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   우리집 브닐라 모음집 - 라스트오리진 채널 (arca.l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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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로가 상당히 바뀌었다. 현재까지 마주친 위협 중 가장 불쾌한 녀석이 우리가 원래 가려고 했던 방향으로 떠나버렸으니까.

 

C 부장.

 

C와의 예상치 못한 조우가 끝난 후, 우리는 가급적 빠르게 자리를 벗어나려 열심히 움직이고 있었다.

 

아니, 그러려고 애쓰고 있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C 놈과 마주치기 전보다 속도가 확연히 느려졌거든. 그도 그럴 것이 내 등 뒤에는 의식을 잃은 바니가 업혀 있었고, 이비의 옆에는 다리를 절며 그녀에게 기대어 걷는 H, 그리고 저 뒤편에는 방패를 들것 삼아 하치코를 데리고 걸어오는 소완과 유미가 있었으니까. 원래도 걸음이 빠른 편은 아니었던 노부부는 덤이다.

 

기존에 가지고 있던 짐도 모자라서 수십 킬로짜리 짐을 더 짊어지고 움직이려니, 이게 여간 힘든 게 아니더라. 오죽했으면 내 뒤의 유미까지도 오만상을 쓰고 있다. 안 그래도 크고 무거운 안테나에, 이젠 딱 봐도 내 몸무게 서너 배는 족히 나갈 것 같은 방패 위에 하치코까지 얹어 놨으니 말이지. 

 

그나저나, 사람 몸무게치곤 가볍다고 해도....바니는 기절해서 중심을 잡을 수도 없고, 이래저래 나도 지쳐있기도 해서인지 체감 무게는 그보다 훨씬 더 나가는 느낌이었다. 

 

자꾸만 어깨와 허리까지 아파 오길래 등 뒤의 바니를 슬쩍 튕겨 다시 자리를 잡아주었다. 아, 이제 좀 낫구만. 바니를 받쳐 든 손에 적당히 따뜻하면서도 말랑한 촉감이 느껴진다. 마침 손이 조금 시렸는데 잘됐-

 

엥 잠깐.

 

뭔가 요상한 느낌이 들었다 했더니, 내 뒤에서 H가 못마땅한 얼굴로 ‘에헴, 에헴’ 하며 헛기침을 해댄다.

 

“손 조심합시다, 아저씨? 니가 업은 거 내 마누라거든?”

 

“그럼 부탁이니까 네 마누라 좀 깨워봐라. 계속 업고 가려니까 죽겠다, 임마.”

 

시답잖은 소리를 하며 H를 재빨리 훑어보았다. 아무래도 표정도 좋지 않고, 다친 다리도 영 상태가 좋아 보이질 않는다. 앞으로도 갈 길이 먼데, 녀석이 제대로 따라올 수 있을지 걱정이다.

 

“...아 참, 그런데 말이야.”

 

H가 문득 입을 열었다. 아까부터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더니, 뭔가 떠오른 모양이다.

 

“아까 그 사람, 네 예전 직장 상사. 그 사람이 데리고 있던 애가 아마....블랙 리리스 같아.”

 

“그 흑백 반반 갈라입은?” 

 

“응. 그게....삼안 라인업 중에서 가장 비싸고 성능도 뛰어난 애야. 나도 스펙은 자세히는 모르지만, 하여튼 경호용이라기엔 말이 안 될 정도로 강력하다고 들었는데....

 

근데 그만큼 가격도 말이 안 되거든? 커뮤니티에서 듣기로는 거의 1억 달러 정도 한다던데... 네 상사라는 사람이 그 정도 지출을 할 여유가 될까?”

 

“아니.”

 

C가 삼안 이사 쪽 친척에다 나보다 지위가 높은 건 맞지만, 그렇다 해도 저 정도씩이나 되는 호위를 끼고 있을 인물은 결코 아니다.

 

“....그 블랙 리리스가 그자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겠지요.”

 

뒤에서 하치코를 나르던 소완이 끼어들었다.

 

“혹, 주인께서는 리리스라는 분의 손을 보셨나이까?”

 

.....그럴 리가. 당장에 일행들은 무슨 좀비처럼 각기춤을 춰대고, 내 머리 쪽으로 총알이 날아오는데 그런 걸 언제 보고 있겠냐. 가뜩이나 뜬금없이 C 새끼 본 것만으로도 머리가 지끈거리는데.

