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 : https://arca.live/b/supernerimk2?category=%EC%86%8C%EC%84%A4&target=title&keyword=%EC%A1%B0%EA%B8%88+%EC%9D%B4%EC%83%81%ED%95%9C


모음 : https://arca.live/b/lastorigin/2071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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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병실. 따뜻한 병실 속에서 아이는 생각했다.

 

이젠 아프지 않다.

태생이 아프게 태어났으나 이제는 더 이상 아프지 않게 되었다.

 

제 피부를 찌르던 격통이 사라진 게 너무도 어색하여 고개를 돌려보았다.

 

 

 

“아빠...”

 

 

 

이불이 아이를 덮고 있었고, 저 멀리서 자신의 부모가 누군가에게 연신 고개를 꾸벅이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저희 아이를 살려주셔서...”

 

“... 아닙니다.”

 

 

 

흰 가운을 입고 있던 사람.

검은 색 머리카락이 길게 늘어져 있는 사람이 자신에게 다가와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저도 단지 흥미가 있어 한 것이었으니까요.

타인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이라니. 통제할 수 없다는 게 조금 안타깝네요.”

 

 

 

언뜻 들어보아도 평범하지 않은, 의미심장한 말.

하지만 살날이 일주일도 채 남지 않은 제 아이를 구한 이의 말을 부모는 차마 의심할 수 없었다.

 

 


"아... 저희도 어쩌다 그렇게 된 건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아침에 일어나고 보니..."


"몸에 상처가 있었겠죠. 타인의 생각을 읽는다는 건 고통도 같이 느낀다는 뜻이니까.

그걸 알고 치료한 것이니 다음부턴 그럴 일이 없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이제 이 아이가 다칠 일은 있지 않을 겁니다.

죽을 걱정도 하지 않으셔도 되고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이는 생각했다.

 

 

 

‘뱃속이 뜨겁지 않아.’

 

‘목도 따갑지 않고.’

 

무엇보다

 

‘이제 조용해.’

 

‘다른 사람의 마음이 들리지 않아.’

 

 

 

생각했다. 생각하고 다시 생각했다.

허나 머리 속엔 온전히 자신의 생각 밖에 없었기에 아이는 난생 처음으로 평화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따뜻하고,

 

따뜻한 세상.

 

그걸 얼마나 느꼈을까.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던 의사가 말했다.

 

 

 

“... 참 기이한 일이구나. 기연이라는 건 책에서만 있는 줄 알았는데.”

 

“책...?”

 

“넌 책을 읽어본 적이 없니?”

 

“네. 읽을 때마다 머리 속이 울려서 읽을 수가 없었어요.”

 

“그럼 이제 읽을 수 있겠구나.

네가 나의 기연이니 너에게도 내가 기연이 될 수 있겠어.”

 

 

 

의사의 손엔 작은 책이 들려 있었다.

 

아이는 그걸 두 손으로 받아 들었다.

이제 글자에서도 더 이상 말이 들리지 않았다. 오로지 생각으로만 소화할 수 있었다.

 

평화로웠다. 책의 글자가 한없이 즐거웠다.

아이는 집중이란 것을 처음 해보았기에 재미있었던 것이다.

 

 

 

“확실히 평범한 아이는 아니었겠어.

일이 터지고 나면 볼만 하겠는걸.”

 

"네? 뭐라고 하셨나요?"


"후후, 아니. 아무 것도 아니란다."


 

 

의사가 검은 장발을 하는 여자였다.

그녀가 목소리를 낮추고 아이의 부모에게서 등을 돌렸다.

 

 

 

"아이야."


"네?"


"네 생각이 궁금하니?"


"... 아뇨."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으면 호기심이 해소되어 주는 안도감보다 복잡한 생각에 빠지는 격통이 더 심하니까요."


"그걸 어찌 알지?"


"지금껏 그렇지 않았던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거든요."


“후후, 그래. 네 말이 맞다.

네가 마음을 읽고도 버텨냈으니 다른 존재의 능력도 충분히 먹어 치울 수 있겠구나.

사람의 생각보다 복잡한 건 없지. 능력이랄 것은 그의 십분의 일도 안 되는 간단한 것이니까.”

 

“... ...”

 

“꼬마야. 이름이 뭐니?”

 

“... 몰라요. 부모님이 지어주셨는데 기억이 나질 않아요.”

