성립한다는 것이죠. 이러한 상호주관적 지표는 인간에게만 존재한다는 점이 인지혁명으로 얻은, 다른 동물들과 구분되는 가장 큰 가치입니다.

 

2부에서는 이런 상호주관적 지표로 인해 역사가 바뀐 사례를 다룹니다. 유발 하라리는 대표적인 상호주관적 지표로 ‘문자’를 꼽았는데요, 문자의 등장으로 사람들은 실재하는 존재라도 문자로 표현되는 서류상에 없으면 믿지 않는 등 상호주관적 지표가 실재에 영향을 미치는 모습을 잘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증명하는 사례 한두 개만 볼까요? 첫 번째로 중국의 마오쩌둥 시기에 진행된 대약진 운동이 있습니다. 대약진 운동이 중국의 기초농업 기반을 깡그리 박살냈는데도 상부로 보고할 때는 0을 추가했고, 그 결과 서류상으로는 그해 중국의 쌀 생산량이 목표치의 150%였다고 합니다. 이를 믿은 지도부는 쌀이 충분하다고 생각하여 중국 안의 쌀을 전부 수출했고, 결국 사상 최악의 기아가 벌어졌죠.

 

두 번째 사례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가 벌인 유대인 학살을 막고자 했던 포르투갈 외교관 아르스티데스 데 소사 멘데스입니다. 난민을 수용할 마음이 없었던 포르투갈 정부가 유대인에게 비자를 발급하지 말라고 명령했음에도, 그와 그의 팀원들은 갖고 있던 고무도장으로 24시간씩 무수면 노동이라는 강행군 끝에 홀로코스트에서 무려 3만 명의 유대인을 구해내는데 성공했습니다.

 

두 사례 모두 실재하지 않으나, 사람들의 공통적인 믿음을 통해 실효성을 얻은 ‘문자’라는 상호주관적 지표가 어떻게 우리의 인식에 영향을 미치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이런 상호주관적 지표는 문자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유발 하라리는 또 다른 사례로 ‘종교’를 꼽죠. 그는 종교는 과학에게 윤리적 명분을, 과학은 종교에게 실증적인 힘을 준다고 말하면서 종교와 과학은 서로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라고 합니다. 어찌 보면 신앙과 실증이 상충할 것 같으나, 코헤이 교단의 존재를 생각하면 종교와 과학의 관계가 바로 납득이 될 겁니다.

 

여기서 다시 중요한 개념이 하나 등장합니다. 상호주관적 지표인 종교를 통해 인류는 세상이 돌아가는 모습에 나름대로의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인본주의 사상이죠. 인간의 존재가 가장 중요한 기반에 있어야 한다는 사상은 자유주의적 인본주의, 사회주의적 인본주의, 진화론적 인본주의로 구분됩니다.

 

이렇게 말하면 어려워보이는데 간단히 말해서 각각 자유주의, 사회주의, 원론적인 나치즘입니다. 현 시점에서 보면 나치즘이 주장한 우생학은 맛이 가도 단단히 간 사상처럼 보이죠. 약육강식에서 벗어난 것이 인류 진화의 산물인데, 그걸 다시 도입하려고 하니까요. 하지만, 유발 하라리는 원론적 나치즘인 진화론적 인본주의를 단순히 정신 나간 사상으로 봐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저 3개의 사상이 역사 속에서 지위를 교체해가며 인류의 진화 과정에 나타난 만큼 모두 생각해볼 가치가 있으며, 때문에 뭐가 옳고 뭐가 그르냐는 따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현재로서는 저 중 자유주의적 인본주의를 반박할 만큼 타당한 사상이 아직 없기 때문에 우리가 자유주의를 가장 중요한 가치로 보는 것이라는 말도 덧붙이죠.

 

대망의 3부에서 유발 하라리는 자유의지 혹은 인본주의와 개인주의의 몰락에 대해 많은 페이지를 할애합니다. 인간이 진화론적 인본주의에 따라 자연선택에 의해 진화하는 유기체라면 인류가 가져온 자유주의적 인본주의는 자연선택에 저항하는 걸림돌이 될 것입니다. 반대로 뇌를 조작하여 인간의 의지조차 조작 가능한 자유를 갖게 되는 미래에, 우리가 생각하는 인간성이란 지금과 굉장히 달라질 수 있음도 지적하죠.

 

이것이 바로 현재 바이오로이드가 걸려든 질문입니다. 자유주의적 인본주의에 의하여 인간이 새로운 인간을 창조할 자유를 갖게 된다면, 창조되는 인간의 사고 스펙트럼을 조정할 자유를 따라 탄생한 피조물은 과연 자유로운 존재일까요?

 

유발 하라리는 이렇게 과학혁명으로 발달한 기술과 자유주의적 인본주의를 결합한 기술 인본주의가 마음이 결여되었다는 중대한 흠결을 갖고 있다고 지적하며, 기술 인본주의가 무너질 수밖에 없다고 주장합니다. 과연 이 마음이란 것이 기술로 구현할 수 없는, 완전한 자유를 보장받는 존재일까요? 

