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사령관과 부사령관이 실종되고 하루가 지났다. 오르카호의 간부들은 혼란과 절망에 빠진 부대원들을 어떻게든 달래며 오매불망 그들을 찾았다는 소식만을 기다리고 있었고, 마침내 에이다로부터 연락이 왔다.


[보고드립니다. 수색에 나선 알바트로스 지휘관이 세 명을 찾았습니다. 다만 셋 다 바이오로이드로 사령관님과 부사령관님은 없습니다.]


"뭣이라...? 그게 무슨 말이오? 대체 누굴 찾았다는 뜻이오?"


[위성사진을 보내드리겠습니다.]


용이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자 에이다는 위성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보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지휘관급 간부들이 모여 사진을 보자 거기에는 알바트로스가 사람 셋을 마주하는 장면이 위에서 내려다보는 각도로 찍혀있었다. 한 명은 부사령관의 부관인 리디아, 다른 한 명은 오렌지에이드가 말했던 펙스의 유미, 그리고 또다른 한 명은 새로 합류한 걸로 보이는 바이오로이드. 정말로 사령관도 부사령관도 없었다.


"으음... 아무래도 부사령관 각하와 떨어지게 되었나 보군. 리리스 경호실장이 안보이는데, 부사령관과 같이 있는건가?"


마리가 그들의 현재 상황을 정확하게 짚어냈다. 비록 그들이 원한 수색 결과는 아니지만 저들 또한 오르카의 부대원인 만큼 저들이라도 먼저 데려와야 한다. 그러나 어떻게 데리고 올 지가 문제였다.


"그럼 뭐, 쟤들 위해서 수송기 띄워? 말해두겠는데, 펙스 영토에 비행기를 보내려면 내 둠 브링어나 스카이나이츠가 호위로 같이 가던가, 아님 그 일대를 정리해놓던가 해야돼. 난 사령관 찾을 때를 대비해 전력을 온존해놓고 싶다고."


"비행기를 쓰기보단... 세 명 뿐이라면 스카이나이츠가 가서 한 명씩 직접 안고 돌아오는 것도 방법일 것 같소"


"아, 그렇게 할까?"


[당신들은 기다리고 계십쇼, 제가 나가서 데려오겠슴다. 리디아 걔는 저희 식구니까 제가 맡아야하지 않겠슴까.]


통신 화면 너머의 트레저가 자진해서 가겠다고 했다. 따지자면 그는 간부급이 아니긴 하나 부사령관측 사람 중 가장 짬밥이 높은 이였기에 닥터가 이 모임에 부른 것이었다.


"아니, 야. 네가 저기있는 미국땅까지 오고가려면 필수적으로 수송기를 띄워야하잖아, 내가 한 말 못들었어?"


[닥터랑 아자즈가 제 몸을 업그레이드해줬슴다. 이젠 저도 비행이 가능하지 말임다. 형님을 찾을 탐지기도 있으니 운 좋으면 형님도 찾아올지도 모르죠.]


"탐지기... 라고 하셨소?"


"그 부분은 내가 설명하도록 하지!"


거기서 끼어든 건 그새 눈가에 다크서클이 짙어진 닥터였다. 알바트로스, 로크에게 맡기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을까 머리를 싸매던 닥터는 기어이 새로운 발명품을 만들어냈다.


"모든 바이오로이드에겐 머릿속에 뇌파 감지기가 들어있다는 거 알지? 그리고 생체신호 감지기도. 그걸 통해서 눈앞에 있는 사람이 인간인지 바이오로이드인지 구분할 수 있으니까 말이야.

원래 그 감지기의 작동 범위는 해당 바이오로이드의 반경 10 미터를 넘기지 못해, 하지만 그 감지기를 토대로 만든 광역 탐지기는 훨씬 넓은 범위 안의 인간 뇌파와 바이오로이드 생체신호를 파악할 수 있어!"


"그럼, 서방님을 찾을 수 있단 뜻이오!?"


"그런 게 아냐. 아직 시제품이라 오빠의 특정 뇌파만 가려서 찾아낼 수는 없어. 탐지 범위 안에 있는 철충들의 뇌파도 전부 다 감지해낼걸. 바이오로이드도 마찬가지고."


"그러면 무슨 소용이..."