 

“그래. 생각대로 됐네.

네 나이는?”

 

“몰라요.”

 

“왜 여기 왔는지는?”

 

“그냥... 많이 아파서 왔다는 것 밖에는 몰라요.”

 

“좋아. 마지막으로.”

 

저벅.


“넌 부모님을 사랑하니?”

 

의사가 한 발자국 더 다가와 물었다.

 

“... 네.”

 

 

아이가 답했다.

 

자신이 받은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 이름을 준 부모는 사랑한다.

언뜻 들어도 이상한 것 투성이인 답이었으나 의사는 빙그레 웃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불쌍한 것. 장차 일어날 일들을 네가 깨닫기엔 너무도 어리구나.”

 

 

의사가 신음했다.

 

 

“하지만 그 때가 되면 넌 모두를 구할 거다.

사방이 비명으로 가득해도 네 앞에 서면 사람들은 희망으로 가득 찰 테니 네가 정말 영웅이 될 거야.”

 

“영웅...”

 

 

 

아이는 문득 의사가 가리고 있던 수술실 안 쪽을 보았다.

 

자신이 누워있던 침대. 그리고 그 옆에는 무언가 쌓여 있었다.

산처럼 놓여져 있는 벌레의 시체들. 그 중 일부는 팔과 다리가 나온 사람 같은 형상을 띠고 있었다.

 

그저 곁눈질로만 보아도 족히 수십은 되어 보이는, 인간의 형체.

 

아이가 담기엔 너무도 끔직한 광경이었기에 눈을 돌려야만 했다.

 

 

 

“그러니 그 때, 넌 나의 기연이 될 것이다.”

 

“... 그 때가 언제죠?”

 

“네가 가장 힘들 때.”

 

 

그것은 이해하기 쉬운 말이었다.

 

 

“부모님이 널 사랑해주고, 친구들이 널 사랑해주니 너의 마음엔 사랑이 가득할 거다.

사랑으로 태어난 아이라. 그러니 지금 당장은 부모님이 네게 주신 이름을 돌려주마.

레돌레타 아모렘. 그것이 너의 이름이다. 사랑의 향기란 뜻이지.”

 

 

사랑의 향기.

 

 

“하지만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게 된다면, 나에게로 찾아오렴.

그럼 네 마음에 드는 이름을 얻을 수 있을 거란다.”

 

 

향기는 한동안 침묵했다.

 

 

“... 제게 왜 이러시는 거죠?”

 

 

의사가 미소를 지었다.

 

 

“너의 이야기가 궁금하거든. 아모렘.

크레아투라들이 들고 일어날 때 너의 행보가 심히 궁금해.”

 

 

 

 

 

 

 

 

 

 

 

 

 

 

 

“쯧.”

 

 

퉷. 핏덩이를 뱉어낸다.

 

 

“괜히 옛날 생각이...

...

... 신경 끄자.”

 

핏덩이를.

 

“삼킬 수는 없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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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아요. 이번에도 잡았군요.”

 

 

시라유리의 목소리였다.

 

 

“확실히 방사능의 반감기가 짧기는 짧아요. 벌써 야생동물이 돌아다닐 정도라니.

저번에 잡은 건 토끼였던가요? 이번엔 사슴이니 다음 번엔 멧돼지도 잡을 수 있겠군요.”

 

 

평원. 넓은 평원.

 

우리는 방공호를 떠나서 주변을 떠돌았다.

시라유리가 밖을 나가본 경험에 따라 위험 요소들이 없는 곳만 돌아다녔기에 주변을 경계할 필요는 없었다.

 

그 무거운 통조림을 여기까지 가지고 올 순 없었기에 식량은 눈에 보이는 동물을 사냥하는 것으로 대체하고 있었다.

시라유리의 활 솜씨가 이럴 때는 더할 나위 없이 든든했다.

 

다만 든든한 건 활 솜씨뿐.

 

 

“저기, 왓슨?”

 

 

꼬치꼬치 캐묻는 말투는 날 곤란하게만 만들었다.

 

 

 

“요즘엔 발작이 일어나지 않는 건가요?

여기까지 오면서 한 번도 그런 후유증은 겪지 않았던 것 같은데, 혹시 한 번에 몰아서 오는 건가요?”

