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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나군.”

 

 

 

두 눈이 휘둥그레지는 광경. 비행기를 타고 알파가 알려준 장소로 도착한 나는 내 눈 앞의 장면에 입을 벌릴 수 밖에 없었다.

 

지평선이 보일 만큼 높다란 언덕 위에서 내려다 보이는 도시.

 

주변은 온통 한 때 도시였다는 흔적 밖에 남아있지 않지만 그 한 가운데에 거대한 건물의 숲이 자리하고 있다.

 

델타가 있던 곳에 비할 수 있을 만큼 거대한 고층 빌딩. 도심의 정중앙에 있는 황금빛 건물은 다른 것들에 비해 유독 커다랬다.

 

 

 

“저게 환상이라고? 아니면 신기루? 

... 그게 뭐가 됐든 사람들 호기심을 자극하기엔 충분한 것 같네.”

 

“주인님? 저기가 주인님께서 말씀하셨던 그곳인가요?”

 

“그래. 우리의 다음 목적지지.”

 

 

 

생각해 보면 굳이 게임 속 이벤트를 따라 오르카의 행보를 결정지을 필요는 없다.

 

하지만 게임의 이벤트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오르카 내에서 일어난 일. 다른 하나는 오르카 외부에서 일어나는 일.

 

전자의 경우는 그냥 대충 대충 넘겨도 되지만 후자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이뤄질 지 모르는 것들이다. 

예를 들어 요정 마을에서 로버트가 세레스티아를 실험체로 써서 죽였을 경우를 생각해 봐라. 상상만 해도 머리가 아찔해진다.

 

그러니 만약 이 낙원 이벤트도 시기를 놓쳐 내가 아는 것과 다르게 진행된다면 그 후폭풍은 예측불허일 것이 불 보듯 뻔한 일.

가능하다면 빨리, 신속하게 끝내버리는 것이 맞다.

 

 

 

“오늘 주인님과의 동침을 위해 저희 동생들이 얼마나 열심히 준비를 했는지 아세요?

정말이지... 머리 속에 뭐가 들으신 건지 모르겠다니까요.”

 

“미안 미안. 나도 리리스랑 오랜만에 오붓하게 지내고 싶었는데 일이 어떻게 될지 짐작할 수가 없어서.

그러니까 그냥 후딱 끝내버리고 같이 자자. 다음엔 두 배 더 같이 있어줄게.”

 

“... 칫. 제 소원은 그런 것보다 지금 당장 주인님과 함께 하는 거란 말이에요.”

 

“소원?”

 

 

 

리리스의 말에 나는 문득 마키나의 능력에 대해 떠올려봤다.

 

지금 우리 눈 앞에 있는 저 도시, 아니, 저 환상을 유지하고 있는 마키나는 대상의 마음 속 깊은 곳의 욕망을 현실로 구현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 능력만 온전히 가지고 올 수 있다면 우리 대원들의 욕구 불만도 어느 정도 해소해줄 수 있을 것이다.

가야 할 곳은 많은데 사람 몸은 하나 밖에 없으니, 어떻게 해서든 꼭 우리 편으로 회유해야만 한다.

 

 

 

‘그러려면 마키나보다 메리를 먼저 만나기도 해야겠지. 메리는 마키나의 환상이 통하지 않는 유일한 바이오로이드니까.’

 

 

 

그런 생각을 하면 도시의 전경을 다시 한 번 내려다 보았다.

 

광활하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 만큼 거대한 도심. 저길 돌아다니며 메리를 찾을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아프다.


어차피 내가 찾을 필요는 없겠지만...

 

 

 

“그나저나 지평선 전체가 도시 모양의 환상이라니. 저 정도 크기면 서울보다 조금 작은 수준일 것 같은데...?

어떻게 저렇게 큰 게 유지되고 있는 거지? 아무리 마키나라고 해도...”

 

“주인님, 정찰을 마치고 돌아왔어요.”

 

 

 

파르르 떨리는 날개의 홀로그램.

 

주변을 돌아보고 온 리제가 내 옆자리에 살며시 내려앉았다.

 

 

 

“주인님의 말씀대로 주변에 철충이나 다른 위험 요소들은 발견되지 않았어요.

