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   우리집 브닐라 모음집 - 라스트오리진 채널 (arca.live) 

 

 

===============

 

 

......

......

......

 

 

눈을 떴더니 나는 침대 위에 있었다. 깔끔한 천장을 은은히 비추는 간접등이 나를 반긴다. 

 

.....뭐지.

 

아까 에스컬레이터 아래에서 C를 봤던 것까진 기억나는데.

 

몸을 일으키려 했더니 배 쪽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진다. 손을 대보니 그쪽에는 붕대 같은 것이 감겨있다. 이제 보니 팔에도 링거가 꽂혀 있었고. 

 

....병원인가? 아니, 이 시국에 멀쩡히 돌아가는 병원이 있을 것 같진 않은데.

 

눈을 돌려 수액을 꽂아놓는 막대를 보니 삼안 산업 로고가 새겨져 있었다. 주변을 더 두리번거렸더니, 병상 옆의 가림막은 물론 웬만한 기물에는 전부 삼안 로고가 박혀있다. 그렇다면 여긴 임원 전용 대피 시설 안쪽이란 이야긴데..... 

 

졸라게 혼란스럽다. 머리가 핑 돌 것 같구만. 

 

입은 바짝 타들어 가고, 힘없이 이마 위에 얹은 손으로는 열이 느껴진다. 몸 상태가 별로 좋지는 않은가보다. 

 

다친 건가? 그러고 보니 이비는 어디 있지? 다른 애들은? 

 

온갖 잡생각들이 머리 곳곳을 헤집고 있다. 잠깐 진정하고 생각을 좀 정리해보자. 차근차근 먼저 있었던 일부터 떠올려보자고.

 

보자, 에스컬레이터를 내려가고 나서 무슨 일이 있었더라?

 

 

========================

 


 

 

 

 

그래, 피비린내 가득한 지하 한복판이었다.

 

C. 저 지긋지긋한 개새끼는 아직도 그곳에 멀쩡히 서 있었고. 여기에서 펼쳐진 학살극도 저 새끼의 소행이었겠지.

 

내 옆에 아무 거리낌 없이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메이드가 있다는 게 이다지도 기쁠 수가 없었던 기억이 난다. 

 

왜냐하면 저 새끼만큼은 꼭 죽이고 싶었으니까. 왜냐고? 하치코와 어르신들도 모자라서 내 오랜 친구였던 H와 녀석의 마누라 바니까지 죽였던 놈이다. 신혼여행은커녕 결혼식도 못 올리고 가버린 내 친구들, 거기에 아라의 양부모는 물론 수많은 바이오로이드를 비롯한 생명까지 아무렇지 않게 해쳐왔으니.....

 

제 목숨을 빼앗길 각오도 충분히 되어있다고 생각해도 좋겠지. 

 

내가 뭐라 말할 새도 없이, 이비는 기다렸다는 듯 C에게 공격을 가했다. 뭐, 별 상관은 없었다. 어차피 ‘이비, 저새끼 죽여.’ 라고 말할 생각이었거든. 

 

이비에 이어 아라까지 가세한 시끄러운 총성이 귀를 때린다. 그 탓에 놈이 뭐라고 외치는지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그의 지시를 받은 리리스는 푸른 보호막을 켜고 우리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이비와 아라는 총을 쏘아대며 에스컬레이터를 마저 내려갔고, 우리도 허둥지둥 그 뒤를 따랐다. 우리가 벗어난 자리에 리리스의 총격이 날아들었다. 조금만 늦었으면 아마 고깃조각이 되었을 거다. 

 

이비와 아라가 한창 리리스(와 그녀의 뒤에 선 C)에게 사격을 가하는 걸 보고 있었더니, 갑자기 C가 “저 새끼부터 조져버려!” 하고 소리친다. 그 순간 소완이 나를 강하게 밀쳐냈다. 쾅, 하는 소리가 뒤를 이었고, 고개를 들자 리리스의 한 손이 내가 있던 곳을 향하고 있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까 시작부터 두 번이나 죽을 뻔했네, 이거. 아무튼 간에.....