 

 

시라유리가 사슴의 다리 살을 구워 야금야금 씹어 먹었다.

 

 

“아니면 설마 참고 있는 거? 그러면 나중에 더 큰 병 되니까 참지 말고 꼬박꼬박 말씀 하세요!

폭심지 주변에서 충분히 벗어났으니까 약국도 찾아보면 있을 거에요.

그러다가 나중에 자빠져버리기라도 하면 화낼 거에요. 아니, 미워하다가 화낼 거에요!”

 

“나 진짜 괜찮은데...”

 

 

 

흠, 하며 팔의 떨림을 뒤로 숨겼다.

어차피 죽고 나면 다시 괜찮아질 테니까.

 

 

 

“그... 그런 것보다도 우선 다른 걸 찾아보는 게 좋지 않을까?

이를 테면 주변에 바이오로이드가 있는지 라던가...”

 

“그런 건 제가 다 찾아보고 있으니 신경 쓰지 마세요.

게다가 바이오로이드들도 방사능 위험한 건 다 알고 있으니까 신경 쓸 것도 없지. 사실...

오면서 바이오로이드는커녕 바이오로이드 머리카락도 못 봤거든요? 정말이지 사서 걱정하는 스타일이라니까.”

 

“하하... 그럼 다행이네.”

 

“그나저나, 요즘 얼굴이 조금 환해진 것 같은데, 제 기분 탓 인가요?”

 

“아마... 그러지 않을까?”

 

 

 

아니. 제대로 봤다.

요 며칠 동안 추기경은 얼굴조차 내밀 지 않고 어딘가로 숨어버렸으니 내가 기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적어도 이상한 망치에 처맞아 죽지는 않아도 된다는 뜻이니 내 생명이 조금 더 연장되었음에 감사함을 느끼며 숨을 쉬었다.

 

 

 

“하여튼, 기뻐 보이는 건 죄다 기분 탓이라고 하고, 슬퍼 보이는 건 설명도 안 해주니 제가 뭐 알 수 있는 게 있나요.

전 왓슨한테 알려줄 거 못 알려줄 거 다 알려줬는데 왓슨은 여전히 비밀 속의 인물이네요.”

 

“내 비밀 같은 걸 알아서 좋을 게 없을 텐데.”

 

“세상에 알아서 좋을 게 없는 비밀은 있을 지 몰라도 궁금하지 않는 비밀은 없는 법이죠.

왜, 얼마나 많은 비밀을 숨기고 있길래 그런 말을 그렇게 당당하게 해요?

지금은 아니어도 한때 세계 최고의 첩보원이었던 사람한테?”

 

“세계 최고? 자부심이 대단하네.”

 

“그럼 저보다 뛰어난 사람을 보셨나요?

일반인들 중에 그런 사람 많지 않을 텐데.”

 

 

 

시라유리가 빙긋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일반인들 중엔 이런 애가 많지 않다... 라.

맞는 말이다. 신기에 가까운 활 솜씨를 보고 있노라면 ‘아니, 저게 왜 맞아?’ 라는 말을 셀 수도 없이 반복하게 되니까.

 

 

 

“내가 일반인이 아니라면?”


"그럼 군침 나오게 하는 비밀들을 머리 속에 그득그득 담고 다니는 보물 상자가 되는 거죠.

마음 같아선 머리를 뜯어보고 싶은데, 제가 친구라서 참아주는 겁니다." 


"말 한 번 무섭게 하네. 내 두개골은 내가 챙겨야겠어.

여기에 보물 같은 기억들을 그득그득 담고 다니거든."


“하긴. 핵 속에서도 살아남을 정도인 사람한테 제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그냥 잊어버리세요. 아니면 전에 알려준 농담이라도 다시 알려주던가.”

 

 

 

내 어깨에 다시금 손을 올리며 시라유리는 뚱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에 알려줬을 땐 제대로 이해한 줄 알았는데, 왜 틀렸다고 설명을 안 해줬어요?”

 

 

 

예쁜 손가락이 내 볼을 쿡쿡 찔러댔다.

 

 

 

“이 농담의 핵심은 그거잖아요.

뒤에서 누가 툭툭 칠 때 돌아보려는 사람의 본능을 이용하는 농담.

전 앞에서 쳤으니 시작부터 잘못된 셈이었죠. 그걸 알고서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아세요?”

