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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신처분, 시저스 리제

티타니아가 오베로니아의 심장을 찌를 때


1편  2편



나올 때만 해도 바다 지평선의 끝은 푸른빛이었는데, 카페에서 돌아나오고 조금 걷자 완연한 어둠이 들어찬다. 드리아드의 발걸음이 닿는 곳은 가로등이 비춰져 어둡지는 않았지만 가게의 소음도 줄어들고 지나다니던 바이오로이드들도 많이 줄어든 거리는 유달리 공허함이 가득했다. 드리아드의 땋은 머리카락이 바다쪽으로 휘날린다. 주인에게 맥주를 가져다주기 위해 보냉가방에 넣었는데 바람이 찬 걸 보니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을 듯 했다.

잠시 벤치에 앉는다. 딱히 무언가 하고자 하는 일이 있어서 앉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하려던 일이 순간에 사라져버려서 목적을 잃은 것에 가까웠다.

 

후우…”

 

짧게 숨을 내쉰다. 가로등 빛을 받은 하얀 입김이 금세 주위로 흩어진다. 보냉가방을 열어본다. 투명한 병에 담긴 맥주가 진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가로등 불빛이 강해서인지 마치 자체로 발광하는 듯 오묘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맥주 한 병을 들어올리자 다른 한 병이 데구르르 가방 안에서 구른다. 다행히 병은 아직 차다.

괜히 가방을 열었다 닫아보고, 고개를 들어 별을 구경하고, 잠시 고개를 젖혀 바람을 느껴보기도 하지만 바뀌는 것은 없다. 고개를 돌려 카페가 있던 방향을 바라본다. 멀리 걸어나온 탓에 그 곳의 불이 아직도 켜져있는지 어쨌는지는 알 수 없었다.

 

여기서 기다리면…”

 

괜한 상상을 해본다. 지금이라도 자신의 주인이 오르카호로 돌아오다가 자신을 마주치지는 않을까 하는 그런 상상. 물론 함 내에서 기다릴 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처음으로 주인을 위해 온전히 자신의 마음을 담아 무언가를 만들었는데 조금은 더 로맨틱해도 좋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다른 바이오로이드들을 모두 보내주고나서야 저 멀리서 주인이 걸어온다. 가볍게 눈웃음을 짓고는 자신도 주인쪽을 향해 걷는다. 주인의 품 앞에 서자 바다를 향해 불던 바람이 멎는 것 처럼 느껴진다. 추운데 왜 여기서 기다렸냐고 묻는 주인에게 별 일 아니라고 대답한다. 오랜만인 것 같다고 멋쩍게 웃는 주인에게 자신은 괜찮다고 이야기한다. 자연스레 벤치로 걸어간 둘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눈다. 그런 와중에 드리아드는 가방을 열어 맥주를 한 병 건네준다. 뚜껑을 누르는 철사를 풀고 코르크를 천천히 오픈한다. 소박한 대화에 악센트를 주는 맑은 소리가 주변을 울린다.

병을 입에 가져다대는 순간, 상상은 그 곳에서 멎는다. 드리아드 자신도 거품을 살짝 맛을 본 것 빼면 이 맥주의 맛이 어떨지 알지 못했다. 물론 보리 한 톨에도 정성을 담고, 문제가 될 만한 행동은 일체 하지 않았으니 준수함 그 이상의 맛이 날 것은 분명했지만, 그 디테일한 맛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일부러 맛보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 맞았다. 자신의 온 정성을 담은 이 결실을 혼자서 먼저 맛보고싶지는 않았으니까, 어떤 맛일지, 주인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모든 것이 기대됐고 자신을 흥분시켰다.

행복한 상상을 깨는 찬 바람이 머리를 홱 하고 휩쓴다. 상상에서 현실로 돌아온 드리아드의 머릿속도 꽃밭에서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주인의 얼굴을 제대로 마주하고 이야기 한 것이 언제인가 하고 곰곰히 생각해본다. 보리가 푸르렀을 때 한 번 찾아오고, 그 뒤로는 스발바르 제도에 정착해서 주인이 이래저래 바빴으니 못해도 두 달은 된 듯 했다. 두 달 만의 첫 대화가 너무 허무하게 끝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이제서야 든다.

 

조금만 더 기다려볼까”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드리아드는 그렇게 되뇌이며 주인을 기다린다. 건물들의 조명이 하나 둘 씩 내려간다.

 

리제 못지 않게 다프네의 방도 아담하다. 리제와 비슷한 방은 마치 방금 정리를 하고 나간 것 처럼 깔끔했다. 책장에는 식물과 바이오로이드 건강에 관한 책들이 꽂혀있었다. 평소에는 허락 없이 동생들의 방에 함부로 들어가지는 않지만, 가끔씩은 이런 이벤트도 나쁘지 않을거라 생각했다.

맥주 두 병을 테이블위에 올려둔다. 메모지에 짧은 편지라도 남겨둘까 하는 마음에 볼펜을 찾는다. 테이블에 놓인 연필꽂이 옆에 놓인 작은 액자 하나가 눈에 띈다. 바닷가에서 수영복을 입은 다프네의 모습과 주인의 모습이 나란히 찍힌 사진이었다. 레아에게도 익숙한 장소였다. 저 바닷가에 있을 때쯤 자신이 오르카호에 합류했으니 말이다.