"아 정말, 끝까지 들어봐! 오빠는 라비아타 언니랑 같이 있고 둘째 오빠는 아마 리리스 언니랑 같이 있을 거잖아? 그러면 인간의 뇌파와 바이오로이드의 생체신호가 하나씩 나란히 붙어있는 걸 찾으면 돼."


"무슨 뜻인지 알 것 같군. 그러면 지금 트레저의 머릿속엔 기존의 감지기가 아닌 그 탐지기가 삽입되어있는 상태인가?"


"아니, 뇌를 건드리는 대수술을 하기엔 시간도 없었고. 억지로 탐지 범위를 한계까지 높인거라 바이오로이드가 직접 쓰면 두통이라던가 그런 부작용이 있을 지 몰라서 안했어. 대신 두통을 느낄 일이 없는 AGS 언니한테 붙여줬지, 둘째 오빠네 포트리스 언니한테 말이야!"


[그러니 저와 포트리스 둘이서 나가 리디아 일행을 데리고오겠슴다. 겸사겸사 탐지기도 한번 돌리고요.]


"참고로 포트리스 언니도 로켓 추진기를 대폭 강화해서 비행기 가능해."


"...알겠소. 이 시간에도 알바트로스 지휘관은 저들을 데리고갈 수송 부대를 기다리느라 수색을 못하고있으니 지체해선 안되겠군. 트레저, 이 임무는 당신에게 맡기겠소. 에이다, 알바트로스 지휘관의 현재 좌표를 전달해주시오."


그렇게 해 오르카호의 간부들과 부대원들은 사령관 소식을 기다리며 계속 대기하기로 하고, 트레저와 포트리스 둘이서만 리디아 일행부터 데리러 오르카호에서 떠나 미국으로 출발했다.


에이다로부터 알바트로스가 리디아 일행을 데리고 수색을 재개했다는 추가 보고를 들었을땐 이미 트레저가 통신불가 영역으로 들어간 뒤였다.



*



몰려오는 철충떼를 피해 승강기에 탄 뒤 무게추를 끊어버려 폐공장 지하로 떨어지는 덴 성공했다. 다만 예상 못했던 게 의외로 공장의 지하 공간이 상당히 깊고 넓었다, 1층이 아니라 무슨 수십층 높이에서 떨어진 것 같다. 승강기의 안전장치가 어떻게든 제동을 걸어 떨어지던 중 멈춰서 땅에 곤두박질 치는 건 면할... 뻔 했으나 노후화는 어쩔 수 없었는지 안전장치가 혼자 부숴져버려 결국 땅에 추락해버렸다. 그래도 지상에서 직통으로 추락한게 아니라 중간에 가속도를 줄여준 덕에 충격을 좀 줄일수는 있었다.

그래서 내가 죽지않고 존나게 아파하는 걸로 끝났지.


"아오... 내 허리... 허리가아아...!"


"부사령관, 당신 낙법 안했습니까?"


"난 애초에 현장에서 구를 일이 없었으니까 안배웠지...!"


"가만 보면 당신은 단기전에 특화된 것 같단 말이죠. 눈 앞에 보이는 문제는 처리할 수는 있지만 그 뒤의 일은 신경쓰지도 않고 어떻게 될지 생각하지도 않는군요."


"...틀린 말은 아니네. 그래 뭐, 내가 아르망처럼 큰그림 그리는 능력은 없어도 여태껏 잘 살아남았다고." 


리리스가 바닥에서 꿈틀대는 나를 부축해 일으켜세워주면서 주변을 둘러봤다. 전기가 대부분 끊겨 어두웠긴 해도 완전한 암흑은 아닌 게 곳곳에 비상등이 켜져있어 어렴풋하게나마 이 장소의 형체를 볼 수 있었다.


"지하에 이런 거대한 공간이 있었을 줄이야... 상상도 못했네요."


"그러게 말이다. 여기서 거대로봇이라도 만들었나, 왜이리 넓어? 실내인데 대형 크레인도 있네."


"흐음... 그런 종류를 만든 건 아닌 것 같네요. 저길 보세요"


검지로 정지된 컨베이어 벨트 위에 놓여져있는 기계 부품들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폴른의 외장입니다. 지상에선 평범한 건축 자재나 부품을 찍어내는 공장이었지만 지하엔 군사 병기를 대량생산하기 위한 공장을 만들어놨군요."