가끔씩 보이는 건 레아 언니가 처리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거에요.”

 

“그래, 수고했어.”

 

“헤헤, 별 말씀을요.”

 

 

 

레아의 능청스러움을 물려받은 리제는 자연스럽게 내 품 안으로 자신의 얼굴을 비비며 들어왔다.

 

고개를 돌릴 때마다 리제의 몸에 달린 레이스가 흔들거린다.

내 피부를 간지럼 피는 레이스들. 리제는 간지러움을 찾는 내 얼굴을 보며 장난끼 넘치는 웃음을 지었다.

 

 

 

“주인님~ 주인님~?”

 

“으, 응. 리제야...”

 

“오늘은 잘 주무시고 오셨나요? 아침부터 다른 분들께 시달리는 장면을 ‘우연히’ 목격해버려서 제가 얼마나 걱정이 많았는데요~”

 

“하하... 괜찮아. 어차피 그 애들이 나를 잡아먹을 것도 아니고...”

 

 

 

빨간 눈이 매력적인 리제. 하지만 이럴 때마다 붉게 빛나는 눈동자를 보면 누구 하나 담그고 온 거 아닌가 싶은 섬뜩함이 느껴진다.

 

이젠 아예 자세를 고쳐 잡고 내 무릎 위에 자기 자리를 만든다. 다소곳이 앉은 리제가 내 목덜미에 자신의 얼굴을 박고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흐음... 하아... ...

오늘 점심으로는 로제 파스타를 드셨나 보네요. 잔잔한 크림향이 아직 느껴져요.”

 

“어... 어, 그렇지.”

 

“다른 여자 향수 냄새가 좀 나는 걸 보니까... 혼자 드신 건 아니시군요?

그래도 리제는 괜찮아요. 그 여자들은 모를 주인님의 비밀을 리제는 다 알고 있으니까...

이를 테면 주인님의 패널에 난 스크래치가 몇 개인지 같은 거? 어제 밤에 봤을 땐 23개였는데 오늘 오면서 24개가 됐더라구요. 후후후...”

 

“... ...”

 

 

 

그래. 이 애 캐릭터가 원래 이랬었지.

 

얀데레. 내가 언제 어디서 뭘 하고 있든 리제는 어떻게 알았는지 내 일거수일투족을 다 알고 있었다.

 

일전에 페더에게 도움을 요청했던 걸 본 적이 있었는데... 그래도 칼 들고 쫓아와서 위협하거나 하지는 않기 때문에 그대로 내버려 두고 있다.

 

아니, 난 오히려 좋다. 이렇게 선 안 넘고 예쁘장한 애가 나 좋다고 달려드는데 어느 누가 싫어하겠나?

마음 같아서는 주머니에 넣어놓고 다니고 싶은 심정이다. 하지만 문제는...

 

 

 

탕!

 

“햇츙!”

 

“그만하지 그래? 주인님께서 불편해 하시잖니.”

 

 

 

날 감시하려 할 때마다 리리스랑 영역이 자꾸 겹친다는 것.

 

때문에 리리스는 전에 없던 강력한 라이벌을 경험하게 되었다.

 

 

 

“주인님의 침실 주변에 놓인 43개의 카메라 중 네가 보고 있는 건 32개.

주인님의 사생활을 침해하는 게 정도가 지나치다고 생각하지 않아?”

 

“후후, 그렇게 말하는 너는 23개를 빌려 쓰고 있다지?

주인님의 경호대장이라면 다야? 32개는 지나치고 23개면 괜찮게?”

 

“나는 엄연히 주인님의 경호를 위해서 그러는 거지. 누구처럼 주인님의 사진을 잘라서 자기 숙소 침대맡에 붙여 놓고 그러진 않아.”

 

“어라? 그럼 내가 컴패니언 숙소 방 안에서 봤던 그건 뭐였을까?

방 하나를 전부 다 주인님의 물건으로 도배를 해놨던데? 주인님의 물건 모양으로 만든 자위 도...”

 

탕!!

 

“햇... 햇츙!”

 

 

 

리제가 음흉하게 웃으며 내게 들러 붙자 리리스가 총을 쏘아 리제의 말을 끊어버렸다.

