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카라비아 서약 대사를 일부 각색함



과연 며칠 동안 업무를 손에서 내려놓은 결과는 참담한 수준이었다. 산더미같이 쌓인 서류 뭉치와 내 결재가 떨어지길 기다리고 있는 작전 계획서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후회가 밀려 들었지만, 어쩌겠는가.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이 놀며 손을 놔버린 과거의 내 탓인 것을. 과거의 내게 욕을 해봤자 누워서 침을 뱉는 것 뿐이리라.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커피를 잔뜩 비축해 놓은 덕분에 미래를 담보로 오늘 눈을 뜨고 있을 수 있다는 것 정도?


"카페인 내성도... 강해지면 안되는데."


먼저 돌아가서 쉬라는 내 말은 들리지도 않는 척, 스카라비아가 응접 용 소파에 몸을 맡기며 중얼거렸다. 평소 담배와 커피를 입에 달고 살던 녀석에게 지적을 받으려니 어색함과 함께 어처구니 마저 날아가는 기분이 들었지만, 지금은 그녀에게 대응할 시간에 한 장이라도 더 서류를 처리해야 했다.


"그래.. 조절할게, 그보다 담배 또 태웠어?"

"안 폈어... 사령관이랑... 끊기로 약속 했잖아..."


솔직히 나 스스로가 담배를 피우면서 스카라비아에게 금연을 하라 말하는 것이 모순 그 자체였지만, 적어도 난 그녀와 다르게 하루 종일 담배를 입에 물고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솔직히 바이오로이드가 아니었다면 아마 그녀는 스스로 뿜어낸 담배의 매연으로 질식해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그래도... 한 대만 허락해주면.. 안돼?"

"하아~ 너 말이야.."


담배를 조르는 스카라비아의 모습에 한숨을 내쉬면서도 어느새 내 얼굴에 미소가 지어졌다. 확실히 홀로 묵묵히 일하는 것 역시 집중도 잘 되는 편이라 좋았지만, 아끼는 사람과 함께 대화를 하며 일하니 그보다 더 효율이 좋아지는 느낌이었다.


"이건.. 장비 개선 방향인가.. 어? 이건 누가 정리한 거지?"

"어디 보자... 아, 그거? 별거 아니야... 내가 기술 고문이니까, 틈틈이 정리해 뒀지..."


능숙하게 작성된 장비 개선 방향에 대한 보고서를 결재 하며 중얼거리자, 어느새 옆에 다가온 스카라비아가 커피를 훌쩍이며 대답했다. 아까 전 분명 내게 카페인 내성이 어쩌고 한 것 같았는데...


"너, 나한테는 카페인 내성이 어쩌고 하지 않았어?"

"사령관이랑... 오래오래 행복한 시간을 보내야 하지 않겠어?"

"뭐? 읍..!"


슬며시 스카라비아를 타박 하며 그녀를 바라보는 순간, 그녀가 갑작스레 키스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의 입에서 내 입 속으로 무언가 알약 같은 것이 넘어왔고, 나는 순식간에 벌어진 그녀의 돌발 행동에 당황하여 그것을 꿀꺽 삼켜버렸다.


"뭐, 뭐를 먹인 거야?"

"영양제를 개발해 봤어~ 사령관이.. 틈틈이 건강 챙기라고 했으니까..."


영양제를 먹은 것 치고는 순식간에 하반신에 피가 몰리기 시작하고, 머릿속이 뿌옇게 변하면서 눈 앞에 있는 스카라비아의 살결을 간절히 탐하고 싶어졌다. 그런 내 상태를 바라보며 잠시 관찰하는 듯 바라보던 그녀가, 늘 그러던 것처럼 나긋나긋한 어투로 살며시 내 뺨을 쓸어 내리며 귓가에 속삭이기 시작한 것은 덤이다.


"이번엔, 임상 시험... 아, 맞다... 남성에겐 시험한 적 없구나~"

"으읏..!"


당했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지만, 이미 때는 늦은 상태였다. 어느새 스카라비아는 간신히 살결을 가리고 있던 셔츠를 벗으며 아름다운 나신을 과시하기 시작하였고, 내게 올라타 대면좌위 자세를 잡았다. '헉' 소리를 내는 등 나름 변명을 하는 그녀였으나, 이게 정말 사고였다는 듯한 저 표정과 말투는 여성이란 생물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를 불러오기 충분했다.


"혹시... 벌써 삼켰어?"

"네가... 먹였잖아..!"


필사적으로 욕망을 억누르며 안절부절 못하는 손으로 스카라비아의 질문에 대답했지만, 사실 의미는 전혀 없으리라. 처음부터 그녀는 내게 이것을 먹일 작정을 한 모양이었으니 말이다.


"아... 어쩔 수 없네."


정말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하는 스카라비아의 눈동자는 가늘게 곡선을 그리며 웃고 있었다. 처음부터 저 여자는 이럴 목적으로 찾아온 것이란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컵라면에 끓는 물이 부어진 격이었으니 이제부터 벌어질 일은 어쩔 수 없는 사고라 생각하기로 했다.


'절대로 내가 일이 하기 싫었던 것은 아니니까.'


마치 높은 산맥처럼 아슬아슬하게 서로 지탱하며 쌓여 있는 서류들과, 매혹적인 몸매와 요염한 미소로 유혹하는 스카라비아. 둘 중에 누구를 선택하라 묻는다면 그것은 남자로써 당연한 선택을 내릴 수 밖에 없으리라.


"일은... 나중에 하면 되겠지?"

"응... 일은... 원래 미루라고 있는 거야... 그건, 미래의 사령관이... 할 일인걸."


기술 파트의 핵심 권위자도 나와 같은 의견이라니 이제 남은 것은 단 하나.


"스카라비아!"

"꺄앗! 후후훗... 저번처럼 하면 내가 망가지니까, 자상하게... 알겠지?"


자상하게 해 달라는 부탁은 아마 들어주기 힘들 것 같다.




아 스카라비아 Emotionless Se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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