리리스는 잠깐동안 공장을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다시 내게 시선을 맞췄다.


"자, 이제 현실을 직시해보죠! 지하로 피신한 건 좋았지만 승강기도 망가졌는데 이제 여기서 어떻게 나갈 겁니까? 오히려 여기 갇혀버렸잖습니까!"


"아니 그래도 사방에서 쏟아지는 철충한테 포위되는 꼴은 면했잖아? 이 높이면 철충도 그냥 뛰어내렸다간 낙사할테니 바로 못올테고..."


"네, 철충한테 포위되는 대신 땅과 땅 사이에 포위돼버렸으니까 그렇죠. 그래서 어떻게 지상으로 올라갈 생각이죠?"


"다른 승강기가 있겠지."


"다른 승강기는 전부 지상 1층에 있는데가 전기가 끊겨 내리지도 못합니다. 올라간다 쳐도 지상에는 철충이 이 건물을 포위하고 있을텐데 그건 어떻게 할겁니까?"


"승강기는 못써도 비상 계단이 하나쯤은 있겠지. 한번 찾아보자. 나간 뒤의 일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어두워서 잘 안보이긴 하는데... 곳곳에 철제 계단은 좀 있네요, 하지만 지상까지 이어지는 계단은 없군요. 중간중간 부숴지거나 끊긴 계단도 많고요... 일단 움직여보죠. 정 다른 방법이 없으면 여기있는 승강기 통로의 벽이라도 기어올라야... ...! 숨어요, 빨리!"


리리스가 내 팔을 잡아당겨 가까운 기둥 뒤로 끌고왔다. 우리가 승강기 방향을 등지고 기둥에 몸을 바짝 기대어 몸을 숨긴 직후 왠 바람 소리가 들리나 했더니 승강기 통로로 커다란 무언가가 쾅 하고 떨어졌다. 그것의 발밑에 있던 승강기는 그 충격으로 이젠 형태도 유지하지 못하고 완전히 납작해져 버렸다. 기둥 너머로 고개를 슬쩍 내밀어보니 뭐가 떨어진 건지 알 수 있었다.


낙하의 충격을 버틸 수 있을 정도로 쓸데없이 튼튼한 저거너트가 우리를 쫓아 지하로 뛰어내린 것이었다.


또 이 전개인가. 하여간 어딜 가든간에 중과부적의 적이 나타나고 난 도망가거나 숨고, 어떻게 맨날 이 지랄이냐... 이 거지같은 인생...


어두운 환경에 맞춰 저거너트의 눈의 조리개가 촤르륵 돌아가는 소리가 슬쩍 들려왔다. 아무래도 놈은 아직 우릴 찾지 못한 것 같다, 찾았으면 바로 여기 달려들어 기둥을 박살냈겠지. 옆에 있던 리리스가 소근거리며 말을 걸었다.


"제 화력만으론 저걸 처리하긴 힘듭니다. 좋은 생각 있습니까?"


"그럼 지형지물을 써보자. 프레스기로 유인해 찍어버리던가, 펄펄 끓는 용광로에 담궈버린다던가..."


"여긴 가동 중지된 지 오래인 폐공장입니다, 잊었습니까? 프레스기도 전부 멈췄고 용광로도 차갑게 식은 지 오래라고요."


"...그냥 조용히 튀자 그럼."


저거너트가 우릴 찾아 해매는 사이 조용히 출구를 찾아야 한다. 일단 저 승강기 통로는 저거너트가 주변에 있는 이상 쓰지 못한다, 저놈이 멀리 가길 기다리느니 우리가 다른 곳을 찾아보는 게 더 나을거다. 우리 둘은 저거너트의 시야를 피해 기둥에서 벗어나 살금살금 걸었다. 


허구한날 사령관실 환풍구에 숨어드는 경력자답게 리리스는 은밀히 이동하는 법을 알고있었으나 문제는 내가 안그랬다는 거다. 바닥을 제대로 못본 탓에 왯 철쪼가리가 발에 걸려 찰그랑하는 쇳소리가 났고, 그 순간 저거너트가 눈을 맹렬한 빨간색으로 빛내며 고개를 돌렸다.


"아 이런 씨ㅂ-"


"뛰어요! 빨리!"


