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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카 호 구석에 마련된 트레이닝 룸.


평소에도 전투용 바이오로이드들의 단련으로 인해 북적이지만, 오늘의 사용자들은 상당히 보기 드문 조합이었다.


"키히힛... 이 해충...!"


"하아..."


이 둘이 트레이닝 룸에서 막고라를 뜨게 된 발단은 이러하다.


얼마 전 레아의 나이 사칭 건으로 인해 불거진 컴패니언과 페어리 시리즈의 다툼은 겉잡을 수 없이 커져 결국 사령관의 중재 하에 1대1 막고라까지 가게 되었다.


보통은 그 부대의 장끼리 붙는게 맞으나, 레아의 특성 상 트레이닝 룸이라는 좁은 환경에서 능력의 사용이 불가능할것으로 보여, 결국 페어리 시리즈 중 그나마 근접전에 능한 리제가 당첨되었다.


(드리아드는 꾀병을 부리다 걸려 하르페이아와 나란히 거지런을 뛰게 되었다.)


처음에는 리제도 상당히 꺼려했지만, 상대의 이름을 알고 나서는 태도를 바꿔 의욕이 충만한 상태로 가위를 갈기 시작했다.


그렇다. 컴패니언 측 대표는 블랙 리리스. 컴패니언 측 최강의 카드다.


컴패니언 측에서는 근접전에 약한 페어리 시리즈를 배려하고자 했지만, 전력으로 부딫혀 오라는 페어리 시리즈의 도발을 받고 친히 리리스가 출전하게 되었다.


"에엥- 하치코도 엄쳥 셰용-"


"가만히 있으세요 하치코. 저 늙은 닭의 코를 찌부러뜨릴 절호의 기회에요."


그렇게 말하는 페로도 막고라에 나가고 싶었지만, 큰언니가 나간다는데 감히 반대할 수는 없었기에 자매들과 함께 열심히 응원하는 것으로 대체하기로 했다.


펜리르는 야성에 충실한 기체라 붙는 상대를 가차없이 짓밟아버릴게, 혹은 그 이상으로 갈 수도 있기에 보류되었고, 포이는 내키지 않는다며 거부했다. 약한 날파리들과 1대1로 싸우는게 뭐가 재밌냐라나 뭐라나.


여담으로, 스노우 페더는 운디네와 정기 모임을 가지기로 했다며 불참했다.


그리하여 블랙 리리스와 리제가 맞붙는 것으로 결론이 났고, 편법 없는 공정한 승부를 위해 결론이 난 즉시 막고라가 개최되었다.


막고라는 사령관과 양 측이 각 숙소에서 탈론페더가 제공하는 영상을 관전하며 진행되고, 감독 및 전투 중재 역은 최강의 AGS 지휘관 알바트로스가 맡게 되었다.


"둘 다 준비는 되었나."


"히히히히히! 햇츙 안햇츙!"


리제는 살기등등한 눈을 하며 흉흉하게 빛나는 가위를 고쳐 쥐었다.


"뭐래는거니.."


허나 리리스는 내키지 않는다는듯 한숨을 내쉬며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예상 외로 리리스는 이번 막고라에 리제가 상대로 나온다는 사실을 듣고 좋아하긴 커녕 고민에 빠져있었다.


"음, 긍정의 표시로 받아들이겠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사령관 허가 하에 정당한 일기토를 개최하도록 하지."


막고라의 시작을 알리듯, 알바트로스의 입자포에서 불빛이 한 차례 번쩍였다. 아마 공포탄 비슷한 역할이었지 싶다.


그와 동시에 리제는 가위를 넓게 벌리고 리리스를 향해 쏜살같이 날아갔다.


"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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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를 실시간으로 지켜보고 있던 페로는 가소롭다는듯 말했다.


"흥, 이 정도 속도로는 언니에게 상처를 입힐 수 없죠."


하치코도 덩달아 말했다.


"마쟈용- 그릉데 이거 언니 총 아니에용?"


"에이, 하치코. 농담하지 마세요, 언니가 저런 자리에 총을 두고 갈 리 없잖아요?"


그렇게 말하며 뒤돌아본 페로의 얼굴이 사색으로 순식간에 물들었다.


페로의 눈에 들어온 것은, 숙소 책상 위에 정리된 채 가지런히 놓여 있는 블랙 맘바.


"그릉가- BB탄 총이었나봐용."


아니, 아니다. 


페로는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저건 틀림없는 블랙 맘바 실물이라고. 

