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오로이드는 인간을 복제한 여성형 인조인간이었다. 지구의 마지막 남자는 그런 바이오로이드들을 이끌고 적들과 싸우고 있었다.


하루는 남자가 측근들을 불러 놓고 물었다.


"이터니티 2호에게 인간화를 시켜주려고 하는데. 너희들 생각은 어때?"


부하들은 얼른 대답하지 못하고 서로 마주 보았다.


바이오로이드는 만들어질 때부터 주인의 명령에 복종하고 애정을 품도록 철저히 세뇌된 존재였다. 인간화는 그런 바이오로이드의 정신 제약을 풀어주는 작업인 것이다.


그녀들에게 부여된 정신 제약을 해제하는 것으로도 이미 인간의 조건을 충족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만큼 바이오로이드와 인간의 경계는 흐릿했다.


저항군의 부사령관이자 인간화 실험의 대상자인 라비아타가 먼저 말했다.


"주인님이 원하신다면 저는 찬성이지만, 신중하셔야 할 거예요… 잘 아시겠지만, 자유란 무거운 것이니까."


"알아. 나도 충분히 생각해서 한 말이야. 어쨌든 그녀의 공은 인정해 줄만하다 생각해서. 이제까지건, 앞으로건."


저항군의 규모가 커질수록 남자는 일이 늘어났다. 그런 와중에 바이오로이드가 낳은 아이를 키우는 게 가능하다고 입증되자마자 벌써 몇 명이나 자식을 보게 되었다.


멸망한 인류의 부흥을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나 문제는 전시 환경이 육아에 좋지 못하단 점이었다.


그는 부모로서 아이들과 최대한 같이 있어 주려고 했지만, 역시 아이 모친들도 다들 바쁜 몸이다 보니 육아를 이터니티 2호에게 맡길 때가 적지 않았다.


이처럼 아이들을 키우기 어려운 환경이어도, 이터니티의 보살핌 덕분에 아이들은 삐뚤어지지 않고 자라나는 중이었다.


그것이 고마웠던 남자는 그녀에게도 정신적 굴레를 벗겨 주고 싶단 생각을 품은 것이다.


"그 아이가 겪을 충격이나 혼란이 걱정되어서요. 뭣보다 본인이 원해야 하고요."


라비아타는 인간화 시술에 극히 신중한 모습이었다. 그녀도 자매들이 자유를 찾는 건 바라던 바였지만, 한편으로는 인간의 자유로운 마음을 가볍게 다뤄선 안된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2호도 내 뜻에 찬성했어. 그녀도 역시 바이오로이드의 한계는 벗고 싶을 테니."


한편, 다른 측근인 아르망 추기경은 반대 의사를 표했다. 아직도 인간화 기술의 충분한 입증이 덜 끝났다는 이유에서였다.


그것은 아르망이 남자의 참모인데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도 인간화를 받지 않은 이유이기도 했다.


만약 2호가 인간의 마음을 견디지 못한다면 자칫 비극이 발생할 가능성이 농후했다. 현재, 저항군 내부에서 인간화가 된 바이오로이드는 손에 꼽을 정도인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아르망의 반대에도 일리는 있었다.


이처럼 다들 할 말은 많아도 눈치만 보고 있는 가운데, 남자의 경호 대장인 블랙 리리스가 손을 들었다.


"저는 찬성이에요."


"?!"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다. 그녀는 인간화를 받기 이전부터 질투심 많기로 유명했던지라, 다들 의아한 눈치였다.


리리스는 남자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 * *



그로부터 얼마 후, 이터니티 2호의 인간화는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인간이 되고 난 후에도 그녀의 일상엔 큰 변함이 없었다. 일선에서 적과 싸우기보다는 주로 저항군 본부에서 남자의 아이들을 기르는 게 그녀의 임무였기 때문이다.


"오늘도 잘 부탁해요, 이터니티 양."


"예."


남자를 경호하러 나가는 리리스 자매를 배웅하며, 이터니티는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그녀의 목숨보다 소중한 아이들.


하지만 이제는 반드시 아이들을 자기 목숨보다 소중히 여길 필요까지는 없었다. 더 이상 바이오로이드가 아니니 자기 스스로 무엇을 우선할지 결정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터니티는 인간이 된 뒤에도 저 아이들을 전처럼 대하기로 이미 결심한 바였다.


시대가 시대인 만큼 이 아이들의 부모는 모두 바빴다. 그렇기에 유모가 필요한 것이다.


"유모 언니. 오늘도 리리쭈랑 동생들하고 놀아요."


"숙제 다 하고 나서예요."


"쫌생이네용."


