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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상태가 좋지 않군요. 갖다 버리세요.”

 

“네? 하지만 아직 먹을 수 있는...”

 

“그거 먹다가 배탈나면 약값만 더 듭니다.

다음!”

 

 

 

훗카이도 42번 대피소. 

시라유리가 기관에게 알리지 않아 아직 멀쩡한 이곳엔 사람들의 발로 북적거렸다.

 

여자와 어린아이의 수만 대충 수십.

장정들의 수는 그보다 조금 적은 정도.

간간히 어머니 대신 유모 역할을 바이오로이드의 품에 안겨 있는 아이들도 있었다.

 

북적거리는 것을 딱히 싫어하는 편은 아니지만, 지금 같은 때엔 마냥 좋을 수가 없다.

물자 부족은 물론이거니와 편히 쉴 곳도 없다는 뜻이니까.

 

그나마 다행인 것은 모두가 살아남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버티고 있다는 것.

오는 길에 주변 편의점, 마트 등을 싸그리 털어봤으나 나오는 것은 쓸데 없는 썩은 우유들뿐이었다.

아마 여기서 먹겠다고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했던 탓이었겠지.

생존 의지가 강해서 다행이다. 누구랑은 다르게 말이야.

 

 

 

“그 통조림은 식량 창고로 옮기세요.

아, 식수들 빼고는 다 정화 처리 해야 할 거 같으니까 걔들은 옮기지 마시고.”

 

“아... 네, 네! 알겠습니다!”

 

“유지방이 있는 음료수들은 진작에 먹어야 한다는 걸 왜 까먹고 다니는 건지...

그런 정신 머리로 어떻게 살아남았나 몰라요.”

 

 

 

아무튼, 지금 저기서 식량 정리를 총괄하는 사람의 목소리는 시라유리의 것이다.

여기 온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열일하는 모습이 아주 대견스럽다.

 

아, 어떻게 이렇게 빨리 자리를 잡을 수 있었냐고?

뭐... 이 대피소로 들어와 주도권을 잡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주변에 있던 바이오로이드 하나 때려 눕히고 끌고 와 보여주니 알아서 슬슬 기었으니까.

 

게다가 똑똑하기까지 하지. (나는 아니지만.)

그런 사람이 땀 흘려 가며 먹을 거 못 먹을 거 가려주고 있으니 싫어할 사람이 없는 게 당연하다.

 

시라유리는 대피소의 남은 식량들을 총괄하는 담당자가 되었다.

그녀의 말 한 마디에 사람들 수십 명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으니 그거야 말로 진정한 장관이겠다.

 

나? 나는 뭐하냐고?

그거야 당연히 살아남을 방법을 간구하고 있지.

 

 

 

“여하튼, 적들의 움직임을 고려해본다면...

...

... 지금 짐의 말을 듣고 있소?”

 

“... 아, 물론입니다...! 요안나 님.”

 

“하아... 이리도 얼빵한 사람이 짐을 대신하여 대피소의 지도자가 되다니.

부디 실전에선 그러지 말길 바라네.”

 

 

 

프레스터 요안나. 참 스토리에선 접점이 없었던 애였는데 우연찮게도 이 대피소에서 사람들을 보살펴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우연... 이라고 하긴 힘드려나? 오는 길에 날이 빠진 검 수십 개가 박혀 있는 걸 보고 어느 정도 눈치채긴 했다.

 

바이오로이드가 인간들을 살려주다니, 그 정체가 수상하여 한 번 살펴보니 이 요안나는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아무튼, 동방의 기독 군주로서 인간들을 학살하는 참혹한 현장에 차마 가담할 수 없다고 했던가?

덴세츠 출신답게 영화 설정에 과몰입하고 있는 건 패시브다.

 

뭐, 그 덕에 나랑 시라유리는 나름 살아남을 탈출로를 찾은 셈이니 우리로썬 덩굴 때 굴러들어온 호박이나 다름 없지.

 

 

 

“후우... 그래도 그대의 무력은 뛰어나 보이니 참으로 다행이구나.

같이 데려온 바이오로이드도 헌신적인 것 같으니 배신 당할 염려는 없을 것 같고.”

 

“그리 봐주시니 영광입니다. 요안나 님.”

 

“... 지금 짐을 비꼬는 건가?

아니면 짐이 지금 허황된 얘기를 하는 거라 지레짐작 하는 겐가?”

 

 

 

허황된 얘기. 

저게 뭔 소리인가 하면... 일단 한 번 들어봐라.

 

 

 

“어...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아무리 그래도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수천의 바이오로이드 군세가 이 근처에 있다니... 그건 조금...”

 

“어허!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짐’만이 사용할 수 있는 군세니라!”

 

 

 

기세 좋게 가슴을 펼치며 자랑스럽게 얘기하는 요안나.

역시, 지금 설정뽕에 취하긴 거하게 취해버렸어.

 

그나저나 수천의 바이오로이드 군세, 저게 허황된 것이 무슨 얘긴가 하면 이 애의 출신을 생각해봐야 한다.

요안나는 십자군 영화를 찍기 위해 만들어진 바이오로이드. 허나 전쟁 영화는 한 명의 전사로는 부족한 법이다.

아무리 CG를 쓴다고 해도 수십 명은 필요한 법. ‘반지의 제왕’ 영화도 그렇게 찍었다 하지 않나.

 

하지만 상대가 누구인가? CG 쓰자고 한 직원을 당일 해고시켜 버릴 만큼 ‘진짜’에 미쳐 있는 덴세츠다.

당연히 영화에 나올 수천의 군세도 CG가 아닌 실제로 만들 계획을 하고 있었고, 그 애들 하나하나가 전부 다 싸울 수 있는 녀석들이다.

 

요안나의 말은 지금 그 영화 소품으로 제작된 진짜배기 전사들이 가까운 공장에서 자신의 명령을 대기하고 있다는 거다.

그러니 당연히 뜬구름 잡는 얘기를 하고 있는 거라 생각할 수 밖에. 이 주변에 멀쩡히 남아있는 공장이 있을 리가 없는데 말이야.

 

하지만 또 덴세츠가 덴세츠 했다고 생각하니 나름 고개가 끄덕여진다.

 

 

 

“아무튼, 짐의 결론은 이들을 이용하여 이 대피소에 일종의 안전 구역을 만들 수 있다는 거다.

아무리 뛰어난 바이오로이드라고 한들 수천의 검과 창을 피할 수는 없는 법이니!”

 

“... 검과 창은 너무 냉병기 아닌가요?

상대는 총도 쏘는 애들인데 그거로 싸우려면...”

 

“짐의 군세가 눈먼 총알 따위에 당할 성 싶더냐?

정 뭐하면 전처럼 시라유리라는 아이에게 총을 쏴보라 하거라. 짐의 방패가 한 톨의 총알도 남김 없이 막아줄 터이니.”

 

 

 

우리의 첫만남을 떠올리며, 요안나는 다시 한 번 웃음을 지으며 날 쿡쿡 찔렀다.

 

우리가 여기 처음 왔을 때 우릴 반긴 건 사람이 아니라 요안나, 즉 바이오로이드였다.

그 탓에 시라유리는 요안나를 보자마자 총을 발포했고, 요안나는 방패를 들어 그걸 보기 좋게 막아냈었다.

 

 

 

“총수들은 총을 쏘기 전에 총구를 겨누지 않던가?

