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 : https://arca.live/b/supernerimk2?category=%EC%86%8C%EC%84%A4&target=title&keyword=%EC%A1%B0%EA%B8%88+%EC%9D%B4%EC%83%81%ED%95%9C


모음 : https://arca.live/b/lastorigin/2071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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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솔룸의 겨울은 참 혹독했다.

 

병마를 극복하고 넓은 집안을 거닐며 산책하는 것.

아이의 나이가 열두 살의 일이었다.

 

 

“아모렘?”

 

“이제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해도 된단다.”

 

 

저택. 샹들리에가 천장에서 아름답게 빛나고 있는 방.

 

어머니의 손길에 따라 자신의 방 안으로 들어온 아이는 거대하게 쌓여 있는 책을 보았다.

타인의 마음이 들리던 질병은 사라졌다. 어머니는 그것을 알고 아이가 좋아하는 책을 한껏 사온 것이었다.

 

 

“아모렘, 이제 네가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자고, 놀고 싶을 때 놀렴.”

 

“... ...”

 

“살고 싶은 대로 살아주렴. 엄마와 아빠는 네가 사는 것만으로도 기쁘단다.”

 

 

아이는 얼떨떨했다.

 

의사 선생님이 줬던 책에서 얘기하던 무릉도원이 이런 곳일까?

 

 

“엄마는 아래 내려가서 사람들을 도와줘야 한단다. 혹시 필요한 게 있다면 말해주렴.”

 

“... 네. 감사합니다.”

 

 

아이는 어머니가 했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타인의 생각을, 감정을 전부 읽어내던 정체불명의 증후군.

뇌가 과부하 되어 살 날이 채 일주일도 남지 않았다 울부짖던 아버지의 마음을 떠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책 보듯이 남을 읽을 수 없다.

뇌가 터질 일이 없겠지, 라며 다행스러워하는 어머니의 생각을 표정 너머로 겨우 추측했을 뿐이었다.


읽을 수가 없으니, 자신의 목숨이 그들에게 얼마나 중한 지도 알 수 없었다.

죽음이란 것이 무언지 깨닫지 못한 아이는 그저 높다랗게 쌓인 책이 마음에 들었다.

 

 

 

덜컹.

 

어머니가 나간 후 누군가 자신의 방문을 열어젖혔다.

 

 

 

“어... 죄, 죄송합니다...!! 그냥 빈 방인 줄 알았는데...”

 

 

 

아이는 문을 연 아이를 보았다.

제 나이와 엇비슷해 보이는 또래 아이. 다만 생긴 것이 자신과 다르게 흰색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 넌 누구야?”

 

“아... 저는 그냥 크레아투라에요. 주인님께서 기억해주실 만한 이름은 따로 없어요...”

 

 

 

그래. 그 얼굴을 보니 기억이 나는구나. 

아이는 기억을 떠올렸다.

구제 사업. 자신의 부모님은 버려진 크레아투라들을 거두어 들이는 일을 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만들었다고 하는 크레아투라.

자신과 닮은 존재였음에도 이들을 경시하는 문화는 이미 솔룸 전역에 퍼져 있었다.

아이의 부모는 자식의 죽음 다음으로 이것에 길게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아직 생각을 읽을 수 있었을 무렵, 아이는 자신의 어머니가 인간의 악함에 대해 비탄을 쏟아내고 있었던 것이 기억났다.

 

그리도 선한 아버지였기에, 또 어머니였기에 아이는 제 방 문을 열고 들어온 아이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 주인님이라 하지 마. 그럼 엄마가 싫어할 거야.”

 

“하... 하지만 저는 그냥 미천한...”

 

“미천하게 태어난 사람이 어디 있겠어?

한 번 태어난 사람은 어떻게든 살 수 있는 거야. 나도 그랬거든.”

 

 

 

아이는 크레아투라에게 책을 한 권 건넸다.


눈이 휘몰아치는 날에만 날 수 있다는 신화 속의 새, 레가의 이야기.


자신이 가장 먼저 읽고 싶었던 책을 양보한 것이다.

 

 

 

“책 좋아하니?”

 

“어... 책... 이요...?”

 

 

 

나눠주는 것의 기쁨.

자신의 부모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아이에게 일러주었던 말이었다.

 

 

 

“자, 같이 읽자. 재미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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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어른들은 전부 착하셔!

 

 

아이가 죽음으로부터 해방된 이후, 집안에는 웃음이 흘러 넘쳤다.

특히나 거둬진 아이들이 그러했다.

 

 

-아무 것도 시키지 않으시잖아!

 

-그래도 뭔가 해드려야 하지 않을까...? 너무 받고 사는 거 같아.

 

-아냐, 여기 주인님들이 우리들은 받는 방법을 더 배워야 한다고 일러주셨어!

 

-바보야, 주인님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알려주셨잖아. 아직도 못 배우면 어떻게 해?

 

 

흥미에 이끌려 사들였다가 흥미에 의해 버려진 아이들.

크레아투라라는 새로운 ‘물건’에 재미를 느낀 솔룸의 인간들은 재미로 인해 아이들을 버렸다.

 

그렇게 버려진 이들이 족히 몇 천이 된다고 어머니는 신음하였다.

그런 만큼 집 안에 돌아다니는 고아는 아주 많았다. 눈어림으로 세어보아도 1000명은 가볍게 넘을 만큼.

심지어 매일 한두 명의 새로운 아이들이 집으로 들어왔다. 

