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탐정 뽀끄루와 봉봉 대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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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령관의 도주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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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유령들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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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장! 오르카 유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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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 플레이어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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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해주지 않으시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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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이 아닌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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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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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릭캐릭 체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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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늘 이렇게 서류에 파묻혀 사는 거야, 아니면 이번만 바쁜 거야?]


  책상 위로 드높게 쌓인 서류의 벽 너머로 조금 가벼운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령관이 고개를 들어 서류 너머를 바라보자 소파에 앉아 장난스레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네는 페레그리누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큼직한 덩치로 소파에 앉아있으니 소파의 비명이 들리는 듯하다.


  "늘 이렇게 바쁘지는 않지만, 바쁠 때는 늘 이렇지."


  사령관이 다시 서류로 고개를 떨구며 무덤덤하게 말했다. 붉게 충혈된 눈, 흐트러진 머리, 메마른 피부, 갈라진 목소리. 눈 밑으로 짙게 드리운 다크 서클은 그 유미가 귀여워 보일 정도였다.


  사령관의 말에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던 페레그리누스가 말했다.


  [혹시 불능인가?]


  "...뭐?"


  느닷없는 페레그리누스의 질문에 사령관이 황당하다는 듯 되물었다. 페레그리누스가 사령관을 향해 진지하지만 조금은 장난기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멸망 전 세상에는 중년의 남성이 워커홀릭에 빠지는 경우가 많았다고 하지. 집안에서 천대받는 것과는 달리 직장에서는 나름 높은 지위에 오른 사람으로서 주위의 인정을 받고는 했으니까. 중년의 남성이 집안에서 천대받았던 대표적인 이유는 발기부전 등의 이유로 아내와의 원활한 성생활이 불가능해져서...]


  만년필이 서류를 날카롭게 긁어내리는 소리가 페레그리누스의 말을 끊었다.


  “나는 중년도, 불능도 아니야. 워커홀릭은 더욱 아니고.”


  쏘아붙이는 사령관의 말에 페레그리누스가 경악하며 말했다.


  [그런 이유도 없는데 이렇게 일에 미쳐 산다고? 혀를 내두르고 싶어지는데.]


  페레그리누스의 말에 사령관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대꾸했다.


  "내두를 혀도 없는 주제에."


  [이런. 아픈 곳을 찌르는데.]


  가시 돋친 사령관의 말에 페레그리누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의자를 끌고 와 사령관의 옆에 앉으려 하자 사령관이 슬쩍 페레그리누스를 바라보았다.


  “그 덩치를 하고 의자에 앉으면 그 의자가 퍽이나 멀쩡하겠다.”


  [고작 3t도 못 버티는 게 의자냐?] 


  “저 소파가 이상하게 튼튼한 거라고는 생각 안 하냐? 키도 멀대같이 커서 허리 안 숙이면 내 방에 들어오지도 못하면서.”


  사령관의 말에 툴툴거리며 그의 옆에 털썩 주저앉은 페레그리누스가 책상 위에 놓인 종이 더미를 가리켰다.


  [이 종이, 쓰는 건가?]


  페레그리누스가 가리키는 종이를 흘긋 바라본 사령관이 고개를 내젓고 다시 서류에 집중했다. 종이 몇 장을 집어든 페레그리누스가 무언가를 접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꽤 그럴듯한 새를 만들어냈다. 순식간에 종이 새 몇 마리를 만들어낸 페레그리누스가 탑을 쌓듯 신중히 새를 쌓아올리기 시작했다.


  페레그리누스가 여덟 마리째를 쌓으려던 그때 오르카 호가 뒤흔들렸다. 무미건조한 서류들 사이에서 드높은 존재감을 뽐내던 새의 탑이 흔들림을 이기지 못하고 한순간에 무너졌다. 페레그리누스가 슬픔 가득한 눈으로 책상 위에 널브러진 새들을 내려보았다. 그 모습을 본 사령관이 무언가 한마디 내뱉으려다 한숨을 내쉬고 다시 서류에 집중했다.


  "오르카 호가 흔들리다니 별일이군."


  [그러고 보니 슬슬 해저화산에 가까워진다 하더군. 이틀 뒤면 해저화산 위에 정박할 거니 조금 더워질 수 있다고 하던데.]


  "아, 벌써 그렇게 됐나."


