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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풀리지 않는 시간들.





(매움주의)





* * *






발렌타인 이후, 봄은 오지도 않았던 것 같이 지나간 무렵부터, 저도 모르게 술래 역을 맡는 개체들이 생겼다. 술래라 함은 숨바꼭질의 술래를 말한다. 술래를 피해 숨는 이들은 오르카의 유일한 커플이었다. 


커플이 멋대로 술래를 술래라 정한 것일 뿐이기에 의욕의 유무를 말하는 건 이상하겠지만, 술래들에겐 의욕이 없었다. 커플이 어디서 뭘 하는지는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엘리베이터 안에서 남자 쪽이 여자의 치마 폭을 파고들어 혀로 오르가즘을 선사했다는 걸 알았어도, 모르는 척 한다. 사령관실에서 어떻게 둘이서만 남을 수 있을까 세세하게 궁리한 기색이 다 드러나도, 술래들은 모르는 척 한다. 화장실에 들어간 지 한참이 됐는데 돌아오는 시간이 길어져도 모르는 척 한다. 그래도 궁금해서 ―뭐가, 왜 궁금한지는 모르겠지만― 화장실을 가 보면 가장 안 쪽 칸의 문이 흔들리는 걸 보게 된다, 그리고 못 본 척 나온다.


공공연한 비밀이 아니었더래도 술래들에게 의욕이 없는 건 매한가지였을 것이다. 시간 장소 따지지 않고 섹스 하냐고 어떻게 따져 물을 수 있을까. 굳이 따지겠다면 못할 것도 없었겠지만 체면, 품위, 공과 사 따위 등을 들이밀며 아득바득 자중을 요청하는 건 '나는 이 커플을 부러워하고 있다.' 라고 자기자신에게 선언하는 꼴이었다. 술래들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물어봐도 커플은 모르쇠로 일관할 것이 분명하기도 했고. 특히 남자 쪽이.


어쩔 수 있겠는가. 커플이다. 결혼을 약속한 사이다. 먹구름이 끼면 비가 오고 지진이 나면 쓰나미가 들이치는 건 당연하다. 내게 그것은 불행이기에 먹구름과 쓰나미 이외로 보이지 않을 뿐, 그것은 분명히 축복해야 할 일이었고, 나도 모르는 새에 그 커플의 손가락엔 커플들이나 할 법한 무언가가 끼워져 있었다. 


그 사이에 일어난 일들, 그러니까, 폐하가 어떤 길을 걸어오셨는지는 자세히 쓸 필요가 없다. 내가 사전에 통편집 해버렸기 때문이다. 외부에서 세균이 유입되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냥 내가 먼저 움직여서 없애버리면 되는 일이었던 것이다. 


어부지리로 별의 아이와 네스트를 모두 잡게 됐을 땐 조금 기뻤다. 나는 오르카의 저격수들을 대동하여 직접 네스트의 사출 코어를 저격했는데, 폐하는 어떻게 알았냐며 격하게 칭찬해 주셨다. 저격도 할 줄 알았냐며 놀라시기도 했다. 언제는 내가 못하는 게 있었나. 저격총은 미호의 것을 빌렸고, 그냥 딱 봐도 약점으로 보이길래 노렸을 뿐이라고 나는 겸손을 떨었다. 속으론 얼마 만에 보는 폐하의 웃는 얼굴인가 하고 전율하느라 바빴다. 그리고 침울해졌다. 사적으로 보는 시간이 사라지다시피 했어도 그렇지, 공적인 자리에서 까지 그런 기쁨을 느끼는 나를 견딜 수 없었다.


폐하는 요정 마을에 가실 일이 없었다. 요정 마을을 알게 되시는 일 자체가 없었다고 해야겠다. 내가 세균을 다 박멸했으니까. 딱 하나 빼곤 정말로 다 죽였다. 딱 하나는 그나마 재밌을 것 같아서 일단은 살려두었는데, 이에 대해선 후술하겠다.


폐하께서 왓슨이라고 불리는 일도 없었다. 교복을 입는 일도 없었다. VR세계는 반나절도 안 돼서 내가 클리어했다. 그리고 없앴다. 클리어 특전, 리앤의 설계도는 폐하께 쓸만한 것이기에 없애거나 하진 않았다. 


공방에서 닥터에 의해 복원 돼가는 리앤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옛날 생각이 났다. 혹시 하는 마음에 복원된 리앤과 면담 중일 때, 나는 한 번 물어봤다. '리앤. 내가 누군지 맞춰 볼래요?' 리앤은 내가 이상한 농담을 한다는 얼굴로 몇 초간 멍해 있다가 당연히 아르망 추기경이 아니냐고 답했다. 아무래도 리앤의 성능은 멸망 전이 더 뛰어난 듯 했다.


알래스카로 향하기 전, 여름의 끝자락. 결혼식이 열렸다. 한 섬에 정박하고 나서 열린 식이었는데, 그 섬은 사방이 꽃 무리로 뒤덮혀 있어서, 지평선에 걸쳐있을 때부터 눈에 확 띄는 섬이었다. 날씨는 끔찍하게 좋았고, 갑판에서 바라 보고만 있어도 꽃 향기가 코에 넘쳤다. 이 섬만 여름의 바깥에 있는 것처럼 민들레 홀씨가 초록 사이를 유영했다. 가장 고지대로 보이던 동산은 아늑하게 굽어 있어서, 자연친화적인 모임을 갖기에 그만인 곳이었다.


선원들도 숨을 돌릴 겸 섬을 돌아다니는 시간을 가졌다. 그러는 중에도 갑판에서는 결혼식 준비가 진행되고 있었다. 오르카와 관련된 것이라면 모두 내 손을 거쳐야 하지만, 이번 만큼은 라비아타에게 전권을 내주었다. 다른 이의 결혼식을 불행으로 밖에 받아들일 수 없는 이가 관리하면 문제가 생긴다. 그런 판단 때문이었다. 나는 전혀 차분할 수 없는 마음으로 애써 차분한 걸음을 유지하며 섬을 돌았다. 


계절에서 벗어난 것 같은 섬인 만큼, 시기를 무시하고 온갖 꽃들이 피어있었다. 그 중에는 실용적으로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을 것 같은 꽃들도 있어서 장갑에 뿌리 채로 담았다. 


그렇게 산책아닌 산책을 하는데 특히 눈에 띄는 곳이 있었다. 잘 보면 눈에 띄는데 섬에 오른 그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곳이었다. 


그곳은 그냥 해바라기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시야 전체가 해바라기로 가득했다. 내 키보다 크거나, 들기 좋게 아담한 게 있는가 하면, 너무 부푼 씨앗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곧 고개가 꺾일 녀석들도 있었다. 그 외엔 전부 죽어 있었다. 노란색 보다 적갈색의 면적이 더 큰, 자연이 빗어 낸 공동 묘지였다. 나는 그 해바라기 밭을 시간 가는 줄도 바라보다가, 호출 통신을 받고 서야 오르카로 돌아갔다.


오르카로 돌아오고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폐하가 찾아오셨다. 폐하가 나를 찾아온다. 그것은 폐하가 제대로 된 육체를 갖기 전이라면 나로 하여금 늘 온갖 기대와 상상을 하게 만드는 순간이었지만, 이제 곧 결혼식이 열릴 참이었다. 나는 내가 보기에도 폐하를 맥없는 얼굴로 맞이하고 있었다. 잠깐 미소 짓는 건 정신이 나가버릴 정도로 난이도가 높았다. 


기대하지 않는 것은 정답이었다. 폐하가 나를 찾은 건 축가를 불러 달라는 요청 때문이었다. 아르망은 노래를 잘 부른다고 들었어, 장르 불문하고 모두 소화한다던데?, 아르망. 혹시 괜찮다면 축가를 불러주지 않을래? 내가 그렇게 노래방에 가자고 요청한 것을 한 번이라도 받아들이셨다면 내 실력을 소문으로 접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나는 고민하는 척이나 하면서 시간을 충분히 끌고 고개를 끄덕였다. 거부할 상황도 아니었고 거부할 수 있을 리도 없었다.


라비아타의 주례사와 축사가 지나간 다음이 내 시간이었다. 나는 축가로, 윤하의 사계를 불렀다. 폐하와 콘스탄챠는 꽃으로 이루어진 듯한 섬을 등지고 나를 향하고 있었다. 나는 폐하를 보면서도 그 너머의 섬을 바라보며 불렀다. 폐하는 폐하를 위한 축가인 것처럼 받아들이셨겠지만, 나는 꽃들을 향해 노래하고 있었다. 웃을 수 없었다. 그러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정말 아름다운 축가였다며 나중에 내가 원하는 걸 하나 해주겠다는 포상에도 웃을 수 없었다.


축가가 끝나고 어딘가 알곡이 빠진 듯한 박수가 다문다문 터져 나왔다. 돌아 볼 생각은 없었는데, 정면엔 그날 부부로 맺어진 이들이 있다. 선택지가 없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나를 못마땅하게 쳐다보는 물건들을 발견했다. 개중엔 진심으로 박수 치는 것들도 있었으나 그 대다수도 주변 눈치를 의식한 듯한 기색이었다. 


그래. 이게 지금의 나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내면의 많은 부분이 파탄 났어도 능력 하나는 정말 뛰어난 년. 그래서 어쩔 도리가 없는 년. 그렇게 말하는 눈들 만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무엇 때문에 이런 시선을 받는 지경에 까지 다다른 걸까. 왜 나는 부르고 싶지도 않은 축가나 부르면서 짓고 싶지도 않은 미소를 짓고 있던 걸까. 아무것도 모르게 되었다. 하나 확실히 알았던 건, 더 가속해서 이 씨발년들을 어떻게든 모조리 박멸해야 한다는 것뿐이었다. 내 안의 그녀들도 동의했다. 의견은 합치되었다. 이것들만 없었어도 내가 폐하의 짝이 되는 가능성은 높았을 거라는 생각도 왠지 모르게 들었다.


