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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신처분, 시저스 리제

티타니아가 오베로니아의 심장을 찌를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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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리아드는 침대에 누워 머릿속으로 생각하던 주인의 이미지를 정리하기 시작한다. 언제나 상냥하고 친절한 마음씨, 가끔 보여주는 어린아이 같은 장난끼, 작전을 지시할때의 진중하면서도 대원들을 생각하는 따뜻한 판단력, 어울리지 않는 여러 요소들이 하나로 이루어진 남자가 그녀의 주인이었다.

분명 상냥한 남자라고 생각했다. 아니 상냥한 남자가 맞았다. 그런데 그런 주인이 왜 자신을 막연히 기다리게만 했을까, 주인에게 실망감을 품은 것은 아니지만 어딘가 섭섭한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기분이 영 좋지 못했다. 주인이 자신을 기다리게 한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주인이 그렇게 자신을 만나러만 와준다면 그 곳에서 하루 종일이라도 기다릴 수 있었다. 날씨니 뭐니 하는 건 그다지 중요치 않았다.

다만, 주인이 자신을 기다리게 했다는 것만으로 주인에 대한 사랑을 의심하는 자신이 너무 보기 싫었다. 겨우 그깟 것으로 주인을 나쁜 사람으로 몰아가는 자신이 너무 버티기 힘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릿속에선 티타니아 언니의 싸늘한 목소리와 말이 같이 떠돈다. 사랑하는 사람을 추운 날씨속에 내버려두는 남자가 그의 주인인걸까, 알 수 없었다. 티타니아 언니는 자신이 복구되기도 전에 주인님이 되살려냈지만, 1년이 넘게 지난 지금까지도 고통 속에서 헤엄치고 있었다. 그런 언니에 비하면 자신은 주인님의 사랑을 온전히 받고있다고 느껴지긴 하지만, 그래도 몇 달간 쏟아부은 자신의 정성을 전해주지도 못하는 지금의 처사가 왠지 가혹하게만 느껴졌다.

괜시리 복잡한 마음에 불을 끄고도 잠자리를 뒤척거린다. 몸을 왼쪽, 오른쪽 돌려보아도 뾰족한 마음의 돌파구가 생기지는 않는다. 깊은 밤인데도 머릿속이 너무 또렷해서 잠이 오지 않는다. 오만가지 잡생각이 머리를 가득 채우지만 그것들이 너무 선명해서 괴로울 지경이었다.

 

하아…”

 

달빛마저 두터운 구름에 가리워진 날, 빛이라고는 한 점 들지 않는 방 안에서 드리아드가 냉장고 문을 연다. 냉장고 조명이 들자 캄캄한 방 안에서 쪼그리고 앉아있는 드리아드의 모습이 비춰진다. 방금 전 까지 가방에 들었던 맥주 두 병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유달리 하얀 조명에 속이 훤히 비춰지는 맥주병에 뻗쳐지던 손이 멈춘다.

 

이건 남겨놔야겠지”

 

냉장고라고 해봐야 큐브모양의 작은 크기였고 그 안에는 간단한 간식거리 정도만 있을 뿐이었다. 가끔씩 밤 중에 견과류나 곡물로 만든 음료수를 마시기는 했지만, 오늘은 그런 것 정도로는 복잡한 마음을 다스릴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머릿속을 완전히 뿌옇게 만들지 못하면 잠에도 못 들 것 같았다. 조금 더 손을 깊숙이 뻗어 병 하나를 꺼낸다. 리제가 마셔보라며 선물해 준 것이었다.

곡선의 크기부터 남다른 진한 녹색 병엔 읽기 힘든 글씨로 무어라 쓰여있었다. 고급스런 와인잔은 못되지만 드리아드의 손바닥으로 감싸쥘 만한 크기의 머그잔에 붉은 와인이 담긴다. 와인에 대해 잘 아는 리제언니가 보면 이래저래 핀잔을 줬을 것 같다. 머그잔에 한 가득 와인이 담기자 병목에서 찰랑거리던 물결이 병의 허리 아래까지 내려간다. 병 크기는 꽤나 커보이는데 안에 담긴 와인은 그렇게까지 많지는 않은 듯 했다.