다만 집안이 그만큼 부유했기에 그들 모두를 거두고도 아무런 무리가 없었다.

 

 

“... 너희는.”

 

 

세상에는 왜 이리도 많은 고아가 있는 건가.

자신이 받는 사랑의 만 분의 일도 받지 못한 이들이 어째서 이리도 많은가.

 

사랑의 향기는 입을 열었다.

 

 

“너희는 어쩌다가 여기 왔어?”

 

 

순간의 정적.

 

아이들이 물끄러미 자신을 쳐다보았다.

 

 

“우리가 재미가 없데.”

 

“내 주인님은 광부 일을 하셨는데, 내가 일을 잘 못했다나 봐.”

 

“어린 아이가 취향인 사람도 있다고 하더라고. 유곽에서 일했었는데...”

 

“별로 말하고 싶지 않아.”

 

“어떤 사람이 내 주인님을 밤 중에 죽여버렸어. 강도였을까?”

 

“날 보살펴 주시던 분이 병으로 돌아가셨어.”

 

“실험실에서 도망쳤어. 배고파서 쓰러졌는데 눈을 떠보니까 여기였더라.”

 

 

배고픔. 창녀. 도적. 병. 학대. 과로.

 

아이들의 입에선 아이들이 담을 수 없는 말이 쏟아져 내렸다.

독향(毒香). 쓰디 쓴 고통의 향이 저택 안에 진동하는 듯했다.

 

 

“... ...”

 

 

아이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독의 색은 참으로 다양했다. 배고픔에 졸아진 독은 짙은 녹색이었고, 창녀로 살아간 아이의 독은 검게 물든 자줏빛이었다.

병이 길러낸 독은 노란 코스모스 같았고, 학대와 무자비에 절여진 독은 붉게 물든 핏빛이었다.

 

그야말로 극독(劇毒). 이들 모두의 마음을 읽어버렸다면 자신은 중독되어 죽었을 지도 모른다.

부모님이 자신을 고쳐준 이유가 아마 이것이었을까? 

요즘 들어 전보다 아이들이 더 많이 들어오는 것이 그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 이제...”

 

 

즈믄의 독. 세상 무슨 독이 이리도 잡스러운가.

그런 독이 모인 이곳은 대체 무엇인가? 이들은 악에게 희생당한 선이 모여있는 곳인가?

그런 자들이 모인 곳이 정말 무릉도원일까?

 

사랑의 향기는 생각했다.

 

 

“... 행복해?”

 

“응!”

 

 

아이들은 여전히 웃었다.

 

 

“밥도 매일 먹을 수 있잖아!”

 

“주인님이 일을 강요하지도 않고!”

 

“이상한 털복숭이 아저씨들한테 몸을 대주지 않아도 되니까.”

 

“이 집에는 도둑이 들 걱정이 없잖아? 그러니까 강도가 쳐들어올 일도 없을 거야.”

 

“아프지 않으니까.”

 

“맞을 일도 없잖아? 아, 혹시 일하지 않으면 나중에 맞거나 그러는 거야?”

 

“그런 얘기 하지 마! 주인 어른께서 우리는 아직 어린애라고 하셨단 말이야!”

 

“맞아, 맞아. 내가 전에 대걸레질을 하려고 했을 때는 오히려 혼을 내셨어!”

 

 

기쁘다. 마음을 읽는 능력이 없더라도 아이는 알 수 있었다.

 

이 아이들은 나태해지지 않는다. 감사하는 법을 알고 있다.

자신의 부모가 그렇게 가르쳤다. 교만하고 오만해지는 법이 없다.

 

따뜻하구나.

베푸는 것은 이리도 따뜻한 것이야.

 

 

“... ...”

 

 

그날부터.

 

아이는 그 아이들과 함께 밥을 먹었다.

 

 

「먹고 싶을 때 먹으렴.」

 

 

아이들이 먹을 때 자신도 함께 어울렸다.

 

 

「자고 싶을 때 자렴.」

 

 

다만 일찍 일어나 아이들이 좋아할 책을 골라냈다.

 

 

「놀고 싶을 때 놀렴.」

 

 

자신의 넓은 방은 어느새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놀이동산이 되어있었다.

그들 모두의 독을 중화하는 동산.

 

아이는 아이와 어울려야 한다는 당연한 사실을 몸으로 체감했다.

 

 

“아모렘은 최고야!”

 

“재미있는 책도 잘 읽어주고, 맛있는 것도 잔뜩 주잖아!”

 

“난 아모렘이 좋아. 진짜루!”

 

“밥도 일부로 우리랑 같이 먹어주잖아?”

 

“나였으면 저 커다란 침대에 자기 말고는 아무도 안 올려 보냈을 텐데, 아모렘은 착하기까지 해.”

 

 

즐거웠다. 이따금씩 자신에게 가벼운 사랑을 고백하던 아이도 있었다.

 

달콤했다.

그 꿈이 그렇게 계속되기를 바랬다.

 

 

「살고 싶은 대로 살려무나.」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하루는 한 청년이 찾아왔다. 

오랜 경험 덕분이었을까, 아이는 그것이 한 눈에 크레아투라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피철갑이 된 채 무언가로부터 도망쳐온 듯한 청년을 아이의 부모는 무시할 수 없었다.

선의로 가득 차 있던 부모는 청년의 모습을 보자 마자 버섯발로 뛰쳐나와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주었다.

