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꿈을 꾸었다. 아주 오래 전의 꿈을.

 

 

‘오빠! 나도 같이 가!’

 

밝은 갈색 장발을 한 그녀가 나를 오빠라고 부르며 달려와 팔짱을 낀다. 그녀가 누군지 기억나지 않지만, 나를 보고 이렇게 환히 웃어주니 기분이 좋아져 나도 그녀에게 미소를 지어줬다.

 

 

한 순간, 세상이 흔들린다.

 

하늘에 열린 검붉은 수십 개의 포탈. 그곳에서 쏟아지는 검은 비에 도시가 아수라장이 된다. 건물은 부서지고, AGS는 도망치는 모든 것을 쏜다.

 

나와 내 옆의 그녀는 어느새 달리고 있었다. 뒤에서 누군가 쫓아오는 것 같지만 뒤돌아볼 새는 없었기에 전속력으로 도망쳤다. 

 

 

달리고 또 달린다.

 

 

도망칠 수 있을 때까지.

 

 

한창 달리고 있는데 발이 돌부리에라도 걸린 건지, 그녀가 균형을 잃고 앞으로 넘어졌다. 괜찮냐고 물어보니 무릎이 까졌다며 그 예쁜 눈에 눈물을 담아 울먹거린다. 

 

한 숟갈의 슬픔을 더 보태는 순간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릴 것 같은 눈물이 그렁거리는 눈을 더 볼 수 없었다. 그녀를 업고 도망칠 수 있는 곳까지 계속 뛰어본다.

 

 

도망치려고 해도 도망칠 수 없었다.

 

 

검은색과 붉은색일 터인데, 이미 수많은 피를 뒤집어써서 그저 갈색으로 보이는 철충은 나와 그녀를 보더니 총구를 들이밀었다. 

 

 

철컥- 

 

차가운 금속음이 들리며 저승행 급행열차표가 끊어지려는 순간, 난 눈을 질끈 감았다. 이내 내 몸이 휘청였고, 난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즉사하지 않은 걸 보니 급소는 피한 것 같다. 하지만 적지 않은 수의 총탄에 맞은 건 분명하니 고통 속에 몸부림치다가 곧 숨이 끊어지겠지. 

 

 

이상하다. 아프지 않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눈을 조심스레 떠보니 내 몸에는 넘어질 때 쓸린 찰과상을 빼면 상처 하나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아니었다. 온 몸에 난 바람구멍에서 피가 흘러내려 옷을 적셨고, 꺼져가는 희미한 생명등(燈)을 조금이라도 밝혀 나를 보려고 했다.

 

 

말이 나오지 않는다. 그저 오열할 뿐이다.

 

 

어째서 나를 살리기 위해 몸을 틀었던 건지, 그 많은 총탄을 맞고도 나를 보고 있는 건지, 꼭 그 방법 밖에는 없었던 건지.

 

 

말을 하고 싶다. 그렇지만 나오지 않는다.

 

 

눈에서 눈물만을 흘리는 나를 보더니 그녀는 힘겹게 떨어지지 않는 입을 떼었다. 그러지 마, 조금이라도 힘을 아껴야지.

 

 

‘괜찮...아... 이걸로... 오빠...한테... 상냥한 사람이... 되었으니까...

 

내게...도... 영....혼....ㅇ......’

 

 

말을 채 끝맺지 못한 채 그만 동공이 풀리고 만다. 기절했을 뿐이라고 생각하며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져 깨우려고 해보지만, 살아있는 자의 온기는 점점 떠나가 식어가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 한참을 울었다. 언제 또 다시 철충이 나를 공격할지 모르는 상황인데도 나는 울 수밖에 없었다. 내게 뚫려 있는 입으로 할 수 있는 건 울부짖는 게 전부였다.

 

 

다시 눈앞이 아찔하더니, 이번에는 군인들이 돌아다니는 연구 시설이 보였다.

 

그 곳에서 나는 하얀 가운을 입고 계속 무언가 글을 썼다. 바이오로이드들과 대화를 나누면서도 글을 썼고, 사람들 앞에서 발표를 한 후에도 글을 썼다. 나는 그 곳에서 무엇을 썼던 걸까.

