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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웜 S9입니다. 완벽한 보호를 약속 드리겠습니다."


우리의 첫 만남, 그녀의 말투와 표정은 딱딱하고 무미건조했다.


"음, 블랙웜은 감정 제어 모듈을 장착했다고?"

"그렇습니다. 사사로운 감정은 완벽한 호위에 방해되기 때문입니다."

"음...."


나는 다른 베틀메이드 인원들을 떠올려본다.

라비, 바닐라, 앨리스...

또 켐페니언의 리리스와 펜리르, 포이의 경우도 있었다.


모두 개성 넘치는 애들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나는 잘 지내왔다.


"글쎄.. 꼭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하는데."


"......말씀하시는 바는 알겠으나, 죄송합니다.

저 역시 저에게 어떤 오점이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해서이니,

보기에 안 좋더라도 양해를 부탁 드리겠습니다."


그녀가 엄격함으로 무장한 이유는 다정한 성격 때문이었다.

초기에는 다정다감한 성격으로 제작됐는데,

오히려 경호 대상과 유대가 너무 깊어져서

냉정을 잃고 패닉에 빠지는 등, 여러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감정을 제어하는 모듈을 탑재한 것이다.

항상 냉정할 수 있도록.


하지만 그건 멸망 전의 얘기다.

지금은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싶지만...


"그건 블랙웜이 스스로 선택한 거야?"

"예."

"...그렇게 말한다면 알겠어. 어쩔 수 없지. 앞으로 잘 부탁해."

"예. 잘 부탁 드리겠습니다. 주인님."


"참, 그러면 동침 관련해서는 어쩔까?

이건 나보다는 블랙웜의 마음이 중요한 문제야.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다면,

그 부분은 건너 뛰어도 돼."


그 말에 블랙웜이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여전히 무뚝뚝한 표정이지만.....


"주인님께 헌신하는 것은 저의 의무입니다.

부디, 원하시는 대로....."


살짝 흔들리며 왼쪽 아래를 향하는 그녀의 검은 눈동자.

거기서, 나는 감정 제어 모듈이 완벽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흐음.'


그때부터 나의 집요한 구애가 시작됐다.







"저기, 블랙웜을 번역하면 검은 벌레잖아. 흑츙이라고 불러도 돼?"

"........?"

"애칭을 하나 만드는 게 어떨까 싶어서."

".....예..... 주인님이 원하시는 대로....."


그녀는 아리송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아 보였다.


'좋아.'


또 며칠 후.


나는 책상에서 업무를 하다 말고 대뜸 외쳤다.


"아~~ 흑츙이 매끈매끈 레깅스에 뺨 비비고 싶다!!!"

".....그런 외설적인 발언은 삼가주시길 부탁 드립니다."

"아, 이런.. 혼잣말이었는데, 언제부터 와 있었어?"


방 한쪽, 블랙웜이 앉아 있었다.


"아까부터 있었습니다만..."

"그랬나? 집중하느라 몰랐네. 불쾌했으면 미안해."


내가 실실 웃으면서 그녀를 보자, 그녀는 살짝 고개를 틀었다.


"......."


아주 옅지만 그녀의 뺨이 붉어져 있었다.

나는 거기서 또 하나의 가능성을 봤다.


다시 며칠 후, 휴식 시간에 그녀에게 말한다.


"흑츙~ 귀 파주라~"

".....? 저는 대단위 전투 호위모델입니다. 이런 일은... 해본 적이 없습니다만...."

"난 흑츙이 해줬으면 하는데. 안 될까?"

"........알겠습니다. 그러면....."


그녀는 무릎에 내 머리를 두고 귀를 파주었다.


일이 끝난 후, 그녀가 작게 말한다.


"끝났습니다...."

"좀 더 이러고 있어도 돼?"

".......일이 바쁘기에...."


그녀는 매몰차게 거절하지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나는 살짝 미소 지었다.


"그러면 할 수 없지. 다음에 또 부탁해."

"....."


블랙웜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부정하지도 않았다.

그녀에게 저 정도 반응이면 긍정에 가까웠다.


'슬슬 때가 됐나.'


벌써 수십 명의 대원들과 친해진 나였다.

이 정도 쯤이야.







나는 블랙웜과 함께 복도를 걸으며 방으로 가는 중이었다.


"오늘 밤에는 뭐 할까?"

"......."


내 질문에 블랙웜은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렸다.

우리는 꾸준히 동침하고 있었다.

그녀도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았기에.


감정을 절제한 거지, 감정이 없는 것은 아니고,

또 나를 싫어하는 것 역시 아닌 듯했으니까.


"오늘은 옷 입고 해주면 안 돼?"

"그런...... 그런 외설적인 일은...."

"흑츙 레깅스에 뺨 비비고 싶은데."

