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부사령관, 일어나세요."


"으어...?"


"멍청한 소리 내지말고 빨리 일어나십시오. 철충입니다."


철충, 그 단어를 듣자 눈이 번쩍 뜨였다. 리리스가 닫혀있는 문틈 사이로 바깥을 보고 있었기에 나도 옆에 가서 틈새로 바깥을 살펴봤다.


당장 보이는 건 나이트칙, 스카우트, 팔랑스... 아마 근처의 펙스 소속 AGS가 철충에 감염된 것 같다. 지들끼리 싸우지 않는걸로 봐선 철의 교황이든 왕자든 둘 중 하나의 부대로만 이루어진 거겠지. 예전에 주유소에서 지나가던 나이트칙과 우연히 마주쳤을 때랑은 달리 저놈들은 냉큼 떠나지 않고 주변을 갸웃거리고 있었다.


"수는 어느정도 돼?"


"제가 확인한 것만 해도 10마리는 넘습니다. 아마 당신을 찾고있는 거겠죠, 인간이 오르카호 밖으로 나온 기회는 흔치 않으니까요. 하아... 이런 때일수록 착한 리리스가 주인님 곁에 있어야 하는건데..."


"사령관 걱정도 좋지만 제발 눈 앞에 있는 곤경에 처한 사람도 좀 생각해주지 않을래?"


"당신 생각했더니 더 우울해졌어요."


"아니 이 오레오년이 진짜..."


뭐 리리스는 제쳐두고, 혹시나 철충과 눈이 마주칠까봐 우리 둘 다 문에서 얼굴을 땠다. 딱히 발자국 남기고 온 기억도 없는데 왜 여길 수색하고 있는건지... 이유야 뭐든 간에 작정하고 이 일대를 수색하는 거라면 곧 실내도 뒤져볼거다.


일단 이 폐공장 내부는 수많은 계단과 복층이 있는 복잡한 구조인데다 온갖 뭔지모를 기계가 가득한 만큼 숨을 곳이라면 꽤 많이 있다. 하지만 저놈들이 금방 포기하고 돌아갈지 아예 이 공업 단지를 점령하고 눌러앉을 지 모르는 일, 후자라면 여기 갇혀서 굶어죽을수도 있다.


"리리스, 도망치자. 경계가 옅은 쪽을 찾을 수 있겠어?"


"철충놈들의 뇌파를 감지할수 있으니 문제없습니다. 정문으로 나가는 건 안되겠고, 다른 출입구로 가보죠."


철충은 바이오로이드처럼 인간의 뇌파를 감지하는 능력이 없으니 날 직접 눈으로 보지 않으면 찾을 수 없지만 반대로 여기있는 리리스는 벽 너머로도 뇌파를 감지해 철충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있다.


우리는 들어왔던 정문에서 떨어져 조용히 다른 문을 찾았다, 멀리 갈 것도 없이 공장 반대편에서 뒷문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문 틈새로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굳게 닫혀있었지만 뇌파를 감지할 수 있는 리리스에겐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 문 밖엔 철충 한마리 밖에 없습니다. 이 근처를 갸웃거리고 있는 것 같군요."


"놈이 지나갈 때 까지 기다릴까?"


"머뭇거렸다간 저게 먼저 문을 부수고 들어올지도 모릅니다, 만약 우릴 발견한다면 곧장 다른 철충한테 알릴거고요. 아직 우릴 눈치채지 못했으니 기습할 기회입니다.

나이트칙이나 스카우터 따위는 순식간에 정리할 수 있으니 문을 열자마자 저 철충이 지원군을 부르기 전에 즉사시키겠습니다. 부사령관, 전 양손에 무기를 들어야하니 제가 신호를 주면 당신이 문을 확 열고 옆으로 비켜서세요."


문 뒤에 어떤 철충이 있는건지는 몰라도 수는 확인할 수 있다. 정문에서 봤던 철충은 하급 병사 뿐이었으니 여기 있는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당연하게 여겼다. 자신만만하게 말을 마친 리리스는 쌍권총을 쥐고 문에서 1m 정도 떨어진 곳에 섰다. 나는 리리스의 말이 일리가 있다 여겼고, 그녀의 제안대로 문 옆에 서서 문고리를 붙잡고 그녀의 신호를 기다렸다.