그렇다면 리리스 언니는 무기도 없이 저 미친년과 싸우러 나간 것이다.


틀림없이 저 미친년은 힘의 가감없이 언니를 동강내려 할 것이고, 그러면 아무리 언니라도 무기 없이는 위험하다.


언니가 강하다고는 하지만, 상대도 철충을 저 가위 하나만으로 수없이 동강내온 전적이 있다.

거기다 감독역 AGS도 영 미덥지 않다.


언니가 크게 다치기 전에 당장 경기를 중단시켜야---


"페로- 핸디캡.. 이 뭐에용?"


"지금 그게 중요한가요? 지금 당장 경기를 중단..."


"여기 BB탄 총 밑에 편지가 있더용."


"..!"


편지의 내용은 대강 이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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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제는 리리스를 향해 한껏 벌려진 가위를 힘껏 닫았다.


하지만 아무런 감촉이 없다.


금속과 금속이 격렬하게 마찰하는 소리만 날 뿐, 무언가가 잘리는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리고, 방금까지 분명히 존재했을 터인 리리스의 모습도 사라져 있다.


"하... 스토커, 상대가 너라는 말을 듣고 고민을 많이 해봤거든?"


리제의 바로 왼쪽에서 들리는 소리.


"..햇?!"


그 소리를 인식함과 동시에 시야가 뒤집혔고, 리제는 어느새 반대편 벽에 처박혀있었다.


"어떻게 하면 네가 죽지 않을까, 그 생각 때문에 지금도 복잡하거든? 그래서 일부러 블랙 맘바도 두고 왔어."


아무 무기도 지니지 않았다는 듯 양 손을 펼쳐 보이는 리리스.


그런 행동에 리제의 이마에 핏줄이 솟았다.


"이... 죽인다죽인다죽인다죽인다죽인다-!!!"


리제는 크게 도약하여 다시 한번 리리스에게로 돌격했다.


하지만 가위날이 리리스에게 닿기도 전에, 리제의 직선 일변도 돌격은 너무나 쉽게 받아 흘려져 리제는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그리고 그 충격으로 엄청난 흙먼지와 함께 주위의 지면이 박살났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령관은 경악했다.


'저 속도로 날아오는 리제를 그 궤도 그대로 업어 쳤다고?!'


"카학... 컥..."


엄청난 충격에 리제는 쉽사리 몸을 가누지 못한 채 바닥에서 움찔거리고 있다.


"그런데 내가 무기를 안쓰더라도 과연 너가 살 수 있을까?"


리리스는 자신의 옆에 박혀있는 리제의 가위를 뽑아 리제가 쓰러져있는 쪽으로 차 보냈다.


"...큽...햇..ㅊ..ㅠ.."


"----이제 아무래도 좋으니 빨리 일어나. 블랙 맘바가 없는 지금이 너랑 내가 그나마 대등하게 붙어볼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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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어리 시리즈 숙소에서 이를 지켜보던 아쿠아가 울면서 다프네에게 매달렸다.


"흐아아앙! 다프네 언니! 리제 언니가... 리제 언니가...!"


"괜찮아요 아쿠아. 언니는 쉽게 지지 않을 거에요."


다프네는 아쿠아를 쓰다듬으며 안심시켜주었지만, 다프네도 경악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언니도 전투 경험이 많긴 하지만, 저렇게 압도적으로 차이가 날 줄은..'


단 두번의 공방.


단 두번, 리제가 돌격하는 것을 리리스가 받아냈을 뿐이다.


그럼에도 이런 압도적인 결과가 나왔다.


"아냐. 아직 괜찮아."


화면을 잠자코 지켜보고 있던 레아가 입을 열었다.


"뭐가 괜찮아. 너 때문에 리제가 이런 꼴을 겪고 있어. 여왕, 너 용서 못해."


옆에서 티타니아의 싸늘한 일갈이 들려왔다.


"윽... 그, 그래도 리제의 특성이 뭔지 알잖아?"


"언어 모듈 장애요?"


"그거 말고, 리제는 다칠수록 강해지잖아."


아쿠아가 기겁하며 말했다.


"그치만 그렇게 되면 리제 언니... 엄청 무서워지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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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제는 리리스가 자신 쪽으로 걷어 차 준 가위를 잡고, 그것을 지지대 삼아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그리고,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가위의 날이 분리 되었다.


"그래, 항상 철충을 썰 때는 그렇게 했었지."


"히히...히히히히!"


