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그로부터 6개월 후.

 

 

“자, 이렇게 환단고기 같은 거짓 역사서와 세기 히로시 같은 가짜 역사학자가 학문적으로 미치는 악영향을 알아보았습니다. 올바른 역사를 이어가야만 과오를 반성하고 더 나아진 미래를 설계할 수 있기에, 기록이 항상 정직해야한다는 교훈을 품고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오늘 강의는 여기까지입니다. 다음 강의가 있는 3일 후까지 하르페이아 조교에게 잘못된 역사를 정정한 사례를 하나 조사한 2장 이상의 리포트를 정리하여 제출해주세요.”

 

오르카 종합대학 인문사회대학 교수로 교편을 잡은 리마토르는 강의를 마치고 교단을 내려왔다. 그동안 도서 한두 권을 주제로 본인이 기억하는 내용만을 끄집어내서 강의를 했던 것과 달리, 체계적인 학문적 지원이 주어지자 강의의 질은 더욱 높아졌다.

전문적인 교원을 확충하기에는 한계가 있었기에 단과대학은 인문사회대학, 자연공과대학, 군사대학 3개가 전부였으나 설치를 주도한 사령관의 기대 이상으로 대학의 효과는 컸다. 심도 있는 지식의 전파탑 역할을 함에 따라 오르카호 내부의 지적수준은 상향평준화되었다. 닥터가 더 이상 게르마늄 이론, 음이온 이론, 육각수 이론이 오르카호 내부에서 말도 나오지 않는다는데 환호할 정도였으니 교육의 효과는 실로 대단했다.

 

리마토르는 자신의 개인연구실로 돌아와 푹신한 의자에 몸을 뉘였다. 학술적인 목적으로 만들어진 공간에서 피로를 푸는 그 순간에 그는 자신이 학자로서의 삶에 충실하다는 감정을 만끽했다.

 

“교수님, 리포트 가져왔어요.”

 

그가 잠시 눈을 붙이려는 찰나 하르페이아가 자신의 리포트를 들고 왔다. 본업인 출격보다 부업인 조교 일에 더 충실해진 그녀의 모습에 리마토르는 고마움을 느끼면서도 내심 미안하여 사탕을 권했다.

 

“이거 미안합니다. 분명 조교 일은 부업이어야 하는데 리포트까지 쓰게 만들고, 주객이 전도되었군요.”

 

“후훗, 아니에요. 오히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게 더 저에게는 맞는 일인 걸요?”

 

“그렇다고 해도 제가 죄송한 부분이죠. 리포트는 읽은 후 피드백을 드릴 테니 오늘은 들어가서 쉬어도 됩니다.”

 

“네~ 감사합니다!”

 

첫 만남과는 다르게 자신에게 존대까지 해가며 인문학을 공부하는 그녀의 모습에 리마토르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물론 인문학을 배우려는 이는 하르페이아만이 아니었다.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두어 번 울리더니 하얀 가운을 입은 닥터가 그에게 두꺼운 종이뭉치를 내밀면서 말했다.

 

“논문 가져왔어 리마토르 오빠.”

 

“수고했어요. 소재는 무엇이죠?”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에 대한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의 분석이야.”

 

“알겠어요, 심사 이후에 석사 학위 수여 여부를 결정해서 통보할게요.”

 

그의 말에 닥터는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더니 투정을 부렸다.

 

“하, 정말이지 이게 뭐냐고. 여럿이 모이면 기술적 특이점도 일으킨다는 닥터 개체인 내가 석사를 받으려고 이러고 있다니...”

 

“아뇨, 오히려 훌륭한 것이에요. 자신이 모르는 걸 넘어서 앎의 영역으로 들어가고자 배우려는 열의를 가진 거니까요. 

 

소크라테스가 말한 대로 스스로가 무지하다는 것을 자각하고 진리를 배우려고 함으로써 우리는 진리에 다가갈 수 있는 것이랍니다. 유교 철학도 배워서 교화되는 걸 중시했잖아요.”

 

군더더기 없는 정론. 그의 말에 닥터는 더 반박할 생각을 하지 않았으나 그래도 이름부터가 ‘닥터’인 스스로에게 너무 박한 처사인 것 같다며 푸념을 계속했다.

 

“내가 어쩌자고 철학 박사 학위를 목표로 하게 된 걸까... 그때 리마토르 오빠가 철학 박사는 안 갖고 있냐고 물어보지만 않았어도 안 이러고 있었을 거야.”

