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여기에도 쓸만한 건 아무것도 없네요."


"끄응... 큰일이네, 곧 해가 질텐데..."


사령관과 라비아타는 폐허가 된 도시의 상가를 뒤지고 있었다. 오전 중에 저항군으로부터 떨어져 버렸기에 점심과 저녁도 거른 채로 식량을 찾아보고 있었으나 도통 보이지를 않았다. 수없이 몰려드는 적들로부터 무사히 도망쳐 적이 없는 곳에 도달하긴 했으나 그 댓가로 오르카호와 너무 멀어져버렸다. 통신도 모두 먹통이라 구조신호를 보낼 수도 없었다.


"땅에 AGS의 것으로 보이는 발자국과 바퀴자국이 있어요. 찍힌 지 얼마 안된걸로 보이네요. 최근에 펙스의 군대에 이 일대를 쓸어갔나봐요."


"그럼... 남은 게 없을텐데..."


"상가는 포기하고 민가를 탐색해보기로 해요. 멸망 전 인간님들이 사적으로 숨겨둔 식량이 남아있을지도 몰라요."


라비아타는 인류 멸망 후 저항군을 막 설립했을 당시부터 최전선에서 싸웠을 뿐더러 자원 탐색 임무에도 직접 나간 경력이 꽤 되기에 금방 식량을 찾을 수 있을만한 장소를 제안해낼 수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첫번째로 들어간 집의 지하실에서 음식을 찾긴 했으나 통조림이 터져 이미 먹을 수 없을 정도로 부패한 상태였다. 두번째 집도, 세번째 집도 다 꽝이었으나 열번째로 들어간 집에서 비로소 상태가 온전한 참치캔을 몇 개 구할 수 있었다.

오르카호에선 화폐 대용으로 써도 될 정도로 썩어넘치는 게 참치캔이었는데 여기선 하루이틀이면 바닥날 분량의 참치캔밖에 없다니, 사령관은 현재 처한 상황을 다시금 실감하고선 축 쳐졌다.


"저기 라비아타, 그... 평소에도 이렇게 탐색에서 음식을 찾기가 힘들고 그래?"


"그렇지 않아요. 이 미대륙과는 달리 레모네이드의 손길이 닿지않은 다른 곳은 비교적 사정이 낫거든요."


라비아타가 참치캔들을 어디선가 줏어온 가방 안에 하나하나 집어넣으며 말을 이었다.


"이렇게 직접 식량을 찾다보니 옛날 생각이 나네요. 인간님들이 멸망했을 당시엔 식량을 찾기가 수월했어요. 도심지에 들어가면 미처 소비하지 못하고 남은 식량이 잔뜩 쌓여있었거든요.

하지만 10년 쯤 지나자 도시에 남아있던 식량도 거의 바닥나서 그 때부턴 눈에 불을 키고 탐색했어야 했죠. 유목민처럼 식량이 있을법한 곳을 찾아 저항군을 이끌고 자리를 옮기거나, 아예 저희들이 자체적으로 식량을 생산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꿔보기도... 아, 죄송해요. 제 옛날 이야기 같은 건 궁금하지 않으실텐데."


"아냐, 안그래. 생소한 이야기다 보니 궁금한걸. 평소에 너랑 사적으로 얘기할 기회도 적었고 말이야."


"아... 그, 그런가요?"


"배고픈데 여기서 끼니도 때우고, 좀 쉬도록 하자. 밥 먹으면서 얘기나 할래?"


"네, 주인님도 계속 걷느라 피곤하실텐데 그렇게 하는 게 좋겠어요. 그럼... 제게 뭔가 궁금하신 거라도 있으신가요?"


"음, 내가 발견되기 전에 저항군은 어땠었어? 기록으로 보긴 했어도 당사자 입으로도 한번 듣고싶은데, 괜찮을까?"



사령관과 라비아타, 한 쌍의 남녀가 폐허가 된 집 안에 자리잡아 그동안 각자의 사정으로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었다. 오르카호에 들어간 뒤 항상 수많은 여자들에게 둘러쌓여 살아왔었기에 누구의 난입도, 듣는 귀도, 그리고 쥐도새도 모르게 설치된 카메라도 없는 조용한 공간 속에서의 솔직한 이야기는 그야말로 각별했다고 할 수 있겠다.



*



"아으... 으윽..."


"부사령관, 정신이 듭니까?"


한 도시 폐허, 부사령관은 고통에 찬 신음소리를 내며 힘겹게 눈을 떴다. 주변을 둘러보려 했으나 옆구리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통증에 인상을 쓰며 고개를 밑으로 내리자 자신이 부상을 입은 상태란 걸 깨달았다.


"움직이지 마세요, 말하지도 말고요. 밖에 적이 남아있으니 조용히 있으세요."


목소리가 들리는 쪽을 바라보자 리리스가 한쪽 무릎을 꿇고 자신의 파우치에서 뭔가 꺼내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니 폐허가 된 건물의 안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자, 입에 무세요."


