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터는 엑소 기술을 이용해 의식을 데이터화하여 인류가 휩노스란 병에 저항을 갖게 할 목적이었다고 한다.

성공한다면 강력한 신체를 만들고 정신을 업로드하여 저항군의 전력 증강에도 도움이 되었을 거고.

엑소 군단이 빛 없이 벡스의 침공을 저지한 전적도 있으니 제대로 본 건 맞다.

하지만 내 이야기를 들은 이후로 프로젝트를 깔끔하게 포기했다. 고려할 사항이 너무나 많았고 하나의 결함이라도 치명적이었으니까.

프로젝트가 종결되었음에도 내가 지금 연구소로 향하고 있는 건


"레이시 씨?"


"아... 사령관님이 말씀하신 인간 님이시군요..."


내 이야기를 들은 사령관과 닥터가 내가 레이시라는 바이오로이드와 이야기해주기를 희망했기 때문이다.

둘 모두에게 큰 도움이 될 거라며 그녀의 정기진단에 연구실로 찾아와달라는 부탁을 받아 지금 이렇게 그녀와 마주보며 앉아있다.

닥터는 내가 도착하자 급하게 할 일이 생겼다며 슬쩍 빠져나갔다. 내게 선배로서 잘 이끌어달라는 귀띔과 함께. 선배라.

서로 가볍게 인사를 하고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어..."


"..."


어떤 이인지는 들었다. 하지만 뭐라 말을 꺼내야할지 모르겠다.

나도 말주변이 있는 편은 아닌데. 이런 건 헌터들이 잘한다고.


"...음. 오늘 날씨가 좋더군요."


"그런가요..."


함내라서 지금 시간도 모르겠지만.


"레이시 씨는 좋아하는 날씨가 있나요? 저는 비 내리는 날씨를 좋아한다 했더니 팀원들이 비만 오면 탑 난간 밖으로 내동댕이치지 뭡니까? 하하."


어떻게해야 그 주제로 자연스레 넘어갈까.

아무 말이나 되는대로 던지는 나와 반응이 없는 그녀.

입에서 '제가 EDZ에 있을 때' 라는 말까지 나오려할 때 그녀가 조그마하게 입을 열었다.


"...의미 없어요."


"네?"


"아무 의미 없어요. 제가 좋아하는 것들도, 기억들도, 저도. 모두 연구소에서 만들어진 가짜니까요."


"...무슨 일이 있었나요?"


잠시 머뭇거리다 머리를 짚으며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하는 레이시.

그녀가 눈을 뜬 건 실험실 안이었다.

그 곳에서 여러 가혹한 실험들을 당해왔다.

그럼에도 그녀는 희망을 놓지 않았다.

가족들을 생각하며. 언젠가 그들이 구하러 올 거라 믿으며.


"어느 날 벽이 무너지고... 저는 탈출의 기회라고 생각하며 발을 내딛었죠. 그리고 복도에서 본건... 저였어요.

네... 전 바이오로이드였던 거죠. 가족도, 갈 곳도. 모든 것이 가짜였어요."


"...가족들은 어떤 분들이셨나요?"


"...하하, 바이오로이드에게 가족이 어디있겠나요? 존재하지 않는 분들이에요.

떠올릴 때마다 절 아프게 해요."


"벗어나고 싶나요?"


"더는 아프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그들을 잊고 싶지도 않아요.


"그들이 레이시 씨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드나요?"


"아파요. 그만 해 줘요."


"제가 도울 수 있습니다."


머리를 싸매던 레이시가 일어서며 소리친다.


"돕는다구요? 인간 님이 절 어떻게 도우실 수 있나요? 제가 버텨오게 했던 그 모든 게 거짓이었을 때의 기분을 인간 님이 아세요?

전 가짜에요. 그 모든 게! 거짓이었어요. 가족이 보고 싶어요, 그런데 그들을 생각할 때마다 아파요!

저를 도와요? 어떻게요?

이런 거짓 기억에 붙잡혀있는 제가 우습나요? 또 희망을 주곤 갖고 놀려고 이러시는 건가요?

당신도 그 실험실 인간들이랑 똑같아!"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레이시의 주변 공기가 스파크로 파직거린다.

고스트가 헬멧을 벗지 말라고 신신당부했지만 지금은 이 방법 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어...?"


