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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 여기 말고 다른 지역도 가보고싶은데 말이지”

예를 들면 어떤 것 말씀이십니까?”

 

배가 꺼지길 기다리며 두 사람은 정처없이 걷는다.

 

뭐 사실 어디던 상관은 없어. 그냥 여기 말고 다른 곳은 없나 싶어서…오메가랑 철충 때문에 갈 곳도 별로 없지만”

 

사실 방주를 떠나려면 못할 것도 없었다. 위치는 이미 델타에게 알려진 곳이고 건질만한 데이터도 대부분은 폐기되었으며 나머지는 백업을 해두었다. 무작정 휴식을 취하기엔 땅이 단단해서 여러명이 거주할 건물을 올리기 힘들고, 날씨도 매우 추운 곳이라 난방 인프라를 설치하는 자재가 추가로 요구되었다.

 

그러면 지금이라도 옮기심이 좋지 않겠습니까?”

 

물론 바다에는 별의 아이가, 그리고 땅에는 이상하게 난폭해진 철충들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예 못 움직일 정도도 아니었다. 당장 이 곳으로 펙스의 부대가 쳐들어온다면 도망치던 싸우던 해야하는 건 마찬가지였으니 말이다.

 

그냥, 아직은 때가 아닌 것 같아서”

 

새로운 주둔지를 만들고, 휴식을 겸한 시간동안 다들 나름대로 이 곳에서의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자신만의 가게를 만들고, 다른 바이오로이드들과 교류하고, 서로 즐길 수 있는 이런 생활을 아직은 그만두고 싶지 않았다. 모든 이들의 노력이 담긴 땅이니 만큼 그저 주둔지 하나로 남기고 싶지는 않았다.

 

이런 생활은 즐길 수 있을 때 즐겨둬야하지 않겠어”

 

사령관이 무어라 이야기를 한다. 다이카의 눈에 싱긋 웃는 그의 모습이 담기고 귀에 담담한 그의 목소리가 들리지만 좀처럼 그것에 신경을 모을 수가 없었다.

혹여나 자신의 잘못이 들키지는 않았을까, 사령관은 이미 눈치를 챘음에도 자신을 생각해서 모른 척 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사령관은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머릿속이 상념으로 들어차니 눈 앞에 있는 것이 탁해진다.

후회한 들 늦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답답함이 가시지는 않는다. 어린아이라면 치기어린 단순함에 거짓말을 했다고 변명이라도 했을텐데, 그런 것 마저 통하지 않을 자신이 왜 거짓말을 한 것일까, 논리적으로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다이카”

 

사령관은 친절하고 상냥한 사람이다. 유능함도, 외모도 모두 그의 매력이겠지만 다이카는 그의 곧은 성품을 언제나 흠모하고 있었다. 장난기 있으면서도 진지할 줄 알고 자신들을 신뢰하면서도 이끌어 줄 줄 알았다. 하지만 다이카는 그런 모든 것 보다 사령관의 성격을 좋아하고 있었다. 인간이 아닌 자신이 인간 대 인간으로써 마주한다면 가장 먼저 눈에 띌 그의 성격이자 본질을 사모하고 있었다.

 

다이카?”

 

그런 사령관에게 아무렇지 않게 거짓말을 해버린 자신은 사령관에게 어울리는 바이오로이드인걸까, 그렇지 않다는 말이 머릿속에서 메아리친다. 요 며칠간 계속해서 고민한 것이 생각난다. 자신은 사령관에게 어울리는 바이오로이드인걸까, 사령관을 곁에서 지켜 줄 수도, 나서서 자신의 매력을 어필할 수도, 특별히 뛰어난 전공을 세울 수도 없는 그런 초라한 바이오로이드였다.

그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거짓을 준비했다. 그저 분위기를 좀 더 좋게 하기 위해서, 사령관이 자신과 있는 시간을 조금 더 즐겼으면 하는 마음에서였다.

그리고 그 거짓말의 근본적인 원인을 생각 할수록 자신의 가슴이 쓰렸다.

 

다이카? 들려?”