 

파란 양갈래 머리의 소녀가 한 쪽 눈에 안대를 끼고 나를 불렀다. 사탕을 주었더니 내게 안기며 나를 오빠라고 부른다.

 

 

그러지 마. 또 그럴 수는 없어.

 

 

파란 머리의 안대 소녀가 나를 따라다닌다. 손을 잡고, 품에 안겨, 등에 업혀, 내 뒤를 따르며 계속해서.

 

 

그리고 죽는다. 또 다시 피투성이가 되어, 나를 보며 희미하게 웃으면서.

 

한 번 더 보고만 비슷한 장면, 이번에도 난 그 장면의 끝에서 짐승처럼 슬픔을 토해내며 울부짖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도 죽지 않고,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세상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모두가 행복한 세상이 있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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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리마토르는 무거운 눈꺼풀을 밀어내며 눈을 떴다. 디너쇼에서 무언가 둔탁한 것에 머리를 얻어맞은 후로, 어둠 속을 걸으며 본 드문드문 끊긴 기억에 그는 스스로도 알 수 없는 기억에 혼란을 느꼈다.

 

“이게 나의 기억인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가 찔린 기억의 파편을 뽑아내던 중, 그의 옆에서 엎드린 채 자던 에밀리가 일어나 그를 보고 옆에서 꾸벅꾸벅 졸던 LRL을 깨웠다.

 

“일어나, 리마토르가 일어났어.”

 

“우음...?! 그게 정말이더냐-!”

 

두 꼬마 아가씨들은 피곤했을 터임에도 급히 정신을 차리려고 볼을 서로 친 뒤, 리마토르에게 말을 걸었다.

 

“권속이여, 괜찮느냐?!”

 

“리마토르... 많이, 아파...?”

 

자신을 걱정해주는 아이들의 모습에 리마토르는 면목 없음을 느끼며 억지로 몸을 일으켜 앉혔다.

 

“괜찮아요, 걱정 끼쳐서 미안해요.”

 

“내 곁에 있어줄 거라고 그러지 않았느냐... 왜 자꾸... 이렇게 아픈 것이냐...”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LRL 앞에서 쓰러진 모습을 보인 것 때문에 많이 두려웠는지, LRL은 리마토르의 품에 안겨서 눈물만을 하릴 없이 흘렸다. 안대로 가린 눈 뒤에서도 눈물이 흘러나오는 걸 본 리마토르는 그저 그녀를 꼭 안아주었다.

 

“나도, 안길 거야.”

 

LRL이 그의 품에 안긴 것이 부러웠던 에밀리는 그녀도 리마토르의 품에 뛰어들었다. 머리에 붕대를 감고, 한 팔에 수액을 맞으며 그는 자신에게 볼을 비비적대는 두 아이들을 꼭 안아주었다.

 

그 광경을 본 아스널은 병실 안으로 들어오며 LRL과 에밀리에게 한 소리 했다.

 

“얘들아, 아직 몸이 안 좋을 수 있으니 내려오거라.”

 

“...짐은 조금만 더 이러고 있고 싶다.”

 

“알겠어... 그래도 잠깐만 더 이러면 안 돼?”

 

둘이 리마토르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걸 본 아스널은 리마토르에게 몸 상태도 안 좋은데 괜찮겠냐고 물어봤다. 리마토르가 괜찮다고 하자 그녀는 침대 옆 의자에 앉아 오렌지 주스를 꺼냈다.

 

“내가 잠시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아이들이 무리를 끼친 건 아닌지 걱정되는군.”

 

“아니에요, 오히려 제가 좋았죠. 그보다 여기 계속 계셨던 거에요?”

 

“그대가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자 우리 에밀리가 문병을 가야겠다고 계속 그러더군. 비스트 헌터가 말렸는데도 평소랑 다르게 고집을 부리길래 내가 보호자로 따라왔던 거네.

 

멸망 전 인간들은 문병을 가면 주스를 사 갔다고 하길래 잠시 페어리 시리즈에게 갔다 왔는데, 그 사이 그대가 깨어났군.”

 

“문병까지 와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아, 그럼 LRL은 어떻게 만나셨나요?”

 

“그대의 병실에 도착해보니 이미 목 놓고 울고 있었네. 그대가 쓰러진 걸 본 게 전에 한 번 있다면서, 이번에는 정말 못 일어나는 것이 아닌지 두려워하더군.”

