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슬 긴 겨울의 여정이 끝나가는 지금, 호라이즌 소속의 모두가 웃고 떠드는 모습을 먼 발치에서 바라보는 내 곁에 누군가 다가오며 귓가에 바람을 불어넣었다. 조곤조곤 귓가를 간지럽히는 은은한 습기를 머금은 숨결과 마치 투명한 유리 구슬이 대리석을 구르는 듯한 청아한 목소리. 이것의 주인이라면 딱 한 사람 뿐이지.


"그 살금살금 몰래 다가오는 거 내 심장 건강에 좋지 못하다니까."

"에에~ 난 충분히 소리 냈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야~ 핫팩이야 말로 아리따운 아가씨들이 헐벗은 모습에 헤벌쭉 해서 그런 거 아니야?"


조롱하듯 헤실헤실 웃으면서 받아치는 천아의 모습에 결국 피식 웃으면서 그녀를 곁에 앉도록 손짓했다. 물론 아리따운 아가씨들의 헐벗은 모습이란 무릇 남성으로써 아주 보기 좋은 광경이었다만, 물론 그래서 흐믓하게 바라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내 명예를 위해서 구태여 변명을 해보자면, 그냥 그녀들이 저렇게 웃고 떠들며 행복하게 지내는 모습이 보기 좋았을 뿐이거든."

"네~ 그러시겠죠~"

"너... 믿지 못하는구나."


하기사, 확실히 멀리 보이는 그녀들이 입고 있는 복장이란 메이드의 그것과는 백만 광년 쯤 아득히 떨어진 것 같으니까. 사실 저 복장을 승인하면서도 과연 저것이 메이드 복이 맞기는 한 것일까 스스로도 의문이 들었지만, 그럼에도 눈의 호강을 위해 어느 정도는 내 사심이 들어간 것이 사실이었다.


"그보다 약속 시간에 늦어 놓고 날 타박 하려는 거야?"

"이크! 미안~"


서둘러 말을 돌리며 약속 시간에 다소 늦은 천아를 다그치니 그녀 역시 눈치 좋게 더 이상 그것으로 나를 곤란하게 만들지 않고 서둘러 사과했다.


"그보다 많이 기다렸어? 아이고, 힘들다~ 그래서 뭐 보고 있었어? 역시... 야시시한 옷을 입은 쟤들?"

"야~ 너도 입고 있거든? 뭐, 꼭 아니라고 부정은 하지 않겠다만.. 그냥 저 아이들이 행복해 하는 걸 보고 있었어."


천아는 내 곁에 털썩 주저앉으며 내가 바라보고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향했다. 슬며시 천아의 얼굴을 살피니 그녀 역시 부드럽게 표정이 풀어져 마찬가지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흐응~ 같이 일할 때도 느꼈지만... 확실히, 다들 즐거워 보이네."


먼발치에 떨어진 우리들에게도 확실히 들리는 그녀들의 웃음소리란 보는 이들마저 함께 웃도록 만드는 마력이 담겨 있었다. 사소한 것이지만, 가장 이루기 힘든 내 꿈. 그것은 모두가 웃는 세상을 만드는 것. 이것으로 조금이나마 더 그 꿈에 가깝게 다가선 것일까.


"그래서, 넌 어땠어?"

"응? 나?"

"그래, 너 말이야. 넌 행복했어?"


내 질문에 다소 의외라는 듯 천아는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잠시 망설이는 듯 다시 시선을 돌려 웃고 떠드는 아이들을 바라보다 이윽고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나도 뭐, 싫지는 않아."

"흠.. 애매한 답변이네."


천아는 아직도 다른 아이들에게 마음을 열어주지 못한 것일까. 오랜 시간을 홀로 떠돌며 살아왔다는 그녀가 바로 마음을 열 것이라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유감인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런 내 표정을 잠깐 곁눈질로 보던 천아는 다시 멀리 떨어진 화목한 분위기의 다른 아이들을 바라보며 그녀의 속내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핫팩도 잘 알고 있잖아? 난 아주 오랜 시간을 동료도, 친구도 없지 홀로 지내왔어."

"장화는?"

"걔? 걔는 음.. 친구나 동료이기 보다는 뭐라고 해야 할까.. 그래! 명목 상 같은 부대원 이라는 것 정도?"

"장화가 들으면 서운하겠는데."


확실히 엠프리시스 하운드라는 조직 자체가 끈끈한 연대를 기반으로 한 동료 의식보다는 그저 같은 목적을 두고 만들어진 점조직과 비슷하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으나 과연 당사자의 입에서도 그런 대답이 나오자 가슴 한구석이 콕콕 찔리는 것 같은 불편함이 있었다.


"딱히? 장화 걔도 나랑 똑같이 생각하고 있을 거니까."

"그렇구나."

"풋! 뭐야~ 핫팩? 혹시 내가 쓸쓸할까 신경 써준 거야?"

