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버스데이 10화 : 과거의 악몽과 망령>


주호와 그렘린, 포츈, 그리고 닥터는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며 복도를 걷고 있었다. 진행중인 프로젝트들은 무난하게 별 탈 없이 진행이 되고 있었다. CMC 전투복과 가우스 소총은 2차 테스트를 기다리고 있었고 렘파트를 기반으로 만들고 있던 신병기 투견 역시 훌륭한 성능을 보여주며 실전 테스트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연구원들은 이 병기가 렘파트와 은근 비슷하게 생겼었다는 점에 신기해했다. 물론 신기한 일이기는 하지만 주호 입장에선 이 투견이라는 병기의 원형이 건설로봇(SCV)이라는 사실만큼 신기하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광산 채광 로봇이 일선 전투 병기로써 탄생했다니 누가 믿겠는가. 이토록 일이 잘 풀려나가니(그럭저럭 잘 풀리는 걸 수도 있지만) 연구팀 역시 즐거운 마음으로 일을 할 수 있었다.


복도를 따라 걸어가며 이들은 프로젝트에 대한 이야기와 각자의 일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닥터의 성장약이 완성을 앞두고 있다는 이야기라던지, 그렘린의 탑돌이가 최근 성능이 더 향상되었다던지 포츈이 드디어 격무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던지 하는 것들 말이다. 소중한 시간들이다. 세상이 멸망하고 나서도 이렇게 각자의 삶에 의미있는 시간을 가진다는 건 중요한 일이었다. 오르카의 상황이야 늘 살얼음판이니(아닌게 아니라 현재 지구의 세력중 가장 약소한 세력이라는 사실은 모두가 인정했다.) 이런 일상은 한순간이 소중했다. 주호 역시.....


"아파....."


어디선가 들리는 소리에 주호의 발이 멈췄다. 무슨 소리인지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 와서까지 들리는건가...


아파....

괴로워.....

네가 만든 물건이였어....?

제발 차라리 죽여줘......


오르카의 복도를 걷던 대원들의 모습이 점점 일그러져간다. 일그러진 그 형체들은 뒤틀린 인간의 형체로 변해갔다. 그리고 그 형체들은 주호를 둘러쌌다. 괴로움... 고통, 원망만이 가득한 표정. 형체들은 주호에게 한걸음씩 다가오고 있었다. 각자 절규하면서, 고통을 호소하면서, 원망하면서.... 주호의 다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어쩌면 주호 스스로가 움직일 마음이 없는 것인지도 몰랐다. 주호는 고개를 숙였다. 자신도 책임을 피할 수는 없다. 그래... 이렇게라도 마음이 풀린다면.... 이렇게라도 속죄 할 수 있다면....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리고 주호와 정면으로 마주보던 형체 하나가 주호를 향해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주호를 밀어 넘어뜨린 형체는 손을 주호의 얼굴에 향해 가져갔고..... 그대로................



..... 사라졌다.....


눈을 뜬 주호는 침대에 누워있었다. 꿈이었던 모양이다. 시계를 보니 출근시간이 가까워져 간다. 그 일이 있은 후부터 이 악몽은 늘 주호를 괴롭혀왔다. 최근엔 좀 안 꾸는가 싶더니 결국 이렇게 주호를 찾아오고 말았다. 주호는 몸을 일으켜 침대에 걸터 앉았다. 양손에 얼굴을 파묻고 그대로 흐느꼈다. 죄송합니다.... 그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아마 영원히 이 악몽은 자신과 함께 하겠지. 분위기를 깨뜨린건 주호의 기상 알람 소리였다. 알람소리를 듣고 정신을 차린 주호는 알람을 끈 후 화장실에서 간단한 세면을 마쳤다. 옷을 갈아 입은 후 식당으로 향했지만 입맛이 돌지 않았다. 그대로 몸을 돌려서 식당 반대편으로 걸어나갔다. 마주치는 대원들과는 형식적인 인사만 나눌 뿐이었다. 창을 바라보자 많은 물고기들이 바다속을 노니고 있었다. 멍하니 고기떼의 움직임을 구경하던 주호는 스프리건이 진행하는 아침 방송의 인트로 음악이 들리자 연구실로 천천히 걸어갔다. 머릿속에선 꿈에서의 모습이 떠나지를 않았다.



"...씨...! .......호씨...! 주호씨! 정신 안차려!"


뒤에서 누군가 다급하게 부르는 소리에 주호는 정신을 차렸다. 포츈이었다.


