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오늘의 천아는 장화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원래는 서로 장난도 치는 가까운 사이지만 장화가 인식증을 멍하니 보며 볼에 부비적거릴 때면 거리를 두고는 했다. 그녀의 입장에서 장화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카페에서 고양이 코스프레를 하고 일하며 핫팩이랑 부쩍 가까워진 후 요새 인식증을 만지작거리는 횟수가 늘어난 것이 불만이라면 불만이었다.

 

“야, 그렇게나 핫팩이 좋아? 인식증 다 닳겠다.”

 

“그치만... 사령관이 날 생각해서 준 거니까.”

 

“나참, 누가 보면 킹치만 소리를 입에 달고 사는 빨간 머리 대장인줄 알겠네. 마침 같은 빨간 머리 아니야?”

 

“너처럼 하얗게 센 것보다는 낫거든.”

 

장화의 삐딱한 대답을 되받아치려던 천아는 순간 주위에 느껴지는 사령관의 기척을 느끼고 짓궂은 웃음을 띠며 장화에게 질문을 던졌다.

 

“킥, 뷰웅신. 너 그보다 빨리 안 도망쳐도 괜찮겠어?”

 

“뭔 소리야? 또 내 인식증 뺏어가려고?”

 

“아니~ 잘해봐!”

 

사령관이 점점 가까이 오자 천아는 재빨리 몸을 숨겼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던 장화는 얘가 점심을 잘못 먹었나 생각했으나, 이내 사령관이 자신의 시야에 들어오자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사고가 정지했다.

 

“에, 에, 에엣....?!”

 

잘 익은 제철 딸기처럼 새빨갛게 물든 장화를 본 사령관은 미소와 함께 인사를 건넸다.

 

“안녕, 여기서 뭐하고 있었어?”

 

“그... 그게...”

 

뭐라고 말을 하려고 하지만 새하얘진 머릿속에서는 아무런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혀도 옴짝달싹하지 않자 장화는 망했다는 생각을 속으로 되풀이했다.

 

“뭐, 말하기 힘들면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 요즘 힘든 건 없어?”

 

다행히 사령관은 인간관계를 다루는데 굉장히 능숙하였기에 그녀가 당황하는 것을 보고 더 걱정하지 않게 대화주제를 바꾸어주었다. 멈춰있던 사고가 다시 돌아가기 시작한 장화는 이 질문에는 제대로 답하겠다는 생각에 굳어있던 입을 급히 움직였다.

 

“없어! 그냥 뭐... 똑같아...”

 

대답을 했으나 사령관이 흠칫 놀라는 기색이 읽힐 정도로 첫 대답이 크게 나왔다. 그에 대한 부끄러움으로 뒤에 이어지는 말은 점점 기어들어갔고 장화의 머릿속은 후회로 가득찼다.

 


‘으아! 나 진짜 뭐하는 거야! 

 

이 바보! 대답 하나 똑바로 못하는 거야?! 

 

사령관이 날 미워하면 안 되는데. 

 

날 바라보지 않으면... 혼자 두면... 

 


...안 되는데....'

 


자책의 수레바퀴가 남긴 자국은 두려움. 어느새 자신이 있을 장소를 빼앗기고 미움 받아 버려질 것이라는 생각에 잠긴 장화는 눈앞의 사령관을 덥석 붙잡았다.

 

“사령관!”

 

“ㅇ, 왜?”

 

갑작스러운 장화의 행동에 사령관은 오늘따라 예민한 그녀의 반응에 당황함을 감추지 않았다. 그러나 장화가 뒤에 꺼내는 말을 듣자 당황함은 서서히 사그러 들었다.

 

“나... 버리지 않을 거지...? 혼자 두지 말아줘...”

 

그녀와 처음 만나던 순간부터 관계의 중심에 있던 감정. 철저히 폭력을 행사하며 관계를 상처 입히는 방법 밖에 모르던 그녀가 갈구하던 자신이 있을 자리. 스스로의 존재를 묻는 그녀에게 사령관 자신이 머물 곳을 마련해주었다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자신이 세상에 살아있을 이유를 느꼈을 것이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아는 사령관이었기에 그는 지금 자신의 눈앞에서 비 맞은 고양이처럼 덜덜 떠는 장화를 꼭 안아주며 토닥여주었다.

 

“괜찮아. 나는 절대 너를 버리지 않아.

 

여기 계속 있어도 돼.

 

네가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내게는 선물 같은 일이야.

 

불안해하지 않아도 돼. 네 옆에는 내가 있을 거야.”

 

사령관의 목소리가 나긋나긋하게 울리며 그녀의 귀에 전달되자 장화의 떨림도 점차 멎어갔다. 대신 심장고동이 점점 빨라졌지만 말이다.

 

“...몰라, 인식증이 있으니까 난 계속 여기 있을 거라고.”