스스로 궤적을 알려주는 꼴인데 그것도 막지 못한다면 왕관은 저 멀리 냅다 던져야지.”

 

“하... 하하...”

 

 

 

자기 말로는 공장에 있는 바이오로이드들 중 7할 이상은 자신보다 뛰어난 전사라 하니, 확실히 어지간한 바이오로이드라면 그 군세에서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허면 요안나 님?”

 

“그냥 요안나라 부르거라.”

 

“지금 우리의 목표가 뭔지 잊진 않으셨죠?”

 

“이 대피소의 인간들을 지키는 것.

짐이 그런 간단한 것도 모를 거라 생각하였느냐?”

 

“그럼 지금 상황을 바이오로이드 격퇴가 아니라 스테일메이트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도 아실 거라 믿겠습니다.”

 

“물론이다. 아무리 군세가 강하다고 한들 전 세계의 미친 바이오로이드와 싸울 수는 없는 노릇이니.”

 

 

 

스테일메이트. 킹이 체크 상태가 아니면서 이번 차례에 스스로 체크가 되는 수를 둘 수 밖에 없는 체스의 상태.

 

그러니까 쉽게 말해 무승부를 노리자는 거다.

우리가 놈들을 상대로 이길 수는 없겠으나, 우릴 치면 너희도 무사할 수 없다는 걸 보여주려는 것.

외줄타기 같은 서늘한 평화라도 유지하려는 것이 요안나의 궁극적인 목적인 것이다.

 

죽지 않는 세계라니. 그게 뭐 별거인가?

어차피 칼에 찔려 죽으나 늙어 죽거나, 이런 미친 세계에서는 죽음을 피할 수 없다.

그러니까 얼마 간이라도 평화가 이어질 수 있다는 논리를 보여주면 되는 것이다.

 

 

 

‘물론 추기경 상태가 말이 아니니 그거로 클리어 조건이 충족될 지는 모르겠다만... 해보긴 해야지.’

 

 

 

수천의 바이오로이드 군세. 그들 모두가 요안나 정도의 실력자라고만 해도 핵 이상의 무력을 의미한다.

하지만 요안나는 그저 지휘관, 전사로 만들어진 애들의 전투은이 그 이상일 건 뻔하다.

이 정도 비대칭 전력이라면 평화를 유지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다만 그 아이들을 깨우기 위해선 짐이 직접 공장에 방문할 필요가 있다.

짐의 목소리가 그들을 영원한 잠에서 깨울 유일한 열쇠이니.”

 

“직접... 말입니까? 쉽진 않겠는데요?”

 

“걱정하지 마라.

요 근래 적들의 침공도 잦아들었고, 네가 데리고 온 시라유리란 아이도 믿음직스러우니 조금 왕래하여 문제될 것은 없을 거다.

무엇보다 공장이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으니 쓱 갔다 오면 된다.”

 

“가깝다고요? 공장이 여기서 얼마나 가깝죠?

밖에 눈 부라리고 있는 바이오로이드를 생각하면 가는 길이 꽤나 험난할 거 같은데.”

 

“그리 멀지 않다. 오늘 당장 가서 꺼내와도 상관 없을 정도지.”

 

“그럼 왜 여태까지 안 가셨죠? 저였다면 당장 가서 데리고 왔을 텐데.”

 

 

 

깊게 생각하지 않고 툭 뱉은 물음에 요안나가 길게 한숨을 내셨다.

 

 

 

“하아... 여기서 언제 죽을 지 모르고 신음하는 어린양들을 내 어찌 버리고 도망하겠나?

그대도 알겠지. 이 세계에서 힘없고 약한 사람들은 모두 목을 잃었다는 것을.”

 

 

 

그렇게 말하며 요안나는 자신의 서랍을 슬쩍 열어 내게 보여주었다.

 

꽃 모양의 머리핀, 월계수 잎 모양의 금관, 토끼 머리띠, 기사들이 입을 법한 흰 장갑...

작은 장식품들이 어지럽게 놓여져 있었다.

 

 

 

“이 대피소를 침략해온 자들에게서 얻어낸 전리품이다.

하루 걸러 하루마다 실력자들이 이곳의 인간들을 몰살하기 위해 찾아왔다.

그들과 싸워 이들을 지켜내고, 상처를 치유하고, 다시 싸우고... 전투에 정신이 팔리다 보니 짐이 차마 갈 수가 없더군.”

 

 

 

꽃 머리핀이라면... 모모일 테고, 토끼 머리띠라 함은 백토일 것이다.

금관은 아탈란테, 흰 장갑은 샬럿.

 

 

“... ...”

 

 

이제야 요안나의 검날이 왜 이리 무뎌져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모모의 카타나를, 백토의 전기톱과 아탈란테의 창, 샬럿의 레이피어를 막아내며 사람들을 지켜왔으니 저렇게 낡게 변한 것이었다.

 

볼품 없기에 그지 없었기에 오히려 눈에 들어온 요안나의 칼.

거기 묻은 피가 아니었다면 이 대피소에선 인간의 피가 소나기처럼 내렸을 것이다.

 

 

 

“... 이해합니다.”

 

“그대가? 어찌?”

 

“저도 바이오로이드를 죽여본 적 있으니까요.

바보 같게도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 쉽지 않은 삶을 살아왔군.

그런 자라면 짐의 등을 맡겨도 믿음직스럽지.

인정 받은 것을 영광으로 알게나.”

 

“물론입니다.”

 

 

 

메인 극초반 지역에서 잠시 얼굴을 비추고 잠적해버린 비운의 캐릭터.

스킨은 물론이거니와 그 흔한 승급조차 없어 영원히 최하위 B급으로 남은 아이.

플레이어들이 정을 붙일 새도 없이 사라진 요안나는 기어코 잊혀져 풀네임조차 까먹은 사람들이 태반이었다.

 

허나 이 세계에선 꿋꿋히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것도 누군가를 지키는 이야기를.

어떤 시나리오보다 자신에게 어울리는 것을 찾아내 목숨을 걸고 그를 위해 사는 것이다.

 

 

 

“정말이지, 그대 같은 용맹한 자가 내 곁에 있을 때 짐의 신화가 시작된다면 참 좋을 텐데.

본디 군대를 이끌고 돌격하는 장면은 아주 일부의 하이라이트에나 어울리는 법이지, 그 외에는 한두 명의 심복과 함께 하는 것이 정석이니라.

그대 같은 자가 짐과 함께 있다면 가히 영화와 같은 역사가 펼쳐졌을 것이다. 참으로 아쉬운 고로.”

 

“... 요안나 님.”

 

“왜 그러지?”

 

 

 

모두에게 잊혀져도 싸우는 것.

하나의 영화처럼 흐드러지는 것.

 

그 용기는 오로지 선한 사람에게서만 나오는 법이었다.

악마라니, 당치도 않는 얘기지.

 

 

 

“우리의 역사는 이미 시작됐습니다.

군대를 찾으러 가시죠.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 후후, 그대 같이 말해줄 이를 내 평생 기다려왔다고 하면 믿겠는가?

그다지 긴 평생은 아니었겠지만.”

 

“하하, 글쎄요... 별로 믿고 싶진 않습니다.

전 그런 영화 같은 말은 오글거려서 면역이 없거든요.”

 

“어휴, 나의 심복이란 분위기란 것을 읽을 줄 모르는 구나.”