리리스가 팔을 들어 문을 향해 쌍권총을 겨눴다. 진지한 표정으로 타이밍을 재고 있던 그녀는 한쪽 발의 구두 뒷굽을 땅에 붙인 채 들어올리더니 잠시 후 탁 소리를 내며 바닥을 쳤다. 내가 그것을 신호로 받아들이고 문을 벌컥 열자 그 순간 리리스가 문 너머에 있던 철충을 향해 사격을 개시했다.


몇 초 후, 그녀는 사격을 멈췄고, 그녀의 표정엔 승리의 미소가 아닌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뭔가 잘못됐다는 걸 직감한 나는 그녀에게 묻는 대신 열려있는 문 너머로 고개를 내밀자 어떻게 된 건지 파악할 수 있었다.


기습은 성공했지만 그 철충은 죽지 않았다, 오히려 화만 돋궜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철충은 나이트칙도 스카우터도 아니었다.



그 자리에 서있던건 기간테스의 감염체인 저거너트였다.

저거너트는 나를 보자마자 거대한 팔을 휘둘러 내리쳤다. 내가 잡고있던 쇠문과 그 옆의 벽이 박살났으나 리리스가 재빨리 내 뒷덜미를 잡아당겨줘 나까지 쥐포가 되는 꼴은 면할 수 있었다. 리리스가 다시 쌍권총을 마구 갈겼으나 저거너트는 팔의 장갑을 방패삼아 자신의 머리와 몸통을 가렸고, 이번엔 저거너트가 흉부의 개틀링건에서 불을 뿜으며 성큼성큼 걸어오자 리리스는 로자 아줄을 전개해 본인과 나를 지키면서 뒤로 물러나야만 했다.


하다못해 1대1이라면 모를까, 아무리 리리스라 한들 내가 발목을 붙잡고있는 상태에서 저거너트의 방어력을 뚫거나 빈틈을 노리는 데 집중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소란을 눈치챈 다른 철충들도 하나둘 이 폐공장 안으로 쳐들어오기 시작했다.

바깥으로 가는 길은 막혔다, 도망치거나 숨을만한 곳을 찾던 중 딱 좋은 게 내 눈에 들어왔다.


"저기다! 승강기로 뛰어!"


"뭐라고요? 저거 전기 끊겨서 작동 안될텐데요!?"


"일단 뛰기나 해!"


제대로된 엘리베이터가 아닌 공사장에서나 볼법한 철망으로 이루어진 구식 화물용 승강기. 위에는 도르래와 모터가 보였고 승강기 반대쪽엔 무게추가 줄에 매달려 있는 게 보였다. 로자 아줄로 적들의 공격을 막으며 우리 둘 다 승강기 안에 들어오는 데 성공하자 나는 곧장 다음 지시를 내렸다.


"리리스, 저 줄 끊어버려!"


그제야 내 뜻을 알아챈 리리스는 승강기 반대편의 승강줄을 정확히 권총 한 방에 끊어버렸다. 무게추가 떨어지고, 동시에 무게추가 사라진 승강기 또한 땅 밑으로 떨어졌다. 우리 둘은 폐공장의 지하로 도망쳐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지금 당장은 말이다.



*



해가 뜬 뒤, 리디아 일행은 바로 작전을 실행에 옮겼다. 폭파물 창고를 통째로 터뜨려 자신들의 위치를 알린다, 그러기 위해 유미가 말한 창고까지 가는 것 까진 문제없었으나 곧바로 난관에 봉착했다.


창고의 경비가 예상 외로 삼엄했다. 기껏해봐야 경비용 램파트 정도나 있을 줄 알았으나 폴른, 포트리스 등의 블랙 리버제 AGS까지 자리를 지키며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원래는 몰래 안에 들어가 시한폭탄을 설치하고 나와서 연쇄폭발을 노릴 생각이었으나 이 상태로는 창고에 가까이 가지도 못한다.


"이건 좀 힘들겠는데... 유미, 다른 폭파물 창고는 없어?


"가장 가까운 것도 수십 킬로미터 떨어져있어요..."


"씁, 그렇게 멀리 있으면 터뜨려도 형님이 볼 수 있을지... 아니, 본 다 쳐도 멀어서 오지도 못하겠네."


"뭘 궁상떨고 앉아있어? 저길 터뜨리려고 왔잖아! 정면돌파하자고!"


