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용이 어떻게든 길을 뚫어 해커를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다. 지금 이 장소에서 벗어나면 오기로 한 해커와 엇갈릴 수 있기 때문에 대충 자리잡고 앉아서 30분 정도 기다리게 됐다. 문제는 시간이 지날수록 리리스가 불안 증세에 시달리기 시작했다는 거다. 사령관을 돕기 위해 뭐든 하고있다면 모를까 오르카호의 지원군이 올때까지 대기하고만 있어야하니 머릿속에선 걱정을 멈출 수가 없는 모양이다. 


리리스가 신경쓰여 편히 쉬지도 못하고있는 가운데, 몸체 윗면에서 나온 안테나가 빙글빙글 돌아가던 포트리스가 이 불편한 분위기를 깨부숴주었다.


"부사령관님, 보고드립니다. 바이오로이드 세 명이 고속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드디어 왔군! 생각보다 빨리 왔네. 도착하려면 얼마나 걸리지?"


"10."


"10분이라, 곧이네."


"9."


"응?"


"8."


포트리스가 초단위로 카운트다운을 시작하자마자 멀리서 뭔가가 요란한 소음을 내며 석양이 지고있는 지평선을 질주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 이거 어디서 많이 듣던 엔진소리인데!"


빨간색으로 도색된 클래식한 디자인의 바이크와 그 바이크를 몰고있는 빨간 단발머리의 앳된 아가씨, 아이언 애니였다. 반가운 얼굴이 보이자 나도 모르게 그녀의 이름을 외치며 손을 흔들었다.


"애니! 여기야!"


"보스으으!! 거기서 비켜어어어!!"


"어, 어어? 애니?"


그것은 바이크라기엔 너무 빨랐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너무 심하게 빨랐다. 애니가 바이크를 옆으로 돌려 아키라 드리프트 자세로 세우려 했으나 가속이 너무 제대로 붙은 탓에 멈추질 않았다. 하마터면 나한테 부딪힐 뻔 한걸 리디아가 날 옆으로 당겨줘서 살았다. 그리고 애니가 타고있던 바이크는 순식간에 우릴 지나쳐 백미터는 더 가고 나서야 멈출 수 있었다.


내가 먼저 바이크가 멈춘 곳으로 걸어가자 리디아와 트레저가 곧바로 내 뒤를 따랐고, 나머지 일행들도 따라왔다. 애니는 심호흡을 몇 번 하다가 식은 땀을 닦고 바람에 헝클어진 머리를 대충 정리한 뒤 바이크에서 내렸다. 그 다음엔 그녀의 뒤에 타고있던 두 명 중 한 명이 애니를 따라 비틀거리며 바이크에서 내렸다.


"안녕 보스! 보스가 부탁했던 해커 데리고 왔어! 보스한테 가야하는 임무라길래 우리가 자진했지! 언제든지 출동할 수 있도록 대기하고 있던 보람이 있네, 헤헷."


"그... 대여... 그간 무탈했느냐...?"


"히루메까지? 애니는 그렇다 쳐도 왜 너까지..."


"첩이 얼마나... 그대 걱정을... 웁, 우웨에엑!"


"으아아악!? 어따대고 토하는거야 이 미친여자야!"


안색이 헬쑥해진 히루메가 갈 지 자로 걷다가 트레저의 셀주크 몸체의 다리에 손을 짚더니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한 채 트레저의 발등에다가 속에 든 것들을 게워내버렸다. 기겁한 트레저는 거대 로봇의 모습에 안어울리게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치더니 발에 녹슬겠다고 궁시렁거리며 대충 흙바닥에 발을 비벼 닦았다.


"...애니, 히루메는 왜저래? 뭐 잘못먹었어?"


"그게 말이지... 얘가 귀가 워낙 좋다보니 바이크 엔진소리의 자극이 좀 셌나봐."


"그 시끄러운 소리도 그렇지만... 그 정신나간 속도가 더...! 우웁...!"