"작업중에 위험하게 그게 뭐하는 짓이야! 왜그래! 평소답지 않거든!"


"팀장님, 혹시 피곤하신거 아니에요? 잠음 제대로 주무신거 맞죠?"


그렘린과 포츈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주호는 이내 자신이 로봇 제작 작업이 한창인 시설 한가운데에서 멍때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확실히 오늘은 컨디션이 영 엉망이었다. 꿈 때문인지 뭣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죄송해요. 꿈때문에 계속 신경이 쓰였나보네요. 간만에 꾼 악몽이라..."


"악몽....? 괜찮은지 걱정되거든...? 혹시 요즘 악몽을 자주 꾸는지 궁금하거든!"


포츈은 악몽이라는 말에 주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 주호에게 말했다. 휩노스 병의 증상중 하나가 악몽이었으니 그럴 만 했다.


"아뇨... 코프룰루에 있을 때도 자주 꾸던 악몽이에요. 여기서는 좀 안꾸나 싶었는데 결국 전 이 꿈에서 못벗어나나 봐요."


"혹시 모르니까 닥터를 찾아가서 검사를 받아보는게 좋겠거든... 여기는 우리에게 맡기고 가서 검사받고 오는거거든...."


"그래요. 아니라고 믿고는 싶지만... 혹시라는게 있으니까요. 저희도 이정도 일은 할 수 있으니 걱정 마시고..."


두명이 강하게 권하자 주호는 더 거절해 봐야 소용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로 몸을 돌려 연구실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고 주호의 모습이 사라지자 포츈과 그렘린은 걱정스러운 듯이 이야기했다.


"이세계의 사람인데도 휩노스 병이 걸리는지가 걱정이거든..."


"글쎄요... 저도 의학에 대한건 잘 모르니까요... 그래도 닥터가 잘 진찰 해 줄거에요. 그리고 문제가 생긴다고 해도 사령관님이 그려셨던 것 처럼 신체 재건 설비를 이용 할 수도 있으니 너무 걱정은 하지 마세요."


고개를 끄덕인 포츈. 두명은 다시 일을 하자는 생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포츈의 눈에 들어온 물건이 있었다. 네모난 종잇조각. 주호가 나가면서 떨어뜨린건가? 무슨 물건이지? 포츈은 그렇게 생각하며 그 종잇조각을 주워 들었다. 그 물건은 사진이었다.



"이건......"


"뭐에요 포츈언니? 뭐 주우셨어요?"


"응, 이거 봐. 이건 주호씨인데... 옆의 여성분은....."


"어머... 꽤 귀엽게 생긴 분이시네요. 주호씨의 여자친구셨을까요?"


그 말을 들은 다른 기술자들이 포츈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생각해보면 주호는 자기 주변 인물에 대한 이야기는 그동안 한번도 한 적이 없었다. 사진속의 주호는 다소 어색한 표정으로 있었고 여성은 주호의 어깨에 손을 올린 채 웃음짓고 있었다. 성격이 꽤나 당찬 아가씨였던 모양이다. 그리고 두 사람은 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타소니스 대학교..... 어머.... 주호씨의 대학시절 사진인가 보거든!" 


"대학이라면 멸망 전의 인류 고등 교육기관이죠? 주호씨도 이런 시절이 있었구나..."


그 말을 들은 포츈은 사진의 뒷면을 봤다. 그곳에는 이렇게 쓰여있었다.


캐시와 함께

2496년


여자쪽 이름이 캐시인 모양이구나. 그리고 주호가 온 시간대가 2506년이라고 했으니까... 이건 10년 전 사진이었다. 그런데 주호는 결혼했다거나 여자친구가 있었다던가 하는 말은 하지 않았었다. 그럼 좋게 끝나지 않은 관계인걸까? 포츈과 그렘린은 서로를 바라봤다. 그러다가 개발실 내의 기술진이 전부 모였다는 사실을 깨달은 포츈은 손을 내저으며 구경 다 했으면 맡은 자리에 가서 일이나 하라고 닥달했다. 그렇게 개발실 내의 분위기는 다시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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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단 말이야? 알았어. 신체 재건 설비는 혹시 모르니 준비시켜 놓을게."


"우리 사령관한텐 늘 고맙거든. 아 그리고.... 주호씨에게 전해줄게 있거든...