 

내가 소완에게 감사의 눈빛을 보내는 사이, 이쪽에 잠시 주의를 돌렸던 리리스에게 다시금 총알이 날아들었다. 자세히 보니 아라가 리리스의 방어막을 견제하고, 이비가 C 방향을 향해 사격하는 모양새였다. 생각보다 방어막이 범위도 넓고 튼튼한지 별다른 효과는 없어 보였지만. 

 

“멀건히 서서 맞지만 말고 좀 움직여, 이 게으른 씨발년아!”

 

C가 버럭 리리스에게 소리 질렀지. 리리스는 그제서야 발을 떼더니 우리를 향해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고. 양손에 쥔 큼직한 권총을 차례로 쏘아대며 여유롭게 다가오는 모습에서 상당한 위압감이 느껴졌던 기억이 난다.

 

“재장전함다, 소위님!”

 

기둥 뒤의 아라가 총을 들어 올리고 탄창에 손을 가져다 대자, 리리스의 집중사격이 그녀에게로 쏟아졌다. 분홍머리 꼬마가 몸을 움츠리며 신음했다. 다친 곳은 없어 보였지만, 그녀 주변의 콘크리트 기둥이 퍽퍽 떨어져 나가는 게 정말이지 위태로운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다른 기둥에 위치하고 있던 이비가 리리스를 향해 불을 뿜는다. 그덕에 아라는 위기에서 간신히 벗어났지만, 리리스는 이비 방향으로 방어막을 돌려놓고는 계속해서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육중한 무기를 들고 저벅저벅 무섭게 걸어오는 것이....꼭 옛날 영화에서 봤던 터미네이터 같은 모습이었다. 

 

아, 이런 일도 있었지. 

 

제대로 된 무기를 가진 두 명의 공격이 통하지 않게 된 시점에서, 유미는 리리스를 어떻게든 막아서려는 듯 외로운 십자가를 들고 앞으로 달려나갔다. 몇 차례 다급하게 크랭크를 돌려대던 그녀가 리리스를 향해 안테나를 향했지만,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아차...”

 

지난번의 싸움에서 파손되었음을 깨닫기엔 너무 늦어버린 것일까, 눈 깜짝할 새 유미에게로 날아온 리리스는 그녀를 멀리 내다 꽂아 버렸다. 리리스는 어딘가 복잡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가히 비인간적인 그녀의 움직임에는 일말의 자비도 없었다.

 

그 순간 나는 이대로 리리스가 내 쪽으로 달려드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아, 여기서 다친건가- 싶기도 했지만, 생각해보니 그게 아니었다.

 

그때 소완이 믿기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리리스에게 달려들었던 게 떠올랐거든.

 

 

 

 

 

한 세기쯤 전 무협 영화에서나 보던 것 같은 초인적 동작들. 사나운 기세로 공격을 몰아붙인 소완은 순식간에 리리스가 가진 장비 -떠다니는 방어막 생성기 같은 것- 중 하나를 파괴하는 데 성공했다. 

 

현재의 소완은 얼핏 보기에도 몸이 그리 성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조건에서도 소완은 순식간에 리리스에게로 달려들어 칼을 휘둘렀고, 그녀에게 권총을 겨누려던 리리스는 예리한 칼날을 피해 몸을 움직이는 수밖에 없었다.

 

소완의 식칼과 리리스의 권총이 현란하게 움직여 대는 꼴을 멍하니 관망했던 게 생생히 떠오른다. 그럴만도 했던게, 이 상황에서 우리가 끼어들어 봐야 방해밖에 안 됐을 테니.

 

그러다가 어떻게 됐더라.

 

아, 맞다.

 

둘이 한참 치열하게 맞붙고 있던 와중에 C가 그 리모컨 같은 걸 꺼냈지. 명령권 강제 재설정 장치였던가 하는 그거. 

 

그 자식이 그걸 소완한테 겨누려고 할 때, 소완은 그걸 눈치채고서는 (또 무슨 무협영화 마냥)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는 어......

 

자기 관자놀이에다 냅다 칼을 꽂더라.

 

보통 사람이 그랬다면 거의 즉사했겠지만, 아무리 몸이 성하지 않아도 바이로이드 스펙이 어디 가지는 않는다는 건지 그녀는 그 상태로도 꿋꿋이 서 있었다. 아무리 인간보다 강하다곤 해도, 저러고도 살아있을 수 있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그때 이비가 소완을 보고서 완전히 미쳤다고 중얼거렸던 것도 생각난다.