".........그럼.. 조금만... 해드리는 걸로...."


은근슬쩍 변태적인 부탁을 하는 나.

머뭇거리지만 은근히 그걸 받아주는 블랙웜.


본인이 의식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그녀는 처음 만났을 때와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렇게 시시덕거리다가 복도 모퉁이를 돌 때였다.


"거기 서라 야외 노출증 환자!!!!"


켈베로스의 호각소리와 함께

붉은 나체의 개변태가 가슴을 출렁거리며 나를 덮쳐왔다.


"엥?"

"앗...!"


펜리르가 전속력으로 질주하다가 나와 부딪힐 기세였다.


"주인님!"


블랙웜이 나를 밀쳤다.

나는 벽 쪽으로 밀려났는데, 거기에는 펜리르에게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두 번째 노출증 환자,

니키 트레이시가 있었다.


"어머?"

"주, 주인님!!"


거대한 젖과 충돌해 코뼈가 작살나기 직전.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금란이 내 앞으로 뛰어들어 니키를 위로 흘려보냈다.


"아잉~ 이런 자세는 싫어어어~~!"


하늘을 붕 날아가는 니키.

다리를 활짝 벌려 적나라하게 드러난 뷰지가 내 머리 위를 지나갔다.


"오우야."

"주인님. 괜찮으신가요."


금란이 넘어진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내가 그녀의 손을 잡고 일어선 직후, 블랙웜이 달려왔다.


"주인님! 죄송합니다.

밀칠 게 아니라 제가 몸으로 막아드렸어야 했는데...!

경황이 없어 실수로 위험에 빠트려 버렸습니다."


"괜찮아."


나는 블랙웜을 달랬다.


"금란이 항상 지켜주고 있었으니까. 그치?"

"...저 뿐만이 아닙니다만."

"예...?"


그제야 블랙웜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곳곳에서 검은 그림자들이 불쑥 튀어나왔다가 쏙 들어갔다.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정체는 뻔했다.

리리스랑 페로, 앨리스 등의 대원들이었다.


"다들 고생이 많아. 자기 임무가 아닌 때에도."

"...모두 원해서 하는 일이니까요. 심려 마시기를."

"응."

"........!"


블랙웜은 무척 놀란 눈치였다.


"그럼 주인님. 저희는 이만...."

"응, 고생했어. 고마워."


금란이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떠났다.


사실, 이 모든 건 내가 짠 판이었다.

일상에서 일어나고 있기도 하지만.

특히 리리스의 경우, 시도 때도 없이 나를 스토킹했다.


굳이 이런 짓을 한 이유는, 그녀에게 일깨워주고 싶어서였다.

마음 급할 필요 없다고.

혼자가 아니니, 조금 마음의 짐을 덜어도 된다고.


블랙웜은 완벽한 경호를 약속했지만...

사실 혼자서 완벽할 수는 없는 법이다.


완벽함이란 같을 뜻을 둔 동료들이 모여 힘을 합쳤을 때 비로소 발휘되는 것이니까.


"이제 갈까?"


나는 블랙웜에게 손을 내밀었다.

많은 생각이 교차하는 듯, 살짝 멍한 표정을 지었던 그녀.


"네....."


여전히 멍한 표정으로, 그녀가 내 손을 잡았다.








"무릎베개 해주라."

"......예? 귀를 파드리는 거라면 해드리겠습니다."

"아니, 무릎베개. 허벅지 베고 자고 싶어. 해도 돼?"

"......예."


나는 그렇게 입에 달았던 대로, 그녀의 허벅지 레깅스에 누웠다.


"헤헤, 흑츙의 레깅스 매끈매끈~"

"......부끄럽습니다...."

"너무 기분 좋다. 이대로 자도 돼?"

"예......"


나는 눈을 감았다.

물론, 잠들지는 않았다.


아주 재밌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으...."


그녀는 작게 앓으면서 한참 동안 무언가를 고민했다.

언뜻 보이는 그림자로 판단하건데,

그녀는 내게 손을 뻗으려다가 망설이고,

또 뻗으려다가 망설이기를 반복했다.


'뭘 하려는 건지 궁금한데.'


나는 기다린다.


그리고 한참 후.

그녀가 내 머리칼을 살짝 쓰다듬었다가 손을 뗐다.


"......"


그 순간 모든 것이 멈췄다.

그녀의 그림자도, 숨소리도.


혹시라도 내가 깨어났을까 봐

확실히 잠들었는지 확인하는 듯했기에,

나는 잠든 척 가만히 있었다.


".........."


그리고 다시 한참 후.

그녀가 조심스레 내 머리를 손으로 빚기 시작했다.


"후후후....."


행복을 품은 웃음소리와 함께.





그로부터 얼마 후.

그녀는 감정 제어 모듈을 제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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