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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는 수복실에 멍하니 서있는 사령관의 손을 꽉 잡아주며 위로했다.

"걱정마. 뇌파는 안정된거 보니 인체 수복은 성공적으로 완료됐어. 지금은 꿈이라도 꾸는게 아닐까?"

휩노스 병이 발병했다며 켈베로스가 수술실에 뛰어들자 닥터는 최대한 신속하게 철남의 몸을 수복용 관에 던져 수술을 실시했다.

그 결과, 지금 침대에 누워있는 건 철충이 아니라 인간의 모습을 한 철남이었다.

그러나 사령관에겐 표정을 일그러뜨리는 철남의 자는 모습이 그리 안정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두 손엔 난리통에 하이에나가 건넨 유채꽃 왕관 두 개가 들려있었다.

한 개는 즙과 흙먼지가 뒤섞였지만 생각보다 촘촘한 철남이 직접 만든 것이고,

한 개는 깨끗했지만 꽃들 사이가 엉성하게 엮인 하이에나가 도와준 화관이었다.

화관을 쥐고 서글픈 표정을 짓는 사령관을 지켜보기 불편해하던 마리는 '각하, 조금 쉬러 가시지요.'라며 소년 사령관의 가는 팔을 붙잡고 수복실을 나갔다.

내심 비슷한 마음이었던 닥터는 안심하고 한동안 철남의 정신이 돌아오지 않을거란 생각이 들었다.

근처에 있던 다프네에게 '미안, 나 눈 좀 붙여도 될까'라고 말해두고 잠시 쉬러 근처 침대에 누워 이내 코를 골며 자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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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령관... 우리 ㅈ때써...'

뭐야. 게임키고 잤던가. 근데 이프리트한테 저런 대사 없던거같는데...?

눈을 뜨니 수영복 차림을 한 벽안의 소녀가 눈물을 흘리며 내 몸을 흔들고 있었다. 아니, 뭐?


'사령관님! 노래 더 알려주시지 말임다!'

사령관 아니래도. 그럼 구보 중 군가를 실시한다! 최대한 크게 불러! 신나게!

새벽에 햇빛이 능선을 밝게 물들이자 브라우니들과 노래를 부르며 걸었다.
철충에 대한 욕설이 가득한 군가를 듣고 깬 다프네가 슬픈 눈으로 쳐다보기 전까진.


브라우니가 복귀하지 못했어.

'하지만 당신이 살아남았잖아. 자, 출발하자. 방주로.'

일어나기 싫은 내 몸을 이프리트가 조그마한 손으로 당겨 일으킨다.


'사령관!'

이젠 지쳤어. 그냥 잘래.

철충들의 폭격은 내 눈을 휘감았다. 왜인지 후련하기까지한 마음이 못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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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윽!

수십년만에 숨을 쉬는 사람처럼 가쁘게 헐떡였다.

'그 폭격에 살았네. 어케 살았냐. 명줄 한번 끝내주게 질기다. 나.'

좀전까지 꾸던 황당한 꿈에 혹시나 싶어 손을 들어 주먹을 두어번 쥐고 펴보았다.

당연히 그곳엔 건장한 인간의 주먹이 꿈틀대고 있었다.

철충의 몸이라니. 그런 악몽은 두번 다시 꾸기도 싫다.

'게다가 오르카호. 내가 그거 찾으려고 개고생하다 포기했는데 꿈에선 그냥 호드 부대가 퀵배송 시켜주잖아. 뭐 그리 편리한 설정이 다 있어? ...음?'

폭신폭신

평소에 드러눕던 실키의 배낭에서 느껴질 울퉁불퉁한 촉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철남은 지금 자신이 누워있는 것에 의문을 품었다.

몇 주만에 누워보는 제대로 된 침대가 낯선 것도 있지만 그게 아직 멀쩡하게 남아있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된다.

"...흐리트."

철남은 자신의 부관을 불러봤지만 성대와 입술이 말라붙어 말도 제대로 안나온다.

쿨럭이며 몸을 앞으로 숙였다가 고개를 들어보니 다프네가 걱정스런 얼굴로 철남을 쳐다보고 있었다.

"오, 다프네. 쿨럭. 너도 살았냐. 여기까지 옮겨준거야? 다른 애들은? 이프리트는 살았어? 실키나 브라우니는?"

"네? 저는..."