  닥터의 연구 때문에 해저화산 근처에 머문다고 했었지. 한참 후의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책상 위의 종이 새들을 적당히 정리한 페레그리누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딘가로 향한 페레그리누스가 무언가와 한참을 씨름하더니 사령관에게 말했다.


  [네 얼마 안 되는 단점 중 하나는 일에 집중하기 시작하면 주위를 못 본다는 거야. 내가 들어오는지도 몰랐지?]


  "내 직무에 충실하다고 말해주지 않으련?"


  [그리고 성격이 날카로워진다는 거지. 네가 이럴 때마다 바이오로이드들이 겁먹어서 사령관실에 못 들어오잖아.]


  페레그리누스의 말에 반박하려던 사령관이 말을 삼켰다. 확실히 최근에는 아스널도 오지 않는다. 배려해주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설마 그런 이유였다니.


  "그건... 반성해야겠군."


  사령관의 말에 페레그리누스가 빙글빙글 웃었다. 서류를 정리하는 사령관의 옆에 찻잔이 불쑥 들이밀어 졌다. 사령관이 고개를 들어 홍차를 건넨 손의 주인을 바라보자 페레그리누스가 웃음기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홍차를 만들어 봤지. 평가 부탁해. 아쉽게도 나는 혀가 없어서 마시지 못하거든.]


  "닥터에게 부탁해서 혀라도 달아줘야겠군."


  [이왕이면 특등품으로 부탁하지.]


  그 큼지막한 손으로 용케도 홍차를 탔군. 사령관의 툴툴거림에 페레그리누스가 말없이 찻잔을 내밀었다. 성화에 이기지 못하고 홍차를 받아 한 모금 마신 사령관이 의외라는 듯 눈썹을 치켜들었다. 평가를 요구하는 페레그리누스에게 찻잔을 돌려주며 사령관이 말했다.


  "적어도 뽀끄루가 타주는 것보다는 낫네."


  [뭐야 그 미묘한 평가는. 좋다는 거야 나쁘다는 거야?]


  이해할 수 있는 평가를 해달라는 페레그리누스의 불평을 한 귀로 흘려들은 사령관이 다시 서류를 읽기 시작했다. 페레그리누스가 한숨을 내쉬며 찻잔과 한가득 쌓인 서류를 정리했다.


  [내가 보기에는 넌 워커홀릭이 맞다니까. 지난번에 하얀 뱀 여자가 뭐라고 했더라?]


  "일거리가 많으면 흥분하는 변태냐고 했었지. 똑똑히 기억해. 그 말을 듣고 내 옆에서 한참을 웃던 너도."


  사령관의 말에 페레그리누스가 킬킬거렸다. 놀리듯이 웃는 페레그리누스를 본 사령관이 신경질적으로 서류 더미를 넘기며 말했다.


  "오랜 전통이야. 잊을만하면 한 번씩 찾아와서 나를 워커홀릭이라고 놀리지.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일만 붙잡고 살 수 있냐고. 그렇게 놀리러 찾아오는 애들한테 매번 말해."


  사령관이 사인을 마친 서류 한 더미를 페레그리누스에게 건넸다. 족히 수십 장은 되어 보이는 서류는 전부 바이오로이드들이 일으킨 사고의 사후처리에 관련된 내용이었다.


  "니들이 사고만 치지 않아도 내 일의 절반은 줄어든다고."


  [세상에. 이게 다 바이오로이드들이 사고 친 거라고? 며칠 치 사고야? 일주일?]


  "사흘."


  사령관의 말에 페레그리누스가 차마 웃지 못하고 서류 더미를 바라보았다. 사흘?


  [오르카 호는 인류 최후의 보루가 아니라 만마전 같은 거였나?]


  "사고 치는 것만 보면 악마도 꼬리를 말고 도망칠 수준이긴 하지."


  마지막 서류에 사인을 마친 사령관이 기지개를 켰다. 얼마나 오래 앉아있었는지 허리를 펴며 터져 나오는 뼈 소리가 페레그리누스에게도 선명하게 들려올 정도였다.


  [오, 일이 마무리 된 건가?]


  "그럴 리가."


  책상 서랍에서 다시 서류 더미를 꺼내는 사령관을 보며 페레그리누스가 질렸다는 듯이 말했다.


  [너 잠은 마지막으로 언제 잤냐?]