 

“...자기 손으로 핵심 모듈을 부숴버렸어요.” 

 

그녀가 말했다. 살짝 비틀거리는 해도, 아까보다 한층 더 맹렬히 싸워대는 소완을 보면서. 

 

그녀의 말대로라면, 소완은 아까의 행위로 이비와 비슷한 상태가 되었다는 모양이다. 기본적으로 프로그래밍된 제약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상태- 달리 말해, 이제 C가 무슨 짓을 하든 소완을 조종할 수는 없게 되었다는 거다. 물론, 이비가 덧붙인 대로, 그걸 위해서 자기 머리에 칼까지 꽂은 건 정말 엄청난 짓이긴 했지만. 즉사하지 않은 게 기적인 수준이었다. 물론 그녀에겐 그러다가 죽든 살든 별반 차이는 없었겠지.

 

아마 C도 소완이 한 행동에 담긴 의미를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에이 썅” 하면서 리모컨을 내던지고 뛰기 바빴으니까. 하긴, 나 같아도 머리에서 피까지 흘리는 붕대투성이 바이오로이드가 달려들면 혼비백산해서 도망치기 바쁘겠지. 대적할 방법을 잃어버렸다면 더더욱. 

 

“저년 막아!”

 

뒤뚱대며 달려가던 C가 소리쳤다. 그러자 리리스가 소완을 막아섰지만, 소완의 예리한 칼은 그녀가 가진 권총 중 하나를 그대로 파손해버렸다. 마치 고속으로 떨어지는 H빔에 맞은 차량처럼 보기 좋게 결딴이 난 것이, 도저히 사람 힘으로 만들 수 없는 모습이었다.

 

음, 그 뒤로는 또 어떻게 됐더라. 기억이 뒤죽박죽이다. 

 

아, 맞다.

 

한동안 싸움을 이어가던 둘을 뒤로하고, 이비와 아라, 그리고 (어느새 몸을 추스린) 유미가 저 멀리 달아나는 C를 쫓았다. 물론 나도 당연히 따라갔고. 저놈하고는 정말로 끝장을 보고 싶었거든. 녀석은 얼마 못 가 이비의 총격에 다리를 맞고 고꾸라져버렸다. 그대로 얼굴로 엎어지는 게 참 고소하기 짝이 없었다.

 

놈이 피가 쏟아지는 다리를 질질 끌며 처절하게 기어 다니는 동안 이비는 놈을 향해 빠르게 다가갔다. 총을 C 자식에게 겨누고 성큼성큼 걸어가는 모습을 보아, 아주 확실하게 끝장을 내겠다는 느낌이었다. 

 

나라고 별반 다를 건 없었다. 저 녀석 숨통을 끊을 마지막 한 방은 내가 날려주고 싶었고, 그게 여의치 않더라도 놈의 차게 식은 몸뚱이에 발차기 몇 번 정도는 먹여 줄 심산이었으니까. 나머지 둘도 마찬가지였다. 그 마음씨 착한 유미도 표정이 험악했는데, C에게 양부모를 잃어버린 아라는 오죽하랴.

 

그렇게 우리가 놈을 에워쌀 때 즈음, C 새끼는 돼지 멱따는 소리로 꽥 고함을 질러가며 발악을 시작했다. 물론 나는 그걸 듣고 코웃음을 쳤지만. 이비의 구둣발이 놈의 얼굴 앞에 탁 놓이자 놈의 흉한 얼굴은 한층 더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어딘가 마음에 드는 표정이었거든. 어떻게든 구차한 목숨을 조금 더 이어보겠다고 아득바득 몸을 비틀어대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이비와 내 시선이 교차했다. 무언의 눈빛을 주고받은 우리 둘이 원하는 바는 완전히 일치했다. 몸을 어떻게든 뒤집어 우리를 향해 멀어지려고 버둥대던 C에게 다시 시선을 돌렸다. 놈은 등으로 바닥 청소라도 하려는 것처럼 필사적으로 바닥을 기어다니고 있었다. 이비는 그대로 권총을 뽑아 놈의 배에다가 한 발을 갈겨버렸다. 