 

닥터가 자신을 세모눈을 뜨고 째려보는 걸 피하며 그는 믹스커피를 타서 그녀에게 건넸다.

 

“정 싫으시면 포기하셔도 돼요. 닥터도 철학 학위는 이미 갖고 있으니까요.”

 

“학사 말이야? 오빠가 나한테 철학 학사 학위를 준 기억은 없는데? 학석박 통합 과정으로 간다고 했잖아.”

 

“아뇨, 그 뜻이 아닙니다. 닥터, 갖고 있는 박사 학위 중에 아무거나 말해볼래요?”

 

“음... 의학 박사?”

 

“의학 박사를 영어로 하면 Ph.D Medicine. 박사 학위를 뜻하는 Ph.D는 무엇을 뜻하는 걸까요?”

 

리마토르의 질문에 닥터는 그의 대답을 예상하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오빠, 내가 생각하는 그거 아니지? 그런 재미없는 농담은 안하는 게 좋아.”

 

닥터는 싱거운 농담으로 치부하려고 했으나, 리마토르는 그녀가 생각하는 것이 맞다는 눈치를 주면서 대답했다.

 

“닥터가 생각하는 게 맞습니다. Ph.D는 Degree of Philosophy의 약자로, 직역하면 철학 학위를 의미합니다. 전혀 관계가 없는 의학 같은 분야의 박사임에도 철학 학위라는 별칭이 붙은 이유는 철학이 가장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는 학문이기 때문이죠.

 

사람들이 가끔씩 ‘인생철학’이 무엇이냐며 대화하고는 하죠? 그런 것처럼 철학은 어떤 일을 추진할 때 가장 기본적인 물음표를 다는 역할을 합니다. 그렇기에 한 분야의 전문가라 할 수 있는 박사까지 올라가면 그 분야의 근본까지 손댈 수 있는 지식을 알고 있다는 뜻에서 철학 학위를 수여하는 것입니다.”

 

“헤, 그러니까 난 이미 철학 학위를 적어도 10개는 갖고 있다고?”

 

“그렇죠. 저는 Degree of Philosophy Philosophy, 철학 철학 학위를 갖고 있는 것이고요.”

 

“그런 농담 재미없어 오빠.”

 

리마토르의 말에 닥터는 표정을 찌푸리면서 툴툴댔다. 능글맞은 미소를 흘리던 리마토르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말했다.

 

“잘하고 있어요, 닥터. 철학 공부를 시작한지 4일 만에 학사 논문을 써오고, 다시 5일 만에 석사 논문까지 써왔잖아요? 겨우 9일 만에 학문으로서의 철학 전반을 공부하고 석사 수준의 논문을 써온 건 닥터급 천재가 아닌 이상 절대 불가능해요. 일반적인 어른의 수준을 아득히 추월한 아주 훌륭한 어른이랍니다.”

 

“...그런 아부해도 별로 안 좋아하거든.”

 

그러나 그녀의 볼은 말과는 다르게 붉은색으로 엷게 물들어있었다. 그녀가 몸만 어릴 뿐 정신은 성인과 큰 차이가 나지 않음을 알고 있는 리마토르는 사령관이 닥터에게 주지 않는 성인으로서의 인정욕을 종종 해소해주었다.

 

“맞다, 그러고 보니 요즘 들어서 기억은 어때? 많이 돌아왔어?”

 

“절반 넘게 돌아온 것 같아요. 문제는 그 기억들이 다 파편화된 거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파악하지 못하겠네요.”

 

“마지막 검사 결과 때는 시냅스 연결이 많이 회복된 상태였어. 이번에 검사 한 번 해보고 약물 투여 여부를 결정하자.”

 

“알겠어요. 제가 지난번에 부탁한 건 알아봤나요?”

 

“동면 전에 무슨 약물을 사용했는가 말이야? 도파민 수용체가 무너진 걸로 보아 메스암페타민부터 헤로인 같은 아편 알칼로이드계 마약을 복용한 것 같아. 해마의 시냅스까지 결딴낼 정도니 LSD 같은 비의료용 향정신성의약품을 사용했던 걸로 추정돼.

 

몸에서 약물이 전부 분해되었던 건지, 약물이 직접적으로 검출되지 않은 걸로 보아 동면하기 수개월 전부터는 약물 투여를 끊은 거 같아. 주사자국이랑 멍이 보이지 않는 걸로 보아 몇 달 단위로 잡아서 보는 게 적절하겠지. 오빠도 알겠지만 동면에 들어가면 몸의 기능 전체가 정지해서 회복도 약물 분해도 이루어지지 않으니까.”

