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칸, 너도 좀 쉬어... 이제 따돌린 것 같은데."


"아니. 긴장을 풀어선 안된다 사령관. 아직 놈들의 발소리가 들리는 걸로 보아 근처에서 수색을 계속하고 있는 것 같다."


로크에게 추격대의 저지를 맡긴 사령관 일행은 최대한 적으로부터 거리를 벌리기위해 여태까지 쉬지않고 뛰었고, 하루종일 몸도 정신도 한계까지 몰아붙인 탓에 현재 폐허가 된 단층건물 안에 몸을 숨겨서 숨을 고르고 있었다. 미간을 찌푸리고 주변을 계속 경계하는 칸의 태도에 다른 일행들도 긴장의 끈을 놓치 못해 제대로 쉴 수 없었지만 사실 그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정말로 문제였던 건 이러한 칸의 행동이 과민반응이 아니라 옳은 판단이었다는 현재 상황이니까.


어둠 탓에 시각보단 청각에 의존하며 주변을 살피던 칸은 위화감을 느꼈다. 뒤에서 들려오던 소리로 보아 펙스의 AGS 군대가 후방에서 접근하던 건 분명했다. 그러나 적들은 사령관 일행을 발견하지 못한건지 하나둘 그들을 지나쳐 앞으로 가버렸다.


수상했던 점은, 적들 중 단 하나도 그들과 마주치지 않은 채 지나가고 있었다는 점이다. 몇 십 분 째 계속해서 이 상황이 계속되니 오히려 고의적으로 자신들을 피해가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이윽고 모든 방향에서 발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자 칸은 뒤늦게 눈치챘다. 자신들이 적의 계략에 당했다는 사실을.


"무기를 들어라! 포위됐다!"


다급하게 외친 칸이 저 앞에서 움직이는 물체를 눈대중으로 조준해 리볼버 캐논을 쏘자 어둠 속에 있던 커스텀 폴른 한 대가 바람구멍이 난 채로 쓰러졌다. 그러자 방금 파괴된 폴른의 뒤에서 매복해있던 더 많은 AGS가 나타나 총구에서 불을 뿜었다. 칸은 일행에게 사령관을 맡긴다는 말을 남기고선 다리의 기동장치를 기동해 순식간에 적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그녀가 사령관이 숨은 폐건물을 중심으로 크게 원을 그리며 돌면서 전선을 휩쓸었으나 그녀 혼자서 저 수많은 적들을 감당할 수는 없었다. 


칸이 놓친 AGS들이 사령관 일행이 숨어있는 폐건물의 벽을 부수고 들어오자 라비아타가 양손으로 대검 트롤스버드를 들고 휘둘렀다. 비록 라비아타는 부상을 제대로 치료하지 않았는데다 트롤스버드와 합체시켜야 할 플라즈마 제너레이터가 방전되어 제 힘을 내지 못하는 상태인지라 깔끔하게 일도양단할 수는 없어도 일격에 AGS를 박살낼 힘은 남아있었다.


허나 북미대륙을 지배하고 있다는 말은 폼이 아닌 듯 펙스의 압도적인 물량공세 앞에선 한계가 명확했다. 두 베테랑 전사의 고군분투에도 불구하고 오래 지나지 않아 사령관과 더치걸, 장화에게까지 점차 위협이 가해지기 시작했다. 라비아타마저 놓친 커스텀 램파트 한 기가 사령관이 있는 폐건물 내부까지 들이닥치자 장화가 딱 하나 남은 사제폭탄을 들고 램파트에게 달려들었다. 


램파트의 몸에 폭탄을 부착시키기 위해 장화가 바닥을 박차고 뛰어오르자 램파트는 방패가 부착된 왼팔을 휘둘러 공중에 뜬 장화를 쳐냈다. 장화가 손에서 폭탄을 놓친 채 바닥을 구르며 넘어지고 램파트가 그녀에게 총구를 겨눈 그 순간, 더치걸이 용감하게 사령관의 품에서 뛰쳐나가 땅에 떨어진 폭탄을 주운 뒤 램파트의 등에 매달렸다. 당황한 램파트가 몸을 휘두르자 더치걸은 몇 초 버티지 못하고 나가떨어졌지만 이미 그것의 등에는 폭탄이 부착된 상태였고, 그걸 지켜본 장화가 곧바로 주머니에서 기폭 스위치를 꺼내 누르자 램파트는 그 자리에서 산산조각났다.