안광을 받아 반짝이는 레이시의 눈물들.

거친 숨소리가 잦아들 때까지 나는 그렇게 헬멧을 옆구리에 낀 채 한참을 가만히 앉아있었다.


"당신... 대체 뭐죠?"


진정한 레이시에게 엑소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했다.

마찬가지로 실험실에서 탄생한 존재.

그리고 불안정한 초기 엑소에 업로드되어 자신도 모르는 새 수 번의 죽음을 경험해봤을 백업 정신.


"저는 이전의 기억이 없습니다. 제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유일한 과거의 흔적이라곤 딸을 잊지 않으려 발버둥치는 한 남성의 음성기록 뿐이었죠."


"따님이...있으셨군요..."


"저는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만... 확신이 서진 않습니다. 엑소들은 재부팅을 할 수록 자아가, 기억이 흐려져갔고, 그걸 보충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기억을 조작했었으니까요.

어떤 엑소는 본 적 없는 어머니의 양파 피에로기 맛을 그리워했습니다. 그게 제겐 이름도 모르는 딸을 그리워하는 기억일지도 모르죠."


"당신은... 아프지 않나요?"


"많이 혼란스러웠습니다. 설원에서 깨어나 싸우고...쓰러지기를 반복하면서, 내게 정말 딸이 있었는가 하는 의문도 점점 커져갔지요. 제가 사람이었다는 것에도 의심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아니... 어쩌면 진짜 저는 여전히 딥스톤 무덤에 잠들어 있고, 이 기계 안 알카헤스트 방산충이 자신을 인간이라 착각하고 인간 행세를 하고 있는 걸지도요.

하지만 사실이던 아니던... 전 제가 인간이었다는 것과 딸에 대한 그리움을 제 과거로 받아들였습니다."


"...어째서죠? 화나지 않나요? 그 주입된 기억에? 인간들에?"


"그 기억이 절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전 착한 사람이 아닙니다.

하지만 나쁜 선택을 하려할 때마다 그 기억이 절 막아섰고, 그 기억 덕분에 모든 것이 무너졌을 때도 마지막까지 사람들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기억은..."


"가짜죠. 만들어진 기억이요.

그러나 그 기억을 바탕으로 행해온 것들은 제 기억입니다.

사람들을 도시로 데려오고, 친구를 사귀고... 그들을 지킨 기억들. 

어느 미친 과학자가 밀어넣은 가짜 기억도, 딥스톤 무덤에 잠들어있을 진짜 저의 기억도 아닌, 엑소로서의 저만이 가진 제 기억이요.

레이시 씨. 그 기억이 사실이던 아니던, 당신이 느꼈던 감정들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기억들로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당신도 온전히 당신이죠. 당신의 존재는 거짓이 아니에요.

당신이 겪었을 고통들... 이해해요. 진심으로 유감입니다."


그녀는 다시 천천히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무언가를 생각하다 긴 한 숨 끝에 입을 연다.


"...저도 할 수 있을까요? 받아들이는 것... 저만의 기억을 만드는 것..."


"할 수 있습니다. 그 짐을 짊어지고도 포기하지 않고 여기까지 오셨으니까요.

갖고 계신 기억으로 지금의 소중한 이에게, 자신에게. 추억을 만들어주세요."


의자에 앉은 채 내 헬멧을 가만히 응시하던 레이시는 무언가 결심한듯 네오딤에게 가봐야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미안해요. 아까 소리쳐서. 그리고, 고마워요."


"신경쓰지마세요. 아 참. 그리고 헬멧 벗은 건 비밀로 해줄 수 있겠습니까? 깐깐한 제 파트너가 알면 저 죽어요..."


가볍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여 약속한 그녀는 연구실을 나섰다.

그리고 그녀가 걱정된다며 근처에 있던 사령관이 들어와 묻는다.


"레이시 얼굴이 조금 밝아진 것 같네요.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냥 이야기나 좀 했습니다. 뭐, 아무 일 없었죠."


그저 과거에 붙잡힌 자와 과거를 잃어버린 자가 이야기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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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시 이야기랑 엑소 이야기가 많이 겹치길래 써봤는데 글쓰기 너무 어렵다.

문학 쓰는 분들 존경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