 

그리곤 내 반대편 무릎에 자기 자리를 만들고 그대로 눌러 앉았다.

 

내 양 다리와 양 팔은 이제 두 아가씨에게 완전히 속박된 상태. 

리리스에게서 나는 라일락 향수 냄새와 리제에게서 나는 장미 향기가 홀연히 뒤섞여 내 정신을 아스라지게 만든다.

 

 

 

“주인님.”

 

“주인님.”

 

 

 

하필이면 호칭도 똑같아서...

 

부드러운 두 사람의 몸을 온 몸으로 느끼고 있자니 괜한 망상이 이리저리 떠오른다.

 

 

 

“누가 제일 좋아요?”

“누가 제일 좋아요?”

 

 

 

야이 나쁜놈들아. 내가 그걸 어떻게 정하냐.

 

하늘을 바라보며 가볍게 한숨을 내셨다. 여기 있는 둘이 좀 심한 편이긴 하지만 다른 대원들도 결국 이 애들과 같은 마음일 거다.

 

그러니 결론적으로 내가 해야 하는 건 마키나를 구하러 가는 것이다. 이벤트를 진행할 이유는 그거 하나로 충분하다.

 

 

 

“사령관... 괜찮아?”

 

“LRL...”

 

 

 

옆에서 곰인형을 끌어 안은 채 나를 보던 LRL이 있었다.

 


 

“크... 크흠... 주, 주인님? 그럼 저는 이만... 헤헤...”

 

“햇츄웅... 햇... 햇츙...”

 

 

 

내 양 옆에 있던 리제와 리리스는 고개를 돌려 헛기침을 했다. 그래도 아직은 부끄럽다는 게 뭔지 알고는 있는 듯 하다.

 

둘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자리가 생긴 내 무릎 위로 LRL이 와서 앉았다.

 

커다란 곰인형은 여전히 LRL의 몸만큼 커다래서 LRL은 고개를 도리도리 돌려 인형을 옆으로 치워야 했다.

 

햇살에 바람이 스산하게 부는 날.

나는 가만히 앉아 눈 앞에 있는 도심의 전경을 바라보았다.

 

 

 

“사령관, 들리나? 칸이다.

명령한 대로 도시 내부를 순찰하는 중이다만 별 다른 것은 발견되지 않는다.”

 

 

 

내 패널 너머로 소리가 들려온다.

 

도시 내부로 보낸 대원들의 목소리. 칸뿐만 아니라 레오나, 마리 등 여러 지휘관들의 말소리가 패널에서 울렸다.

 

 

 

“그럴 거야. 원래 거기 있는 건 그냥 다 환상일 뿐이니까.

문제는 너무 사실적인 환상이라는 거지. 속으로 품고 있던 욕망들이 구현된 환상이라 빠져나가기도 힘들 테고.”

 

“환상이라?”

 

 

 

칸이 말 끝을 올리며 의문을 표했다.

 

 

 

“... 알겠다. 일단 그 부분을 염두 해두도록 하지.

확실히 환상적인 도시이긴 하다만...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들도 존재하고.”

 

“아마 마키나, 그 애가 데리고 온 바이오로이드일 거야.

왠만하면 건들지 말라고 해줘. 마키나가 보여주는 환상에 사로잡힌 애들이라 건드리면 들켜버릴 거거든. 들키면 문제가 될 테고.

내가 너희 소수만 보낸 이유를 까먹지 말도록.”

 

“확인했다. 별 다른 이상 징후가 나타나면 다시 연락하도록 하지.”

 

 

 

칸은 그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목소리가 울렸던 것을 보면 어느 건물 안으로 숨어 들어가 있던 것 같은데, 마키나에게 들키지 않아야 하니까 그랬던 거겠지.

 

아무튼, 내가 직접 저 도시 안으로 들어가지 않은 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다.

 

첫째, 내가 갔다가 또 무슨 위험 요소를 만날 지 모르니까. 

안 그래도 플랜 z의 후유증이 남아있는 판국에 내가 저기 나갔다간 대원들의 반발이 어떨지 불 보듯 뻔하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둘째, 저 안이 증강 현실인지, 아니면 가상 현실인지 애매모호하기 때문이다.