 

“하하... 그냥 그렇게라도 해보려고 하는 게 귀여워서 그랬지.

원래 배움에 의욕을 보이는 학생은 가르치고 싶은 법이거든.”

 

“학생이라... 내가 교복 입고 수 년을 학교에서 돌아다녔는데 학생 취급 받는 게 이렇게 신기했던 적은 처음이네.

당신, 참 신기할 정도로 매력적인 사람이에요. 농담 하나만큼은 지독하게 못한다는 것만 빼면.”

 

“... 내가 혹시 재미가 없었어?”

 

“글쎄, 조금 얼빠져 있는 얼굴 보는 재미는 조금 있을 지도?”

 

 

 

후후, 하며 소리 내어 웃는 시라유리.

타닥 타닥 익어가는 사슴 고기는 모닥불 속에서 먹음직스러운 갈색 빛이 되어갔다.

 

소완이 해준 요리도 이런 과정을 거쳐 갈색이 되는 거겠지?

잊혀질 법도 한 옛날 생각이 아직도 생생하게 떠올라 내 머리 속에서 사슴고기의 향을 따라 흘러갔다.

 

 

 

“얼빠진 얼굴이라... 그래, 그 때도 얼빠진 얼굴이긴 했지.

시라유리는 탄 죽을 먹어본 적 있어?”

 

“탄 죽이요?”

 

“약간 잿물 먹는 느낌도 나고, 석탄 같은 걸 부서 먹는 느낌도 나고.

로맨스 코미디 소설을 읽고 난 뒤엔 그것만큼 효과적인 것도 없을 거야. 먹고 나면 바로 단 게 땡기거든.”

 

"... 왓슨."


"응?"


“그거 농담인가요? 어느 누가 죽을 태워 먹어요?”

 

 

 

그래. 당연히 그러겠지.

밥이랑 물을 섞고 긴 시간을 휙휙 섞어서 만드는 건데 어떤 사람이 죽이 탈 때까지 가만히 내버려두겠나?


자기를 죽어라 괴롭히던 인간이 어느 순간 돌변하는 걸 보지 못한 사람이라면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난 아직도 그 때 먹었던 죽 맛이 기억난다.


시커먼 죽이.


 

 

“농담 아닌데.”

 

“그런가요. 그럼 그냥 농담이라 생각하죠.

탄 죽은 별로 먹고 싶지 않으니까.

저도 비슷한 건 먹어본 적 있거든요. 석탄 묻은 빵은 먹어보셨나요?”

 

“... 그건 먹어본 적 없는데 아마 비슷한 맛일 거 같네.”

 

“흐음, 탄 죽이라. 탄 죽...

... 재미는 있네요. 나름 철학적인 느낌도 나고.

이런 얘기 더 없어요? 전에 했던 ‘공작새’ 농담보다는 더 좋은 거 같은데.”

 

“없진 않지. 없진 않는데...

...”

 

 

 

농담이라. 이 이야기가 농담이라면 참으로 우스운 농담일 것이다.

아주 먼 옛날, 사령관에게 몸시중을 대주러 온 안드바리와 코코에게 내 밥을 건네고 먹은 게 탄 죽이었다.

산해진미들을 버리고 그런 걸 먹었으니 농담이라면 질 나쁜 농담일 테다.

 

그리고 난, 아마 세상에서 가장 많은 농담을 알고 있는 사람일 테고.

내가 겪었던 것들 중엔 농담 같이 말이 안 되는 것들이 너무 많았거든.

 

 

 

“사람의 몸에 다른 사람의 영혼이 들어가는 얘기는 들어봤어?

세상에서 가장 평범한 인간이 가장 악독한 사람의 몸으로 들어가는 얘기.”

 

“아뇨. 난생 처음 듣는 내용인데요?”

 

 

시라유리는 지그시 나를 쳐다보았다.

 

 

“그래도 지금까지 들었던 것들 중에는 가장 재미있을 것 같네요.

해주시게요? 이번에는 기대해보죠.”

 

“... ...”

 

 

 

턱을 손으로 괸 채 나를 쳐다보는 시라유리.

조금 우스꽝스럽게 팔을 앞으로 젖히며 우아한 이야기꾼마냥 인사를 올렸다.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가씨.”

 

“후후, 그런 취급을 받는 것도 생각보다 즐겁네요.