 

“그 대신 망치질은 좀 할 줄 압니다.”

 

“그래. 그거면 충분하지.

오글거리는 말을 읊는 건 짐이 하겠노라. 그대는 옆에서 투박한 망치질이나 하거라.”

 

“예, 저도 그 말만을 기다려왔습니다.”

 

 

 

여전히 영화란 꿈 속에 사는 사람.

다른 요안나들은 자신이 그저 배우란 사실을 자각하고 살았으나 이 요안나는 여전히 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허나 그래서 더욱 멋이 있었다.

멋스러운 대사, 피와 살점이 난무하는 세계에서 안심하게 만드는 기적과도 같은 말 한 마디.

세계가 이러하니 정의의 멋은 결코 쇠퇴하지 않았다.

 

 

 

“삶의 늘그막이 느껴질 찰나에 그대 같은 자를 만나다니.

이 또한 참으로 꿈 같구나.”

 

 

 

내 눈 앞에 요안나가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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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쪽이니라.”

 

 

 

멀지 않은 공터, 요안나가 한 폐공장을 가리키고 있었다.

굴뚝에서 연기가 나기는커녕, 주변 공기는 상쾌하기 그지 없었다.

버려진 공장은 되려 깨끗해야지만 버려졌다는 걸 증명할 수 있던 것이다.

 

어름어름 바이오로이드를 피해 도심 외곽으로 겨우 몸을 피했다.

역시 아직 도심 중앙을 돌파하기엔 무리였다. 바이오로이드가 그렇게나 많이 있었으니까.

그래도 요안나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면 이제부터는 가능할 거다.

 

근데 문제는 공장의 크기가 너무 작다는 거지. 

 

 

 

“저곳이다. 저곳에서 짐의 병사들이 짐을 기다리고 있도다.”

 

“어... 그냥 버려진 공장 아닙니까?

굴뚝에선 연기도 안 나오는... 그래. 연기야 인간들이 다 죽었으니까 그럴 수 있다 칩시다.

그런데 일단 너무 작잖아요? 수천의 병사라고 하기엔...”

 

 

많이 쳐줘봐야 수백 명 정도 있을까 말까 하는 정도의 크기.

언뜻 보면 그냥 별 볼 일 없는 중소기업 설비 라인 같기도 하다.

 

 

 

“의심도 많구나. 땅 위가 탐탁치 않다면 땅 아래를 살펴보면 될 것을.”

 

“땅 아래라면...”

 

 

 

지하를 얘기하는 건가? 하지만 공장 부지에 그 정도 규모의 지하실이 있다고 상상하는 건...

... 아니다. 덴세츠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 쓸모 없는 건 그냥 넘기자.

 

게다가 공장이 저리 작다면 다른 바이오로이드의 의심을 피할 수도 있었을 테고... 장점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자, 이제 나머지 걸음을 걸어보자.

짐도 짐의 병사들을 볼 날이 다가왔다 생각하니 가슴이 떨리는 구나.”

 

“... ...”

 

“왜, 너는 심장이 두근거리지 않느냐?

이젠 너 혼자 지키려 애를 쓰지 않아도 된다. 짐의 병사들이 너를 힘써 도와줄 것이니.”

 

“... 아뇨. 그런 건 아닌데...”

 

 

 

우리 편인 바이오로이드라니, 그러면 그 애들이 다치는 꼴은 또 보기가 민망해진다...

 

... 그래. 바보 같은 소리라는 건 안다. 내 코가 석 자인 상황이니까.

하지만 솔직히 마음에 걸리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젠 누가 죽는 꼴 보기엔 이골이 나서 말이지...

 

 

 

“아니면 그냥 조용히 따라오거라!

짐은 소 여물 씹듯이 웅얼거리는 것을 가장 싫어하느니라.”

 

 

 

... 자기 회상도 못 하게 하시는 구만.

역시 한 성깔 하시는 우리 요안나 님이시다.

 

 

 

삑. 삐빅. 삑. 삑.

 

요안나가 능숙한 솜씨로 공장의 비밀 번호를 눌렀다.

중세 시대의 전설을 연기하는 사람이 현대 문물을 이리도 잘 사용할 줄이야. 

왠지 모를 어색함에 머리를 긁적거렸다.

 

 

 

“자, 기대하거라. 이제 짐의 병사가...

... 수그려라!”

 

 

 

문이 열리던 그 때, 요안나는 무언가를 보고 급하게 내 머리를 바닥에 처박았다.

눈 앞이 핑 돌려는 것을 간신히 참아낸 뒤 공장 안을 보자 이리 저리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바이오로이드 몇 명을 볼 수 있었다.

 

파랑 머리. 기이할 정도로 새파란 것이 처음 보는 아이였다.

허나 주변을 둘러보는 눈은 충혈이라도 난 것인지 간담이 서늘해지게 만드는 빨간색이었다.

 

 

 

“설마 이곳까지 수색을 진행하고 있을 줄은...”

 

“저기... 혹시 그러다가 저희 군대를 발견하기라도 했다면 어떻게 합니까?”

 

“그럴 걱정은 없다.

문을 강제로 개폐한 흔적도 없고, 무엇보다 짐의 음성이 아니면 병사들은 반응하지 않는다.

저쪽, 부서진 창문을 타고 들어온 것 같군.”

 

 

이 작은 공장에 왠 손님이 이렇게 많은 거냐.

 

요안나는 툭, 하고 투정을 내뱉으며 주변을 이리 저리 살폈다.

 

 

 

“지금 당장이야 괜찮겠지만 짐이 목소리를 낸다면 들킬 지도 모를 일...

이 주변에 얼마나 숨어있을 지 모를 일이니 그대는 여기서 대기하도록 해라.”

 

“그러다 다치시기라도 하면 어쩝니까?

칼도 다 날이 빠졌고 방패도 너덜너덜하지 않습니까...”

 

“나의 심복은 참 걱정도 많은 아이로고.

네 놈이 짐보다 많이 다쳐봤겠느냐? 짐은 아픈 걸 참는 것엔 익숙하다.”

 

“(... 태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면서...)”

 

“뭐라 궁시렁거리느냐?”

 

“아, 아닙니다...”

 

 

 

... 아마 아닐 텐데요.

그 얘기가 목 밖으로 나가는 걸 간신히 참았다.

 

 

 

“흥, 능구렁이 같은 것이 그림으로 빼다 박은 듯한 책사 감이니라.

그러니 이러쿵저러쿵 하지 말고 저짝 풀숲에 숨어 있거라.

숨는 것도 싸우는 것만큼이나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될 터다.”

 

“어... 저도 싸움은 한 따까리 하는데 좀 거들어드릴까요?”

 

“망치질이나 하는 녀석을 데리고 무슨.

내가 필요하면 부를 터이니 잠자코 숨어 있어라.”

 

“... ...”

 

“뭐 하느냐? 숨어있으래도?”

 

 

 

훠이 훠이. 요안나가 나를 향해 손짓하며 빨리 가버리라고 재촉한다.

 

하지만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수전증에 걸린 것처럼 부들거리는 것이 내 눈에 보여져 버렸으니까.

 

 

 

“... 요안나 님. 이게 쉬운 싸움이 아니란 건 알고 계시잖습니까.”

 

“어허, 지금 그런 것을 가릴 때가 아니란 것쯤은 안다.