저거너트가 괴성을 질러대며 무시무시한 기세로 돌진하자 나와 리리스는 급박하게 반대 방향으로 뛰었다. 그것도 차라리 저거너트 혼자서 쫓아오는 거였다면 나았을까, 아까의 포효가 나를 찾았다고 소리지른 거였는지 스카우트와 와습 따위의 비행형 철충 열댓마리가 지하로 내려왔다. 근데 저거너트 쟤 입 열리는 게 가능한 구조였어?


리리스가 간간히 뒤에다 총을 쏘며 스카우터를 한두마리 제거하긴 했지만 저거너트는 도무지 쓰러러질 않았다. 어두운 지하 공장 안을 뛰어다닌 지 1분도 안되어 정면에서도 철충 공군이 몰려왔다. 우릴 추격하고있던 놈들이 앞지른 것이 아니라 정말로 앞쪽에서 증원이 날아왔다.


내 체력도 한계였고, 양방향에서 포위되자 우린 발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리리스가 공세를 전환할 기회였다.


"숙이세요!"


그 외침에 내가 곧바로 몸을 낮추자 리리스는 기다렸다는 듯 양손에 쥔 권총으로 화려한 건카타를 선보이며 사방을 향해 불을 뿜기 시작했다. 얼핏 보면 사방팔방 난사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녀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것도 빠른 속도로 방향을 바꿔가며 자신을 향해 몰려오는 적들에게 정확히 총알을 박아넣었다.


그러면서도 나나 리리스에게 오는 공격을 로자 아줄로 막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제자리에서 권총 두 정 만으로 전 방향을 커버할 수 있는건 그 블랙 리리스이기에 가능한 신기였다. 스카우터와 와습이 차례차례 낙엽처럼 떨어지고 끝내 공중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하지만 땅 위에는 저거너트가 남아있었다. 날벌레들을 다 처리한 리리스가 저거너트를 향해 집중적으로 공격을 퍼부었지만 저거너트를 주춤하게 만들 뿐 장갑을 뚫진 못했다. 일단 저놈이 양팔로 머리를 감싸느라 앞을 못보고 있어서 당장 달려들진 않고 방어만 하고 있다. 리리스 혼자였다면 빈틈을 찾아 노려볼만 했겠지만 나를 보호한다는 임무때문에 내 곁에서 멀리 떨어질 수 없어 그럴수도 없었다.


이 상황을 타파할 다른 수가 필요하다. 뭔가 주변에 쓸만한 게 없을까 둘러보던 중 땅에 떨어진 스카우터의 잔해가 눈에 들어왔다. 정면에서 온 철충의 증원, 그놈들은 어디로 들어온 거지? 놈들이 왔던 방향으로 눈을 찌푸리니 과연 또다른 출입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승강기가 아닌 비상계단과, 그 끝에 있는 휑하니 열려있는 문. 저기가 바로 지상으로 갈 수 있는 탈출구다.


"리리스! 출구를 찾았다!"


"앞장서세요! 따라가겠습니다!"


내가 먼저 출구를 향해 뛰자 리리스가 견제사격을 유지하며 따라왔다. 그러자 우리가 도망치려 한다는 걸 눈치챈 저거너트 또한 리리스의 공격을 몸빵으로 버티며 집요하게 쫓아왔다. 이 지하 공장의 복잡한 내부 구조 때문에 마냥 평지에서처럼 이동할 순 없었다. 철골로 된 계단을 오르고, 높은 곳에 설치된 철망으로 된 작업발판 위를 건너며 출구로 이어지는 계단을 향해 뛰었다. 발판이 생각보다 튼튼해서 저거너트가 올라왔음에도 삐걱거리기만 할 뿐 무너지거나 하진 않았다, 덕분에 좀처럼 추격을 뿌리칠 수도 없었다. 


어느덧 건물 몇층 높이에 있는 발판 위를 뛰고있었다, 가뜩이나 난간도 성하지 않은데 발 한번 삐끗했다간 낙사할거라 생각하니 괜히 더 무서워졌다. 그러나 저기있는 출구로 이어지는 비상 계단은 명백히 사람이 쓰는 크기다, 저거너트의 덩치와 무게로는 오를 수 없을 것이다. 우리 둘이 비상계단의 맨 밑에 도착할 때 쯤 저거너트가 추격을 멈추나 싶더니 주변에 있는 기계를 잡아뜯어서 비상계단에다 집어던졌다, 그리고 계단의 그 쇳덩이에 맞은 부분이 박살나 끊어져버렸다.


