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   우리집 브닐라 모음집 - 라스트오리진 채널 (arca.live) 

 

 

===============

 

...

...

...

 

 

보트에서 내린 지 한참, 우리는 유미가 봐 두었던 길을 따라 걷고 또 걸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H는 점점 더 걷기를 힘들어했다. 그 꼴을 보다 못한 바니는 자기 총을 이비에게 맡겨놓고 H를 업어 들었지. 바니가 녀석을 등에 업고 나서부터 이동하는 속도가 조금은 빨라진 느낌이다. 하긴, 다친 다리로 아무리 애를 써 봤자 H는 노부부보다도 느렸으니까. 

 

눈길을 옆으로 돌렸더니, 바니와 H가 주거니 받거니하는 광경이 눈에 들어온다. 

 

“바니야, 미안해. 호강시켜주겠다고 해놓고....고생만 잔뜩 시키네.”

 

“흥. 그래도 미안할 줄은 아십니까? 미안하시면 얼른 낫기나 하십시오. 무거워 죽겠습니다. 그러게 살 좀 빼시랄 때 빼셨으면 얼마나 좋-”

 

“아잇, 야. 밤마다 치킨 사 먹으면서 나까지 살찌운 건 너였잖아.”

 

“얼씨구, 그래서 고생하는 마누라 야식 뺏어 드신 건 잘한 짓인가요?”

 

“네가 줬잖아. 나 자고 있으면 깨워서까지 먹였으면서!”

 

“저 혼자 먹었다간 서방님께서 또 이틀은 삐져계실 텐데, 저라고 좋아서 드렸을까요?”

 

......저렇게 평소처럼 티격태격대는 걸 보니, 내가 알던 둘이 맞긴 하구나 싶다. 가시 돋친 말을 해대면서도 바니의 얼굴엔 따뜻한 미소가 서려 있었고. 부드러운 목소리에선 H를 향한 애정이 느껴졌다.

 

“혹시라도 불편하시면 말씀하세요. 상처 덧나면 큰일 나니까요.”

 

“아이고, 불편하다니! 우리 마누라 어부바가 세상에서 제일 편한데?”

 

“킥킥, 하여간 주책은...”

 

바니의 등에 업힌 H도 평소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녀석의 안색은 역시나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다시 돌려보니 이비도 바니와 H쪽을 보고 있다. 녀석이 걱정되는 건 나뿐만이 아닌 듯, H을 보던 이비의 얼굴에도 근심이 서려 있었다.

 

 

==============

 

 

해 질 녘까지 힘겹게 이동한 우리는 오래된 산골 도로 한구석에서 빈 건물 하나를 찾았다. 족히 수십 년은 방치된듯한 폐창고였지만, 당장 밤을 보내기엔 모자람이 없었다. 

 

다른 일행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자리에 눕자마자 기절하듯이 잠들어 꿈도 없는 깊은 수면에 빠져 있었다. 적어도 아까까진 말이야. 

 

방금 악몽 때문에 눈을 팍 떠버렸거든. 

 

나만 빼고 모두가 죽는 꿈을 꿨다. 그것도 내 눈앞에서. 노부부와 하치코, 바니, H.....소완, 유미, 그리고 이비까지. 모두 사방에 죽어 널브러져 있었고, 이비는 곳곳에서 피를 흘리며 내 품 안에서 숨을 거두었다. 

 

개꿈 같긴 하지만, 찝찝한 기분은 어쩔 수가 없다. 가뜩이나 피곤해 죽겠는데 이젠 다소 심란하기까지 하다. 잠기운도 싹 날아간 게 지금 눈을 감는다고 곧바로 다시 잘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은 아닌 것 같네. 나는 조용히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보았다.

 

내 주변의 다른 일행들이 -다행히도 모두들 숨이 붙어 있었다- 옹기종기 모여 누워 잠을 청하고 있을 때, 이비만큼은 저 멀리서 바깥을 바라보고 앉아 불침번을 서고 있었다. 그녀의 뒷모습이 어딘가 쓸쓸해 보인다. 

 

어차피 눈을 뜬 김에, 고생하는 이비에게 차라도 한잔 가져다줄 심산으로 보온병에 따뜻한 차를 따라보았다. 아까 소완이 만들어 둔 보이차다. 어둑어둑한 곳에서 주전자로 물을 제대로 따르는 게 쉽진 않았지만, 어떻게든 오감을 동원해 보온병이 넘치지 않을 정도로 차를 따르는 데 성공했다.

 

저쪽에서는 이비가 낡은 의자에 앉아서 총을 다리 위에 올려두고 있었다.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한 그녀의 뒷모습. 나는 일행들이 깰세라 조용히 그녀의 방향으로 다가갔다. 

 

“이비, 이거 마셔. 따뜻한 차야.”

 

“....Thank you, sir.”

 

나를 힐긋 돌아본 이비는 보온병을 두 손으로 받아 들더니 보이차 한 모금을 목으로 넘겼다. 

 

“상당히.....일찍 일어나셨네요, 주인님. 잠이 잘 안 오시나요?”

 

“아니, 그냥 어쩌다 보니 깼어. 넌 새벽에도 고생 많네. 혹시 지금까지 계속 깨어있던 거야?”

 

이비는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고 차를 한 모금 더 홀짝일 뿐이었다. 아무래도 여기 앉아서 밤을 새운 모양이다. 어쩐지 지쳐 보이더라니.