이왕이면 더 해주세요.”

 

“지금부터 할 얘기는 그런 아가씨에겐 어울리지 않는 내용인데.

잘 숙성된 와인보단 씁쓸한 가루약 같은 거거든.”

 

“참... 농담도 못하게 하신다니까.

좋아요. 가루약 정도야 눈 감고 먹어드리죠. 쓴 거에는 자신 있거든요.”           

 

 

 

자신 있다는 시라유리를 뒤로 한 채, 작게 한숨을 내셨다.

모닥불의 불꽃은 경계가 희미해질 때까지 타닥, 타닥, 타들어갔다.

 

멸망한 세계. 내 앞에 있는 것은 그저 농담을 기다리는 한 명의 아이.

그리고 밖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기다리는 수많은 관중.


나의 가냘픈 농담을 이야기를 하기에 이보다 좋은 때는 없을 것이었다.




"... 아팠지...? 난 아직도 기억하고 있단다."


"네? 뭘 기억해요?" 

 

"아냐. 너한테 한 얘기가 아니야."



저 밖에 있는 아이들에게 한 말이야.




“...후우.”

 


 

옛 기억을 떠올리자, 머릿속에서 무수한 비명들이 그려졌다.

 

그릇되고, 절규하는 포효들.

 

하지만 입 밖으로 그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기억을 그려내는 것과 전혀 다른 문제였다.

나는 여전히 그 아이들의 고통을 깨닫지 못했다. 수박 겉을 열심히 핥아댔을 뿐이지.


그러니 말을 꺼내보았자, 황새를 따라 하는 뱁새처럼 몸이 찢겨질 뿐이다.

 

 

‘어차피 찢어질 거라면.’

 

 

하지만 죽음에 관한 것이라면?


아는 것이 있다. 이미 죽어봤으니까.

 

 

‘제대로 찢어져야지.’

 

 

목숨이 천박한 농담이 된 세계.

생존이 가련한 희망이 된 세계.

 

그것들을 마음 속으로 그리며, 나는 천박한 농담과 가련한 희망을 이야기했다.

 

이 VR 세계에 오기까지 보았던, 아니, 보아야 했던 함성과 고함과 거친 총소리들이 있었다.

그 오열과 절규는 언제나 생생한 날것이어서, 난 그 소리들을 떠올릴 수 있었다.


내 작은 성대가 담아낼 수 있을 때까지 그들의 흐느낌으로 나의 떨림을 물들였다.

 

 

「살려주세요.」

 

「제가 아니라도 좋아요, 제발 이 아이들만이라도 살려주세요, 제발.」

 

 

잠수함의 깊은 심연.

 

그곳에서 어린 아이의 가죽을 벽에 매달아야 했던 마녀들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아저씨.」

 

「저희도 저렇게 되는 건가요.」

 

 

그곳에서 아이들은 쇠사슬에 묶여 있었다.

천장에는 컨베이어 벨트가 있어 내 키의 절반도 오지 못하는 아이들은 도축장의 돼지처럼 걸려 피를 흘려댔다.

기운은 흩어지는 싸리눈의 한 알보다도 희미하여 비명조차 낼 수 없었던 아이들.

 

주황색 머리카락이, 땋은 머리가 나에겐 잊혀지지 않는 악취였다.


 

「죽고 싶지 않아.」


「죽은 아이들의 몸을 파해치고 싶지 않아.」

 

 

그 아이들의 비명을 목에 담아, 이야기를 펼쳤다.

 

 

 

“... 왓슨...”

 

 

 

천천히, 느리게, 한뼘씩.

 

내가 떠올려야 할 것이 밀물처럼 밀려들었기에 난 나의 호흡에 심장 박동을 맞췄다.

 

 

「밥... ... 아냐...!! 아냐...!!」

 

「내가 한 게 아니야!! 먹으려고... 했던 게 아니었단 말이야!!」

 

 

어느 병실의 침대 위.

 

그곳에서 자신이 먹은 아이를 회상하려 했던 어미의 절규를 떠올렸다.

 

 

「내가 어떻게 내 자식을 먹어?!」

 

「내가 왜! 내가 왜 그러겠냔 말이야!!」

 

 

어미의 눈에서는 절절한 눈물이 흘렀다.

눈물이 마르고 피가 흐르고, 피가 마르면 검은 진물을 쏟아냈다.