리리스는 손수건을 둘둘 말아 두껍게 만든 뒤 부사령관의 입에 물리고, 그 다음엔 큼지막한 주사기처럼 보이는 걸 꺼내 손에 들었다.


"아플겁니다. 비명 지르는 대신 이 악무는 걸로 참으세요."


말을 마친 리리스는 냅다 부사령관의 상처부위에 주사기를 냅다 꼽았다. 계속 느껴지는 것보다 더 강한 통증에 부사령관은 본능적으로 입에 문 손수건을 세게 깨물었다. 잠시 후 그녀가 주사기를 뽑자 그도 물고있던 손수건을 퉤 뱉었다.


"수복용 나노머신과 진통제를 투여했으니 금방 통증이 완화될겁니다. 몇 분 정도만 쉬면 움직일 수 있을거에요."


그 말대로 통증이 점점 줄어들자 부사령관은 침착함을 되찾아 본격적으로 주변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리디아는 어디있어? 유미는?"


"헤어졌어요. 지금은 저랑 당신밖에..."


"뭣-"


"쉿! 큰 소리 내지 말라니까요!"


부사령관이 자기도 모르게 소리지를뻔 한 걸 리리스가 손바닥으로 그의 입을 막았다.


"부사령관, 당신이 정신을 잃기 전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나나요?"


"그래... 너랑 나, 리디아, 유미 넷이서 한참 도망치고 있었는데... 옆에 떨어진 유탄이... 폭발하고..."


"맞습니다. 그 때의 충격으로 당신은 부상을 입고 기절했어요."


"왜 그 땐 로자 아줄이 작동하지 않았던 거야?"


"다른 둘한테 포탄이 날아올 때마다 일일이 방어 대상을 바꿔야만 했으니 그렇죠. 2인용 방어막으로 4명 전원 지키는 게 쉬운 일인 줄 알아요?"


"...음, 그래서... 내가 기절한 뒤론 어떻게 된건데?"


"당신을 최대한 빨리 안전한 곳으로 옮겨서 치료해야 했습니다. 급한대로 엄폐물을 찾아 응급처치를 하고, 제가 당신만 챙겨서 먼저 빠져나가기로 했죠. 저는 당신들과 속도를 맞줘주지만 않는다면 훨씬 빠르게 이동할 수 있으니까요. 그 둘과는 나중에 합류하기로 한 뒤 저는 당신을 업고 여기까지 뛰어왔습니다.

마침 몸을 숨기기 알맞은 건물을 발견해서 치료하기 위해 당신을 벽에 기대어 앉혔을 때 당신이 눈을 떴습니다."


"니가 아직까지 내 옆에 남아있다는 게 제일 놀라운걸."


"마음같아선 다 때려치우고 당장 오르카호로 달려가고 싶지만, 주인님을 구하기 위해 모든 오르카호의 자매들과 동료들이 노력할테니 저 한명은 잠시 빠져도 되겠죠. 그리고, 구할 사람들이 넘쳐나는 주인님과는 달리 지금 당신을 구할 수 있는 건 저밖에 없는데 제가 어떻게 두고 가겠나요."


"허... 니가 왠일로 날 챙겨주냐?"


"이것도 다 제 주인님을 위해서에요. 임시긴 해도 당신의 경호원인 제가 당신을 죽게 놔두면 당신은 주인님이 당신을 제거하라고 명령했다고 오해할 게 뻔하잖아요. 주인님이 그런 오명을 쓰게 놔둘 수는 없죠.

주인님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마지막으로 받은 명령인 당신을 지킨다는 임무를 보란듯이 완벽히 수행해내겠습니다."


일편단심 주인님바라기인 리리스에서 온갖 계산과 생각을 거친 결과 내린 결론이었다. 저번과는 달리 그녀는 제대로 믿을 수 있는 아군이 됐다.


"고마-"


"감사인사는 오르카호에 돌아가고 나서 해요."


"...무안하게시리. 근데 여긴 어디야?"


"모르죠. 캐나다 서부 어딘가에 있는 폐허가 된 도시, 그것만 압니다. 지금 바깥에선 펙스의 AGS 군대와 피아식별 없이 날뛰고있는 철충이 뒤섞여 싸우고 있는 중이고요."


그 말을 듣고 가만 귀를 귀울여보니 과연 바깥에서 총성과 폭발음이 들렸다.


"그건 그렇고, 오늘따라 철충이 이상하게 행동하네요. 철충끼리 죽고 죽이다니, 이런 광경은 생전 처음봅니다."


"내분이라도 일어난 거겠지."


"그러니까 왜 뜬금없이 내분이 일어났냐는 말입니까, 100년 넘게 잘만 단합하던 놈들인데."


"철의 왕자. 그놈이 철충 측에 합류한 결과겠지. 예전부터 자신이 신세계의 신이 된다는 미친 망상에 사로잡힌 놈이었는데, 순순히 철충한테 고개를 숙일 것 같아? 철충의 우두머리격 되는 무언가랑 철의 왕자가 충돌하면서 내전이 일어난 거일 거야."


"호오... 그건... 꽤 흥미로운 추측이군요."