 

절로 미간을 찌푸린 나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분의 손에는 보석이 박힌 반지가 끼워져 있었사오나, 그.... C라는 자의 손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사옵니다. 필시 그 자가 원래 주인이 아니라는 뜻이겠지요.”

 

....뭐라고 할까. C 답다면 C 답네. 남의 것들 뺏고 돌아다니는 게.

 

“셰프님...힘......앞에 힘이...”

 

“주인.”

 

뒤에서 바들대는 유미의 간절한 목소리를 무시한 소완.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소첩, 다른 자매들에 대해 자세히는 알지 못하나.....리리스라는 분께서 허투루 빗맞힐 분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사옵니다. 그분께서는 주인을 빗맞힌 것이 아니라, 애당초 노리고 쏜 것이 아닐 것이옵니다.”

 

“....맞아, 아마 그럴 거야. 블랙 리리스 모델들이 전투 성능은 최고 수준이니까. 지시에 어느정도 불응할 수 있는 것도 상위기종 특유의 자율성 때문일 거고.”

 

소완의 설명에 H가 맞장구를 친다. 흠. 그럼 그 친구는 C 놈의 명령에 어느 정도 저항할 수 있었다는 건가. 소완이 자기 두 번째 소유주가 했던 말을 교묘히 이용해서 놈을 버렸던 것처럼 말이지.

 

새삼 몸값 비싼 친구들이 무섭긴 하구나 싶다. 

 

그런데, 그렇게 자율성 강하고 머리 좋은 애들까지 결국 C의 영향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었다는 건....그보다 못한 친구들을 아예 그런 시도조차 못한다는 건가?

 

이후로도 소완과 H의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에 잠겨있기를 잠시, 마침내 나는 떠올랐던 의문 하나를 입 밖에 내었다. 

 

“저기, 만약에 C랑 다시 마주친다면 말야. 너희는 또....그렇게 되는 걸까?”

 

그러자 소완의 어깨가 축 늘어지더니, 눈을 침울하게 아래로 내리깔았다.

 

“으-으앗, 셰프님! 팔 아파요! 팔, 팔!”

 

갑작스레 경사로 뒤에서 방패와 하치코의 하중을 모조리 떠맡게 된 유미가 버둥거리는 사이, 소완의 얼굴을 살피던 이비가 내 어깨를 가볍게 한 대 툭 친다.

 

바니를 업고 있는 터라 뭐라 대응도 할 수 없어서, 조금 짜증을 담은 얼굴로 그녀를 보니, 이비가 나에게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잔소리를 해왔다.

 

(그런 얘기를 왜 하필 지금 하십니까!)

 

(아니, 중요한 얘기는 맞잖아!) 

 

(소완씨 표정 안 보이세요? 타이밍이 문제란 말예요!)

 

그렇게 소리죽여 다투던 와중, 소완이 목소리를 내었다. 낮게 깔려있었지만, 깊은 무게가 있는 목소리로.

 

“행여 또다시 마주치게 된다면...아까만큼도 버틸 수 없을 것이옵니다.” 

 

그녀가 눈을 내리깔고 나직히 읊조린다.

 

“소첩의 머릿속이 그렇게 말하고 있지요. 비상 명령권 동기화가 거의 완료되었다고. 두 번째에는 방금처럼 저항할 틈조차 없을 것이라 보여지옵니다.”

 

소완의 목소리에 서린 불길한 기운에, 우리는 한동안 할 말을 찾지 못하고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ㅅ-셰프님....제발...!!”

 

유미의 고통스런 신음이 정적을 깨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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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움직이다보니 바니와 하치코도 정신을 차렸다. 마침내 바니를 등에서 내려놓을 수 있었던 나도 한 숨 돌렸지만, 저 육중한 방패와 하치코의 몸무게까지 감당하고 있었던 유미야 말로 지금 가장 기쁜 사람일 거다.


아니, 다시 생각해보니 사실 별로 기쁘진 않겠다. 


지금 우리가 뭘 기뻐할 상황이 절대 아니었으니까.


C와 행선지가 겹치지 않기 위해 유미가 골랐던 예비 루트. 여기까지 오는 길에는 딱히 마주친 것이 없어서 좋긴 했는데......

 

“허허허.”