머그잔에 담긴 와인에 드리아드의 얼굴이 붉게 비친다. 술은 아직 한 잔도 마시지 않았는데 왠지 얼굴이 상기된 느낌이다. 홀짝거리는 소리와 함께 입 안에 씁쓸한 맛이 감돈다. 에일 맥주에서 느껴지는 과일향과는 다른 원색적이고 농축된 포도향이 느껴진다. 막연히 포도주라면 달콤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었는데, 의외로 단맛이 강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마치 살아있듯 신선하다 해야할까, 입 안에서 흐르는 액체가 자신의 오감에 포도향을 퍼뜨리는 것만 같았다.

처음엔 술에 취해서 너무 또렷한 정신을 몽롱하게 만들고 싶었는데, 어쩌다보니 와인 자체에 정신을 뺏겨버렸다. 술을 즐기지는 않았지만, 처음 느껴보는 신선한 감각에 오감이 몰두하고 있었다. 큰 머그잔에 가득 든 와인을 홀짝이다 한 잔을 비운다. 이끌리듯 와인병에 손을 쥐고 한 잔을 따른다. 가득 든 머그잔의 와인을 이번에는 크게 들이킨다. 풍부하게 입 안을 누르는 바디감이 인상적이다. 드리아드에게도 익숙한 흙냄새가 느껴진다. 한 잔을 마시고 시간이 지나니 몸이 왠지 후끈해지는 느낌이다. 심장이 뛰는 것이 몸 속에서 느껴진다. 심장이 뛸 때 마다 양 볼이 따뜻해지는 것이 체감된다. 술에 취했구나 하는 기분이 적나라하게 느껴진다. 내친김에 남은 와인까지 잔에 따른다. 머그잔에 반 만 담긴 와인이 왠지 야속하게 느껴진다.

병과 잔을 내버려두고 침대에 드러눕는다. 후끈한 감각이 왠지 기분나쁘게 느껴지지 않는다. 머릿속에 탁한 물이 들어차자 생각하던 것들도 불투명하게 보인다. 생각을 끊어내자 빈 공간에 피로감이 들어찬다. 오늘 하루도 양조된 맥주를 병으로 옮겨담고, 포장하고, 찬 바람이 부는 밖에서 오랫동안 기다렸으니 피곤한 것이 정상이었다. 천천히 눈이 감긴다. 이불도 덮지 않았지만 오히려 노곤한 몸이 지금 상태가 딱 좋다고 말하고 있었다.

 

으으…”

 

감각적으로 지금이 완전한 아침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눈을 감고 서너시간 정도가 지났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술을 먹은 탓에 눈은 감았지만 오히려 깊은 잠에는 빠지지 못하고 있었다. 드리아드의 입에선 연신 미약한 신음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오르카호 내에서도 리제가 구해주는 와인은 고급스럽고 맛 좋은 술이라는 이미지와는 다르게 항상 강한 숙취를 동반하고는 했다. 와인이란 술이 대개 그랬지만 리제것은 유달리 그런 느낌이 강했다.

몸을 일으켜 앉는다. 머리는 앉아있는데 정신은 한 박자 늦게 딸려오는 것 같았다. 고개를 살짝만 돌려도 정신이 늦게 돌아오는 느낌에 속이 메스꺼워진다. 그것과는 별개로 머리를 쿡쿡 찌르는 듯한 고통이 익숙해지지 않는다.

비척거리는 몸을 일으킨다. 한 걸음 살짝 내딛기만 해도 머릿속이 둥둥 울리는 듯한 느낌이다. 불규칙적인 숨을 이끌고 문을 연다. 밤이니 만큼 복도 조명의 밝기를 낮게 낮추었지만 그럼에도 캄캄한 방 안에 있던 눈이 빛을 만나자 자연스레 눈을 찡그리게 된다. 미간에 힘이 들어가자 두통이 심해진다.

 

어머, 드리아드씨 어디 아프신가요?”

 

실눈을 뜬 채 복도의 벽을 짚어가며 걸어오는 드리아드의 모습을 보고 층의 당직을 서던 님프가 묻는다. 평소에는 소박하고 수수한 이미지의 그녀가 이마를 손으로 짚고 비틀거리고 있으니 다른 바이오로이드와는 다르게 유달리 아파보이는 것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냥 두통이 좀…”

 

두통이라고는 했지만 드리아드가 가쁜 숨을 내쉴 때 마다 느껴지는 온기와 단내는 드리아드가 술을 마셨다는 걸 뻔히 알게 해주었다. 물론 술 정도야 마시는 것이 이상할 건 없었지만 드리아드가 자신의 몸도 못 가눌 만큼 많이 마실 이미지는 아니었다.

