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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거야?"


형식적인 동료조차 아니었다면 진작 와이어로 저런 도발을 하는 목을 끊어버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천아는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해서 웃으며 도발을 하고 있으니 심사가 뒤틀리긴 여전했지만.


"아니, 그도 그럴게~ 너 '이딴 옷을 입으라고?' 라고 말했었잖아~"

"그건..!"


솔직히 거울을 보며 얼마나 자괴감에 빠졌는지 모르지만, 결국 천아의 말대로 얌전히 고양이 귀가 달린 메이드 복인지 발정난 고양이가 구애를 하는 것인지 모를 천 쪼가리를 걸친 내 자신도 어처구니 없기는 마찬가지였고, 이렇게 놀림을 당하는 신세가 된 것이다.


"어쩔 수 없잖아! 그 자식이! 그 자식이.. 보고 싶다고.."


그래, 이건 내 탓이 아니야. 처음부터 사령관 그 자식이 이런 야한 옷을 보고 싶다고 하지만 않았어도...


"확실히, 좋아하긴 엄청 좋아하더라."

"저, 정말이야? 그 녀석이 좋아했어?" 

"어머! 이년 이거 완전 빠졌네."


처음에 했던 푸념은 어느새 모두 사라지고 그 녀석이 좋아했다는 소리 하나에 내 기분이 반전되었다. 누군가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이런 옷을 입게 된 스스로의 모습도 신기하긴 했지만, 그게 중요한 일이던가. 그 녀석의 웃는 얼굴을 볼 수 있다면...


"야! 아이고~ 이년아.. 얼굴 다 풀려서 헤실거리네? 이거 완전 중증이잖아."

"그보다 그 자식 이야기 좀 더해봐."


어떻게 천아가 사령관이 이런 야한 옷을 좋아한다고 알아낸 것인지 의문이 들었지만 지금은 그저 그의 소식을 조금이나마 더 듣고 싶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기댈 곳 없고, 갈 곳도 없었으며, 모든 곳에서 버려진 나를 아무런 조건 없이 받아준 녀석이니까. 조금은 관심이 가도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는 자기 합리화를 하면서 나는 귀를 기울였다.


"널 만나러 오기 전까지 핫팩이랑 단 둘이서 아주 뜨~거운 대화를 하고 왔거든~"

"뭐? 죽을래? 아니, 죽여줄게. 최소한의 의리로 곱게 죽여줄게."

"야! 아니, 네가 듣고 싶다며! 븅신아!"

"하... 그래, 계속 지껄여 봐."


순간 천아의 말에 왜 욱했는지 잘 모르겠지만 진심으로 빡쳐 손에 힘이 들어갔다. 왜 저 뱀같이 간사한 년이랑 단 둘이 있었다는 사실만 들어도 화가 나는 것일까. 사령관과 만나고 나서 나는 근본적인 부분부터 어긋나고 있는 것일까. 이제 죽어 없어진 여제님이 아신다면 즉각 폐기하라 했겠지.


'이제 죽어버려서 그러지도 못하겠지만...'


"이거 보여? 후후후! 자알~ 보이겠지? 이 영롱한 반지를!"

"겨우 그딴 자랑이나 하려고 찾아온 거냐? 역시 죽여줄까?"

"하~ 정말 그 성깔 고치지 못하면 핫팩이 너한테 정나미 떨어질지도 모른다?"


천아의 대답에 순간 차갑게 식어 나를 내치는 사령관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렸다. 경멸의 표정, 불쾌함을 숨기지 않는 눈빛, 그리고 냉정한 목소리로 내게 당장 꺼지라고 말하는 그의 모습...


"안돼!!!"

"아이~ 참 깜짝이야! 농담이야! 왜 그렇게 소리 쳐?"

"그, 그 녀석이.. 나, 나를 버릴 리.."


머릿속이 하얗게 물드는 공포감이 엄습했다. 사령관에게 합류하기 전 숱한 죽을 위기를 넘기면서도 겪지 못한 공포가 뒷덜미를 서늘하게 만들고 어깨를 짓누르며 숨이 턱 막히는 중압감으로 다가왔다.


"야! 야! 노, 농담이야! 농담! 핫팩에게 그저 네가 카페에서 잘 일하고 있나 지켜보고 여유가 있어 보이면 데리고 와 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뿐이라고! 왜 그렇게 벌벌 떨어!"

"정말..이야? 사령관이.. 날 데려오라고?"