 

잠시 배를 부여잡고 깔깔 웃던 천아는 이내 뒤로 몸을 뉘우고 어느덧 반짝이는 별들이 아름답게 뿌려진 검은 하늘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아까 싫지 않다고 했던 말.. 그거 진심이야. 오히려 지금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이, 아마 핫팩이 말하는 행복이라는 게 아닐까 싶어."

"그러냐? 그럼 다행이고."


천아가 바라보는 밤하늘을 같이 바라보며 몸을 눕히자 아름다운 별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모두의 미소를 지켜주겠다는 결심을 했을 때도 이렇게 별이 아름다운 밤이었는데...


"그도 그럴게, 이렇게... 끝날 때까지 우리 착한 핫팩... 아니지, 주인님이 기다려 주는 걸?"

"뭐? 겨우 그것 때문에 행복해?"


생각보다 시시한 대답에 김이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내게 있어서도 언제나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그녀들을 웃는 얼굴로 기다리는 것은 행복한 일이었고, 딱히 그것이 그녀들을 행복하게 만들어 준다는 자각은 없었다. 그저 몸에 깊게 스며든 습관과도 같은 일상이었을 뿐.


"핫팩은 말이지 너무 거창하게 생각하는 나쁜 버릇이 있어."

"그런가? 자각하지 못했는데.."

"행복이 별거야? 그냥 서로 웃고 떠들고, 그런 것들이 쌓여나가 추억이 되면 그게 행복이지."

"정말 단순하구나 너는."


천아의 대답은 아주 단순하지만 사실 명쾌하고 뼈가 있는 대답이었다. 사실 깊게 생각할 것 없이 천아가 내게 말한 저것이 정답이리라. 스스로도 그것은 알고 있었지만 언제나 조바심이 나 깊게 생각하고는 했었다.


"사냥개로 살아가다 보면, 깊게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필요 없으니까."

"천아..."


사냥개. 그 한 단어가 이토록 시리게 들릴 수 있을까. 문득 멸망 전 그녀들이 받아왔을 처우와 대접을 생각하게 만드는 말이었다. 나는 그것이 싫었다. 그 무엇이 그녀들을 그저 도구로 만들었을까. 아마 그것은 멸망 전의 인간들이나 알고 있겠지.


"사실 우리들은 인간들에게 있어 도구나 다름 없었어. 자신이 사용하는 도구가 행복하길 바라는 사용자 따위, 있을 리 없잖아?"

"너희들은 도구가 아니야!"


천아의 신랄한 말에 나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지고 말았다. 하지만 높아진 언성에도 불구하고 천아는 그저 웃는 얼굴로 내 얼굴을 살며시 쓰다듬으며 아직 말이 끝나지 않았다는 듯 눈을 마주쳤다.


"그래서 난 핫팩이 좋아."

"뭐?"

"우리들을 그저 도구가 아니라,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해 주니까. 우리들을 동등하게 대해주고, 마음을 나누어 주니까."


그 말을 끝으로 천아가 살며시 내게 입을 맞췄다. 그저 짧고 간단한 입맞춤이지만 그녀의 진심이 전해지는 것 같았다.


"핫팩, 너는 도구에 불과했던 우리들에게 영혼을 불어넣어 준 인간이야."

"내가.. 너희들에게?"

"응. 그래서 난 너를 사랑해. 그래서 너를 따르기로 했고.."

"너는 날 그렇게나 신뢰하는 거니?"


'나도 너희들을 도구로 다루던 그 인간들의 후손인데.'


결국 생각으로만 남길 뿐 두려워서 결코 내뱉지 못한 말. 혹여 그녀들이 나를 증오하게 될까 결코 입 밖으로 내지 못한 그 말을, 천아는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는 듯 다시 밤하늘을 올려보며 짧은 숨결을 내뱉었다.


"하~ 예쁘다."

"그래 예쁘네."

"어? 별똥별이다! 소원 빌어 어서!"


난데없이 지나가는 별똥별을 본 천아가 냉큼 자리에서 일어나며 소원을 빌기 시작했다. 별똥별이 떨어질 때 소원을 빌면 이루어 준다는 것 따위는 그저 속설이나 다름 없었지만, 나 역시 무언가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소원을 빌기 시작했다.


'그녀들이 날 원망하는 일이 없도록 도와줘..'


"핫팩."

"응."

"네 소원은 절대 이루어 질 수 없어."

"뭐..?"


내 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 바라보는 천아의 눈동자가 살며시 곡선을 그리며 웃고 있었다. 그렇게 당황하는 내 품에 천아는 살며시 다가와 안기며 허리에 손을 감고 간신히 들릴 정도로 속삭이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게... 모두들 너를 사랑하고 있는 걸, 미워하고 원망할 녀석들은 없으니까. 그러니까 애초에 성립조차 되지 못하는 소원이지."


짧은 말 한마디에 구원을 받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천아는 살며시 고개를 들어 내게 입을 맞추고 아름답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내 소원은 방금 이루어 졌어."

"네 소원은 뭐였어?"

"정말 정말 소중하고, 사랑하는 핫팩이 이렇게 웃을 수 있기를!"


어느새 환하게 웃고 있는 내 얼굴을 본 천아가 그렇게 대답하며 함께 웃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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