 

“.....괜찮아, 이비? 피곤할 텐데 들어가서 눈 좀 붙여. 내가-”

 

“주인님.”

 

그녀가 내 말을 끊었다.

 

“...아까는 잘 해주셨어요. 그런데....”

 

어제 선착장에서 있었던 일 말인가. 나는 그녀의 옆에 쪼그려 앉아 경청할 준비를 했다. 

 

“우리 둘끼리니까 말씀드리는 건데, 사실은 주인님이 정말 걱정됐어요. 남들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체해야 했지만.....”

 

이비가 차 한모금을 더 홀짝인다.

 

“하하, 먼저 날 지목한 건 너였잖아. 뭔가 확신이 있으니까 그런 거 아니었어?”

 

팔꿈치로 그녀의 팔을 살짝 건드려본다. 그녀가 내쪽을 돌아보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물론 주인님께 별일은 없을 거라 생각하긴 했지만.....어쨌든 자살에 가까운 일이긴 마찬가지니까요.”

 

하긴, 맨정신으로 할만한 일은 아니긴 하지. 절로 픽, 하고 헛웃음이 나오길래 고개를 저었다. 곧 이비가 다시 말을 이었다.

 

“가능했다면 다른 사람을 썼을 거예요. 그런데 H씨의 상태로는 제대로 미끼 노릇을 하기도 전에 죽어버릴 테고, 뭣보다 환자를 데리고 무슨 짓이냐고 바니가 길길이 날뛰었겠죠. 그 나이든 숙녀분은 생존성이 떨어지는 건 둘째치고 하치코와 노인 쪽에서 반발이 심했을 테고요. 특히나 그 노인이 협조를 안 했다간 우린 끝장이었으니까.....전 차악을 선택한 것뿐이죠.”

 

과연, 진지할 때의 이비다운 계산적인 이유였다. 

 

평소답다면 평소다운 현실적인 판단에 수긍하면서도, 나는 마음 한편에서 약간의 불편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게 표정이 미묘해지기 시작할 때쯤, 이비가 다시 입을 열었다.

 

“....헤, 괜히 합리적인 체하는 것도 뭔가 어색하네요.”

 

어딘가 씁쓸한 웃음을 짓는 이비.

 

“무슨 말이야, 이비?”

 

“아까 말씀드린 이유도 있긴 했지만.....사실은 그냥.....주인님이라면 이럴 때 어쩌셨을까 생각해봤거든요.” 

 

그녀가 나를 돌아보며 말을 이어갔다.

 

“주인님 성격에 제가 다른 사람들을 그렇게 쓰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실 것 같았어요. 젊고 사지 멀쩡한 내가 있는데 왜 그러느냐- 하면서요. 하여간 제가 걱정하는 건 신경도 안 쓰시죠.”

 

애정 어린 짜증을 슬쩍 섞어놓은 듯한 목소리. 가벼운 원망을 담은 이비의 눈빛이 내 시선과 맛닿았다. 

 

“이미 몇 번이고 말씀드렸지만, 저는 주인님만 계시면 돼요.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되든 전혀 관심 없다고요. 그래서 저에게 인간 일행들은 짐짝일 뿐이었어요. 잠재적인 위험요소였고. 그것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되고부터 주인님이 다른 사람들 일에 휘말려서 잘못되실까 봐 계속 불안했는데....”

 

그녀가 다시 하늘을 향해 고개를 돌리더니,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어느 샌가부터 마음이 바뀌었어요.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솔직히 이제는 H씨나, 그 부부가 어떻게 되거나 하면 슬플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어요. 그새 정이라도 든 건지...”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았던 진지 모드 이비에게도 나름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모양이다. 해맑고 싹싹한 모습이 원래 성격이라던 게 빈말은 아니었는가 보지. 나는 이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약간이나마 따스함이 전해지길 바라면서. 내가 말재간이 조금만 더 좋았어도 뭔가 따뜻한 말을 해 줬겠지만.....유감스럽게도 내가 그런 인물은 못 되어서 말이야.

 

“.....흠, 어쩌면 말예요.”

 

어깨 위에 올라온 내 손을 느낀 이비가 나를 돌아보았다. 

 

“그냥 제가 주인님에게 물들어버려서 그런지도 모르겠네요.”

 

그녀가 피식, 웃음을 흘린다. 

 

“I mean, what the heck was up with that weird ass dance? I thought you went insane for a second there.”

(아니 그니까, 그 괴상한 춤은 대체 뭐였는데요? 그땐 주인님이 미치신 줄 알았다고요.“

 

”아니....그건-.“

 

”그래도...“

 

부끄러워하는 내 말을 자른 이비. 

 

 

 

 

 

”저는 그런 주인님도 사랑하지만요.“

 

그녀가 나를 향해 예쁜 미소를 지어주었다. 표정과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살가운 분위기가 나를 간질인다. 평소에 자주 봐 왔던 생글생글한 이 미소. 너무나도 그리웠던 그녀의 해맑은 미소를 보자 내 얼굴에도 자연스럽게 미소가 떠올랐다.

 

나는 쪼그리고 있던 다리를 펴고, 그녀의 옆자리에 다가가 앉았다. 그러자 눈을 감고 내 품에 머리를 대어 오는 이비. 나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렇게 둘이서 앉아있기를 한참, 이비가 운을 떼어온다. 