 

여유를 되찾았는지 장화는 사령관의 말을 튕기며 평소의 태도로 돌아왔다. 하지만 귀까지 새빨갛게 물든 그녀의 모습은 누가 봐도 그녀의 말이 솔직하지 않음을 알려주었다.

 

“그래, 계속 머물러도 괜찮아. 여기 머무르면서 한 번 강의도 듣고 그래봐. 너를 위해 학생증도 발급했으니까 시간표를 보고 원하는 수업을 들어가면 돼.”

 

사령관은 품에서 플라스틱 카드를 꺼내 장화에게 건넸다. 오르카 종합대학 인문사회대학 철학과 소속이라는 글귀 아래에 장화의 사진이 붙어있었다. 

 

“이건...”

 

“네가 무슨 과를 들어가고 싶어 할 지 잘 몰라서 리마토르 씨가 있는 학과로 정했어. 모르는 게 있을 때마다 그 사람한테 가서 물어보면 잘 알려줄 거야.”

 

“...알겠어.”

 

사령관은 그녀의 대답을 듣더니 빙긋 웃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사령관이 지나가자 숨어있던 천아가 튀어나와서 장화의 학생증을 잽싸게 채갔다.

 

“야! 뭐하는 거야!”

 

“흐음~ 우리 장화가 이제 대학생이 되었구나?”

 

“돌려줘!”

 

“풋, 네가 철학과라니 참 웃기지도 않네.”

 

학생증에 적힌 장화의 소속을 보던 천아는 조소를 날리며 그녀에게 학생증을 돌려주었다. 학생증을 돌려받은 장화는 천아를 째려보며 사령관이 자신에게 준 인식증과 함께 손에 꼬옥 쥐었다.

 

“으이구, 그렇게 핫팩이 좋으면 그냥 확 고백하라니까?”

 

“무, 무슨 소리야! 내가 좋아하기는 뭘!”

 

“누가 봐도 ‘나 사랑에 빠졌어요’라고 광고하고 다니는 중이면서 뭔 소리야.”

 

“...그런 거 아니거든.”

 

“맞구만... 그렇게 좋아하는데 대체 왜 다가가지 못하는 거야?”

 

천아가 답답하다는 어투로 장화에게 물어보자 장화의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다. 천아는 평소의 장화처럼 ‘시끄러워!’라며 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으나, 그와는 사뭇 다른 반응에 자신이 실수한 건 아닌가 고민했다.

 

“...도저히 모르겠어. 내가 지금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지, 저 사람을 좋아해도 되는지...

 

오로지 여제님을 위한 사냥개로 살았지만 이제는 여제님도 앙헬도 없는 시대야. 홍련을 증오하며 사냥했던 과거도 있었지만 이제는 그것마저도 내가 할 일인지 모르겠어.

 

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거지? 애시당초 내가 만들어진 이유는 뭘까?”

 

깊이 있는 질문에 천아는 여지껏 자신이 장화의 내면까지 알지는 못했음을 깨달았다. 자신과 함께 멸망 이전에 여제를 위해 일한 장화였지만, 주어진 임무가 철충의 침략으로 강제종료 된 현재에 나름대로 적응해서 살아가는 자신과 달리 과거에서 사슬을 달고 있었던 것이었다.

 

“뭐 그런 것까지 고민하고 그래. 하루하루 적응하면서 살아가는 거지.”

 

“난 그걸 못하겠어. 내가 있을 곳이 어디인지 모른 채로 이런 고민을 반복하고 싶지는 않아.”

 

장화의 표정이 복잡해보이자 천아도 생각이 깊어졌다. 다른 사람들에게 가볍게 대하는 그녀라고 해도 표현 내면의 감정까지 가벼운 것은 아니었다. 그 상대가 멸망 전에도 알고 지내며 같이 활동한 장화라면 감정적인 가벼움은 우주 끝과 끝의 거리만큼이나 멀었다.

 

“정 고민이 되면 그 교수한테 물어보던가. 그 리투아니아인가? 오르카호에서 대학 교수로 일한다는 그 사람 있잖아.”

 

“글쎄, 그 사람이 과연 도움이 될까? 전에 저녁 파티 때 갑자기 쓰러져서 실려 가는 걸 보면 몸도 허약해보이던데.”

 

“밑져야 본전이지. 합류했을 때 강당에서 말하던 모습 보면 입은 잘 쓰던데, 누가 알아? 널 입으로 해결해줄지?”

 

“갈라진 혀 완전히 갈라버리기 전에 조용히 해!”

 

천아가 해결방법을 권하면서도 장난스럽게 혀를 밖으로 내밀고 외설스러운 동작을 보여주자 장화는 톡 쏘아붙였다. 천아는 이제야 평소의 장화다운 모습으로 돌아왔다고 생각하며 말을 정리했다.