얘 뭐라니. '저는...' 은 무슨.

자신의 의무병에게 뭐라고 하려는 순간 기둥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문이 개폐음을 내며 열렸다.

"철남씨! 몸은 괜찮아요?"

갈색 머리에 흰 제복이 참으로 잘 어울리는 소년이 다급히 뛰어왔다.

동그란 구체와 함께 들어온 금발의 여인은 한참을 뛰어왔는지 근엄한 얼굴에 홍조를 띈 데다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날 걱정하는 표정이군.
걱정하는 인간이군.
오르카호. 불굴의 마리. 사령관.
철남씨? 날 왜 그렇게 부르지? 난...'

"아."

"철남씨? 철남씨!"

남자의 목소리가 멀어져감을 느끼며 철남의 정신은 현실과 잠시 거리두기를 실천했다.

시야 가장자리부터 연막처럼 다가오는 어둠을 느끼며 철남은 한가지만을 생각했다.

'지금이 꿈이었으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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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남이 정신을 차린건 창 밖의 바다가 여명의 빛을 머금어 밝아지는 새벽 아침이었다.

내심 눈을 뜨기 전에 자신이 살던 좁은 자취방에서 눈을 뜨고 통발을 돌리다 방전된 핸드폰을 충전기에 꼽으며 하루를 시작했으면 했다.

그러나 천천히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려 시야에 들어온 것은 자신의 무릎에 엎드려 누워있던 소년이었다.

'소년? ...!!!!!'

눈앞의 남성이 누구인지 감이 온 철남은 침착하게 고개를 치켜들고 마음속으로 진정을 위한 마법의 단어를 외웠다.

'ㅈ됐다. ㅈ됐다. ㅈ됐다.'

"으응..."

사령관이 뒤척이며 슬며시 일어나자 철남은 호랑이 앞의 토끼처럼 앉은 자세 그대로 굳어버렸다.

"깜빡 잠들었네... 바닐라한테 잔소리 좀 듣겠군. 어? 철남씨! 일어나셨네요!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요."

철남에겐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일단 눈앞의 이 녀석이 그 사령관이라는 것을 제쳐둔다 치자.

그러나 장병시절 만나본 장성이라곤 고작 사단장을 한번 봤을 뿐인 철남에게 군의 톱과 만난 것 자체가 본능적인 두려움을 선사했다.

'많이 놀랐죠? 아픈데는 없어요?'

'아닙니다. 없습니다.'

그런 질문엔 심장이 튀어나올 듯이 놀랐어도, 내장이 쏟아질 것 같이 아파도 없다고 대답해야한다.

'휩노스 증후군의 위험때문에 급하게 신체를 바꿨어요. 철남씨 DNA기반으로 시술하긴 했지만 위화감은 없나요?'

'없습니다.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그저 이 눈앞의 무언가를 자극해서는 안된다 라는 생각 외에는 뇌를 거치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 지휘관 회의에 가야하는데 괜찮으시면 같이 가서 인사를 나누는 건 어때요?"

"예. 괜찮습니다. ...예?"

무의식적으로 대답한 철남은 현실을 부정했다.

'어? 지휘관 회의? 그 계급으로 은하수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그 공간? 거기에 저를 던져 넣으신다굽쇼? 에이, 농담도 참.'

차라리 10일 굶은 사자 우리에 던지는게 편하리라. 거긴 한방에 보내주기라도 할테니.

'아니, 생각해보니 거기 진짜 암사자가 있잖아.'

"좋아요. 그럼 빨리 가죠! 사실 조금 지각할 거 같긴 한데, 다프네. 철남씨 옷은 내 청년용 옷 입혀서 회의실로 보내줘. 난 빨리 가서 잔소리 듣고 준비하러 갈게!"

다급하게 뛰어간 사령관을 배웅하곤 다프네는 몸을 돌려 철남에게 반듯하게 접힌 옷을 내밀었다.

"혼자 입으실 수 있으신가요?"

이불에 덮혀 몰랐지만 철남의 의복은 뒤가 휑 뚫린 환자복이었다.

속옷이 없는건 물론이요, 조금만 펄럭이면 철남 주니어와 둔부가 시원한 공기를 쐬는 불쾌한 상쾌함이 느껴졌다.

"예. 물론입니다. 그... 여기 커텐을 치고 입으면 되겠습니까?"

