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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신처분, 시저스 리제

티타니아가 오베로니아의 심장을 찌를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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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제가 자신을 찾아온 것 자체는 이상할 것이 없었다. 언제나 자신에 대한 관심을 열렬하게 표현한 바이오로이드였으니까, 물론 최근엔 무슨 연유에서인지 자신만 보면 감정을 주체 못해서 기절까지 해버리고는 했지만, 그렇다고해서 자신을 거부하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자신을 대뜸 찾아와놓고 눈도 제대로 못 마주쳐서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는데다가 얼굴은 자기 눈동자마냥 붉게 상기된 모습으로 꼼지락거리면서 가쁜 숨을 내쉬는데, 저런 부담감을 갖고도 자신을 찾아온 바이오로이드가 자신을 싫어할리가 없지 않은가.

드리아드와는 비슷하지만 다르게, 손을 잘못 대면 깨질 것만 같았다. 최대한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리제를 마주한다. 레아가 어디있냐고 묻고 싶긴 했지만, 일단은 리제가 찾아온 이유부터 듣기로 한다. 다른 바이오로이드라면 가벼운 스킨십이라도 했겠지만, 리제에겐 그럴 수도 없었다.

 

무슨 일이야? 그것도 급하게”

네?”

진정해, 너 숨 엄청 빨리 쉬고있어. 뛰어왔어?”

아뇨, 그건 아니지만…”

 

언제나 분위기를 편안하게 하는 것은 유머다. 과거, 리제가 사랑에 눈이 멀어 사고가 정상적으로 되지 않을 때에는 백치 같은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지금은 자신과 주인의 관계를 어느정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리제 자신도 숨이 가빠진 것이 주인을 마주했기 때문이란 것을 알기에 모른척 뛰어왔냐고 묻는 주인의 농담에 헤실거린다.

 

그래서, 무슨 일이야?...잠깐 자리를 옮길까? 여긴 복도니까, 사무실이라던가”

아뇨! 아뇨…괜찮아요. 잠깐이면 돼요. 잠깐…”

 

리제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린다. 말 한마디 하는 걸 저렇게 어려워할 필요가 있을까. 말 한마디에 죄송하단 말을 반복하던 드리아드와 비슷한 구석이 보인다. 자매는 자매구나 하는 생각이 뜨문뜨문 들게하는 모습이었다.

허리와 몸을 베베꼬던 리제의 등 뒤에 머무르던 손에서 종이 한 장이 나온다.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흰 종이에 주름이 세게 져있었다. 달달 떨리는 손으로 리제가 종이를 펼친다. 글자가 제대로 보이기나 할까 싶은 모습에 손이라도 쥐어주고싶었지만 그런 짓을 했다간 리제가 또 쓰러져도 할 말이 없었다. 위태하고 불안한 모습이어도 일단은 그 모습을 지켜보기로 했다.

 

주인님, 후우…저는 아침에…드리아드의 자해를 말리기 위해 드리아드와 몸쌍무을 했습니다. 절대, 주인님을 실망시키려고 한 행동이 아닙니다. 저를 미…미…”

안 미워해, 걱정하지마”

 

어쩐지 만나는 애들마다 저 말을 입에 달고있다. 드리아드의 말은 자신의 소외감 때문에 자기를 미워하지 말아달란 것이라면 리제는 혹여나 자신의 행동에 사령관이 실망했을까 하는 말이란 것 정도의 차이는 사령관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거 말해주려고 여기까지 온거야?”

네”

헤에…그건 편지인건가?”

네?”

나 줘”

 

얼떨떨한 반응에 리제는 사령관의 손으로 종이를 건네준다.

 

어후”

 

거의 깜지마냥 문장을 썼다 지웠다, 썼다 지웠다의 반복 끝에 a4 용지 구석 끝자락에 짧은 문장 하나만이 온전히 남아있었다. 그 문장을 적은 공간을 빼고는 전부 검은 글자 위에 검은 선을 덧대 수정한 흔적 뿐이었다. 그것도 글자가 겹쳐져 꽤나 빽빽하게 보였다. 뒷면은 흰 종이인데 앞면은 복잡하다못해 보고있기만 해도 어지럼증이 느껴질 정도였다.