 

“한 번 가봐. 난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천아가 핫팩에게 가보겠다며 자리를 뜨고 난 뒤에도 장화는 한참을 고민했다. 그 남자가 정말 자신에게 고민의 답을 알려줄까? 철학이라는 학문이 이런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있나?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지만 장화는 답을 내리지 못했다. 그저 주인을 찾는 애처로운 고양이처럼 사령관의 작은 손길이라도 더 느껴보고자 학생증을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학생증을 한참동안 매만지던 중, 그녀는 한 문장을 발견하고 바로 결단을 내렸다. 강의실로 뛰어가는 그녀의 표정에는 날카로운 각오가 제대로 서 있었다.

 

 


 

리마토르는 최근 들어 식사시간조차 못 챙길 정도로 바빴다. 교양인 리버럴 아츠 강의와 전공인 철학 강의의 준비, 닥터의 학위논문 심사, 하르페이아와 수강생들의 리포트 채점을 돌리는 것이 개교 이후 그의 주 업무였다. 이 일과들이 조화롭게 자리를 맞추어 돌아가는 중간에 한동안 잊고 있던 자신의 학술논문 집필을 끼워 넣었더니, 그의 생각 이상으로 여유 시간이 대거 소멸하며 업무 간 균형이 깨졌던 것이었다.

 

“이런 망할... 선행 연구를 분석하고 내 생각을 정리해서 짜내는 데만 시간을 엄청나게 소요한다는 사실을 간과해버린 내 실책이야.”

 

오늘의 아침은 샌드위치 하나, 점심은 라떼 두 잔으로 가볍게 넘긴 그는 강의 시작 3시간 전에 리버럴 아츠 강의의 리포트 채점을 방금 막 마쳤다. 브라우니가 주 수강생이라 리포트의 질이 그다지 높은 편이 아니라서 리포트 한 편씩을 채점하는 것은 큰 부담이 되는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수로 밀어붙이는 스틸라인의 특성상 리포트의 양도 어마어마하다는 것은 그가 리포트 채점만으로도 상당한 체력을 소모하게 만들었다.

 

“격렬하게 운동을 한 것도 아닌데 땀이 이렇게나 나다니, 아무래도 좀 쉬어야겠어.”

 

그는 채점을 마치는 대로 마르쿠제의 <에로스와 문명>이 제시한 에로스 사회가 하일지의 <경마장 가는 길>의 등장인물 R의 생각에서 어떻게 나타나는가 비교하며 바이오로이드 사회의 성 윤리에 대해 고민해보려던 생각을 접고 책장 옆의 간이침대에 몸을 뉘였다.

 

“크으, 역시 전기장판을 켜서 따끈하게 해둬야 허리를 지질 수 있다니까.”

 

그가 뻐근한 허리를 뜨끈뜨끈한 열기로 치료하며 피로를 풀던 중, 문 밖에서 노크가 울렸다. 막 휴식을 취하려는 참에 손님이 방문했다는 사실에 불만을 표하던 그는 일어나서 문을 열었다.

 

“네, 무슨 일이신가요?”

 

문을 열자 그의 가슴께에 이마가 닿을 법한 빨간 머리의 작은 아가씨가 있었다. 홍련을 닮은 인상에 세미콜론 모양의 점을 가진 그녀는 뭐라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우물쭈물거렸다.

 

“저기, 저한테 하실 말씀이...?”

 

기다리다 못한 그가 조심스럽게 먼저 말문을 열자 장화는 학생증을 그에게 내밀면서 황급히 말했다.

 

“당신이! 내 지도교수니까... 그렇게 학생증에 나와 있었어...”

 

첫 목소리는 리마토르를 깜짝 놀라게 할 정도로 컸으나 점점 기어들어갔기에 귀를 기울여야만 간신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녀가 무슨 일로 찾아왔는지는 아직 몰랐으나,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사항임은 확신한 그는 그녀를 안으로 안내했다.

 

“자, 편히 앉으세요. 커피 괜찮으시죠?”

 

“으, 응.”

 

천아 이외에 따로 개인적인 시간을 보내는 바이오로이드도 없었고, 사령관 이외의 인간 남성과 독대하는 것도 처음이었던 장화는 편하게 있으라는 리마토르의 말과 정반대로 뻣뻣하게 굳어있었다. 리마토르는 그녀의 분위기를 풀어주고자 커피를 한 잔 건네며 책상을 메우고 있던 서류 무더기를 바닥으로 내렸다.

 

“이거 미안합니다. 한창 연구가 진행 중이라 자료가 많아서 지저분하네요.”

 

“아, 아니야. 그런 건 무, 문제가 안 돼.”

 

“그리 말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저한테 무슨 일로 찾아오셨는지는 모르겠으나, 제가 지도교수라는 이유로 찾아오셨다는 건 제게 무언가 도움을 요청할 일이 있어서 그러신 것 같군요. 무엇이든 편히 말씀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녀가 경계심을 곤두세우지 않게 부드러운 어투로 말한 리마토르는 자신의 발언에 대한 장화의 반응을 관찰했다. 아직 그를 신뢰하지 못하는지 눈에 힘이 빠지지 않았으나, 그녀가 말문을 열자 그는 관찰을 중지하고 경청을 시작했다.