눈앞의 적을 쓰러뜨렸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것도 잠시, 또다른 커스텀 램파트 한 기가 나타나 바닥에 엎어져있던 더치걸의 등을 발로 밟아 제압했다.


"아악...!"


"더치걸!"


사령관이 더치걸의 이름을 외치자 라비아타와 칸의 시선도 폐건물 안쪽으로 쏠렸다. 곧이어 그 커스텀 램파트에게서 나온 목소리는 사령관 일행 전원을 얼어붙게 했다.



[이 바이오로이드의 목숨이 아깝다면 지금 당장 항복하십시오, 오르카의 사령관.]


"...!!"


그것은 일반적인 램파트의 남성 목소리가 아닌, 익숙한 여성의 목소리였다. 레모네이드 오메가가 커스텀 램파트의 스피커를 통해 말한 것이었다. 당황한 사령관이 머뭇거리는 사이 램파트가 더치걸의 뒤통수에 총을 겨누었다.


사령관은 자신을 바라보는 라비아타, 장화, 칸의 얼굴을 한번씩 훑어보고 마지막으로 인질로 잡힌 더치걸과 시선을 맞춘 뒤 듯 결단을 내렸다.


"...미안해, 다들... 지금의 결정이 무슨 결과를 불러온다 해도... 나를 믿고 따라와준 그 누구도 죽게 내버려둘 수 없겠어. 모두 무기를 버려줘. 항복할게."


아무리 보잘것없고 흔해빠진 바이오로이드라도, 사령관은 차마 그 한명조차 포기할 수 없었다. 어리석을 정도로 자기희생적인 결정에 라비아타는 그녀의 주인을 말리고싶은 말이 목끝까지 차올랐으나 그렇다고 더치걸을 버리고 살아남자고 말하는 것은 여태껏 사령관이 해왔던 행적에 반한다는 뜻이었기에 끝내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 


체념한 칸이 눈을 질끈 감고 총을 버리자 라비아타 또한 대검을 바닥에 내던졌다. 


"윽... 으흑... 미안해... 미안해..."


더치걸이 고개를 들지 못하고 울먹였다. 그녀의 작은 등을 누르고있는 램파트의 발 보다도 무력한 자신때문에 모든걸 망쳤다는 죄책감이 더욱 무겁게 느껴졌다. 사령관이 그녀를 위로하려 말을 건네보았지만 이미 그녀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펙스 AGS들이 다가와 라비아타와 칸에게 바이오로이드용 특제 수갑을 채우고, 사령관의 손목에도 수갑을 채우고 나서야 레모네이드 오메가 본인이 AGS 군대 사이에서 그 거만한 모습을 드러냈다.


"오랜만이군요 사령관. 저희가 마지막으로 만났던 게 알레스카였었죠? 그 때와는 입장이 반대가 됐는데, 기분이 어떠신가요?"


"오메가, 이제 됐잖아. 더치걸을 놔줘."


사령관은 오메가의 비꼬는 말에 응수하는 대신 수갑이 채워진 양팔을 보란듯이 앞으로 내밀며 더치걸을 풀어줄 것을 요구했다.


"원하신다면야 그렇게 하죠. 어차피 저건 더이상 필요가 없으니까요."


오메가가 말을 마치자 커스텀 램파트가 더치걸의 등 위에 올려놓았던 발을 치웠다. 그러나 더치걸은 아직도 바닥에 엎드린 채 일어서지 않고 있었다.


"야 꼬맹이, 일어나... 일어설 수 있겠어?"


"미안해... 나 때문에..."


수갑이 채워지지 않았던 장화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더치걸을 부축해줬지만 더치걸은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 둘을 차가운 눈빛으로 흘겨보던 오메가는 다시 입을 열었다.


"흠, 이거 곤란하게 됐네요? 유감스럽게도 수갑을 3개밖에 안가져와서 저 두 마리는 가져갈 여유가 안되거든요. 놔두고 갔다간 따라올지도 모르니... 처분하고 가야 겠는걸요?"


"뭐? 오메가! 약속이 다르잖아!!"


