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도로 목적지를 정하자마자 우리는 인근에 있는 물자란 물자는 전부 공단으로 끌어와 비축하기 시작했다. 위로는 삼척 시멘트 공장에 적재되어있는 시멘트를 싹싹 긁어왔고, 아래로는 울산 조선소에 있는 각종 기계들을 통째로 뜯어왔다. 버려진 집에 있는 가전 기구 또한 대상 중 하나였다. 비록 오래되긴 했지만 안에 있는 첨단 반도체들과 오랜 시간 동안 전력이 끊겨도 멀쩡히 돌아가게 만들어 주는 자가 발전기는 결코 버려둘 수 없는 물건이었다. 


 

중요한 군사 기기도 아니고 일반 가정용 냉장고에 자가 발전기를 쑤셔박을 생각을 하다니. 22세기에 토니 스타크가 있었나? 손에 쥘 만큼 작은 이 녀석이 사실은 태양열 발전기라니. 우리 때의 태양열 발전기는 주로 옥상에 설치하는 거대한 판넬 형태였는데. 1세기 만에 훌쩍 발전한 과학 기술의 결과를 살펴본 나는 포츈의 지시대로 냉장고를 분해하는 스파르타 팀에게 태양열 발전기를 전해준 다음, 뒤에서 단말기를 만지는 그렘린에게 다가갔다. 

 


“앗, 민님이시군요! 부탁하신 작업은 다 되어가요!”


 

극지에서 주로 싸워왔다는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 출신인 그녀는 늦은 2월의 바닷바람을 막기 위해 두터운 코트를 입고 있었다. 주르르 흘러내리는 땀을 손으로 한번 훔친 그녀는 삐뚤어진 안경을 고쳐 쓰고선 

 


“일은 힘들지 않아?”


“스파르탄들이 군용 AGS들이여서 효율이 그렇게 높지는 못하지만 6할의 효율만으로도 충분히 처리할 수 있어요.”


“그래? 다행이네. 포츈은?”


“포츈 언니라면 지금 마지막 군수 물자 생산량을 오르카 호 개척부대에게 전달해주고 있으실 거에요. 레드후드라는 분도 가신다고 하니 배웅하실 겸 가보시는 게 어때요?”

 


그 얘기는 들었다. 레드후드는 오르카호에서 중요 보병부대를 맡은 스틸라인의 대장인 마리의 부관 자리를 오래 비우게 할 수는 없으니 그녀 혼자 오르카호로 귀환시키는 대신, 레드후드 없이 남아 있을 스틸라인 주둔군을 지휘할 피닉스 대령과 그녀를 보조할 스틸라인 소대 하나를 복원시킬 수 있는 유전자 씨앗과 장비들을 보내준다고 했다. 


 

즉, 우리 공단에 스틸라인 소대와 대령 하나가 새로 식구로 들어온다는 소린데...하필이면 오는 타이밍이 제일 바쁠 타이밍이다. 안 그래도 자리가 부족한데 억지로 소대가 들어갈 자리를 만들어야겠구만. 

 


그래도 일단 배웅은 해야지. 부둣가로 가자 짐을 들고 수송선에 타는 레드후드를 만났다. 


 

“승리! C-77 레드후드. 귀환을 명령받고 지금 막 오르카호에 귀환하려고 합니다.”


“그동안 고생 많았어, 레드후드. 공단을 지켜줘서 고맙다.”


“직접적인 교전 하나 없이 공단에만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제 후임으로 올 피닉스 대령은 지상군 지원에 특화된 기종이니 군수사령관님의 전투에 조금 더 도움이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 군수사령관님께서 직접 복원하실 것 아닙니까.”


“그 점이 좀 궁금한데 왜 이번에는 우리가 직접 복원하는 형식으로 지원하는 거지? 그냥 저번처럼 파견군 형식으로 보내주면 서로 편해질텐데.”


“크흠...보고 받은 바로는 무리한 연구에 더해 ‘스트롱홀드’모델을 복원하느라 자원이 좀..많이 소모가 되었다는군요. 그것 때문에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의 안드바리가 많이 화가 났다고 합니다..”