  "글쎄. 이 서류 처리를 시작하고 나서는 한 번도 안 잤지."


  [너 사흘 전에도 이러고 있는 걸 내가 봤는데? 이게 사흘 치 사고라며?]


  "사흘 치 사고라고 했지 지난 사흘이라고는 안 했다. 그건 지난주 사고야. 이번 주 분량은 아직 시작도 못 했어."


  사령관의 말에 페레그리누스가 서류의 날짜를 확인했다. 그의 말대로 서류에 찍힌 날짜는 일주일 전의 것이었다.


  적어도 사흘, 길게는 일주일 넘게 잠을 못 잤다는 소리겠지. 어쩐지 가끔 밖에서 볼 때마다 얼굴이 초췌하다 싶더니. 그의 상식으로는 인간은 하루에 7시간은 자야 한다고 들었는데 그의 상식이 틀린 것일까, 이 친구가 이상한 것일까?


  [이 많은 서류 처리를 너 혼자 다 하는 거야? 오르카 호에 네 서류 정리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한 명도 없을 것 같지는 않은데?]


  "사실 이게 급한 일은 아니라서. 다들 자기 일로 바쁠 텐데 굳이 불러서 급하지도 않은 일을 시키면 좀 그렇잖아. 그건 그렇고 여기 온 이유가 나를 방해하려고 온 거냐?"


  조금 짜증이 난 듯 툴툴거리는 사령관의 말에 킬킬 웃은 페레그리누스가 손목시계라도 있는 양 손가락으로 손목을 톡톡 두들기며 말했다.


  [방해라니. 이래 봬도 부탁을 받고 내 일을 하려고 여기 와 있는 거라고. 그러니까... 슬슬 됐으려나?]


  페레그리누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령관의 눈앞이 핑 돌았다. 급작스레 쏟아지는 잠에 사령관이 붉게 물든 눈으로 페레그리누스를 바라보았다. 설명을 요구하는 사령관에게 페레그리누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네가 잠 좀 잘 수 있게 해달라고 메이드들이 나한테 부탁하더라. 나를 너무 원망하지 말라고?]


  무겁게 가라앉는 눈꺼풀을 이기지 못하고 눈을 감는 사령관이 유언이라도 남기듯 힘겹게 페레그리누스를 향해 말했다.


  "두 번 다시 네가 주는 홍차는 안 마신다..."


  마지막 말을 남기고 사령관이 책상 위에 쓰러져 깊은 잠에 빠졌다. 잠이 든 사령관을 향해 페레그리누스가 슬프다는 듯 눈물을 훔치는 시늉을 했다.


  [그건 좀 슬픈걸, 친구.]


  페레그리누스가 잠든 사령관의 얼굴을 살폈다. 좋아. 잠든 것 같군. 페레그리누스가 사령관을 의자에 뉘인 후 서류를 치우며 책상을 뒤지기 시작했다.


  [여기 어딘가에 있을 거라고 했는데... 아, 찾았다.]


  페레그리누스가 수많은 서류 더미에서 사령관의 패널을 찾아냈다. 페레그리누스가 노크를 하듯 패널을 두들겼지만, 패널은 곯아떨어진 작은 진조 꼬맹이처럼 묵묵부답일 뿐이었다.


  [내가 만져선 안 되는 거로군. 사령관이 만져야 하나?]


  페레그리누스가 축 늘어진 사령관의 손을 붙잡아 그의 손가락으로 패널을 두들겼다. 사령관의 손가락이 닿은 패널이 기다렸다는 듯이 하얗게 빛을 내기 시작했다.


  [빙고.]


  만족스러운 웃음소리를 흘린 페레그리누스가 사령관의 손가락으로 패널을 조작했다. 통신 목록에서 누군가의 얼굴을 찾아낸 페레그리누스가 전화를 걸자 몇 번의 신호음 후 패널의 스피커 너머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끝났나요?]


  [끝났어. 이제 들어와도 돼.]


  콰앙!


  페레그리누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누군가가 문을 부술 듯이 걷어차 열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정갈한 메이드복. 갈색 머리에 동그란 안경. 오르카 호의 실질적인 안주인, 콘스탄챠다. 청소도구를 양손에 들고 위풍당당하게 선 콘스탄챠를 보며 페레그리누스가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설마 계속 문 앞에서 기다린 건가?]