 

“철학이라는 학문이 바이오로이드의 존재에 대해서도 가르쳐줘?”

 

그녀의 질문에 리마토르는 속으로 의외라며 놀랐다. 자신이 오르카호에 합류한 이후로 하르페이아와 네오딤을 제외하면 자신에게 그 질문을 던진 이는 없었다. 그러나 자신을 떠보려고 한 사령관처럼 간단한 질문일 가능성도 배제하기에는 일렀다.

 

“물론이죠. 철학의 형이상학이 존재에 대해서 탐구하는 학문이랍니다.”

 

“...그렇다면 알려줘. 나는 왜 살아야만 하는 거야?”

 

장화의 질문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오로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러 왔음이 그녀를 모르는 리마토르에게도 확실히 읽혔다. 그 정도로 그녀의 눈에는 각오가 들어차있었고 말은 뚜렷했다. 잠시 고민하던 리마토르는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제가 전공한 학문은 철학이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틀을 넓힌 ‘인문학’을 주제로 이야기 해보죠. 두 학문 간의 차이가 느껴지시나요?”

 

“...모르겠어. 특별히 다른 점이 있나?”

 

“사회에서 인문학을 지칭하면 대개 철학이 나옵니다. 사실 인문학은 문학, 어학, 사학, 철학, 문헌학 등을 포괄하는 학문으로, 인간과 인간의 근원문제를 다루는 학문입니다. 철학은 인문학의 하위 분야죠.

 

인문학이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를 탐구하는 학문이라고 하지만 저는 더 쉽게 말해 ‘질문하는 학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극한상황에서 스스로의 본질을 물음으로써 자신을 이해하고 위로를 건넬 수 있는 것이죠.”

 

“그래서 천아가 여기를 추천한 건가...”

 

리마토르의 말을 듣던 장화는 천아의 생각을 이해하고 혼잣말을 뱉었다. 

 

스스로에 대한 답을 찾는 것철학, 인생의 여러 가지 모습을 보여주는 것문학, 다른 사람의 발자국에서 자신이 갈 길을 찾는 사학. 인문학을 대표하는 학문을 꼽으라고 하면 흔히 말하는 문사철(文史哲)이라는 학문을 말하는데, 이 학문들을 통해 우리는 스스로를 이해하고 살아갈 방향을 알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개인적 위로를 넘어 사회적 위로가 가능한 시스템에 초점을 맞출 수 있죠. 모든 학문의 주체가 사람으로 귀결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이 중심에 있는 학문을 통해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게 바로 인문학이죠.”

 

“그런 말을 들으니 믿음이 가는 걸. 이제 제대로 내 문제를 해결해주길 바래.”

 

리마토르의 말을 들은 장화는 흥미가 동하였는지 유희가 담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말투도 긴장에 휩싸여 부자연스러웠던 이전과 달리 평어체로 돌아왔다. 그런 그녀의 반응을 보며 자신의 1차 전략이 유효했다고 판단한 리마토르는 바로 2차 전략을 꺼내들었다.

 

“장화 씨에게 삶이란 무엇인가요?”

 

“....내가 그걸 알아보려고 여기 온 게 아닌가?”

 

질문을 해결하려고 왔는데 역으로 같은 질문을 받자 장화는 방금 전까지 자신이 가진 흥미가 전부 착각이었나 의문이 들었다. 자신이 표현을 잘못했음을 깨달은 리마토르는 급히 말을 수정했다.

 

“표현을 정정하겠습니다. 장화 씨에게 삶은 무엇으로 가득 찬 것인가요?”

 

“음...”

 

리마토르의 질문에 장화는 턱을 괴더니 잠시 고민했다. 오로지 단 한 사람, 마리아 리오보로스를 위해 싸웠고, 홍련을 증오하여 몽구스 팀 전원을 죽이려고 했던 과거의 자신에게 가득 차 있는 것은 ‘고통’뿐이었다.

 

“고통. 그거 같아.”

 

“그렇군요. 장화 씨는 고통을 통해 얻은 것이 있으신가요?”

 

재차 돌아온 그의 질문에 그녀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오랫동안 쌓였던 기억과 감정들을 전부 들여다보며 마주하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생각을 거듭할수록 그녀의 머리가 점점 뜨거워지며 속 안에서 무언가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그건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없었다. 분노, 우울, 공황, 절망, 공포, 뭐라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부정적인 감정의 덩어리였다.

 

“...없어.”

 

“없으신가요?”

 

“정확히는 모르겠어. 이 감정을 대체 어떻게 말해야하는 거지...?”

 

혀끝에는 맴돌지만 정확히 말하기 어려운 답답한 감정을 그녀가 표정으로 드러내자 리마토르는 금방 그녀의 감정을 파악했다.