설정에서는 도시 모양의 증강 현실로 사람들을 유혹하고 납치한 후, 가상 현실 캡슐 안에 집어 넣는다고 했는데 그 말을 믿을 수가 있어야 말이지.

 

실제로 방금 칸이 거리에 돌아다니는 애들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가상 현실을 보고 있다면 어디 캡슐실 안에 갇혀 있어야지, 걸어 다닌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 사령관. 정말로 나 저기 보낼 거야?”

 

“안전이 확보만 된다면.

LRL도 저기 가면 재미있는 거 많이 할 수 있을 거야. 보고 싶은 사람도 볼 수 있을 테고.”

 

“... ... 난 저런 곳보다 사령관 옆이 더 좋은데...”

 

 

 

LRL은 여전히 내 무릎 위에 앉은 채, 내 옷 소매를 양 손 가득 붙잡고 있다.

나에게 무언가를 기대해주는 것일까, 그 손이 아련하게 떨려온다.

 

그러는 게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한계가 명확한 법.

LRL 뿐만 아니라 다른 어린 바이오로이드들도 마키나의 환상을 통해 더 성숙해질 수 있을 것이다.

 

 

 

‘왠지 애들을 저기에 버려두고 오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긴 하지만... 인정할 건 인정해야겠지.

내가 이 애들 아빠 노릇을 해줄 수 있을 만큼 어른이 된 것도 아니고, 그럴 시간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아직도 철충 생각만 하면 머리가 지끈거린다.

 

여왕이니, 교황이니, 정체도 알 수 없는 것들이 어디선가 머리 싸움을 하고 있을 텐데 난 그 끝자락에도 닿을 수 없다.

 

행여나 그 여파가 오르카 호에 닿기라도 한다면 적어도 이런 평범한 일상이 박살 나는 건 순식간일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아버지 노릇을 하라니. 내가 일주일 연속 아스널과 동침을 하는 일이 있더라도 그건 불가능할 것이다.

하기 싫다는 게 아니라, 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말이지.

 

 

 

“사령관. 말해준 황금색 빌딩 하층에 도착했다.

이 건물 최상층을 시작으로 그 마키나라는 자를 찾아보겠다. 특이 사항을 다시 한 번 설명해주겠나?”

 

“그래. 파란색 단말 머리에 키가 나랑 비슷한 여자 바이오로이드야.

주변에 수정 구슬 같은 게 달린 드론이 떠다닐 텐데 그걸로 공격을 해올 수도 있으니 조심하도록.”

 

“확인했다. 그럼 건물 진입을 시작하겠다.”

 

“총 인원이 몇 명인지는 얘기하고 가야지. 애들 다 도착한 것 맞아?

스틸라인 애들은 도중에 뺐다고 들었는데.”

 

“호드 4명, 발할라 5명, 몽구스 5명. 총 14명, 전원 무사 도착했다. 작전의 난이도 상 스틸라인 대원들은 어쩔 수 없이 열외됐다.

사령관이 우리를 걱정해주고 있다는 사실을 잠시 망각했군. 양해 바란다.”

 

 

 

나한테는 큰 소리 쳤으면서 자기들끼리는 아무 말도 없이 쑥쑥 하고 있네.

 

그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속으로 삼켜 넘겼다. 

누구들은 자기들 걱정된다고 난 움직이지도 못하게 했으면서... 으휴, 사령관 팔자가 원래 이런 거지 뭐.

 

아무튼 칸과 레오나, 홍련까지 도착을 했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저 애들이 마키나를 만나면 인간인 내가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을 말해줄 것이고, 그러면 마키나도 최후의 인간을 만기 위해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물론 그 뒷일은 내가 감당해야겠으나 유사시 명령권을 사용하면 그만이니 상관 없다. 지금 당장 급한 건 마키나를 만나는 것이니까.

 

 

 

‘마키나는 극도의 메시아 콤플렉스니까 우리 오르카 호 얘기를 해주면 합류하지 않을 수가 없겠지.

여기에 지금 구원 받아야 하는 애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 부분을 중점적으로 얘기해주면 될 거야.’

 

 

 

나는 얌전히 앉아 LRL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음 연락을 기다렸다.

 

왠지 모를 불안감을 표시하는 LRL. 그러나 괜한 두려움은 긴장감만 고조시킬 뿐이다.