 


민망한 듯 고개를 돌리며 말끝을 흐리는 그녀의 말을 듣자 순간 황당한 마음이 들었다. 동맹을 맺으며 이쪽도 주기적으로 제법 자원을 많이 보내준 것 같았는데 그래도 자원이 부족하다고? 21세기의 북쪽 돼지처럼 경제 영끌해서 핵폭탄이라도 만들었나? 그리고 스트롱홀드는 또 뭔데? 대체 뭘 만든 거야? 나도 좀 알자.


 

같이 듣고 있던 포츈도 나와 같은 심정인지 잠자코 듣고 있던 그녀의 눈이 크게 뜨였다.

 


“저기..우리 지금 공장 이전 준비 중이거든..? 이번은 특별히 많이 보내주지만 본격적으로 이전하게 되면 자리잡을 때까지 당분간 자원 많이 못 보내 주거든?”


“그 점은 제대로 숙지하고 있습니다. 오르카호의 지휘관들 또한 그 점을 인지하고 있으니 앞으로 자원 낭비 문제는 없을 것입니다.”

 


본의 아니게 간섭을 한것 같아 미안하긴 하네. 수송선에 자리를 잡고 마지막으로 인사를 건네는 레드후드에게 무운을 빌며 그녀의 배웅을 마치자마자 스틸라인 주둔군 막사에서부터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꽉 조이던 분위기가 사라져서 기쁜 건 알겠는데 그래도 너네 지휘관이 사라졌는데 그렇게 기뻐하고 싶냐. 쓴웃음이 나왔다. 


 

레드후드가 탄 병력 수송선이 가자마자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기사 복장을 한 구릿빛 피부의 여인이 포츈과 대화를 나누며 타고 온 물자 수송선에 물자를 하역하기 시작했다. 커다란 AGS들과 바이오로이드들이 합심해서 물자를 실어 나르는 모습은 언제봐도 경이롭다. 

 


쟤네도 일을 하니 나도 이제 내 할 일을 해야지. 여기서 더 노가리를 깠다간 홍련의 잔소리가 길어질 테니까. 맑게 개인 겨울 하늘에 대고 한 차례 기지개를 편 나는 군수사령관이라는 거창한 명칭에 맞는 일을 하러 갔다. 

 


대마도로 거처를 옮기기 전 생존자 수색을 할 지역을 생각하고, 대마도에 상륙하기 위한 작전을 짜기 위해선 일단 우리들 중 가장 예측능력이 뛰어난 홍련을 찾아야 한다. 그녀라면 완벽하진 않더라도 적절한 작전을 입안해주겠지. 

 


그런데 왜 멀쩡히 걷던 발이 공중에 둥둥 떠 있는 걸까? 어느새 공중에 둥둥 떠 있는 두 발을 보고 한숨을 쉰 나는 허리를 굳게 끌어안은 팔을 툭툭 두드렸다.

 


“아스널. 갑자기 사람을 들지 말아줄래?”


“후훗. 그대가 무방비하게 있으니 나도 모르게 들고 말았다.”


 

실실 웃으며 다시 날 땅에 내려놓은 그녀는 뭐가 그리 기쁜지 실실 웃고만 있었다. 서로의 동의하에 첫날 밤을 가진 이후로 그녀는 내가 보일 때마다 끌어안는 걸 즐겼다. 문제는 그녀와 내 사이에는 18cm의 넘지 못할 키차이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178cm의 장신인 그녀가 날 안아들면 키가 작은 나는 저항도 못하고 공중에 둥둥 들려야만 한다. 


 

아무리 서로 사귀는 사이라지만 똥개 들 듯이 들린 채 다니는 건 좀...체면이 안 산다. 조용히 한숨을 쉰 나는 날 향한 햇빛을 가리며 그림자를 드리우는 아스널을 올려다 보았다. 


 

“아스널..다 좋은데 그렇게 들지만 말아줘. 나도 나름 남잔데..”


“그대는 체면을 중요시 하는군. 나와 있을 때에는 그런 체면치레는 필요 없는데 말이지. 첫날밤에는 솔직하지 않았나?”

 


그렇지. 첫날밤에는 엄청 솔직했지. 진짜 죽을 뻔 했으니까.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자 자연스레 아랫도리가 저릿해진다. 