  "그럼요. 신호를 주시면 언제라도 일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콘스탄챠를 따라 바닐라와 금란이 뛰어들어와 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책상에 한가득 쌓인 서류를 정리하던 콘스탄챠가 사령관의 몰골을 보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우선 주인님을 씻겨야겠군요.”


  [욕실까지는 내가 옮기지.]


  페레그리누스가 사령관을 안아 들고 욕실로 향했다. 페레그리누스가 욕실에 사령관을 내려놓자마자 콘스탄챠가 능숙한 솜씨로 사령관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그런 콘스탄챠의 귓가에 페레그리누스가 작게 속삭였다.


  [내 역할은 여기까지야. 약속 지켜야 해?]


  페레그리누스의 말에 콘스탄챠가 그를 향해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요. 약속인걸요.”


  콘스탄챠에게서 두 번 세 번 다짐을 받은 페레그리누스가 욕실을 나섰다. 사령관실을 리모델링할 기세로 청소하는 바닐라와 금란에게 살짝 손을 흔들며 그녀들에게 방해되지 않도록 그림자처럼 방을 나섰다.


  어두운 복도로 나선 페레그리누스가 살며시 문을 닫았다. 사령관실의 문이 소리도 없이 닫히며 복도로 새어나오는 빛을 잘라냈다. 어둠에 잠긴 복도 속에서 페레그리누스가 슬쩍 옆을 바라보았다.


  강철의 소녀가 어둠 속에서 두 눈을 빛내고 있었다. 소녀가 고개를 들어 페레그리누스를 바라보았다. 푸르게 빛나는 두 눈은 마치 얼음을 박아넣은 듯했다. 위용 넘치는 강철의 두 날개도 없이 홀로 선 가녀린 모습에 페레그리누스가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다.


  [준비는 됐수, 누님?]



  *

  인간들은 어려서부터 함께 자란 친구를 소꿉친구라고 부른다지.


  AGS에게도 그 말이 해당한다면 페레그리누스와 글라시아스도 소꿉친구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같은 목적을 가지고 한날한시에 태어나, 멸망을 넘어 지금까지 함께 살아온 존재.


  어쩌면 소꿉친구라기보다는 남매라는 말이 어울릴 수도 있겠다. 물론 페레그리누스는 이 말을 들으면 질색하며 손사래를 치겠지만.


  이런 관계이다 보니 좋든 싫든 간에 페레그리누스와 글라시아스, 사이클롭스 프린세스 셋은 서로를 가장 잘 아는 사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페레그리누스는 실제로 그렇다고 생각했다.


  오르카 호에 합류하기 전까지는.


  닥터와 아자즈. 


  기술력의 정점인 바이오로이드라고 멸망 전부터 들어왔지만 실제로 보니 소문이 따위처럼 들릴 정도로 경이로운 실력이었다. 글라시아스를 살펴본 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수리를 마치더니 그녀를 자신보다 작은 여성형 AGS로 개조까지 했으니까. 그런 모습으로도 이전과 출력이 달라지지 않았다고 하니 반칙이나 다름없다.


  물론 페레그리누스는 그 모습을 보고 배를 잡고 바닥을 뒹굴며 웃었지만, 그때는 그녀가 마음에 들어 하는 듯하니 깊게 따지지 않고 넘어갔다.


  문제는 그 이후다.


  그렇게 인간형 AGS가 된 글라시아스는 하루가 멀다 하고 사령관의 뒤를 쫓아다녔다. 식당, 회의실, 연구실, 사령관실. 말리지 않았다면 욕실까지 따라들어갔을 것이다. 사령관의 연인이라도 된 양, 아니면 되려는 양 사령관의 곁에서 떨어질 생각을 하질 않았다.


  그렇게 사령관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다니는 글라시아스의 모습을 보며 페레그리누스는 광기의 두 과학자가 기어이 글라시아스의 인공 지능에 손을 대었다고 확신했다.


  아니면 자신의 시각 센서가 잘못되었던가.


  [각인 효과라고 들어보셨수, 누님?]


  간만에 사령관 없이 글라시아스와 단둘이 된 페레그리누스가 능청스레 그녀에게 말했다.