 

저기 들어간 애들은 작전의 귀재들이라 해도 손색 없는 에이스들이다. 그러니 저 애들이 실패한다면 우리 중 누가 들어가도 실패한다는 얘기지.

 

 

삐리릭---

 

 

거봐. 기다리고 있으니까 어련히 알아서 연락을 해오잖아.

 

패널에 손을 뻗어 칸에게서 온 전화를 받았다.




"... 칸?"

 



하지만 그 너머가 이상하리만큼 고요했다.

 

 

 

“... 칸? 내 말 들려?”

 

“들린다. 하지만 작전에 이상이 생겼다.

지금 천장 위에 숨어 놈을 관찰하는 중이다. 뭔가가 잘못되었다.”

 

“놈? 마키나 말이야?”

 

“... ...”

 

 

 

칸은 자신이 말하는 대신, 천장 아래쪽에서 속닥거리는 누군가의 말소리를 담아 보냈다.

 

은은하고 차분한 여성의 목소리. 분명 마키나의 음성이었다.

하지만 그 말의 내용이 심상치가 않다.

 

 

 

“이런 걸 보고 낙원이라 하다니... 시시하기 짝이 없군, 그래.

저 아래 있는 좀비 같은 피조물들이 네 낙원의 시민들인가?”

 

“... 나... 나의 낙원을... 크흑!!”

 

“만져지지도 않는 환영으로 만든 건물들과 눈 가리고 아옹 식의 조잡한 가상 현실.

쯧쯧, 이런 것 정도로 만족하는 너희들의 꼴이 보기 한심스러울 정도구나.”

 

 

 

전혀 다른 말을 하는 같은 목소리. 두 대화의 주체 모두 신기할 정도로 같은 목소리를 하고 있었다.

 

칸에게 좀 더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고 싶었지만 지금 칸은 저 안에 숨어있는 상황. 나는 침을 삼키고 아이들에게 귀환 명령을 내렸다.

 

 

 

“칸. 돌아와라. 이건 예상 밖의 일이야.”

 

“하지만 지금 벗어나면...”

 

“됐으니까 빨리! 만약 저기 있는 게 바이오로이드가 아닌 다른 거면 어쩌려고 그래!”

 

 

 

일개 바이오로이드 따위가 칸과 레오나, 홍련을 이길 수는 없는 노릇. 

그 때문에 칸은 조심스럽게 내게 의문을 표했지만 순간 내 머리속을 스쳐 지나가는 생각 하나가 그런 의문을 무마시켰다.

 

일전에 사향 역시 처음 등장했을 때 메이의 모습을 하고 나타났다.

 

그러니 만약 저기 있는 게 또 다른 철충의 고위 개체라면? 그렇다면 지금 대원들은 사지에 나가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상황이다!

 

 

 

“계획은 전부 취소한다! 전부 다 들키지 말고 돌아와. 이건 명령이다!”

 

“아, 알겠다. 사령관. 그럼 이만 철수를...”

 

“어허, 그러면 안 되지.”

 

 

콰직!

 

패널 너머로 천장이 으스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제길, 벌써 들킨 건가?

 

 

 

“어딜 쥐새끼처럼 빠져나가려고? 너희가 도시 입구에 들어섰을 때부터 이미 알아챘다.

그나저나 역시 교황 성하의 말씀이 옳았군.

이단자. 네가 여기로 올 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었다. 뭐, 직접 오는 게 아니라 이런 도구들을 보냈다는 게 조금 흠이긴 하지만.”

 

“끄으윽... 소음이...!”

 

 

 

철충들의 말은 나를 제외하곤 거친 굉음으로 밖에 들리지 않는다.

 

아이들의 신음 소리가 저것의 목소리 너머로 들려온다.

 

 

 

“스읍... 그나저나 이렇게 되면 일이 조금 복잡해지는데.

원래 우리 계획대로였다면 이단자, 네가 이곳으로 직접 왔었어야 했단 말이야. 이따위 재미 없는 피조물들이 아니라.”

 

‘뭐지?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 건가?’

 

 

 

단순히 떠보는 것인가? 아니면 저것들도 뭔가 계략을 꾸미고 있는 걸까?