 


솔직히 처음 두 세 번까지는 좋았다. 피부와 맞닿는 여성의 부드러운 살결과 만질 때마다 탄력 있는 몸매, 허리에 감기는 늘씬한 허벅지, 그리고 한 손으로 잡지 못할 만큼 풍만한 가슴과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쾌감과 함께 전해지는 서로의 진심까지. 할아버지에게 강제로 주입당한 유교 탈레반 사상을 가지고 있는 젊은 꼰대인 나조차 반하게 만들 정도로 아스널과의 관계는 진실 되고, 그만큼 깊고 황홀했다. 


 

문제는 네 번을 넘어갈 때였다. 허리를 감고 있던 다리를 푼 아스널이 날 아래에 깔고 허리를 찍어누르듯이 움직이자, 쾌감은 순식간 폭력으로 변했다. 아랫도리에서부터 전해지는 억지로 쥐어짜지는 듯한 쾌감을 못 이겨 기승위로 움직이는 그녀의 허벅지를 손으로 치며 잠깐 멈춰달라고 부탁했지만 내게서 주도권을 넘겨잡은 아스널은 그 동안 쌓인 걸 전부 풀 기세였는지 멈추기는커녕 ‘그대는 정말 허벅지를 좋아하는군.’이라는 말과 함께 내 정신과 육체 양쪽을 전부 쥐어짜기 시작했다. 


 

그때는 좋았다는 말과 함께 아스널이 붉은 눈을 반짝이며 입맛을 다시자 저절로 몸서리가 처졌다.

 


“복상사했다는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죽었는지 몸으로 잘 알 수 있는 유익한 시간이었다, 아스널.”


“하하핫 농담도 잘하는 군. 복상사라니. 내가 그대를 죽일 리가 없잖나? 그대의 한계는 내가 잘 알고 있다.”


 

그래.. 그 한계를 잘 아니까 목숨이 간당간당할 때 멈췄겠지. 은근슬쩍 손을 올리는 아스널에게 한 번 눈을 흘겨준 나는 그녀와 함께 홍련이 있을 사무실로 향했다. 아스널과의 첫날밤이 어쨌건 상륙작전을 하는 데에는 그녀와 AA캐노니어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다. 마침 새로 증원될 공단 소속 스틸라인 부대의 소속도 정해야 하니 그녀도 함께 하는 게 좋겠지.

 


“주인님, 리리스가 모실게요.”


 

부둣가를 지나 막 공단의 중앙 광장에 도착했을 때, 언제 왔는지 모를 리리스가 은근슬쩍 내 옆에 끼어들었다. 다짜고짜 내 오른팔을 잡아 팔짱을 낀 리리스는 내 왼쪽을 걷은 아스널을 향해 생긋 웃었다. 


 

“주인님과 관계가 한층 돈독해지신 것 같네요, 아스널 씨.”


“러브레터까지 받고 멋진 고백까지 받은데다가 서로 뜨거운 밤까지 보냈는데 당연히 가까워질 수밖에.”


“그런가요? 주인님의 처음을 뺏긴 건 참 아쉽네요. 하지만 너무 기고만장하지 말아주세요. 주인님처럼 그릇이 크신 분은 첩이 많은 법이니까요. 진정한 본처는 이 리리스니까요. 처음이 누가 되었건 착한 리리스는 그런 건 신경 쓰지 않는답니다.”


“그런가? 그러면 처음 관계를 가진 내가 신경 써야 할 걸 좀 알려줘야겠군. 군수사령관은 허벅지를 매우 좋아한다.” 


“허벅지요?”


“그래. 관계 도중 내 허벅지를 어찌나 쓰다 듬던지..홍련을 그런 눈으로 봤던 이유를 잘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스스로 주도권을 잡기보단 잡히는 걸 좋아한다. 위에서 찍어 눌렀을 때 어찌나 좋아하던지. 팔딱팔딱 뛰기까지 하더군.”


“잠깐..그 얘기 나중에 자세히 들려주실 수 있나요?”