다프네는 웃으며 화장실로 안내했다.

갈아입는 겸사겸사 안의 세면도구는 자유롭게 쓰라며 제법 가득 찬 파우치 하나를 내밀었다.

그리고 혹 몸이 불편하시면 언제든 말해달라고 덧붙히곤 문을 닫았다.

옷을 다 입고 세면을 마치자 철남은 그제서야 거울에 비친 자신을 응시했다.

날카로운 삼백안인 자신의 모습은 그리 호인으로 보이진 않았다.

'으으... 후회물 금태양마냥 쫓겨나긴 싫은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험악한 얼굴이나 약간 통통한 몸이 그리 매력적이라고 볼 순 없어 그런 일은 없을거라 확신했다.

자신의 몸과 얼굴을 두 손으로 반죽하며 그 사실에 조금 불만을 품긴 했지만.

'에이씨. 해줄거면 몸매랑 얼굴도 개쩔게 만들어주지.'

그러다 곧 회의에 가야한다는 사실에 암울해졌지만 정신을 차리고 각오를 다졌다.

'그래. 장성이 별거야? 나 분명 사령관 공인 손님이랬어! 이상한 짓만 안하면 쫄릴거 하나 없다고. 그래, 그 누구에게도 쫄지 마! 철남이!'

철남은 심호흡을 하고 양 볼을 세게 두들기곤 힘차게 화장실을 박차고 나갔다.

"준비는 되셨나요?"

"꺄아아아아아악!"

문 바로 앞에 서있는 고양이 귀 경호원을 보자 철남은 거미를 본 소녀마냥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아... 뭐야, 시끄러워... 잠 좀 자자. 잠 좀."

굳세게 다짐한 철남의 각오는 고작 녹초가 되어 침대에 누워있던 닥터를 반쯤 깨우면서 바람같이 사라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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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령관의 문.

게임 상에선 한 번도 본 적 없지만 옆엔 호출용인지 개폐용인지 패드가 달려있고 동그란 창이 달린 시원한 흰색 철제 문이 철남의 눈 앞에 있었다.

그러나 철남의 눈엔 불타는 해골과 '이 문을 지나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라는 문구가 적힌 팻말의 환각이 일렁이고 있었다.

도망칠까도 생각했지만 그러는 순간 페로의 단분자 발톱으로 철/남이 될 것 같아 배제하기로 했다.

철남은 자포자기로 까짓거 죽겠어 하는 마음으로 심호흡을 크게 하곤 문을 두드리려 했다.

"오, 철남씨. 빨리 도착하셨네요. 바닐라의 잔소리가 길어져서요. 안녕, 페로. 좋은 아침!"

저 멀리서 어느새 구겨진 제복을 갈아입은 사령관이 도도도 달려오고 있었다.

페로는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다가오는 사령관을 위해 회의실의 문을 열어주었다.

사령관을 보기 위해 복도에 시선을 두던 차마 철남은 고개를 돌릴 용기가 나지 않아 가자미처럼 눈알만 굴려 회의실 내부의 분위기를 살폈다.

내부의 지휘관들은 밈으로 알던 모습과는 달리 근엄한 자세로 회의실에 앉아있었다.

음쇼섹 마리의 발광하는 구체는 팔짱을 낀 그녀의 머리 주위를 위협적으로 떠다니고 있었다.

착정마로 유명한 아스널은 진중한 모습으로 양손을 깍지 낀 채 그 위에 턱을 괴고 이쪽을 힐끔 쳐다보았다.

그리고...

'솔직히 쳐다보기도 싫다.'

칸이 처음으로 통신을 했을 때 잠깐 얼굴을 봤었지만 실제로 본 감상은 고드름이 심장에 박혀도 그렇게 한기가 느껴지진 않았을 것이다.

기억을 잃은 상태여서 개긴거지, 지금은 시선을 맞추기도 두렵다.

북방의 암사자. 철혈의 레오나.

여기서 실질적으로 위험한 존재다. 당장 저 허리춤의 총구가 나를 향해도 이상하지 않...

"다들 모였지? 회의 시작할게."

'야이 ㅆ'

뒤에서 사령관이 나를 회의실 -처형실- 로 떠밀었고 페로는 야속하게 문을 닫아버렸다.

"이번에 오르카호에 합류한 인간인 철남씨야. 다들 인사해!"