 

... 아이들의 비명이 점점 짙어진다. 더 이상 기다리게 할 수는 없다.

 

 

 

“... 우선 말부터 똑바로 해라. 나도 알아먹지 못할 것 같으니까.”

 

“어라? 그런가?

그럴 리가 없는데? 분명 교황 성하께서 본 내용에 따르면 네가 이해하는 것에는 우리 언어가 상관 없다고...”

 

 

 

다행히 저것이 먼저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을 이어나갔다. 

 

마키나의 목소리를 한 채 저런 말투라니. 이질감이 머리 속을 강타했지만 가까스로 참아 넘기고 대화를 시작했다.

 

 

 

“원하는 게 뭐지?”

 

“글쎄... 한 번 알아 맞춰 볼래? 그냥 알려주면 심심하니까.

물론 한 번 틀릴 때마다 여기 있는 애들 팔 하나씩 자를 거야. 놀이에는 주고 받는 게 있어야 하는 법이잖아?”

 

“... ...”

 

 

 

말하는 투가 한없이 경박하긴 하지만, 왠지 모를 불길함이 엄습해온다.

 

... 원하는 걸 말하라고 했지? 어차피 저것들이 원하는 건 하나뿐이다.

 

 

 

“내가 거길 가길 원하는 건가?”

 

“정답~ 그러고 보니 맞춘 아이에겐 상을 줘야 하는데 그걸 깜빡하고 있었네.

벌을 정했으면 상도 같이 정했어야지. 아이, 내 정신 좀 봐.”

 

 

 

탁!

 

그 순간 패널 너머에서 손가락 튕기는 소리가 나더니 무언가가 웅웅 거리며 거대한 진동을 일으켰다.

 

문제는 웅웅거리는 소리가 패널에서 나는 게 아니었다는 거지.

 

고개를 들어 도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광경에 나는 다시 한 번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네...스트...? 그것도 3마리나...?”

 

 

 

도시 전체를 둘러싸는 네스트와 그 휘하 드론들.

 

바이오로이드 모양을 한 네스트의 함재기들 수천 기가 도시 전역을 날아다니며 수문장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말했다시피 지금 눈 앞에 보이는 건 교황 성하께서 심혈을 기울여 만드신 네스트들.

원래대로였다면 은폐장을 켜놓은 채 다가오는 걸 전부 말살해버렸을 텐데 네가 정답을 맞췄으니까 특별히 보여주는 거야~

그나저나 역시 저 연결체의 정체를 알아보는구나? 역시나 환생자다워.”

 

“... 뭐라고?”

 

“아, 내가 또 쓸데없는 말을 했네.

아무튼 내가 원하는 걸 알게 됐으니 어서 이쪽으로 오도록 해. 난 시간 끄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까.”

 

 

 

내가...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걸 알고 있는 건가? 대체 어떻게?

 

... 아니, 그런 생각으로 시간을 끌 수는 없다. 나는 서둘러 리리스에게 LRL을 넘겨준 다음 말을 이어나갔다.

 

 

 

“리리스, 리제. 둘 다 오르카로 도망쳐.

그리고 감마 불러와. 그 녀석의 기함이라면 저거 상대로 시간 벌이 정도는 할 수 있을 거야.”

 

“네? 그럼 주인님은 어쩌시려고요!”

 

“협상이라도 해봐야지. 지금 저 안에 들어간 애들은 우리 핵심 전력들이니까.”

 

“하지만 주인님! 주인님 혼자서 어떻게 하실 수는...”

 

“그럼 뭐 애들 버리고 도망이라도 칠까?! 지금 저 녀석의 목표가 나라고 떡 하니 알려줬는데?!”

 

“지금 연락된 통신망은 오르카 군용 회선 전역에 연결되어 있어요. 사태를 파악한 대원들이 뭐라도 하고 있을 테니까 주인님은...”

 

“리리스!”

 

 

 

나는 리리스를 뿌리친 채 도시를 향해 눈을 돌렸다.

 

 

 

“대원들이 대응을 하면 그 다음은? 저기 있는 연결체를 잡고 안으로 들어가기라도 할 셈이야?!”

 

“자, 잡을 수 있을 지 없을 지는 몰라도 주인님을 위해 시도 정도는...”