그 말을 듣고 놀란 사령관이 달려들려는 듯한 움직임을 보이자 곧바로 펙스 AGS들에게 제지당했다. 오메가는 그를 비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단 한 개체만 존재하는 라비아타 프로토타입이나 호드의 지휘관과는 달리... 저 처음보는 빨간머리 바이오로이드와 싸구려 광부 바이오로이드는 가치가 없답니다. 가져갈 가치도, 살려둘 가치도 말이지요."


펙스 AGS들이 장화와 더치걸을 향해 총구와 포구를 천천히 들어올렸다. 오메가의 발포 명령 한마디만을 기다리는 그 짧은 순간, 커다란 번개의 창이 폐건물의 지붕을 찢어버림과 동시에 그 AGS들이 서있는 곳을 강타했다. 느닷없는 천재지변에 놀란 오메가는 곧장 대응하지 못했으나 사령관은 이 번개가 누구의 것인지 바로 눈치채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각하!!!"


철충 추격대를 일소한 로크가 성하지 않은 몸뚱아리를 이끌고 귀환하는 것을 본 사령관이 오메가보다 먼저 선수를 쳤다.


"로크, 저 둘을 데리고 도망쳐!"


사령관의 긴급 명령을 수신한 로크는 속도를 줄이지 않고 날아오더니 마치 맹금류가 먹이를 낚아채듯 장화와 더치걸을 붙잡아 전광석화와도 같은 속도로 자리를 벗어났다. 펙스 AGS들이 한 발 늦게 대응사격을 했으나 텅 빈 허공에 총알을 낭비할 뿐이었다.


"아직 한 패가 남아있었군요....! 그런데, 그것도 사라져버렸네요? 당신이 이 위기에서 탈출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당신 손으로 날려버렸다는 걸 아시나요?"


예상치 못한 로크의 난입에 잠깐동안 짜증내던 오메가는 방금 사령관이 내린 명령으로 그가 쓸 수 있는 패가 바닥났다는 사실을 깨닫자 다시 오만한 미소를 지었다.


"로크는 적잖은 부상을 입은 상태였어. 아무리 그라도 우리 모두를 구할 수는 없었을거야."


"하지만 당신 한 명을 구할 수는 있었겠죠. 고작 바이오로이드나 기계 따위를 위해 희생하는 인간이라니, 성인군자라고 칭찬이라도 받기를 바랬습니까? 당신은 그저 어리석은 것 뿐입니다."


오메가가 눈앞에서 비웃고, 등을 보이며 그녀 휘하의 AGS 사이로 사라지는 내내 사령관이 더이상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녀가 남긴 수송 준비를 하란 명령에 AGS들이 움직이기 시작하는 한편 칸이 사령관에게 다가와 침통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내가 케시크였을 때부터... 백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산전수전 다 겪으며 온갖 전투 속에서 살아남았는데, 이런 방식으로 최후를 맞이하게 될 줄은..."


"칸. 미안하지만 나는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된다, 설령 더치걸이 인질로 잡히지 않았었더라도 이미 사면초가인 상황이었으니까. 비록 내가 바랬던 최후는 아니지만 이 말은 꼭 해둬야겠군. 그대 자신의 목숨과 타인의 목숨이 저울에 올려졌을 때 타인을 살리기를 선택한 그대의 이타적인 사랑을 확인할 수 있어서 기뻤다. 그런 그대를 섬길 수 있어서 영광이었다. 사령관."


칸의 마지막 인사에 사령관은 씁쓸한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더치걸과 장화를 구할 수 있었다 하더라도 자신과 같이 희생하게 된 라비아타와 칸에겐 미안할 따름이었다. 사령관은 자신이 더이상 없는 오르카호의 가족들이 걱정되었고, 그 중에서도 병적으로 자신을 사랑하고 있던 리리스가 가장 걱정되었다.



*


퉁, 퉁, 퉁, 퉁, 퉁...


건물 내에 규칙적으로 울려퍼지는 소리를 애써 무시하며 오르카호의 동앗줄이 내려오기를 기다리고 있지만 슬슬 정신적으로 지쳐가고 있는 중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감마 몰래 오르카호에 메시지를 보낸지 시간이... 어...


"누구 시계 있는 사람?"


"10분 지났어요."


"고마워, 유미."


"천만에요."