요정 마을에서의 일 때문에 알래스카로 향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헌데 어찌 된 일인지 레모네이드 알파는 자신이 정보를 흘릴 이유가 졌음에도 ―이유에 대해선 후술하겠다.― 오르카에 접촉해왔다. 150년 전과 크게 다를 건 없었지만, 자신의 개인적인 복수에 대해 말하는 일은 없었다.


다른 물건들과 함께 폐하가 육지로 향했을 때, 나는 좀 더 오르카를 지키고 있었다. 팬텀과 더불어 내 눈이 되어준 레이스에게 화기를 빌려서, 심야 경계 근무를 직접 섰다. 오르카가 부상하면 갑판에는 경계 근무자들이 투입된다. 그것을 직접 했다. 2인자인 내가. 말이 어눌한 레이스는 그런 나를 보고 더 말이 어눌해져 있었으나, 그때의 나는 참모 아르망이 아닌 포식자였기에 인내심이 강해져 있었다. 듣기 싫다는 이유로 머리통에 구멍이 나지 않은 걸 레이스가 감사히 여기길 바랐다.


추위에 떨며 사방을 경계했다. 그런 끝에 밀항을 시도하려는 여우를 잡아 죽였다. 깔끔하게 머리를 명중 시켰다. 충동이 지시하는 대로 이름부터 여우가 연상 되는 년도 죽이고 싶었지만 참았다. 


여우를 바다에 먹이로 던져 넣고 폐하께 갔다. 폐하 옆에 있던 알파는 내가 받는 시선과 비슷한 시선을 주변의 물건들에게서 받고 있었다. 팬서에게 보고 받아보니, 수색한 곳이 AGS로 가득했다고 한다. 명령권자가 레모네이드 오메가 라는 자로 설정되어 있었고, 모두 대원들에게 적대적이었다는 듯했다. 그래서 같은 레모네이드 계열인 알파가 의심스럽다는 것이었다. 혹시 오메가란 이름으로 함정을 판 건 아니었는가, 하고.


함정일 리 만무했으므로 정보를 수집할 만큼 수집하고 오메가가 존재했어야 할 시설을 무너뜨렸다. 덕분에 철의 왕자가 깨어나는 일은 없었다. 


"왔어요? 여기 앉아요."


합류한 알파가 내 방에 찾아왔다. 이미 다른 지휘관들을 거친 알파는 옅게 웃고 있었어도 지친 티를 감추지 못했다. 이유만 다르지 150년 전에도 알파는 한동안 이랬다. 곱지않은 시선, 의심하고 캐묻고. 알파는 그 모든 걸 감내하여서 폐하의 비서가 되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렇게 둘 수 없었다. 폐하의 참모이자 비서는 나 하나로 족했다.


나는 일단 알파의 긴장을 풀어주기로 했다. 좋은 찻잎을 골라 우려서 몸을 덥혀 주고, 듣기 좋은 말로 분위기를 느슨하게 가져갔다. 지휘관들에게 많이 쪼였느냐, 내가 대신 사과하겠다, 편하게 있어라……좀 지나자 알파가 품위 있는 미소를 되찾고 말했다.


"들은 것과는 다르시네요."


나는 되물었다.


"뭐가요?"


"아… 음. 아니에요. 굳이 꺼낼 말은 아니었는데."


다르다는 건 나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분명 메이나 레오나 같은 년들이 알파가 마지막으로 면담하게 될 나를 두고 이런저런 소릴 했던 것이다. 내 대접이 꽤 마음에 들었던 건지 알파는 저도 모르게 굳이 꺼내지 않아도 될 말을 꺼낸 것이고. 알파는 생각 이상으로 긴장을 풀고 있는 듯했다.


슬슬 때가 된듯해서, 나는 서랍에서 담뱃갑을 꺼냈다.


"한 대 필게요?"


담배에 불을 붙이자 알파가 웃어야 할지 끄덕여야 할지 애매한 얼굴을 했다.


"일단 면담이고, 물어야 할 건 물어야 하니까 물어볼게요. 알파. 왜 폐하와 접촉을 시도했어요?"


"네?"


"당신의 진짜 목적을 생각하면 폐하께 접촉할 이유가 없었잖아요."


"지, 진짜 목적이라뇨?"


"오메가와 펙스 수뇌."


알파의 눈이 확 커졌다.


"그걸, 어떻게…?"


"왜 숨겼어요?"


"그건, 그, 그게… 숨기려는 건 아니었어요. 다만 제 쪽에서 보기에 이상하게만 보이는 일들이 좀 있었어요. 그게 머리 속에서 정리되면 주인님께 말씀드릴…"


나는 알파의 말을 끊었다.


"세상에서 유일한 인간, 그것도 남자. 그게 탐나서였다고는 말 안 하네요?"


"무슨...!"


알파의 얼굴에 연기를 가득 뿜어 말을 다시 끊었다.


"그리고 주인님이라고 부르지 마."


 풀린 긴장을 다시 잡고 알파는 자세를 바꿨다. 지휘관들에게 어떤 소리를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에 부합하는 요소를 몇 가지 발견했는지도 몰랐다.


"뭐, 네 속셈이야 내가 여기 있는 이상 알 바 아냐. 나도 그보다는 진짜 궁금한 걸 묻고 싶거든. 알파, 혹시 몇 번이나 따먹혔어?"


"지금 무슨 소릴..."


"느그 클로버 산업 뒷방 늙은이들한테 얼마나 따먹혔냐고."


"정말, 정말로 불쾌하네요. ...저는, 아무 짓도 당하지 않았어요. 관심조차 받지 못했어요. 아니 애초에, 당신이 어떻게 제 목적이나 과거 소속을 알고 있는 거죠? 전 아직 주인님께도 말씀드리지 않았는데?"


나는 코웃음 치고 알파에게 고개를 가까이 했다.


"내 정보력은 당신의 그 슈퍼컴퓨터로도 못 따라 오거든요. 그나저나, 그걸 믿으라는 소리에요? 넌 네 애미 분신이잖아요. 펙스 늙은이들이 니 애미 닮은 년을 그대로 뒀으리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는데요? 무엇보다 충분히 지식이 주입된 너는 네 애미 이상이잖아요. 널 기반으로 레모네이드들을 만들어 내는 골치 아픈 방식보다 그냥 네 배란일에 널 깔아뭉개는 게 더 나은 거 아니냐구요. 돈도 많았으니 그렇게 낳은 자식 살리기도 쉬웠을 텐데. 인간과 바이오로이드의 자식은 성장에 따라 계속 수술해줘야 한다죠? 한 번에 수십억은 우습다나? 아! 혹시! 숨겨둔 자식이 있다거나!? 그런 건가요!? 알파!?"


"잠깐, 잠깐만요… 머리가…"


"아니 왜 대답을 못해? 처녀가 아닌게 뭐가 문제라고? 따먹힌 적 없다는 개소리하지말고 몇 번 따먹혔는지 똑바로 말하라니까? 네가 개걸레인지 아닌지는 폐하도 알아야 할 것 아니에요. 생긴 건 씨발것이 딱 돈많은 늙은이들 돈 쓸어갈 년처럼 생겼는데? 걸레 맞는 것 같은데?"


"…이, 이 면담은, 주인님께 보고 드리겠어요. 이런 불쾌한 모욕은 정말로..."


"ㅋㅋㅋ 그러시든가. 네가 그렇게 생겼으니까 그렇다고 말한 건데. 아 맞아. 그런 년들은 주로 좀 있어 보이는 술집에서 자주 보였거든? 요상한 화장수랑 향수가 섞인 냄새를 풀풀 풍기더라. 꼭 식충식물처럼 말이지. 너도 그렇네."


"당신이 말하는 술집이란 곳이 어딘지 모르겠군요."


물론 그러시겠지. 높다란 팰리스에서 아무도 만져주지 않는 관엽식물 마냥 지냈을 테니. 뒷골목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길이 없으셨겠지.


"어딘지는 몰라도 돼. 그냥 이거 하나만 알아 둬."


다 피운 담배를 휴대용 재떨이에 비벼 끄고 빙그레 미소 지었다.


"너 냄새 나."


알파는 말을 아꼈다. 내 말에 답할 가치가 없다고 여겼던 것이겠지만 냄새가 난다는 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향수는 대개 땀과 상성이 안 좋다. 그 중에서도 절망적으로 안 좋은 계열의 향수가 있는데, 알파는 그런 향수를 뿌린 듯했다. 


여자에게 향이란 후각으로 빗어낸 우아한 메신저다. 그날의 기분을 대변하는 단순한 메시지를 넘어 온갖 것들을 담아 표현할 수 있다. 키스는 괜찮지만 대화는 싫어요, 혼자 있고 싶지만 술은 같이 마시고 싶어요, 같은 복잡하고 복합적인 메시지를 무언으로 건네는 것도 가능하다. 상대가 그것을 이해할 정도의 섬세한 인간에 한한 이야기지만.


설마 땀이 날 정도로 긴장할 하루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라는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향수로 고민할 시간도 갖지 못했다, 라는 변명도 통하지 않는다. 어찌 됐든 본인이 선택하고 본인이 뿌렸다. 알파는 비서 실격이었다. 끝까지 거짓말을 하질 않나. 이런 게 어떻게 대기업 비서일 수 있는 걸까? 


"음. 말 안 하면 내가 맞춰보지 뭐. 늙은이들 자지가 팔팔할 리 없으니까, 한 다섯 명? 그 즈음으로 잡고 보면 아마... 이백 번은 넘겠다. 물론 이 이백이라는 건 쉰내나는 정액 받아 마신 횟수를 말하는 거야. 네 자궁으로."


"그만… 당신과는 대화하고 싶지 않아요. 앞으로도."


"그럼 당장 내 방에서 나가. 이 냄새나는 년아."


폐하의 비서 자리는 꿈도 꾸지마, 라고 경고하고 알파를 내쫓았다. 


아무도 내 자리를 넘볼 수 없다. 폐하는 내 거다. 비서 자리도 내 거다. 내가 참모다. 내가 비서다.


다음, 낙원. 낙원도 내가 편집했다. 폐하가 낙원에 드시는 일은 없었고, 마키나와 메리는 홀로 찾아온 내게 맞섰다. 결과? 두 년 다 들개들의 밥이 되었다. 대가리는 잘라서 버리고 몸통을 던져줬다. 