"야임마, 니눈엔 저 많은 수의 AGS가 안보이는 거냐?"


"내 눈엔 끝~내주는 불꽃놀이를 구경할 관객들밖에 안보이는데! 계속 꿈지럭댈거면 내가 먼저 간다!"


"뭐!? 야 기다려! 야! 야이 미친년아!!"


하이에나는 이윽고 바퀴 달린 부츠를 가동시키더니 말릴 새도 없이 총알처럼 튀어나갔다. 양손에 안전핀 뽑힌 수류탄을 하나씩 들고 광소를 터뜨리며 창고에 돌진하는 모습은 용기라기보단 광기에 가까웠다. 있는대로 어그로를 끌더니 아니나 다를까 그녀를 발견한 적 AGS가 경고도 없이 바로 발포했다.

이에 리디아는 오랫동안 잊고있었던 한가지 사실을 깨닫았다. 호드를 통제할 수 있는 건 칸의 카리스마 아니면 인간의 명령 뿐이라는 걸, 그리고 여긴 둘 다 없다는 걸.


"트레저 그 새끼도 그렇고 왜 내 주변엔 이런 놈들밖에 없는거야!!"


하이에나가 땅 위를 지그재그로 달리며 총알세례를 피하는 한편 리디아는 마구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엄폐물을 낀 채 엄호사격을 개시했다. 하이에나와 적들의 거리가 좁혀지자 그녀는 냅다 들고있던 수류탄을 던진 뒤 물러났고, 수류탄은 적들의 코앞에서 폭발했다. 폴른 두어대가 큰 손상을 입고 가동중지됐지만 그 뒤에 있는 포트리스는 흠집만 났을 뿐 멀쩡했다.


그녀는 척탄병이라지만 멀리서 수류탄을 던지는 것보단 본인 안전을 신경쓰지도 않고 근접해서 터뜨리길 좋아하는 성격이었기에 이런 막무가내 돌진을 강행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완전히 돌머리는 아닌 것이 안전핀을 뽑은 뒤 터질 시간을 계산해서 계속 들고있다가 적의 눈앞에서 터질 타이밍에 던지고는 했다.


그러던 중 당장 들고있던 폭탄이 떨어진 하이에나는 보충을 위해 리디아가 있는 엄폐물 뒤로 돌아와서 폭탄이 한가득 담긴 가방을 뒤졌다.


"야 포트리스 저거 못뚫겠는데!? 어떻게 창고에 불씨 하나 안들어가게 해주냐!"


"이제 어쩔거야 이년아, 난 탄창도 별로 안남았는데."


"아직 폭탄 많이 남아있으니 계속 던져봐야지! 내 폭탄이 다 떨어지나 저놈이 지쳐 쓰러지나 한번 해보자고!"



*



"주인님, 잠시만요."


"응?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라비아타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주변에 귀를 기울였다. 사령관의 귀에는 바람소리 외엔 특별한 건 안들렸으나 최고의 신체능력을 지닌 그녀에겐 아니었다. 비록 금란 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오감으로도 멀리서 울려퍼지는 소리를 감지하기엔 충분했다.


"폭발 소리에요... 그런데..."


"또 어디서 철충과 펙스가 싸우고 있는건가? 아님 철충끼리?"


"아뇨, 뭔가 달라요. 소리가 작은 게... 이건 수류탄 소리 같네요."


전장에서 구른 경험이 멸망 전부터 싸워왔던 지휘관들 못지않은 그녀인만큼 폭발음 만으로도 무슨 종류인지 분간해낼 수 있었다.


"수류탄? 포탄이나 미사일 따위가 아니라?"


그리고 수류탄 종류라 함은, AGS가 아니라 그걸 손에 들고 던지는 사람, 바이오로이드가 있다는 뜻이다. 


"네. 폭발 소리가 들리는 간견으로 봐선... 한 명이 계속해서 폭탄을 있는대로 던지는 것 같네요."


어떤 바이오로이드가 혼자서 싸우고 있다. 싸우는 상대가 펙스든 철충이든 간에, 그 자가 야생 바이오로이드든 오르카호에서 온 대원이든 간에 찾으면 아군이 되어줄 것이 분명하다.