  [몇몇 새들은 알에서 깨어나고 자신이 처음 본 상대를 부모라고 생각하고 따르고는 하는데, 인간들은 그걸 각인 효과라고 부른답디다. 내가 하피의 왕이라서 아는 건 아니고.]


  소파에 앉은 글라시아스에게 페레그리누스가 장난스레 말했다.


  [그런데 나는 용도 각인 효과가 있는지 처음 알았습니다, 누님. 아, 그러고 보니 용도 난생이라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니, 글라시아스.]


  [친구 뒤를 쫄래쫄래 쫓아다니는 이유가 뭐냐는 거요.]


  페레그리누스의 말에 글라시아스가 숨을 들이켰다. 실제로 숨을 들이켠 것은 아니지만. 글라시아스의 맞은편에 털썩 주저앉은 페레그리누스가 글라시아스를 바라보았다.


  [오르카 호에 소문이 자자합니다. 누님이 사령관 뒤에 찰싹 달라붙어서 어디를 가던 따라다닌다고.]


  [그... 그렇게 소문이 났단 말이니?]


  [...진짜 몰랐다고? 한 달을 찰싹 달라붙어 있었는데 소문이 안 나기를 바랬습니까? 얼마나 친구 등짝만 바라보고 있었던거요? 짝사랑도 그 정도면 감탄할 지경이오, 누님.]


  페레그리누스의 말에 글라시아스가 당황한 목소리로 말을 흘렸다.


  [짜... 짝사랑 같은 것이...]


  [아, 이제 와서 잡아뗄 생각은 하지 마쇼, 누님. 이미 오르카 호에 소문이 자자해서 그 작은 진조 꼬맹이도 알고 있을 지경니까. 인간과 용이 사랑에 빠졌다며 눈이 돌아가 있수.]


  큰 진조 꼬맹이는 다른 의미로 눈이 돌아가 있다는 것도 잊지 마시고. 페레그리누스의 말에 글라시아스의 안광이 불안하게 깜빡였다. 고개를 푹 숙인 글라시아스를 향해 페레그리누스가 무심하게 툭 던지듯 말했다.


  [뭐, 나는 응원하고 있으니까 잘 해보시고.]


  페레그리누스의 말에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글라시아스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 맹렬한 기세에 페레그리누스가 저도 몰래 몸을 뒤로 피할 정도였다.


  [저... 정말이니?]


  [뭐요. 그러면 내가 반대라도 할 줄 아셨수? 거 참, 사람 한 번 야박하시네. 아, 사람이 아니구먼.]


  페레그리누스의 말에 글라시아스가 눈을 깜빡였다. 탁자 위의 종이를 집어든 페레그리누스가 능숙하게 종이로 새를 접기 시작했다.


  [내가 몇 번을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고리타분한 계약 같은 건 집어치우고 누님의 삶을 살라고 말이요. 내가 말하는 누님의 삶이란 게 바로 이런 거요. 보고 싶은 걸 보고, 하고 싶은 걸 하고, 즐기고 싶은 걸 즐기고.]


  새 두 마리를 접어낸 페레그리누스가 입맞춤을 하듯 종이 새의 부리를 맞댔다.


  [하고 싶은 사랑을 하고.]


  페레그리누스의 말에 글라시아스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했다.


  [나는 네가 고귀한 혈통의 아이를 응원할 줄 알았단다.]


  그녀의 말에 페레그리누스가 질색을 하며 손을 흔들었다.


  [그 꼬맹이를? 켁. 농담하지 마십쇼. 그런 못돼먹은 꼬맹이가 뭐가 귀엽다고 편을 들어준단 말입니까? 그리고 잘 생각해 보슈. 내버려 둬도 알아서 잘 될 녀석을 제가 편들어서 뭐해요? 당장 웃통 까고 침대에 달려들기만 해도 알아서...]


  [페레그리누스.]


  [아 알아요, 알아. 내가 무슨 말을 더 하겠습니까.]


  글라시아스의 질책에 페레그리누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안 그래도 불리한 입장인데 이렇게 점잔빼고 있으니 될 것도 안되는 거지.


  [그래서, 그렇게 한 달 동안 친구의 뒤를 쫄래쫄래 쫓아다녀서 얻은 게 있습니까? 한 달입니다, 한 달. 누구는 유전자 씨앗에서 복구된 지 하루 만에 침실로 쳐들어갔다는데 한 달이나 남자의 뒤꽁무니를 쫓아다녔으면 뭔가 얻은 게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페레그리누스의 말에 글라시아스가 수줍은 소녀처럼 손가락을 맞대며 말을 골랐다. 세상에. 누님이 사춘기 소녀 같은 꼴을 하는 걸 보는 날이 오다니. 오래 살고 볼 일이로군.