발랄한 톤으로 이야기하는 전설의 5스타는 회의실의 분위기를 아는지 모르는지 마치 새학기에 전학온 학생을 소개하는 듯 한 목소리였다.

'미친척 하고 도망쳐버릴까...'

위장이 타들어가는 고통이 차라리 진짜였으면 했다. 그러면 바로 수복실로 돌아갈텐데.

어버버하는 철남의 표정에 의자에 앉아있던 레오나가 한숨을 쉬며 이마를 짚었다.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의 대장, 철혈의 레오나."

"...?"

"뭐해, 다들. 자기 소개하라니까. 손님 앞에서 벙찌지 말라고. 사령관이 언짢아 하잖아."

철남을 포함한 모든 인원이 눈동자만 굴려 콧노래를 부르며 자리에 앉는 남자를 바라보았지만 전혀 그래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레오나의 제안에 거부할 만한 이유가 없던 지휘관들은 마뜩잖아 하면서도 하나 둘씩 고개를 돌려 철남에게 인사를 건넸다.

"스틸라인의 지휘관인 불굴의 마리라고 합니다. 잘 부탁합니다."

마지막으로 마리가 인사를 끝내자 그 공간의 모든 사람들이 철남의 자기소개를 기다렸다.

그런데 철남의 표정이 이상했다.

얼떨떨해하는 표정이 베이스이긴 했지만 모든 지휘관들에게 '잘 부탁드립니다!'라며 씩씩하게 대답하던 철남이었다.

그런데 마지막에 마리의 얼굴을 본 순간 흙빛이 섞인 듯 얼굴색이 창백해진 것이다.

"괜찮으십니까? 혹여 제가 무언가 결례를 끼친건 아닌지...?"

"아닙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이전 칸씨에게 구조된 철남이라고 합니다. 구조해주신 점. 또 이 잠수함에 받아주신 점 감사드립니다!"

찌릿

발할라의 지휘관쪽에서 불편한 낌새를 드러냈다.

철남은 만일 눈빛에 물리적인 힘이 존재한다면 방금 그것으로 자신을 전기통닭쯤은 만들었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프네의 이름은 어떻게 알았지?"

"예?"

"시치미 떼지마. 오르카의 보고 체계는 상당히 빠르거든?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직후, 네가 중얼거린 말이 1시간도 안되는 시간에 내 테이블에 올라올 정도로 말이지. 자, 그럼 다시 물어볼게. 기억을 잃었다면서 어떻게 바이오로이드의 이름을 알았지?"

'아차.'

사실 철남의 지식은 유채꽃 왕관을 만들 정도로 비교적 상식적인 부분은 남아 있는 수준이었다.

고로 멸망 전 인류라면 바이오로이드의 이름을 안다는게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기에 사령관이나 다른 몇몇 지휘관들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러나 그 사실을 망각해버린 철남은 식은땀을 뻘뻘 흘릴 수 밖에 없었다.

"그... 그게. 저, 오해가 있으신듯 한데..."

"그럼 빨리 오해를 풀어봐. 사령관이 손님으로 취급해달랬지만 난 수상한 이라는 수식어가 달린 사람은 싫거든."

말을 더듬는 남자의 반응에 다른 지휘관들도 이상한 낌새에 무장에 손가락을 얹고 상황을 지켜보았다.

사령관 또한 그저 한손으로 입을 감싼 채 철남을 바라보았다.

'끝났다.
내가 내린 결론은 이거다.
끝났다.
내가 거짓을 말하든 진실을 말하든 믿지 않고 바로 바다로 던져버리겠지. 아니면 닥터의 실험체가 되거나.'

철남은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막나가기로 결정했다.

"옛날에 바이오로이드랑 좀 굴렀슴다."

"뭣.."

"그... 뭐냐, 예~엣날에 지휘권 없는 애들 데리고 철충이랑 싸우다 폭격에 맞고 전멸했습니다. 아, 기억은 요 인간 몸이 되고 나서 되돌아왔고. 여전히 이름은 기억이 안 나네요."

한층 경박하고 무례해진 말투에 대해 기가 막혀 말도 나오지 않는 레오나 대신 마리가 나섰다.

"그럼 아까 나를 보고 당황한 건 돌아온 기억과 관련이 있나? 나는 귀관을 본 기억이 없는데."