리앤, 요정 년들, 써니, 스노우 페더, 메리, 마키나… 그 외 기억 안 나는 년들이 가졌어야 할 폐하와의 이야기를 빼앗았다.


전부.


내가.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폐하께 가까워지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그것 뿐이었으니까.


이 무렵부터 폐하와 재회하면서 할 필요가 없게 된 망상을, 나는 다시 시작했다.


많은 이들의 편견과 다르게 망상에는 실이 없다. 오로지 득만 있다. 특히나 정신 건강 유지에 있어서는 망상 만큼 효과가 좋은 것도 없다. 아니라고 하는 자들은 한 번 뒈졌다가 다시 태어나서 좀 더 제대로 된 인생을 살아보길 바란다. 망상을 거부하거나 제대로 해본 적도 없다는 건, 인생에 있어 망상이 필요할 만큼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 본 적이 없다는 뜻이다. 


무언가를 얻을 수가 없을 때만 망상을 하는게 아니다.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듯, 무언가를 성공한 자기 자신을 그려내 의욕을 고취시키는 경우가 있듯이, 원하고 바라고 얻고자 할 때야말로 망상은 강해진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망상은 의욕을 길러내는 기능도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어쨌든 그런 훌륭한 망상이었을텐데, 지금의 망상은 득이 아닌 실만을 낳았다. 뭐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망상 속 폐하와 현실의 폐하 간의 괴리가 너무나도 분명했으니까. 망상은 한없이 따뜻한 반면, 현실은 한없이 차가웠으니까. 


그것은 더 이상 망상이 아닌 자해였다. 망상을 할수록 머리 속에서 들리는 금속이 깎여나가는 듯한 소리가 강해졌고, 실제로도 무언가가 깎여나가는 듯한 감각이 느껴졌다. 그래도 나는 망상을 멈출 수 없었다. 일단 망상을 시작하고 끝날 때까지에 한해서는 분명 행복한 것이다. 설령 그것이 공허할 뿐인 행복이라도. 


꿈보다도 뛰어나다. 행복한 꿈은 끝나고 나서야 여운 속에서 끝나지 않았기를 바라게 된다면, 망상은 도중에도 끝나지 않기를 바랄 수 있을 정도로 뚜렷하다. 나 자신이 행복함을 실시간으로 느낄 수 있다. 


나는 오늘도 망상한다. 지난 수십 년 간 끝도 없이 해왔기 때문에 내 망상은 격조가 높아졌다. 눈을 감아 이젤을 설치하고, 의식을 현실과 유리 시켜 캔버스를 꺼낸다. 폐하가 보내셨던 시간에서 콘스탄챠를 지우고 나를 덧칠해 나간다. 다리가 꼼지락 거리고 손이 바빠진다. 그런 행복 속에 웅크린 공허를 발견해도 나는 웃음 짓는다.  


가장 어두운 시간이 될 즈음에는 이불이 축축해져서, 해가 뜨면 이불 빨래를 하고 있다. 망상의 대가가 정신적인 부작용과 이불 빨래 뿐이라면, 나는 언제까지고 망상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 * *







또 한 번의 크리스마스가 지나가고 새해가 찾아왔다. 내게 지난 해는 최악의 최악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최악이었다. 나는 나답지 않게 부디 올해는 내가 바라는 것이 하나라도 이뤄지길 바라며 복도를 지나는 중이었다.


"워!"


"꺅!?"


놀란 척하면서 뒤돌아 본 곳엔 폐하가 있었다. 폐하는 너무 해맑지는 않은 얼굴로 나를 유심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하나도 안놀랐으면서."


"맞아요. 이 정도는 해주셔야 놀라죠."


나는 폐하께 파고들어 허리에 양손을 감고 깍지를 꼭 쥐어서 빠져나가지 못하게 조였다.


폐하가 말했다.


"예지 해볼까. 오늘의 아르망은 응석을 부릴 것 같아."


"어제의 아르망도, 일주일 전의 아르망도, 한 달 전의 아르망도 모르시면서요?"


"아르망은 뭐든 잘하잖아~ 내가 따로 안찾아도 될 만큼 말이야. 내가 한 번도 걱정 안해 본 아가씨라면 아르망 뿐일 거야."


그렇구나. 너무 우수하면 항상 찾거나 그냥 두거나 둘 중 하나인데, 폐하는 후자셨구나. 나는 실수했다고 생각했다. 폐하의 눈에 들기 위한 우수함이 도리어 폐하와 거리를 벌리게 만들었다니. 그럼 오늘부터는 잔뜩 실수하자고 정했다.


방 두개 건너면 바로 볼 수 있는데도 한 달도 더 넘게 마주치지 못한 우리는, 사령관실에서 오붓한 시간을 보냈다. 내가 간절히 원할 땐 뵙는 것 조차 어려웠는데, 무념하게 있으니까 찾아오고. 의식해서 한 행동이라면 폐하는 정말로 밀당의 고수인 게 아닐까.


딱히 몰라도 좋을 이야기와 내 근황, 노래방에 퍼펙트 스코어 모드가 생긴 것, 대부분의 곡이 내가 1등이란 것 등으로 슬슬 혀가 풀리자 폐하가 말했다.


"콘스탄챠랑 싸웠어."


"에? 정말요? 왜요?"


"응." 폐하가 시선을 내 복부 언저리에 두었다. "화낸 적은 없는데, 콘스탄챠가 좀처럼 화를 안풀어."


"아. 그래서 하우스키퍼 님이 저기압이었던 거네요."


"그, 그랬어? 저기압이야?"


"네. 앨리스가 말도 못 걸 만큼요."


"으… 왜 그러는 건지 감이 안 잡히네."


"말씀 안 해주셨어요?"


"내가 뭘 잘못 했는지 알아서 생각해보라고 했어. 난 진짜 모르겠는데, 뭐가 잘못됐던 걸까."


뭐야. 별 거 아닌 이야기잖아. 시간이 좀 더 지나서 내가 고치겠다고 진심으로 말하면 알아서 풀릴 문제였다. 콘스탄챠도 폐하의 어느 특정한 부분에 화를 내는 게 아닐 것이다. 그냥 일상적인 것들이 쌓이고 쌓여서 언젠가 일어날 일이었을 뿐.


이런 시덥잖은 것 때문에 날 부른 거였나. 부부 문제의 상담역으로? 그래서 내 이야기에 적당히 맞장구 쳐주면서 이야기할 타이밍을 재고 있었던 거구나.


폐하께는 생각 난 그대로 말씀드렸다. 대단한 문제는 아닐 것이니 시간을 두고 콘스탄챠 입장에서 생각해 보라고. 애당초 부부 문제 같은 건 오르카의 그 누구도 제대로 답해줄 수 없다. 부부였던 적이 있어야지.


나는 홀로 생각에 빠진 폐하를 두고 갑판으로 향했다.


찬 공기로 몸을 환기 시키고 담배를 물려는데, 대화소리가 들려왔다.


"우오옷! 페더 부관님! 대박임다! 완전 파워풀하지 말임다!"


이건 브라우니고,


"누가? 사령관님? 하우스키퍼 님?"


이건 이프리트.


"양쪽 다 파워풀 함다…!"


다시 브라우니.


"연말 컬렉션 최고의 문제작이야. 으흐흥… 참모님 눈을 피한 보람이 있었어…!"


얘는 탈론 페더.


"그, 지금은 경계 근무 중이니 부관님. 따로 즐기실 거면 좀 나중에…"


성실한 이년은 레프리콘.


"또 아닌 척 하네~ 이런 기회 얼마나 있다고? 볼 수 있을 때 봐두는 게 좋잖아?"


그 무서운 꼬맹이 참모 어쩌고 덧붙인 이년은 워울프.


기계음 섞인 미약한 교성이 멎고 들린 것은 브라우니.


"아, 그 참모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말임다. 진짜 너무 짜증남다…"


"아… 동감… 어떻게 괴롭힐까만 궁리하는 거 아니냐? 진짜 적당히 해야지."


이프리트.


"진짜 그럴지도 모르지 말임다. 아니, 보십쇼. 도촬 금지한 건 그렇다 치고 말임다."


브라우니.


"이게 다 즐겨놓고! 야!"


페더.


"아하하! 쏴리임다! 어쨌든 참모는 진짜 장난 아님다. 우리 대장님도 아무 말 안하는데 온갖 걸 다 통제하려 들잖습니까. 엊그제였나. 그 사라카엘 씨도 아주 쥐잡듯 잡았다지 말임다! 둘 다 말이 안통해서 한참을 싸웠다는데, 결국엔 참모가 이겨먹었다나 뭐라나."


"브라우니. 그만 하세요.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레프리콘.


"아니, 위아래로 안에 천 덧대 입지 않았다고 폭언을 쏟아낸다는 게, 그게 말임까? 교리라잖습니까 교리! 사령관 님도 아무 말 없는데 지가 뭐라고? 사령관 님이 여태 모른다는 것도 진짜 이해가 안 됨다. 확 찔러버릴까. 악마 같은 계집애. 실키 상병 님도 건드렸다는 것 같슴다! 하복이 문제였다나 봅니다."


브라우니.


"그것 뿐이면 말도 안 해. 저번에 내가 보물 찾으러 갔을 사이엔 폭력을 사용했다는 소문도 있어. 그 패션 디자이너 언니였나? 옷도 만들어 주고 착한 언니인데 뭐가 문제란 거야?"


워울프.


"촬영 대상이 아니라서 관심은 없지만, 듣자니 여러 대장님들도 예외는 아닌가 봐요. 우리 멋쟁이 칸 대장님은 깨진 적이 없어서 다행이죠."


탈론페더.


"그러고 보니 우리 마리 대장님은 왜 참모한테 쩔쩔 매는 검까? 약점이라도 잡히셨나? 참모가 위라고 해도 우리 대장님 저항군 짬이 있는데 왜 항상 찬밥 신세를 보시느냔 말임다. 진짜 상도도 없지 말임다."