그러니 헛튼 소리 하지 말고...”

 

“죽으러 가실 생각이십니까?”

 

“... ...”

 

 

 

순간, 요안나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언제나 과장된 몸짓으로 나를 속이려 했던 요안나지만, 저 공장에 어슬렁거리는 이리들은 그런 것으론 가릴 수 없을 만큼 성나 있었다.

 

 

 

“지금 요안나 님 몸 상태가 말이 아니라는 것. 저도 알고 있습니다.

전에 시라유리의 총알을 막고 한참 동안이나 말이 없으셨던 거, 제가 몰랐을 것 같습니까?”

 

“그, 그 날은 그저 컨디션이 안 좋았을 뿐이니라.

짐은 그저 네가 걱정되어서...”

 

“정말 걱정이 된다면 이런 곳에 홀로 버려두면 안 되는 겁니다.”

 

 

 

죽으러 가는 나를 보던 시라유리의 감정이 이런 것이었을까?

날 뒤로 밀어내려는 요안나가 원망스럽기 그지 없었다.

 

그 탓에 조금 목에 힘을 주고 말했다.

요안나가 휴우, 하고 한숨을 내쉬며 나를 가볍게 끌어 안았다.

 

 

 

“... 좋다. 방금의 선택은 짐의 실책이었느니라.

심복이 이리 말을 한다면 그에 응해주는 것이 군주의 응당한 책무인 법이지.”

 

“누구랑 다르게 말이 통해서 참 다행입니다. 요안나 님.”

 

“누구? 지금 은근슬쩍 짐을 놀리는 것이렷다?”

 

“하하... 아뇨, 그런 건 아니고 그냥 그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친구 지키겠다고 수십 명을 죽이고 수십 번 죽던 녀석이.”

 

 

 

이렇게 자조적으로 말하려 하니 얼굴이 제법 붉어진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요안나는 지금 내가 내 이야기를 한다는 걸 몰라 하는 눈치라는 것 정도겠구나.

 

 

 

“수십 번 죽어? 그럼 죽어도 일어나는 게냐? 

그렇다면 필시 좀비나 동방의 강시와 다를 바 없는 것이겠구나.

뭐, 사람은 아니겠지. 사람이라면 제 목숨 아까운 줄 알아야 하는 법이니.”

 

“하... 하하...”

 

 

 

저렇게 말하는 걸 보면 눈치 못 채는 건 또 아닌 것 같고...

 

 

 

“아무튼, 짐의 목숨을 귀히 여겨주는 건 고맙다만 응당 그 대응책을 간구했으니 그랬던 것이렷다.

이제 어찌할 셈이냐. 저 공장 안에는 짐의 목소리로만 일어나는 병사들이 잠들어 있다.

짐의 몸은 이제 나약해져서 네 말대로 홀로 들어간다면 필시 죽음을 피할 수 없겠지.”

 

“... ... 대응책... 말입니까?

방법이 없지는 않은데 그게 조금...”

 

“호오? 좋다. 생긴 것도 곱상하니 본래부터 싸움보단 머리 쓰는 일에 어울린다 생각하던 참이었다.

우리 능구렁이가 무슨 생각을 떠올렸을 지 참 궁금한고로.”

 

“... ...”

 

 

 

그래. 원래 소설에서도 해법 없이 질질 짜기만 하는 엑스트라가 제일 좆 같은 법이다.

그러니 일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이를 악 물고 고민했다.

 

우선 저것들이 아군인가? 아니, 그럴 리 없다. 총을 들고 있는 모양새를 보니 누굴 죽이려고 온 게 틀림 없다.

그러니 저건 적군이라 생각해야 한다. 하지만 뭘 하기 위해 온 거지?

 

단순 수색? 아니면 요안나의 군대를 점령하려고? 전자라면 다행이지만 후자라면 큰일이다.

반인간 세력에도 요안나가 있을 지 모를 일이니까.

 

그나마 주변에 흔적은 없다고 한 것으로 보아 다른 놈들이 선수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가져가야 한다. 그러려면 저 놈을 죽여야 하고, 주변에 있을 지도 모를 동료도 처리해야 한다.

 

 

 

‘... 아니 뭔 상황이 이렇게 개떡 같냐...’

 

 

 

... 솔직히 이렇게 백날 분석해봐야 답이 없긴 매한가지다.

애초에 우리의 전력은 여기 있는 애들에 비하면 개미 떼나 다름 없으니까.

 

시라유리는 대피소를 숨기기 위해 남아 있었어야만 했고, 대피소 내의 바이오로이드 중엔 전투용으로 만들어진 애들은 없었다.

결국 나와서 싸울 수 있는 건 나랑 요안나 뿐인데 그마저도 이 모양이다.

 

은밀하게 숨어서 들어가는 게 최선인데 목소리를 써야 하기에 들킬 수 밖에 없는 상황.

폭발물이라도 있으면 여기서 주의 분산용으로 먼 곳에서 터트리는 수라도 있는데 그것도 마땅치 않다.

 

 

 

“무엇하느냐? 말해보라 하지 않느냐.

혹시 아무 생각 없이 짐의 길을 가로 막은 것은 아니겠지?”

 

“하... 하하...”

 

 

 

결국 남은 방법은 그것뿐인가...

내가 이 방법은 눈치 보여서 죽었다 깨어나도 쓰고 싶지 않았는데...

 

 

 

“... 요안나 님. 혹시 낚시 해보신 적 있으십니까?”

 

“낚시? 그건 또 왜?”

 

“원래 낚시를 할 때라면 미끼가 필요한 법입니다.

인간 피에 미쳐있을 녀석들이니 제가 미끼가 된다면 놈들은 분명 이를 악 물고 따라오겠죠.”

 

“뭐라?”

 

“주변에 누가 있을까 걱정된다고 하셨죠?

제가 먼저 움직이겠습니다. 저기 있는 애들을 데리고 나갈 테니 그 틈에 요안나님은 군대를 꺼내 오시죠.

우리가 여기까지 온 것을 헛되게 하면 안 됩니다.”

 

 

 

어차피 죽어야 한다면 원 코인 남아있는 애가 하는 게 낫지.

그렇게 생각하며 손에 망치를 들었다.

생긴 게 좀 우스꽝스럽긴 했지만 부피가 크니 눈 먼 총알 정도는 이게 막아줄 수 있을 거다.

 

어디 보자. 숨을 크게 한 번 들이 마시고 계산을 한 번 해봤다.

동료가 2명 이하라면 4번 미만으로 죽을 테고, 5명 정도라면 8번 정도는 죽을 각오를 해야 한다.

그 이상이라면 뭐... 요안나가 올 때까지 죽어줘야겠지.

 

운이 좋다면 대화하면서 몇 분 정도는 더 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여 발을 앞으로 내딛으려 했을 때,

 

 

 

“지금 이게 미쳤나?!”

 

“으읍?!”

 

 

 

요안나가 내 목덜미를 후려치며 망치를 뺏어 던졌다.

 

 

 

“지...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그러다가 들키기라도 하면...”

 

“아서라! 그게 지금 네 입에서 나올 말이더냐?!

네 말대로 지금 그게 스스로 뒤지러 들어가는 것과 다를 바 없는데, 내가 그걸 보고만 있으라고?”

 

 

 

아, 내가 죽어도 괜찮다는 걸 몰라서 이러는 건가?