히루메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또 구역질을 시작하자 애니가 뻘쭘해하며 골골대는 히루메에게 다가가 등을 두드려줬다. 그 과정에서 풍성한 아홉 꼬리 때문에 등이 어딘지 찾는데 잠시 애먹었다는 사소한 헤프닝이 있었지만 큰 문제는 아니었다.


"아 그래, 그 속도... 분명 바이크에서 나올 수 있는 속도가 아닐텐데, 어떻게 된 거야?"


"보스. 전에 내가 아자즈한테 바이크 수리맡겼던 거 기억해?"


"...설마..."


"알맹이를 멋대로 개조해놨더라... 무슨 로켓에나 쓰일법한 엔진을 달아놨어 이거. 급한 마음에 풀악셀 밟았더니 속도가 통제가 안되는 거 있지? 덕분에 엄청 빨리 오긴 했지만..."


"헥... 헤엑... 두번 다신... 타고싶지 않구나..."


"그럼 펙스의 포위망은 어떻게 뚫고 온 거야? 오르카네 애들도 뚫지 못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걔들은 뭐 군대가 다같이 움직여야 하니 발이 느린 것도 있지만... 아자즈가 엔진뿐만 아니라 내 바이크의 방어막도 리리스가 들고다니는 그 파란 방어막 급으로 업그레이드 해놨더라고. 그 단단한 방어막을 킨 채로 돌진하니까 자동으로 일점돌파가 되던걸."


"그냥 질량병기삼아 때려박았다 이거군. 그건 알겠고, 쟤는 뭐... 기절한거야?"

 

나는 애니와 히루메를 지나쳐 바이크 위에 남아있는 세번째 인물에게 다가갔다. 중력가속도를 버티질 못해 기절한 건지 고개를 푹 떨구고 바이크 위에 걸터앉아 침묵을 유지하고있었다.


"...난 분명 알파를 불렀건만."


기절해있는 그녀를 깨우기 위해 어깨에 손을 올리자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눈을 번쩍 떴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나와 눈을 마주친 순간 속사포처럼 말을 시작했다.


"와 부사령관님! 되게 오랜만에 보네요 아니 시간으로 따지면 그리 오랜 시간은 아닌데 오르카호에서 난리난 상태로 난민분들 안내하며 쉬지도 못하고 일하느라 바빠서 되게 피곤했던거 있죠? 저 진짜로 잠 잘 시간도 아껴가며 일했다구요! 분위기가 워낙 다운돼있어서 난민분들도 편히 쉬지못하고 눈칫밥 먹고있다니까요 원래는 저희가 외부 거점으로 쓰고있는 섬에 내려줄 생각이었는데 철충이 쳐들어와서 요안나 씨가 그곳의 인원분들과 함께 섬을 버리고 귀환한 상태에요 아 한명도 남김없이 전부 데려왔다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문제는 오르카호가 너무 좁아졌다는거죠 난민분들이 아직도 난민같이 먹고자는 모습이 얼마나 씁쓸했는지! 어머 유미씨도 여기있네요! 건강해보여서 다행이에요 눈에 다크서클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지만 어디 다치진 않은 것 같네요 오메가 유인할 미끼역 자처한다고 들었을 땐 정말 두번다시 보지 못할 줄 알았는데 부사령관님 나이스! 리리스 씨도 나이스! 오예!"


"에... 반가워요 오렌지에이드 씨..."


"오렌지에이드."