 

LRL이 자신을 그렇게 걱정해주었다는 말에, 리마토르는 자신의 품에 안겨있는 소녀가 자신에게 준 마음을 담아 토닥여주었다.

 

“고마워요, LRL. 에밀리.”

 

“떠나가지 마라... 소중한 누군가가 떠나가는 건 정말 싫다...”

 

“내가 사랑하는 리마토르, 아프면 안 돼.”

 

둘이 있기에는 그의 품이 부족했는지 LRL은 리마토르의 무릎에 앉고, 에밀리는 뒤로 돌아 그의 등을 꼭 안았다. 리마토르는 이 광경이 혹여 오해는 사지 않을까 두려워하며 아스널을 바라봤으나, 아스널은 호탕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하하! 그대는 아주 사랑받으며 살고 있군. 정말이지 부럽네.”

 

“아스널도 사랑받으면서 지내시지 않으신가요? 오르카호에서 인망이 두터우실 것 같으신데요.”

 

그의 말에 아스널은 여전히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어쩐지 쓸쓸함의 커튼이 웃음 위에 드리워졌다.

 

“내가 사랑하는 사령관이 나를 사랑해주기는 하지만, 사령관에게는 이미 많은 여자가 있지 않는가.”

 

“그래도 많이 사랑받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렇기는 하네. 다만, 사령관이 내게 특별한 존재인 것처럼 나도 사령관에게 절대 변하지 않는 확고한 특별함의 대상이었으면 하는 것이지.

 

그이가 나를 더 사랑해줄 방법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녀의 말을 들은 리마토르는 색욕에 찬 평소의 그녀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오르카호의 지휘관들이 쇼타콘이나, 유아 코스프레 같은 독특한 페티쉬가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으나, 그 중에서도 아스널의 색욕은 단연 독보적이었다.

 

오죽하면 아스널이 사령관에게 ‘아침 먹고 떡, 점심 먹고 떡, 창문을 열어보니 성욕의 아침~’이라는 개사본을 들려주는 바람에 나중에 아이들이 찾아와서 ‘아침 먹고 땡, 점심 먹고 땡, 창문을 열어보니~’라는 노래를 배웠다고 불러주니 공포에 부들부들 떨 정도였겠는가.

 

그 강한 성욕 때문에 리마토르는 아스널을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호방한 여장부라고 생각했으나, 이런 이야기를 듣자 그녀에게 씌워진 필터가 벗겨졌다. 그녀 역시도 사랑받고 싶은 한 명의 여성이었다. 단지, 그 방법이 색욕이었을 뿐.

 

리마토르가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해줄까 고민하던 중, LRL이 그를 바라보며 물어봤다.

 

“권속이여, 인간은 죽으면 영혼이 사라지고 빈껍데기만 남는다고 들었다. 짐은 권속이... 빈껍데기만 남을까봐 몹시 두렵다.

 

나 같은 바이오로이드에게도 영혼이 있을까...? 있으면 권속의 영혼과 만날 수 있을 거니까, 죽어도 혼자가 아닐 거야...”

 

깊은 생각을 거쳐서야만 나올 수 있는 질문에 리마토르는 LRL을 단순한 어린이로 생각한 자신의 오판을 고쳤다. 몸은 어릴지언정, 등대에서 홀로 보낸 100년의 시간만큼 그녀의 생각은 바오밥나무보다도 크고 강하게 자라 있었다.

 

리마토르는 두 사람 모두에게 답을 줄 수 있는 내용을 떠올리고는 빙그레 웃으며 LRL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스널과 LRL, 두 분 모두에게 답을 드릴 수 있겠군요. 제 몸 상태가 썩 좋지는 않지만, 간단한 철학 수업을 즉석에서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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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살짝씩 풀기 시작한 리마토르의 과거. 리마토르는 대체 무슨 일을 겪고 오르카호에 합류하게 된 걸까?


그리고 14편 말미에 내가 아스널이 순애보라고 쓴 기억이 나는데, 그 말을 이번 에피소드에서 회수해봤어. 개인적으로는 아스널을 색정마로만 보는 것보다는, 사랑받고 싶은 욕구를 색욕으로 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순애보로 보는 게 더 좋더라.


오늘도 부족한 작품 읽어줘서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