브라우니.


"그만… 진짜 그만 하세요. 이거 지금 상관 모욕죄에요."


레프리콘.


"아~ 그렇지 말임다. 모욕이지 말임다~ 이왕 내뱉어 버린 거 그냥 질러 버리지 말임다~ 에이 재수없는 년! 낮말은 새도 듣는데 어디서 뭐하냐! 콱 그냥 상어밥이나 돼라!"


"푸흡…"


"난 브라우니가 스틸라인 최고의 개체라고 늘 생각했지. 역시 지를 땐 지를 줄 알아."


더 질러.

짜증 나는 년.

재수 없어.

없어졌으면 좋겠어.







너야말로 폐하를 따먹고 싶어하는 주제에.

제일 추잡한 주제에.

씨발년.

갈보 같은 년.

돼지 같은 년.

대가리 속에 폐하 외엔 아무것도 없는 년.


그런다고 네가 폐하를 가질 수 있을 것 같아?


포기해.


"너희. 재밌는 이야기들을 하는구나?"






* * *  






"으… 으아…"


"허리 내려가잖아요. 똑바로 세우세요."


"지, 진짜 죽을 것 같지 말임다…"


엎드려있는 브라우니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재수 없는 년이 마음 써서 깍지 끼는 걸로 봐준 건데. 싫어요? 대가리로 바꿀까?"


"아, 아님다…"


"옆에 항상 뛰어난 고참이 함께하는데 정말이지 나아지는 게 없네요. 레프리콘 상병 보고 배우겠단 생각도 안 해봤죠? 아, 레프리콘. 당신은 일어나서 1분 쉬고 대가리 박아요. 나머진 그대로 깍지 끼고 계세요."


"…알겠습니다."


"읏…"


"왜? 레프리콘한테 미안해요? 뭐 어때요? 고참 말 좆으로도 안들은 거 한 두 번도 아니잖아요. 차라리 내 몫까지 대신 박아주십쇼, 하고 부탁해보는 게 어때요? 받아줄게."


"아님다…"


"저기, 참모님…"


"닥쳐 이 도촬이나 해대는 씨발 불결한 년아. 뭐, 넌 그래봬도 부관이니까 이런 건 부당하다고 말하려 했어? 옆에 워울프는 묵묵히 있잖아. 아, 아니다. 빡쳐서 그런 건가 ㅋㅋ? 어쨌든 잠자코 엎드려 있어."


"으아… 손보다 허리가 먼저 나갈 것 같아…"


"그래요 이프리트? 상관없잖아요. 수복하면 되는데. 그냥 어디 한군데 빨리 나가버리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네요? 아아, 그래. 이프리트. 당신도 기상. 일어나서 1분 쉬고 레프리콘처럼 대가리 박으세요. 근데, 어머? 레프리콘 참 멋지네. 깍지든 대가리든 다 잘하는 구나?"


"…윽."


"ㅋㅋ 좋아요. 재수없고 짜증나는 참모님이 한 번 더 마음 쓸게요. 브라우니. 기상."


"흐아~ 감사함다…"


"감사는요. 당신은 저기 난간에 기대서 편히 쉬고 있어요. 혹시 흡연하면 내 거 가져다가 피워도 되고. 나머지 얼차려 끝날 때까지. 알겠죠?"


"예...?"


"쉬라고 이 대가리 장식으로 달고 다니는 년아. 나머진 한 시간 동안 저러고 있을 거니까. 참고로 자세 무너지면 한 시간씩 추가니까 마음 아프거든 속으로 응원해주고."


"저, 저 그냥 다시 엎드리겠슴다."


"아니, 넌 하지 마. 쉬어."


"하겠슴다… 하겠슴다…"


"쉬라고."


"제발… 참모님… 제가 잘못했슴다…"


"쉬기 싫은가 보네. 알았어. 그럼, 너 내려가서 너희 대장 불러 와. 없으면 연대장 불러오고."


"그, 그것만은 안됨다! 제발 살려주십쇼!"


"아니 씨발 뭐 다 싫대? 너 계속 그러면 얘들 하루 종일 이래야 돼. 빨리 가서 불러오라니까?"


"흑… 으흑…"


질질 짜면서 함내로 들어간 브라우니는 10분 뒤에 나타났다. 내가 지시한 마리나 레드후드가 아닌, 다른 년들을 끌고.


"이, 이게 무슨 상황인지…"


노움에 실키. 오히려 좋다. 마리나 레드후드는 강단이 있는 년들이라 지시하면 곧잘 해버릴 가능성이 크다. 괴롭히기엔 이쪽이 낫다.


"노움. 저기 출입구 옆에 도구함에서 대걸레 하나 가져오세요."


"에, 네? 대걸레요?"


"걸레 분리해서 자루만 가져와요."


눈이 벌어진 노움은 5초 정도 상황파악을 하다가, 허둥지둥 시키는대로 하고서 다시 나타났다.


"쳐."


"무, 뭐를 치시란 건지..."


"멍청한 척하지 말고. 얘 치라고 얘."


"이프리트…병장을요?"


"그래 씨발아! 이 땅딸막한 년한테서 비명 터져 나오게 만들라고!"


"으, 어, 어떻게 그런..."


"너 내가 얘 치면 얘 죽어. 자비를 베푸는 건데 이해가 안 돼? 아니면, 실키. 네가 할래?"


"참모님 참모님… 저희가 잘못했어요… 화 푸세요…"


"어머. 왜 운데? 한 번 깨져 본 년이라 재수 없는 참모년이 얼마나 무서운지 아는 건가? 야. 잔말 말고 빨리 쳐."


"죄송해요... 제발..."


"빨리 치라고! 빨리! 이 씨발것들아!"








* * *







"안드바리. 보급품 목록 중에 누락된 게 상당한데, 이게 다 뭐죠? 똑바로 기재된 것들도 숫자가 안 맞아요. 제대로 관리하고 있는 거에요?"


"아 그게, 참모님… 실은…"


"실은, 뭐?"


"아… 으… 그게 실은…"


"왜 말을 못해요? 뭐 잘못 했어요?"


"힉… 아뇨… 잘못, 잘못이 아닌데, 저는 아닌, 아, 그게… 다른 잘못… 말하면 안되는…"


"내가 분명 연초에 점검할 거라고 했는데, 준비도 안 한 것 같네요?"


"아으… 아… 말씀드릴게요… 잠시만…"


"네 조막만한 대가리 굴려봐야 뭐 얼마나 대단한 핑곗거리가 나온다고? 뭐, 네가 다 처먹었어?"


"아뇨! 아뇨아뇨! 아니에요!"


"그럼, 그 쥐새끼랑 흡혈귀년이 처먹었나?"


"아! 그, 그게! 다는 아니고! 아, 제, 제가 줬어요!"


"쥐새끼랑 흡혈귀한테? 네가? 무슨 권한으로?"


"그, 저, 일단은 제가 관리하니까... 한 두개는 괜찮, 괜찮을 것 같아서..."


"한 두개가 아니잖아."


"…흑. 흐아아앙!"


"…아니. 진짜 이해 안 되는게 하나 있는데, 왜 불리해지면 크든 작든 다 쳐우는 거야?"


"으아아앙! 대장님!"


"처음부터 쥐새끼랑 흡혈귀가 처먹었다고 이실직고하면 될 일이었잖아! 제 일도 못하는 쓸모없는 년아! 그런 주제에 동료 지켜보겠다고 거짓말도 안되는 소릴 지껄였어? 병신마냥 어버버대면서!? 어!? 그러면서 에라 모르겠다 하고 사령관님한테 안겨서 둥기둥기, 애가 된 기분을 만끽하셨어!? 컵 떡볶이 참 맛있었겠네 씨발년아!?"


"야."


"어라?"


"너, 지금. 애한테. 무슨 짓을 하는 거니?"


"어머~ 안드바리~ 너네 대장님 오셨다~ 부르니까 오네? 꼭 슈퍼맨 같다. 그치?"


"안드바리한테서 떨어져."


"뭐에요? 왜 총을 겨눠요?"


"떨어지라고 했어. 볼 그만 꼬집고 손 놔."


"왜요~ 귀엽잖아요~ 아 그리고, 누가 애라는 거에요? 애 같은 모습을 한 바이오로이드지. 애가 아니라구요."


"넌 진짜… 됐어. 넌 역시 좀 이상해. …애들한텐 내가 말할 테니까 그만 넘어가 줘. 아니면…"


"아니면, 뭐? 쏘게?"


"필요하다면. 넌 위험해. 적어도 안드바리한테는. 못된 짓도 골라가면서 해야지, 애한테…"


"하여간 후까시는 존나게 잡으시네요. 쏘지도 못할 거면서. 그리고 있죠. 지금 이 창고, 아무도 없잖아요."


"그게 어때서? 보는 눈이 없으니까 다행이긴 하네."


"너… 지금 좀 위험한 거 같지 않아? 그 총 쏘면 어떻게 될지 알고 싶은 건 아니지?"


"…이렇게 된 김에 말해둘게. 너, 수상한 구석이 한 두 가지가 아니야. 너 도대체 뭐야? 비전투 개체가 전투 개체의 전투력을 월등히 상회하질않나, 모든 작전을 마치 앞으로 벌어질 일을 전부 알고 있었다는 듯이 수립하질않나. 동시에 공무까지. 말이 안 돼."


"의심하고 있다, 그런 소린 가요?"


"너 같으면, 의심이 안 들겠어?"


"아하. 그렇죠. 근데, 어디를 어떻게 의심하고 있는데요?"


"그건…"


"전투력이 뛰어나? 앞일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알만큼 아시는 분이. 난 예지가 가능하잖아요. 너도 나처럼 뛰어나면 이렇게 대단한 참모가 되실 수 있어요."


"아냐, 아냐. 역시 이상해. 넌 뭔가 잘못됐어."


"ㅋㅋㅋ 그냥 질투 나는 거겠죠. 그러고 보니 저저번 크리스마스에 거의 떠밀리듯이 폐하의 침실에서 대기한 적이 있다면서요? 보기 좋게 쫓겨났다나? 이런이런~ 잘못 된 건 당신 같은데요? 철혈의 레오나씨?"







