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는다는 게 사실 참으로 속 편한 거야. 죽고 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다르게 말하면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는 얘기거든. 매일 밤마다 야간초를 서지 않아도 되고, 참호를 파지 않아도 되고, 철충한테 돌진하지 않아도 되고... 죽을 걱정도 없고. 산 놈이라야 죽이지 죽은 놈을 어떻게 죽이겠어. 참 좋은 거지. 죽는다는 게... 나쁜 새끼들. 아무리 비상 상황이라지만 짬순도 안 지키고 먼저 가버리고 말이야...
 이프리트-8314, 박격포병


 
 우리 분대가 철충이 습격한 농장지대에 순찰을 나갔어요. 박살낼 거 다 박살내고 돌아갔는지 철충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더군요. 다른 자매들은 혹시 모르니 조심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그때 목이 엄청 말랐거든요. 그래서 물펌프라도 있을까 싶어 농장에 갔는데... 개 한마리가 앉아있었어요. 그러다가 제가 가까이 다가오니까 슬프게 울었어요. 물펌프로 물을 퍼내고 있는데 개가 농장 문가에서 참 슬프게도 울더라고요. 그래서 뭐가 있나 싶어서 개를 따라 농장 안에 들어가봤는데... 다 죽어있었어요. 갈기갈기 찢겨서 겨우 모델만 알아봤는데, 엘븐, 콘스탄챠, 더치걸. 전부... 개가 콘스탄챠 곁에 앉아서 참 슬프게 울었어요. 마치 사람이 우는 거 같았다니까요. 사람이...
 브라우니 - 20257, 소총수



 "레나"라고 부르던 노움이 있었어. 레나는 어쩌다 그렇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죽음을 불러오는 존재였어. 그녀가 있는 분대는 전부 죽었어. 레나, 단 한명만 빼고 말이야. 포격이 떨어져서 다 죽었겠네 싶어도 레나는 남들 다 죽는 동안 살았어. 눈사태도, 산사태도, 하여간 사람이 죽을 수 있는 모든 상황과 방법으로 레나 빼고 다 죽었고, 레나는 무슨 수를 써서든 다 살아남았지. 한두번이야 재수가 참 없다 하고 말겠지만, 그게 계속된다고 생각해봐. 비이성적이라고 하지만, 아니 그러면 전쟁부터가 이성적인가. 하여간 레나는 혼자가 됐어... 분대끼리 서로 안 받으려고 떠넘기고 싸움도 났지. 그래도 팔다리 달렸고 총 쏠 줄 아는 년이었으니 뭐라도 시켜야 할 거 아냐? 그래서 전령을 맡게 됐지. 막상 중대장도 재수 옴 붙을까봐 레나를 중대본부 텐트 바깥쪽에 세워놨어. 말이 좋아 전령이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들, 예를 들어 주둔지 초소 보강이나 변소구멍 퍼내기 같은 일이나 했어. 그러던 어느 날에 무전기가 고장나면서 레나가 제 역할을 할 때가 찾아왔지. 레나는 보고문을 들고 대대본부로 뛰어갔어.
 
 "저러다 대대본부도 날려먹는 거 아닌가 몰라."

 누가 그런 짓궃은 농담을 했지. 말이 씨가 된다고... 다음 날이 되어서야 레나가 도착했어. 온 몸이 만신창이가 된 상태로... 입 안에 들어간 진흙을 뱉어낸 레나가 대대에서 쓰던 무전기를 가져와서 중대장한테 넘겼어.
 
 "대대본부가 포격으로 전멸했습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뭐라 말할 새도 없이 참호 밖으로 뛰어나가서 자살했어... 불쌍한 것.
 워울프 - 473, 돌격병

 

 등짐을 메고 고지에 올라갈 때가 있었어요. 그 고지에서 등짐을 푸는데, 레프리콘이 저에게 와서 물었어요.
 "저기요. 다음번에 오실 때 사탕 하나만 가져다주시면 안될까요. 하나만..."
 저는 보급이 내가 그렇게 가져오고 싶다고 맘대로 가져올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말했죠. 그게 사실이기도 했고요. 레프리콘은 안 그래도 죽은 표정이 더 죽은 것처럼 변했어요. 어쩔 수가 없었죠. 그런데 다음 번에 와 보니까... 레프리콘이 한쪽 팔에 부목을 달고 제 쪽에 오더니 제 바지를 붙잡고 이야기했어요.
 "태어나서 사탕을 먹어본 적이 없어서요... 사탕 하나만 가져다주면 안될까요. 하나만..."
 거절할 수가 없어서... 짐을 실을 때 몰래 떨어진 사탕들을 주워서 가져갔어요. 그런데 올라가서 등짐을 풀자마자 철충들이 포격을 한 거에요. 다리가 굳어서 오도가도 못했어요. 그러다가 그 레프리콘이 기관총을 들고 마구 쏘다가 철충한테 당해서 온몸이 찢긴 상태로 제 옆에 떨어졌어요. 붕대를 감아주려 했는데, 그 사탕이 자꾸 생각나는 거에요... 그래서 사탕을 먹여줬어요. 피를 쏟는데도... 표정이 정말 편안했어요. 사탕 하나로.
실키 - OO, 보급병