 

“뭔지 알겠습니다. 스스로의 감정이 무엇인지 정확히 표현하기 어려울 뿐, 고통에서 유발된 감정은 분명히 존재하니까요.

 

자, 지금부터 우리는 장화 씨가 지금 느끼는 감정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눌 겁니다. 잘 따라오실 수 있으시겠어요?”

 

리마토르는 재빠르게 머리를 굴려 할 말을 전부 구상하고 그녀에게 동의를 구했다. 장화가 그의 제안에 그러겠다고 답하자 그는 말문을 열었다.

 

“분노, 비탄, 슬픔의 감정으로 괴로워서 자해를 하거나 타인을 공격해도 분노와 비탄, 슬픔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저 그 감정을 느끼는 일이 유예된 것일 뿐이죠.

 

기쁨, 즐거움, 좋음의 감정처럼 화려하고 쾌락을 주는 감정이라도 영원히 행복을 주지 않습니다. 그런 감정들을 촉발하는 일이 지나간 후에는 공허함이 남죠.

 

결국 긍정적인 감정도 부정적인 감정도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 감정들에서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 것은 처음부터 잘못된 일이죠. 그럼 우리가 감정에 대해서 이야기하겠다는 것은 무엇이냐? 바로 감정이 온 근원과 감정을 조절하는 방법을 찾아보자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이해가 되시나요?”

 

리마토르는 은은한 웃음을 지으며 장화를 바라보았다. 한 번에 많은 정보가 들어와서 이해에 애를 먹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고개를 위 아래로 끄덕이는 것을 보니 아직 따라갈 만하다는 뜻이었다. 그녀의 반응을 본 리마토르는 그녀의 눈을 감겼다.

 

“눈을 감으면 무엇이 보이나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보인다고 해봤자 어둠이지.”

 

“그렇죠. 그럼 눈을 그렇게 꼭 감은 채 손을 내밀어 보세요.”

 

장화가 손을 내밀자 리마토르는 서랍을 열더니 잡동사니를 꺼내 장화의 손 주변에 흩뜨려놓았다. 그녀의 양손 모두를 책상에 바짝 붙이게 지시한 뒤 그는 그녀에게 다시 말했다.

 

“저는 책상 위에 여러 물건을 올려놨습니다. 제가 뜨라고 하기 전까지 눈을 절대 뜨지 마시고, 책상에서 쓸모 있는 물건과 그렇지 않은 물건을 구분하세요.”

 

“잠깐만, 눈이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하라는 거야?”

 

“손에 느껴지는 감각으로 한 번 해보세요.”

 

장화는 잠시 당황했으나 이윽고 천천히 물건을 만져보기 시작했다. 그녀는 전신의 감각을 손끝에 집중해서 물건을 어루만진 정보로 물건의 정체를 상상했다.

 

‘동그란 원통? 이건 필통인가. 그럼 필요하겠어.

 

이건 끝이 뾰족한 거 같은데... 가늘고 짧고 뾰족한 건 이쑤시개인가?

 

말랑말랑하고 차가워. 고무 같은 걸 보니 지우개일 거 같아.

 

종잇조각? 보나마나 쓰레기겠지.’

 

“끝나셨나요? 이제 눈을 뜨고 보세요.”

 

장화가 분류를 마치자 리마토르는 그녀에게 자신이 한 일을 보라고 시켰다. 눈을 뜨고 자신의 분류를 본 장화는 탄식이 자신의 입 밖으로 나오는 것을 막지 못했다.

 

장화가 필통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다 먹은 국수통이었고, 이쑤시개라고 생각했던 것은 볼펜심이었다. 지우개라고 추측한 건 골무였고, 종잇조각은 리마토르가 논문 초안을 정리한 종이였다.

 

“하나도 안 맞잖아...”

 

“생각하셨던 것과 많이 다르신 것 같네요. 왜 그런 걸까요?”

 

“그야 당연하지. 눈을 감고 분류를 시키면 그걸 누가 해?”

 

리마토르가 천연덕스럽게 질문을 던지자 발끈한 장화가 톡 쏘는 말을 던졌다. 그는 자신의 의도대로 잘 반응해주었다는 생각과 함께 말을 이었다.

 

“그렇죠. 방금처럼 어둠속에서 물건을 분류하려고 했던 장화 씨의 모습을 불교 철학에서는 무명(無明), 지혜가 없는 것이라고 합니다. 자신의 눈앞에 있고 만지기까지 하는 물건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쓸모가 있는지 없는지조차 모르니 아무거나 무작정 만져보는 것이죠. 제 책상 위에는 위험한 물건이 없었지만 만약 칼이나 압정이라도 놓여있었으면 어땠을까요?

 

손을 찔렸겠죠. 피가 날 테니 짜증이 올라와서 물건을 대충 한 곳에 밀어넣을 수도 있고, 아니면 더 이상 물건을 건드리지 않고 안전한 상태를 유지하려 할 수도 있죠. 이런 행위가 모두 무명입니다.”

