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arca.live/b/lastorigin/49543871  - 시리즈 모음집

















기지에서 나와 근처 협곡지대에 매복한 지 40분 정도가 지났다. 그 기다림의 시간 동안 점으로 보이던 철충들의 모습은 이제는 눈으로도 확실히 식별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보는 것만으로도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수준의 거체를 가진 네스트와 땅을 검은빛으로 물들이는 철충들



"…저거 진짜 내가 상대해야 해?"



"그렇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 지원이 있다면 74.5% 확률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아라크네는 격려 차원에서 말이겠지만 목숨을 걸기에는 애매한 수치 때문에 오히려 마음이 불안해졌다. 수많은 철충을 상대해본 적도 있었고 강력한 개체와 싸워본 적도 있었지만 동시에 그 둘을 상대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잡담은 여기까지. 적 병력이 유효 사거리에 진입했다. 타이런트 공격을 개시하라"



알바트로스의 명령에 나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플라스마 포를 가동했다. 막대한 에너지가 충전되는 것을 감지한 철충들과 페어리 드론이 진군하던 방향을 바꿔 나에게로 돌격했다. 



허나 광선의 질주는 이미 시작되었다. 붉은 광선이 여느 때처럼 질주하며 수많은 적을 불태웠다. 하지만 평소와는 달리 파괴의 흔적 한복판에서 아직도 서있는 존재가 있었다.




"———!!!!"




전장의 한복판에서 화염에 그슬려 끔찍한 비명을 지르는 네스트, 그 비명이 신호탄이 된 것처럼 방금보다 더 많은 철충이 몰려오고 네스트의 몸에서는 페어리 드론들이 사출되었다.



"전 포병 발사하라!"



알바트로스의 호령에 불꽃이 쏘아져 철충에게 내려앉았다. 정확한 위치에 떨어진 불꽃은 한 마리의 철충도 놓치지 않고 파괴하고 주변 지형을 무너뜨려 매몰시키고 구덩이를 만들어 접근을 방해했다.



비록 병력의 양은 열세였지만 지휘관의 실력 차이는 그 차이를 충분히 매꾸고 있었다. 



"아라크네, 타이런트 3시 방향으로 우회해서 네스트를 처치하라"



당당한 AGS 지휘관의 지시에 힘을 얻었는지 혹은 내 공격이 통했다는 사실에 용기를 회복했는지 나는 두려움 없이 철충의 무리를 향해 돌진했다.



땅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많은 철충의 수— 하지만 그것은 의미를 가지지 못했다. 내 몸은 하급 철충들의 빈약한 화력에는 상처도 나지 않았다. 경계해야 하는 것은 오직 네스트와 페어리 드론



그것들의 공격에 대비하는 것이 아라크네의 역할이었다.



"타이런트, 네스트의 드론이 접근합니다. 시스템 접근을 허용해주십시오"



"그거 어떻게 하는건데?"



"…저항만 하지 않으시면 됩니다."



그와 동시에 내 미사일 포대가 멋대로 움직였다. 당황도 잠시 그것이 아라크네의 행동이라는 것을 인지한 나는 그녀의 말대로 저항을 그만두었다.



"요격 알고리즘 개선 완료, 발사합니다."



그녀가 말을 끝냄과 동시에 하늘로 날아오른 미사일과 네스트의 드론이 충돌했고 드론의 무리는 산산조각 났다.



땅바닥으로 떨어지는 드론의 잔해를 본 나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다.


방금 네스트가 사출한 숫자에 비해 추락한 드론의 잔해가 너무 적었다.




"아라크네 나머지 드론들은 어디 있는거지?"



"알바트로스님과 와쳐들이 상대하고 있습니다."




하늘을 슬쩍 올려다보니 알바트로스가 어느새 창공을 누비고 있었다. 수많은 와쳐들은 알바트로스의 명령 아래 바다를 누비는 거대한 물고기의 군집처럼 자유자재로 흩어지고 뭉치기를 반복했고 그럴때마다 페어리 드론은 힘을 잃고 추락했다.



이에 질세라 나와 아라크네도 부지런히 움직였다. 빔 병기, 미사일, 거대한 질량의 꼬리가 쉼없이 전장을 가로지르며 철충을 잔해로 만들었다.




그러나 쓰러트리는 적의 수보다 더 많은 수의 적들이 네스트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다수의 적을 상대로 늘 정답이었던 플라스마 포조차 흩어져서 비행하는 페어리 드론을 상대로는 큰 의미를 가지지 못했다.