"저도 없어요. 그 때 모았던 대원들이 대부분 스틸라인이니까요. 사실 다프네 빼면 전부죠."

"...전멸시켰다는 죄책감때문이었겠군."

"아뇨, 그냥 당신 얼굴을 보니 그네들이 생각나서 그랬습니다. 죄책감은 무슨, 그런거 가질 처지가 아니거든요."

"..."

"..."

차라리 할 말 다하고 죽겠다는 마음에 거리낌없이 나불거린 입이 조용해지자 잠시 외출을 간 이성이 돌아왔다.

"...죄송합니다. 이런 말씀드리려고 온게 아니었는데."

"아니. 귀관이 지금 내 앞에 있다는 것은 내 대원들이 임무를 성공했다는 것이겠지. 오히려 내 쪽에서 감사를 표하지. 고맙네, 살아남아줘서."

마리는 약간 표정을 미소로 누그러뜨리며 철남에게 다가가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마리의 의도는 좋았으나 철남은 마치 납망치로 내려찍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이 전멸시킨 부대의 장에게 오히려 위로를 받는 처지라니. 이보다 비참하긴 힘들 것이다.

잠시 우울한 표정을 짓던 철남에게 또다른 질문이 들어왔다.

"그럼 지금 뭔가 하고싶은건 있어요?"

가만히 상황을 보던 사령관이 갑자기 입을 뗐다.

"저희는 곧 난민들을 구출하러 미국으로 향할거예요. 같이 가셔도 되고, 중간에 안전한 섬이나 대륙에 내려드릴 수도 있어요. 아, 물론 강요하는 건 아니지만 여기에 남으시면 제 지휘나 행정에 큰 도움이 될 거예요."

"...지금은 좀 쉬고 싶습니다. 푹 잔게 언젠지 기억이 나지 않아서요."

"네. 언제든 편하게 말씀해주세요."

사령관이 패널을 조작하자 몇분 뒤 바닐라가 회의실 문을 열고는 철남을 데리러 왔다.

힘없이 끌려가면서도 철남은 마리의 눈을 최대한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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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실에서 벗어난 철남은 바닐라에게 배정받은 방을 안내받고-사령관실과 같은 층이었지만 오르카 호 정반대편에 있어 상당히 걸어야 했다- 자신의 침대에 걸터누워 천장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자기소개라고 쓰고 청문회라 읽을 법한 그 악몽같은 상황을 벗어난 것 만으로도 행복하다 생각하며 잠에 들려했다.

'미친 놈. 내가 지휘에 도움이 될거란다.'

오른손 주먹을 하얗게 질리도록 꽉 쥔 철남은 벽을 후려치려다 팔을 돌려 침대를 내리쳤다.

퍽.

약간 단단한 매트리스에서 뿜어져 나온 먼지와 바람에 이불보가 들썩였다.

'85명이야. 내 무능때문에 죽인 병사만 85명이라고! 네놈은 단 한번도 잃지 않았겠지만 말이지.'

"나의 사람들을..."

브라우니 63명.
레프리콘 19명.
실키 1명.
다프네 1명.
...이프리트.

피로하다.

주먹을 쥐지 않은 왼손으로 눈을 가리곤 철남은 불도 끄지 않은 채 기절하듯 깊이 잠들었다.


철남이 떠난 회의실.

사령관은 의자를 돌리곤 어깨를 사시나무처럼 떨며 울고 있었다.

자신은 단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상실을 비슷한 처지의 인간이 담담하게 말한 것이 너무나 슬펐다.

사령관은 확신했다.

이 남자는 반란이나 스파이는 커녕 브라우니에게도 심부름을 받을 정도로 순박하고, 그러면서도 부러지지 않는 강인한 사람이란것을.

그리고 사령관은 눈물을 손수건으로 닦고 뒤를 돌았다.

'하지만 지휘경험도 있는 그런 인재를 놓칠 수는 없지.'

눈물에 젖어 나약해보이던 눈은 금세 선량한 청년을 이용해먹을 강직한 지휘관의 눈빛을 띄었다.

철남의 운명을 결정할 두번째 회의가 열렸지만 철남은 그를 알지도 못한 채 지난 세월동안 취하지 못한 숙면에 빠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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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우 내가 쓰고싶은걸 쓰려해도 갈길이 멀다.
뭔데 쓰다보면 글이 늘어나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