 

이 책은 앞으로 기술 인본주의가 퍼져나감에 따라 모든 것을 데이터를 기준으로 처리하는 사회가 확대되어, 데이터가 하나의 진리로써 신봉되는 ‘데이터교’가 성립한 세계가 될 거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데이터가 돌아가는 알고리즘 속 하나의 톱니바퀴에 지나지 않게 되죠.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 아닌가요? 제가 보기에는 멸망 이전 바이오로이드들의 삶으로 들립니다만.”

 

여기까지 말한 리마토르는 슬쩍 곁눈질로 그녀들의 반응을 보았다. 앞의 강의까지는 그래도 밝은 모습으로 따라오던 하르페이아와 네오딤 모두 미간을 찌푸리며 잔뜩 고민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그는 이야기를 마저 매듭지었다.

 

“유발 하라리는 3가지 질문을 던지며 책을 마무리합니다.

 

첫째, 유기체는 단지 알고리즘이고, 생명은 실제로 데이터 처리 과정에 불과한가?

 

둘째, 지능과 의식 중에 무엇이 더 가치 있을까?

 

셋째, 의식은 없지만 지능이 매우 높은 알고리즘이 우리보다 우리 자신을 더 잘 알게 되면 사회, 정치, 일상에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이 책은 바이오로이드도, AGS도 탄생하기 한참 전인 2017년에 쓰인 책이지만, 제가 보기에는 현재 저희가 탐구하는 질문을 아주 잘 찌른 것으로 보이는군요.

 

앞선 <총균쇠>에서는 인간의 나약함을, <사피엔스>에서는 연대와 탐구를 인간의 본성으로 짚었죠. 그럼 <호모 데우스>에서는 어떤 것을 인간 본성으로 볼 수 있을까요?”

 

책을 덮은 리마토르가 그녀들에게 질문을 던졌지만, 하르페이아는 고민의 답이 나오지 않는다는 식으로 끙끙대고 있었고 눈을 감고 고민에 잠긴 네오딤은 무의식적으로 주변의 펜을 허공에 둥둥 띄우고 있었다.

 

그는 아무래도 너무 어려운 질문을 던졌다는 생각에 무슨 예시를 들어야 그녀들이 이해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한 권의 책을 떠올렸다.

 

“아이작 아시모프라는 SF 작가의 작품 중에 <200년을 산 남자(Bicentennial man)>이란 소설이 있습니다. 가정용 로봇이 자아를 갖게 되어 가정 구성원들과 정서적 상호작용을 하고, 스스로 인간이 되고자 신체를 인공장기로 대체하다가 인간과 사랑에 빠져 결혼하고자 하죠.

 

세계 의회에서 영생하는 인간은 존재할 수 없다고 하자, 불로불사의 로봇인 삶을 포기하고 스스로의 자유의지로 인간으로서의 죽음을 결정하여 200년의 삶을 마감하는 장면은 <호모 데우스>와 같은 질문을 던져줍니다.

 

기술을 통해 인간이 사피엔스라는 종을 뛰어넘은 새로운 존재가 되고, 스스로의 힘으로 창조한 존재가 인간과 생활하며, 인간의 도덕성을 교육받고, 인간의 사회기준을 적용받는다면 과연 인간이라 부를 수 있는가?

 

인간의 삶이 데이터로 이뤄진 알고리즘의 일부냐, 지능과 의식 중 무엇이 더 중요하냐, 지적 능력이 매우 우수한 알고리즘이 인간을 초월해 인간을 이해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가 전부 저 질문의 초석 위에 놓여있는 것입니다.

 

과연, 인간이란 존재를 어디까지 정의해야 하는가?

 

여러분께서 저 질문을 어떻게 생각하실지는 모르겠으나... 저는 바이오로이드 역시 인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유의지에 따라 스스로의 삶을 개척하니까요.”

 

그가 말을 마쳤음에도 여전히 그녀들은 고민에 빠져 답을 말하지 못하고 있었다. 리마토르는 고민하게 냅두면 분명 사령관이 자신을 문책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고민하는 그녀들이 기특했으나 답을 객관식으로 주기로 했다.

 

“자자, 이렇게 하르페이아와 네오딤이 제게 질문했던 처음 질문으로 돌아왔네요. 인간이란 과연 무엇인가.

 

여러분이 고민해서 내리는 답이 가장 값지고, 고민하시는 모습이 기특하지만 우선 제가 생각하는 인간의 조건을 말씀드려야겠군요.

 

저는 인간과 바이오로이드의 차이가 단순히 골격과 신경망 구성의 차이라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사고하는 바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유발 하라리가 지적한 ‘마음’에 대해서도 감정의 존재로 충분히 증명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러니 제 입장에서 인간으로서의 사고와 마음만 가지고 있다면, 모두 인간으로 인정될 수 있는 존재라고 봅니다.”

 

그가 그렇게 말하자 하르페이아는 조금 문제가 풀린 것 같다는 미소를 지으며 미간을 폈다. 하지만 네오딤은 여전히 걸리는 게 있다는 표정으로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질문 있어. AGS에게도 마음이 있을까?”