"계단이...! 저 망할 벌레놈이!"


"진퇴양난이군요... 아아, 주인님... 착한 리리스는 먼저 가서 길 닦아놓고 있을게요...!"


"가긴 어딜 가, 정신 차려 임마!"


출구로 갈 수 있는 길이 사라져버렸다. 설령 벽을 등반하려해도 저거너트가 투석기마냥 주변에 있는 물건을 있는대로 던질텐데 벽에 붙은 채론 피하지도 못한다. 그리고 발판의 양 옆은 절벽이나 다른없는 높이, 저거너트가 퇴로가 끊긴 우리에게 다가왔다.


개틀링으론 로자 아줄의 방어력을 뚫을 수 없다는 걸 학습한건지 더이상 개클링을 쓰지 않고 물리적으로 패러 묵묵히 걸어왔고, 오히려 그랬기 때문에 그 기세에 압도되어버려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다가 발치에 무언가 닿았다. 밑을 내려다보니 팔뚝만한 갈고리가 쇠사슬에 이어진 채로 발판에 떨어져있었다. 사슬은 위로 이어져있었고, 사슬을 따라 시선을 올리니 사슬의 끝이 크레인의 도르래 부분에 이어져있는 게 보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망가진 크레인이었다, 도르래 반대쪽으로 빠져나온 사슬은 크레인에 이어져있질 않고 끊긴 채로 여기서 조금 떨어진 곳의 바닥에 힘없이 쳐져있었다.


"이거 잘하면... 리리스, 이 갈고리 들 수 있겠어?"


"...? 이 정도야 들 수 있죠."


제법 묵직할텐데도 리리스는 가볍게 사슬에 이어져있는 갈고리를 한손으로 주워들었다.


"그럼 그거 던질 수 있겠어?"


"던져요? 어디다가?"


"저거."


검지를 들어 점점 가까이 오고있는 저거너트를 가리켰다.


"그냥 맞추기만 하는걸론 안돼, 제대로 묶어서 고정시켜야 해. 할 수 있겠어?"


"또 무슨 생각을 하는, 아니, 궁금해할 시간도 없군요... 당신이 불리한 상황에서 살아남은 게 한두번도 아니고, 칸 소장도 당신의 생존능력이나 임기응변을 높게 평가했었죠... 좋아요."


리리스가 사슬을 붙잡고 갈고리를 빙글빙글 돌리자 저거너트도 뭔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다가오길 멈추고 그 자리에 멈춰섰다. 



"똑똑히 봐두세요, 착한 리리스에겐 못하는 것 따윈 없어요!"


이윽고 리리스가 저거너트를 향해 직선상으로 묵직한 갈고리를 집어던지자 저거너트는 자연스레 손을 뻗어 그것을 붙잡으려했다. 그러나 그것은 리리스의 노림수였다. 저거너트의 손이 갈고리에 닿기 직전 있는 힘껏 사슬을 당겨 저거너트가 헛손질하게 만들고, 사슬은 끝에 달린 갈고리를 무게추삼아, 그리고 리리스를 회전축 삼아 크게 한바퀴 돈 뒤 저거너트의 몸체의 옆을 강타하자 갈고리가 순간적인 원심력으로 저거너트의 몸을 휘감았다, 볼레아도라스라고 불리는 사냥도구로 대상을 칭칭 감아 무력화하는 것과 같은 방식이었다.


일시적 무력화이긴 하나 저거너트가 눈 깜짝할 새 사슬에 묶여버렸고 그와 동시에 관성으로 인해 옆으로 기우뚱하더니 발판 옆으로 떨어져버렸다.


"자, 말한대로 묶ㅇ-"


"아니 아직 떨어뜨리라곤...! 반대쪽 사슬 잡아! 어서!"


저거너트가 밑으로 추락하며 그것을 묶고있던 사슬이 촤르륵 내려가자 도르래 반대편으로 나와있던 사슬이 빠른 속도로 올라가고 있었다. 리리스는 이 사슬이 어디에 이어져있는건지, 내가 무슨 생각인지 이제야 눈치챘다.