 

 

“하아... 하아... 여기가... 크레아투라들을 거둬들이는 곳 맞습니까...?”

 

“아... 아이고, 어쩌다가 이런 일을...”

 


분명 부드러운 손길로 그 얼굴을 닦아주었건만, 제대로 된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청년은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말했다.



“대답해주십시오. 이곳이 맞습니까?”

 

“네... 네, 맞습니다. 혹시 도움이 필요하여 오신 것이라면...”

 

 

피가 닦여 나가자 얼굴에 나있던 상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위압감에 아이는 불안감을 느껴 부모를 만류했으나, 부모는 예전부터 그렇게 생각했다.

 

 

-이들을 이유 없이 괴롭히는 자가 있다면 이유 없이 품어주는 자도 있어야 하지 않겠니.

 

 

그런 사람이 어린 아이의 불안감을 중하게 여길 리 만무했다.

그랬기에 아이는 자신의 친구들을 데리고 방 안으로 몸을 숨겼다.

 

어쩌면, 그러지 말았어야 했던 것을.

 

 

“그럼 분명 돈도 많겠군. 우리의 고혈을 짜내서 돈을 번 괴물들 같으니.”

 

“뭐라...”

 

 

스슥!!

 

마지막 아이를 방 안에 숨겼을 때, 아이는 자신의 부모가 두동강 나는 것을 보았다.

잘린 머리는 말없이 땅 위로 떨어졌다. 카펫이 피에 흥건했다.

 

 

“됐습니다. 보스. 이제 거사를 시작해도 될 것 같습니다.”

 

-그래, 잘했다. 그런 작자들이 남아 있으면 그걸 핑계로 놈들은 우리의 복수를 비난할 지도 모를 일이다.

-피를 빨아먹는 돼지 같은 것들. 어린아이들까지 죽음으로 내모는 것들에게 자비를 보일 필요는 없다. 이 도시가 피로 물드는 꼴을 지켜보라지.

 

“여기 남아 있는 것들은 어떻게 할까요?”

 

 

무선기로 통화를 하던 그 자는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죽여라. 솔룸인이라면 죽여 마땅하고, 크레아투라라 한들 괴물들과 한솥밥 먹으며 자란 것들이다. 우리에게 합류할 리는 없어.

 

“알겠습니다. 다만 저택이 넓어서 화재로 위장하는 편이 좋겠군요.

여기까지 들어오느라 경비 시스템도 전부 박살이 났는데 이 참에 전부 지워버리겠습니다.”

 

-네 마음대로 해라. 모든 것은 우리의 자유를 위하여.

 

“모든 것은 우리의 자유를 위하여.”

 

 

청년은 주방으로 들어가 가스 밸브를 열었다.

집 안이 워낙 거대했던 탓에 가스가 차오르는 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이 때다. 도망칠 기회다.

그리 생각하여 아이는 자신의 방 안에 있을 친구들에게로 향했다.

 

 

“나... 분명히 들었어! 우리도 죽여버릴 거라고!”

 

 

그러나, 분위기가 이상했다.

 

 

“복수 때문에 그러는 거라 했지...? 그럼 우리도 같이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면 되는 거 아냐...?”

 

“어떻게 보여줄 건데! 우리는 여기 주인 어른들이랑 같은 밥 먹으면서 살았잖아!”

 

“비명 소리... 밖에서 잔뜩 들리잖아...!!”

 

 

밖에는 이미 비명 소리가 가득했다.

자신을 지켜주던 경비원도, 방호 시스템도, 그 어떤 것도 작동하지 않아, 아이는 홀로 차오르는 가스의 흐름을 느껴야만 했다.

 

불행하게도 아이의 방은 2층이었고, 가스의 잔혹한 냄새가 아이를, 또 친구들을 취하게 했다.

그 탓이었을까, 누군가 그런 말을 꺼냈다.

 

 

“아모렘을 죽이자. 그 애는 솔룸인이니까 크레아투라인 우리가 죽이는 걸 보여주면 우리도 분명 받아줄 거야!”

 

“어떻게?”

 

 

뒤 따르는 말이 ‘왜’가 아니라 ‘어떻게’였다는 사실이 아이를 미치게 만들었다.

 

 

“그냥 칼로 찌르면 죽지 않을까?”

 

“안 돼! 여기엔 칼이 없는 걸?”

 

“전에 날 때리던 주인님은 뾰족한 거 보단 무거운 걸 많이 썼어!”

 

“무거운 거? 하지만 우리 손에 들릴 만큼 무거운 건 없는 걸?”

 

“없기는 왜 없어?”

 

 

스르륵.

 

문 너머에서, 누군가 손에 책을 쥐었다.

 

 

“이걸로 때려 죽이자.”

 

“얼마나 때려야 하는데?”

 

“죽을 때까지! 전에 내 친구가 맞아 죽던 걸 생각해보면 기껏해야 몇 분 걸리지도 않을 거야...!!”

 

 

자신과 함께 읽었던 책.

어머니가 선물해줬던 책.

 

레가의 이야기.

눈발이 휘몰아치는 날에만 날 수 있으나 따스한 불꽃을 사랑하던 새의 이야기.


그게 지금 자신을 죽이려 하고 있었다.

 

 

“... ...”

 

 

아이는 말없이 문을 열었다.

나눔의 기쁨을 몰라서 저러는 것일 것이다. 이런 위급한 상황에서도 내가 지켜주는 모습을 보이면 손에서 책을 내려놓을 것이다.