 

“글쎄요, 이건 저도 연구를 더 이어가야할 문제입니다. 현재로서는 인간과 바이오로이드는 화학적 작용으로 감정을 느끼나, AGS는 컴퓨터 프로그래밍이니 마음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봅니다.”

 

“....그런가. 알겠어.”

 

그의 답을 들어도 네오딤은 표정이 개운치 않았다. 리마토르는 자신이 말한 답이 앞으로 더 연구가 필요한 분야라고 덧붙였으나, 그녀의 질문을 듣고 나니 AGS도 인간이라 볼 수 있는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AGS가 컴퓨터 프로그래밍으로 감정을 느낀다고 하면 바이오로이드들의 감정은 뭐가 되는 거지? 결국 기술 인본주의에 의해 설계된 존재라는 건 동일하잖아.

 

그럼 바이오로이드들이 AGS처럼 전자두뇌를 갖고 화학적 작용이 아니라 코드 몇 줄로 감정을 느낀다고 하면, 그녀들은 인간이 아닌 건가?

 

아니야, 그렇게 볼 수 없어. 그러면 전자두뇌를 제외한 모든 육체는 동일하고 의식까지 똑같이 복제한 복제인간을 인간이 아니라고 봐야하는 거잖아. 의식이 존재한다면 그건 이미 인간이 아닌가?

 

설계된 지적능력인 AI가 의식까지 재구성할 수 있을까? 기술 발전으로 가능하다고 하면, 의식은 이미 자유의지를 잃어버렸기에 인간으로서의 실격 상태에 빠진 건가? 그러면 세뇌당해 사고 범위를 제한당한 인간과 어떻게 다른 거지? 바이오로이드의 명령권과 다른 점은 뭐야?

 

애시당초... 내가 내린 인간의 정의로는 이 문제를 풀 수 없어. 이 문제에 대해 가장 많이 알고 있었다고 자부하던 나조차도, 결국 인간이 무엇인지 하나도 모르고 있었던 거야.’

 

혼란에 빠져 생각의 갈피를 잡지 못하던 리마토르는 자신과 그녀들이 같은 위치에 서 있음을 다시 실감했다. 그녀들도, 자신도 인간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점에서는 전혀 다르지 않았다.

 

“네오딤, 고마워요. 저도 이 문제를 아주 오랫동안 고민해봐야겠네요.”

 

그의 말을 들은 네오딤은 놀란 눈치로 그를 바라봤다. 어려운 철학 질문에도 척척 답하던 그가 그리 말하니 그녀는 믿기 어려웠다.

 

“리마토르도, 아직 모르는 거야?”

 

그녀가 조심스럽게 묻자 리마토르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말했다.

 

“네. 원래 철학은 모두가 모르는 길을 걷는 거에요. 그 안에서 몇 걸음 더 가냐 마냐의 차이죠.

 

오늘 여러분과 대화하며 인간의 정의에 대해 가르쳐드리려고 했는데 오히려 제가 훌륭한 고민거리를 안고 가네요. 다들 정말 고맙습니다.”

 

“아니야, 우리가 오히려 생각 많이 하게 됐어.”

 

하르페이아가 손을 내저었으나, 리마토르는 그녀들에게 책을 쥐어주면서 말했다.

 

“아뇨, 제 연구의 초석이 될 아주 중요한 질문이에요.

 

이 책들은 가져가셔서 천천히 다시 읽어보세요. 제 작은 선물입니다.

 

여러분께서 고민하는 게 힘들고 어려워도 너무 자책하거나 조급해하지 마세요. 인간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고대 그리스부터 멸망 전쟁 전까지 수천 년 동안 그 누구도 풀어내지 못한 문제니 여러분께서 해결하시는데 오랜 시간을 들이는 게 맞는 겁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네오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오르카호에 합류한 이후로 사령관 외의 인간이 그녀에게 손을 대는 건 처음이었으나, 그녀는 그의 따뜻한 손길을 기분 좋게 받아들였다.

 

“음, 아침 먹고 시작한 강의인데 벌써 오후 3시가 다 되어가네요. 점심 걸러서 배고플 텐데, 제가 살 테니 카페 호라이즌에 들러서 간식이라도 먹고 가요.”

 

그 말에 환하게 웃는 네오딤과 하르페이아를 데리고 리마토르는 대회의실 밖으로 나갔다. 새로운 질문거리에 그만 그는 팬텀이 광학미채를 뒤집어 쓰고 자신을 주시하는 걸 깜빡해버렸으나, 팬텀은 그의 강의를 듣고 인간의 존재를 고민하는 구 인류의 존재에 충격을 받고 생각이 정지한지 오래였기에 다행히 그녀가 그를 암살하려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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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장장 4편에 걸친 하르페이아와 네오딤의 질문 강의가 끝났네. 원래는 두 편으로 쪼개서 올려야하는 분량인데, 내용상 한 편에 몰아줘서 1만자가 좀 넘으니 길 수도 있어. 길고 조잡한 글인데 끝까지 읽어준 모든 이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올린다.


다음 에피소드는 가볍게 갈 예정이야. 마음의 소리 같은 느낌을 참고하려고 노력해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