지상으로 접근하는 철충들조차 점차 그 수가 늘어나더니 어느새 포격으로 전부 처리하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이건 좀 위험한데…?"




꼬리를 휘두르고 돌진하는 것만으로 한 번에 대여섯 마리의 철충이 쓰러트릴 수 있다해도 그사이에 열마리, 스무마리의 철충이 몰려온다면 의미가 없었다.



게다가 철충을 처리하느라 발목이 잡힌 사이 네스트가 뿜어대는 드론의 숫자는 점점 늘어났다.




"비장의 수를 써야겠습니다. 타이런트, 귀하에게 EMP 방어 알고리즘을 설치해뒀습니다.

드론이 무력화되면 적의 본체에 최대한 달라붙어 도주를 막아야 합니다."



"알겠어!"



"EMP 사용 후 저는 과충전의 여파로 일시적으로 기능 정지됩니다. 무운을 빕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아라크네의 등에 달린 코일이 발광하였고 이내 강렬한 자기장이 느껴졌다. 섬광이 세상을 뒤덮은 순간 하늘을 날던 페어리 드론들은 땅으로 추락했고 몰려오던 철충들은 실이 끊긴 인형처럼 땅에 널브러졌다.



나와 네스트 사이의 길을 막던 것들이 사라졌다.


네스트는 당황하며 사출장치에서 드론들을 뿜어내려 했지만, EMP의 여파로 작동되지 않았다.



그제야 자신을 지켜줄 존재가 남아있지도 더 만들어낼 수도 없다는 것을 깨달은 네스트는 아라크네의 예상대로 도주하려 했다.



"어딜 가냐!"



그러나 타이런트는 금속이빨을 네스트에게 꽂아 넣으며 온몸으로 녀석의 도주를 막았다. 네스트는 연결체답게 단단했지만, 그것이 타이런트의 치악력을 버틸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끼에에에에엑—!!!"



고통의 비명에 아랑곳하지 않고 타이런트는 네스트의 몸에서 사출장치를 뜯어내었다. 거친 금속음과 폭발음과 함께 네스트의 일부였던 것은 고철 덩어리로 전락했다.



하지만 그동안 네스트도 놀고 있지는 않았다. 타이런트가 사출장치를 뜯어내는 사이 연결체의 강력한 에너지가 단 한 명의 적을 쓰러트리기 위해 한 곳에 집중되었다.




콰광!!




네스트는 공격의 여파에 자신조차 휘말리는 것을 감수하고 화력을 퍼부었다. 보통의 적이라면 즉사했거나 적어도 떨어져 나갔을 에너지가 담긴 공격이었다. 허나 상대는 그 보통의 적에 해당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 끼에에에에엑!!"




그 공격에 장갑이 뜯어져 나가는 상처를 입고도 쓰러지지 않은 타이런트의 모습에 네스트는 당황했다. 하지만 타이런트의 상태는 쓰러지지 않은 정도가 아니었다. 더 사나워져 있었다.




정신은 인간의 것이었지만 타이런트를 받아들인 그에게 고통은 공포를 주고 정신을 나약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었다. 고통이란 오직 투쟁심을 불태우는 연료로써 작용했다.




"크아아아아아아아!!!"




투쟁심에 불타오르는 폭군의 욕망은 실로 단순했다.


눈 앞의 적을 죽이는 것



그 욕망에 따라 돌진한 폭군의 턱은 사출장치 뜯어져 나가며 생긴 구멍을 파고들었다.



몸의 내부가 뜯어져 나가는 공포와 고통에 네스트의 반항이 더욱 거세졌다. 그러나 에너지 구체를 날리고 광선을 쏘고 몸을 뒤틀어도 폭군이 물러나는 일은 없었다.




"…!!! 크에에에에에에엑!!!"




폭군의 턱이 네스트의 몸을 또 한 번 뜯어낸 그 순간 네스트는 마지막 남은 힘으로 몸을 뒤틀고 공중에 띄워 폭군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도망칠 수는 없었다. 온몸이 손상되어 장시간 비행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맞서 싸워야한다— 그렇게 생각한 네스트의 모든 에너지가 한 점에 집중되었다.



그 광경을 보면서도 폭군은 한점 두려움을 품지 않았다. 모이고 있는 에너지는 그의 눈에는 너무나도 미약해 보였다.



네스트가 모든 에너지를 발사한 순간 폭군도 불타는 숨결을 내뿜었다.



허공에서 붉은 숨결과 검붉은 광선이 충돌했다. 잠시 밀리나 싶던 붉은 숨결은 푸른 빛으로 변하더니 기어코 검붉은 광선을 갈라버리며 적에게 도달했다.