 

그녀가 만든 작은 희망이, 낙원이 괴물에 의해 불태워지고 있었다.

사람이 사람에게 잡아 먹히는 광경이 아이의 눈에 낙인이 되어 박혔다.

 

 

「너도 인간이잖아...」

 

「너도 눈물을 흘릴 수 있잖아...」

 

「그런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그 아이가 정신을 놓기 전, 마지막으로 괴물에게 읊조렸던 말을 떠올렸다.

그 말이 너무도 잊혀지지가 않아서.

 

 

「너만... 인간이야...?」

 

 

그 절규를, 검은 비명을 목에 담아 쌓인 살(煞)을 풀어내었다.

 

 

 

“... ...”

 

“... ...”

 

 

 

나의 말은 하나의 발걸음을 옮겼다. 발자국이 뒤에서 길게, 늘어졌다.

눈물이, 피가, 골아 터진 진물이, 발자국의 원료였다.

 

그들의 이야기는 완연한 슬픔이어서, 중간중간 길을 잃어버릴 것 같았지만 이곳까지 왔던 발자국들을 돌아보며 억지로 말을 이었다.

내가 너희의 이야기를 잊지 않았음을 모든 아이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 무슨 삶을 살아오신 거죠...?”

 

 

 

세계를 볼 때, 내가 있던 그 어느 곳에서도 목숨이란 가장 가벼운 것이었다.

 

단지 내가 있던 곳은 바이오로이드의 목숨이, 이곳에선 인간의 목숨이.

종류의 차이가 있었을 뿐, 가치의 경중(輕重)에는 일절 다름이 없었다.

 

비명의 옥타브는 어느 누구에게도 똑같아서, 음표 하나가 공평하게 마지막 삶의 촛불을 대언한 것이다.

 

 

「이건 낭비에요.」

 

「피와, 몸과, 살과, 뼈와, 피부와, 감정과, 모든 것의 낭비란 말이에요.」

 

 

세상에서 가장 죽음과 가까이 있었던 아이.

요정의 비명은 무언(無言)이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당신이 누구시기에 우리를 이토록 괴롭게 하십니까.」

 

 

그녀의 마지막 말은 질문이었다.

삶을 한없이 괴롭게 만든 이에게 던지는 질문.

 

허나 괴물의 얼굴엔 혐오감이 만연하였고, 아이는 산산이 부서지는 제 몸을 이끌고 어둠 속으로 도망해야 했다.

 

 

「전 해충이에요.」

 

「제 곁에선 언제나 시체 썩는 냄새가 날 거에요.」

 

「제가 당신의 정원에 들어가면 정원의 꽃들이 눈물을 흘릴 지도 몰라요.」

 

 

의심. 불신, 믿음을 버리는 것은 그녀의 비명이었다.

 

비명의 종류는 참으로 다양해서 사람의 모든 목소리는 비명이 될 수가 있었다.

 

기쁨도, 슬픔도, 분노도, 사랑도,

증오도, 욕망도, 감동도, 즐거움도,

 

결국 비극으로 끝나는 이야기에선 이 모두가 비명이 될 수 있었고, 그리 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무덤에 꽂힌 십자가, 풀을 뜯어 만든 피리,

흙내 나는 커피와 작은 방 너머로 비추는 노을 햇살,

삐걱거리는 휠체어와 네 자루의 검, 하나의 대검.

 

그 속에 담긴 이치가 아무리 경탄스럽다 해도, 그 오묘함이 현묘함의 극에 달한다 하여도,

결국 베드 엔딩을 맞이한 세계는 그들 모두가 비탄으로 물드는 것이었다.

 

기적.

나라는 기적과 그런 나를 믿어주는 이들의 기적.

 

비명으로 검게 물든 세계를 되돌리기 위해 필요한 것은 기적이었다.

그러니 기적이 오기까지 눈물로 버텨야 한다.

 

 

「... 보기 싫어.」

 

「당신들이 무슨 엄청난 주인공이라도 되는 것처럼 시늉하는 꼴이 보기 싫다고!」

 

 

그 기적이 닿지 못한 세계가 이곳이었다.

 

살아가는 모든 것이 비명이 되어버린 세계.

복수하기 위해 죽고, 복수가 부른 복수를 위해 죽고,

 

죽음이 끝나지 않는 세계가 이곳이었다.