아직 아이는 희망을 놓지 않았다.

 

허나 문을 열었을 때, 

자신을 돌아본 시선은 차갑기 그지 없었다.

 

 

“죽이자.”

 

“죽여서 우리는 살아남자.”

 

 

이들은 악에게 희생당한 선이 아니었다.

 

 

“생각해보니까 복수하지 않는 건 우리도 억울해!”

 

“우릴 괴롭게 만들었던 주인놈들을 전부 죽여버리자!”

 

 

그저 악을 표출하는 방법을 몰랐을 뿐.

 

가스에 취해있던 걸까.

아니면 흔들리는 불꽃에 최면이라도 당한 걸까.

 

어린 괴물들이 아이를 향해 달려 들었다.

한 손에는 책이.

 

아이가 가장 좋아하던 책이 들려 있던 채로.

 

 

-이유 없이 괴롭히는 자가 있다면.

 

아이는 몰랐다.

 

-이유 없이 품어주는 자도 있어야 하지 않겠니.

 

존재라는 건 그렇게 딱 나눠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이유 없이 괴롭히는 자가 있다면 이유를 가지고 괴롭히는 자는 또 얼마나 악독해질 수 있을까.

아이는 자신이 보았던 모든 독을 마음 속에 품어 졸여냈다.

 

죽음으로. 구타 당해 피가 터지고 뼈가 으스러지는 격통으로.

그 불꽃으로. 졸여냈다.

 

 

-아프다.

 

-아프다.

 

-내가 아프다.

 

 

불꽃이 졸여낸 염(殮).

그렇게 아이는 첫 번째 죽음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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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요. 왓슨?”

 

 

 

귀뚜라미. 시끄러운 귀뚜라미 소리가 울리는 어둑함.

 

내가 눈을 뜬 것은 아직 별빛이 가시지 않은 새벽 아침이었다.

 

 

 

“일어나야죠.”

 

 

 

몸을 일으키려 배에다 힘을 주었지만 왠지 모르게 일어나지지 않았다.

 

이유가 적잖아 궁금해 눈을 뜨니, 코 앞에 시라유리의 얼굴이 맞닿아 있었다.

 

 

 

“스읍, 내 친구는 아가가 아니에요.

아침에 일어나는 것도 도와줘야 할 사람은 아니겠죠?”

 

“... ...”

 

 

 

이 애, 내가 자고 있는 틈에 배 위로 올라탄 것이었다.

그러니까 당연히 못 일어나지. 

시라유리의 속눈썹이 슬렁거리는 것이 눈 앞에 보일 정도로 아주 착 달라 붙어있었으니까.

 

 

 

“... 치마 입고 다니는 애가 경망스럽게 뭐 하는 짓이야.”

 

“하지만 왓슨은 섹스도 많이 해봤다고 했잖아요?

이 정도 자극이야 뭐, 아무렇지도 않죠?”

 

“내가 언제 그런 얘기를...”

 

“어제 저한테 막 귀신 들린 듯이 얘기해줬을 때.

경황이 없어서 이해하는 데 시간이 걸렸을 뿐이죠.”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싱글싱글 웃으며 내 팔을 자신에게로 쭉 잡아당기는 시라유리.

아무래도 나랑 얘는 개그 코드가 좀 다른가 보다.

 

 

 

“계속 그렇게 나 깔고 앉아 있으면 일어나려고 해도 못 일어날 거 같은데.

일어나다가 이마 부딪힐 거 같단 말이야.”

 

“흐음, 일어나자마자 청산유수인 걸 보니까 몸은 멀쩡한 모양이군요.”

 

 

 

시라유리가 일어나 묻은 먼지를 털어냈다.

 

 

 

“스트레칭 좀 하시고 일어나세요.

오늘부터는 좀 험난한 여정이 될 것 같으니까.”

 

“험난한 여정?”

 

“전 이 건물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을 게요.”

 

 

 

그렇게 말하곤 휙, 돌아서서 가버렸다.

내가 뭔가를 말할 새도 없이, 화살과 활을 챙기고 떠나버린 것이다.

 

오늘 뭐든 하겠다고 작정을 한 건가.

멀뚱멀뚱 눈을 두어 번 감았다 뜨니 정신이 말짱해졌다.

 

 

 

“... 저건 챙겨가라고 내버려 둔 건가?”

 

 

 

덜컥거리는 감각에 옆으로 눈을 돌리니 그곳에 각종 무기가 널려 있었다.

 

정확한 이름은 모르겠으나 080 기관의 표식이 적힌 권총과 저격 소총.

전쟁 영화 속에서나 봤던 생존용 나이프, 마체테 등등. 언뜻 보기에도 탐탁치 않은 것들이었다.

 

설마 저걸 나보고 전부 싸들고 오란 건 아니겠지. 옆에 가방이 있는 걸 보면 그러라는 거 같기도 하고.

그런 생각에 그나마 만만한 권총을 손으로 들었다.

 

 

[아이템: 권총 을 획득했습니다.]

 

“응?”

 

 

 

그 때 총이 작은 빛 가루 같은 것으로 변하며 공중으로 흩뿌려졌다.

 

게임이라더니 이런 기능까지 구현해놓았던 건가?

다른 건 몰라도 추기경이 지구 문화에 대해 공부를 많이 했다는 건 인정해줘야겠다.

 

 

철컥. 스륵. 스르릉.