 

”.....주인님.“

 

응, 왜 그래 이비? 하고 대꾸해주며 그녀를 본다. 그러자 나에게 눈을 맞춰오며 그녀가 말을 이어갔다. 

 

”.....저, 잘하고 있는 건가요?“

 

정말로 짧은 문장이었지만, 그녀의 눈빛과 목소리에서 그 속에 눌러 담긴 온갖 생각을 엿볼 수 있었다. 맑고 초롱초롱한 그녀의 눈동자 깊은 곳에는 감히 나로서는 상상도 하기 힘든 과거의 편린들이 가라앉아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준 후, 그녀를 내 품에 더 가까이 끌어안았다.

 

”나도 이런 상황이 처음이긴 하지만…”

 

그녀의 숨결이 내게 닿아온다.

 

“넌 충분히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해.“

 

나는 손을 들어 이비의 머리를 다시 쓰다듬었다.

 

”.....노력해줘서 고마워, 이비.“

 

 

.....

.....

.....

 

 

이비는 지금 내 품 안에서 잠들어있다. 계속해서 눈을 뜨려는 걸 내가 겨우 달래서 재워놨거든. ”무슨 일 있으면 깨울 테니까, 눈 좀 붙여 둬.“ 그녀는 내 고집에 못 이기는 척 나의 품에 안겨 잠들었다. 예상대로 상당히 피곤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녀의 숨소리가 새근새근 내 귀를 간질이고, 함께 두르고 있는 담요 아래로는 그녀의 온기가 전해져 온다. 문득 그녀와 내가 이렇게 함께 있을 수 있는 순간이 너무나 소중하게 느껴졌다. 그 꿈은 그저 꿈일 뿐, 내가 사랑하는 이비는 지금 내 곁에 살아있으니까. 

 

나는 아침까지 쭉 이렇게 있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녀를 깨워야 할 일도, 이렇게 포근한 느낌을 갑작스레 떨쳐내야 할 일도 없기를. 

 

다행스럽게도, 이튿날 해가 밝을 때까지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그 덕에 나는 눈을 비비며 일어난 이비의 해맑은 미소를 바로 앞에서 감상할 수 있었고. 내 옆에서 눈을 뜬 오늘의 그녀는 과거의 기억으로 고통받던 상이군인이 아닌, 나의 귀여운 덜렁이 메이드였다.

 

 

=======================

 

 

”맛있게 드세용!“

 

복슬복슬한 꼬리를 흔들며 하치코가 내 앞에 내려놓은 미트 파이. 배가 고프다. 정말 많이도 고프다. 그런데도 저 파이에는 전혀 손댈 엄두가 나지 않는다.

 

....저번에 할아버지랑 할머니께서 그러셨었지. 시간이 지나면 자기들이 왜 저 파이를 잘 안 먹는지 이해하게 될 거라고.

 

......지금 절절하게 이해하고 있다.

 

저 맛있는 미트파이로 처음 끼니를 때울 때는 정말 좋았지. 근데 그게 두끼...세끼....그러다가 아예 며칠째가 되고 나니까 이젠 미트파이 얘기만 들어도 신물이 날 지경이다. 기름지고, 느끼하고.....그마저도 시간이 지날수록 파이는 질겨지고 안쪽은 푸석해져서 맛이 더더욱 기하급수적으로 하락하고 있었다.

 

물론 중간 중간 긁어온 보존식들을 곁들어 먹었기 때문에 순전히 미트파이로만 연명한 건 아니라고 해도.....좌우지간 설명이 안 될 정도로 하치코의 미트파이는 빠르게 입에 물렸다. 원래부터 가리는 게 없는 이비와 이 미트파이 지옥을 열어버린 당사자 하치코 본인(또는 본견)을 제외하면, 모두가 복잡한 얼굴로 미트파이를 우물거리고 있었다. 

 

”저기.....이거 마저 드실래요?“

 

조금 깨작거리다 만 파이를 이비에게 내미는 유미. 이비는 또 그걸 좋다고 받아든다.

 

”오오, 감사함다! 유미씨 최고임다!“

 

”아하하.....뭘요.....저는 그럼.....잠깐 신호가 잡히나 좀 보고 올게요.....아하하.“

 

파이를 성공적으로 떠넘긴 유미가 끙차, 하며 안테나를 들고 물러났다. 그러자 은근히 눈치를 보던 H와 바니도 이비에게 먹다 만 파이를 내민다. 짜식들, 지금 우리 이비한테 짬처리 하는 거냐. 괘씸한 H 내외에게조차 온몸으로 기쁨과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며 파이를 받아드는 이비를 보니 어딘가 기분이 복잡해졌다.

 

그러면서도 내 손은 자연스럽게 남은 파이를 이비 앞에 가져다 놓고 있었지만. 

 

…..사람이란게 참 간사하기 그지없는 생물이다 싶다.

 

행복한 얼굴로 파이를 와구와구 해치우는 이비 –그리고 눈을 감고 파이를 우물거리는 소완도- 를 뒤로하고 고개를 돌려보니 핸드폰으로 무언가를 보고 있는 H가 눈에 들어왔다. 바니는 물론이고, 유미까지도 안테나를 땅에 세워두고 녀석의 폰에 얼굴을 들이밀고 있었다. 