 

지금은 H의 무미건조한 헛웃음이 모든 걸 말해준다. 

 

저 멀리서는 철충들이 여럿 돌아다니고 있고 (상식적으로 이곳까지 들어와 있을 이유가 있나 싶었지만), 우리 앞에는 강이 있었으니까. 더 정확히는 바다를 접한 강이라고 해야 맞으려나. 조그만 관광지라도 되는 듯 강가에는 오리보트와 모터보트 선착장이 보였다. 주인 잃은 고급 요트도 몇 척 처량하게 떠 있고. 

 

그리고....분명히 이 자리에 있었을 다리는 진작에 끊어진 지 오래인 듯, 양끝 부분만 간신히 남아있었다. 또냐, 시밤. 무너진 다리라면 이제 지긋지긋하다.

 

결국 남은 길이라곤 저 모터보트 선착장 뿐이구먼. 다행히도 철충들은 비교적 먼 곳에 있어서, 선착장까지 가는 동안 조용히만 한다면 마주칠 일은 없어 보였지만.

 

이비는 당황한 얼굴로 태블릿을 만지작대는 유미의 어깨를 슬쩍 밀쳤다. 

 

“Seriously?”

(지금 장난해요?)

 

“아...으....이번엔 정말로 괜찮을 줄 알았는데....그-그래도!”

 

유미가 다급하게 선착장을 가리켰다.

 

“이번엔 또 돌아갈 일은 없잖아요!”

 

.....


당연히 돌아갈 일은 없어야지. 지금 상황에서 우회할 길이 얼마나 있다고.


나는 복잡한 표정을 하고 유미가 가리킨 곳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다른 일행들도 아마 똑같이 하고 있을 거다.


“....”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잠시 후, H의 질문이 정적을 깬다.

 

“그럼, 저....여기 보트 몰 줄 아는 사람 계세요?”

 

“아쉽게도 전 모릅니다.”

 

“저도 몰라용!”

 

바니와 하치코가 즉답한다.

 

“내가 할 줄 아네. 예전에 요트랑 보트같은 걸 좀 몰곤 했었거든.”

 

뒤이어 손을 들고 대답한 할아버지.

 

“그럼 운용 문제는 해결되었으니...”

 

앞쪽을 살피던 이비가 바이저를 다시 올리며 말을 이었다.

 

“저기까지 가서 보트만 확보하면 되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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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과 매장 건물들로 둘러싸인 선착장은 마치 관광시설 사이에 고립된 듯 보이기도 했다. 출입구도 하나 뿐이고, 강변에 홀로 툭 튀어나와서는 -그 앞에 놓인 작은 주차장을 제외하면- 앞으로는 건물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뒤로는 강물이 넘실대는 모양새였으니까. 그 와중에 관광지 특유의 '딱봐도 맛대가리 없어보이는' 식당 간판들은 주렁주렁 걸려 있었다.

 

철충들을 피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만 해도 운이 좋았는데, 문 너머에 넘실대는 수많은 보트를 보니 더더욱 운이 좋다 싶다. 상황이 이렇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하나같이 상태가 좋아 보였으니. 진작에 사람들이 다 빠져나간 덕택인가 보다.

 

다가가면서 보니까 문이 단단히 잠겨 있긴 했지만, 이비 말로는 시간만 약간 있으면 조용히 딸 수 있어서 별 문제는 안 된단다. 

 

그렇게 선착장으로 이동하던 중, 뜬금없이 소곤소곤 속삭이는 어린아이들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저기 온다! 어떡하지?)

 

(아무도 없는 척 해. 그럼 그냥 갈 거야.)

 

(...그래도 어슬렁대면-)

 

“저기 얘들아, 다 들리는데.”

 

어색하게 말을 붙였더니 즉시 조용해 지는 아이들. 아무래도 내가 헛것을 들은 건 아닌 모양이었다. 자물쇠를 까부수려 빠루를 꺼내들었던 이비도 말소리가 들리던 옥상 쪽을 바라본다.

 

“....저기, 얘들아, 괜찮니? 아프거나 하진 않고?”

 

“에헤헤, 친구들! 배 고프지 않아요? 여기 맛있는 미트파이도 있어요!”

 

내 곁에서는 옥상에 인기척이 있는 걸 확인한 H와 하치코가 아이들을 안심시키려 들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문 앞에서 생쇼를 했더니 그제서야 고개를 내미는 세 아이들.