  [그래. 맹우의 뒤를 따라다녔지. 그게 한 달이나 되었는지는 몰랐구나.]


  글라시아스가 가녀린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은 뇌 내부의 호르몬 분비를 촉진해 스트레스를 진정시키는 효과가 있다지. 호흡도, 호르몬도 없는 AGS에게 한숨이란 의미 없는 행위. 역설적이게도 한숨이 자연스러울수록 인간에 가까운 AGS라 평가받는다.


  인간에 가깝지 않았다면 사랑에 빠질 일도, 마음을 졸일 일도 없었을 것을.


  [마음을 전달하려고 했다. 맹우에게. 수만 번 생각했지. 맹우의 옷깃을 잡고 나를 돌아보게 하여, 내 마음을 전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너무도 쉽다고 생각했지.]


  글라시아스가 자신의 손을 내려보았다. 사령관이 맞잡은 바이오로이드들의 부드러운 손이 아닌, 무기질적인 강철의 손이 눈에 들어왔다.


  [그 쉬워 보이던 것이, 쉽지 않구나.]


  페레그리누스는 그제야 글라시아스가 망설이는 이유를 깨달았다. 


  맹우의 곁에 자리하는 바이오로이드와 다르게 자신은 AGS이니까. 그의 품에 안길 수도 없는 가짜 몸으로 무엇을 하겠다는 말인가. 부드러운 살결을 갖지 못한 자신은 맹우에게 있어 그저 인형에 불과한 것을.


  페레그리누스가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이유는 그가 사령관을 지나치게 신뢰했던 것이기 때문이리라. 그 남자는 그런 것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으니, 그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줄 것이라고 너무나 당연스럽게 생각했다. 그녀의 고민은 생각지도 못하고.


  [...인정합니다. 내가 너무 성급했습니다, 누님. 누님은 누님 나름의 고민이 있었을 텐데. 내가 너무 무신경했습니다.]


  페레그리누스가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는 확신했다. 그의 친구는 글라시아스가 AGS라고 해서 거부할 정도로 작은 남자가 아니다. 사실 거절하는 쪽이 인간으로서는 더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이런 쪽에 있어서 그의 아량은 이상할 정도로 넓으니 괜찮을 것이다. 문제는 글라시아스다. 어떻게 하면 그녀를 움직일 수 있을까.


  그러고 보니 요 며칠 친구가 일에 붙잡혀 두문불출하고 있다지. 메이드들이 그것 때문에 마음고생이 심하다는 소리도 있었고.


  [누님은 여태껏 누님의 방식으로 움직였수. 그렇지만 실패했고.]


  며칠 뒤에 오르카 호가 해저 화산 위에 정박한다고 했지. 어쩌면 그것이 좋은 기회일지도 모르지.


  [이제는 내 방식대로 움직일 차례요.]



  *

  어두운 방에서 사령관이 살며시 눈을 떴다. 꽤 긴 잠을 잤는지 머리가 둔하게 움직였다. 페레그리누스 녀석. 이런 식으로 나를 억지로 재우다니.


  가늘게 뜬 눈으로 가장 먼저 본 것은 푸른 강철의 소녀였다. 선명한 푸른색으로 빛나는 두 눈은 마치 얼음을 박아넣은 듯했다.


  [맹우가 깨어났구나.]


  소녀가 사령관을 향해 눈웃음지었다. 사령관도 글라시아스를 향해 웃어 보였다.


  “일어나면 누군가 옆에 있을 거라 생각하기는 했지만, 설마 그게 너일 줄 몰랐는데.”


  사령관이 글라시아스의 뺨에 손을 뻗었다. 손끝으로 강철 같지 않은 부드러움이 조금은 차갑게 느껴졌다.


  “조금 더운데.”


  [해저화산에 정박했다고 하더구나. 해저화산이 분출 중이니 아무리 오르카 호라도 조금은 더워질테...]


  글라시아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령관이 글라시아스를 품에 안았다. 차가운 소녀의 몸에 사령관이 웃음을 지었다.