 

”뭐 보냐?“

 

나도 H의 근처에 다가가 앉았다. 그러자 녀석이 대꾸하길,

 

”별로 좋은 소식은 아니야.“

 

녀석이 내 쪽으로 화면을 돌려주었다. 그렇게 해서 보게 된 것은 그의 말마따나....그다지 유쾌한 소식은 아니었다.

 

[.....잇따른 공격으로 피해가 커지고 있는 가운데, 삼안산업 제2 자치 광역시가 마침내 함락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삼안산업 보안군 통합 사령부와의 연락이 두절되어 향후 작전에 불가피한 차질이 생길 것으로 전망됩니다. 현재까지 정확한 피해 집계는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생존자는 극히 희박할 것으로 추산되고 있습니다. 한편, 대한민국 정부는 함락을 목전에 둔 세종시를 떠나---] 

 

삼안산업 제2 자치구역. 노부부의 손녀가 있는 곳이랬지.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그곳으로 통하는 큰 도로가 나온다. 그런데 이젠…..

 

나는 노부부와 하치코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사이좋게 통조림과 음료수를 나누어 먹는 그들의 모습이 보인다. 이렇게나 어두운 형세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화목한 모습이었다. 

 

”....말씀 드리는 게 맞겠지?“

 

H가 떨떠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안쓰러울 정도로 파리해진 그의 얼굴은 그새 더욱 핼쑥해져 있었다.

 

나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우리는 끝까지 갈 생각이네. 그 아이가 우릴 기다리고 있어. 살았건 아니건…..직접 데리고 나오지 않으면 하늘에서 기다리는 아들내미랑 며느리를 볼 면목이 없을 게야.”

 

노부부는 끝내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곳의 상황을 전해 드린 뒤, 우리와 함께 가시는 게 어떻겠냐 제안 드렸지만, 금지옥엽 같은 손녀를 어찌 그런 곳에 버려두고 갈 수 있겠느냐며 한사코 사양하시는 것이었다. 하치코도 결연한 얼굴로 그들과 끝까지 함께할 것을 밝혔다. 

 

나로서도 그들의 심정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당장에 나도 (엄밀히 따지면 그저 남, 그것도 한낱 바이오로이드에 불과했던) 유미를 데려와야 한다고 고집을 피웠던 적이 있었으니까. 하물며 어릴 때부터 귀하게 길러온 손녀라면 어떻겠는가. 하여, 나는 구태여 의미 없는 설득을 계속하는 대신 얌전히 그들의 의사를 존중해주기로 했다. 

 

.....

.....

.....

 

 

 

 

 

“그동안 고마웠어요, 언니들! 나중에 꼭 다시 봐요!”

 

“이히힛, 힘 내십쇼! 아가씨 무사히 찾으시는 검다!” 

 

“조심조심 살펴 가세요. 산만하게 꼬리만 흔들지 말고, 주인분들 좀 잘 지켜드리고요.”

 

“아 참, 가기 전에 미트파이 좀 더 나눠ㄷ-”

 

“아뇨 아뇨, 그건 됐습니다. 살펴 가세요” 

 

제2삼안 IC 인근에서 우리와 헤어지게 된 하치코와 노부부. 메이드들이 앞장서서 그들을 배웅해주고 있었다. 밝은 목소리와 미소로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주는 이비, 말로는 틱틱 대면서도 걱정해주는 얼굴로 하치코를 바라보는 바니. 소완과 유미도 조용히 그들을 배웅했다.

 

“.....지난 며칠간 신세 많이 졌네. 자네들도 무사하길 바라겠네.”

 

“그래요. 다들 몸조심하고, 색시들도 잘 챙겨줘요.”

 

우리와 작별 인사를 나누고 몇 걸음을 옮긴 뒤, 노부부가 등을 돌려 나와 H에게 건넨 말씀. 그것이 그들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우리는 그들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잠시 그곳에 머무르며 노부부와 하치의 앞길에 행운을 빌어 주었다.

 

어째서인지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한 가지 느낌이 있었으니까.

 

이제 저들을 다시 보지 못하리란 것. 

 

 

====================

 

 

 

앞으로 갈 길이 조금 더 힘들어지리란 생각은 하고 있었다. 하치코가 가지고 있던 (더는 못 먹어 줄 기분이긴 했지만) 꽤 많은 양의 식량과, 그녀의 든든한 방패는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다. 그리고 우리 앞에는 철충 뿐만 아니라, 별의별 이상한 인간에 명령권 재설정인지 뭔지까지 가능한 C놈까지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내 옆에 있던 게 진지 모드의 이비였더라면 그녀도 내심 걱정을 하고 있었을 거고.

 

그렇다. 일행이 줄어버린 만큼, 앞으로의 길이 한층 더 위험해질지도 모른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예상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빨리 엿될 줄은 몰랐지.

 

“흐아아! 저것들은 또 어디서 튀어나온 거야!”

 

무거운 안테나와 가방을 메고 열심히 다리를 놀리던 유미가 절규한다. 뒤에서 총을 쏘아대는 철충도 모자라서, 하필이면 가는 길도 오르막길이라 더욱 더 죽을 맛일 거다. 

 

이비와 바니는 우리의 뒤에서 총을 갈겨대며 겨우겨우 발을 맞추고 있었고, 소완은 성치 않은 몸에도 불구하고 H 녀석을 업어 든 채로 빠르게 달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헉-헉-헉- 씨발...씨발...씨발.....”