아, 네 사령관님”

 

몇 걸음이나 걸었을까, 낮이 짧은 스발바르 제도에 익숙한 밤이 찾아온다. 시골마을 같던 주둔지에 가로등이 일렬로 점등되자 꽤나 계획적으로 세워진 도시란 느낌이 물씬 풍긴다.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

 

가로등 불빛에서 살짝 비껴진 벤치에 몸을 던진 사령관이 늘어지게 기지개를 켠다. 다이카는 조용히 그의 옆에 앉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자신이 듣게 될 말이 어째선지 미리 들렸던 것 처럼 선명하다. 빗나가길 바라는 그 예상은 너무도 깨끗하게 들어맞는다.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는단 말은 누가 한 것일까. 다이카는 오늘만큼은 그 사람이 너무도 야속하다.

 

오늘 말야, 뭔가 분위기가 이상하지 않아?”

무슨 말씀이신지…”

뭐라해야하나, 다른 사람들이 유독 우리를 밀어준 느낌이어서 말이야”

 

사령관이 한마디 할 때 마다 입에서 뽀얀 김이 흩어진다. 무신경한 말이 하늘에 흩어지지만 다이카에게는 한 마디, 한 마디가 자신을 향해 꽂히는 창처럼 느껴진다.

 

부탁한거야?”

 

다이카는 말이 없다. 말라붙은 미소와 함께 끄덕거리는 고개만이 그녀의 뜻을 대변하고 있었다.

 

그랬구나”

 

사령관은 가로수 너머 하늘을 바라본다. 평소엔 별이 쏟아질 듯 많은데, 두꺼운 구름이라도 끼었는지 오늘은 캄캄한 하늘에 뒤덮힌 구름만 어둠속에서도 선명히 보인다.

다이카는 울지도, 변명하지도 않는다. 씁쓸한 미소만 입가에 띄운 채 가로등 불빛을 받는 흙길만 바라보고 있었다. 무거운 침묵 속에서 저 멀리서 늑대 울음소리만이 메아리친다. 

 

언제 눈치채셨습니까?”

글쎄, 언제라기보단…”

 

말을 끊은 사령관은 다이카에게 손을 내민다.

 

차 한 잔만 줄래”

 

다이카는 말 없이 짙은 보라색 보자기를 풀러낸다. 차게 식어있는 녹차는 가로등 불빛 때문에 더욱 노랗게 보인다. 잔에 담긴 녹차를 사령관은 한 번에 입에 털어낸다.

 

그래, 분명 다이카라면 이렇게 했겠지”

네?”

차를 달라고 하면 차를 주고 간식을 달라 하면 떡을 주겠지”

그건 그렇습니다만…”

그런데 오늘은 안그러더라고”

 

영문 모를 소리를 하는 사령관이 다시금 잔을 올리자 다이카는 차를 따라준다. 차가 다 떨어진 물통에서 마지막 방울이 톡 떨어지며 넓은 파형을 만든다.

 

다른 애들이 뭔소리를 했는지는 별로 안 중요해, 내가 점쟁이나 디자이너도 아니고 사실 그렇다 하면 그런가보다 하는거지, 커플서비스를 받는다던가 누가 뒤에서 밀친다던가 해서 몸이 겹친단 건 시도 때도 없이 경험하는거야”

 

찻잔이 아니라 맥주캔을 쥐고 할 말 같지만 사령관의 손에는 도자기로 빚은 찻잔이 들려있었다.

 

너가 평소랑 다르더라고”

 

땅만 바라보던 다이카가 그 한 마디에 사령관을 쳐다본다. 일부러라도 다이카와 시선을 맞추지 않는 듯한 사령관은 그렇게 자신의 속내를 내뱉는다.

 

어딜 가던 집중 못하고 딴 생각하는 것 같고, 초조해보이고…그러니까 대충은 알겠더라고”

역시 못 당하겠네요 사령관님에겐”

 

고개를 슬쩍 돌린 사령관이 이제 공을 다이카에게 넘겨준다. 조용히 땅을 바라보던 다이카가 입을 연다.


아마 다음편이 엔딩이지 않을까

이거 끝난 뒤로는 페어리를 좀 전체적으로 다루는 소설을 써보고싶은데 분량이 걱정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