 

 

그렇게 남아있는 무기들을 전부 챙긴 다음, 재가 된 모닥불 주위를 이리 저리 둘러보았다.

우리가 있는 곳은 무너진 건물의 으슥한 내부. 불이 꺼지니 밖에서 들어오는 흐릿한 새벽빛에만 의존해 걸어나갈 수 밖에 없었다.

 

 

 

“... 미친 놈이신가?”

 

 

 

그 때 무언가 발에 툭, 하고 걸렸다.

얇은 막대기 같은 무언가. 눈을 게슴츠레 뜨고 자세히 살펴보니 거대한 망치였다.

 

겉에 붙어 있던 쪽지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었다.

 

 

-본 추기경은 그대의 활약을 기대한다네!

 

“... 미친 놈 맞네.”

 

 

 

전에 날 때려 죽인 그 망치. 내가 자고 있는 사이에 이 놈이 툭, 하고 놓은 다음 가버린 것이다.

 

들어보니 확실히 가볍긴 가벼웠다. 나이프 무게의 절반 정도나 될까?

휘두르는 감각에 공기 저항도 느껴지지 않았고, 적어도 인간이 만든 무기 같지는 않았다.

 

 

 

“뭐야, 쪽지 뒤에 뭐가 더 적혀 있네?”

 

-혹시라도 추기경이 만나고 싶거든 언제든 마음 속으로 숫자를 생각하게나! 생각해야 할 숫자는 259. 본인이 죽은 횟수라네!

 

“... ...”

 

-추신: 혹시라도 부를 마음이 있다면 미리 언질이라도 해주게! 아무리 나라고 해도 최애캐에게 부스스한 모습을 보여주긴 싫으니까!

 

 

 

음.

 

이 쪽지는 태워버리자. 손도 대면 안 되겠어.

 

특히 259. 저건 생각도 하면 안 되겠다. 

259. 내 평생 가장 불행한 숫자로 기억해주마.

 



조심스럽게 물건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흐릿한 물안개가 껴있는 세계. 

하늘을 올려다 보려고 했으나 안개와 하늘의 경계가 구분되지 않아 나는 막연히 시라유리를 따라 나섰다. 

 

 

건물을 빠져나가자 멸망한 세계가 눈 앞에 펼쳐졌다.

 

도심 한복판에 시라유리가 활을 들고 나를 향해 손짓했다.

저 멀리, 꽤 높게 올라간 건물을 가리키면서.

 

 

 

“어때요, 잠은 푹 주무셨나요?

자다가 누가 아주 업어가도 모르겠던데.”

 

“예, 누가 잘 자던 사람 몸 위에 올라타기 전까지는 말이죠...”

 

“하여간 말 잘하는 건 인정해줘야 한다니까.”

 

 

시라유리는 영 마딱잖은 듯이 눈썹을 찡그렸다.

 

 

“그냥 아예 내가 업고 도망쳐버릴 걸 그랬나?”

 

“누굴 아주 물건으로 아는 구만...”

 

“지금 세상에서는 안 그런 게 더 이상할 걸요?

바이오로이드들은 복수하겠답시고 세계를 점령했는데, 사람을 사람 대접 해주면 그게 더 이상한 거죠.”

 

“... 그건 조금 소름 끼치는데?”

 

“바이오로이드는 수십 년을 그러고 살아왔어요.

그냥 그러려니 하세요. 적어도 당신 옆엔 당신을 사람처럼 대하는 친구가 있잖아요?”

 

“그건... 으휴. 내 팔자가 어쩌다 이 모양이 되어버린 건지.”

 

“그냥 운명인가보다~ 생각하세요. 후후.”

 

 

 

인간의 목숨이 물건이 되어버린 세계라.

단지 그 단어는 말로만 들어도 제법 오싹한 감이 있다.

내가 그런 세계에서 살아가는 중이라면 더더욱 그렇고.

 

그래도 운 하나는 억세게 좋은 놈이라 여기까지 살아남았다.

솔직히 처음 이곳에 떨어졌을 땐 죽어도 골 백 번은 죽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운은 정말 끝내주게 좋은 셈이지.

 

 

'... 생각해보면 그건 또 아닌 거 같은데...'

 

 

추기경, 그 개새끼가 나한테 스토커마냥 들러 붙은 걸 보면 또 그런 것 같지는 않고...

... 하여튼 여왕도 그렇고, 카르디아도 그렇고. 

아무래도 난 철충들의 마돈나인가 보다.

 

 

 

“따라오세요.”

 

 

시라유리의 발자국을 따라 밟으며 진창을 걸었다.

그러는 동안 시라유리가 말했다.

 

 

 

“원래 계획대로 였다면 제가 당신을 방공호에 감금시켜 놓고 안전해질 때까지 데리고 있으려 했죠.

하지만 그 요상한 증후군 때문에 그럴 수는 없게 됐으니, 나름대로 살아갈 방법을 간구해봤어요.”

 

“방법? 무슨 방법?”

 

“피식자가 포식자들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으려면 포식자가 되는 수 밖에 없죠.

무기는 들고 왔죠?”

 

“일단은.”

 

 

 

시라유리가 뒤돌아보기 전에 난 가방에서 저격 소총을 꺼내 들었다.

아이템을 얻는 것처럼 꺼내는 건 별로 어렵지 않았다. 내가 생각을 하면 물건을 쥐기도 전에 가방 안에 들어 있는 것이 보였으니까.