 

수복실에 연락해드릴까요?”

네…”

 

목이 건조한지 드리아드는 소리를 작게 내는데도 목소리가 갈라지고 있었다.

 

잠시 앉아계세요”

 

평소엔 당직을 서며 자신이 앉아있던 의자에 드리아드를 앉힌다. 자신의 패널을 통해 수복실에 알림을 보내며 정수기에서 물 한 잔을 받아다준다.

 

자, 천천히 마시세요”

 

비틀리는 속에 냉수가 들어가자 구토감이 확 올라오지만 정신의 초점은 조금이나마 잡히는 것 같았다. 얼굴을 찡그리는 드리아드를 부축해 일으킨다. 님프의 보폭에 맞추려는 드리아드와 드리아드의 보폭에 맞추려는 님프의 마음이 엇갈리다보니 서로의 스텝이 꼬인다. 코 앞의 엘리베이터까지 가는데도 한참이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수복실까지 그녀를 바래다준다. 자다 깬 듯 부스스한 모습의 리제가 황당하단 표정으로 드리아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언니, 저 아파요…”

어후 술냄새…혼자 술마셨어?”

 

리제에게 안기듯 몸을 맡긴 드리아드가 입을 떼자 리제의 표정이 찡그려진다.

 

네…”

으이그 이 화상아…자, 침대에 누워”

 

부상당한 바이오로이드가 없으니 입출입도 자유로워진 수복실을 기껏 새벽에 비웠더니 손님으로 자기 동생이 올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시트를 깔끔하게 갈아놓은 침대에 드리아드를 눕힌다.

 

맥주 마신거야?”

으응…”

 

이상한 신음과 함께 드리아드가 고개를 가로로 젓는다. 조도를 낮춘 수복실에 드는 불빛이라고는 문을 열어둔 리제의 사무실 정도가 끝이었다.

 

뭐에요 이거…?”

이온음료, 님프씨가 하나 가져다주셨어. 원래 발할라 부대 보급품인데…”

 

이온음료를 드리아드에게 건네주고 리제는 침대 옆에 걸터앉는다. 꼴깍거리며 잔에 따른 이온음료를 마시고는 드리아드가 천천히 몸을 뒤로 눕힌다.

 

그래서, 뭘 마신거야?”

언니가 줬던 와인…”

그걸 얼마나 마셨길래”

한 병…”

 

황당한 대답에 리제의 눈이 동그랗게 뜨인다.

 

그걸? 혼자서 마셨다고?”

 

드리아드가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리제의 뜨인 눈이 가볍게 감기고는 황당하다는 듯한 웃음을 내뱉는다.

 

안주는”

그냥 술만…”

미쳤구나…”

 

그 큰 병에 든 와인을 안주도 없이 혼자 마셨으니 속이 안뒤집어지는 것이 이상할 지경이었다. 게다가 발효주인 와인과 다른 과실주는 증류주들과는 다르게 도수에 비해 숙취가 심한 편이었다. 평소엔 술을 입에도 잘 안대던 드리아드가 저렇게 술을 들이킨 이유를 리제는 공감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다고해서 황당함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언니…”

응”

주인님…내일은 오실까?”

 

리제가 예측하기에도 뻔하다면 뻔한 이유였기에 드리아드의 속이 공감은 됐다. 저렇게 솔직하게 자신의 속내를 내뱉는 걸 보니 마음이 심란한 것이 꽤나 심한 듯 했다.

 

으이그 주인님이 그 꼴을 보면 퍽이나 좋아하시겠다. 오늘은 잠이나 푹 자세요…밝기 더 낮춰줄게”

응…”

 

수복실 조명의 밝기를 완전히 낮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드리아드의 숨소리가 새근히 들려오는 걸 듣자 리제는 다시 사무실로 돌아간다.

 

주인님…연락 드려야하나…”

 

리제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참고로 난 술먹고 메로나나 붕어싸만코 먹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