 

네가 쓴거야?”

다프네가…써보라고…”

보고서 올리고 세상 다 죽은 표정으로 내가 너 싫어할까봐 걱정이라도 했어?”

 

리제는 자신의 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사령관의 모습에 애써 맞춘 눈을 피한다. 자신을 미워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주인이 지금 자신을 질책할리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속이 들여다보이는 느낌이 부끄러운건 어느 소녀던 마찬가지인 듯 했다. 보고서를 올리고 책상에 얼굴을 박으며 한숨만 푹푹 내쉬던 리제에게 주인님 걱정은 하지 말고 잘못한게 신경쓰이면 차라리 사과하러 올라가는게 어떻냐고 말한 것은 다프네였다. 어떻게라고 물어보니 뭐든 상관없지 않냐며 종이 한 장을 가져와서 자기 마음을 적어보라 한 것도 다프네였다. 이건 어떨까 저건 어떨까 하며 쓰고 지우고를 반복하고 2문장의 짧은 글만을 적어내자 양은 상관 없다며 올라가보라고 등을 밀어준 것도 다프네였다.

평소라면 다프네의 말을 꼭 따르지 않을 리제가 순순히 그렇다고 하는 걸 보니 마음고생이 어지간히도 심했구나 하는 것이 느껴진다.

 

주인님, 제가 그런 짓을 해도…절대 주인님을 실망시키려고 그런 게 아니란 거 아시죠?”

 

리제의 목소리가 격하게 떨린다.

 

그럼, 드리아드가 다칠까봐 그랬던거지? 드리아드가 다치면 내가 실망할까봐”

네…네!”

설마 그런것도 모를까봐”

그러면 저를 아직도 사랑하시나요?”

 

한마디와 함께 리제가 겨우 사령관과 눈을 맞춘다. 그녀에겐 엄청난 도전과 부담이었겠지만 주인은 아무렇지 않게 리제와 눈을 맞추어준다. 팔을 가볍게 벌린다.

 

에?”

왜, 싫어?”

 

자기 품에 안기란 뜻이었지만 리제는 그토록 바라던 표현에도 몸을 머뭇거린다. 참 애틋하고 불쌍하면서도 볼때마다 장난기가 돌게하는 모습이었다. 사령관은 일부러 발을 앞으로 턱 내딛는다.

 

아이구”

 

자기가 달려올거라고 생각이라도 한 걸까, 한 걸음 앞으로 내딛었을 뿐인데 리제가 그대로 자신의 품 안에 뛰어들었다. 아니 달려들었단 표현이 맞을 것이다. 아무리 사령관의 몸이 튼튼하다 해도 예상치 못한 속도로 어깨부터 치고 들어오는 리제의 무게를 받아내기엔 역부족이었다. 몸이 기울어지는 와중에도 리제는 받아냈지만 리제는 미동이 없다.

 

기절했구나”

 

자기가 공격하고 자기가 기절하다니, 어쩐지 리제답단 생각이 든다.

 

아야…”

 

그리고 곤히 기절한 모습을 보고 나서야 넘어진 엉덩이와 리제의 어깨에 찧인 가슴팍이 아파오기 시작한다. 리제를 번쩍 안아들고 누군가에게 전화를 건다.

 

레아?”

네, 주인님”

내 방으로 와줘”

알겠습니다”

 

리제를 자신의 사무실로 옮겨놓고는 침대에 눕혀놓는다. 자기가 죽고못사는 주인에게 어깨빵을 후려갈겨놓고 저리 곤히 자고있는 모습을 보고있자니 괜히 웃음이 나온다.

 

주인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응”

 

언제나처럼 단정한 모습, 고개를 살짝 숙인 레아가 방 안으로 들어온다.

 

어머”

뭐…설명하자면 길어”

 

팔자좋게 사령관 집무실의 침대에 뻗어있는 리제를 보고 레아가 조금 놀란 듯 주인과 리제를 번갈아 바라본다. 주인은 신경쓰지 말라는 듯 레아를 자리에 앉힌다.