 

 

 

“... 참 가지고 다니기도 힘든 걸 들고 오셨네요.”

 

“그래도 우리가 가려는 건물 크기를 생각하면 나쁘진 않을 거 같은데.”

 

“... ... 하늘도 무심하시지. 어쩌다가 제 친구가 이리도 생각 없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까.

총 쏘는 게 무슨 게임처럼 쓱쓱 하면 뾰복 하고 날아가는 줄 아세요?

오늘 같이 안개가 짙게 깔린 날에는 앞도 잘 안 보이고 습도 계산까지 해야 하는데.”

 

“그럴 줄 알고 다른 것도 들고 왔지.”

 

 

 

권총. 기관단총. 나이프. 마체테. 조금 과하다 싶은 전기톱까지.

추기경이 내려놓고 간 망치를 제외한 모든 물건을 가방에서 꺼내 보기 좋게 땅바닥에 내려 놓았다.

 

 

 

“그걸 지금 다... 들고 온 거에요?”

 

 

 

아직 다 꺼낸 거 아닌데.

시라유리가 딱 기겁하는 정도에서 난 손짓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힘들지 않았... 아니, 오리진 더스트로 강화 시술을 받았다면 그럴 수도 있겠죠.

어째 오늘따라 더 능글맞아 보인다 했더니 아주 바리바리 다 싸들고 오셨네요. 

080 기관에서 육성될 때도 당신 같은 능구렁이는 본 적이 없어요.”

 

“칭찬이지?”

 

“마음대로 생각하시죠. 후우... 도통 가늠을 할 수가 있어야지.”

 

 

그래, 살기도 빡빡한 세계.

굳이 인색하게 이런 말 하나하나에 거칠게 반응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사람들의 말을 곱게 곱게 받아들이는 법도 연습해야 능숙해지는 법이니까.

 

 


“... 이쯤이면 되겠군요.”

 

 


시라유리가 안내한 곳은 손가락으로 가리켰던 건물 건너편의 다른 빌딩이었다.

빌딩이라 하기엔 유리창도 전부 뜯겨 나가 뼈대만 남은 시체 같은 건물이었을 뿐이지만, 그 크기만큼은 우리의 목적지와 비견되는 크기였다.

 

안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으나 시라유리가 활시위를 당기고 나면 건물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자기 말로는 쥐나 다른 설치류라던데, 뭐 볼 수 있는 게 있어야 의심을 하든 말든 하지.

 

날도 어둑어둑해 별 신경을 쓰지 않았고, 우리는 건물의 중간쯤 되는 위치에 다다랐다.

 

 

 

“저기, 건너편의 건물 보이시죠?

 

“응. 근데 저기로 가려던 거 아니었어?”

 

“아뇨. 저기가 우리의 목적지라고 했지. 저기로 가야 한다고는 하지 않았어요.”

 

“그게 그거 아닌가 싶은데...”

 

“뭐, 궁금하시면 가셔도 좋지만 이걸 보면 생각이 달라지실 걸요?”

 

 

 

내 가방에서 저격총을 건네 받은 시라유리가 능숙한 솜씨로 스코프를 설정해 나에게 보여주었다.

 

빛이 닿지 못해 한밤처럼 어두운 건물 2층과 3층. 그 안에는 피가 낭자한 제단 같은 것이 있었다.

그리고 제단을 향해 절을 하고 있는 무언가가 보였다.

 

 

 

“저거... 바이오로이드야...?”

 

“네. 사람들을 죽여서 인신공양 비슷한 걸 하는 바이오로이드들이죠.

저희 기관에서도 저것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고민 중이에요.

사람들 데리고 오면 정보를 얻어내야 하는데, 그러기도 전에 제물로 죽여버리니까.”

 

“... 사이비들인가...? 어쩌다가 저런 짓을...”

 

“사람들도 종종 그런 종교에 빠지지 않던가요?

저 애들도 그런 거 비슷한 거겠죠. 다만 저렇게 광신도가 된 거에는 이유가 있겠지만.”

 

“이유?”

 

“저기 있는 바이오로이드들은 전부 옛날에 부자들이 돈을 들여 사제로 만든 애들이에요. 신고되지 않은 기체들이죠.

당연히 예전엔 불법이었죠. 설계 과정을 통제할 수가 없으니 안전성도 떨어지고, 그 과정에서 두뇌의 일부를 건드리면 둘도 없는 살인마가 될 수 도 있었으니까.

아마 명령권이 해제되는 과정에서 뇌 일부가 고장이 났거나... 뭐 대충 그럴 거라고 기관은 판단하는 중이에요.

지금까지 납치해 죽인 인간만 해도 이백 명은 넘을 거라 추정 중이라 빨리 처리하고 공문까지 내렸죠.”

 

 

 

시라유리의 말에 다시 한 번 스코프를 들여다 보았다.

 

확실히, 내 눈에 익은 바이오로이드는 없었다.

북미에서 넘어온 아이들까지 전부 명단을 확인해봤었지만 저기 있는 애들은 그 중 누구와도 닮아 있지 않았다.

 

프랑켄슈타인마냥 머리에 커다란 나사를 꼽고 있는 아이.

온 몸이 시체처럼 새파랗게 질려 있던 아이.

팔이 두 쌍 달려 있거나 가슴이 세 개씩 달린 아이 등, 

아이들은 단지 생긴 것만으로도 돈 많은 것들이 어떤 취향을 가졌는지 낫낫이 고하고 있었다.