아이들은 손이 많이 갔다. 다들 울거나, 칭얼대거나, 놀아주거나 하며 관심을 주길 바랬다.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본성은 말을 잘 듣고 착한 아이들이었지만, 기운이 팔팔한지 쉬지 않고 일을 벌이곤 했다.


이터니티는 혼자서 아이들을 상대했다. 때로는 다정하게, 때로는 엄격하게. 할 일은 하고 놀 땐 놀고.


그날도 오후가 되어 아이들이 조용해질 무렵에야 그녀는 가만히 쉴 수 있었다.


"휴."


아이들이 잠들자 이터니티는 읽어 주던 동화책을 덮었다. 저도 모르게 진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사실 예전부터 해 온 일이었으니 이제 와서 힘들다고 할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이날따라 더 피곤한 느낌이었다.


귀찮아진 걸까. 내 아이가 아니라서 그럴까.


그렇게 생각하며 아이들을 내려다보던 이터니티는 순간 놀라서 멈칫했다.


실수라고 해도 유모로서 상상도 할 수 없는 마음가짐을 품은 게 아닌가.


"애옹?"


잠시 굳어 있던 이터니티는, 잠에서 깬 미니 페로의 시선을 느끼고 얼른 웃어 주었다.


아무것도 아니랍니다, 아무것도. 분명, 수술의 후유증일 거예요.


하지만 '후유증'은 그 한번 뿐이 아니었다.


여러 아이들을 도맡아 기르는 건 원래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던 것이 인간화가 되고 나선 점점 더 힘이 드는 것 같았다.


"유모 언니! 리리쭈랑 총싸움 해요."


"민트파이 드실래요?"


"…나중에 하죠."


최고급형 바이오로이드였던 그녀의 체력이 약한 것은 아니었다.


지치는 건 정신적인 쪽이었다.


그녀는 전과 다르게 아이들을 쉬이 편하게 대할 수가 없었다.


"…."


이터니티는 아이들에 대한 생각이 많아졌다.


아이들은 자신을 단순한 유모라고 생각할까, 자신이 없어도 개의치 않아 할까, 나중엔 유모와 지낸 일도 잊어버리는 걸까.


자신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절로 마음이 아팠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아이들이 생모와 지내느라 가 버릴 때가 더 괴로웠다.


마치 친딸처럼 기른 아이들을 뺏기는 것만 같았다.


아이들을 낳은 쪽이 누구인지를 생각하면 웃기는 이야기였지만, 이터니티는 쉽게 설명할 수 없는 감정에 종종 사로잡히고는 했다.


그 감정이 질투라는 건 나중에야 알았다.


차라리 내 아이로 키우면 어떨까. 나라고 저런 착하고 귀여운 아이를 가지지 말란 법이 있는가.


이처럼, 예전 같았으면 품지 않았을 검은 마음이 조금이나마 고개를 드는 것이다.


그녀도 물론 아이들의 친어머니들을 질투하고 미워하고 싶진 않았다.


모두들 유모인 그녀를 좋아하고 고마워했다. 아직 남은 뇌파 감지 능력 - 바이오로이드 시절의 잔재 - 으로 잘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더욱 혼란스럽고, 가슴 속이 아팠다.


혼자 지내야 하는 밤에는 때로 아무 이유 없이 울적해서 눈물이 날 뻔한 적도 있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고, 누구를 탓할 수도 없었다.


그저, 인간의 마음을 갖는다는 게 이토록 힘든 일인지는 몰랐다. 바이오로이드 시절엔 생각을 많이 할 필요가 없었는데, 인간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뛰어난 유모인 그녀가 혼란스러운 기분을 내색할 정도로 프로 의식과 자제심이 없진 않았다. 그래도 눈치 빠른 아이들은 가끔 무언가 위로해 주려고 하거나, 알아서 조용히 지내기도 했다.


이터니티도 멋모르는 아이들의 걱정이 고마워서,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스스로를 책망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마침 다른 대원들이 아이들을 보살피기로 한 날이라, 이터니티도 자유로운 시간을 보내려고 하던 차에,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좋은 하루예요."


미니 리리스의 생모이자 인간이 된 전 바이오로이드, 리리스가 찾아온 것이었다.


이터니티는 내심 뜨끔했다. 안 그래도 요즘 그녀를 보는 것이 껄끄러웠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그녀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굳은 것을, 상대방이 놓치지 않았는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자 리리스가 먼저 말했다.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차 한잔 하시겠어요?"


이터니티는 거절할 이유도 없어서 순순히 리리스를 따랐다.



* * *



오르카호의 가든은 요정 자매들이 정성껏 가꾸었다는 명물이었다.