 

 

 

 

 

주황색 머리칼에 앙증맞은 이목구비를 한 소녀들이었지만, 하나같이 꾀죄죄한 행색에 다들 안전모까지 쓰고 있었다. 그리고 피로와 절망에 찌든 듯한 눈은 덤이었고. 어째 다들 깨나 고생하고 살았던 눈치다.

 

“.....원하는 게 뭐야.”

 

가장 앞에 있던 여자아이 하나가 상체를 빼꼼 내밀어 우리를 보았다. 

 

“아, 반가워! 혹시 여기 문 좀 열어줄 수 있을까? 아저씨랑 언니들이 저 보트 타고 슝-하고 강을 건너야 하거든. 문 열어주면 먹을 거랑 마실 거도 줄게. 아, 혹시 갈 데 없으면 같이 갈까?”

 

녀석을 향해 H가 애써 발랄한 목소리로 횡설수설 말을 건넨다. 그러자 세 소녀 중 뒤쪽에 수줍은 듯 서 있던 하나가 입을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나쁜 사람들 같진 않아.....열어줘도 되지 않을까?”

 

그러자 그 반대편에 선, 애꾸눈에 이곳저곳 흉터가 많은 녀석이 이어받는다.

 

“아직 순진하네. 지금까지 대놓고 나쁘게 생긴 인간들 본 적 있어? 무슨 수로 구별할 건데?”

 

“그래도-”

 

“지금 저 문을 열어주면 우린 또 죽자고 일만 해야 할걸? 또 햇빛도 안 들어오는 땅속에서 죽어가고 싶은 거야? 안돼.”

 

맨 앞에서 우리를 내려다보던 녀석도 고민하는 눈치다.

 

“너도 잘 생각해봐. 누가 우릴 거기다 몰아넣었는지. 그리고 누가 죽어서 우리가 나올 수 있었는지.”

 

“.....”

 

“그냥 그거 쓰자니까? 걔들이 알아서 잘 처리해 줄 거야.”

 

“....그래.”

 

녀석들이 나누는 대화를 따라가지 못해서 멍하니 있던 사이, 상처 투성이인 녀석이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러자 곧바로 입을 여는 맨 앞의 여자 아이.

 

“.....못 열어줘.”

 

녀석이 우리에게서 눈동자를 돌렸다. 

 

“너희들도 결국은 똑같을 거야. 우린 이제 인간하곤 더 엮이기 싫어. 미안해.”

 

그러더니 그녀석과 나머지 하나도 찝찝한 표정을 하고는 그대로 몸을 감추었다.

 

“....야, 쟤들 왜 저ㄹ-”

 

H가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갑자기 건물 곳곳에 달린 스피커에서 고막을 찢을 듯한 사이렌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그 요란한 소리 사이로 안내 방송이 함께 섞여 들어왔다. 

 

[...수위가 상승 중입니다. 손님 여러분께서는 즉시 대피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그리고 그에 화답하듯 저 멀리서 울리는 카랑카랑한 소리. 철충들의 쇳소리 같은 포효였다.

 

 

하하 시발 돌겠네.

 

 

“Fucking Brats!” 

(좆같은 꼬맹이 새끼들!)

 

이비는 빠루를 내던지고 소총을 들어 올려 자물쇠에 갈겨버렸다. 산산이 조각난 자물쇠가 사방으로 튀어 대자 이비는 그대로 문을 걷어차더니, 언제 올랐는지 그새 보트를 타고 떠나는 세 꼬마에게 총을 겨누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내 녀석들을 쏘는 걸 포기한 이비. 

 

그녀는 곧바로 허겁지겁 방송장치를 찾아 사이렌을 꺼버렸지만, 이미 시끄러운 사이렌 소음은 사방으로 퍼져나간 뒤였다. 

 

다급히 옥상에 올라 바이저를 내리고 상황을 살피던 이비가 우리에게 소리친다.

 

“어르신! 여기서 작동되는 보트 있는지 확인하세요! 바니 언니! 언니는 서방님 안쪽에 모셔놓고 합류합니다! 하치코랑 유미도 준비하세요!”

 

그러더니 그녀가 나까지 가리켰다.

 

“아, 주인님도 잠시 수고해주십시오!”

 

 

.....

.....

.....

 

 

그래서....