 

개인이 사제로 만든 바이오로이드라니...

하긴, 돈이면 뭐든 다 되는 세상에서 그런 게 안 될 건 또 뭐가 있겠나 싶다.

 

 

 

“자, 이제 우리 목표는 저기 있는 애들을 전부 다 죽이는 거에요.

대충 백여 명 정도 있더군요? 그 정도는 죽일 수 있겠죠?”

 

“... 몇 명? 백 명? 그걸 설마 나보고 전부 다 죽이라고?”

 

“제가 옆에서 지원 사격 해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리고 말했잖아요? 피식자가 포식자 틈에서 살아남으려면 포식자가 되야 한다고.”

 

“... ...”


"강화 시술까지 받은 사람이 뭐가 무서워서 그래요?

저렇게 만들어진 애들은 안전성이 떨어진다고 했죠? 그러니까 싸움의 싸 자도 모르는 애들뿐이죠.

아닌 말로, 바이오로이드 백 명이 모였는데 사람 이백 명 '밖에' 못 죽이는 게 말이 되나요? 전부 약하니까 그런 거지."

 

 

 

그렇게 생각하면 또 그렇긴 하다.

몸 바꾸기 전에는 브라우니랑도 팔씨름하면 열 번 중에 두어 번 이길까 말까 했을 정돈데.

물론 내 몸이 약하기도 했던 거지만 말이다.


아무튼, 심기일전 하고 건물 내부를 찬찬히 둘러보았다.

각도 때문에 잘 보이진 않았으나 저 안에서 십자가에 매달린 사람이 보였다.

치사량의 두 배는 될 정도로 흘린 피가 바닥에 흥건했고, 바이오로이드들은 그걸 보며 환호하고 경배한다.

 

명령권이란 족쇄에서 해방시킨 신에게 찬양이라도 하는 걸까.

저기 매달려 있는 게 나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니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아, 이번에는 총 쓰지 말고 단검이나 마체테 같은 근접 무기를 쓰도록 하세요.

모르는 사람이 쏘면 십중팔구, 반동 제어 못해서 자세가 금방 무너지고 말거든요.

총 쏘는 법은 나중에 천천히 알려줄 테니까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지 마시고.”

 

“저 애들은 총 안 쓴데...?”

 

“자기를 괴롭힌 인간들을 고통스럽게 죽이려고 하는데 그런 비싼 걸 쓰겠어요?

애초에 총구류에는 별 관심이 없더군요. 기관에서 몇 번 거래를 시도해봤는데 그런 건 쓸모 없다고 무시하더라구요.

원래 인간들도 고통스럽게 죽일 때 총을 써먹진 않잖아요? 그런 거죠. 뭐.”

 

“... 미친 애들이 한둘이 아니구나.”

 

“미치지 않고서야 살아남을 수 없는 세계니까요.

 

 

 

가방 안에선 날카로운 칼날이 손 끝에 만져졌다.

굳이 죽여야 하나? 내가 직접? 게임만 클리어 하면 되는 일인데...

밖에 있는 애들 눈치 보이는 게 이만저만이 아니라서 말이다.

 

... 하지만 거절을 하기도 마냥 쉽지만은 않았다.

일단 명분이 없잖나. 시라유리 입장에서는 날 평생 함께 갈 동료로 생각하고 있을 텐데, 제 목숨 하나 못 지키는 겁쟁이를 데리고 다니기엔 부담스러울 것이다.

 

 

 

“혹시 누군가를 죽이는 게 부담스럽다면 저희 기관이 하는 방법을 알려드릴 게요.

저희는 첫 번째 임무에서부터 여러 명과 싸워야 하는 미션을 맡아요.

그러다 보면 우연찮게 첫 살인을 하게 되죠. 그리고 당연히 그걸 듣고 몰려드는 사람들에게 두 번째, 세 번째 살인을 하게 되고.”

 

“... ...”

 

“마음이 연약해지기도 전에 몰아붙이는 거에요.

죽이고 죽이고 계속 죽이다가 어느새 괴물로 변해버린 자신을 보는 거죠.

누군가를 죽이는 것이 주는 죄책감보다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가 크니까.”

 

 

 

시라유리의 말을 들으며, 우리는 건물 아래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마음을 닫아버린다는 거, 어렵게 들리지만 그보다 쉬운 일은 없어요.

살아남겠다는 열망만 쫓아가다 보면 그렇게 되어버리니까.

대신,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반대편의 건물 안에는 괴물들이 있었다.

약에 취한 듯이 비틀거리는 바이오로이드들이, 얼굴에 인간의 피를 뒤집어 쓴 채 염색을 하는 아이들이.

 

그건 하나 같이 인간이길 포기한 자들이었다.

인간으로부터 자유로워진 바이오로이드. 그들 중엔 인간이 아니라 괴물이 되기를 선택한 자들도 있었다.

 

 

 

“당신이 그 선을 넘기 전에, 제가 지켜줄 테니까.

생존을 천박한 농담처럼 말하게 되기 전에 끄집어내 줄게요.”

 

“... ...”

 

“우리는 그저 살아남으려는 거에요.

변명이라 생각해도 좋고, 비겁하다 손가락질 해도 좋아요.

하지만 언젠가 해야 할 일이라면 저런 괴물들로 시작하는 게 좋겠죠.”

 

 

 

그래. 시라유리의 말이 맞다.

인간이란 것은 살아남으려면 흙도 파먹을 수 있는 것들인데 살려면 뭔들 못하겠나.