다행히 최악의 불안감은 가셨지만 이번엔 다른 불안이 내 다리를 흔들기 시작했다. 이 모습을 보이면 분명 좋아한다는 말은 숱하게 들었지만, 역시 그에게 보이기에는 너무 창피하고 수줍었기에 시야가 흔들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니까? 자, 얌전히 이 언니만 믿고 따라 와!"

"자, 잠깐!"

"아~ 왜! 가능하면 빨리 데려오라 했어."

"그, 그래도 이 옷은..."


겨우 유두를 겨우 가릴 정도로 면적이 좁은 가슴, 어지간한 팬티보다 좁아 엉덩이는 사실상 전부 노출된 하의 까지. 도저히 그에게 보이기에는 창피하고 낯 뜨거운 옷 인지라 나도 모르게 손을 잡아 이끄는 천아에게 저항했지만 알게 모르게 그가 찾는다는 사실에 저항을 강하게 하지 못하는 스스로가 원망스러울 정도였다.


"하~ 솔직히 말하자면, 반지를 받기 전에 슬쩍 핫팩의 주머니를 백아에게 시켜 뒤져봤거든."

"너... 그런 짓 내가 하지 말라고..."

"어휴~ 븅신아! 습관이 그리 쉽게 없어지냐? 아무튼, 그랬더니 반지가 두 개 있었어."


반지가 두 개였다는 천아의 말에 순간 머리가 돌아가지 않아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자 천아는 피식 웃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렇게 눈치 없어서 어떻게 살아남았냐? 정말 이 언니가 없었으면 네 미래도 뻔했겠다."

"닥치고 계속 설명이나 해 봐."

"싸가지 하고는.. 그러니까, 그 두 개의 반지 중 하나는 내게 줬고, 핫팩이 널 불러 달라고 했어. 그럼 나머지 하나는 뭘까?"


그런 걸 물어본다 한들.. 솔직히 내가 알 턱이 없었다. 저 반지가 무슨 의미기에 천아가 이토록 열을 내는 것일까. 내 어리둥절한 표정을 읽은 것인지 한숨을 또다시 내쉰 천아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아이고~ 누가 사냥개 출신 아니랄까봐, 이런 쪽에는 젬병이네.. 어디 가서 엠프레시스 하운드 출신이라고 말하지 마라, 이 언니가 다 쪽팔리니까."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그러니까! 핫팩은 나머지 반지를 널 주겠다는 소리지! 이 븅신아! 남자가 여자한테 반지를 왜 주겠냐? 어? 당연한 거 아니야! 계속 옆에서 함께 살아가자고 주는 거겠지! 아이고~ 답답해라!"


천아의 말을 그제야 이해한 나는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이 뛰기 시작했다. 그 녀석이 내게.. 계속 함께...


"오~ 장화 그 옷 정말 잘 어울리네~"

"아! 핫팩~ 미안! 내가 늦어서 직접 행차한 거야?"

"그것도 있지만.. 역시 직접 찾아오는 게 예의 같아서 말이야."


뒤죽박죽인 머리로 이번에는 사령관까지 직접 이곳에 찾아오자 더 이상 머리가 회전하길 거부하는 것 같았다. 너무 놀라면 말도 나오지 않는다고 하던가. 지금의 내 상황이 딱 그 짝이었다. 분명 멍청하고 애달픈 모습이겠지. 이래서 이 녀석 앞에 서는 게 무서웠어.


"사, 사령..관.. 어, 어쩐 일이야.."

"천아에게 대충 들었겠지만 이거, 너에게 주려고 찾아왔어."

"야, 잘 해봐! 굴러 들어온 먹이도 못 먹으면 평생 놀려줄 테니까!"


천아가 슬쩍 내 옆구리를 팔꿈치로 툭툭 치고 자리에서 멀어졌고 어느새 사령관이 내 앞까지 찾아와 살며시 반지를 끼워주기 시작했다. 기쁨, 환희, 행복, 그리고 두려움. 모든 감정들이 뒤섞여 폭풍과 같이 머릿속을 헤집는 동안 어느새 반지를 다 끼워준 사령관이 나를 끌어당겨 그의 품 속으로 이끌었다.


"이제 넌 혼자가 아니야. 내가 살아있는 한, 언제나 네 곁에는 내가 있을 거야."

"....정말?"

"정말, 난 거짓말 잘 못해."

"그래... 이제 네가 내 삶의 이유야..."


떠돌이 사냥개를 품에 안은 남자는 사냥개에게 마음을 나누어 주었다. 갈 곳을 주었다. 기댈 곳을 주었다. 삶의 이유를 주었다.

길고 길었던 방랑의 시간이 끝나고, 이제 난 진정한 주인.. 아니, 반려자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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