 

하아…”

머리 아프시죠? 동생들이 힘들게 해서”

애들이 무슨 잘못이 있겠니, 내 불찰이지”

 

머리가 아픈 것 까지는 부정하지 않는다. 레아는 사령관을 바라보며 빙긋 웃는다. 보고있으면 자신의 속내를 솔직하게 고백하게 되는 미소였다. 레아가 자신의 언니는 아니었지만, 사령관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살짝 숙이고 속내를 털어놓기 시작한다.

 

정말, 뭐라해야하나…드리아드나 리제…”

다루기 힘드시죠?”

응”

 

언니 앞에서 그런 말을 대놓고 하기엔 사령관도 부담이 됐는지 머뭇거렸지만, 이미 레아는 사령관의 속내를 훤히 들여다보고있었다. 언니인 자신도 가끔은 난처하고 피곤하게 만드는 동생들인데 하물며 주인은 더하면 더하지 덜하진 않을 것이다. 공감인지 격려인지 모를 미소를 보인다.

 

어떻게 해야할까?”

주인님은 동생들이 어땠으면 좋으시겠는데요?”

나?”

네, 주인님”

 

동생들, 리제와 드리아드가 어땠으면 좋겠냐니, 흔한 질문이고 뻔한 대답이 나와도 뭐라 할 사람은 없었지만 말문이 턱 막혀버린다.

 

행복했으면 좋겠어. 나랑 같이 있지 못해도 부정적인 생각을 안했으면…뭐 그런거지”

어려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런가?”

물론이죠”

 

레아는 의자를 돌려 주인을 마주한다. 드리아드나 리제의 눈은 마주칠 때 마다 흔들리고, 다프네만 해도 부끄러움에 눈을 피하는 경우가 많았다. 티타니아는 반대로 속을 알 수 없이 차게 식은 눈동자였다면, 레아의 눈동자는 모든 것을 받아들여주는 바다의 모습이었다. 사령관은 눈동자에 빠지듯 레아를 응시한다.

 

다른 바이오로이드들도 그러잖아요? 레오나 대장이 사령관님이랑 떨어져있다고 이상한 행동을 보이진 않는 것 처럼”

그렇지”

메이 대장도 그렇고, 다른 바이오로이드들도 대부분이 그래요”

그래서?”

 

레아는 잠시 고개를 돌렸다가 사령관을 다시 바라본다. 레아의 눈동자에 담긴 바다가 조금은 차게 식은 듯 했다.

 

주인님, 아이들을 사랑해주세요”

어?”

말 그대로에요. 저도, 티타니아도, 리제, 다프네, 드리아드, 아쿠아 모두 주인님의 사랑을 확인만 한다면 절대 주인님에게 걱정을 끼쳐드리진 않을거에요”

하지만, 난 모두를 사랑…”

 

레아의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으면, 속내를 고백하게 된다. 갈피를 못잡는 자신의 속마음을 단정할 수 없었기에 사령관의 말문이 틀어막힌다.

 

어…”

주인님, 리제를 사랑해주세요”

뭐라 해야하나…대답을 못하겠어”

주인님이 리제를 싫어하지 않는단건 누구나 다 알아요. 하지만 주인님은 지금 자신의 마음에 솔직하진 못한 것 같아요”

 

레아의 말이 점점 자신을 미궁으로 끌어당기는 느낌이다. 속마음을 마주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라지만, 그것은 마주하는 것이 자신을 불편하게 만들어서이지 속마음을 알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주인님, 리제와 드리아드, 티타니아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걱정되지, 리제와 티타니아는 겉은 예민하고 사나워보여도 속은 매우 불안정하고, 드리아드도 겉은 상냥하고 친절하지만 속으론 계속해서 자신이 버려지지 않을까 계산하고 있으니까”

그거에요”

응?”

 

가볍게 손뼉을 마주한 레아가 싱긋 웃는다. 영문 모를 행동에 사령관의 고개가 기울어진다.

 

동생들 걱정은 제가 하면 돼요. 주인님은 그냥 동생들의 모습 그대로를 사랑해주세요. 얘는 어떻게 해야할까, 쟤는 어떻게 해야할까…왜 그런걸 고민하고 계세요. 사랑한다면서요”

아”

 

한숨인지 탄식인지 모를 짧은 단말마가 사령관의 입에서 새어나온다.