실상은 그가 옛날에 라오챈에서 본 9지역 떡밥 해석글 봤던 걸 대강 읊었을 뿐이었다. 


"아무튼 그건 지금 우리랑 상관없는 일이야, 돌아갈 궁리나 해야지. 놈들의 경계가 옅어지면 다시 바다쪽으로 가서 오르카호랑 교신을 시도해보..."



그 때 부사령관이 등을 기댄 벽에서 조금 떨어진 위치에 큼지막한 미사일이 떨어져 벽을 부숴버렸다. 리리스가 바로 로자 아줄의 방어막을 쳤으나 불발탄이었는지 미사일이 폭발하진 않았다.


그렇다 한들 콘크리트 벽을 박살낼 정도로 무거운 질량을 가진 쇳덩이다. 만일 리리스가 부사령관을 문에 가까운 벽에 앉히지 않고 건물 안쪽에 앉혀놨으면 방금 미사일에 맞고 그대로 소리없이 죽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정신나간 동네 같으니라고... 눈 먼 포격에 맞아 죽기전에 우선 좀 조용한 곳으로 튀어야겠다."


"그래야 할 것 같군요. 움직일 수 있겠나요?"


"그래, 멀쩡해. 상처도 대충 아물은 거 같네. 이제 움직이자."



*



"이봐, 그거 대체 언제 끝나는 거야?"


"잠시만요... 이제... 됐다...!"


부사령관, 리리스로부터 헤어진 리디아는 주변이 잠잠해지자 리리스가 뛰어간 방향으로 따라가려고 했었지만, 유미가 자신이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며 다른 방향으로 가려하자 혼자 가게 냅뒀다가 객사하기라도 하면 찝찝할 것 같아 마지못해 따라갔다. 

그 둘은 펙스의 감시기록장치가 있는 건물에 들어와서 유미가 저항군 분함대의 추적 기록을 지우는 동안 리디아는 주변을 경계했다. 초 단위로 갱신되는 기록이라 분함대가 오메가의 감시망에서 벗어날 때까지 계속 기록을 지워야먄 했었다, 안그랬다간 잠수할 수 있는 오르카호는 안전하다 쳐도 난민들이 타고있는 배는 그러질 못하니 펙스의 감시 위성이 끝까지 추적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 배가 펙스의 감지 범위에서 벗어나자 둘은 그제야 한 숨 돌릴 수 있었다.


"이걸로... 난민분들은 무사히 도망칠 수 있을 거에요..."


"이제 우리가 문제지. 어떻게든 형님이랑 합류하던가 오르카호랑 합류하던가... 잠깐, 우리 실으러 배나 비행기 오면 그 땐 또 저 감시장치에 걸리는 거 아냐?"


"위성 궤도에서 카메라로 추적하는 거라 잠수함에 타서 도망가면 되긴 해요. 아니면 오메가의 본부에 있는 서버실을 폭파시키던가... 아니, 방금 건 잊어주세요. 저번과 같은 상황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일이니..."


리디아는 문을 살짝 열고 고개를 빼꼼 내밀어 주변을 둘러봤다. 하늘은 어느덧 해가 늬엿늬엿 지며 빨간색으로 물들었고, 땅에는 파괴된 철충의 시체와 펙스 AGS의 잔해가 널부러져 있었다. 여기서 움직이는 건 리디아와 유미 둘 뿐이었다. 안전한 것으로 보이자 둘은 건물 밖으로 나와 어디로 가야할지 생각했다.


"그럼 형님이 갔던 방향이... 어디더라, 제길. 일단 다시 바다로 가볼까?"


"연기..."


"응?"


유미의 중얼거림에 고개를 돌린 리디아는 저 멀리서 시꺼먼 연기가 피어오르는 걸 볼 수 있었다. 공장의 굴뚝에서 나오는 것도 아닌데도 멀리서도 볼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연기, 마치 누군가가 위치를 알리기 위해 만든 구조신호로 보였다.


"형님인가!?"


"글...쎄요. 하긴 통신이 전부 막혔으니 저런 구식 수단을 쓸 수밖에 없겠네요."


"저기로 가보자! 연기가 꺼지기 전에!"


리디아가 연기가 피어오르는 곳을 향해 불나방처럼 뛰어가자 유미도 종종걸음으로 그녀를 뒤따라갔다, 그 연기를 피운 장본인이 자신들이 기대하는 인간이기를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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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폭탄마 합류예정

참 그리고 전편에서 말하는걸 잊었는데 요안나 아일랜드의 일행들도 철충 침공 때문에 오르카호로 복귀함


라붕이 파티



사령관 파티


여기서부터가 본격적인 두 인간의 오르카호 밖에서 살아남는 이야기의 시작

일단 둘 다 스타팅 파트너로 탑티어 캐릭터가 붙었다


1부에선 1화에서 바로 오르카호에서 쫓겨나서 이야기 시작했는데

2부는 부사령관 등극한 라붕이가 또 밖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이유+오르카호가 바로 도우러 오지 못하는 이유를 어떻게든 납득될만하게 만들다보니 분량이 길어졌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