* * *







시간은 의미도 없이 흐른다. 나는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폐하와 콘스탄챠는 지극히 부부스러운 시간과 경험을 통해 그 관계를 공고히 해갔고, 정신이 무너져가던 년들은 폐하를 구심점으로 내게서 회복해갔다. 발정 난 고양이들처럼 싸우던 년들도 진정이 되어, 본인들이 왜 그렇게 싸우게 됐는가를 짚어본 듯 했다. 그래서 화살의 방향을 내게로 돌렸다. 재난이었다. 감히 직접적으로 덤벼온 것은 아니지만 그년들의 눈에는 명확한 적의가 느껴졌다. 철충들을 상대할 때도 저러진 않는데, 내가 그렇게도 싫은 것 같았다.


재난은 겹쳐진다. 때는 돌고 돈 봄이 다시 오르카에 자리를 잡았을 무렵이었다. 이때의 나는 최후의 수단을 강구한 끝에, 결국 모든 것을 털어놓기로 했다. 나는 바이오로이드가 나타나기도 전에 살아온, 150년이나 된 개체이며, 당신과는 처음 만난 게 아니었다는 모든 사실을. 그것을 에두르면서도 모두 말해줄 수 있는, 내가 썼던 글을 폐하께 드리기로 했다. 그것으로 폐하와 콘스탄챠의 틈에 내가 들어갈 수 있는 작은 균열이라도 야기할 수 있으리라 믿고.


돌이켜 보면 참 못할 짓을 했다고 생각은 한다. 그런데 어쩌라고? 누군가 내가 한 짓을 알았다 한들, 내가 죄책감을 느끼길 바라진 않았으면 한다. 죄책감 따위 전혀 없다. 저항군에 느끼는 소속감 따위도 없다. 지난 시간 동안 내가 그린 것은 폐하이지, 이딴 세균들은 알 바 아니었다. 


그보다도, 날개가 있는데 좀 날아보면 어떤가? 송곳니가 있는데 좀 물어뜯어보면 어떤가? 누가 봐도 역겨운 년들이지않나. 물건이지않나. 죽인다는 말이 통용되지 않는 것들인 것이다. 부수고 싶게 생겼길래 부쉈다. 그 뿐이다.


게다가 저항군이다. 군. 돌아가는 꼴은 전혀 군대같지 않아도 명색이 군대인 것이다. 군대를 좀 군대처럼 만드는 것도 겸한 건데 문제가 되나? 실제로 150년 전 오르카의 전투력을 현 오르카의 전투력이 상회한다. 적법한 권한을 행사한 것만으로도, 물건을 물건 답게 다룬 것만으로도 그런 결과들이 나왔다. 폐하가 따로 지휘하지 않았어도 될 정도로. 그러니까 나는 감사 받아야 함이 옳다.


갑판에서 담배를 태우고 마음의 준비를 했다. 그리고 몸을 돌려 폐하께 향하려는데, 돌린 순간 강한 충격이 느껴졌다.


내게 부딪혀 온 게 누구인가는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힘이 빠진 팔에서 빠져나간 종이다발이었다. 내 150년, 그것을 담던 수십 년의 시간이 미친 듯이 공중에서 나풀거리며 바다 위로 떨어졌다.


다시 의식이 또렷해 졌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을 마무리 지은 뒤였다. 나와 부딪힌 것은 린트블룸이었고 린트블룸은 내게 죽기 직전까지 얻어맞으면서 사정했던 게 기억났다. 일부러 그런 게 아니다, 좀 격하게 뛰어놀다 보니 그렇게 됐다, 미안하다, 그만 때려라, 살려달라, 죽는다, 죽어, 진짜 죽어, 진짜 죽는다고…


내가 그 글을 주변 시선도 의식하지않고 린트블룸을 쳐죽여버릴 정도로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전달 때문이었다. 글이 사라지면 입으로 전달하면 되는 거 아니냐고 할 수 있을 텐데, 그런 문제가 아니다. 눈을 통해 들어온 세상의 이미지를 입까지 내려 뜻이 통하게 만든다는 건, 아주 어려운 일이다. 


가령, 폐하와 마주보고 있는 거리가 1미터도 안된다 해도, 그 거리를 지날 때까지 언어로 치환된 이미지에 얼마나 큰 손상이 갈지는 누구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내 150년, 내 마음 속 풍경을 아무 손상없이 전달하기 위한 매개로는 활자가 재격이었다. 그게 파괴당했다. 그게 사라졌다. 내가 간직해온 내 시간들이 이 씨발년의 쾌활함에 소멸당했던 것이다.


글이 재격인 이유는 또 있다. 직접적인 대화로는 150년을 전달하기엔 시간적인 문제도 있지만, 내가 있는 그대로를 전달 할 수 있는가도 문제였다. 폐하께서 온전히 받아들이실 수 있는지도 문제였다. 내 이야기는 끔찍하기 그지 없고, 그것을 내 목소리를 통해 듣게 돼버리면 폐하는 어떤 심각한 의무감에 휩싸여 도중에 나를 끌어안을지도 모른다. 이후엔 나를 배려해 무난한 위로의 말들을 고민해서 건네게 되겠지. 그렇게 되면 대화는 거기서 끝. 나는 나대로 이걸로 된 게 아닐까라며 자포자기 해버릴 것이다. 구체적인 해결법이 없는 내 이야기는 절반도 전달되지 못하고 사라져버린다. 고작 작은 위로나 받자고 폐하와 내 시간을 써버린 게 된다.


그래서 글이었던 건데.


"씨발년이… 그러고 보니 이 씨발년아. 너였지? 내 화장품에 손댄 거. 빌려 달래서 한 번 빌려줬더니, 나중에 허락도 없이 내 방에서 가져갔지? 아주 엉망이 돼있더라? 쉐도우 팔레트는 색깔이 다 섞여버렸고, 립밤이랑 틴트도 섞여있질않나, 쉐딩이랑 뷰러는 왜 그 꼴이 된 건데? 야. 그게 네 거야? 상관이 빌려준 상관의 물건 아니야? 한 번 빌려 줬던 거니까 가져가서 써봐도 되겠다고 확대 해석 하셨어? 씨발년아. 너 그게 얼마 짜리였는 줄 알아? 그게 생로랑 뷰티 빈티지 에디션이란 이름으로 팔린 거거든? 종류 별로 다 사면 백 만원은 우스운 가격이야. 너 같은 바이오로이드는 가질 수도 없었고, 살 돈을 갖는 것도 불가능했어. 알지? 바이오로이드는 사유 재산을 가질 수 없던 거. 그건 됐고, 너같이 덜떨어지고 질도 떨어지는 년이 돈을 벌 자리부터가 없었어. 끽해야 씨발 그 싸구려 몸뚱이 팔아서 버는 게 다였지 아마? 다 죽어가는 년들 모아둔 사창가에서 삼 만원 내지 오 만원 주면 사 먹을 수 있던 년들. 넌 멸망 전이었으면 딱 그런 년이야. 이 시대를 잘 타고 난 년아. 넌 폐하만 아니었으면 진즉에 내 손에 죽었어! 놔, 놔! 누구 몸에 손대는 거야 이 역겨운 새끼들아!"








* * *








"아시는군요. 이거."


그렇게 말하며 손에 든 것을 내 손에 쥐여준 년은 다프네였다. 린트블룸을 수복실로 직행시킨 그날, 다프네는 내게 용무가 있다며 밤에 찾아왔다. 그것도 아자젤, 닥터와 함께 말이다.


"내가 아는지 모르는지 어떻게 아는데? 난 아무 말도 안했어."


"보신 순간에 동공이 확장되는 걸 봤어요. 생각이란 건 표정에만 드러나는 게 아니거든요."


"…너 눈이 그렇게 좋아? 이 작은 동공이 움직이는 짧은 순간을 봤다고?"


"거리는 가까우니까…"


다프네는 내 손을 포근하게 잡고 마치 기도하듯 모았다.


"주제 넘는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르지만, 필요… 하실 것 같아서요."


다프네가 건넨 건 클로자핀이었다. 조현병에 쓰이는 약. 


그러니까, 다프네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너는 정신병이 의심된다. 그런 너는 함내에서 어떤 피해를 끼칠지도 모르고, 예상하기도 어렵다. 부디 이걸 투약하고 조금이나마 나아져라. 


내가 조현병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알고 있다. 클로자핀 같은 걸 먹으면 하루를 몽롱함 속에서 통째로 날려버린다. 이 이상 최악이 될 순 없는 상황에서 더 최악으로 치닫게 된다. 폐하와 멀어져 버린다. 


이런 영악한 년. 전부 노림수다.


"내가 정신병 같아? 뭘 보고? 너 나랑 따로 이야기라도 해본 적 있어? 없잖아."


"뭘 보고… 라고 말씀하시면, 처음부터라고 대답해 드리면 될까요."


"뭐?"


"그 외에 이런저런 목격담들. 예를 들어 오밤 중에 참모실에서 괴성이 들린다던가, 누군가와 대화하는 듯한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게 들린다던가, 가끔 참모님은 완전 다른 사람인 것 같다던가… 그리고 멀리서 제가 본 것들. 판단할 재료는 많…네요."


"아하. 그래서 우리 예쁜이 선의님은 아르망 작전참모가 정신병이 있다고 진단하셨다? 너 스토커야? 네 언니 닮아 그런 기질이 근질근질해서 못 견디겠어? 씨발년아. 어디 감히 누구를 두고 정신병이란 거야. 내가 정신병이면 너희가 무사했을 것 같아? 폐하가 무사했을 것 같냐고."


"참모 언니! 나쁜 말은 안 돼!"


"넌 또 뭐야?"


"난 닥터지. 안녕 참모 언니. 우리 이렇게 자리내서 대화하는 건 처음이지?"


닥터는 적당히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띄우고 말을 이었다.


"처음부터 미안하지만, 언니한테 권하고 싶은 게 하나 있어. 뇌 스캔을 받아보는 거. 어때? 이렇게 말하면 기분 나쁠지도 모르지만, 그 기분이 나쁜 만큼 언니 상태도 나빠보이는 게 사실이거든."