"네! 귀염뽀짝 오렌지에이드입니다! 사령관님 돕기 위해 해커가 필요하다고 하셨죠? 걱정마세요 이런 현장 임무엔 제가 제격이죠! 아 오해하지 마세요 전 언제나 내근을 선호한답니다! 사실 자세한 내용은 못들었는데 용 중장님이랑 알파님이 와서 부사령관님을 도우라는 특급 임무를 주셨더라고요 피곤하긴 했지만 저라도 때와 상황은 가릴 줄 안다고요 유미씨도 걱정되고 해서 당연히 가겠다고 했죠! 응? 왜 그렇게 보세요? 아 알겠다 왜 알파님 대신 제가 왔냐고 묻고싶은 거죠? 그게말이죠 알파님이 할 일이 엄청 많거든요 내정업무가 쏟아져서 아르망 씨랑 콘스탄챠 씨랑 사령관실에 모여 밤 새가며 일하고있는 게 안쓰럽게 느껴지는 거 있죠 솔직히 알파님이 머리 정돈도 못한채로 커피를 커피기계째로 벌컥벌컥 마시는 거 보고 엄청 놀랐어요 항상 품위있는 모습을 유지하셨는데 알파님도 사령관님 걱정에 마음앓이가 심하셨나봐요 그래도 할 일이 있으니 드러눕지도 못하고 있고 참고로 전 난민 안내하는 일을 담당한 덕분에 글자 쳐다보느라 눈 깨질 일은 없었어요 만일 그랬다간 저도 안경 써야했을걸요 아 근데 저 안경쓰면 잘 어울릴것 같지 않아요? 막 유미 씨처럼 스마트해보이고..."


"한문장으로 요약해!"


"알파님이 바빠서 제가 대신 왔습니다! 데헷!"


"하아..."


"아! 그 한숨 뭐에요 제가 보는 앞에서! 또 제가 못미덥다 이려려는 거에요? 아니 뭐 전에 제타 군대 난입한 걸 막은 건 부사령관님 덕이니까 할 말 없긴한데 그래도 이번엔 진짜 자신있다구요! 체력도 쌩쌩하고요! 오면서 자서 그런가? 아무튼 그렇게 됐으니 무슨 임무인지 설명 좀 해주세요 애니 씨가 거의 납치하듯이 끌고와서 자세한 임무 내용을 못들었거든요 아 말이 나와서 말인데 부사령관님 저 바이크 타봤어요? 전 저렇게 빠른건 처음 타봤어요 롤러코스터보다도 더 빠른거 있죠! 호드분들이 돌격할때 같이 끼여서 엄청난 속도로 펙스 군대를 뚫고 지나가는데 교통사고 빵빵 낼때마다 타격감이 아주 그냥!"


"오케이 거기까지. 미안한데 니 얘기 끝까지 들어주기엔 좀 바쁘거든."


"꺄하하핫! 이상한 애들만 잔뜩 왔어! 리디아 형님아, 니 친구들은 다 이래?"


"그래 뭐 그렇다고 치자. 하이에나 너도 거기 포함되는 거 알지?"


"캬핫, 그렇지! 나만하겠냐 응? 야야 저 바이크 알맹이는 개쩌는 모양인데, 폭탄으로 개조하면 얼마나 큰 폭발이 일어날지 궁금하지 않아?"


"뭐? 야 손대지마! 아자즈가 내 바이크에 자폭기능 넣으려는거 발견했을 때 얼마나 심장이 철렁했는지 알아? 그보다 넌 누구야!?"


"...아직 작전은 시작도 안했는데 벌써 피곤해지네. 다 때려치고 집에 가고싶다..."


"부사령관."


"말이 그렇다는 거지, 누가 진짜로 한대나..."


리리스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날 째려보자 시끌벅적하던 분위기가 얼추 가라앉았다. 나는 헛기침을 한번 해 주변을 확실히 조용하게 만든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이걸로 전부 모였군."


옛날 리디아, 트레저와 헤어진 후 만나서 내가 혼자가 되지 않게 해주었던 히루메와 애니, 거기에 미대륙 난민 구조작전 임무를 같이했던 오렌지에이드까지. 이 중 절반만 내 팀의 고정 맴버고 나머지 반은 사령관 소속이라 임시 맴버긴 해도, 지금 나를 따라와주는 인원들이 마침내 한자리에 모였다.