사실 가장 큰 이유는, 위험에 처한 사람을 결코 내버려두지 못하는 그의 천성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동안 철충과 펙스를 피해 싸움이 발견되면 최대한 멀리 떨어졌으나 지금만큼은 반대였었다.


"도우러 가자! 라비아타!"


"네, 주인님!"


그들은 폭발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뛰어갔다, 점점 가까워질수록 사령관의 귀에도 폭발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곧이어 펙스 AGS가 여럿 보이기 시작하자 라비아타는 사령관에게 숨어서 기다리고 있으라 한 뒤 왼손에 들고있던 플라즈마 제너레이터를 땅에 내려놓고, 그녀의 대검 트롤스버드를 플라즈마 제너레이터와 합체시켜 검신의 길이를 연장했다. 안그래도 그녀의 키만했던 대검이 이젠 그녀 본인보다 두 배나 길어졌는데도 라비아타에게 있어선 휘두르는 데 문제가 없었다. 


라비아타는 트롤스버드를 양 손에 꽉 쥔 뒤 적 AGS 쪽으로 돌격했다. 적들 또한 라비아타가 뛰어오는 걸 발견하고 포구를 돌려 사격했으나 총알이 닿기 전 그녀가 먼저 엄청난 기세로 도약해서 피함과 동시에 그 거대한 대검을 내리치기 위한 자세를 취했다.



*



하이에나가 전장을 누비고 리디아가 엄호하는 동안 유일한 비무장 인원이었던 유미는 총성과 폭발음에 귀청이 떨어질 것 같아 양쪽 귓구멍에 손가락을 꼽고 쪼그려 앉아있었다. 물론 그래봤자 소리를 완전히 막을 순 없었다.


어느 순간, 그토록 시끄러웠던 총성이 확 줄어들었다. 리디아나 하이에나가 쓰러진 건 아니다. 다만 그녀들 또한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공격을 멈춘 참이었다. 유미가 고개를 슬쩍 돌려보니 자기들을 향해 기관포를 쏴재끼던 폴른과 포트리스가 일제히 하늘 위로 포구를 돌려 발포하고 있었다.


그 다음 그녀가 본 것은, 하늘에서 떨어진 거대한 무언가가 그대로 포트리스에 몸을 부딪혀 박살내버린 장면이었다. 그것은 주변에 남아있는 다른 포트리스 한 대와 여러대의 폴른이 대응하기도 전에 레이저포 같은 것을 쏴 차례대로 처리했다. 


리디아 일행이 멍하니 쳐다보는 사이 창고의 경비 병력이 일소되자 그것은 유유히 그녀들에게 날아왔다. 점점 가까워지자 하이에나가 자동샷건을 겨누며 소리쳤다.


"야, 넌 뭐냐! 적이냐 아군이냐!"


"하이에나, 진정해. 아는 얼굴이야."


리디아가 하이에나의 샷건 위에 손을 얹혀 총구를 내리도록 했다. 사실 리디아도 개인적인 접점은 별로 없었으나 저 커다란 로봇이 누군지는 잘 알고 있었다.


"알바트로스 지휘관이야. 저 분도 오르카호의 일원이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다. 부사령관은 지금 어디있나?"


알바트로스가 안면부에서 푸른 안광을 빛내며 물었다. 그 무미건조한 톤 때문에 알바트로스에겐 그럴 의향이 없다 하더라도 마치 심문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헤어졌어. 지금 블랙 리리스 걔랑 같이 있을걸. 그쪽도 형님 찾고있는 모양인데, 우린 어떻게 알고 찾아온거야?"


"맞아, 아직 폭파물 창고는 터뜨리지 못했는데 말이지! 혹시 수류탄 소리 듣고 날아왔어?"


"본 기체에 내장된 스캐너의 감지 범위 내에 오르카 소속 바이오로이드의 생체신호가 걸렸기에 이곳으로 온 것이다."


"...폭발은 없어도 됐었네. 재미없게스리... 지금이라도 가서 저거 몽땅 터뜨려도 돼? 응?"


"지금은 안돼."


"리디아 자네가 추측한 대로, 나는 사령관과 부사령관을 찾기 위해 미대륙 수색에 나선 상태다. 둘 중 한명이라도 찾으면 직접 데리고 오르카호로 귀환할 예정이었지만 이건 예상하지 못했던 발견이군. 지금쯤 에이다가 내가 너희를 찾았다는 걸 오르카호에 보고했을 것이다. 수송 부대가 올 테니 그들과 함께 오르카호로 귀환하도록. 나는 수색을 속행하겠다."