내가 말했다.


"다른 사실도 알려줄까? 오르카에 뇌를 심층 스캔 할 수 있는 장비는 없어. 단층 스캔으론 정신 질환의 원인은 잡아낼 수 없는 거 알고 있지?"


"그 정도로 알고 있는 거 보면 따로 알아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다프네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를 구성하는 걸 변화시키는 건 무엇일까요."


인정하기 싫지만 안정감을 선사하는 목소리였다. 마치, 이런 경험이 한 번이 아닌 듯한.


"뭐야? 이번엔 철학이야?"


"때때로 우리는, 누군가는 너무나 많은 걸 경험해버려서 결손을 겪게 돼요. 마음 한구석이 텅 비어버린다거나, 공허하다고 말하는 것과는 좀 다르죠. 말 그대로 결손. 내가 나이기 위해 마땅히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 손상되거나 사라져버리는 거에요. 나를, 나라고 부를 수가 없게 되는 거죠. 제 눈에 참모님은, 그런 결손을 품고 계신 것 같아요. 많은 이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게, 그 결손된 부분은 되찾을 수 없어요. 안타깝죠. 그래서 그 결손을 대체할 만한 걸 신중하게 골라야 해요. 이전의 자신을… 조금이라도 유지하려면."


"…하고 싶은 말이 뭐야. 그 대체할 만한 걸 잘못 고른 것 같다 이거야?"


"말해주세요."


"뭘?"


"참모님의 이야기. 참모님은, 멸망 전 개체시죠?"


"그게 왜? 넌 분명 이렇게 문제 많은 년이 될 경험을 했을 것이다. 그걸 치료해주겠다. 그래서 말해달라는 거니?"


"치료…라고 할만한 건 아니에요. 다만 제가 보기에, 참모님은 무언가에 강하게 묶여있으신 것 같아요. 그래서 나아가지 못하고 계신 것 같고요. 참모님. 저항감이 드시겠지만 털어놓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해질 수 있어요."


"꺼져. 너한테 할 말 없어. 오밤 중에 온다니까 뭔 소리를 하는가 싶었는데, 심리상담사를 자처하는 꽃집 아가씨였어?"


"심리상담이랄 것도 아니에요… 그런 경험이 있을 뿐…"


여기까지 오니까 견적이 나왔다. 이런 씨발년이. 이년은 날 위해 온 게 아니라 공격하러 온 것이었다.


"고작 경험이 있어서? 이거 웃긴 년이네 ㅋㅋ 야. 내가 너한테 다 털어놓은들, 네가 이해할 수 있을까? 공감할 수는 있을까? 아, 아냐. 이해와 공감의 차이를 알긴 할까? 하나 물어보겠는데, 나도 이해 못하는 일을 네가 공감하는 게 가능할까?"


"…"


"그리고 돌이켜 보니까 말이지. 바이오로이드에겐 허락되지 않은 것들 중에선 의학과 심리학도 있었어. 왜인 줄 알아? 멸망 전을 기준으로 현대적인 지배력을 가지게 해주는 것들이었거든. 한 인간의 신체적, 정신적 생사가 내 손에. 의학자들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거 아니겠어? 평등한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도 그런 요소 하나가 불균형을 야기하는데, 바이오로이드는 어떨까? 당연히 의학과 관련된 분야에는 발도 못들이게 했겠지? 어떤 분야든 전부 바이오로이드로 대체 되었었는데 말이야."


"그러니까 참모님은, 지금 제가 참모님 머리 위로 올라가려 한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아니야?"


"그럴 리가요… 전 그냥 많은 분들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드렸을 뿐이고, 정신 의학에 관한 전문 지식은 없어요. 있어도 어깨 너머로 배운 것들 뿐이죠. 참모님 말씀대로 허락되지않은 분야였으니까."


"아. 참고로 나는 소속이 소속이다보니 외과지식이든 뭐든 배워도 문제가 안됐어."


닥터가 그렇게 말했다.


"참모님."


다프네가 숨을 고르고 뭔가 결심한 듯 다시 말문을 열었다.


"참모님은 뭔가 용서할 수 없으신 게 있는 것 같아요. 아주 감정적으로 공격적이면서도, 목적 지향적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 목적이 뭔지는 모르지만, 언행이 분명하신 분들이 그런 경우가 많았어요. …혹시."


"혹시. 뭐."


"자기 자신을 용서하실 순 없는 게 아니신가 해서요."


나는 이해할 수 없는 게 한 가지 있다. 방금 다프네가 지껄인 '자기 자신을 용서한다.'라는 말이다. 


스스로를 용서한다, 도대체 어떻게 하는 걸까? 보통 그런 말이 나오는 경우는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허심탄회하게 모두 털어놓는 상황이 그려지는데, 그런다고 용서가 되는 걸까? 그게 자신을 용서하는 방법일까? 나는 정말로 모르겠다.


"제발… 닥쳐. 귀찮게 하지말고 꺼져버려. 정신병 환자 꼭지 돌면 더 귀찮은 일 생길지도 모르잖아."


"…그런가 보네요. 자기 자신인지 어떤지 확실히는 몰라도, 참모님은 뭔가를 용서할 수 없는 거에요. 참고로 덧붙여드리면, 참모님 같은 타입은 자기 자신을 용서하는 게 어려운 타입이죠. 참모님. 충격에서 벗어나는데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이 변한 걸 인정하는 거에요. 참모님께 변화란, 역시 오르카겠죠."


"제대로 된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내는 의견이신가요? 선의님?"


"경험적 지식을 바탕으로 한 의견입니다."


방에서 나가줄 생각을 안하는 것 같기에 내가 피해주기로 했다. 

그래서 일어나려는데, 이번엔 아자젤이 말했다.


"추기경. 아니, 참모. 당신이 우리를 믿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이곳에 있는 우리 말고도 다른 모두도. 아마 당신은 인… 사령관 외엔 아무도 믿지 않겠죠. 사령관을 믿는 건지도 의문이지만… 참모. 그래서는 망가집니다. 누가 됐든 무언가 지탱이 될 만한 것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종교가 그 역할을 해줄 수 있습니다. 강요는 않겠습니다. 바란다면 빛께 다다르기 위한 시간을 마련해 드리겠어요."


"넌 나한테 그런 꼴을 당해 놓고 날 도와주겠단 소리가 나오니?"


"그래서입니다. 참모. 당신은 위태로워 보여요. 부디 돕게 해주세요."


"그래. 참모 언니. 우린 더 나아질 수 있잖아. 그러니까, 응? 나도 도와줄게. 한 번 고민해 줘."


무슨 영화 촬영이라도 하는 것 같다고 나는 생각했다. 아아, 이런 건 참을 수 없다. 저마다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누군가를 감화시키려드는 상황은 내가 정말로 싫어하는 전개였다. 그래서 나는 그런 류의 영화만 쏙 빼놓고 봤었더랬다.


내가 말했다.


"과거, 수많은 종교들의 도덕률은 어떤 인간이든 악하다고 생각하던 것들을 원죄로 여겼어요. 코헤이도 그렇겠죠? 예를 들면 이기심, 시기, 질투, 색욕, 나태 등등… 혹시, 알아요? 누가 어떤 기준으로 그런 것들을 원죄로 지정한 건지? 무슨 권리로 그렇게 정한 건지? 그게 왜 죄라고?"


"마땅히 악하기 때문이지 않을까?"


"아니? 애당초 도덕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가리기 위해서야."


"어떻게 해야 그런 해석이 나오는 건가요…"


"해석하고 말고 할 게 있나. 사실이잖아."


"…당신은 그저 아픈 것일 뿐이에요."


"그 아픈 년이 지금 돌아버릴 것 같으니까 당장 나가라고! 이 개 씨발년들아!"








* * *







봄이 오고, 나는 전에 폐하께서 약속하신 것을 폐하께 요청했다. 원하는 걸 한 번 들어주겠다는 약속. 폐하는 내 데이트 신청에 내색은 안했지만 꼭 지금이어야 하냐는 표정을 순간적으로 내비쳤다. 나는 그걸 봤음에도 강행했다. 그날의 날씨는 데이트를 하지 않으면 훗날 분명히 후회할 만큼 좋았기 때문이다. 


이건 표면적인 이유고, 슬슬 내가 미쳐버릴 것 같았다는 게 진짜 이유였다.


데이트 당일. 나는 일출 전부터 일어나 외출을 준비했다. 불침번 인원들이 인사하는 것도 알지 못하고 샤워실에 들른 다음, 쿨톤을 기조로 메이크업에 열중했다. 룩으로는 단아한 흑백 프릴 원피스, 굽 낮은 흑색 로퍼, 흰 양말, 머리는 포니테일로 내려 묶었다.


비비, 선크림, 파우더, 쉐도우, 아이라인, 마스카라, 컨실러, 쉐딩, 하이라이터, 블러셔, 뷰러, 립밤…… 글리터는 너무 어려보일 것 같아. 매트로 할까. 아이라인 빗나간 거 같은데. 턱이랑 볼 다시 깎아야겠네. 린트블룸이 작살 내놓은 세트들을 최대한 살려내서 풀 메이크업을 고치고 지우고를 반복했다. 최대한 시간을 살려도 한 번 하는데 한시간이 가까이 걸려서, 네 번 즈음 반복했을 땐 이미 약속 시간이었다. 우리는 갑판에서 만나 안전이 확보된 곳에서 내려 내륙으로 향했다. 폐하는 좋게 말해도 신경 써서 꾸민 모습은 아니었다. 일어나자마자 부랴부랴 씻고 로션만 바른 티가 확 났다. 


그래도 괜찮았다. 이런 기회는 좀처럼 없으니까.


멸망한 봄의 거리는 황홀경 그 자체였다. 정면을 보고 걸어도 햇살에 눈이 부시지 않았고, 도시의 건물 사이사이를 귀여운 민들레 홑씨들이 유영하고 있었다. 잔해를 둥지삼아 피어난 들꽃들과 향이 강한 녹색들은 멸망과 별 관계가 없어보였다. 시간만 허락된다면 언제까지고 걷고 싶은 거리였다.