드리아드와 이야기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면 그저 무슨 일이 있는지 파악하고 드리아드에게 계속해서 질문을 퍼부었을 뿐이었다. 리제와 이야기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생각해보면 그저 리제의 이야기를 듣고 리제의 속마음만을 파악했을 뿐이었다.

너무 단순하고 허탈한 자신의 잘못된 행동에 사령관은 말을 잇지 못한다.

 

다프네도 마찬가지에요. 그 아이를 리제와 드리아드에 비해 평범한 아이로 보지 말고 그냥 다프네 그 자체를 사랑해주세요. 우린 자매지만, 사랑받을때는 자매라는 것도 잊고싶으니까요”

 

질책일까 하면서도 레아의 목소리는 온화했고 표정은 다정했다.

 

아쿠아도, 티타니아도 다른게 맞고 다를 수 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그 아이들도 온전히 아이들의 모습으로만 봐주세요

뭔가, 내가 큰 착각을 하고 있었던거 같아”

후훗,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요. 물론 어렵겠지만, 사령관은 완벽에 가까운 남자니까요”

완벽은 아니구나”

완벽한 사람이 어디있겠어요. 호호”

 

완벽, 가끔 사령관이 착각에 빠지곤 하는 것이었다. 완벽한 인간이 될 필요는 없다던가, 반대로 완벽하다고 착각에 빠져 무언가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있곤 했다.

 

주인님은 그저 본인이 지금 하실 수 있는 일을 해주시면 돼요. 동생들을 만족시키는건 다른 바이오로이드들보다 어렵고 오래걸리겠지만, 100퍼센트가 아니어도, 첫 걸음만 걸어도 제 동생들은 복에 겨워 헤어나오지 못할 테니까요”

 

레아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들어가보겠습니다. 주인님”

아, 레아 하나만 더 물어봐도 돼?”

 

아무렴 상관 없다는 듯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웃어보인다.

 

너는?”

네?”

너는, 내가 널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해?”

물론이죠. 주인님”

 

거짓일까? 레아의 눈동자는 거짓말을 틀어막고 미소는 진실을 말하게 했지만 레아의 미소는 쉽게 그 속을 읽어낼 수가 없었다. 거짓말을 하지 않을 바이오로이드란 사실만으로 그녀를 믿을 수 밖에 없었다. 어른의 관록일까? 사령관은 고개를 잘 모르겠다는 듯 익살스럽게 표정을 찡그려본다. 그런 주인을 바라보며 레아가 다정히 웃어보인다.

 

부탁 같은거 없어?”

네?”

뭐랄까, 동생들한테 내가 그동안 사랑도 못주고 무관심했구나 싶어서, 언니인 너라면 동생들을 위한 선택을 내리지 않을까 해서. 뭐든 좋아…물론 당분간은 일정이 들어차서 어렵겠지만, 그것도 레아라면 동생들이 잘 이해하게 얘기해 줄 것 같고”

부탁…부탁…아!”

 

레아의 표정은 풍부하게 변한다. 손뼉을 가볍게 친 레아가 흥분인지 감탄인지 모를 목소리와 함께 말을 이어간다.

 

티타니아 만큼, 다른 동생들도 관심 가져주세요…들어가볼게요”

 

문 밖으로 나갈 때 까지, 부탁에도 동생들의 이야기를 한 레아는 리제를 안아들고 사령관실 밖으로 나간다. 사랑, 관심, 자신은 언제나 모두를 사랑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러지 못했단 사실이 정신을 멍하게 만들었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쉬운 듯 하면서도 막연하게만 느껴진다. 할 수 있는 일, 정말 사소한 것도 상관 없을까? 하는 생각에 사령관은 통화 버튼을 누른다.

 

드리아드, 어제 만들었던 술…지금 가져와줄래?”


조금 길지 않을까 했는데 평소랑 비슷한 분량이었네 결국

개인적으로 내가 생각하는 페어리의 모습을 쓰고 싶었어

레아는 언제나 어른스러운 혹은 언니다운 모습이 부족하다고 생각. 초코 레아가 욕을 존나 먹긴 하지만 그땐 그래도 동생들을 위해서 뭘 한다는 얘기라도 있었지


다음에도 뭘 쓰긴 해야하는데

레프리콘 얘기를 쓸지 스트라토 얘기를 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