누군가를 죽여본 적은 없으나 죽여야 한다면 망설이지 않을 용기는 있다.

 

다만 한 가지, 밖에서 이런 나를 보고 있을 아이들이 마음에 걸렸다.

 

그 탓에 시라유리 대신 앞장 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아무런 무기도 들지 않은 채.

 

반쯤 깨진 유리문을 벌컥, 열어젖혀 남들의 이목을 끌어들였다.

그 중엔 눈이 세 개 달린 아이도 있어 시선이 제법 부담스러웠다.

 

 

 

“응?”

 

 

 

건물 안으로 들어선 나와 그런 나를 뒤따라 온 시라유리.

우리 둘을 향해 몇 명의 바이오로이드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인간? 이 주변에 아직도 인간이 남아 있던 건가?”

 

“죽일까? 요즘에 제단이 텅 비어 있어서 마음이 아팠는데.”

 

“아니, 살아있는 채로 잡아야지. 080인지 뭔지 하는 년들 때문에 제물을 구하기가 쉽지 않단 말이야.”

 

“어라, 저기 옆에 있는 바이오로이드... 낯이 익는데?”

 

 

 

건물 안을 채우는 수근거림에 수 명이, 그 뒤로 수십 명이 바글거리며 건물의 2층에서 우릴 내려다 보았다.

그들 손엔 하나 같이 낡은 단검이 들려 있었다. 피를 잔뜩 머금어 붉게 된 단검이.

 

그 중 하나가, 시라유리를 향해 검을 던졌다.

하나가 던지자, 둘이, 셋이 던지는 것은 전염병이 퍼지는 것처럼 당연했다.

 

 

팅!

 

팅! 팅! 팅!!

 

 

다행히 화살통을 들어 능숙하게 막아낸 시라유리.

다만 그 뒤로 따라오는 수십 개의 단검을 막아내기란 역부족이었다.

 

얼굴에 스친 상처, 다리에는 아예 검 하나가 박혀 피를 흘리고 있었다.

다만 바이오로이드 특유의 회복력 덕분인지 이 정도로 끝나서 다행이라며 시라유리는 한숨을 돌렸다.

아무렇지 않게 뽑아낸 자상에선 피가 순간 뿜어나다가, 이내 그쳤다.

 

 

 

“다음 단검을 던질 때까지 대략 10에서 15초.

왓슨, 상의도 없이 먼저 들어와버린 건 나중에 탓할 테니까 지금은...”

 

“... 됐다.”

 

 

 

그리고 나 역시 안도의 한숨을 내셨다.

 

죽지 않아서가 아니라,

명분을 만들 수 있어서.

 

 

 

“지킨다.”

 

 

 

저것들은 시라유리를 죽이려 했다.

그리고 시라유리는,


내 친구다.

 

 

 

“친구를 지킨다.

싸울 이유가 생겼어.”

 


 

이제 밖의 어느 누구도 내가 이들의 머리에 칼을 박아 넣는 걸 탓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극한에 다다른 때라고 해도 난 인간일 수 있었던 자들을 죽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 대신, 다른 이유로 손에 검을 들었다.

지키는 것. 멸망한 세계에선 오직 그것만이 하나의 정의로 수렴하였다.

 

 

 

「악이란 건 대체 뭐지?」

 

「무엇이 악이고, 무엇이 선인지는 누가 판단하지?」

 

 

 

좋다, 추기경. 이번만큼은 너의 말이 맞았다고 해주마.

저들은 선이 아니다. 한 때 선이었을 수 있었던 자들이었겠으나, 지금은 악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시라유리를 지키려는 자에게는 저들이 악이 맞다.

 

다만 내가 저들을 향해 칼을 들려는 것은 악을 심판하겠다는 거창한 이유가 아니다.

살아 남고, 지키려는 것이지.

 

 

 

‘애들 숫자를 보니 단검이나 마체테로는 안 될 것 같고...’

 

 

 

대신, 나는 손맛이 좋은 망치를 들었다.


 

 

“후우... 시라유리?”

 

“네. 말씀하세요.”

 

“애들을 죽이다가 내가 선을 넘게 되면 네가 책임져 준다고 했지?”

 

“뭐 이런 곳까지 와서 그런 걸 걱정하나요?

당신이 힘들면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아니, 그럴 필요 없을 것 같아서.”

 

 

 

지키자. 나의 손짓은 오직 지키려는 자의 신념을 따라 행하자.

그들의 비명과 신음과 팔짓과 발동작, 모두를 떠올리자.

그걸 마음에 심고, 괴물들을 향해 뽑을 칼날을 벼려낼 숫돌로 만들어내자.

 

그리 하여 나는 선을 넘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그 선이 나에게 성큼 다가오지 않는 이상, 난 출발점에서 변치 않고 기다릴 것이다.

 

지키기 위해 휘두른다면,

나의 눈을 그 어느 때보다 선명하게 흩날리는 피를 볼 수 있을 테니까.

 

추기경이 나를 죽음으로 몰아넣으려 하더라도 내가 행했던 것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자.

멸망한 세계에서도 정의를 따르는 사람이 있단 걸 보여주자.

 

그게 인간에게 분노한 아이들이 나란 놈을 받아준 방식이었고,

 

 

 

“내가 먼저 간다. 시라유리.”

 

 

 

내가 아이들을 좆간에게서 구해낸 방법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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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절대 애 호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