 

.......모양 빠지니까 자세한 묘사는 생략하겠다.

 

근처에 아무도 없다고 방심한 탓이었을까, 아니면 이런저런 감상에 젖어버려 순간 안이해져 버린 탓일까. 우리 근처를 서성이던 철충 무리의 눈에 띄고 말았다. 그렇게 총성이 울린지 얼마 지나지 않아 주변에 있던 온갖 철충들이 우리 위치를 향해 몰려들기 시작했고......대충 이렇게 된 거지. 

 

...하하 돌겠네 진짜.

 

“재장전함다!”

 

이비가 몸을 낮추고 탄창을 갈아 끼우는 동안, 바니가 총 아래에 달린 유탄발사기를 발사했다. ‘퍽’하고서 다소 맥빠지는 소리가 난 뒤, 뒤뚱거리며 우리를 쫓던 철충 하나에게 큰 폭발이 덮쳐왔다.

 

하지만 하나를 잡으면 뭐하랴, 그 뒤로 몰려오는 게 대여섯은 더 되는데.

 

“으아아! 이게 또 왜 이러는 검까!”

 

급하게 총을 장전하던 이비에게서 당혹감 가득한 외침이 들려왔다. 그녀의 소총에는 총알 하나가 요상한 모양새로 걸려 있었다. 그녀가 몇 번이고 노리쇠를 당겨보았지만, 여간 단단히 걸린 게 아닌지 별 소용이 없었다.

 

바니가 시간을 더 벌어주기 위해 남은 총알을 모두 쏟아부었지만, 그것도 얼마 지나지 않아 바닥나버리고 말았다. 공허하게 울리는 ‘틱’ 소리에 당황해하는 바니의 얼굴. 그리고 버려진 자동차를 짓밟으며 몰려오는 철충들을 바라보던 이비. 그리고 그런 그들을 지켜보던 나. 

 

내 앞에서 달려가는 다른 일행과 내 뒤에 남겨진 두 메이드를 번갈아 볼 때마다 머리가 멍해지는 거로도 모자라 시공간이 늘어지는 듯한 착각까지 들었다. 

 

이제는 정말로 끝인 건가, 불길한 생각이 마음을 좀먹기 시작했다. 뜀박질이 점점 느려지는 기분이다. 다리에 힘이 빠져서 그런 건 아닌 것 같지만. 속도가 점점 느려지는 것에도 아랑곳 않고, 나는 이비와 바니 방향으로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저 아래에서는 기괴하게 뒤틀린 기계들이 기관총을 쏘아대며 육중한 발걸음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제대로 움직이기 힘든 H를 업은 소완과 발에 불이 나도록 뛰고 있는 나와 유미는 그저 죽어라 도망칠 뿐이었고, 그나마 저항 비슷한 것이라도 가능한 두 메이드조차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우리가 이러는 동안에도, 놈들은 차츰차츰 우리에게 더 까가이 다가오고 있다. 

 

그 순간, 이비의 눈빛이 다시 날카로워졌다. 

 

“바니 언니, 유탄 몇 개나 남았죠?”

 

“....방금 하나 써버렸으니...이젠 딱 한발 남았네요.”

 

허겁지겁 탄창을 갈아 끼우던 바니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대답한다. 

 

“탄알집은요?”

 

“채워둔 건 이게 끝이에요. 가방에 남은 탄약도 얼마 안 됩니다.”

 

“.....하.”

 

이비는 떨떠름한 얼굴로 자기 소총을 바닥에 내려놓고, 가방을 풀어 탄창 두어 개를 꺼내 놓았다. 그리고서는 한숨을 한 번 쉬더니,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바니에게 말을 건넨다.

 

“그 총하고 남은 유탄은 저한테 주시고... 이제 제 말 잘 들으세요, 바니. 지금부턴 언니께서 남은 분들을 책임지셔야 합니다.”

 

그러면서 바니의 손에 자기 권총을 꺼내 쥐어준다.

 

쟤가 지금 뭘 하는 거지? 

 

설마....

 

“이비씨? 이게 무슨-”

 

“어서요!”

 

자꾸 소총을 건네 달라며 재촉하는 이비.

 

.....설마 했더니.

 

이비를 쳐다보느라 느려지긴 했어도, 씨발 씨발 거리며 꾸준히 줄행랑을 치던 내 두 다리가 뚝, 하고 일시에 정지해버렸다. 

 

아니 이게 무슨 영화도 아니고. 꼭 이런 순간만 되면 자기 목숨을 내던져야 한다는 법이라도 있는 건가? 

 

.....평생 함께 하자고 약속했잖아.

 

그 와중에 바니와 짧은 실랑이를 벌이던 이비는, 그녀를 뒤쪽으로 거칠게 밀어보냈다.

 

“시간 없으니까 얼른 가라고요!” 

 

그 말을 들은 바니는 이비의 망가진 총을 주워들고, 망설이듯 추춤거리며 우리 쪽으로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이비가 그녀의 치맛자락을 붙잡더니, 아련한 표정으로 한마디를 덧붙이는 것이었다.

 

“참, 언니.....우리 주인님 잘 부탁드려요.”

 

그리고는 미련없이 바니에게서 손을 떼는 이비.

 

“이비!”