나와 리리스는 거의 동시에 발판에서 뛰어 위로 올라가는 사슬을 향해 손을 뻗었다. 리리스는 사슬을 붙잡는데 성공했으나 나는 그녀와 달리 도약력이 부족했다. 내 손은 사슬에 닿기까지 거리가 남아있었다, 그러나 그 짧은 찰나 리리스가 반대쪽 손으로 내 손을 잡아줬다. 저거너트는 지하 깊숙이 떨어졌고, 난 그녀와 함께 사슬을 타고 올라갈 수 있었다.




좀 전에 봤던 출구 높이까지 오자 리리스는 나를 먼저 집어던지고선 그녀또한 사슬을 잡고있던 손을 놓고 뛰었다, 그 다음 공중에서 나를 붙잡은 뒤 사뿐하게 출입구 앞에 착지했다.


그리고 나는 지금 그녀한테 공주님 안기 포즈로 안겨있다.


"...내려줘."


"안그래도 그럴거에요. 당신이 낙법만 할 줄 알았어도 이럴 필요는 없었는데..."


리리스한테서 내려 바닥에 발을 딛고 밑을 내려다보자 쬐끄만하게 보이는 저거너트가 사슬을 끊고 우릴 향해 고래고래 소리지르고 있었다. 이럴때 쓰는 딱 좋은 대사를 알고있지.


"철충이여, 잘 기억해둬라! 오늘을 이 오르카 부사령관을 잡을 뻔 했던 날로!"


"하루종일 굶었으면서 소리칠 기운은 남아있습니까? 저놈이 벽 타고 올라오기 전에 빨리 나가기나 해요."


"그래, 그래야겠다... 그나저나 넌 아쉽겠어, 이런 아슬아슬한 탈출은 니 주인이랑 해야 더 극적이었을텐데."


"그 반대죠. 이런 위험에 노출된 게 주인님이 아닌 당신이여서 얼마나 다행인지..."


깔끔하게 인성질도 마친 나는 지하에 남은 저거너트를 뒤로하고 공장 1층으로 나왔다. 빨리 햇빛을 보고싶어 정문을 열고 공장 바깥으로 나오자 수많은 나이트칙과 재퍼, 팔랑스가 우리 둘을 성대하게 환영해주었다.


"아, 시발 진짜..."


"제 곁에서 떨어지지 마세요!"


리리스가 우리 둘을 감싼 구체의 방어막을 만들어 철충들의 총알세례를 막았다. 물론 거기서 그치지 않고 쌍권총으로 반격해 전열에 있던 나이트칙들을 몇 마리 파괴했으나 남은 철충들이 팔랑스의 방패 뒤에 숨어버려 좀처럼 쉽게 처리할 수 없게됐다.


"탄창은 충분해!?"


"지금 장전돼있는 게 마지막 탄창입니다!"


그 말을 마치고선 얼마 안가 그녀의 권총이 불을 뿜는 대신 짤각거리는 소리만 내게 되었다.


"...그리고 방금 쏜 게 마지막 총알이었고요."


"망했다..."


공격수단이 사라진 걸 눈치챈건지 철충들이 더 거세게 공격을 퍼부으며 포위망을 좁혀오고, 거기다 하늘에선 적의 공군까지 날아오고 있었다.


가만, 철충이라기엔 저거 색이 검정 빨강 조합이 아닌 거 같은데.


이쪽으로 날아오던 두 대의 로봇이 속도도 줄이지 않고 우리 앞에 추락하듯 착륙하고 나서야 그것들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들과 철충들의 사이에 한 대의 셀주크, 그리고 한 대의 포트리스가 나타났다.


"형님! 제가 왔슴다 형님!!"


"포트리스, 합류합니다."


"트... 트레저!? 포트리스까지...!?"


"아군 보호 모드 발동합니다."


포트리스가 스스로를 고정모드로 바꾼 뒤 철충들을 향해 기관포 사격을 개시했다. 트레저 또한 철충한테 무자비하게 직사포를 쏘는 한편 가까이에 있는 철충은 아예 벌레 잡듯이 발로 짓밟아서 발살내버렸다. 역시 거대로봇...


저 둘이 어그로를 끌면서 우리 앞에 나서준 덕에 나와 리리스는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재퍼 한 대가 트레저에게 테이저건을 쐈으나 트레저는 전기 충격에 아파하긴 커녕 너 이새끼 잘걸렸다 하고 중얼거리더니 역으로 손에 테이저건의 전선을 붙잡고선 재퍼를 철퇴삼아 마구 휘둘러 주변의 철충들을 박살냈다. ...아니 잠깐 쟤 손은 언제 붙인거야?