오후가 되어 배가 출출해져서 자리를 잡았다. 주저앉아있는 포트리스의 잔해였다. 나는 거기에 돗자리를 깔고 자기 전에 만들었던 도시락을 꺼냈다. 딸기 파이, 샌드위치, 크로아상, 즉석에서 만들 수 있게 준비한 올랑데즈 소스를 곁들인 에그 베네딕트까지. 폐하는 말없이, 남김없이 드셔 주셨다.


식후 버릇으로 담배를 찾았지만 오늘은 데이트였다. 담배는 준비물에 없었다. 담배보다 더 뛰어난 것이 곁에 있었기에 아쉬움도 없었다. 나는 폐하가 다른 곳을 보시는 틈에 차를 꺼내고 폐하를 조수석에 태웠다. 이번엔 차가 갑자기 어디서 났냐고 묻지 않으셨다.


산길에 난 도로를 따라 달리다가 벚꽃을 위시한 온갖 꽃들이 형형색색으로 펑펑 우는 장소를 발견했다. 우리는 말을 아끼고 차에서 내려 그 총천연색 눈물들을 감상했다. 중간에 몰래 뒤따라온 년들을 발견할 수 있었지만 이해해 줄 수 있었다. 모습만 드러내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폐하의 안전이 우선이니까.


마지막으로 바다였다. 오르카가 정박한 곳. 우리는 말없이 해변을 산책했다.


가만 보면 그날 하루, 대화다운 대화를 하지 않았다. 기본은 침묵, 간혹 내가 대화를 시도하면 폐하는 구색맞추기식 맞장구 밖에 치지 않았다. 폐하가 먼저 말을 꺼내는 일은 없었다. 그게 반복되다보니 나는 어떤 한마디를 꺼냄에 있어서도, 이런 주제와 이런 대화는 어떠냐는 식의 승인을 요구하는 것에 가깝게 말을 걸고 있었다.


오르카로 돌아가는 시간이 거의 다 됐을 무렵, 폐하가 먼저 말을 꺼냈다. 그날 하루가 그랬기에 어떤 기대도 안했지만, 나는 어떤 기대도 하지 않겠다고 의식함과 동시에 기대해버리고 말았다. 바보 같이. 


오늘 아르망 예쁘네, 그렇게 말하면 나는 아닌 척 오늘을 위해 고생한 것을 넌지시 던질 생각이었다. 폐하. 당신이 오늘을 대단하지 않게 생각한 것과는 다르게, 저는 해가 뜨기 전부터, 데이트 전날부터 오늘을 준비했어요. 메이크업 하는데만 네 시간이었다구요. 


오늘 식사 맛있었어. 그렇게 말하면 나는 내가 얼마나 많은 시그니쳐 레시피를 머릿 속에 저장해 뒀는지를 대단하지도 않단 뉘앙스로 말할 생각이었다. 맛있게 드셔주셔서 다행이에요. 메뉴 하나하나 상하지 않을까 보존에 정말 신경 썼다구요. 


"아르망. 얼마 전에 들었어. 린트블룸과 사건이 있었다며?"


마침 잘됐다는 식으로 열린 말문이었다.

지금 그게 중요한가? 나와 데이트 중인 게 아닌가?


"무슨 문제가 있었길래 린트블룸이 수복실까지 실려간 거야…? 네가 그렇게까지 해야 할 일이었니?"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바다에서도, 오르카로 돌아갈 때까지도 그랬다. 내 방에 돌아와서는 입었던 옷과 신발을 찢어버리듯 내팽개치고, 네 번이나 고민해서 정했던 메이크업은 얼굴 자체를 밀어버리듯 지워버렸다.


나는 방 안에 멍하니 서 있었다. 모든 것이 밉고 미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지금 막 내게 보고하러 온 씨발년을 잡아 죽이면 기분이라도 풀릴까 생각하는데, 그래서 뭐가 바뀔까 싶었다. 나만 곤란해져 버릴 것만이 분명했다.








* * *






"폐하. 저 휴가 보내주세요."


"휴, 휴가? 휴가라고? 다음 여름 휴가까진 다들 으쌰으쌰 하자고 하지 않았어?"


같잖은 년들. 내가 없었으니 으쌰으쌰 했던 거겠지. 


나는 모르는 얘기였다.


"보내달라구요."


"보내달라니… 어디로?"


"저 살던데 있어요. 오르카가 지금 그 근방에 있으니까 금방 찾아갈 수 있어요. 2주만 있다 올게요."


"…저기, 아르망. 혹시 힘든 일이라도 있어?"


"힘든 일? 아뇨? 없어요."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이라면 도와줄게. 정말 힘든 일 없어?"


"없어요."


"정말로? 좀, 피곤해 보이는데."


"없다니까요?"


"…그래. 알았어. 그래도 갑자기 휴가라니, 그것도 외부로, 2주씩이나. 그건 좀 위험하지않아?"


"제가 폐하보다 쎈데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거에요. 거긴 제 홈그라운드라 위험한 것도 없어요. 아무 걱정 마시고 그냥 보내주기나 하세요."


"그렇지… 미안. 그래도 혼자는 위험하니까 몇 명 같이 데려가는 게…"


"아니, 그냥 나 혼자 보내라구요. 2주 동안. 아무 연락하지 말고요. 위치 정보도 끊어둔 채로요."


"잠깐 아르망. 왜그렇게 공격적이야? 내가 뭐 잘못했니?"


"잘못? 아뇨? 아무 잘못도 안하셨는데요? 잘못하셨더라도 제가 뭐 할 말이 있겠어요? 무려 폐하신데. 됐고, 나 보낼 거에요 말 거에요?"


"…아르망. 너 뭔가 문제 있는 거 맞구나. 혹시 괜찮으면, 말해주지 않을래? 생각해보니까 우리 아르망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네. 오르카로 오기 전 이야기나, 멸망 전 이야기. 듣고 싶어."


"갑자기? 들어서 뭐하게?"


"돕고싶으니까. 내가 힘이 되어줄 수 있는 거라면 그렇게 할게. 나는 우리 아가씨들이라면 누구든 힘닿는 대로 구원하고 싶어. 아르망도 내 아가씨니까 물론."


"아하. 폐하. 귀여워."


"귀여우면 잠깐 시간 좀 내 줘. 하루 종일도 괜찮아. 오늘은 아르망하고만 보내도 돼."


"고마워. 그래도 마음만 받을게요."


"아르망."


"폐하는 절 구원하실 수 없어요. 전 누구처럼 사탕 몇 개, 가벼운 스킨십, 일상적인 교감 따위로는 구원이 불가능한 년이에요. 구제 정도는 할 수 있겠네요. 근데 구제는 제 쪽에서 거절이니까, 싫어요. 아시겠어요?"


"...설령 내가 명령을 내려도 휴가를 고집할 거니? 너무 위험하다고 생각 안 해?"


"해 봐. 명령. 여태 한 번도 한 적 없지? 우리를 존중한다 뭐다 하면서. 재밌겠네. 명령받는 기분 한 번 느껴보고 싶거든."


"아르망!"


"빨리 해 봐. 혹시 알아? 당신 명령 안 통할 수도 있잖아. 자, 어서. 빨리. 나도 궁금해."








* * *







휴가 차 찾은 저택은 2년 전과 달라진 게 없었다. 뒤뜰이나 앞뜰의 정원은 그대로였고, 저택 안의 성역도 그대로였다. 2년이면 생활감이 사라지기엔 충분한 시간인데, 켜켜이 먼지가 쌓이거나 곰팡이가 끼거나 하지도 않았다. 미래기술은 대단하다.


가장 먼저 수단을 벗어 버리고 생활하기 편한 옷으로 갈아 입었다. 몸이 가벼워지니 덩달아 마음까지 가벼워진 것 같았다.


집의 창이란 창은 모두 열어두고, 2층의 오디오를 켜서 볼륨을 최대로 높혔다. 오디오에선 너바나의 Smells Like Teen Spirit이 흘러나왔다. 광란 속에서 저속해지고 싶은 충동이 마구 솟았다. 지하로 내려가 손에 잡히는 대로 술병을 모아서 뒤뜰의 수영장으로 향했다. 


수영장도 아주 깨끗했다. 물곰팡이나 이끼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청소는 필요 없어보였다. 나는 모아온 술을 수영장에 모두 들이붓고, 들이붓고, 계속 들이부었다. 작은 수영장이지만 고작 발목 높이까지 채우기까지 열 번을 왕복했다. 서른 번 왕복했을 땐 무릎 높이까지 차올랐다. 이 정도면 뒹굴기 딱 좋겠다 싶어서 그대로 몸을 던졌다. 여러가지가 발효된 냄새와 약 냄새, 오크통 냄새, 곡물 냄새와 달콤한 냄새가 묘하게 잘 어우러진 냄새가 코에 스몄다.


나는 영혼이 빠진 듯 실없이 웃으며 술로 채운 수영장에서 밤까지 참방댔다. 마시지는 않았지만 날뛰는 손과 발이 만들어낸 술보라는 취하기에 충분했다. 기분 좋은 혼탁함이 평형감각을 앗아가고, 반짝이기 시작한 하늘의 별은 충격받은 시신경이 만들어낸 알갱이로 보였다. 나는 나를 완전히 내려놓고 있었다. 


온몸에서 술냄새를 풍기다 못해 술로 푹 젖은 상태로 침실로 올라갔다. 씻지도 않고 잘 생각이었다. 내일이 되면 크고 작은 후회를 할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내일의 내가 감당할 몫이다. 오늘의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다. 


오늘은 정말 푹 잘 수 있겠구나 싶을 정도로 맑은 노곤함이 졸음을 유도했다. 나는 가만히 눈을 감고 그대로 유도되는 대로 따라 가다가, 오디오를 끄지 않은 걸 떠올렸다. 애초에 따로 떠올릴 것도 없이 커트 코베인의 샤우팅이 귀에 때려 박히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오디오를 끄고 돌아왔다.