 

그 소리를 듣자마자 나는 즉시 방향을 돌려 이비에게로 돌아갔다. 갑작스럽게 몸을 돌리느라 보기 좋게 자빠질 뻔했지만, 휘청거리면서도 겨우 중심을 되찾고 전력으로 달려나간다. 위아래로 정신없이 흔들리는 시야와 가빠지는 호흡 사이로, 바니의 총을 들고 철충들에게 겨누는 이비의 뒷모습이 보였다. 

 

정신없이 달리다 보니, 내 쪽을 향해 달려오던 바니와 맞닥뜨렸다.

 

“A님, 정신 나가셨어요? 어서-”

 

“저리 비켜!”

 

나를 말리려는 바니의 손길을 뿌리치며 계속해서 이비에게 달려갔다. 거의 코 앞까지 도달했을 무렵, 그 시끄러운 와중에도 내 기척을 느낀 이비가 나를 돌아보며 눈을 휘둥그레 뜬다.

 

“주인님?”

 

“이비, 여기서 뭐하는 거야! 같이-”

 

그 순간, 이비가 우악스런 힘으로 날 잡아당겼고, 아까까지 내 머리가 있던 위치로 “쐑” 하고 무언가가 지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뒈지려고 작정했- 아니, 그보다 여긴 왜 왔어요? 제가 지금 누구 때문에 이 짓거릴 하고 있는지 몰라서 이러세요?”

 

그녀가 내게 짜증 가득한 얼굴로 소리친다.

 

“그럼 널 두고 나만 도망가라고? 그래서 혼자 살아봤자 뭐! 그렇게 살아서 뭘 하라고!”

 

나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졌지만, 원체 시끄러운 상황이라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 없는 느낌이다. 나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한마디를 더 읊조렸다.

 

“.....죽어도 같이 죽는 거야. 너랑 나랑은.”

 

그러자 이비가 노여움 가득한 눈으로 날 쳐다본다.

 

“지금 그게 멋있다고 생각해서 하신 말씀이에요?”

 

“아니, 진심으로 한 소리야.”

 

한층 더 구겨드는 그녀의 미간.

 

“.....미친새끼.....당신 진짜 미친새끼야, 알아?”

 

“나도 잘 알아.”

 

“.....씨발 진짜.”

 

(아마도 깊은 짜증에서 우러나온 듯한) 앓는 소리를 낸 이비. 그녀가 빈 탄창 몇 개와 총알 박스를 내 앞으로 밀어 보냈다.

 

“.....하, 기왕 오신 김에 이거나 채워주세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여주었더니 그녀가 내 멱살을 붙잡고 한마디를 덧붙인다.

 

“그리고 만약에, 진짜 만약에 여기서 살아나가면.....주인님이랑 저랑 말씀을 좀 나눠야겠습니다.”

 

어금니를 꽉 깨물고 위협적으로 으르렁대는 그녀.

 

“한 대 때려도 좋으니까 살아만 돌아가자.”

 

“말이나 못하면 진짜.....”

 

 

.....

.....

.....

 

 

나는 할 수 있는 최대한 민첩하게 두 손을 놀리며 탄창에 총알을 채워 넣는 중이다. 사격장에서 이비가 하는 걸 봤을 때는 정말 간단해 보였는데, 막상 직접 해보려니 생각보다 뻑뻑한 게 촤라락 빠르게 넣기가 어렵다. 

 

저 경사로 아래에서 우리와 대치 중인 철충들을 향해 신중하게 한두 발씩을 쏘아대던 이비는 벌써 탄창 하나를 다 비워냈는지 바닥에 놓인 마지막 예비 탄창에 손을 뻗고 있었다.

 

“좀 더 빨리 하셔야 해요, 주인님. 이게 마지막이니까-”

 

“으으, 나도 알아! 노력하는 중이야!”

 

다급한 마음에 자꾸만 손이 헛돌고 있다. 그렇게 계속해서 빌빌대고 있던 순간, 흰 장갑을 낀 자그마한 손이 내 손에 있던 탄창을 낚아채갔다.

 

“그냥 제가 하겠습니다. 이러느니 나무늘보 한 마리를 데려다 시키는 게 더 빠르겠네요.”

 

바니?

 

고개를 돌려보니 바니는 물론, 소완과 유미까지 어느새 우리 쪽으로 와 있었다. 

 

“언니? 뭐하러 돌아왔어요! 언니 서방님은-”

 

그러자 바니가 자기 뒤편을 가리켰고, 그곳에는 버려진 미니밴에 몸을 기댄 채 맥없이 손을 흔드는 H가 보였다.

 

“친구 아니랄까 봐 생각 없는 건 A 님하고 똑 닮아서는, 도저히 친구를 두고는 못가겠다고 하시더군요. 서방님께서 그러시는데 제가 뭘 어쩌겠습니까.”

 

어깨를 으쓱하는 바니에 이어서 소완도 입을 열었다.

 

“소첩, 이 여정의 끝까지 주인을 모시겠노라 약조한 몸이온데, 어찌 주인의 은혜를 저버릴 수 있겠사옵니까.”

 

그녀가 철충들을 바라보며 주방칼 세트를 펼친다. 그녀의 옆에는 안테나와 크랭크를 품에 안은 채로 달달달 떨고 있는 유미가 있었다. 

 

모두가 마지막 싸움을 각오한 기세였다.

 

그 짧은 찰나에 서로 의미심장한 눈빛을 교환한 바이오로이드들이 고개를 끄덕이고, 그 순간 이비가 마지막 남은 유탄을 장전하고 그대로 몸을 내밀어 철충들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풍’ 하는 소리가 귓가를 때린다.