 

“동면 전의 저는 심각한 약쟁이였군요...”

 

리마토르는 과거의 자신이 쌓았던 업보를 보며 심란한 마음을 억누르지 못했다. 마약을 끊었다는 점은 분명 다행이지만, 처음부터 시작해서는 안 될 길에 발을 들였던 자신의 선택이 무엇에서 기인했는지 알고 싶었다.

 

‘계속해서 꿈에 나오는 밝은 갈색 장발의 여성과 LRL을 닮은, 푸른 머리의 안대 소녀가 관계가 있을 거야. 그 둘이 반복적으로 나온다는 건 내게 있어서 중요한 사람임을 의미할 것이고, 철충의 공격에 당해 피투성이가 되어 죽는 모습도 같이 나온다는 건 내 눈앞에서 죽었다는 걸 뜻할 거야.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소중한 사람이 눈앞에서 죽는 경험을 2번씩이나 하는 건 트라우마가 될 여지가 충분하지.

 

하지만 밝혀지지 않는 건 그 둘이 대체 누구라는 거야. LRL을 닮은 파란 장발에 안대를 한 여자아이도, 나보다 약간 어려보이는 연갈색 장발의 여인도 나와 무슨 관계를 갖고 있는지 감이 오지 않아.

 

대체 누구지? 이 둘에 대해서 알아낼 방법은 없는 건가?’

 

리마토르가 심각하게 고민을 이어가는 동안, 그 모습을 CCTV로 지켜보던 사령관은 아르망을 보며 말문을 열었다.

 

“아르망.”

 

“네, 폐하.”

 

“리마토르 씨가 오르카대학 인문사회대학 학장을 맡은 이후 변화된 오르카호 내부 동향을 간략하게 설명해줘.”

 

“알겠습니다. 리마토르님께서 철학과, 사학과, 어문학과, 정치경제사회학과로 이루어진 인문사회대학 학장을 맡으신 이후 오르카호 내부 교양 수준이 가시적인 수준으로 증가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하는 스틸라인 전체를 대상으로 한 기초학력조사 결과가 대학 설치 전과 설치 4개월 후를 비교했을 때 무려 21점의 차이를 보입니다. 종합 상식을 평가하는 100점 만점의 시험 평균이 대학 설치 전에는 42점이었다가 설치 4개월 후 63점까지 올라갔음을 보면 대학의 설치 효과는 굉장히 뛰어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수치가 리마토르님과 관계된 이유는 이 조사에 참여한 스틸라인 전 병력이 리마토르님의 강의를 수강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리마토르님께서 전공과목인 철학 수업 외에 개설한 종합 교양 강의인 ‘리버럴 아츠’가 복합적인 지식을 쉽게 전달한다는 점도 한몫한 것 같습니다.”

 

“교수 지위를 준 판단은 옳았군. 그 후로 리마토르 씨가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지는 않았지?”

 

“예. 하르페이아를 조교로 채용하여 연구를 진행하는 것 이외에 특별히 분란을 일으키거나 하는 움직임은 없었습니다.”

 

아르망의 대답에 사령관은 시름을 놓았다. 그가 오르카호에 승선하고 장장 6개월이 지나서야 그가 완전히 분위기에 융화되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래... 전임 교원으로는 누가 있지?”

 

“인문사회대학에서 전임교원은 학장인 리마토르 씨 한 분입니다. 사학과는 080기관이, 어문학과는 덴세츠 엔터테인먼트가, 정치경제사회학과는 배틀 메이드에서 시간제 부교수와 시간 강사를 파견하고 있습니다.”

 

“...이것저것 문제가 많아 보이는데 운영은 제대로 되고 있나?”

 

“네. 철학과만큼 학문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희망자가 꽤 있습니다. 리마토르님께서 자신이 아는 분야에 한해 강의를 진행하는 등 감독 역할도 겸하고 있으시기에 강의 내용에 심각한 결함이 발생하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그 말을 들은 사령관은 리마토르의 능력에 감탄했다. 교육자로서의 능력뿐만 아니라 감독자로서의 능력까지 갖추고 있는 그는 처음 봤을 때부터 지금까지 대단히 뛰어난 인재였다. 그걸 어느 정도 신뢰했기에 자신은 명목상의 총장으로 앉아있고, 실무는 아르망과 학장들에게 맡겨놓고 정기보고만 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그가 자신에게 등을 돌리고 반란을 도모했을 때의 결과를 생각하니, 생각해봤자 괜히 머리만 아파졌다.