하긴, 죽지 말라고 붙잡았는데 대신 죽으러 가겠다 하는 거니 남들이 보기엔 이상한 모양새였을 것이다.

 

 

 

“괜찮습니다. 저는 어차피 죽어도...”

 

“다시 부활한다고?”

 

“... 에?”

 

 

어라.

 

이건 예상 못 했는데.

 

 

 

“너와 함께 온 아이에게 들었다.

네 놈, 죽어도 부활할 수 있다면서? 오리진 더스트인지 뭔지 하는 것 때문에.”

 

“... 시라유리가 그걸 말했습니까?”

 

“그 아이는 똑똑한 아이다. 정보로 거래를 할 줄 아는 아이지.

하물며 자신이 원하는 바는 빼놓지 않고 말할 줄 아는 아이고.

그 애가 나에게 뭐라 당부했는지 아느냐?”

 

“... ...”

 

“죽게 내버려 두지 말아달라고 했다. 아주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근데 내 눈 앞에 있는 것은 죽고 싶어 안달 난 하루살이 같구나!”

네 목숨의 무게가 정녕 하루살이 정도이더냐?”

 

 

 

요안나는 나를 잡아 당긴 다음, 자신이 직접 공장 안으로 들어갔다.

단 한 발자국만. 은밀했기에 아직 적이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네가 말했지. 우리의 역사는 이미 시작되었다고.

아니. 네가 그리 말하고 싶다면 나는 그것을 거절하겠노라.

짐의 역사의 첫 페이지를 네 놈의 피로 장식하고 싶었더냐? 오만방자한 것 같으니.

네가 피를 흘리면 그 아이도 피눈물을 흘릴 것이니 짐의 첫 페이지는 붉게 물들겠구나!”

 

“... ...”

 

“짐이 너를 용맹하다고 평가했으나, 아니. 짐이 틀렸노라!

넌 그저 죽음의 공포를 잊었을 뿐이다! 그러면서도 몸에 칼이 박히는 것은 두려워 덜덜 떨고 있지!

네 몸이 덜덜 떨면서 비명을 지르는 게 보이지 않더냐?!”

 

 

 

요안나가 망치를 들고 있던 오른팔을 들어 내 눈 앞에 전시했다.

 

떨림. 근육이 자기 마음대로 움직여 이도저도 아닌 모양새를 하고 있다.

 

무서워서? 아마도 맞을 거다.

내가 이걸 잊어버리려고 얼마나 노력을 했는데 결국 완전히 떨쳐 낼 수는 없었다.

 

 

 

“... 그리 말하는 요안나 님은 뭐 엄청난 묘안이 있습니까?

저도 처음부터 이렇게 되고 싶진 않았습니다.”

 

“됐다! 짐도 방법이 없었던 것은 아니니라!

그저 조금 안전한 길을 택하려 했을 뿐인데 네 놈이 만류하여 그쳤던 것이다!

엄청난 묘안이 있냐고? 짐이야말로 묻고 싶구나!

뭐 얼마나 대단한 방법이길래 그렇게 뻐드렁대며 짐의 앞길을 막았던 것인지!”

 

“... ...”

 

 

 

방법이 있다는 말에 차마 대꾸할 힘마저 사라졌다.

혼자 있는 척, 잘난 척은 다했는데 결국 떠올리는 방법이 뒤져가면서 시간 버는 거라니.

내가 요안나였다고 해도 기가 찼을 테니까.

 

화가 난 듯이 거칠게 내 손목을 가로 채는 요안나.

부들거리는 내 손과 다르게 요안나의 팔은 일절의 떨림도 없었다.

 

 

 

“짐은 너의 의지에 감탄했다.

이런 세계에서도 누군가를 지키려고 하는 너의 모습에 경의를 표했다.

하지만 그렇게 쉽게 내던질 목숨이라면, 전언 철회하마.

넌 지금 스스로의 삶뿐만 아니라 짐의 인정마저 좀 먹고 있는 것이다!”

 

“...”

 

“할 말 있느냐?”

 

“... ... 묘안을 떠올리지 못하는 멍청한 인간이라 죄송합니다.”

 

 

 

그 말에 요안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다시.”

 

“... 멍청하게 죽으려고 해서 죄송합니다.”

 

“다시.”

 

“... 별 생각도 없었으면서 나대서 죄송합-“

 

“다시!”

 

 

 

불호령이라는 것이 이런 걸까.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였음에도 내 어깨 위에 코끼리 수십 마리가 올라간 듯하다.

 

 

 

“지금 짐이 왜 이렇게 하는 것인지 모르는 거냐!”

 

“...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하! 솔직한 건 마음에 드는군.

그저 말이나 해보라는 거다! 어쩌다가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죽는 인간이 됐는지.”

 

“죽어도 다시 살아나니까...”

 

“그걸 보는 사람의 심정을 정녕 모르는 거냐?”

 

“압니다. 알아서 이렇게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겁니다.

그리고 요안나 님이라면...”

 

 

 

군주로 태어난 사람의 눈에서라면, 전사를 이끄는 지휘관의 눈에서라면,

전쟁으로 죽는 사람의 아픔보단 그 각오를 좀 더 봐줄 거라 생각했다.

 

 

 

“... 짐이라면 그렇게 죽으러 가는 널 놓아주리라 생각하였느냐?”

 

“... ... 예.”

 

 

 

시라유리. 그래도 나의 친구일 테니 그 애에겐 이렇게 죽는 내가 힘겨워 보일 수도 있을 거다.

그래서 그 애를 피해 이렇게 도망쳤다.

 

밖의 아이들이 나를 보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이 게임에서 한 시라도 빨리 탈출하는 것.

밖에서 여전히 괴로워하고 있을 애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미어터질 것 같다.

 

그러니 적어도 아직 나에게 죽음은 도구다.

그러니 남 몰래 죽는 건 상관 없을 거다, 애들 마음에 상처만 주지 말자, 그렇게 생각했다.

죽을 때마다 유언으로 밖의 아이들에게 인사라도 건네면 괜찮지 않을까, 그렇게 여겼다.

 

하지만 이 요안나는,

조금 다른 의미로 화가 난 것 같다.

 

 

 

“... 짐을 그런 무뢰배 취급 한 것은 마음에 들지 않다만.

말해봐라. 무엇을 위해 죽었던 것이냐.”

 

“... 처음엔 그냥 사랑을 증명하려고 죽었습니다.

그 다음엔 증명한 것을 검증하고자 죽었습니다.”

 

“... ...”

 

“그리고 그 다음엔 지키려고 죽었습니다.

내가 약해서... 무능해서 이 모양이 된 게 한탄스러워서 죽었습니다.”

 

 

 

억울함. 답답한 어떤 것이 거북이 등딱지처럼 단단하게 굳어 내 마음에 들러 붙은 듯했다.

 

원래라면, 게임 속의 주인공대로였다면 난 지금쯤 오르카 호에서 편히 쉬고 있을 것이다.

이렇게 공장 앞에서 쭈구려 어떻게 죽어야 잘 죽었다고 할까, 그 따위 고민은 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란 말이다.

 

 

 

“난 여전히 살아갈 것임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몇 번이고 죽어도 너희를 위해 절대 포기하지 않을 거란 걸 보여주려고 했단 말입니다...”

 

“... 그러했구나.”

 

“죽어도 다시 살아나는 거... 아픕니다. 더럽게 아파요.