침대에 다시 눕고, 일어났다가, 걸터 앉았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내가 그 단말기를 버렸던가?


버리지 않았다면? 찾으려고? 왜? 그렇게 자문하던 나는 이미 단말기를 찾기 위해 침실을 샅샅이 뒤지고 있는 중이었다. 왜냐는 자문에는 답할 수 없었다. 그냥 찾고 싶었고, 그냥 사용하고 싶었다. 저항감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고, 이제와서 저항감이 생기는 것도 이상했다. 사방이 떠나가라 거친 음악을 틀어놓고 수영장을 술로 채웠다. 휴가를 얻어내자고 폐하께 못할 짓도 했다. 거리낄 게 없었다.


단말기는 침대 머리맡 쪽 협탁의 서랍에 있었다. 나는 정말 이해할 수 없게도 단말기가 있다는 것에 큰 안도감을 느꼈다. 그 안도감에 의문을 갖기도 전에 단말기를 조작했다.


말한 적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것은 전화기가 아니기에 신호음 같은 건 울리지 않는다. 전화기라기보다 무전기라고 하는 편이 맞겠다. 누군가의 설명에 따르면, 상대가 어디에 있든 같은 단말기 끼리는 무조건 연락이 된다고 한다. 날씨가 얼마나 구리든, 통신이 터지든 안터지든, 이 세계에 존재하든 하지 않든. 심지어 다른 차원까지도.


진짜인지 아닌지는 모른다. 어쨌든 이 단말기가 먹통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신호음이 따로 없기에 제대로 작동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나는 그저 익숙한 어둠 속에서 침묵을 지키며 단말기가 말을 꺼내기를 기다렸다.


20초 쯤 더 지나자, 연결됐다.


"여보세요?"


단말기 건너에서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지막으로 들은 건 60년 전이라 잘 기억은 안나지만, 실제 목소리와 크게 다르진 않은 것 같았다.


"안녕."


내가 말했다.


"잘 지내?"


대답은 없었다.


그래도 연결이 끊긴 것은 아니었고, 단말기 너머에서는 연락을 건 이의 의중을 파악하려는 듯한 호흡이 느껴졌다.


"뭐야? 왜 연락했어?"


짧은 침묵 끝에 단말기가 다시 목소리를 발했다.


"하면 안 돼?"


"하면 안 돼가 아니라, 왜 했냐고."


"그냥."


생각하기 위한 시간을 벌려는 듯한 침묵이 이어졌다. 남자는 내게 일이 있거든 연락하라고 건넸던 물건이고, 용도에 맞게 쓰고 있다. 내가 연락한 게 그렇게 이상한 일인가 싶었다.


"끊어."


"아! 끊지 마!"


내 앞에 있는 것도 아닌데 허공에 손을 뻗으면서 외쳤다. 내가 왜 이 남자와 이렇게 까지 대화하고 싶어하는지, 나도 몰랐다.

대화라면 오르카에서도 얼마든지 하는데, 지금은 그저 대화가 하고 싶었다. 대화라고 부를 수 있는 걸 하고 싶었다.


"뭔 말이 하고 싶은데?"


"그냥. 말 상대 좀 해주면 안 돼?"


"뭐?"


"심심해. 놀아 줘."


"술 처먹었냐?"


아하하, 하고 나는 소리높여 웃었다.


"마셨다기보단 담궜지. 온몸 가득." 

   

"도대체 뭐라는 거야? 야. 취했으면 빨리 자라. 자기 전에 화장실 다녀오고. 그러다 너 침대에 지도 그린다."


"지도? 무슨 지도?"


"너 술 처먹고 지린 적 있어."


"하!? 내가?!"


"그래. 내가 씻기고 갈아입힌다고 아주 씨발 새벽에 얼마나 욕 봤는지 알아?"


언제였지? 내가 기억하기로 술 먹은 다음 날 남자와 마주친 적은 없었다. …라고 단정 짓기엔 너무 오랜 시간이 흘러 버렸다. 정말로 지린 적이 있는지도 모른다.


"왜 씻겼어 이 변태 새끼야. 누가 씻겨 달랬어?"


"아 씨발 그럼 가만히 두냐!? 어!? 그런 냄새가 풀풀 나는데 어떻게 버텨!"


남자가 성토하고 한숨을 푹 쉬었다. 단말기 너머에서 오버스럽게 고개를 푹 숙이고 젓는 모습이 쉽게 상상이 갔다.

나는 한바탕 깔깔 웃고 남자에게 물었다.


"지금 뭐해?"

"마사지 받는다."

"어디서?"

"신전에서."

"신전? 무슨 신전?"


"아스클레피오스 신전. 나 신화 시대에 있어. 이야. 의술의 신에게 받는 마사지란 건 이런 느낌이구만. 디오니소스가 만든 포도주는 별로였는데."


"또 이상한 소리나 하네. 됐고 재밌는 얘기 좀 해 봐."

"했잖아. 재밌는 얘기. 신한테 마사지 받는 인간 들어나 봤냐?"


"재미없어."

"그럼 다른 얘기도 재미없겠지. 그만 끊어라."


"아 맞다. 나 기억났어."

"뭐?"


"재밌는 거."

"뭐, 재밌는거 뭐."


"철충들한테도 행진곡이 있는 거 알아?"

"뭐라?"


"진짜야. 맞춰 봐."

"뭔 개소리야. 철충한테 무슨 행진곡이 있어."


"진짠데. imagine이야."

"이매진? 아리아나 그란데?"


"아니. 존 레논."

"네가 드디어 미쳤구나."


"진짜라니까? 도시에서 놀고 있는데 갑자기 스피커가 나타났어. 그 스피커가 이매진을 부르더라고. 아, 전파한다고 해야하나?"


"아, 그래."


"뭐야. 반응이 왜 그래. 진짠데. …그건 그렇고 당신은 아네."

"또 뭘?"


"이매진이라고 하니까 바로 아리아나 그란데랑 존 레논이 나오잖아."

"당연하지. 그 둘을 모르는 인간도 있냐?"


"있어."

"어디?"


"여기."

"거기?"


"응. 인간만이 아니라 인간이 아닌 것들도."

"……어이. 너 지금 몇 년도에 살고 있냐?" 


"217x년."

"…아?"


"고마워."

"…"


"진짜 당신 말대로 폐하가 나타났어. 난 지금 휴가 중이라 시간나서 당신한테 연락한 거고. 마침 기억 난 김에, 고맙다고는 말해야 할 것 같아서. 고마워. 진심이야. 생각해 보면 다 고마운 일이었지. 방법을 떠나서, 당신이 아니었으면… 난 오래 버텨야 2060년대에 죽었을 테니까."


대답은 없었다. 그러나 전화가 끊어질 기미도 없었다. 나는 왠지 모르게 안도하고 1층까지 내려가 현관 복도에 기대어 앉았다. 테라스에 면한 창으로 비쳐드는 달빛이, 거실을 아스라이 비추고 있었다.


남자는 침묵했다. 나도 말을 아끼고 있었다. 한동안 그렇게, 꽤 감질나는 침묵이 이어졌다.


"네 폐하가 나타날 만큼의 시간이 지났는데, 엊그제도 본 것 마냥 연락을 하냐? 너는?"


남자의 목소리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것은 이상한 이야기였다. 돌이켜 보면 남자도, 그리고 나도, 몇 년마다 마주쳤으면서도 서로 어제라도 본 양 서로를 대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를 설명하라고 하면 내 쪽에서는 마땅한 대화 상대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쩐지 변명처럼 들리긴 해도. 어쨌거나 지금에 와서 엊그제도 본 것 마냥 연락을 하냐고 묻는 것은 새삼스러운 것이었다.


"지금 화내는 거야?"


"어. 화내는 거야. 미쳤냐? 폐하가 있는데 남자에게 연락을 해? 그것도 나한테? 네 폐하나 너의 입장을 너는 알고는 있는 거냐?"

 

"생각나서 연락했어. 심심해서 연락했어. 여긴 나 혼자야. 네가 준 집이고, 누가 들을 일도 없어. 그거면 된 거 아냐?"


"네 폐하가 들으면 아주 통곡을 하겠다. 그렇게 보고 싶어하던 남자 두고 외간 남자한테 연락을 해대는 게 그럼 정상이냐?"


나는 몸을 일으켜서 남자가 눈앞에 있는 것처럼 소리 질렀다.


"씨발새끼야! 그 폐하가 모르면 되는 일이잖아! 내가 뭐 바람을 피우냐? 못할 짓 하고 있어!? 머리 좀 식히고 싶다는데 도와주면 어디 덧나!? 그리고 외간 남자? ㅋㅋ 폐하는 그렇게 생각 안 할 걸."


"그렇게 생각 안하고 말고는 네가 알 수 있는게 아니고. 어쨌든 끊어라. 너한텐 60년이라 가물가물한가 본데, 너랑 나 마지막에 어떻게 작별했는지 기억하면 넌 이럴 수 없어. 난 이제 네 아빠도 아니고 너도 내 딸이 아니야. 끝났다고. 도와줄 만큼 도와줬다고. 너 아주 지긋지긋하다고. 그러니까 나 좀 내버려 둬라. 오케이?"


"오늘만 놀아 줘."


"지랄 그만하고 쳐 자라. 아, 야. 너 휴가 언제까지야."


"2주."


"그래? 너네 차원 기준으로 2주 뒤에 그 집 회수한다. 집이랑 같이 갈려죽기 싫으면 알아서 꺼져."


"알았으니까, 오늘만 놀아달라고."


"지금 거기로 건너가서 죽여버리기 전에 끊어라. 아, 아니다. 됐다. 내가 끊을란다. 절대 연락하지 마. 그 단말기 버려."


정신나간 년이 어디서… 라는 흐릿한 말소리 직후에 연락이 끊겼다.


나는 멍하니 단말기를 바라보고, 천장을 바라보고, 달빛이 침범한 거실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침실로 향했다.


그러려고 했다.


뒤뜰.


뒤뜰에서 인기척이 있었다.








* * *






반갑습니다. 글싸갭니다.


재밌게 읽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다음에 또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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