  “조금 낫군.”


  부드럽게 와 닿는 사령관의 온기에 글라시아스가 숨을 들이켰다. 그의 품에서 어찌할 바를 모른 채 굳어있던 글라시아스가 사령관의 품에 얼굴을 파묻었다. 품속에서 작게 떨리는 글라시아스의 몸에 사령관이 웃음을 지었다.


  “분명 내가 잠들기 전에는 이틀 후에 해저화산에 정박한다고 했는데 말이야. 설마 이틀 넘게 내 옆에 누워있었던 건 아니겠지?”


  글라시아스가 사령관의 품에서 고개를 들었다. 사령관의 눈과 얼음 같은 글라시아스의 눈이 마주쳤다. 글라시아스가 사령관을 향해 살짝 눈웃음을 지었다.


  [걱정 말거라. 잠든 그대를 지켜보는 것은, 그대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즐거웠으니.]


  글라시아스가 사령관의 뺨에 손을 뻗었다. 강철의 손끝으로 사령관의 뺨이 뜨겁게 느껴졌다. 사령관이 글라시아스의 손을 맞잡으며 웃어 보였다.


  “한 달 동안 따라다닌 끝에 해낸 것이 이런 것은 아닐 테고, 페레그리누스 녀석의 생각인가?”


  [그래. 페레그리누스가 그대를 재우는 조건으로 콘스탄챠와 거래를 한 것 같구나.]


  무슨 자신감으로 나한테 수면제를 먹였나 했더니 든든한 뒷배가 있었군. 사령관이 가볍게 투덜거렸다.


  “그래서, 그 녀석의 제안을 받아들인 건 고민이 해결됐기 때문인가? 그 고민 탓에 한 달 동안 내 뒤를 따라다니면서 아무것도 못 한 거잖아?”


  사령관의 말에 글라시아스의 두 눈이 당황한 듯 깜빡거리다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대는 정말로 다 알고 있구나.]


  “나는 의외로 눈치가 빠른 모양이야.”


  글라시아스가 다시 사령관의 품으로 고개를 묻었다. 용의 몸으로 내려보았던 그 작은 인간의 품이 이렇게 넓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글라시아스가 떨리는 목소리를 가라앉히며 간신히 말을 꺼냈다.


  [솔직히... 지금도 잘 모르겠구나. 나는, 그대의 곁에 있는 자들과 너무나도 다르니까. 맹우에게 이 몸은 인형에 불과하잖느냐. 나는...]


  “아직도 고민 중인가?”


  사령관이 글라시아스와 이마를 맞대었다. 사령관의 숨결이 부드럽게 글라시아스의 목덜미를 간질였다. 글라시아스가 사령관의 숨결에 부끄러운 듯 움츠러들었다. 그런 글라시아스의 모습에 사령관이 살짝 미소 지었다.


  “인간이라면 보통 이런 상황에서 키스를 하는 법이지.”


  [아쉽구나. 나는 입술이 없어 무리일 테니.]


  “글쎄.”


  사령관이 고개를 숙여 글라시아스의 입술이 있을 부분에 입을 맞추었다. 촉각 센서 너머로 부드러운 것이 맞닿고 떨어지는 것을 느낀 후에야 글라시아스는 그것이 사령관의 입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글라시아스가 숨을 들이켜며 사령관에게서 떨어졌다.


  가슴이 옥죄는 듯했다.


  호흡이 가빠지는 듯했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듯했다.


  심장이 격렬하게 뛰고 있는 듯했다.


  전부 그럴 리 없는 것이지만, 어쩐지 그렇다고 느끼고 있었다.


  사령관이 손을 뻗어 글라시아스의 가슴을 손끝으로 건드렸다. 강철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러운 가슴을.


  “심장이 빠르게 뛰고 가슴이 옥죄는 것 같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지만 말이야.”


  사령관의 말에 글라시아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령관이 글라시아스의 손을 잡아 자신의 가슴으로 가져갔다. 손바닥의 촉각 센서 너머로 사령관의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인간은 사랑을 하면 가슴이 뛰지. 지금 네가 그러는 것처럼.”


  사령관이 글라시아스를 다시 품에 안았다. 글라시아스의 가슴에 폭풍이 몰아치는 것 같았다. 미친 듯이 뛰는 가슴에 닥터가 무언가를 잘못 건드린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였다. 떨리는 목소리로 글라시아스가 사령관에게 말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인형이란다.]