 

“그러다가 죽으면! 생채기 하나 못 내고 의미 없이 몰살 당하면!”

 

 

 

네스트는 별의 아이 유체까지도 혼자 잡을 수 있는 개체.

 

그런 녀석이 세 마리나 모여 있는 이상, 대륙급 전력을 데리고 오지 않는 이상 이기기는커녕 상대하지도 못할 게 뻔하다.

 

 

 

“너희는 내가 걱정된다고 여기 가만히 있으라고 했지!

그러면서 내가 너희를 걱정하는 건?! 그건 이해 못해?!”

 

“... 주... 주인님...”

 

“당장 오르카로 돌아가! 이건 명령이야!”

 

“... 알겠습니다.”

 

 

 

애들의 마음은 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마음보다 녀석의 관심을 끄는 게 우선이다.

 

하다 못해 감마가 여기 올 때까지만이라도. 그 때까지만 버티자.

 

 

 

“... 알았다. 내가 거기로 갈 테니까 애들은...”

 

“스읍, 늦었어. 이단자.”

 

 

 

탁!

 

녀석이 다시 한 번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도심 정 중앙에 있던 황금색 빌딩 꼭대기에서 알 수 없는 빛이 뿜어져 나왔다.

 

은은한 보랏빛 안개 같은 것이 도시 전역을 뒤덮었고, 이윽고 패널 너머에서 기이한 괴성이 들려왔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두 번 다시 안 그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사, 사령관님! 제발...!! 제발 그 안드바리는 건드리지 말아주세요! 차라리 제가 들어가겠습니다! 제가 분쇄기로 들어갈 테니까 제발!!”

 

“미안해... 미안해... 내가 죽여서 미안해... 죽이고 싶어서 죽인 게 아니었어...! 그 사람이 죽이라고 명령해서 어쩔 수 없이...!!

미안해미안해미안해미안해미안해미안해미안해미안해미안해미안해미안해미안해미안해미안해”

 

“애... 애들아...?”

 

 

 

이젠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던 비명 소리. 과거의 음성 기록으로 밖에 들을 수 없었던 괴성.

 

온 몸의 솜털이 바짝 일어섰다.

 

 

 

“이단자. 네가 너무 늦어버려서 나도 어쩔 수 없었어.

원래 이 시간부터 가동하기로 약속했던 거란 말이야. 이쪽 가상 현실의 통제권은 나에게 있지만 그 시작은 교황 성하께서 직접 내려주시는 거라...”

 

 

 

나는 한없이 차분해진 목소리로 읊었다.

 

 

 

“... 지금 뭐 하는 거지?”

 

"왜? 내가 뭐 잘못했어?"


"뭐 하는 거냐고 물었다."


“뭐 하긴. 그냥 여기 있는 마키나가 만든 장치를 조금 손 봐줬을 뿐이야.

낙원을 보여준다면 당연히 그 반대인 지옥도 보여줄 수 있는 거 아니겠어? 

마침 이 애들한테는 지옥이 뭐였을 지 궁금했는데 이런 거였네? 제법 흥미로워졌어.”

 



이 개새끼가.




“... 죽여줄게.”

 

“뭐?”

 

 

 

사람이 극에 달하면 눈이 돌아간다고 했던가? 나는 패널을 쥐고 도시 안쪽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넌, 내가 반드시 죽여줄게.

사지를 잘라서 짐승들 먹이로 던져줄 테니까 거기 이 악물고 기다리고 있어라, 이 개새끼야!!”

 

“하하하! 좋아. 분노는 훌륭한 동기부여가 되지.”

 

 

 

녀석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내 말에 대답했다.

 

 

 

“내 이름은 데우스. 너희들의 말로 신이란 뜻이다.”

 

“그러니 어디 한 번 죽이러 와봐라.

교황 성하의 두 번째 추기경이자 사향 님의 충실한 신자가 너에게 초대장을 던지니라!”

 

 

 

살면서 이렇게 분노해봤던 적이 없었다.

 

데우스. 너는, 내가 어떻게든 죽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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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의 주된 빌런은 언제나 주인공 이전의 좆간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하고 싶었스빈다.




아무튼

절대 애 호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