"난 형님 찾기 전에는 안 가. 계속 수색할거면 나도 끼워줘."


"나도 안 가! 거기 가봤자 인간도 없다는데 뭐하러 가냐!?"


알바트로스는 리디아 일행이라도 먼저 보내려했으나 정작 그녀들 본인이 완강하게 거절했다. 유미는 마음같아선 돌아가고 싶었지만 자기 한 명만을 위해 수송 부대가 온 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기에 반강제로 리디아, 하이에나의 의견에 찬성했다.


"무슨 뜻인지는 알겠지만 연락수단도 없는 낙오병들을 내팽개치고 갈 수는 없다."


"누가 따로 행동하겠대? 목적도 겹치는데 같이 다니면 되지. 형님 찾는 동안은 댁이 우리 태우고 다니면 되겠네."


"내 손에 쥐고 안전하게 옮길 수 있는 건 한 명 뿐이다, 오른팔에 장착된 입자포를 해제한다 해도 두 명. 또한 본 기체는 설계상 탑승에 용이한 형태가 아니-"


"우리가 알아서 붙잡고 있을 테니까 그냥 태우고 날기나 하셔."


리디아의 고집에 벌써 말로 설득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직감한 알바트로스는 호흡 기관이 없음에도 음성 장치를 통해 긴 한숨 소리를 냈다. 이를 동의하겠단 뜻으로 받아들인 리디아와 하이에나는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히죽 웃더니 각각 알바트로스의 양 어깨에 한명씩 올라탔고, 알바트로스는 땅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유미의 허리를 왼손으로 붙잡았다. 크기차이 때문에 그 모습이 마치 바비인형을 쥐고있는 꼴이었기에 퍽 우스웠다. 각자 자신의 몸 위에 자리를 잡자 알바트로스는 천천히 공중에 떠올랐다.



"속도를 조절하기는 하겠지만, 안전장치도 없으니 떨어지지 않도록 꽉 잡고 있어라."


"그래서, 이번엔 어디로 갈 거야? 그 스캐너가 감지한 신호 또 있어?"


"다른 한 명의 신호가 감지됐었다. 자세한 신원은 확인할 수 없었기에 남은 신호가 라비아타 프로토타입의 것인지 블랙 리리스의 것인지는 근접하지 않는 이상 알 수 없다."


"잠깐만요, 앞으로 찾아야 할 건 두명인데 한 명 밖에 없다는 것은..."


"그건 아닐거다. 내 스캐너의 감지 범위 밖에 있을 수도 있고, 지하에 숨어있는 경우엔 감지되지 않기도 한다."



*



"주인님, 무사히 데려왔어요. 아는 얼굴이네요."


라비아타는 펙스 부대를 전멸시킨 뒤 혼자서 폭탄만으로 싸우고 있던 바이오로이드를 데리고 사령관에게 돌아왔다. 사령관은 그녀의 얼굴을 보자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새빨간 단발 머리를 한 여자는 퉁명스럽게 제 나름의 감사 인사를 건넸다.


"안녕. 어쩌다보니 또 도움받아 버렸네, 쳇... 일단 고맙다고는 해둘게."


"자, 장화...? 정말 너야?"


장화, 사령관이 만나본 유일한 엠프레시스 하운드의 부대원이자 몽구스 팀의 리더인 홍련의 자매기.

오르카호가 미 대륙에 오기 전에 태평양 반대편에 있는 일본에서 준비를 갖추는 사이, 오르카호의 부대원들은 장화와 조우했었다. 처음엔 마찰이 있었긴 했으나 결과적으로 아군으로 회유하는 데 성공했었다. 그러나...


"분명 그 때 오르카호에 합류하지 않고 떠났었잖아? 여긴 어떻게 온거야?"


"...그게 그리 궁금해?"


장화가 말하기가 껄끄러운 듯한 반응을 보이자 사령관이 말하기 싫다면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려는 순간 그녀가 다시 말을 이어갔다.