 

“그래, 다른 대학은 어떤가?”

 

“닥터가 학장으로 있는 자연공과대학은 농생명학과, 종합공학과, 수학과, 기초과학과를 두고 있습니다. 전임교원은 닥터 한 명이며, 농생명학과는 페어리 시리즈에서 시간제 교원 파견을 받고 있습니다. 

종합공학과는 닥터와 포춘, 유미, 아자즈가 중심이 되어 운영하고 있습니다. 수학과와 기초과학과는 모두 닥터 혼자서 운영합니다.”

 

“사실상 닥터 혼자서 모든 과를 운영하네. 인력이 부족하지는 않대?”

 

“오비탈 와쳐 측에서 종합공학과와 기초과학과에 인원을 파견하고 있으나, 닥터 양 혼자서 연구하는 것과 큰 차이가 나지 않아 사실상 자문 역할을 맡고 있다고 합니다.

 

애시당초 자연공과대학은 농생명학과를 제외하고는 크게 인기가 없습니다. 종합공학과는 소수의 선호가 있으며, 수학과와 기초과학과는 닥터 양이 연구를 위해 창설한 과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입니다.”

 

“멸망 전에는 리마토르 씨가 운영하는 인문사회대학의 선호도가 더 떨어지는 편이라고 초기에 보고하지 않았나?”

 

“그때는 대학이 학문의 장이 아니라 취업을 위한 디딤돌이 된 사회구조였기 때문입니다 폐하. 현재 오르카 대학은 학업에 뜻이 있는 이들이 원하는 학문을 제한 없이 배우라는 취지로 설립된 곳이며, 유이한 인간인 리마토르님께 인간에게 호감을 갖는 바이오로이드의 본능이 발동한 결과이기도 합니다.”

 

“결국 시대를 잘 타고나야한다는 것이군. 군사대학은 어때?”

 

“라비아타님께서 학장으로 있는 군사대학은 육군학부, 공군학부, 해군학부 3개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각 부대의 지휘관들께서 전임 교원으로 강의를 맡으며, 유기적인 움직임을 위하여 다른 군학부의 과목을 2과목씩 총 4과목 이상을 수강해야 졸업이 가능합니다.”

 

“여기는 걱정할 게 없겠군. 다들 실력 하나는 확실하니까.”

 

“그렇습니다. 전투에 배속되는 부대의 모든 인원은 군사대학으로 입학하여 복수전공의 방식으로 다른 단과대학의 수업을 수강하며, 전투와 무관한 부대의 인원에 한해서 인문사회대학과 자연공과대학의 학과를 제1전공으로 입학할 수 있습니다.”

 

“훌륭해. 아주 잘했어 아르망.”

 

“과찬이십니다.”

 

불안해보였지만 성공적으로 돌아가고 있는 오르카 종합대학의 모습에 사령관은 큰 만족감을 느꼈다. 이 상태로 쭉 가면 자신이 목표로 하는 바이오로이드들의 이상향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고 믿으며, 그는 리마토르로부터 ‘바이오로이드가 가진 인간다움’에 대한 답을 빠른 시일 안에 얻을 수 있기를 고대했다.

 

그러나 세상일은 결코 바라는 대로만 이루어지지는 않는 법. 사령관의 바람과 달리 오르카호를 혼란으로 몰고 갈 폭풍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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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강의만 뛰다가 드디어 정식으로 교수가 된 리마토르. 인류가 멸망한 후에야 인기를 얻은 인문학을 이끌고 있지만, 어떻게 받아들이는지가 관건인 인문학이 어떤 여파를 미칠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 거야. 툭하면 문제를 일으키고 다니는 개연성 생성기가 사고를 칠 거라고 감히 예측이나 했을까?


본격적인 줄거리를 풀기 전에 쉬어가는 느낌으로 한 화를 올렸어. 본격적인 이야기를 진행하기에는 아직 여유가 있으니까, 리마토르와 철학 대담을 나누는 걸 보고 싶은 바이오로이드가 있으면 댓글로 알려주길 부탁해. 여건이 되면 최대한 쓸 수 있도록 노력할게.


오늘도 부족한 글을 읽어줘서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