온 몸이 타들어 죽기도 했고 방사능에 절여져 죽기도 했습니다.

중독, 갈증, 굶주림, 가지가지 방법으로 다 죽어봤습니다.”

 

 

 

배가 고플 땐 흙이 맛있어 보였다.

목이 마를 땐 하수구의 구정물이 시원해 보이기도 했다.

죽음이란 언제나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것이었고, 이 세계에서도 똑같았다.

 

하지만 그런 것에 아이들을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잖나.

저기 밖에, 내가 나오기만을 목이 빠져라 기다리는 아이들이 있을 텐데, 그 애들 앞에서 못하겠다고 쓰러지면,

그래서 클리어를 포기하겠다 선언해버리면, 그건 이런 가상 세계에서 죽는 것쯤은 따위로 만들어버릴 만한 충격이었을 테니까.

 

 

 

“미친다는 게 뭔지 알았습니다. 정말 미치기 직전까지 가기도 했고요.

머리 속엔 살아야 한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더 쉽게 죽었습니다.

... 저도 제 목숨을 던지고 싶었던 건 아니란 말입니다. 아니었는데...”

 

 

 

그랬는데, 나도 정말 더럽게 힘들고 추악하게 버텨왔는데.

 

 

 

“... 제 목숨이 고작 하루살이 같다고요...?”

 

 

 

그런 말을 들은 게 너무도 억울했다.

 

 

 

“... 짐이 또 한 번 실언을 했구나.

미안하...”

 

“제 죽음이 그리도 가치가 없었습니까?”

 

“... 그만하거라. 짐의 잘못을...”

 

 

 

화가 났다.

그 단순한 감정이 왜 이리도 어색한지.

 

토하듯이 말이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뭐? 목숨이 가볍다고요?

난 그냥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죽고 싶어서 죽었던 것도 아니라고요!!”

 

“... ...”

 

“네! 가벼웠겠죠! 존나게 평범했으니까 명줄도 존나게 가벼웠을 겁니다! 

애초에 난 그리 대단한 사람도 아니었-“

 

“그만.”

 

 

 

순간.

주변이 고요해졌다.

 

 

 

“그만하거라. 부탁이니라.”

 

“... ... 아...”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는지 인지한 순간, 난 내 손으로 입을 틀어막을 수 밖에 없었다.

지금 누가 누구에게 큰 소리 치고 있는 거냐. 나에겐 그럴 자격도 없는 건데 대체 누구에게...

 

 

 

“... 아팠구나.”

 

“... 예...?”

 

 

 

웅크려 앉은 나를 요안나는 그저 가만히 끌어 안았다.

 

따스하고, 온화하게.

근심으로 가득 찬 얼굴을 내게서 숨기면서.

 

 

 

“아팠구나. 

그 모든 날이 너에게 아픈 나날이었어.”

 

 

 

그 안이 사뭇 따스하여 숨결이 고요해졌다.

 

 

 

“네가 그 동안 얼마나 아팠겠느냐, 얼마나 비명을 지르고 싶었겠느냐,

그것을 짐작하지 못할 게 아니었거늘, 짐이 참으로 멍청했구나.”

 

“... ...”

 

“울고 싶었느냐, 소리치고 싶었느냐, 그러하면 지금 나에게 하거라.

짐의 역사는 아직 하이얀 백지이나 너는 이미 핏빛으로 물들었구나.

그게 얼마나 괴로운 것인지 짐이 모르지 않거든... 아아, 안다고 자만하는 꼴이 네게 추하게 보였겠구나...”

 

 

 

요안나가 나의 뺨을 쓰다듬었다.

 

 

 

“허나 그 동안 단 한 번도 그 핏빛을 고할 기회가 없었을 것이니... 네가 참으로 힘겨운 삶에서 살았다.”

 

“걱정해주시는 겁니까...?”

 

“후회하는 거란다. 나의 말을, 주워담을 수 없는 그 말을.”

 

“요안나 님이 후회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후회해도 제가...”

 

“아니. 후회스럽다.

너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많이 알았어야 하거늘, 네가 죽으러 가는 그 뜻을 알지 못하였으니 후회스럽다.”

 

“... ...”

 

 

 

목소리가. 또 그 짙은 눈동자가.

 

그 모습은 전사가 아닌 되려 성녀의 것이었다.

 

 

 

“아아, 어찌 눈물 한 방울 흘리지 못하는고.”

 

“... ... 그랬다간... 저를 사랑해주는 아이들이 힘들어할 테니까요.”

 

“여물지 못한 새가... 벌써부터 무대 위의 광대가 되었구나.

너에게 누가 그리 하라 하였더냐. 어찌 이 우스꽝스러운 세계에서 도망치지 않았느냐...”

 

“... 친구가.”

 

 

리앤이란 친구가.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거든요.

아마 지금도.”

 

“... 그래. 그러했구나.”

 

 

 

시기가 급함에도 불구하고 요안나는 그저 말없이 나를 지켜보았다.

 

급히 오기 위해 차마 알지 못했던 나의 과거를 전부 훑어내는 듯이,

눈동자가 가만히, 내 눈을 응시했다.

 

그녀의 손은 제법 거칠었다.

검의 손잡이에 너무도 많이 스쳐 굳은살이 배겨버린 것이었다.

 

 

 

“네가 흘린 피는 필히 방패가 되었어야만 했으나, 이 세계가 그것을 검으로 벼려내었다.

검이 흘리게 만든 피가 또 다른 검이 되었으니, 너의 삶은 검날로 무참히 찢겨졌다.”

 

 

 

요안나가 손으로 내 귀를 막았다.

 

저벅 저벅,

주변을 기웃거리는 바이오로이드의 발소리를 가려준 것이다.

 

 

 

“검에 짓이겨진 마음에 미쳐 광인이 되어도 모자랄 판에 아직도 넌 네 친우를 구원하고자 하는구나.

네가 아직 죽음을 두려워하는구나. 허나 그러기에 용맹하다.

네 이야기가 핏빛일지 언정, 그 심성은 변하지 않는다.”

 

 

 

발가국의 저벅임은 한 줌 자박임이 되었고,

손결의 따스함은 뜨거운 울분처럼 녹아들었다.

 

 

 

“네가 아팠더냐, 그럼 아픔을 노래하라.

네가 울고 싶었더냐, 그럼 눈물로 노래하라.

나는 그것이 듣고 싶구나.”

 

“... ... 저는...”

 

 

 

그 때, 이 손길의 온기가 기시감을 일으켰다.

 

아침잠을 헤치며 날 깨우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그러했고,

피로한 어깨를 장난스럽게 풀어주는 이의 손이 그러했고,

고된 하루 끝에 내 옆에서 함께 잠드는 이의 눈과 같았다.

 

난,

모든 아이들과 함께하고 있었다.

 

 

 

“... 처음에는 뜨거워 아팠습니다.”

 

 

 

고해소에 들어간 어린 아이처럼 아픔을 노래했다.

 

 

 

“처음엔 피부가 벗겨졌습니다. 둘째에 근육의 심줄이 뜯겨졌습니다.

하지만 순간의 섬광이 눈을 뒤덮고 나서야, 셋째에 아팠습니다.”

 

“뼈가 녹아 드는 기분이 저릿하더군요. 한 걸음을 내딛을 때 뼈가 부러지기도 했습니다.