 

이비의 계획은 이랬다.

 

철충들의 거리와 속도로 보건대 놈들이 곧 들이닥칠 거고, 할아버지가 보트를 찾아 시동을 걸기까지 시간이 충분할지 알 수가 없단다.

 

그래서 시간을 벌 요량으로 유미의 안테나를 과부하 시켜 선두의 철충들을 묶어둔 뒤, 메이드들의 화력으로 마무리하고, 그렇게 파괴된 철충들을 장애물 삼아 나머지 놈들의 진입을 늦추겠다는 건데.... 

 

......그럼 나는 여기서 뭘 하라는 거지.

 

“그래서 내 역할이 뭐라고?”

 

이비가 나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다시 설명하겠습니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보니, 철충들은 우리를 무시하고 인간님들을 최우선으로 노리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우리만 여기 있어 봐야, 거들떠보지도 않고 선착장 쪽에 사격을 가하겠죠.”

 

“그럼 나는-”

 

“미끼입니다.”

 

저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뱉는 이비를 보니 머릿속이 새하얘진다.

 

“어.....그럼 그 미끼가 굳이 나인 이유는?”

 

“달리 방법이 있었다면 주인님을 쓰진 않았을 겁니다. H님은 부상이 심하고, 할아버님은 보트를 찾으셔야 하고, 할머님은 거동이 불편하시니까요. 그나마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은 분은 주인님뿐입니다.”

 

......그렇게 들으니 할 말은 없다.

 

“하치코 씨가 주인님을 지켜드릴 겁니다. 모퉁이를 돌아야만 우리가 보이는 구조니, 화망에 노출되는 시간도 길지 않을 거고요. 그동안 유미 씨가 철충들을 무력화하고, 우리가 나서서 마무리하고 돌아갑니다.”

 

이비의 손짓을 본 바니와 하치코가 무기를 점검하며 결연한 얼굴로 앞으로 나섰고, 유미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채로 안테나와 축전지를 안아 들고 자리를 잡았다. 소완은 주방 칼 세트를 펼쳐놓고 있었고.

 

“.....”

 

여전히 뭔가 떨떠름한 기분이긴 했지만, 나는 이비의 계획에 잠자코 따라주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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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쿵쿵거리는 육중한 걸음과 짐승의 숨소리처럼 불길하게 쉭쉭이는 소리가 점차 가까이 다가온다. 

 

건물 모퉁이에 각자 몸을 숨기고 준비를 갖춘 메이드들과 유미. 방패를 단단히 쥐고 유미의 옆에서 대기 중인 하치코와 그 뒤에서 잔뜩 긴장한 채 침만 삼키고 있는 나.

 

모두가 운명의 시간이 다가왔음을 직감했다.

 

“지금입니다!”

 

이비가 신호하자 하치코와 나, 그리고 유미가 움직였다. 재빨리 길 한복판에 방패를 박아 세운 하치코, 그 뒤로 재빨리 달려가 잔뜩 웅크린 나. 그리고 파들파들 떨리는 팔로 크랭크를 마저 돌려대는 유미까지, 모두가 곧 닥칠 총알 세례를 준비하며 긴장하고 있을 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건 또 어떻게 된 일인가 싶어 방패 너머로 고개를 빼꼼 내밀어보니, 유미는 크랭크를 붙잡고서 “어, 이게 왜 이래?” 하며 잔뜩 당황하고 있었다. 아마 과부하가 걸리지 않은 모양이지. 

 

그리고 우리 앞에는 좁은 길에 꽉 들어찬 철충들이 있다. 하지만 놈들이 붉은색으로 흉흉히 빛나는 카메라는 이쪽이 아니라 영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바로 선착장 너머로.

 

노부부와 절뚝이는 H가 분주하게 보트를 준비하는 그곳.

 

 

....어 슈밤.

 

 

선두에 선 철충들 중 일부가 갖가지 무장을 선착장에 겨누더니 우리 머리 너머로 온갖 잡동사니를 던져댔다. 굵은 전선 다발, 각종 폐품, 심지어는 무슨 유탄같은 것까지 종류별로 죄다 구비되어 있다. 거 참 열심히도 준비했네.

 

“개새끼들!”

 

“서방님!”