"오메가를 패퇴시키고 사령관 일행을 구하기 위해, 우리는 쓸 수 있는 건 전부 쓰고, 할 수 있는 건 전부 해야만 해. 그러나 날 포함해 11명이 모였음에도 오메가가 직접 지휘하는 펙스의 군대를 위협하기엔 수적으로도 불리하고, 화력 또한 마찬가지야. 따라서 우리는 적의 허점을 노린다. 오메가는 지금 워싱턴 주에 있는 본진을 비운 상태고, 이는 우리가 그 곳에 잠입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허점투성이인건 이 작전도 마찬가지죠. 오메가의 본진의 수비 병력이 얼마나 남아있는건지 제대로된 정찰도 못한 채로 달려들겠다니요."


"물론 저번에 한번 본진을 털린 경험이 있으니 이번엔 어느정도의 병력을 남겨뒀긴 하겠지만, 에이다가 보내줬던 정보에 의하면 오메가 휘하의 병력은 거의 전부 사령관을 잡거나 오르카호를 막는 임무에 동원된 모양이야. 따라서 추측해보건데 남은 병력은 많지 않을 거다."


"흠..."


리리스가 수긍한 듯 고개를 살짝 끄덕이자 나는 본격적으로 작전의 설명을 시작했다.


"이번 작전에선 돌격팀, 잠입팀, 잉여팀 세 팀으로 나눠서 움직인다."


"...잉여팀?"


"리디아, 트레저, 포트리스, 하이에나. 너희 넷은 돌격팀을 맡는다. 오메가의 본진에 도착하면 너희가 정면에서 공격한다. 그럼 그곳의 병력이 너흴 막기위해 밖으로 나오고, 건물 안은 비워지겠지.

히루메, 애니, 오렌지에이드. 너희 셋은 잠입팀이다. 돌격팀이 외부에서 시선을 분산시키는 동안 너희가 내부에서 들키지 않게 움직여야 해. 문의 잠금 해제나 감시카메라 무력화 등의 일은 오렌지에이드 너에게 맡길게.

그리고 나와 리리스, 유미, 알바트로스는 잉여팀이다."


"부사령관, 그 잉여팀이란게 대체 뭡니까?"


"나랑 유미는 비무장 인원이니까 멀리서 구경만 해야지. 리리스 넌 우리 지켜줘야 하고, 어차피 총알도 바닥났잖아."


"그럼 알바트로스 지휘관이 잉여팀에 배치된 이유는 뭐죠?"


"알바트로스는 오메가의 본진 근처의 전파탑을 부숴서 그 일대의 통신을 복구하는 일을 맡아야 해. 그래야 우리끼리 연락하면서 작전이 잘 되가는지 알 수 있지. 전파탑 부수고 돌아온 뒤엔 뭐 상황봐서 돌격팀 돕게 하던가 해야지."


"저기, 부사령관님... 저는 잠입팀으로 옮겨주세요."


"뭐? 유미 넌 전투능력 없지 않아?"


"오메가 산업 본사 건물의 내부 구조도 잘 알고있고, 그곳 시스템을 관리한 것도 저니까 오렌지에이드 양을 도와줄 수 있을거에요."


"...그럼 그렇게 해. 히루메, 애니, 오렌지에이드, 유미 이렇게 네 명이 잠입팀을 맡는다."


"그리고 당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전 아무것도 안하는 인간 한 명을 지킨다는 아주 막중한 임무를 맡게 된 거군요."


"아 예 예, 연약한 인간님이라서 미안하게 됐수다."


"부사령관 자네가 직접 지휘하진 않는건가?"


"난 사령관이 아니야 알바트로스. 그 친구랑은 달리 전투 지휘같은 건 할 줄 모른다고. 대충 작전 짜고 포지션 분배나 할 줄 알지. 그런 관계로 돌격팀은 알아서 싸워줘."