둘은 향기 나는 실내 가든의 테이블에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야기라고 해도 거의 리리스만 말하고 묻는 식이었고, 이터니티는 듣는 쪽이었다.


찻잔을 반쯤 비울 무렵 리리스가 불쑥 물었다.


"그나저나 요즘, 조금 힘들지 않아요?"


"예?"


"마음이요. …그 수술 뒤로."


이터니티는 얼른 대답하지 못했다.


리리스는 그런 이터니티를 잠시 바라보다가 말했다.


"이런 말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이해해요. 저 또한 마음의 고통을 받았으니까요… 처음에는요."


"…."


"바이오로이드일 땐 아무렇지 않았던 일이, 마음이 자유로워진 뒤론 자꾸 신경이 쓰이고… 때로는 아프고 슬퍼지기도 하지요."


차를 한 모금 마신 리리스는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한 시선으로 중얼거렸다.


"그래서… 어떨 땐 저도 모르게 소중한 사람들이 미워지기도 하고, 종종 나쁜 생각마저 들지도 몰라요."


이터니티는 입술을 달싹였지만, 좀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다.


"차라리, 인간이 아닌 채로 있었다면 편했을지도 모르는데. 자유가 이렇게 힘든 것이라면. …그렇게 생각한 적도 있을 거예요."


듣고 있던 이터니티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왜 찬성하셨죠."


그녀는 침을 삼켰다.


"알고 있어요. 당신이 제 인간화를 찬성했단 걸요."


리리스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인간의 마음이 힘겨운 길이란 걸 알고 있었잖아요, 당신도."


이터니티의 말에는 힐난이 섞인 듯했다. 그녀도 리리스가 원망할 대상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아니, 어떤 면에서는 고마워해야 할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괴로운 마음을 토해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리리스는 그런 이터니티를 물끄러미 보고는 잠시 뒤에 입을 열었다.


"물론, 제일 이유는 주인님을 위해서였어요. 마지막 인간인 그분에겐 인간이 많아질수록 더 외롭지 않으실 테니까요."


리리스가 다시 차를 홀짝였다.


"하지만, 그런 거 말고도 보상을 주고 싶었어요. 아이들을 잘 돌봐 준 당신한테요.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가 나지막히 말을 이었다.


"아이에게 인간 어머니를 더 만들어 주고 싶었어요."


순간, 이터니티의 자색 눈이 멈칫했다.


리리스의 말은 계속되었다.


"저나, 이터니티 양이나, 모두 어머니가 없이 만들어진 존재잖아요… 바이오로이드였으니까.


비록 인간이 되었다고 해도 저희는 어머니가 무엇인지 모르지요.


어머니가 얼마나 좋은지, 어떻게 해야 좋은 어머니가 되는지도 알 수 없어요.


그래서 저와 자매들은 아이들한테 좋은 어머니가 되어 주지 못할지도 몰라요."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당신에게 조금 무리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그 애들한테는 어머니가 항상 필요하니까요. 아이들을 사랑해 줄 수 있는… 또 한 명의 인간 어머니가.


그러니까… 도와 달라고 싶었어요, 유모인 당신에게요.


그것이 저와 자매들과 주인님의 바람이에요."


이터니티는 묵묵히 리리스를 바라보았다.


"이제 설명이 됐을까요? 제 뜻이."


"…충분히."


이터니티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어쩌면 자신이 리리스의 입장이어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 같았다.


인간이 되지 않았다면 그런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아직도 모르는 것이 많았지만, 인간이 된다는 의미를 조금은 깨닫게 된 것 같았다.


리리스는 다시 부탁해 왔다.


"이터니티 양, 앞으로도 미니와 아이들을 잘 부탁드려요."


이터니티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가씨들을 위해서."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아이들을 돌보리라.


괜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녀가 훗날 자식을 갖는다고 해도, 지금의 아이들 역시 소중하다는 건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아이들이 설령 자신을 잊어간다 한들 상관없었다.


결국은 그 아이들도 모두 자신의 딸이었으니까.


그래서 그녀는 인간의 마음으로 맹세했다.


앞으로도 작지만 새로운 희망들을 키워내리라.


거기까지 생각한 이터니티는 어쩐지 실없이 웃고 말았다.


인간이 되고 처음으로 아무 생각 없이 웃음이 나온 것 같았다.


그런 그녀의 미소를 본 리리스도 마주 웃어 주었다.


마음을 읽을 순 없어도 서로 어떤 마음인지 알 것 같았으니까.



=====

미니 리리스가 나온 다른 작품들과 동일한 세계




문학 모아둔 픽시브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