 

“내가 지혜가 없다고? 그럼 지혜가 생기면 책상이 자동으로 치워져?”

 

장화는 그가 황당한 소리를 한다며 짜게 식은 표정으로 쳐다보았으나 리마토르는 고개를 저으며 말문을 이었다.

 

“지혜가 생겨도 여전히 물건은 제자리에 있죠. 그러나 우리가 그 물건이 무엇이며, 쓸모가 있는지 없는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다시 말해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구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분류하려고 했던 물건들은 불교 철학에서 ‘번뇌’라고 말합니다. 삶을 살아가며 마주치는 일로 드는 미혹한 감정들과 고민들이죠. 저도, 장화 씨도 모두 지혜가 없는 무명 상태로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랬기에 어둠 속에서 물건의 정체도 몰랐고, 분류를 제대로 못해서 손을 다치기도 했죠. 손을 다쳐서 분노하기도 했고 절망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왜 우리는 이렇게 고통스러운 걸까요?

 

불교 철학에서는 그 원인을 탐(貪)진(嗔)치(恥)라고 합니다. 멈출 줄을 모르고 탐욕에 빠져서, 해야 할 일과 그러지 말아야 할 일을 구분하지 못하고 무지한 일을 반복해서, 분노에 빠져 제대로 생각을 하지 않고 감정에 이끌려 다니면 전부 괴로움만 남는다는 것이죠. 

 

괴로움은 번잡한 생각인 번뇌를 부릅니다. 우리는 번뇌에 빠져 다시 괴로워하거나, 번뇌가 미치지 않는 범위에서 가만히 있거나, 번뇌가 사라지기를 바랍니다. 이것들은 감정의 본질을 보지 못하게 막으니 전부 지혜가 없는 상태, 무명에 빠진 것이랍니다.”

 

“지혜를 가지면 내가 뭘 하고 하지 말아야 할지 알 수 있게 된다는 거잖아. 그럼 다 되는 거야?”

 

“그렇지 않습니다. 지혜를 통해 분별이 가능해졌으면 우리는 실천을 해야 하죠. 물건을 분류하고 정리함으로써 우리가 지혜를 통해 알게 된 것을 현실로 옮겨야만 비로소 책상이 정리가 되는 것이죠.”

 

“하, 그러면 ‘지혜를 갖고 실천해라.’ 이게 해주고 싶은 말의 전부야?”

 

리마토르의 원론적인 말에 장화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자신이 그런 말을 들으려고 이 곳에 아니라는 생각에 자리를 뜨려고 했으나, 리마토르가 잇는 말에 생각이 바뀌었다.

 

“아닙니다. 지혜를 갖고 실천해도 여전히 괴로움이 있죠.

 

삶이란 괴로움으로 가득 찬 것입니다. 살아가면서 겪을 수밖에 없는 다양한 느낌, 감정, 생각 등이 전부 괴로움과 번뇌를 일으킵니다. 우리가 책상을 정리해도 생활을 하다보면 새로운 물건이 들어와서 다시 정리가 필요한 순간이 오는 것과 같은 이치죠.”

 

“지혜를 가져도 고통뿐이라는 거잖아. 무슨 의미가 있는 건데?”

 

“아주 큰 의미가 있습니다. 장화 씨는 나비를 좋아하시나요?”

 

“나비... 싫어하지는 않아.”

 

“그럼 바퀴벌레는요?”

 

“그야 질색이지!”

 

“같은 곤충인데 왜 바퀴벌레를 차별해요?”

 

“지금 나랑 장난해?”

 

리마토르의 질문에 장화는 표정을 구기고 그를 쏘아보았다. 리마토르가 그녀에게 웃으면서 설명을 해주려고 하자, 장화는 자신이 끝이 없는 동굴에 빠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모두 같은 곤충인데 싫어하는 이유는 ‘어떻게 생겼냐’는 조건의 차이 때문입니다. 인(因)과 연(緣)의 결과로 만들어진 조건언제나 바뀌는 것입니다. 조건과 조건이 변하면 시시각각 상황이 변하는데, 조건에 집착하여 붙잡아야 할 것과 놓아주어야 할 것을 분별하지 못하면 괴로움과 번뇌가 발생하죠.

 

분별을 잘해서 붙잡아야할 것만 잡는다고 해도 우리는 지난 선택지의 조건을 떠올리며 ‘이랬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괴로워하죠. 이것이 반복되는 것이 삶입니다.

 

하지만 노력해도 바뀌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책상을 계속 정리하면서 점점 쓸 수 있는 물건이 많아지는 것처럼, 해야 할 일을 알고 실천하면 우리는 얻는 것이 존재합니다. 중간에 잘못된 길을 택한다고 해도 올바른 길을 택해서 바로 잡으면 과정에서 얻는 것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건 오직 ‘나’뿐이에요. 장화 씨의 삶이 괴로운 것은 스스로에게 조타키를 맡기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외부에 의해 주어지는 고통에 맞서 취할 방법을 몰라서 무명에 잠겨있었고, 번뇌가 반복되며 고통에 몸부림쳤을 겁니다.


