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술잔에 술을 조금 따르며 그녀가 미소 지었다.


"물론! 이제 오래된 일이지만 아직도 똑똑히 기억해."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오르카를 포격으로 구명하고, 승선했던 그녀의 말을 어찌 잊겠는가. 당시에 그녀를 보며 느꼈던 감정이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설마 아직도 기억할 줄은..."

"분명, '피할 수 없는 죽음이 우리를 찾아올 때까지 그대를 모시리다.' 라고 했었지."

"이런! 주군은 언제나 소관을 놀라게 만드는 것 같소."


기억할 수 밖에 없지. 그녀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은 잘 모르겠으나, 내게 그녀는 처음으로 생긴 우상이기도 했으며 당시 미숙했던 나에게 그녀는 좋은 스승이 되었다. 돌이켜 생각해본다면 그녀 없이 지금의 내가 존재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니.


"하핫! 그때는 정말 긴장했었지."

"그대도 긴장이라는 것을 하는 모양이오?"


도대체 내 이미지란 그녀에게 어떻게 박힌 것일까. 마치 완벽 초인의 약한 모습을 본 것 같은 그녀의 표정에 술을 한 모금 마시며 그녀에게 대답했다.


"나도 한낱 인간이야. 신기한 것들을 보면 놀라기도 하고, 철충을 보면 또 두렵기도 하고... 그리고 사실 이렇게 함께 술잔을 기울이는 것 역시 쑥스럽다고 생각하지."

"그대는 나와 함께 있는 것이 쑥스러운 것이오?" 

"아무래도 예쁜 여성과 단 둘이 술잔을 기울이는 것은 충분히 쑥스럽지."

"그게 무슨..."


취중진담이라 하던가. 평소라면 절대로 하지 못했을 말들도 알코올의 기운을 빌리니 술술 나오기 시작했다. 얼굴을 붉히는 그녀 역시 단지 술기운 때문에 붉어진 것은 아니리라. 그런 점에서 그녀의 저런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도 충분히 뛰어난 술 안주라 할 수 있다.


"그보다 처음 했던 말을 왜 기억하는지 물어본 거야?"

"아, 그게..."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것처럼 그녀는 살며시 시선을 내리 깔고 생각을 정리하는 것처럼 보였다. 앞으로 할 말들이 진지한 내용일까 고민하는 내게 그녀는 술을 한잔 마시고는 시선을 똑바로 맞추며 입을 열었다.


"언젠가 소관이 처음 말했던 그 순간이 찾아올 것이라 생각했다오."


담담한 어조와 다르게 그녀의 눈빛이 짙게 가라앉아 슬픔을 내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가 말한 '그 순간'이란 피할 수 없는 죽음을 말하는 것이겠지. 생물인 이상 언젠가 그 끝이 찾아오기 마련이니.


"소관은 그대와 만나기 전까지는 별다른 생각 없이 그저 하루하루 연명하며 살아가고 있었소."

"그건... 외로운 걸."

"그렇소, 아주 외로운 길이라오. 허나 그 고독 덕분에 두려움은 없었으니 소관은 그것을 썩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었지."


과거형인 그녀의 말에 직감적으로 그녀의 그 생각이 최근 들어서 변화했음을 깨달았다. 역시, 이어진 그녀의 말에는 변한 그녀의 생각이 고스란히 담겨 내게 전달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제 소관도 두려운 것이 생겼소."

"두려운 것?"

"그렇소."


짧은 침묵이 이어지고 그녀의 희고 고운 손이 내 손을 살며시 맞잡았다.


"그대를 잃는 것이 두려워졌소. 혹, 내 곁에서 그대가 사라질까. 그것이 두려워 냉정을 잃을지도 모르오."


소중한 누군가를 잃는다는 것은 누구든 두려운 일이리라. '무적'이라는 칭호를 어깨에 짊어지고 언제나 전장에 나서는 그녀에게도, 소중한 오르카의 대원들을 이끌어 나가는 내게도. 그것은 아주 두려운 것이다. 하지만.


"난 그 두려움을 나쁘게 생각하지 않아."

"어째서..."


크게 흔들리는 그녀의 눈동자가 시선에 담아졌다. 손에 들린 술잔에서 찰랑이는 술과 같이 흔들리는 그녀의 청록 빛 눈동자는 진정으로 의구심과 두려움을 내포하며 내게 호소하는 듯 보였기에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스스로 내린 결론을 말하기 시작했다.


"두려움을 알기에 우리는 함께 살아가는 것이라 생각하니까."

"함께 살아간다?"

"응. 용, 네가 처음 나에게 말했던 것처럼 언젠가 피할 수 없는 죽음이 우리를 가르겠지. 하지만 그 끝이 있음을 알기에 함께 보내는 이 시간을 난 더욱 소중하게 여기고 즐겁다고 생각하니까. 두려움이란 꼭 나쁘다고 말할 수 없는 것 같아."


나 답지 않게 철학적인 말을 하려니 코끝이 간질 거리는 느낌이었지만, 그럼에도 계속해서 목소리에 힘을 주어 그녀에게 말했다.


"그러니 내가 두렵고 힘들어서 기댈 장소가 필요하다면, 난 용에게 기댈 거야. 그러니 용은 내게 기대주었으면 좋겠어."

"주군..."

"언젠가 용이 내게 말했지? 사내는 입 밖으로 낸 약속은 꼭 지켜야 한다고."

"그건... 그렇소만."


처음 마주쳤을 당시의 당당했던 여인의 모습과 엄격했던 스승의 모습을 기억하는 내게, 지금처럼 기대어 쉴 장소를 원하는 그녀의 모습은 새롭게 다가왔다. 그러니 이번에는 그녀가 내게 가르침을 주었던 것들을 제자로써 지켜나갈 차례라 여겨졌다.


"약속에는 담보가 있어야겠지. 용, 내게 손을 줘."

"아, 여기..."

"서약의 반지야. 이게 무슨 의미인지, 용도 알고 있지?"


멍하니 손가락에 끼워지는 반지를 보며 그녀의 얼굴이 더욱 붉게 달아올랐고 나 역시 짧은 침묵의 시간이 이토록 길게 느껴진 적은 또 없을 정도로 긴장했지만, 그럼에도 충분히 진심을 전했기에 그저 이 마음이 그녀에게 닿기를 소망 했다.


"부디 앞으로도 부족함 많은 이 몸을... 부탁 드리오... 아니, 부탁 드립니다. 서방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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