 

놈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지더니, 불판의 위의 굼벵이마냥 몸을 웅크린다. 이비는 손을 쓰기도 싫다는 듯, 고통에 신음하는 놈을 발로 툭 툭 차대며 녀석의 몸을 다시 펴두었다. 이어서 이비가 한쪽 발로 놈의 배에 난 구멍을 짓밟고, 총구를 놈의 머리에 가져다 대는 순간이 생생히 떠오른다. 아라도 부모의 복수를 하게 되길 기대하는 눈치였다. 놈의 죽음을 기대하던 건 아라 뿐만이 아니었다. 나한테도 정말이지 만족스러운 광경이었으니까. 

 

그녀가 방아쇠를 한 번 더 당길 수만 있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우리의 옆으로 무언가가 날아들었다. (원래도 만신창이었지만) 잔뜩 만신창이가 된 소완이었다. 아까 칼을 찔러넣었던 머리 한편에서 흐른 피가 그녀의 은발과 얽혀 지저분하게 뭉쳐있었다. 하얀 조리복은 군데군데 찢어져 넝마가 되기 일보직전이었고. 그 뒤로는 그녀를 그렇게 만들어 버린 원인이 우리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블랙 리리스.

 

순식간에, 문자 그대로, 눈 한번 깜빡이는 사이에 우리에게 날아오다시피 뛰어든 그녀는 아라를 저 멀리 부딪혀 보내고, 소완의 칼에 못 쓰게 되어버린 권총을 유미에게 집어던졌다. 그리고는 그대로 관성을 싣고 몸을 날려 이비에게 뛰어들었고. 

 

 

 

 

 

그대로 이비를 쓰러뜨린 리리스는 두 손으로 이비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그녀의 고운 얼굴에는 마치 악마같은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소완과 싸우며 이리저리 망가진 행색이 그 얼굴을 더욱 기괴하게 만들었다. 

 

경련하는 근육, 하얀 피부를 뒤덮는 주름. 영화에서나 보던 사이코 살인마 같은 표정이었지만, 나는 그 이면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얼굴을 뒤덮은 것은 희열이 아니었다. 그건 이런 상황에 저항할 수 없다는 울분에 가까운 것이었다. 적어도 그렇게 느껴졌던 기억이 든다.

 

이비는 그녀의 팔을 붙잡고 떼어내려 안간힘을 썼지만, 태생이 소모품이라는 한계는 극복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 힘 센 이비도 상위 라인업이라는 리리스 앞에서는 무력하디 무력한 존재에 불과했던 것일까. 소완, 아라는 물론 유미까지도 쓰러져버린 상황에서 그녀를 위해 나설 수 있는 것은 나밖에 없었다. 그 가냘프고 짜리몽땅한 유미조차 팔씨름으로 이겨본 적 없는 무력한 인간인 나밖에는. 

 

하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순 없었다. 리리스에게 달려드는 즉시 곤죽이 되어버리는 내 모습이 눈에 선했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당하고 있는 와중인데, 그렇게 될 걸 알면서도 뛰어들 수밖에는 없지 않겠나. 

 

나는 몸을 일으켰다. 어떻게든 리리스를 저지하고 이비를 돕기 위해서.

 

.....아니, 일으키려 했다는 편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몸을 엉거주춤 반쯤 일으킨 순간, 내 배 쪽에 뜨겁고도 강렬한 통증이 느껴졌다. 마치 누군가가 달궈진 다리미를 몸 깊이 찔러넣는 느낌 같기도 하고, 손톱 밑에 가시가 파고들었을 때의 느낌을 몇 배 정도 부풀린 것 같기도 했다. 

 

반사적으로 뒤쪽을 돌아보자, 한 손으로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상체를 일으킨 C 놈이 있었다. 놈의 다른 한 손은 내 배를 향해 있었다. 놈의 뚱뚱한 손바닥 밖으로 튀어나온 주머니칼 손잡이도 눈에 들어왔다.

 

놈이 헐떡이는 숨으로 무어라고 내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정확히 무슨 말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배때지에 손가락 길이 정도 되는 쇳덩이가 박혀있는데 무슨 말이 귀에 들어오겠나. 무릎이 줄 끊어진 꼭두각시처럼 푹 내려앉았다. 