스스로의 인생이 괴로움으로 가득찼다는 사실에서 눈을 돌리면 안됩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인정하고 어떤 방향으로 삶을 바꾸어 나갈지 탐구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끊임없는 실천을 통해 삶을 매일 닦아나가면 어느 순간 현실의 고통을 초월하여 삶이란 그 자체로 의미를 만들 수 있는 기회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의 말에 장화는 누군가 자신의 머릿속에 바람을 불어넣은 느낌을 받았다. 괴로움에 몸부림 쳐왔지만,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해도 자신이 돌아갈 곳은 그 곳 밖에 없다는 생각에 계속해서 고통 속으로 돌아가는 삶을 되풀이해왔었다. 그런 삶을 반복하며 바뀌기를 갈망했지만 어떻게 바뀌고 싶은지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번뇌.... 라는 거지?”

 

“네.”

 

장화의 표정이 점점 굳자 리마토르는 불교 철학 외에 두 가지 철학을 더 일깨워줘야 이해가 쉽겠다면서 말을 덧붙였다.

 

“말이 복잡해서 어렵죠? 조금 더 쉽게 이야기해보죠. 20세기 초반에 활동한 카시러라는 학자가 있었습니다. 카시러는 상징주의를 내세운 신칸트학파 철학자였는데, 세계를 하나의 상징으로 보고 해석하는 것이 세계를 받아들이는 과정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차근차근 알아봅시다.

 

카시러모든 것을 비판적으로 보려고 한 신칸트학파의 거장이었습니다. 그는 신화, 언어, 예술, 과학처럼 모든 감성적인 현상의 전체를 말로써 의미를 구현하고자 했습니다. 말을 통해 의미가 구성된 것을 상징형식이라고 했죠. 이러한 상징형식들은 외부세계를 수동적으로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정신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카시러는 우리가 존재하는 세계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능동적으로 구성한다고 주장했죠. 카시러는 이런 상징이 직관과 지각의 영역에서부터 이미 작용하고 있다고 봅니다. 직관과 지각에는 감각적인 인상들을 외부로부터 수용하는 능력을 넘어, 그것들을 독자적인 형성법칙에 따라서 형태화하는 능력도 존재하기 때문이죠. 따라서 만약 대상에 대한 인식이 항상 어떤 독특한 상징형식을 통해서만 행해질 수 있다면 상징형식이 달라짐에 따라서 대상도 완전히 다르게 나타납니다.

 

복잡해보이지만 카시러의 주장을 요약하면 ‘인간은 세계를 특정한 상징형식으로 해석한다.’입니다. 세계를 구성해가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는 것이죠. 장화 씨도 인간이기 때문에, 장화 씨가 살고 싶으신 세계를 본인이 원하는 상징형식으로 해석해서 구축할 수 있습니다.”

 

리마토르는 그리 말하고 커피를 마셨다. 마른 목에 식어서 미지근해진 커피가 넘어가자 촉촉하게 수분이 보충되었다. 그의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장화는 다시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지금까지 한 말을 종합하면 무엇이 옳은지 파악하여 실천하라는 거네. 옳은 방향을 걸으며 내가 원하는 가치로 세계를 해석해서 구축하면 행복해질 수 있다는 뜻이고.”

 

“그렇습니다.”

 

길고 복잡한 주장을 잘 받아들인 그녀를 보며 리마토르는 길게 말한 보람을 느꼈다. 그러나 내심 흐뭇한 그와 달리 장화는 아직 풀리지 않은 의문을 그에게 물었다.

 

“내가 원하는 세계를 만들라는 말은 잘 알았어. 그걸 대체 어떻게 시작해야하는 거지? 세계를 어떤 식으로 해석해야하는 건데?”

 

구체적 방안에 대한 질문. 여태까지 그가 말한 방안이 이론에 불과했음을 깨달은 그는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연구하며 읽은 자료들이 저장된 두뇌에서 답을 검색한 그는 말문을 열었다.

 

“카시러와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비트겐슈타인이라는 철학자가 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 철학의 대가로, 세계가 어떻게 언어로 구성되는가를 연구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의 사상은 전기후기로 갈립니다. 전기 철학에서 그는 언어를 세계의 모사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세계를 완벽하게 묘사한 이상적인 언어가 존재할 것이라고 믿었으며 올바른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아름다운 세계를 구성하는 방법이라고 주장했죠. 후기 철학은 이와 극명히 갈립니다. 중년이 된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이 청년이었던 시절에 주장한 이상 언어론을 폐지하고 일상의 언어로 세계를 아름답게 구성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언어는 사용자에 따라 특정한 의미를 부여받고 하나의 장기말로 쓰이기에, 어떤 언어에 무슨 의미를 부여하는가가 중요한 문제라고 보았습니다.

