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080기관의 몇몇 자매들이 모인 자리에서 난데없이 질문이 날아들었다. 모두의 여동생인 닥터는  은근히 귀를 쫑긋 세우며 내 대답을 기다리는 눈치였고, 질문을 한 당사자인 니키는 두말할 것도 없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면서 내 반응을 관찰하고 있었다.


'이거.. 말을 돌리는 정도로는 벗어나기 힘들겠는데..'


그동안 숙련된 첩보원의 감각이 본능적으로 경고음을 울리고 있었지만, 이것에 굴복하면 첩보원으로써 쌓아온 자존심에 상처를 입는 일. 자매들에겐 아쉬운 일이나 사령관 님의 정보를 누설할 수 없었다.


"음~ 멋진 분이죠. 일단 너무 자상하세요."


짧은 답변에 맥이 빠진 듯 닥터가 볼을 부풀리며 불만을 표하고 니키 역시 아쉽다는 듯 맥주를 훌쩍이며 입을 삐죽였으나 그녀 역시 080기관의 요원. 바로 감정을 수습하고 다른 질문을 하며 공세를 시작했다.


"흐응~ 생각보다 시시한 남자네? 소문과는 다른 모양이야."

"무, 무슨 소리죠? 소문이라니."

"뭐야? 관심이라도 있어?"

"흥! 과, 관심이 아니라.. 아니, 그것보다 처음 그 말은 뭔가요! 시시한 남자라니! 그런 언사는 불경해요, 니키!"


과연 소문에 관심이 없다면 그것은 거짓말이겠지. 다른 누구도 아니고 사랑하는 남자에 관련된 소문이란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얻고 싶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니키가 말한 처음 부분이 거슬렸다. 사령관 님을 무시하는 것 같은 언사에 나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졌다.


"이거 우리들 끼리 있으니 하는 말이지만.. 사령관 말이야, 밤에는 굉장한 야수가 된다고 하던데?"

"그, 그건..."


솔직히 그런 소문이라면 부정할 수 없는 노릇이다. 지금도 왼손에서 반짝이는 반지를 어루만지며 사령관 님에게 안기던 때를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니까. 그의 사랑을 독차지하기를 바라는 한편, 과연 이대로 지낸다면 내 몸이 온전할까 싶을 정도였다.


"화, 확실히.. 대단하긴.. 하시죠.."

"오오! 역시 소문은 사실 이였나."

"가끔 저를 품으시면 제 몸이 남아나지 않을까 걱정이 될... 아!"


어느새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귀를 기울이는 닥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와 입을 틀어 막았다. 아직 그녀에겐 이른 이야기였고, 사령관 님께서 특별히 당부하신 것들이 있어 조심할 필요가 있었지만, 니키의 가벼운 도발에 흔들려버리고 말았다.


"다, 닥터에겐 아직 빠른 이야기니 여기까지 하지요."

"에엣! 시라유리 언니! 난 괜찮.."

"크흠! 확실히.. 닥터에겐 아직 빠르려나."


다행히 니키 역시 내 편을 들어주며 닥터의 귀여운 불만을 잠식 시켰다. 남녀의 정신적 사랑 말고 육체적인 사랑이란 심오한 녀석이고, 그것을 닥터에게 다 말해주기엔 역시 도덕적으로 올바른 일인가 싶었다. 사령관 님께서도 특별히 신신당부 하기도 했고.


'그래도.. 그것만 아니라면, 다른 것들은 말해도 괜찮겠죠.'


사랑에 꼭 육체적인 결합만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니키의 질문을 조금 비틀어서 생각하면 답해주지 못할 것도 없었으니.


"이런 것들로 답변이 될까, 저도 잘 모르겠지만.."

"응! 응!"


결국 못이기는 척 사령관 님에 대해 말하려 운을 띄우자 닥터와 니키가 허겁지겁 곁에 다가와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소중한 동료들이고, 그녀들 역시 사령관 님에 대해서 알았으면 좋겠다 생각했으니까.


"전 첩보 요원으로써 태어나 훈련 받았어요. 뭐, 같은 기관의 동료들이니 잘 아시겠지만요."

"그렇지. 나도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사실 저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막연하게 누군가를 위하는 것이 사랑일까? 그렇다면 그것은 단순하게 충성심이라고 생각해도 좋지 않은가. 하지만 단순히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미묘하게 다른 것들이 많았다.