얼마 지나지 않아 둘이서 이 폐공장 일대의 철충 한 다스를 싹 정리해버리고 나서야 제대로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상황 종료. 이동 모드로 전환합니다."


"벌레놈들 청소 끝났슴다 형님!"


"트레저! 구하러 와줬구나, 오랜만이다!"


"오랜만이라뇨... 우리 오르카호에서 나온지 하루밖에 안지났어요."


"말이 그렇다는거지 말이. 그래서, 그... 먹을 거 있냐?"


"암요! 형님이랑 리디아 굶었을까봐 트렁크에 비상식량 한가득 챙겨왔슴다!"


"...언제부터 너한테 트렁크가 있었어?"


"오늘부터요. 개조 수술 받았거든요."


트레저가 몸을 낮추더니 몸 밑부분이 열리며 장롱 같은 게 내려왔다. 식량 중에 초코바도 있길래 두 개 꺼내서 하나는 리리스한테 건네주고 하나는 내가 포장 뜯으며 질문을 계속했다.


"아 그래, 개조라... 그 손에다가, 날아다니는 거에다가, 뭔가 잔뜩 업그레이드 받았나보네. 너도 그렇고, 포트리스도 날아서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긴 생각해보니 셀주크 스킨 2스 보면 로켓 추진으로 막 장거리 점프하고 그랬었지. 포트리스는 원래부터 로켓 추진으로 이동하는 기능이 있었고. 그래도 그렇지, 그걸 더 개조해서 아예 비행이 가능할 정도로 하는게 가능할 줄이야.


"...날 수 있게 된 건 좋은데, 좀 제대로 착륙할 순 없는거야? 리리스 아니었으면 내가 흙먼지 다 뒤집어썼어. 아님 풍압에 날아가던가."


"비행 연습할 시간도 없이 바로 실전에 투입돼서 그랬지 말임다."


"너 전에 차 운전할때도 급발진이랑 급제동하더니만... 우물우물... 개맛있네 이거...

근데 여기 펙스 대공망 깔려있지 않아? 어떻게 온거야?"


"몸으로 막으면서 왔죠!"


"...그냥 맞으면서 왔구나. 일단 무사히 와서 다행이다. 그나저나 손 추가한 건... 다 좋은데, 그, 머리 달린게 좀... 거시기하네."


"역시 그렇죠? 이거 머리부분 떼서 생긴 걸 드레드노트같은 느낌으로 바꾸면 괜찮을 것 같지 않슴까?"


"오 그거 좋은 생각이네."


"부사령관, 아직 중요한 질문이 남아있잖습니까. 저와 부사령관이 여기 있다는 건 어떻게 알고 온 겁니까? 그것도 개조의 성과입니까?"


"그렇지. 인간 뇌파랑 바이오로이드 신호 찾을 수 있게 광역 탐지기 만들어서 붙였거든. 나 말고 포트리스한테."


닥터 아자즈 콤비가 진짜 만능 개연성이긴 하구나.


"그러면 우리 찾으려고 탐지기 붙인 포트리스 데리고 나온거야?"


"사실은 리디아를 찾았단 보고를 먼저 받았슴다. 그래서 걔부터 챙기려고 저희가 나왔는데, 막상 그 좌표에 가보니 전투 흔적만 있고 아무도 없었지 말임다. 그래서 걘 냅두고 형님부터 찾으려고 포트리스한테 탐지기 써보라 시켰더니 쟤랑 같이있는 형님을 찾을 수 있었던검다."


"리디아... 일단 살아있긴 한 모양이네. 포트리스, 사령관도 찾을 수 있겠어?"