 

두 주장의 결이 많이 다르지만 귀결되는 것은 ‘언어를 올바르게 사용함으로써 이상적인 세계를 찾을 수 있다’입니다. 제가 장화 씨에게 부탁드리고 싶은 게 이겁니다.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세계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세계를 정의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하죠. 그 수단으로 언어를 사용하셔서 원하는 세계를 만드시길 바랍니다.

 

지금까지 장화 씨께서 사용한 언어는 부정적인 것들이 다수였습니다. 제게 찾아오셔서 하신 말에 쓰인 주요 어휘가 ‘아니다’처럼 부정어구였죠. 이에 기초하여 그동안 스스로 세계를 어떻게 해석하셨는지 생각해보시면 어떻게 다른 해석을 시작하셔야할지 어렴풋이 감이 오실 겁니다.”

 

그녀의 질문에 완전히 답을 준 리마토르는 그녀의 표정을 관찰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눈매를 날카롭게 세우고 고민을 이어갔던 그녀가 지금은 눈에 힘을 풀고 그를 편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여유를 찾다 못해 처음 들어왔을 때와 달리 엷은 미소까지 입에 건 그녀는 그에게 감사를 표했다.

 

“고마워. 여기 오길 정말 잘한 거 같아. 덕분에 내가 뭘 해야 할지 알았어.”

 

“아닙니다. 저는 제 일을 한 것뿐인걸요.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정말 고마워, 다음에 강의하면 꼭 들으러 올게.”

 

장화는 그에게 손을 흔들고 문밖으로 나왔다. 강의실 앞 복도는 여전히 적막이 흘렀으나 왔던 길과 달리 마음이 가벼웠다.

 

‘내가 원하는 세계... 내가 있어도 되는 세계...

 

그 세계를 만들어 줄 수 있는 사람...’

 

리마토르의 강의를 곱씹던 그녀는 그 자리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러고는 발걸음을 45도 돌려 자신의 방이 아닌 다른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 무슨 일이야?”

 

사령관실에 도착한 그녀는 가볍게 노크하고 문을 열었다. 업무를 보던 사령관이 그녀를 보고 말을 걸자 그녀의 심장은 100m 달리기를 한 듯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얼굴에 피가 몰려 그녀의 머리색처럼 새빨개지자 입도 굳어갔다.

 

‘이러면 안돼, 하고 싶은 말이 있잖아.’

 

“어디 아파? 열나는 거 같...”

 

말없이 얼굴이 불콰하게 달아오르는 그녀를 보며 걱정이 된 사령관이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에게 꼭 건넬 말이 있었던 그녀는 단단하게 붙은 입을 열려고 했으나 입보다 몸이 한 박자 더 빨랐다. 그녀는 팔을 벌려 사령관을 폭 끌어안았다.

 

“장화야...?”

 

갑작스러운 장화의 포옹에 사령관은 약간 당황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감정에 개의치 않고 더듬더듬 말문을 열어 하고 싶은 말을 꺼냈다.

 


“난... 그동안 내가 있어도 될 곳을 몰랐어. 그게 싫었고, 나랑 다르게 서로가 서로의 보금자리가 되어주는 몽구스팀을 파괴하려고 했었지.

 

여제가 사라진 후에도 난 내 감정을 정확히 알지 못했어. 내가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걸까, 정말 여기 머물러도 되는 걸까 몰랐었어.

 

하지만 이제는 알 것 같아. 내가 원하는 세계를 이 곳에서 시작하고 싶고, 그래서 너에게 이 말을 꼭 해야겠어.

 

 

나는 너를 사랑해. 그러니까... 너도 날 사랑해줘, 아주 많이.”

 



장화는 그렇게 말하더니 까치발을 뻗어 사령관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새로 뿌리내릴 곳을 찾은 새빨간 그녀의 입술에서는 장미향이 은은하게 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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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날 다음에 바로 올리겠다고 해놓고 3주 가까이 지나서 와서 정말 미안하다.... 변명 아닌 변명을 해보자면 원래 장화 에피소드는 불교 철학 하나만 쓰려고 했었어. 그런데 쓰고 나니까 카시러 철학과도 연결할 수 있고, 비트겐슈타인에 후설, 알프레드 아들러 철학까지 이어붙일 수 있을 것 같아서 자료 찾고 추가해서 더 내용을 늘렸었어. 그렇게 다 쓴 뒤에 다시 읽어보니 너무 내용이 방대하고 꼬여있어서 후설과 아들러 부분을 쳐내고 결말을 매끄럽게 조정해서 끝을 냈어. 그 과정을 다하고 나니까 지금에 이르게 되었지.


장화 에피소드 신청해준 사람들에게는 늦어서 많이 미안할 뿐이다. 긴 시간 들인 것치고 퀄리티도 높은 편이 아니라서 할 말이 없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