"맡겨만 주십쇼 형님! 싹 다 박살내버리겠슴다!"


"그런데 형님, 돌격팀이 대놓고 공격하는데 밖에 나가있는 본대가 우릴 족치러 돌아오면 그 땐 앞뒤로 쌈싸먹히는 거잖아."


"만일 오메가의 시선을 끌어 본대가 회군하게 된다면 역으로 사령관이 도망갈 틈을 만들 수 있겠지."


"그럼 우리는? 살아남을 수 있는건가?"


"잠입팀에게 너무 부담주고싶진 않지만, 본진을 성공적으로 점령한다면 오메가의 본대가 와도 우릴 섣불리 공격하지 못할거다. 더 질문있어?"


"그 빌딩 통째로 폭파시켜도 돼? 응? 응??"


"아니. ...상황봐서 허락할게."


"아싸!"


"또 질문 있어? 없지?"


몇 초 정도 침묵이 유지되자 나는 다시 말을 이었다.


"다들, 출발하자! 무슨 수단을 쓰는 한이 있더라도, 오메가를 몰락시켜야만 한다!"



*



"주인님, 저길 보세요!"


라비아타가 큰 소리로 외치며 가리킨 방향에는 사람 크기의 무언가가 흙먼지로 꼬리를 길게 남기며 땅 위를 질주하고 있었다. AGS에 비해 작은 체구로 펙스 군대 사이를 종횡무진 누비는 모습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저건 또 뭐야? 펙스에 저런 것도 있었어?"


"장화, 공격하지 마세요! 저건... 칸 소장입니다!"


"칸이라고!?"


멀리서 작게 들려오던 바퀴 소리와 추진기 소리가 순식간에 커졌다. 모래바람이 걷히자 신속의 칸이 기다란 포니테일을 휘날리며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를 뒤쫓던 적들은 로크의 번개세례를 맞고 숯덩이가 되었다.


"무사해서 다행이군 사령관. 늦어서 미안하다."


"아냐아냐, 늦었을 리가! 잘 와줬어."


안그래도 펙스가 점점 목을 조여오던 상황이었기에 누구든 간에 지원군이 도착했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위안이 됐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맙다. 역시 화면 너머로 보는것보단 직접 마주하는 것이 더 좋군. 더 얘기하고 싶지만 상황이 급박하니 나중으로 미루도록 하겠다."


"그런데, 칸 너 혼자 온 거야?"


"실망시켰다면 미안하지만, 호드의 자매들은 나를 위해 활로를 열어주느라 같이 오지 못했네. 여기까지 올 수 있던건 나 하나뿐이다."


"그렇다면 아직 이 난관을 헤쳐나가기엔 부족한 상황이로군요."


하늘에서 로크가 내려와서 사령관과 칸의 대화에 난입했다. 인터셉터의 발칸포와 미사일을 전부 피하지 못했는지 장갑 곳곳에 파손된 흔적이 대거 늘어나있었지만 안면부의 발광체는 여전히 빛을 잃지 않았었다.


"보고드립니다, 이 일대의 펙스 공군을 전멸시켰습니다. 아무리 파괴해도 계속해서 증원이 왔었는데 언제부터인지 병력 충당이 끊겼더군요. 요점은, 이로서 적의 고공 정찰은 차단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벌써 증원으로 보낼 인터셉터가 바닥났을리는 없고,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공군 증원을 끊어버린 건가?"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건 어리석은 판단입니다. 각하를 생포하려고 혈안이 되었는데, 각하의 위치를 효과적으로 파악할 수단인 공군만 철수시킨다니요."


"사령관의 위치는 이미 발각된 상태 아닌가. 여기서 계속 머무르고 있다면 새로 위치정보를 업데이트할 이유가 없으니까."