"제 탐지기로 찾을 수 있었던 건 부사령관님 뿐이었습니다. 사령관님은 현재 탐지기의 범위 밖에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



사령관과 라비아타, 장화는 펙스의 눈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도심지가 아닌 험준한 산길을 거쳐 바다로 향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완전히 문명의 손길이 닿지 않았던 자연 속을 걷는 것은 아니었다. 어느정도 평평하게 손질된 비포장도로와 그 위에 부숴진 차량의 잔해, 컨테이너 박스로 만든 이동식 주택이 배치되어 있어 이동하면서 식량을 어느정도 찾을 수 있었다. 이 때까지만 해도 산을 거쳐 바다로 가는 게 좋은 생각이라 생각했다. 철충 정찰기인 인트루더에게 발각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바닷속 잠수함에 숨어있던 두 명의 인간이 무리에서 떨어져나와 육지에서 해매고 있고,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인간을 찾고있던 건 펙스뿐만 아니라 철충도 마찬가지었다. 철충은 북미 대륙을 점거한 기계들과 철충 사이의 반동분자들을 제거하면서도 적극적으로 수색을 펼치고 있었고, 펙스나 오르카보다 먼저 사령관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사령관 일행 또한 하늘 위의 인트루더를 확인하자 라비아타가 손으로 근처 컨테이너 박스의 한쪽 모서리를 뜯어내고, 구겨서 가늘고 뾰족하게 만든 뒤 인트루더를 향해 투창하듯 던졌다. 인트루더는 회피기동할 틈도 없이 쇠꼬챙이가 되어버려 공중에서 폭발했다.


그러나 인트루더가 죽기 전 이미 다른 철충들한테 위치를 알린 뒤였다, 사령관 일행이 멀리 도망가기도 전에 사방에서 철충들이 나타났다. 벌써 산을 포위하기라도 한 건지 어느 방향으로 가도 철충이 보였다. 장화가 나무 사이에 와이어와 폭탄을 설치해 철충의 진입을 막고 라비아타는 대검을 방패삼아 사령관을 노리는 철충의 공격을 막아봤지만 수적으로 불리한 이상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었다.


"저기다! 니들, 저 안으로 들어가!"


장화가 큰소리로 외치며 가리킨 곳은 암벽에 뚫려있는 광산의 입구였다. 입구 안쪽은 햇빛이 잘 닿지 않아 어둠밖에 보이지 않았다. 광산, 구인류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더치걸들을 가혹한 노역 속에 밀어넣은 곳 . 테마파크, 투기장과 더불어 사령관이 유독 싫어하는 장소 중 하나였으나 현재로선 저기가 최선의 탈출구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사령관과 라비아타가 먼저 광산 안으로 뛰어가고, 조금 떨어져서 뒤따라간 장화가 뛰면서 폭탄을 떨어뜨려 광산 입구를 폭파시켰다. 입구 부근의 천장을 받치고 있던 오래된 나무 지지대가 부러지자 바위가 무너져내려 입구와 근처 통로를 매워버렸다. 이로서 철충의 진입을 차단할 순 있었으나 햇빛조차 더이상 들어오지 못해 완전히 어두워져버렸다. 라비아타가 들고있는 플라즈마 제너레이터에서 나오는 은은한 불빛으론 주변을 비출 수 없었기에 장화가 손전등을 꺼내 주변을 비췄다. 폭발의 충격으로 흙먼지가 휘날리자 사령관이 마른 기침을 하며 먼지를 치우려 손부채질을 했다.


"콜록... 다들 무사해?"


"저흰 괜찮아요. 주인님은 괜찮으신가요? 혹시 다치치 않으셨나요?"


"나도 괜찮아. 장화, 고마워. 덕분에 철충의 추격을 끊을 수 있었어."


"저 흙더미로는 그리 오래 버티지 못할거야. 밖에서 철충들이 바위 치우고있는 소리 들리지?"


"으음... 일단 더 안으로 들어가보자. 다른 출입구가 있어야 할텐데..."


사령관 일행은 장화가 들고있는 손전등 하나에만 유지한 채 광산의 어둠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철충들이 먼저 입구를 뚫고 쳐들어오기 전에 그들이 다른 출구를 찾을수 있기를 빌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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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이 지하에서 나오자 다른 한명이 지하로 들어갔다네


라붕이가 들어갔던 폐공장 지하는 이렇게 굉장히 깊고 넓은 공간이라고 생각하고 봐주셈


리리스 건카타 장면은 옵치 트레일러에 나온 리퍼 궁 생각하면서 썼다


내가 이걸 사족으로 붙이는 이유는 배경이랑 액션 묘사하는게 존나 힘들어서 전달 잘 안됐을까봐 그랬음

머릿속으로 장면 그릴때는 좋았는데 글로 옮기려니 어렵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