 

저기 모여 있던 철충들을 다 해치우기에는 턱 없이 부족하겠지만-

 

부족......

 

......

 

폭발이 한 번 더 일어났다. 그리고 한 번 더. 그럴 때마다 철충들이 하나씩 고꾸라진다.

 

이게 폭발력이 원래 저렇게 좋았나?

 

....아니, 이제는 보인다. 우리랑은 상관없이, 어딘가 다른 곳에서 유탄이 날아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궤적이 시작되는 곳은.....점점 더 우리와 가까워지고 있는 듯한 느낌인데. 그 주인이 누구든 간에, 그 사람은 정말이지 신기한 솜씨로 철충들을 하나 하나 박살내고 있었다.

 

“......어?”

 

얼마 지나지 않아 H가 의아한 소리를 내며 손을 들어 어딘가를 가리켰다.

 

이제는 아주 가까이서 들리는 ‘풍’ 소리 한 번. 이어서 마지막 철충이 쓰러져 버린 뒤, 갑작스레 바닥에 나타난 그림자를 쫓아 눈을 돌려보니.....

 

 

 

 

 

웬 여자애가 하나 있네. 

 

그림자의 주인은 자동차 지붕에 올라 버티고 선 분홍 머리 여자아이였다. 생김새와 복장을 보아하니 중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앳된 소녀. 제 몸에 어울리지 않게 큼직한 무기들을 들고 있는 모습이 약간은 우스우면서도 위협적으로 느껴진다. 

 

아마도 저 녀석이 우릴 구해준 거겠지. 나는 감사 인사라도 할 생각으로 몸을 일으키려 했는데....

 

“움직이지 마!”

 

그녀가 사나운 표정으로 외쳤다. 그러더니 들고 있던 소총을 곧장 우리에게 겨누었다. 

 

“.....너희는 또 뭐야. 전부 삼안 애들이네? 아까 그놈하고 한패야?”

 

아까 그놈?

 

“저기.....무슨 말을 하는-”

 

“입 다물고 손 올려!”

 

어린 티가 풀풀 풍기는 목소리로 빽 소리 지르는 게 별로 무섭지는 않았지만, 총구 앞에 서게 된 이상 별수 없이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릴 수밖에 없었다. 

 

이비도 별다른 도리 없이 총을 바닥에 내려놓고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릴 뿐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눈을 올려 저 당돌한 꼬맹이를 쳐다본 순간, 그녀의 눈이 한 번 더 휘둥그레 커졌다.

 

“.....Sarge?”

(하사님?)

 

그 소리에 이비 쪽을 돌아본 꼬맹이. 그러자 녀석의 눈도 덩달아 크게 뜨인다. 꼬맹이가 총까지 내리고서는 눈을 찌푸리며 고개를 우리쪽으로 들이민다.

 

“뭐야 넌.....브라우니 아냐?”

 

“....이프리트 하사님?”

 

뭔가 넋이 나간 듯 중얼거리는 이비. 그녀의 나직한 부름에 꼬맹이가 고개를 살짝 갸웃거린다.

 

“응? 아, 맞아. M-5 이프리트. 제대할 땐 하나 올려서 하사 달아주긴 하더라.”

 

“진짜....하사님....”

 

“혹시 우리 구면인가? 부대가 어디-, 야 잠깐, 너 왜 그래? 괜찮아?”

 

뭔가 이상한 분위기에 꼬맹이가 당황하는 순간, 이비는 갑작스레 정신을 잃고 쓰러져 버렸다. 옆에 내가 있었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아스팔트 바닥에 머리를 세게 부딪혔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대로 눈을 감고 몸에 힘이 풀린 이비를 안은 채, 나는 그 꼬맹이에게 따가운 시선을 보냈다. 그러자 다른 일행들도 녀석에게로 고개를 돌려 빤히 쳐다보고 있다. 

 

“....그....저기....뭐 도와줄 게 있을까?”

 

노기가 풀린 얼굴로 우리에게 어색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이프리트인가 뭔가 하는 꼬맹이. 녀석의 본래 목소리는 어딘가 졸린 듯 느릿느릿한 분위기를 풍겼다.

 

 

.....

.....

.....

 

 

".....아깐 오해해서 미안했어. 전부 삼안 언니들인 줄 알았지 뭐야." 

 

소완이 건네준 보온병 속 보이차를 홀짝이며 분홍 머리 꼬맹이가 입을 열었다. 

 

“....삼안 애들만 잔뜩 데리고 돌아다니는 놈이 하나 있었거든. 삼안 바이오로이드로 서커스단이라도 차렸는지 종류별로 많이도 끌고 다니더라.”


아까 밝힌 바로는 자기 이름이 ‘아라’랜다. ‘서아라’. 이름만 놓고 보면 평범한 한국 여자애같은데, 생김새는 전혀 그렇지가 못했다. 외모가 한국인 같지 않은 건 둘째 치고, 누가 봐도 바이오로이드스러웠으니까.

 

작달막한 몸집과는 대비되는 괴력의 소유자인 아라는 자기보다 훨씬 큰 이비를 아무렇지 않게 들어서 인근의 한적한 캠핑장에까지 옮겨주었다. 녀석의 안내로 도착한 이 곳에는 주인 없는 작은 텐트가 몇 개 펼쳐져 있었다. 영문은 모르겠지만 주변은 난장판이었고.