포츈이 그렘린을 바라보자 그렘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본 포츈은 주웠던 사진을 사령관에게 내밀었다. 사진을 받은 사령관은 사진을 한번 바라본 후 포츈을 바라봤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주호씨의 과거에 대해 너무 무관심했던 것 같거든.... 그래도 명색이 우리 대원이고 여기에 하루이틀 머문 것도 아닌데 이정도로 우리 대원에 대해 모르는건 말이 안된다고 생각하거든!"


사령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보면 사령관도 두루뭉실한 대강의 이야기만 알 뿐 주호에 대해 많이 아는게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하다못해 생일조차 모르는 상황이지 않은가. 다만....


"실례가 되는 일은 아닐지 걱정되는데...."


"정 그러면 사진을 돌려주면서 일단 한번 떠보기만 하는 거거든. 만약에 주호씨가 말할 마음이 있다면 우리에게 말을 해줄 거거든. 만약에 주호씨가 말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면 굳이 더 물어 볼 필요는 없는거고...."


그렇게 말을 할때 사령관의 통신기에 알람이 울렸다. 닥터의 통신이었다. 사령관은 바로 닥터의 통신을 받았다.


"그래 닥터, 주호씨는 좀 어때?"


"휩노스 병은 아닌 것 같아. 악몽을 꾸기는 했다지만 최근 수면 패턴도 일정했다고 하고, 휩노스 증상으로 피로를 느낀다기 보다는 뭔가 악몽의 내용 그 자체 때문에 기운이 없어 보이거든...."


악몽 그 자체 때문에 힘들다라... 무슨 내용의 꿈일까... 어쩌면 주호의 과거와 관련 된 이야기일지도 몰랐다.


"그래 닥터. 주호씨랑 거기서 기다리고 있어. 우리가 그쪽으로 갈테니까."


자리에서 일어선 사령관을 보며 포츈과 그렘린은 사령관을 바라봤다. 자신들도 따라가겠다는 무언의 의사표시였다. 그 모습을 본 사령관은 고개를 끄덕였고 그렇게 사령관, 포츈, 그렘린, 그리고 그날 경호를 맡고 있었던 스노우 페더까지 네명이 닥터의 연구실로 향했다.



사령관은 벨을 눌렀고 닥터가 반갑게 맞아주며 연구실의 문을 열어줬다. 닥터는 사령관을 만나자 마자 성장약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사령관을 안내했다. 발소리를 들은 주호도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마침 방금 테스트가 끝나서 다프네가 주호 몸에 달려있던 측정기들을 떼어놓고 있던 참이었다. 주호와 사령관은 인사를 나눴고 사령관은 침대 옆의 의자를 하나 골라 앉았다. 나머지 대원들도 그렇게 했고 주호 역시 침대에 걸터앉았다. 다프네는 리제의 호출을 따라 수복실로 향했다. 다섯명의 사람들은 잠시 적막속에 있다가 사령관이 먼저 입을 열었다.


"먼저...."


사령관은 주머니에 손을 넣어서 사진을 꺼내 주호에게 건냈다.


"아까 떨어뜨렸던 모양이더라고. 멋대로 본게 기분 나빴다면 정말 미안해."


"아뇨.... 괜찮습니다. 대단한 사진도 아니고....."


주호는 사진을 받으며 말했다.


"그... 정말 미안하지만... 악몽을 꿨다고 들었는데...."


사령관은 잠시 헛기침을 한번 한 후 말을 이었다.


"혹시 과거의 일이 악몽으로써 너를 괴롭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 우리 대원들 중에서도 그런 애들이 있지. 레이시라던지 티아멧이라던지... 실험체로써 괴로운 인생을 살아왔던 애들이 그런 일을 많이 겪곤 하지. 그 애들의 악몽 이야기를 들어보면 과거에 있었던 끔찍한 일들이 악몽에서 되풀이되는 경우가 많더라고..."


주호는 사령관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한숨을 쉰 주호는 입을 열었다.


"......그래요.... 차라리 속 시원하게 말하는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네요.... 다만...."


주호는 주변을 한번 둘러보며 대원들과 사령관의 얼굴을 한번씩 바라보고 말을 이었다.


".....경멸스러운 이야기가 있을지도 몰라요.... 괜찮으시겠어요?"


사령관과 대원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본 후 주호를 바라보며 말을 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본 주호는 심호흡을 한번 한 후 침대 머리맡에 놓여있던 물 한컵을 그대로 들이켰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6년 전 이야기에요. 아직 테란 세계가 테란 연합에 의해 다스려지던 시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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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화부터는 회상 스토리로 이어질 예정... 아마 두화정도 쓸 것 같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