"그렇다 한들 저 같잖은 공군을 계속 투입함으로서 제 발목을 잡을 수라도 있을텐데, 이런 악수를 둔 이유를 모르겠군요. 허나 그 이유가 뭐든간에, 이제야 제 손이 비었기에 저 또한 펙스의 육군을 요격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거 좋은 소식이군. 마침 나 또한 보고할 게 있다 사령관. 지금 철충과 펙스와 싸우고 있다."


"뭐? 철충이라니?"


사령관이 의문을 표하자 칸은 옆으로 비켜서 전장을 보여줬다. 칸에게 신경이 쏠려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지만, 어느새 사령관 일행이 한가롭게 얘기할 수 있을 정도로 펙스의 공세가 약해져있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니, 수많은 철충과 펙스 AGS들이 뒤엉켜 싸우느라 바빴기 때문이었다.


"어디서 나타난 건지 모를 철충 떼가 펙스에게 달려들더군. 그 덕분에 펙스의 포위망이 흐트러져 우리 호드 부대원들이 길을 뚫을 수 있었던 것이지."


"아, 그러고보니 각하가 들어갔던 폐광 입구에서 철충 무리가 모여있던 걸 본 기억이 나는군요."


불현듯 사령관의 머릿속에서 폐광에 들어가기까지의 과정이 다시 떠올랐다. 철충에 쫓겨 폐광 안으로 도망치게 됐고, 철충들은 다같이 비좁은 폐광 입구 안으로 따라들어가는 대신 연결체인 추격자 한 마리만을 투입했었다. 


결과적으로 추격자는 임무를 실패했고, 자신은 살아남았다. 힘을 합쳐 추격자를 처리할 순 있었으나 광산 앞에서 대기하고있던 철충 무리가 남아있었다. 추격자가 임무를 실패했다는 사실을 알아챈건지 저것들도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모양이다.


지금 오메가가 이끄는 군대는 전부 AGS, 그것도 오르카호의 AGS랑은 달리 생체회로가 탐재되지 않아 철충 감염에 대비가 되어있지 않은 상태다. 펙스의 병력이 철충들을 파괴하면 철충 유체가 튀어나와 새 숙주를 붙잡아 감염시켰다. 그럴때마다 펙스 AGS가 감염되기 시작한 동료 AGS를 무자비하게 처리하고 유충들도 자신들의 몸체에 닿기전에 사살하는 식으로 응전해 조금씩 철충의 수를 줄여나갔다. 오메가는 북미대륙의 철충을 몰아내고 이 땅을 정복했던 만큼 나름대로의 대 철충 프로토콜이 확립된 모양이었다.


펙스 포위망 중 철충과 싸우고있는 부분이 뚫리려하자 펙스는 사령관에게 집중하지 못하고 포위망의 다른 부분에서도 병력을 차출해 지원했다. 그 덕에 포위망 자체는 유지되긴 했어도 조금씩 그 군세가 약해지고 있었다. 펙스가 조금 우세한 상황이니 완전한 공멸까지 기대하진 못하더라도 양측 다 약화되고 있다. 지금이 기회다.


"마침 잘됐군요, 제안드릴 게 있습니다 각하. 저 칸이라는 바이오로이드 여성의 등에 업혀서 탈출하십시오. 제가 포위망의 한 부분을 골라 그 일대의 적을 일소할테니 저 여성은 그곳을 통해 달리기만 하면 됩니다."


"로크,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럼 다른 셋은 어쩌고?"


"사령관 그대가 어떤 인품을 가졌는지는 잘 알고있다, 하지만 지금은 고집피울 때가 아니다. 곧 해가 완전히 저물거다. 우린 어둠속에서 시야가 제한되는 반면 상대방은 AGS인 만큼 열감지 센서같은 야간투시 장비가 탑재돼있을테니 시간을 지체했다간 우리가 불리해질거다."


로크와 칸은 사령관 한 명 만이라도 탈출시키려 했다. 그들의 능력이라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그건 사령관이 바라는 방법이 아니었다.