머릿속의 시계를 돌려보니 벌써 3년 전의 일이었다. 그 예전에 찍은 사진을 아직까지 간직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다른 사진이라도 찍었으면 좋으련만 다프네의 성격상 주인이 바쁘거나 할 때에 그를 곤란하게 만들 일은 절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다프네에게 남은 건 예전에 찍은 이 사진 한 장 뿐이었다.

다프네 역시 주인을 열렬히 사랑하는 바이오로이드였다. 비록 드리아드나 리제가 그런 쪽으로는 이미지가 강해서 많은 바이오로이드들이 간과하고 있었지만, 다프네 역시 주인의 사랑을 얻기 위해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바이오로이드였다. 본연의 임무에 수복실의 일을 더 하면서도 불평 한 마디 않는 것도, 철 없던 언니와 동생이 주인에게 민폐를 끼칠까 노심초사하는 것도 모두 다프네가 주인을 사랑하기에 하는 행동이었다.

레아에게는 여러모로 안타까운 동생이었다. 때로는 리제처럼 자신의 마음을 확실하게 표현했으면 했는데, 언제나 주인 혹은 언니인 자신이 곤란해할까봐 자기는 괜찮다고 연신 사양하는 모습은 지고지순한 걸 넘어 미련하게 보이기도 했다.

물론 다프네도 가끔 조급해질 때가 있었지만, 그럴 때 마다 언젠가는 사령관이 자신을 알아줄 것이라는 마음으로 정신을 가다듬고는 했다. 어찌보면 가장 이상적인 모습이었지만, 오르카호의 사정을 생각하면 정말 몇 십년이 걸려도 어려울 수 있는 목표이기도 했다.

사진 한 장을 빤히 쳐다보던 레아가 동생에 대한 기특함, 가여움 등을 담아 편지를 꾹꾹 눌러 쓴다. 처음에는 드리아드가 만든 맥주를 두고 갈 테니 마시고 쉬라는 짧은 문장 정도였는데, 마음을 담다 보니 여러모로 글이 길어진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언니한테 이야기 하라던가, 가끔씩은 스트레스를 풀어 줄 필요도 있다던가 하는 걱정이 대부분이었지만, 모두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이었다. 글씨 크기를 줄여가며 메모지 끝에 글을 우겨넣고 나서야 편지를 끝마친다. 펜을 오랜만에 쥐어서 그런지 힘을 너무 줘 손이 저리다.

아쿠아에게는 술을 줄 수 없고 티타니아는 거리를 두는 것이 상책이었다. 언니로써 동생이 싫은 것은 아니었지만, 동생이 본인을 불편하게 여기니 어쩔 수 없었다. 남은 세 병의 맥주를 들고 레아는 자신의 방으로 향한다.

 

익숙하게 간호사복의 옷매무새를 가다듬는다. 허리까지 오는 머리카락을 길게 빗질한다. 반질반질한 머리카락에 간호사 모자를 올린다. 사실은 벗고 있어도 지장은 별로 없지만, 주인이 지정한 복식이니만큼 최대한 지키고 싶었다.

원래대로라면 교대는 다음날 아침이었지만 오늘은 조금 일찍 수복실로 향한다. 어차피 환자도 거의 없고, 인수인계 받을 사항도 적을 테니 언제 교대하던 별로 의미있지는 않았다. 숙소층에서 내려가 함내의 제반시설이 있는 층으로 향한다.

오르카호의 인원들은 대부분이 전투 인원이었고 크던 작던 철충과의 전투를 꾸준히 하고 있기 때문에 사령관이 지속적으로 수복실의 설비 개선과 시설 확충을 진행한 결과 지금의 수복실은 대량의 인원을 쾌적하게 수용 가능한 장소가 되었다.

수복실 안은 거의 비어있었다. 침대에 누워있는 바이오로이드가 보였지만 전투가 거의 없는 지금은 가끔 농땡이를 피우러 오거나 과음한 몸을 하루 정도 달래려는 바이오로이드들이었다. 밤인 만큼 조도를 낮춰 어두운 수복실을 지나 문을 두드린다.

 

나야”

 

미닫이 문이 열리자 다프네가 의자에서 기지개를 쭉 켠다.

 

일찍 왔네요 언니?”

응 교대하자”

괜찮은데, 아침에 교대해요”

 

패널로 글을 읽고있던 다프네가 리제와 눈을 맞춘다.

 

됐어, 벌써 왔는데…아마 언니가 네 방에도 맥주 가져다 놨을거야. 한 병 마셔봐”

맥주요?”

드리아드가 수확한 보리로 만든거래”

어머, 벌써 그렇게 됐나요?”

 

다프네도 언젠가 봤던 보리를 벌써 수확하고 맥주로 만들었단 사실이 새삼 놀라운 듯 했다. 벌써 5월 말이었다. 스발바르 제도가 워낙 추운곳이라 아직도 겨울처럼 느껴졌지만 시간은 둘의 생각보다 빠르게 흐르고 있었다.

 

아, 그리고 드리아드 좀 찾아가봐”

드리아드요? 무슨 일 있어요?”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만, 언니가 말하기로는 주인님한테 맥주를 전해주러갔는데 지금 주인님이면 아마 장화라는 애랑 같이 있을거같아서”

 

간략하게 설명하는 리제의 말 뜻을 다프네는 금새 알아듣는다.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던 다프네는 패널을 챙기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방에 가서 옷만 갈아입고 찾으러 가볼게요”

응, 부탁할게”

 

다프네와 직무를 교대한 리제가 의자에 걸터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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