  “너를 인형이라 생각하지 않아.”


  사령관이 글라시아스에게 달콤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감정을 느끼고, 사랑을 하지. 누구보다 인간적인 네가 인형일 리 없어. 그러니 그런 걱정 하지 말고 너는 그저 보고 싶은 걸 보고, 하고 싶은 걸 하고, 즐기고 싶은 걸 즐기고.”


  글라시아스가 사령관을 올려보았다. 그녀의 푸른 두 눈동자가 사랑스럽게 빛났다.


  “하고 싶은 사랑을 하면 돼.”


  사령관과 글라시아스의 입술이 맞닿았다.



  *

  [어쨌든 가능하다는 소리군.]


  “쉬운 기술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또 그렇게 어려운 기술은 아니라서 말이야. 멸망 전에도 과학자들이 뇌를 전뇌로 바꾸는 일이 있었잖아? 그 역설계라고 보면 되는 거지. 바이오로이드 만드는 것처럼 육체를 만들어서 뇌를 전뇌로 교체한 후 글라시아스 언니의 AI를 전뇌에 원격으로 연결. 쉽지?”


  닥터의 말에 페레그리누스가 어이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렴 네가 그렇다는데 내가 뭐라고 하겠니.


  “제작은 지금이라도 시작할 수 있지. 그런데 이거 오빠랑 글라시아스 언니한테 허락받은 거 맞지?”


  [너랑 아자즈 특기 있잖아? 미리 완성해두고 허락받기. 그러면 너만 믿고 나는 간다~.]


  “뭐?! 잠깐만...!”


  성난 닥터의 외침에서 도망치듯 연구실을 빠져나온 페레그리누스가 복도를 배회했다.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사고라는 건 원래 쳐둔 뒤에 생각하는 법이지 아무렴.


  그러고 보니 글라시아스가 사령관실에 들어간 지 사흘째다. 슬슬 나올 때가 됐는데. 아, 마침 저기 나오는군. 페레그리누스가 웃으며 글라시아스에게 인사를 건넸다.


  [아이고, 누님. 사흘 만에 뵙는구려. 제가 또 우리 누님을 위해서 준비해둔 게... 어럽쇼? 우리 누님 표정이 밝아지셨네?]


  페레그리누스의 말에 글라시아스가 살짝 웃어 보였다.


  [알겠니?]


  [우리 누님 표정이 밝아지신 게... 물론 우리한테 표정은 없지만. 고민거리가 해결되신 모양이구만.]


  페레그리누스의 말에 무어라 말해야 할지 몰라 잠시 망설이던 글라시아스가 가슴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사랑을 느꼈단다.]


  글라시아스의 말에 페레그리누스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가슴에 손을 얹는 그 몸짓, 부드러운 목소리, 살짝 짓는 눈웃음 하나하나가 소녀 같았다. 사랑에 빠진 소녀.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지?


  [그 카사노바가 기어이 우리 누님마저 홀려놓은 듯 모양이구만.]


  [네가 응원해준 일 아니니?]


  그녀의 웃음을 볼 때마다 페레그리누스는 저도 몰래 자신의 시각 센서를 의심했다. 친구 녀석. 대단한 녀석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하룻밤 새에 누님을 이렇게 바꿔놓다니 신통방통하기 그지없다.


  [맹우와 이야기를 나눠보았단다. 여태껏 고민한 것이 괜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시원스레 대답해주더구나. 나의 고민을 나보다 더 잘 알고 있는 듯했다.]


  글라시아스가 페레그리누스를 향해 사랑스럽게 웃었다. 


  [가슴이 옥죄는 감정을, 사랑을 느끼고 있다면 우리같이 만들어진 존재라도 인형이 아니라고 하더구나.]


  얼음처럼 사랑스러운 웃음을 남기고, 글라시아스가 페레그리누스의 가슴에 온기를 남기고 눈의 요정처럼 훌쩍 떠나갔다.


  [그러니 조금만 더 이대로 있어볼 생각이란다.]


  소녀처럼 콧노래를 부르며 멀어져가는 글라시아스를 보며 페레그리누스가 머리를 벅벅 긁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기껏 준비해 뒀는데 말짱 꽝이로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