10분. 그래, 10분 지났다. 오르카호에 메시지를 보냈지만 답장을 받을 수가 없어서 그냥 저쪽이 우리 메시지를 받았길 기대하며 10분째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리디아와 히루메는 아직도 경계심 MAX로 내 양 옆에 찰떡같이 붙어서 감마를 째려보고 있고, 하이에나와 애니는 감마 감시를 반쯤 포기했는지 이 주변에 뭐 재밌는 거 없나 수색하고 있다. 물론 그러면서도 감마를 시야 안에 두기위해 멀리 가진 않고 있다.


오렌지에이드와 유미는 감마의 눈치를 보며 태블릿같이 생긴 저 패널로 해킹인지 뭔지 하고있는 것 같다. 오렌지에이드는 평소와는 달리 감마가 신경쓰이기 때문인지 말수가 눈에 띄게 줄어들어 있었다. 근데 유미는 왜 안경을 벗어놓은 거지.


정작 모두가 신경을 곤두세우게 만든 당사자인 감마는 눈감고 팔짱 낀 채 석상처럼 조용이 서있다. 진짜로 닥치고 있으니 괜히 더 신경쓰이네, 저거 명상하는거야 아님 자는거야?


냉동 회장은 아직도 꽝꽝 얼어있다. 규격이 맞는 콘센트가 없어 저 동면포드의 전력 케이블을 도로 꼽을수도 없으니 조금이라도 녹는 속도를 늦추려면 냉동고나 하다못해 에어컨이라도 빵빵 튼 방 안에 집어넣어야하지 않나 싶지만 막상 옮기기도 힘드니 이대로 버텨주길 바랄 뿐이다. 듣자하니 저 동면 포드의 덮개가 열리거나 아예 파괴되지 열리지 않는 이상 전력 공급이 끊겨도 장시간 보온이 가능하다는 것 같다.


알바트로스와 포트리스는 건물 밖에서 얌전히 대기하고 있고, 트레저는 자고 있다고 했고. 안그래도 밤이 깊었으니 나도 그냥 눈 좀 붙이고 싶지만 저 퉁퉁거리는 소리때문에 도저히 편하게 쉴 수가 없다.


그리고 리리스는 지금...


퉁, 퉁, 퉁, 퉁, 퉁, 퉁...


"리리스가 가야하는데 리리스가 가야하는데 리리스가 가야하는데 리리스가 가야하는데 리리스가 가야하는데 리리스가 가야하는데 리리스가 가야하는데 리리스가 리리스가 가야하는데 가야하는데 리리스가 가야하는데 리리스가 가야하는데 리리스가 가야하는데"


...10분 내내 벽에 머리를 찧으며 같은 말을 반복해서 중얼거리고 있었다. 벌써 이마에 시퍼렇게 피멍 들었을 것 같은데 지치지도 않나? 근데 말리려고 말 걸었다간 폭발할 것 같아서 못본척 하고 있는 중이다.


"흐으음... 만약 오르카호에서 우릴 꺼내주기 전에 오메가가 먼저 도착하기라도 하면 여기서 농성해야 하는데,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이 한 개도 아니고 두 개나 있다니 신경쓰여서 미치겠ㄴ-"


"오! 방금 폭탄이라고 했어? 여기 폭탄 있어!?"


"방금건 비유법이야 하이에나, 진짜 폭탄은 없어."


"그럼 내가 하나 만들어줄까? 내가 시한폭탄 하난 기똥차게 잘만들거든! 혹시 관심있어? 응? 어때?"


"그런건 필요없- 잠깐, 시한폭탄 만들 줄 알아? 즉발성 수류탄이 아니라?"


"응, 응!"


하이에나가 눈을 반짝거리며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으래? 그거 아주 흥미로운데...!"


"뭐야 형님, 갑자기 폭탄에 흥미가 생겼어?"


바로 옆에서 가만히 듣던 리디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나는 리디아와 하이에나의 어깨에 한 손씩 올려놓아 둘의 얼굴을 가까이 끌어당긴 뒤 장난기 가득한 미소와 함께 대답해줬다.


"그럼그럼. 오메가 엿먹일 재밌는 생각이 떠올랐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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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의 인질극에 못이겨 결국 생포된 사령관과 아직도 오메가 본진에 갇혀있는 라붕이


슬슬 2부 끝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