폭군의 숨결이 네스트의 광선을 먹어 치우고 육신마저 탐하자 이미 무너져가던 네스트는 몸의 안쪽부터 불타올랐다. 



바다에서 올라올 재앙을 막해내야 한다는 그 의무감마저 희미해지는 것을 느끼며 네스트는 최후를 맞이했다.



네스트의 거체는 땅으로 조각나 쏟아져 폭군의 앞에 널브러졌다. 그 순간 하늘을 누비며 알바트로스와 싸우던 드론들이 폭발하며 그것들의 어미와 함께 땅의 일부가 되었다.



드론들까지 죽자 계속해서 몰려오던 철충마저 물러가며 전투가 마침내 끝났다




"크아아아아아아!!!"




폭발음이 울려 퍼지는 전장, 철충의 잔해 사이에서 폭군이 포효했다. 










바닥에 앉은 타이런트의 옆에 알바트로스가 착륙했다. 그 바람에 흙먼지가 휘날렸지만 둘 다 호흡기도 유기적인 눈도 없기에 상관하지 않았다.




"수고했다. 드론은 전부 파괴되었고 철충의 군세도 물러나고 있다. 다만.."



"왜 또? 싸우라고는 하지마. 당분간 파업할 거니까"



"철충들이 바닷가로 향하고 있다. 근처 다른 철충들까지 합류하고 있군 어째서 그곳으로 가는지는 아직 파악하지 못했다."



"바닷가…?"



머릿속에 파묻혀 있던 게임 속 줄거리가 갑자기 떠올랐다. 네스트, 철충, 바다



"별의 아이…"



그런데 내가 네스트를 지금 죽였고..그렇다면



용의 함대를 깨운 오르카가 그녀와 함대가 도착할 때까지 살아남을 수 있던 이유는 네스트와 별의 아이가 서로 싸웠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만약 별의 아이가 오르카를 직접적으로 노린다면?



오르카에 있는 모두의 목숨이 위험했다.




"…도와줘야하나"




그런 긴급한 상황임에도 뛰쳐나가려는 발목을 잡는 것이 있었다. 그날 느꼈던 배신감과 분노. 결코 잊을 수 없는 기억이었다. 몸에 폭탄을 심었던, 그리고 무기를 나를 향해 겨눈 그녀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난 뭘 망설이는 거지?




그런 짓을 당했다. 




내 몸에는 폭탄이 심어졌고 그것 때문에 죽을뻔했다. 




내 등을 찌른 것이 그와 그녀들이다.




그런데도 어째서 그와 그녀들을 내버리지 못하는 거냐





그 이유를 찾으러 기억의 강을 거슬러 가다 보니 의식은 칸과 작별 인사를 한순간까지 떠밀려 올라왔다.





그녀들의 행동을 용서하지 못할지언정 이해할 수 있게 된 그 순간을 떠올리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그 순간이 망설임의 원인이었다. 사령관과 그녀들을 용서하지 못했다고 한들 이해할 수 있게 된 순간 그녀들도 사령관도 악마라 칭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마냥 미워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악마라 생각한 이들이 서 있던 자리에는 실수하기도 하고 무언가를 두려워하기도 하는 인간과 인간보다 더 인간답게 행동하는 피조물이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존재들은 강철의 육신으로 옮겨진 한 인간의 정신이 아끼고 또 사랑하는 존재였다.





여전히 분노는 타오르고 그때의 기억을 회상하면 고통스러워 참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그와 그녀들의 죽음을 방관할 것이냐 묻는다면 결단코 아니었다.




"알바트로스, 철충의 목표는 오르카 호야. 우리가 그 쪽에 합류할지 말지는 아직 정하지 못했지만 최후의 인간이 죽어버리는 것만큼은 막아야 하지 않겠어?"



"확실히 오르카 호의 위치와 철충들의 이동 경로가 부합하는 군. 병력 재정비가 끝나는 대로 이동하겠다."



"나부터 보내. 수송기는 있겠지?"



"지금 호출하겠다."




타이런트는 분노도 복수심도 집어삼켰다. 고통스러운 목 넘김이었다. 집어삼켜도 몸 속에서 타오르는 그 감정을 다른 감정으로 붙잡았다.



그 감정의 이름은 사랑,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기에 수많은 감정을 그 위에 덮었다. 인내, 자애, 희망, 기대 수많은 감정들의 이름으로 복수심도 분노도 묶어버렸다. 



타이런트는 수송기를 향해 나아갔다. 괜히 네스트에게 입은 상처가 쑤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