목이 말라 눈 앞의 액체를 들이켰는데 독이더군요. 몸이 안쪽부터 녹아내렸습니다.”

 

“갈증은 바스락거렸습니다. 굶주림은 갉작거렸습니다.

땀 한 방울조차 열기에 증발해버리는데 눈물이 나올 리가 없단 걸 너무 늦게 깨달았습니다.”

 

“... ... 참...”

 

 

아픈 날이었습니다.

 

그리 말하려던 찰나, 요안나가 내 입을 손으로 감쌌다.

 

 

 

“... 그만.”

 

“부탁이니... 그만하거라.”

 

 

 

손은 고요한 분(憤)을 품었다.

내 귀엔 어째서인지, 저 밖의 아이들의 목소리처럼 느껴졌다.

 

답답했다. 속이 메스꺼워지고, 먹은 통조림이 날 것으로 거슬러 올라오는 듯하다.

그 모습에 요안나가 한탄을 하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 먼 옛날, 예수라는 자가 있었다. 신의 아들이었지.

자기 백성을 구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구원자.

자신을 향해 손가락질 하는 이들의 조롱과 멸시, 울분과 원망을 한 몸으로 받으며 죽었다.”

 

“허나 그 역시 오직 한 번의 죽음이었다.

아이야. 불쌍하고 가엾은 아이야. 넌 앞으로 얼마나 죽으려 하느냐.

신조차 그저 한 번의 죽음으로 족하다 하였다. 얼마나 죽어야 괴로움에서 벗어나겠느냐.”

 

 

목청은 가만히 떨리고 있었다.

 

 

“아이야. 죽음은 그저 아픔이다. 그것이 너를 지켜줄 수는 없다.

그러니 죽어야만 한다면, 부디 그 가치를 헤아리거라.

네 죽음으로 울어야 하는 이들의 눈물이 능히 대해(大海)를 이루겠으니 그 무게를 셈하거라.

이런 세계에서, 죽지 말란 말은 하지 않겠다.” 

 

“그저... 아프지 말거라.”

 

 

 

요안나가 내 가슴께를 쿡, 쿡, 찔렀다.

마치 깨달으라는 듯이.

 

죽어가며 누군가를 지켜낸다는 건 신도 하지 않을 미친 짓이었단 걸 왜 몰랐을까.

 

전지(全知)하진 않으나 전능(全能)한 반쪽 신이어야만 할 미친 짓.

반 쪽짜리 신이더라도 신임을 증명하라고 했던 게 이런 의미였을까.

 

 

 

“그래, 그리 말하며 빈 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겠지.

잠시 쉬고 있거라. 나는 다시 저들의 군주로 돌아가야 하니.”

 

“네...? 그게 무슨...”

 

“... 후우...”

 

 

 

흐르는 눈물을 팔로 훔치며 요안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그녀는 허릿춤의 검집에서 낡은 검을 뽑아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다시금, 이전의 위엄을 가지고.

 

터벅. 터벅.

 

요안나의 발자국이 무겁게 땅을 짓눌렀다.

그 소리에 공장 안 바이오로이드들이 일순간 고개를 돌려 총구를 겨누었다.

 

그러나 요안나는 아무렇지 않게 읊조렸다.

 

 

“거짓을 따라 사는 이들아.”

 

“꿈을 따라 사는 이들아.”

 

“너희의 왕이 명한다.”

 

 

 

철컥.

철컥. 철컥. 철컥.

 

수십, 아니, 숨어있던 수백의 총이 요안나를 향해 겨눠졌음이 느껴졌다.

 

허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일어나라!”

 

 

 

말을 함과 동시에, 요안나의 검집에서 칼날이 빠져 나왔다.

햇빛에 반사된 날은 한없이 반짝거렸다.

 

그 순간, 공장이.

 

 

“기드온의 삼백 용사여!”

 

쿵.

 

“다니엘의 불타는 병거여!”

 

쿵.

 

“다윗의 다섯 물매돌들아!”

 

 

공장이 울려 퍼진다.

그리고 목소리가 울렸다.

 

 

“우리의 왕께 영광을!”

 

“영원히 잠들었어야 할 아이들아! 십자군의 꿈에서 방황하는 전사들아!

너희가 잠결에 어지럽거든 오늘 일을 그저 미몽으로 여기거라!”

 

“지존자께는 찬송을!”

 

 

땅 밑이 비명을 외쳤다.

 

 

“꿈이라 하여도 좋다!”

 

 

멸망한 세계에서 죽은 이들이 다시 깨어나는 것.

 

 

“우리의 몸에 다시금 힘이 깃드는 것을 한낮 노생지몽(盧生之夢)이라 하여도 좋다!”

 

 

죽은 이들이 다시 살아나는 것.

그것은 정녕 한 줌 꿈이었다.

 

 

“덧없고 부질없는 신념을 위해 일어난 지금이 그저 꿈 속에서 노는 것이라 하여도 좋다!”

 

“어린양께 목숨을!”

 

“그렇다면 꿈처럼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허나 뜻이 있었다.

의(義)가 있었으며 형(形)이 있었다.

 

 

“아멘!”

 

“우리의 죽음은 촛불의 불빛이니!”

 

“세상을 밝히리라!”

 

“할렐루야!”

 

“우리의 목숨을 주군에게!”

 

 

 

요안나의 검이 빛을 머금었다.

 

 

 

“일어나라!”

 

 

 

전쟁이 시작되었다.

 

공장의 닫힌 문이 열리며 그 안에서 수많은 바이오로이드가 달려 나왔다.

로봇 말을 탄 기사, 방패와 검으로 무장한 전사, 지팡이 같은 것을 들고 나오는 마법사까지.

영화 그 자체를 현실에 재현해 놓은 듯한 물결이었다.

 

기사의 창 끝에 피가 묻었고, 마법사의 지팡이는 불꽃을 내뿜으며 주변을 태웠다.

전사가 적들의 총알에 쓰러지면 그 시체를 밟고 다음 전사가 나타나 죽은 이의 검을 던졌다.

 

그 포물선은 수십, 수백이었고, 그들은 그것을 비라고 표현했다.

책을 들고 있는 누군가가 비가 있으리라 하니, 곧 검의 비가 쏟아졌다.

 

말 탄 기사가 천둥 소리를 내니 마법사가 전격을 쏟아냈다.

전사들의 함성이 곧 우레였기에 번개는 무음(無音)으로 충분했다.

 

 

 

“죽어라!!”

 

 

 

그저 보는 것만으로 아군과 적을 구분하는 태생의 전사들.

로마의 팔랑크스 못지 않은 이들의 용기는 주변의 바이오로이드들을 함성만으로 무너뜨렸다.

 

 

 

“저들이 경계를 한 덕에 짐의 군세가 먼저 선수를 칠 수 있었구나.

하긴, 조용히 창문으로 들어올 만큼 조심스러운 애들이었으니 그냥 처음부터 이렇게 할 걸 그랬어.”

 

“이... 이게...”

 

“그래. 이것이 짐의 군세.

곧, 십자군(十字軍)이니라.”

 

 

 

그들의 가슴팍에는 붉은 보석으로 장식된 십자가가 아롱아롱 달려있었다.

 

순간 군대가 아니라 다이아몬드 박물관에라도 온 것인가 착각이 일렁일 정도로,

그 기세는 아름답기 그지 없었다.