 

 솔직히 말하면 내가 어떻게 살아서 당신이랑 이야기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어... 폭탄을 들고 철충한테 기어가는데, 그만 폭탄 안전핀이 빠져서 터진 거야... 재수 옴 붙었다 싶어서 일어나려는데 배가 허전하더라고. 표현이 좀 그렇긴 하지만 그랬어. 아래를 내려다보니 대장하며, 소장, 하여간 전부 다 쏟아져 있었어... 그대로 그 위에 엎어졌어... 그 때만큼 죽기를 바란 적이 없어. 하필 빠져도 핏물이랑 빗물 가득한 구덩이였는데 비까지 오고 있었지. 비가 오고 흙탕물이 내 장기를 적시는 느낌이 진짜로... 진짜로...

 "이 개새끼들아, 빨리 죽여! 죽이라고!"

 구덩이 바로 옆에 자매들 목소리가 들려서, 마구 욕을 뱉었어. 그러니까 자매들이 깜짝 놀라서 의무병을 대동해서는 나를 데리러 왔어. 난 죽을 줄 알았어. 솔직히 자매들도 그냥 죽여주는 게 낫지 않겠냐고 핀잔을 줬는데, 어떻게 살아남았지. 간은 교체했고, 소장은 절반을 잘라야 했고, 대장은 플라스틱 튜브로 바꿨지만 말이야. 누구는 살려달라고 기도해도 못 살고 죽는데, 나는 제발 죽여달라고 기도해도 이렇게 살아남았어. 제발...
 레프리콘 - 4448, 척탄병



 이 일을 하다보면 딱 10초만 더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곤 했습니다.. 10초만 더 있으면 목표를 육안으로 식별할 수 있고, 거기서 10초를 더 살면 적어도 폭탄 투하가 가능한 고도까지 내려갈 수 있고, 확실하게 폭탄을 명중시킬 수 있는 고도까지 살아있을 수 있으니까요... 죽는 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삶보다 10초가 더 중요하냐고요? 질문이 잘못됐습니다. 그 10초들의 총합이 삶입니다.

 밴시에게는 며칠, 몇 달, 몇 년이란 개념이 의미가 없습니다. 그저 10초 앞만이 있을 뿐입니다. 오래 살면 허벅지에 그리는 킬마크가 늘겠지만 그 뿐입니다. 10초... 그 10초만이 중요했을 뿐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지금도 10초마다 항상 위험한 걸 찾습니다. 저 자동차가 나를 치지 않기를, 저 아이가 든 가위가 내 목을 찌르지 않기를... 미친 소리 같지만, 이게 밴시가 하는 생각입니다. 죽을 때까지요.
 밴시-683, 급강하폭격수




 인천에 상륙할 때 있었던 일이에요. 그때는 상륙병력도 병력이지만, 대포도 정말 많았어요. 작은 대포, 중간 대포, 큰 대포... 구경은 달랐지만 공통점은 정말로 많이 쐈다는 거죠. 밤에도 쏴대서 잠을 못 잤어요. 청력을 잃기 싫어서 맨날 귀마개를 하고 다녔어요. 그러다가 포격이 멈추고, 인천 해안에 정찰을 나가라는 명령을 받고 날아갔어요... 저공으로 날아가는데 바다에 뭔가가 보였어요. 그래서 가까이 가해보니까... 털이 벗겨진 개들이 필사적으로 바다로 헤엄치고 있었어요... 다른 데도 아니고, 어디로 닿을지도 모르는 바다로요... 저렇게 쏟아부은 포격을 보고도 이 개들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추측하지 못한다면 바보겠죠?

 얼마 가지 않아서 정찰을 포기해야 했어요. 열화상 카메라를 켜보니까 대충 세도 수백은 되어보이는 철충들이 잡혔거든요. 그리고 돌아가면서... 바다로 도망친 개들처럼, 자매들한테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알 수 있었죠. 알기 싫었지만...
 테티스-OO, 해상초계관