 

“우리는 다른 사람들 몇몇이랑 같이 모여서 안전한 곳으로 가고 있었어. 그러다가 잠시 쉬어가는 길에 그 이상한 행렬이랑 마주쳤는데, 다들 그놈을 보니까 엄청나게 반가워했어. 저렇게나 일손이 많으니 우릴 도와줄지도 모른다고 말야. 그런데....지금 생각해보면, 이 상황에서 그렇게 멀쩡하게 돌아다닐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뭔가 말도 안 되는 일이잖아.”

 

아라의 눈가에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그놈이 정확히 뭘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녀석이 나타나고 나니까 주변에 있던 삼안 언니들이 이상해졌어.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언니들이 갑자기.....”

 

녀석이 후드티의 소매로 눈가를 비빈다.

 

“....자기 주인들을 막 덮쳤어. 미안하다고, 자기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고, 비명을 지르면서 자기 주인들을 피투성이가 될 때까지 찌르고, 때리고.....” 

 

이내 보온병을 부여잡은 채로 울음이 터져버린 꼬맹이.

 

“....힘들면 그만해도 돼. 대충 무슨 일인지는 알겠으니까.”

 

나는 히끅대며 울어대는 아라 앞에 쪼그려 앉아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C부장. 

 

지금까지의 이야기로 보아, 이 꼬맹이가 속한 피난민 그룹은 C에게 공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아라는 이비같은 블랙 리버 출신이라 멀쩡했던 모양이고.


지긋지긋하다. 왜 악연이란 건 항상 이렇게까지 진득하게 이어지는 걸까. 그리고 그놈은 대체 왜 이런 일을 벌이는 걸까.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해서 얻을 게 뭐가 있다고. 

 

절로 머리가 지끈거리고 미간까지 찌푸려졌지만, 나는 최대한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이 분홍 머리 소녀를 안심시키려 했다.

 

“괜찮아, 무서워할 거 없어. 그놈은 이제 여기 없으니까-”

 

“그게 문제가 아냐.....”

 

녀석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지킬 수 있었단 말이야. 싸울 수 있었다고....”

 

파르르 떨리던 아라의 눈과 입이 마침내 비틀어 열렸고, 그곳으로부터 –그 앳된 얼굴에 맞지 않는 깊이를 가진- 비통한 울음이 흘러나왔다. 이윽고 녀석은 보온병까지 떨어뜨리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몸을 움츠렸다.

 

그렇게 애처롭게 흐느끼던 녀석은 급기야 바닥에 주저 앉더니 한참을 통곡했다. 형언할 수 없는 고통과 슬픔을 눌러담은 듯한 그 소리에 나도, 유미도, -아직 깨어나지 않은 이비를 제외한- 다른 일행 모두도 차마 아무런 행동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울어대던 아라는 곧 비틀대며 몸을 일으켜 어딘가로 위태로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녀가 향한 곳은 캠핑장 외부의 콘트리트 차단벽이었는데, 그 앞에는 회색 방수천 같은 것에 싸인 무언가가 있었다. 나와 유미는 조심스레 그녀의 뒤를 따랐다.

 

 

 

 

 

“.....도망가라고만 안 했어도....”

 

녀석이 겨우겨우 입 밖에 낸 한 마디. 그녀가 주저앉은 자리 앞, 방수포에 싸인 물체는 무언가 불길한 윤곽을 가지고 있었다. 어딘가 익숙한 모양새인데....

 

“이건-”

 

“.....우리 엄마 아빠야.”

 

그녀의 대답에 유미와 나는 할말을 잃었다.

 

“.....나보고 도망가서 안전해질 때까지 숨어있으라고 하셨어. 명령이라면서. 평소엔.....그런 거 전혀 안하시는 분들이셨는데.....그래서 명령 때문에 꼼짝 못하고 도망가서 숨어있어야 했어. 그래도 곧바로 돌아온다고 돌아왔는데, 돌아왔을 땐 이미.....” 

 

유미는 녀석의 어깨의 손을 올렸다. 아마 나름대로 위로의 제스쳐를 취한 거겠지. 막상 본인도 안타까워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눈치였지만. 

 

나도 아라의 안타까운 사연에 뭐라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마음이 무거워졌다. 위로를 건네주고 싶어도, 이런 상황에서 대체 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착잡한 마음을 안고 아라와 유미의 뒷모습만을 바라보고 있을 때쯤, 내 옆에 웬 인기척이 느껴졌다.

 

어느새 일어나서 여기까지 걸어온 이비였다.

 

이비는 말없이 아라의 옆으로 다가가서, 무릎을 꿇고 앉아 녀석을 자신의 품에 안아주었다.

 

셋은 한동안 그렇게 있었다. 흐느끼는 아라, 안타까운 얼굴로 등을 토닥여주는 유미. 그리고 눈을 감고 품에 아라를 안고 있는 이비. 소완과 바니, H의 눈빛에도 이 꼬마를 향한 연민이 실려 있었다. 

 

....C.

 

당신은 대체 어떻게 돼먹은 인간이냐.

 

 

====================


일이 바빠져서 여러모로 늦어버렸습니다 ㅠ

많은 분들이 떠나셨지만, 그래도 남아계신 분들을 위해 별 것 아닌 연재를 이어가봅니다.

매번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