 

 

 

“하... 하하하...”

 

“허허... 불쌍한 아이로고. 이제 실성이라도 해버린 건가.”

 

“멀쩡한 사람 미친 놈 취급하지 마세요.”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아무튼, 네 감상이 어떠하냐?”

 

“감상이랄 거야... 뭐, 말할 게 있나요.

이 정도 군대라면 진짜 어지간한 바이오로이드는...”

 

“그게 아니다.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죽지 않고 목표를 이뤄낸 것.

그 감상을 물어본 것이다.”

 

“아...”

 

 

 

공장, 그리고 그 밖의 수백 미터 근방까지,

십자군의 군세가 닿지 않는 곳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가만히 나를 향해 웃는 요안나와 그 뒤로 펼쳐지는 기적 같은 풍경.

신기에 가까운 검을 흩날리며 적을 쓰러뜨리는 검수와 불 마법 비슷한 것을 사용하는 마술사까지.

 

그리고 무엇보다 아직 한 번도 죽지 않은 나.

고통도, 격통도 없이 이런 광경을 보는 게 어느새 낯선 전경이 되어버렸다.

 

 

 

“... 좋네요. 안 아프고.”

 

“후후, 그래. 그럼 된 것이다.

굳이 이 공장에 숨어있는 자들을 찾기 위해 네가 죽지 않아도 된다.

죽음을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살 방법을 간구한다면 이런 것도 떠올릴 수 있단다.”

 

“... 애초에 요안나 님만 할 수 있는 거잖습니까?”

 

“그래. 이건 네가 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니지.

허나 짐의 방식이다. 그렇기에 이건 너의 방식이기도 하다.”

 

“... ...”

 

“보아라. 나의 심복이여.

저들은 신이 아니다. 죽으러 온 인간이니라.”

 

“대체 뭘 위해서 말입니까?”

 

“자신의 신념을 위해서. 지키기 위해 죽으려 한다면 무너지니라.

허나 자신의 믿음을 따라 죽는 자에겐 한 세상의 무게가 있는 법이지.”

 

 

 

쓰러진다.

흐드러진다.

 

총을 맞은 자는 바람 구멍이 나 죽었고,

전기에 감전된 이는 몸이 오그라들며 죽었다.

제 아무리 위대한 십자군도 죽지 않는 불사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가벼운 죽음이 없었다.

가벼이 쓰러진 자는 있었으나, 가벼이 감긴 눈은 없었다.

 

 

 

“이제 말해보거라. 너의 믿음은 무엇이지?

지키기 위해 죽는 것이냐?

아니면 지키고 함께 살아가는 것이냐.”

 

“... 살아가는 것입니다.”

 

 

측은한 이들의 옆에서.

 

 

“절대 죽지 않고 버티는 겁니다.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

 

 

“마지막까지 버티는 겁니다.”

 

“이제야 내 마음에 쏙 드는 대답을 하는구나.”

 

 

 

요안나의 검이 다시금 검집으로 돌아가는 순간, 게임은 끝났다.

 

주변이 적막해질 때쯤, 기사가 타고 있던 말이 요안나의 곁에 다가와 등을 내주었다.

말의 기수는 하얀 머리를 흩날리는 갑주의 여인이었다.

 

 

 

“돌아가자. 우리의 신념을 지키러.”

 

“... 요안나 님.”

 

“왜 그러지?”

 

“당신의 신념은 무엇인지요?”

 

“우리의 신앙과 믿음이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그 믿음.

그것을 지키러 우리는 죽음을 각오하고 왔노라.

허면 너의 신념은 무엇이지?”

 

 

 

그 대답을 떠올리기엔,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사랑하는 겁니다.”

 

“사랑이 필요한 아이들 옆에서 사랑을 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네가 몇 번이나 죽겠느냐?”

 

“... 한 번.

단 한 번이면 족할 듯 합니다.”

 

 

 

그 말에 요안나가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오만방자한 것 같으니.

한 번도 죽지 않을 생각을 해야지, 어디 벌써부터 죽을 생각이나 하고 있느냐?

널 위해 내뱉은 말들을 다시 주워담고 싶어지는 구나.”

 

“에이, 전 누구들과 달리 잘 못 싸운단 말입니다.”

 

“내가 했던 말에 삐진 게냐? 아니면 못 싸우게 해서?

은근 황소 같은 구석이 있는 게 종 잡을 수가 없구나.”

 

“그래도 막 사는 것보단 뜻을 가지고 죽는 게 좋죠.

황소도 이왕 죽을 거 멋지게 죽는 걸 바라지 않겠습니까?”

 

“어휴, 말 잘하는 건 아주 수준급이구나.

그래도 뭐, 나쁘진 않았다. 짐을 울게 하지 말거라.”

 

“어련히 알아서 모시겠습니까.”

 

 

 

방황하였다.

참 오래도 방황하였어.

 

수십, 수백 번을 죽으며 지키려 했던 것이 결국 죽지 않아야 끝나는 일이었다니.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없구나.

 

 

 

“요안나 님.”

 

“왜 그러지?”

 

“전에도 당신 같은 사람을 본 적이 있는데, 볼 때마다 제가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네요.”

 

“그래서 언짢았느냐?”

 

“뭐, 쪼끔?”

 

“하, 그럼 짐이 말에서 내려 무릎이라도 꿇어야겠구나.”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이젠 눈 앞이 쾌청하거든요.”

 

 

 

요안나의 눈빛은 드물게 밝아오는 노을 같았다.

그녀가 내게 손을 뻗었고, 난 그 손을 잡아 말 위에 함께 올라탔다.

 

그렇게 달그락거리는 말 발굽 소리를 들으며 갈 때, 그녀가 잠시 콧김을 내뱉었다.

조금 낮은 어조로, 그녀는 말을 이어갔다.

 

 

 

“... 가엾은 아이야.”

 

 

 

잠시, 의미심장한 한숨을 내쉬면서.

 

 

 

“결국은 사람이니라.”

 

“... ... 네?”

 

 

 

그녀의 미소도 참으로 의미심장했다.

 

 

 

“결국은 사랑이니라.

돌아가서 그 사랑을 증명해보거라.”

 

 

 

어디선가 들었던 말.

노을 빛이 붉었던가, 갈색 머리카락이 하얬던가,

그녀의 갑옷이 하얀 원피스처럼 스렁거렸다.

 

유독 하얘 보이는 요안나의 머리카락을 뒤로 한 채, 나도 그녀의 뒤에 올라 탔다.

달그락거리는 말 발굽 소리가 청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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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두 편으로 나눠서 올릴 생각이었는데 그냥 다 올림.

이것도 대충 2만자 되네. 참 많이도 썼다.


사족 때문에 비추 받고, 플롯 좆 박은 거 때문에 비추 받아도 이 악물고 한 게 다 개추뽕 때문인데.

개추 좋아하고 댓글 좋아해서 한 건데 이제 그거 못 받을 생각하니까 힘 다 빠진다.

(나한테 그거 때문에 표식 박았던 사람들한테는 미안하다고 하고 싶음. 내가 아카고 dc고 루리웹이고 이런 걸 전혀 모르던 사람이어서 우쭐댔었슴... 미안해.)


... ... 아무튼

절대 애 호... 해야지. 애들 잘못도 아닌데.



추가) 맨날 내 변명하느라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을 못 했던 거 같아.


글 읽어줘서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