"너희랑 헤어지고 한달 쯤 지난 뒤, 너희 부대원들이 철충한테 쫓겨가며 후퇴하는 걸 봤었어. 그 때... 잘 모르겠어, 그냥... 어쩌다보니 너흴 도와주게 됐더라고. 그리고 배가 떠나려하자 여기서 놓치면 안될 것 같아서 몰래 타게 됐던거야. 그 다음 여기 도착해서 네가 내리자 나도 따라내렸고."


"아, 그 때... 우리 애들이 후퇴할 때 도와준 게 너였구나.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말해야겠네, 고마워."


"...흥."


시니컬하게 대꾸했지만 그녀의 얼굴이 살짝 빨개진 게 싫어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오르카호에 탔었다고? 그건..."


"왜, 밀항한 게 불만이야?"


"아니 그건 아닌데, 오르카호 대원이 아닌 자가 탑승하면 바로 경보가 울렸을텐데, 어떻게 보안을 뚫은거야?"


"보안? 그냥 들여보내주던데, 자동문 아니었어?"


"엥?"


"주인님, 장화는 홍련 씨가 데려왔을 때 손님 신분으로 설정해놨었어요. 그래서 보안 시스템에 걸리지 않고 들어올 수 있었던 거일 거에요."


"아하... 그런거였구나."


"하지만 아직 의문점이 남아있어요. 철충이 작전 기지를 습격했을 때 왜 오르카호로 돌아가지 않았던 건가요?"


"왜냐니, 그야 니가 걱ㅈ... 아니, 아무것도 아냐. 이유따윈 없어."


장화는 말하기 부끄러웠는지 얼버무리려했지만 사령관과 라비아타는 금방 그녀의 속내를 파악할 수 있었다.


"나를 찾고 있었던 거구나... 도와주려고... 그럼 펙스의 AGS와 싸우고 있었던 건..."


"...널 찾을 방법이 없으니 하다못해 널 쫓는 놈들의 수를 줄여보려고 했지. 그러다보니 저 여자가 와준거고."


장화는 사령관을 돕기 위해 행동했었고, 사령관 또한 누군지도 몰랐던 바이오로이드를 돕기 위해 행동했었다. 서로의 선의가 서로를 만나게 해 준 셈이었다.


"장화. 나랑 라비아타는 오르카호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돌아갈 방법을 찾고있는 중이야. 너도 우리와 같이 가지 않을래?"


"안그래도 그러려고 했어. 망해버린 세계를 떠도는 건 익숙하니까 도움이 될 거야. 전에 너네한테 받았던 것도 가져왔고."


"응? 우리가 줬던 거...?"


사령관이 의문을 표하자 장화는 어깨에 걸치고 있던 가방을 땅에 내려놓고 내용물을 보여줬다. 안에는 비상식량, 의약품, 생존키트, 통신기(사용불가), 거기다 권총 형태의 조명탄 발사기까지 있었다. 사령관이 매고있던 참치캔 따위의 식량만 들어있던 가방과는 달리 알찬 구성이었다.


"어머나, 주인님께 도움이 될 물건들이 잔뜩 있네요! 장화와 만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네요."


"뭐야, 나보다 가방의 내용물을 더 반기는거야?"


"그럴리가요. 저 혼자만으로 주인님을 지키기에 벅차던 참이었던지라 장화 당신에게도 기대하고 있답니다."


"...그래, 그럼 됐어."


"모든 통신이 먹통이 된 상태니 이 조명탄은 유용하게 쓸 수 있을지도 몰라. 하늘에 둠 브링어나 스카이 나이츠가 지나갈 때 쓰거나, 아님 바다로 가서 오르카호가 보이면 그 때 쏘도록 하자."


"좋은 생각이에요. 그럼 우선 바다쪽으로 가보죠."


당장의 생존을 위해 정처없이 떠돌기만 했던 사령관과 라비아타는 장화의 합류로 가야할 곳을 정할 수 있었다. 그들은 다시 무기와 가방을 챙겨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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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적택시/폭탄마 합류 성공


처음에 일본에서 헤어졌다던 장화가 대체 뭔수로 스발바르 제도까지 온거지 했는데 어디서 질풍노도 이벤트 후에 오르카호에 탔다는 말을 듣고 여기서 등장시켰다

참고로 천아는 장화랑 같이 밀항하긴 했는데 거기서 나오지않고 오르카호에 남아있어서 출현예정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