 
 갓 생산되었을 때, 저는 전사보다는 어린 소녀에 더 가까웠어요. 제 자매들도 다 그랬고요. 오르카호의 매점에서 손거울도 사고, 부족하고 비쌌지만 화장품도 하나 사서 서로 돌려썼죠. 손재주가 좋은 자매가 깡통을 갈라서 반지들도 만들어줬죠. 다들 자대배치를 위해 더플 백을 쌀 때도, 각자 산 것들을 더플백 속에 우겨넣었어요.
 배치될 부대로 이동할 때, 다른 자매들은 전부 벌벌 떨었지만 저는 이상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어요. 나는 아직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죽음이 날 피해갈거야, 그렇게 생각했죠. 알아요, 이게 얼마나 순진한 생각인지. 하지만 그때는 진짜 그렇게 생각했다니까요. 자매들이랑 같이 더플백을 매고 차에서 내렸어요. 그리고 막사 중앙에 도열했죠. 지휘관이 우리를 보더니 막사 준비가 덜 되었으니 더플백을 일단 앉은 자리에 쌓아두고 따라오라고 했어요. 그래서 지휘관을 따라갔죠. 그런데... 그때, 하필 그때 포격이 시작된 거에요. 첫 포탄은 저 바로 옆의 막사에 떨어졌어요. 저는 그 자리에서 엎드렸어요. 하지만 막사에서 피투성이가 된 사람들이 뛰어나오고, 제 자매들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혼잣말을 했어요.

 "내, 내 짐!"

 그 말을 남기고 중앙에 쌓아놓은 더플백으로 뛰어갔어요.

 "야! 너희 그러다가 다 죽어! 멈춰! 이런 썅!"

 지휘관은 그렇게 말했지만, 듣지 않았어요. 자매들의 표정이 급해졌어요. 한 자매가 더플백에서 손거울을 꺼내고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죠. 그게 마지막이었어요. 그 웃던 얼굴이... 폭발에 휘말리면서 사라져버렸죠. 그 난리통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건, 손거울이었어요. 거울이 깨져 유리조각들이 이리저리 떼어진 채, 제 앞에 박혔어요. 깨진 금 너머로 제 얼굴이 보였어요. 죽음을 그렇게 순진하게 생각하던 저를 비웃고 있었죠. 
 발키리 - 449, 지정사수


 항상 뛰었어요. 태어났을 때도 뛰었고, 훈련을 할 때도 뛰었고, 싸울 때도 뛰었죠. 제 친구 중에 미호가 있었는데, 저랑은 다르게 한 자리에 가만히 있는 걸 좋아했어요. 태어났을 때도, 훈련할 때도, 싸울 때도요. 저는 항상 같은 자리에 있는 미호가 답답했는데, 미호는 항상 뛰어다니는 제가 답답했나 봐요. 하지만 미호랑 저는 좋은 친구가 됐어요. 미호는 항상 말을 잘 했고, 저는 항상 말을 잘 들었거든요. 케이크를 만드려면 계란을 얼마나 깨야 하는지, 초콜릿을 만들려면 원료 선정부터 어떻게 해야하는지도 다 들었어요. 미호는 정말 똑똑했어요. 아는 것도 많았구요. 

 나중에 철충을 지구에서 몰아내면, 같이 케이크 가게를 하나 열기로 약속했어요. 밥도 식당에서 먹고, 자는것도 식당에서 자기로요. 수익은 절반으로 나누기로 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에... 철충한테 매복을 당했어요. 평소 하던 대로 뛰어가려는데 엄마*가 절 붙잡고 반대쪽으로 뛰어가라고 했어요. 그래서 뛰는데... 철수 지점까지 뛰어왔는데 미호가 안 보였어요. 그래서 다시 뛰어갔어요. 그런데 뛰어가는 길에 불가사리가 쓰러져 있어서 업어왔고, 핀토는 피를 너무 흘려서 못 움직여가지고 제가 업어왔어요. 엄마도 구했어요. 다리는 못 구했지만.. 미호를 찾으려고 뛰어갈 때마다 미호 말고 다른 애들이 도와달라고 했어요. 그러다가 미호를 찾았어요. 풀숲에 누워있었어요. 미호가 다프네 씨가 간호를 잘 한다고 했던 걸 들었어요. 데려가면 다프네 씨가 잘 간호해 줄 거라고 생각해서 업고 뛰어갔어요. 철수 지점까지 뛰어갔는데, 미호가 울고 있었어요. 그 때가 미호와의 마지막 순간이란 걸 알았다면 좀 더 좋은 말을 했을 거 같은데...

 "미호야, 안녕."

 "그래... 안녕. 드라코... 케이크가 먹고 싶어."

 그 말에 저는 전투식량 봉지를 까서 파운드 케이크를 찾았어요. 하지만 뒤돌아서니까 미호는 더 이상 반응하지 않았어요. 케이크는 조각만 봐도 좋아하던 미호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미호가 항상 그랬던 것처럼, 한가운데 가만히 멈춰 있었어요. 
 스틸 드라코 - 781, 돌격병
* 스틸 드라코는 홍련을 엄마로 지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