"처음에는 단순한 충성의 대상이었어요."


본능적으로 각인된 충성.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을 뿐이었다.


"당연하게 모셔야 할 대상이고, 충성을 다 받칠 사람이다. 그렇게 생각했었죠."


이유 없는 충성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지만,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어느새 변해버린 제가 있었죠."

"변해? 설마 충성심이 흔들린다거나?"

"설마요! 충성심은 여전해요. 다만, 충성심과 다르게.. 더 깊은 부분을 생각하게 됐죠."


오히려 충성심은 깊어졌다. 다만, 머리로 생각하는 충성과 다르게 가슴이 시켜 움직이는 경우가 많아졌다.


"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니, 매일같이 사령관 님의 얼굴을 떠올리며 혼자 웃는 일이 많아졌어요."

"그런게 사랑일까?"


닥터는 그런 질문과 함께 큼직한 눈을 깜빡이며 홀로 생각에 잠겼다. 나는 그것에 대답을 할 요량으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을 이어나갔다.


"단순히 그의 얼굴을 떠올리는 것 말고.. 내 모든 것들을 그를 위해 쓰고 싶어졌어요."

"아! 시라유리 언니의 말 조금은 알 것 같아!"

"푸훗! 우리 닥터, 벌써 어른이 되려고 하는 건가요? 아무튼.. 처음에는 그저 복종의 대상에서, 어느새 내 모든 것들을 다 주고 싶은 대상으로.. 비유적인 의미가 아닌, 진심으로 보잘 것 없는 제 목숨 까지 전부를 바치고 싶은 분이 되었어요."


이제 와서는 내 신념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게 되었다. 오로지 080기관의 일원으로써, 기관의 활동을 위한 톱니바퀴로써 행동하던 과거의 나는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에 장작과 같이 하얗게 불타 없어졌다. 임무를 위해 죽어야 한다면 미련 없이 목숨을 포기할 수 있던 과거의 나는 사라졌다.


"예전의 저는 임무의 수행을 위해, 그리고 기관을 위해서 라면 망설임 없이 죽을 수 있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아니랍니다."

"뭐? 그건 곤란해 시라유리. 우린 080기관의..."


내 말에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는 니키의 말을 가볍게 제지하고 나는 그녀에게 설명을 이어나갔다.


"놀라지 말아주세요. 단지, 충성의 대상이 기관이 아닌.. 한 사람이 되었을 뿐이랍니다."

"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사령관 님이지요. 그분은 저에게 삶의 이유가 되어주셨어요."


맹목적으로 복종과 충성을 각인하던 기관과 다르게, 그는 언제나 사랑으로 보듬어 주었다. 나는 그것에 보답하고 싶었다.


"사령관 님에게 영원히 변치 않을 충성을 맹세하던 날, 그가 저에게 내린 첫 명령이 무엇인지 아시나요?"

"글쎄..."

"당신을 위해 죽지 말라고 하셨죠. 무슨 일이 있어도 임무보다 생존을 우선하라 하셨어요."


그는 명령이라는 표현을 싫어했다. 언제나 명령보다는 부탁하는 사람이었고, 자신의 욕심보단 우리들의 욕심을 먼저 채워줄 궁리를 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다음으론 이것도 강조하셨어요. 힘든 일이 있다면 언제든 찾아와 당신께 머리를 기대고 의지해 달라고 말이죠."

"그건.. 풋! 확실히, 나한테도 그랬어. 사령관이란 남자는."


니키 역시 내 말에 무언가 깨달은 것 같다는 표정으로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고,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마지막으로 설명을 덧붙였다.


"길고 장황하게 이어진 말이지만.. 짧게 니키, 당신의 질문에 대답하자면.."

"응? 아~ 사령관 님을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이었지?"

"네, 그것에 짧게 대답하자면.. 살아보고 싶어졌어요."

"살아보고 싶어졌다? 뭐야 그건.. 지금도 살아 있잖아."


너무 짧게 대답한 것일까. 니키가 의문부호를 띄우듯 고개를 갸웃거렸고, 나는 미소 지으며 살며시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사령관 님, 당신 덕분에.. 한번 살아보고 싶어졌어요. 정말 살아가는 것 처럼.. 언젠가 야트막한 초원 위에 우리들만의 집을 짓고, 함께 살아가면서.. 웃고, 떠들고.. 사랑하는 사람 곁에서 잠에드는.. 그런 삶을 살아보고 싶어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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