 

 

「아프다. 아프다.」

 

「저 멀리, 작은 아해(兒孩)가 눈물로 세상을 우짖는다.」

 

 

수백 번 죽은 이도 이 세계에서는 아픔을 노래했다.

 

미쳐서 웃었다.

 

내 이야기는 그 웃음을 담았다.

 

 

“. 그만.”

 

 

이야기했다.

 

 

“그만해요.”

 

 

살풀이했다.

 

 

“그만하라고 말하잖아요!”

 

 

어느덧 떨리는 성대는 멈추었다.

 

내가 멈추려 해 멈춘 것은 아니었다.

시라유리가 내 손목을 꾸욱, 막아 세우고 있었다.

 

 

 

“당신...”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대체 무슨 얘기를 하는 거에요...?”

 

 

보랏빛 낙화(落花). 떨어지는 꽃이.

울고 있었다.

 

 

“난 그저 농담을 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아무리 내가 농(濃)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다고 해도 그런 이야기가 농담처럼 나올 수는 없는 거란 건 알아요!!”

 

“... ...”

 

“차라리 같이 울어달라고 하세요! 속에 응어리진 게 그렇게 많으면 그냥 얘기를 하라고요!

아무리 080 기관에서 살았다고 해도 내가 눈물 한 방울 못 흘릴 줄 아세요?

나도 슬픈 게 뭔지 알고, 비명 소리에 소름 끼칠 수 있는 사람이라고요!”

 

 

 

나는 그제야 내가 지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단지 얘기만 했을 뿐인데, 어느새 온몸이 흠뻑 젖어있었다. 성대를 바위가 짓누르는 듯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적적한 하늘을. 폐허가 된 땅을.

귀뚜라미 한 마리가 숨을 죽인 채 날 보고 있었다.

광공해(光公害)가 없는 청명한 하늘엔 별자리 수천 개가 지고 있다. 땅거미가 바스락거리며 땅을 파내리고 있었다.

어쩌면 내가 느낀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이 지났던 걸 지도 모르겠다.

 

 

 

“... 어때.”

 

 

힘겹게 입을 열어보았다.

 

 

“나 농담 더럽게 못하지?”

 

 

 

농담이라 꺼낸 이야기들. 허나 그저 농담이어야만 했던 것들.

시라유리는 침묵했다.

 

목숨이 천박한 농담이 되어버린 세계.

하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천박할 수 없었다.

 

 

 

“... 미워요. 오늘은 울고 싶은 날이 아니었는데.”

 

 

 

한참이나 침묵한 끝에 시라유리는 등을 돌렸다.

모닥물에 물을 부어 꺼뜨린 다음, 평소 불침번을 서던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익나 남은 고기의 잔향이, 조금 누리끼리한 냄새가 밤잠을 설치게 했다.

산책이라도 할까, 일어나보려 했으나.

 

 

'... 힘들다.'

 

 

털썩.

 

무릎이 풀려버렸다.

 

 

 

“... 약한 모습 보이면 또 그 새끼가 죽이러 올 텐데...”

 

 

 

추기경. 의식이 흐릿해져 가는 가운데 그 녀석이 떠올랐다.

눈을 뜨고 났을 때 그 놈이 시라유리를 데리고 가버리면 어쩌지.

그런 고민들이 문득 두려움과 함께 밀려왔던 것이다.

 

성치도 않은 몸으로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한 탓에 눈앞이 벌써 깜깜했다. 죽음에 지쳐버린 거였다.

그 때 저 멀리서 시라유리가 내게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양 손에는 얇은 이불이 들려 있었다.

 

 

 

“... 그래요. 그런 걸 농담처럼 얘기해야 했던 당신도 사정이 있었겠죠.”

 

 

 

기절하기 직전, 눈을 가늘게 떠 그 모습을 담아냈다.

황새를 따라 한 뱁새는 결국 제 풀에 지쳐 찢겨진 다리와 함께 쓰러지는 것이었다.

 

다만 목소리가 들렸다.

옥구슬 같은 소리. 

 

그래도 조금 위안이 되었다.

 

 

 

“그러니까... 이젠 그런 말 하지 마세요.

그렇게 되도록 내가 옆에 있을 테니까...”

 

 

 

썩 나쁘진 않은 뱁새였던 모양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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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절대 애 호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