 

.....생각만 했는데도 배가 다시 아파져 온다. 상처를 누군가가 다시 잡아 벌리는 듯한 기분이다. 존나게 아프네 시발거.

 

아무튼, 그대로 옆으로 쓰러져서 배를 움켜잡고 신음하고 있으려니, C새끼가 민달팽이마냥 내 귓가로 기어와서는 이렇게 속삭였다.

 

“씨발놈의 새끼야. 넌 내가 꼭 죽인다고 했지.”

 

놈이 피 묻은 손으로 내 볼을 움켜쥔다.

 

“근데 그 전에, 저 좆같은 백마년 뒈지는 꼴부터 똑똑히 보여준다. 야 짜장면!”

 

그 새끼가 리리스의 등에 대고 소리질렀다.

 

“죽여버려!”

 

그러고서 놈은 낑낑대며 내 몸을 무슨 소파처럼 써가며 기대앉았다. 개새끼가 무겁긴 존나게 무거워서 쌀 포대 수십 개에 짓눌리는 기분이 들었던 게 떠오른다. 생각하니 더 좆같네.

 

 

 

 

 

그렇게 나는 피를 질질 흘리면서, 이비가 발을 버둥대며 죽어가는 꼴을 지켜봐야 했다. 아주 좆같은 기분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온갖 어휘를 총동원해도 그 좆같음의 일부도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여기까지 오면서 죽을 고비를 여러번 넘겼지만, 이번에는 진짜로 이렇게 가는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내가 지금 여기 누워서 이러고 있는 걸 보면 그때 죽었을리는 만무하지만.

 

기억을 더 더듬어보자.....

 

그래. 

 

피를 흘리며 죽어가던 내 눈에 이비의 수상쩍은 움직임이 보였다. 리리스의 팔을 괴롭게 쳐대고 긁어대던 그녀는, 마치 힘이 빠진 것처럼 손을 축 늘어뜨렸다. 그러고서는 늘어진 손을 허리춤의 권총에 슬적 가져가더니, 권총집에서 뽑지도 않고 그대로 방아쇠를 당겼다. 

 

“으악 씨발, 야! 이 병신년아! 너 일부러 이러냐! 일 처리 좀 제대로 안할래!”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C가 맞는 일은 없었다. 애초에 각도가 달라도 너무 달랐거든. 하지만 가뜩이나 예민해져 있는 C 자식을 자극하기에는 충분했던 것 같다.

 

C가 버럭 소리지르자 리리스는 반사적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비가 노리고 있던 건 바로 그것이었다.

 

 

 

 

이비는 재빨리 나이프를 뽑아 그대로 리리스의 관자놀이에 찔러넣었다. 

 

아까 소완이 자기 머리를 찔렀던 부위와 같은 위치였다. 놈이 날 짓누르고 있던 탓에 C의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놈이 소스라치게 놀라 몸을 움찔대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리리스가 그 자세 그대로 꼼짝을 안 하길래 즉사했나 싶었지만, 잠시 후 이비가 나이프를 뽑아내자 낮은 신음을 흘리며 몸을 움직이는 걸 보니 그걸 맞고도 살아있었던 모양이다. 역시 비싼 몸이시다 이건가. 

 

“.....주....주인님.”

 

잠시 동안 몸을 떨고 있던 리리스가 입을 열었다. 아까 소완이 그랬던 것처럼, 그녀의 은빛 머리칼도 점점 붉게 물들며 엉겨 붙고 있었다.

 

“...헤..헤헤! 그-그래, 이 씨발년아! 네가 그딴 거에 픽 뒈져불면 안 되지, 앵? 키하하하!”

 

얼어있던 C가 긴장이 풀린듯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주인님.....리리스는.....”

 

다행스럽게도 리리스의 손은 이비의 목에서 떨어져 있었다. 그녀는 축 저진 어깨로 자꾸 ‘주인님 (그게 누구든 간에)’을 부르기만을 반복했다. C는 그런 그녀가 답답했던듯, 자꾸만 욕지거리를 섞어가며 그녀에게 윽박질렀다.

 

“주인님.....”