 


당연히 팔딱팔딱 뛰지. 생명의 위기가 왔었는데! 얘네는 장본인을 앞에 두고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야. 첫 경험을 마치 어제 날씨를 말하듯이 자연스럽게 말하는 아스널의 입을 필사적으로 막은 나는 옆에 서 있는 리리스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그녀는 황금색 눈을 곱게 휘더니 짧은 치마를 잡아 슬쩍 위로 올렸다. 


 

“주인님, 리리스의 허벅지도 봐주세요.”


 

맨들거리는 하얀 허벅지를 넘어 속옷까지 훤히 보이자, 자연스레 고개가 옆으로 홱 돌아갔다. 여친을 앞에 두고 다른 여자의 속옷을 봤다는 사실에 죄책감이 들었다. 아스널에게 사과하기 위해 옆을 돌아봤지만 정작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피식 웃었다. 


 

“후훗. 두 번째 경험은 경호대장과 함께 즐기는 것도 좋겠군. 언제가 좋을 것 같나?”


“후후 전 일요일이 좋아요.”


“너희 혹시 일처일부제라는 말은 알고 있니?”


“지금은 22세기다. 그리고 지금은 인간 남성이라곤 두 명 밖에 남지 않았지. 그대가 다른 여성과 어울린다고 한들 난 신경 쓰지 않는다. 중요한 건 내가 그대만을 사랑한다는 사실 하나뿐이지. 그대도 개방된 마음을 가지는 게 어떤가?”


“너무 개방적이여서 문제잖아! 소련 멸망할 때도 이렇게 개방하지는 않았겠다!”


“다음에는 그대의 꽉 막힌 생각을 깨부숴야겠군.”

 


아스널과 리리스를 상대로 해볼테면 해봐라라고 했다간 진짜 무슨 짓을 저질러서라도 20년간 주입받은 사상을 깨버릴 것 같았기에 난 그녀들에게 핀잔을 주는 대신 말 없이 한숨만 쉬었다. 리리스와 함께 하자는 말이 좀 걸리긴 했지만 평소에 농담을 즐기는 아스널의 짓궂은 농담이겠지.


 

둘을 데리고 사무실이 있는 공단 관리소 건물로 가자 정문에 기대 잡지를 보고 있던 블러디 팬서가 우리 셋을 맞이해 주었다.


 

“민님 오셨습니까. 홍련 작전관이 엄청 찾고 있었지 말입니다.”



“그래? 얼마나 기다렸어?”


“5분 정도 기다렸을 겁니다.”

 


다행이다. 5분밖에 안 돼서. 5분 정도면 잔소리 한 두 마디로 끝나니까. 홍련 성격상 5분까진 봐주는데 그 이상 넘어가면 잔소리를 엄청 길게 한다. 업무 중이 아닐 때는 한 없이 다정하고 상냥한 그녀지만, 업무 중에는 딴짓 하나라도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그래도 기다려 준 사람이 가장 대하기 편한 블러디 팬서여서 다행이다. 같이 올라가기 위해 늘상 하던 대로 블러디 팬서의 어깨에 팔을 두르자 팔 너머로 움찔거리는 움직임이 전해졌다. 평상시와는 좀 다른 듯한 반응인데? 전에는 팬서쪽이 먼저 팔을 둘렀고 같이 맥주도 까마셨는데.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팬서는 더운지 손으로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팬서 무슨 일 있어?”


“아, 아무일 없슴다.”


“무슨 일 있으면 말해. 우린 친구 같은 사이잖아.”


 

브라우니와 레프리콘이 여동생이라면 팬서는 같이 힘든 역경을 헤쳐나온 친구다. 비록 내가 그녀들의 명령권자고 그녀 또한 날 상관으로 여겨주긴 하지만 적어도 난 그녀를 친한 친구로 여기고, 그렇게 대해주고 싶다. 


 

“친구 말임까..알겠슴다..”


 

내 말을 들은 팬서는 털털한 그녀답지 않게 시무룩한 표정을 짓더니 피식 웃으며 내 어깨를 두드리고선 먼저 계단을 올라갔다. 시원시원한 그녀답지 않은 영문 모를 행동에 멍하니 서 있자, 내 옆에 있는 리리스 또한 영문 모를 말을 했다.

 


“불쌍한 팬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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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업보+1


그리고 리리스랑 아스널한테 동시에 짜이는 기분은 과연 어떤 기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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