"...아니. 그럴 순 없어. 설령 내 결정으로 내가 죽는다해도, 누구도 두고 갈 순 없어."


"그대가 목숨을 잃게된다면 그 다음은 오르카호의 몰락이다. 그걸 잊은 건 아니겠지?"


"칸, 난 더이상 최후의 인간이 아니야. 만약 내가 어떻게 된다면 부사령관이 내 뒤를 이을거야."


"뭐라고... 사령관, 그건..."


"주인님. 여기선 칸 소장의 말을 따르는 게 좋아보여요. 저흰 괜찮으니 주인님만이라도..."


"라비아타."


사령관이 무겁에 말을 떼자 한순간 움찔한 라비아타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네, 주인님."


"난 그 사건에 관한 건 이미 용서했어. 그런데 넌 아직까지도 죄책감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지. 네가 스스로를 용서하고, 네 배틀메이드 자매들의 당당한 맏언니로 돌아오기 전까지 네가 죽는건 허락할 수 없어."


"주... 주인님..."


"그리고 장화. 멸망 전부터 마리아 리오보로스의 지속적인 학대 속에서 자라왔다는 네 과거에 대해 알게되고, 너에 대해 많이 걱정했어. 홍련 덕분에 이제 막 따듯한 마음이 꽃피기 시작했는데, 어떻게 널 죽게 놔둘 수 있겠어.


"뭐, 뭐야 갑자기..."


"마지막으로 더치걸. 평생을 지하에 갇혀 살아온 너에게도 세상의 따듯함을, 삶의 즐거움을 보여주고 싶어. 희생된 네 9명의 자매들과 토미 워커를 생각해서라도, 꼭 그러고 싶어."


"...정말... 정말 내게도... 그럴 자격이 있어...?"


"그럼. 넌 상상도 못할거야."


더치걸은 폐광에서 빠져나온 뒤 계속 자기 자신이 이 일행의 짐처럼 여겨졌다. 그렇기에 상황이 점점 악화될수록 자신은 버림받게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사령관의 확고부동한 의지가 그 생각을 정면해서 깨부숴주기 전까지는. 


그 작은 소녀의 눈가에 물이 고이고, 그걸 본 칸은 두 눈을 감고 잠깐동인 생각에 잠긴 뒤 결정을 내렸다.


"알겠다. 사령관 그대의 뜻을 따르겠네. 내가 선봉에 서서 활로를 열겠다, 다들 내 뒤를 따라와다오."


"그렇다면 각하의 뒤를 노리는 저 하찮은 무리들은 부디 제게 맡겨주시길. 각하께서 신경쓰실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로크. 난 너도 여기서 죽는 걸 원하지 않아. 반드시 살아서 돌아와라."


"크크큭, 지금 저를 걱정해주시는 겁니까? AGS 로보테크 최고의 역작인 이 저를? 이 기회에 한번 더 제 실력을 각인시켜드려야 겠군요."


로크의 날개가 꿈틀거리며 장갑에서 노란 스파크가 빠직거리더니 이내 그의 전신이 붉게 달아올랐다.


"너... 아직도 그럴 힘이 남아있었어?"


"거두어야 할 생명이 지천에 널렸는데, 사신이 이 정도로 지쳐서야 쓰겠습니까?"


"하하... 펄펄해보이네. 그럼 뒤를 부탁할게."


사령관은 위풍당당한 로크에게서 시선을 떼고 자신을 기다리는 네 명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다들, 출발하자! 어떤 댓가를 치르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 모두 반드시 살아남자!"


------

이제부터가 결전


2부 시작하면서 너프먹었다가 드디어 완전체가 된 라붕이 파티 (리더 1명 외 고정맴버 6명, 임시맴버 4명)


마찬가지로 사령관 파티도 완성, 더이상 파티원이 늘어나지 않을거임


캐릭터가 너무 많아져서 내용이 복잡해진거 같이 느껴진다면 스미마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