 

“그래, 네 주인 씨바 여깄다고! 대가리에 칼빵 좀 맞았다고 병신 됐냐? 안 죽었으면 하던 거나 마저-”

 

 

 

 

 

“당신 부른 거 아니야.”

 

리리스가 C를 똑똑히 노려보며 대답했다. 

 

“.....야 짜장면, 너 지금 뭐-”

 

그것이 그대로 C 자식의 유언이 되었다.

 

한 문장, 그것도 채 끝맺지 못한 미완의 유언.

 

왜냐하면, 리리스가 곧바로 놈에게 달려들었거든. 그 충격에 C가 빈백 쿠션삼아 기대고 있던 내 몸은 저 멀리 밀려났고, 덕분에 그녀가 놈에게 한 짓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녀는 C를 문자 그대로 잡아찢고’ 있었다. 그녀의 손이 한번 움직일 때마다 콸콸 흐르는 피와 함께 족히 한 근은 되어 보이는 살점이 사방으로 날아갔다. ‘우지직’ 하는 끔찍한 소리와 리리스의 움직임으로 볼 때, 그녀는 C의 늑골을 강제로 벌려서 열어젖히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면서도 계속해서 붉은 살점이나 누런색의 비계 따위를 마구 떼어내 던져버리고 있었고. 이따금씩 길쭉한 모양을 한 부위들도 보였다. 아마 창자겠지. 그것들이 힘없이 날아가는 꼴은 일견 우스워 보이기까지 했다. 

 

C가 내지르던 비명은 인간의 비명이라기보단 짐승의 그것에 더 가깝게 들렸지만, 그마저도 그리 오래 가지 못하고 뚝 끊겨버리고 말았다. 아마 숨통이 끊어져서가 아닐까 싶지만, 리리스의 손에 길다란 분홍색 코끼리 코 같은 게 들려 있었던 걸 보면 성대를 뽑혀서 그런 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 나도 잘 모르겠다. 나한테 의대 학위가 있는 것도 아니니까.

 

한가지 확실히 알 수 있었던 건, 얼마 후 리리스가 있었던 자리엔 사방에 흩뿌려진 고깃조각과 지저분하게 붙어있는 살점으로 붉게 물든 뼈다귀 더미뿐이었다는 사실이었다.

 

생생한 인간 발골쇼가 진행되는 와중에도 이비에게서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이비가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알지 못한 채, 내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졌다. 그러고보니 점점 몸에서 힘이 빠졌지. 난데없이 추워지기도 했고. 

 

얼마 남지 않은 살점을 알뜰히 발라내던 리리스의 뒷모습을 뒤로 하고, 나는 그렇게 의식을 잃었다. 그때 내 머릿속에는 그 때 이비에게 반지를 조금만 더 일찍 줬어야 한다는 생각 밖에 없었던 것 같다. 

 

 

============================

 

 

한동안 누워서 더 기억나는 것이 있나 떠올려 보았지만, 아무래도 내 기억은 여기까지인듯하다. C놈과의 질긴 악연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던 건 반가운 일이었지만, 막상 가장 중요한 이비의 생사는 물론 다른 일행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전혀 알 수가 없으니 답답해서 미칠 노릇이다.

 

그렇다고 직접 몸을 일으켜서 그들을 찾아보기에는 몸 상태가 영 아니었고. 그렇게 하릴없이 누워서 끙끙 앓고 있으려니, 병실 문이 사르륵 열리더니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낸다.

 

아, 이비인가? 혹시나 하는 희망에 몸에 활기가 다 돈다. 반가움에 아픔도 잊고 상체를 벌떡 일으켰지만, 내 눈에 보인 것은 이비도, 다른 일행도 아니었다.

 

 

 


.....그 누군가는 다름 아닌 블랙 리리스였다.

 

 

 =============================


원래는 더 길었지만 분량상 여기에서 잘랐습니다


초안 구상대로라면 이 즈음에서 이야기가 끝났겠지만....

꿈 속 리리스가 부탁한 대로 플롯을 바꾸다 보니 엔딩이 아니라 그냥 중간 지점이 되어버렸네요


아무튼, 그동안 짧지 않은 똥글 시리즈였는데도 지금까지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바로 다음 회차부터 3부가 시작되거든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이힣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