 

한박자 늦게 떨어지는 철충들의 공격. 잔잔하던 수면 위로 온갖 잡동사니가 물보라를 일으키며 비 오듯 쏟아지고, 폭발 때문에 물기둥까지 치솟는다. 이어서 옹기종기 모여있던 오리보트와 모터보트 일부까지 박살 나서 허공을 날아다니기 시작했지만, 가까스로 노부부와 H가 있던 곳에는 타격이 없었다. 아직까지는. 

 

그러자 나머지 철충들은 그대로 우리를 무시한 채 앞으로 계속해서 다가왔다. 

 

이비와 바니, 하치코까지 모두 놈들에게 총알을 갈겨봤지만, 앞에 있던 철충 한두 놈을 무력화한 것 말고는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놈들은 우리에게 놀라울 정도로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마치 너희 따윈 그냥 밟고 지나가도 아무 상관 없다는 듯.

 

“주인님! 놈들의 주의를 끌어야 합니다!”

 

사격을 멈추고 내 쪽으로 소리치는 이비. 

 

.....아니, 대체 이런 상황에서 날 더러 뭘 어쩌란 말이니.

 

“뭐라도 좀 해보세요!”

 

그러자 이제는 입을 한데 모아 재촉하는 바니와 이비 그리고 유미. 

 

저 뒤에서는 하늘에서 쏟아지는 물건들과 물보라에 몸을 움츠리는 다른 일행들이 보였다.

 

내 앞에는 그 어떤 것에도 멈추지 않겠다는 듯 천천히 그 육중한 발을 옮기는 괴물들이 있었고. 

 

그리고 온갖 자극에 과부하를 받아 내 멍해져 버린 내 두뇌는.... 

 

또 한 번 또라이 같은 짓을 벌이고 말았다.

 

 

 

 

 

 

“호우!”

 

나는 불쑥 앞으로 나와 몸을 흔들어 재끼기 시작했다. 이성의 끈 따위는 저 멀리로 던져둔채.

 

“아저씨 지금 뭐 하셰용....”

 

얼핏 봤다간 아무런 목적 없이 흐느적대는 동작으로 보이겠지만, 이래 봬도 회식 자리 18번이었던 무근본 막춤이다. 아무리 철충이라도 요란하게 팔을 휘젓고 골반을 실룩대는 꼴을 그냥 넘길 수는 없겠지.

 

아무런 반주도 없었지만, 그와는 전혀 상관없이 열정적인 춤사위가 이어진다. ‘너 지금 뭐하냐’ 라는 듯한 눈으로 쳐다보는 메이드들의 싸늘한 눈초리가 따갑게 나를 찔러왔지만, 당장 내 눈에 들어오는 건 철충들의 당황한 듯한 눈빛뿐.

 

그리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게 또 어떻게 먹힌 것 같다. -굳이 따지자면 기계들에겐 감정도 눈도 없긴 하겠지만- 어쨌든 모든 행동을 멈추고 가만히 있는 꼴이 심히 당황한 모양새 그 자체다. 

 

혹시 내가 무슨 숨겨둔 비장의 무기라도 있어서 이러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뭐, 아주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허나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지.

 

지금 나는 한 명의 댄서, 아니, 배드보이 불리였으니까.

 

나에겐 지금 아무런 생각이 없다. 왜냐하면 지금 내겐 아무런 생각이 없으니까.


당장 내 머릿속에서는 제일 좋아하는 음악의 하이라이트 부분이 재생되고 있었고, 그에 맞추어 이 근본 없는 막춤도 슬슬 절정 부분에 다다르고 있었다.

 

“유미 씨, 지금입니다!”

 

내 등 뒤에서 이비가 신호했고, 그에 맞춰 또다시 크랭크를 뱅뱅 돌려댄 유미가 안테나를 높이 들어 올렸다.

 

 

 

 

 

 

빠밤빰.

 

내 마무리 동작과 동시에 번개보다도 강렬한 스파크가 철충들을 덮친다. ‘파자작 파자작’하는 의성어를 그대로 시각화한듯한 모양이 내 눈앞을 수 놓았고. 이내 선두에 선 수많은 철충들이 벼락에 맞고 그대로 바들바들 떨며 제자리에 멈춰 서버렸다.

 

....저 안테나가 그렇게 위험한 물건이었나. 새삼 소름이 다 돋는다.

 

“사격 개시!”

