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나 모를 위험에 대비해 그녀에게 장비들을 단단히 채우는 내 귓가에 작은 목소리가 들린다. 그녀의 순수한 질문에 무어라 대답을 해주는 것이 좋을까 고민하면서 그녀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어주니, 그녀가 품에 안기며 온기를 즐기듯 뺨을 비비면서 다시금 말을 시작했다.


"괜찮아.. 난 무섭지 않아, 오히려 기뻐! 더 강해지면 사령관의 도움이 될 수 있으니까."


위험한 현장에 아이들을 내보내는 것은 언제나 무겁기만 한 기분이 들어 유쾌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전시.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전력을 온전히 투자해야 희생이 줄어든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기에, 무릎을 꿇고 그녀와 시선을 맞추며 그녀를 안심 시키기 위해 웃어주었다.


"걱정하지 마, 전투 현장은 맹세코 아니니까."

"그럼... 어디야?"


단순히 오르카에 필요한 물자 들을 탐색하러 나가는 것 뿐이지만, 그녀에게 착용 된 장비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녀가 오해를 하는 것도 당연할지 모른다.


"단순한 탐색 임무야. 호위할 병력들도 함께 움직일 테니 안심해."

"그런데 이렇게 좋은 장비를... 나한테 줘도 되는 거야?"


그녀의 말에 처음 그녀를 발견했을 당시가 떠올랐다. 허름하고 낡아 빠진 옷차림과-아니, 그것은 옷이라기 보다는 누더기에 가까웠다-그리고 유일하게 신체를 방어해줄 만한 안전모 하나. 그것 하나만 보더라도 멸망 전 그녀가 받았을 대접이란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이깟 장비들 보다 네가 더 소중해. 그러니 혹시 위험해지면 장비를 포기하고 무사히 돌아오는 것만 생각하고."


도구로 태어나 도구로 쓰인 여린 아이를, 적어도 나 만큼은 소중하게 여기고 싶었다. 그 무엇이 그녀를 도구로써 희생되게 만들었는지 생각해보면,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나와 같은 인간들이었겠지. 그러나 앞으로의 세상은 다를 것이다.


"약속이야, 위험해지면 장비를 포기하고 무사히 돌아오는 것만 생각해!"

"아... 응, 알겠어! 약속할게."


그녀의 밝은 미소를 보자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처음으로 되찾은 그녀의 미소를 앞으로도 지켜주기 위해서라도, 나는 이 전쟁에서 질 수 없다.


"그럼, 출격 포트까지 손 잡을까?"

"응!"


조막만한 손이 내 손에 쏙 들어와 잡히자 따뜻한 온기가 전해졌다. 조금만 더, 열심히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나아간다면, 나는 이 아이에게 다시는 아픈 기억을 남기지 않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니 기분 좋은 긴장감이 어깨를 누르기 시작했다.


"저기, 사령관."

"무슨 일이니?"

"혹시... 내 손이 거칠다거나 그렇지는 않지?"


옛날의 고된 노동으로 혹여 손이 상했을까, 그렇게 걱정하는 그녀의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만약 거친 손이라고 해도, 나에게는 그 무엇보다 부드럽고 따뜻한 작은 아이의 손일 뿐이니, 그래도 이 작은 숙녀의 우려에 성실히 대답하는 것이 레이디를 에스코트 하는 신사의 의무이리라.


"걱정 마! 정말 예쁘고 부드러운 손이니까."

"헤헷, 다행이다... 고마워, 사령관."

"아, 바깥에 도착했네. 이야~ 날씨가 정말 화창한 걸?"

"와아... 정말, 좋은 날이야..."


바깥에 도착한 우리들을 반겨주는 흐드러지는 꽃잎들과 시원하게 뺨을 스치는 바닷바람이 기분 좋게 느껴졌다. 향기로운 꽃 냄새와 바다 특유의 비릿한 냄새가 조금은 어색한 조합으로 다가왔지만, 그럼에도 손을 붙잡고 둘이 마주하는 이 광경이란 머릿속에 각인되어 오랜 시간을 함께해줄 것 같았다.


"예전부터 동화 속 왕자님이 있다면 누굴까 하고 상상했었어."

"동화 속 왕자님?"

"응.. 그런데 이제 알 것 같아. 내 동화 속 왕자님은 사령관이 아닐까? 날 구원해준 인간은 사령관 이니까.."

"구원이라..."


나는 그저 어둠 속 탄광에서 겁을 잔뜩 집어먹고 몸을 떨던 작은 아이에게 손을 내밀고 겉옷을 덮어준 나약한 인간일 뿐이다. 피폐해져 가느다란 목숨을 부지하고 옅은 호흡을 이어가던 그 작은 아이를 바라보며, 내가 할 수 있었던 일은 그것 뿐이었으니까.


"이렇게 내가 따뜻한 해를, 시원한 바다를, 아름다운 자연을 느낄 수 있게 해줘서 고마워."


이렇게 감사를 받을 자격이 과연 나에게도 있을까. 눈을 떠보니 마지막 인간이었고,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철충들과 싸우며 가족들을 지켰을 뿐이었다. 딱히 감사를 받을 마음도 없었으며, 딱히 정의로운 일을 행했다는 자각도 없었지만 그녀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나가기 전에... 꼭 안아줄래? 응... 참 이상하지? 나, 사령관의 품에만 안기면 없던 힘이 생겨. 앞으로도 가끔... 부탁해도 돼? "

"내 품으로도 괜찮다면, 언제든지."


거대한 자연 앞에 한없이 무력하고, 강대한 철충들 보다 나약하며, 뛰어난 지휘관들에게 항상 신세를 지는 어리숙한 내 품으로도 그녀가 이렇게 웃을 수 있다면, 언제든지 내 품은 그녀에게 열려있을 것이다.


"자, 이제 출발하자! 호위 병력들이 기다리고 있어."


해맑게 웃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녀의 등을 토닥이자, 그녀가 내 볼에 살며시 입을 맞추고 미소 지었다.


"머리카락 흐트러지는 거 별로 안 좋아했는데, 사령관이 해주는 건 기뻐. 그러니까... 다녀오면 계속 해줘."

"응! 약속할게! 난 약속은 꼭 지키는 사람이야."


이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앞으로도 싸워나갈 힘을 얻는다.

그녀가 나에게서 희망을 찾은 것처럼, 나 역시 그녀에게서 희망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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