 


 


 

즉시 이비의 지시에 맞춰 일제히 철충들에게 화력을 쏟아붓기 시작한 메이드들. 이비는 아예 총을 옆구리에 끼고 연발로 갈겨대고 있었으며, 바니는 유탄에 총알까지 총동원해서 선두에 있는 철충들을 쓰러뜨렸다. 그들의 화망에서 벗어나 틈새로 파고들려는 놈들이 생겨나자, 소완은 양손에 예리한 칼을 꼬나쥐고 그대로 달려나가 녀석들을 부숴놓았다.

 

이비와 바니는 놈들의 동체에서 꼬물꼬물 기어나오는 빨간 애벌레같은 것까지 놓치지 않았고, 소완은 칼로 후려치는 곳마다 보라색 액체가 난무하는 게 아마도 벌레 째로 놈들을 박살내고 있는 듯 했다. 

 

이렇게 방패 너머로 무기를 내밀어 유탄을 쏘아대는 하치코의 뒤에서 상황을 관망하고 있으려니, 어느새 길목은 여러 철충들의 잔해로 꽉 막혀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형성된 바리케이드를 비집고 들어오려 애쓰는 소리도 저 잔해 더미 너머에서 들려오기 시작했고. 

 

앞쪽에서 잡동사니를 던져대던 놈들은 전부 부서져 나뒹굴고 있고, 뒤쪽에 있던 녀석들은 시야가 차단된 탓인지 공격을 중단하고 장애물 돌파에 힘을 보태는 눈치였다.

 

“저 정도면 잠깐은 버텨줄 겁니다. 어서 선착장으로 이동하시죠.”

 

이비가 탄창을 갈아 끼우며 우리에게 말했다. 

 

소완은 날이 상해버린 칼들을 보며 미간을 찌푸리더니 떠날 채비를 했고, 유미는 다리가 풀려서인지 바닥에 주저앉아있었다. 내가 유미를 일으켜 부축하는 동안 바니는 그녀의 짐을 챙겨주었고, 이비의 지시로 소완과 하치코가 후방을 주시하며 재빨리 발을 옮겼다.

 

할아버지가 그 정신 없는 와중에도 애써주신 덕분일까, 우리가 갔을 때는 준비가 거의 끝나있었다. 물보라를 일으키며 보트가 출발하자, 어느새 장애물을 뚫고 우리에게 달려오는 철충들이 보인다.

 

아뿔사, 놈들이 우리 예상보다 일찍 길을 뚫어버렸다.

 

아직 그리 멀리 나오지 않은 상황. 우리는 놈들의 공격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다. 거리를 벌릴 때까지만이라도 어떻게든 해보려는 심산인지 이비와 바니, 하치가 무기를 부여잡고 놈들을 겨누고 있다.

 

하지만 철충들은 그저 닭 쫓던 개처럼 우릴 멍하니 쳐다볼 뿐이었다.

 

아니, 놈들은 오히려 주춤주춤하며 조금씩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인데도 불구하고 그저 물가에서 멀어지려고만 할 뿐이었다. 이비와 다른 일행들도 갑자기 저놈들이 왜 이리 얌전해졌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 표정들을 하고 있고.

 

어쩌면 놈들은 물을 싫어하는 건가. 하기사, 어쨌든 몸은 일단 기계니까 습기가 달가울 리는 없겠지. 짠내가 조금씩 느껴지는 게, 이곳이 바다 근처라 특히 더 그런건가 싶기도 하다. 금속류에 소금기는 쥐약이니까.

 

이렇게 철충이란 것들에 대해 시답잖은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문득 예전에 다큐멘터리에 봤던 장면 하나가 떠오른다. 

 

겁에 질린 채로 물가에서 뒷걸음질 치며 주춤대는 영양들. 그 동물들은 물 자체를 무서워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 물 속에 도사리고 있는 것, 방금 자기 동료의 목을 채간 악어를 두려워하고 있었던 거지.

 

어쩌면....저놈들도 물이 아니라 물 속에 있는 무언가를 두려워해서 저러는 걸까?

 

이제 보트는 아까 떠나놨던 선착장이 희미하게 보일 정도로 멀리 나와 있었다.

 

.......

 

아까의 의문은.... 아무래도 나로서는 알아낼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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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모로 바빠서 글 쓰는 게 늦었읍니다 흑흑

이제 3부까지 한 회차 남았네요.

매번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