아까 땅에 처박혔다는 사실이 무색하게, 리제는 마치 쌍검처럼 분리된 가위를 고쳐잡고 지면과 가까이 부유하고 있다.


그리고 숨을 한 번, 들이켰다.


"!"


그와 동시에 내질러진 일격. 


리리스의 머리를 노린 상당히 빠른 일격이지만, 여전히 닿지 않았다.


"옆구리가 텅 비었어."


-쩌억-


리리스는 휘둘러진 도신을 피하고, 리제의 품으로 파고들어 왼손으로 가볍게 바디 블로우를 날렸다.


"큽...켁!"


아무리 리리스가 가볍게 쳤다곤 하지만 최상급 스펙의 바이오로이드가 날리는 바디 블로우다. 치명적이지 않을 리가 없다. 오리진 더스트로 강화되지 않은 평범한 인간이 맞았더라면 그 자리에서 즉사했을지도 모르는 충격.


리제는 간신히 버텼으나, 큰 충격에 몸을 가누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이..햇츙... 용서 못해...!"


"말만 그렇게 하지 말고 유효타를 내 봐. 너 휘청거릴 동안 내가 너 쳤으면 이미 끝났어. 고맙게 여기라고, 스토커."


"죽일거야방해물은주인님과의사랑을방해하는해충은죽일거야죽일거야죽인다죽인다죽인다죽인다---!"


리제는 리리스를 향해 매서운 연격을 퍼부었다.


목, 복부, 팔, 손목, 허벅지, 종아리, 고간, 허리, 발목... 리제는 눈에 보이는 리리스의 모든 부위를 대상으로 두고 엄청난 속도로 검의 폭풍을 퍼부었다.


목을 노린 공격은 회피당하며 파훼되었다.

복부를 노린 공격은 궤도를 비틀리며 파훼되었다.

팔과 손목을 노린 연격은 손목에 부착된 수갑에 의해 튕겨나며 파훼되었다.

허벅지와 종아리를 노린 연격은 마치 예측했다는듯 한걸음 뒤로 빠짐으로써 베지 못하고 파훼되었다.


"이익...!"


"난 철충이 아니라고, 네가 휘두르는 대로 맞아주진 않아. 좀 더 생각하고, 좀 더 정밀하게 베어보란말이야."


그와 동시에 리제의 머리가 크게 흔들렸다.


발목을 향한 공격이 파훼됨과 동시에 가해진 충격.


리리스는 발목으로 날아오는 칼날을 가볍게 도약하여 회피한 후 밟아 바닥에 박은 뒤, 오른발로 리제의 턱에 강한 일격을 먹였다.


"카학..."


리제의 입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고, 리제는 힘없이 뒤로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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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판이 난건가..'


사령관은 끝났다고 생각하며 알바트로스에게 무전을 보냈다.


"알바트로스, 아무래도 끝난 것 같지?"


하지만 알바트로스에게서 돌아오는 답은 예상 외의 것이었다.


"시합은 속행한다. 페어리 시리즈 측에서 시합을 계속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뭐..?!"


그리고 그 때, 이변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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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쓰러졌던 리제는, 아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살기를 뿜어내며 구부정하게 서있다.


입에서 떨어지는 선혈과 그 못지않은 붉은 색으로 발광하는 흉흉한 눈이 관전하고 있는 모든 이들의 오금을 저리게 한다.


하지만 리리스만은 그 분위기에 압도당하지 않고 오히려 이제 할만하겠다는듯 손을 풀고 있다.


그 찰나,


리제가 리리스의 앞에 서있었다.


"..어?"


피로 붉게 물든 리제의 입꼬리가 찢어질 듯 올라감과 동시에, 흉흉한 검 한 쌍이 빛을 발하며 리리스를 덮쳐왔다.


리리스는 재빨리 뒤로 빠졌으나, 리제의 검 쪽이 살짝 빨랐다.


"!"


리제의 도신 끝이 리리스의 얼굴을 스쳐지나가, 도화지 같은 흰 뺨에 한 줄기 붉은 선을 그었다.


"첫 유효타네. 축하해."


리리스는 장갑으로 흘러내리는 피를 대충 닦고 다시 자세를 잡았다.


리제의 표정은 변화가 없이, 입꼬리가 찢어질 듯 올라간 그대로 리리스를 향해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허나 아까 휘두를 때와는 완전히 달랐다.


휘두를 때의 부하 따위는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이 속도가 비약적으로 상승했으며, 집요하게 머리와 목만을 노리고 있다.


리리스의 반응 속도로도 따라가기 힘든 연격, 리리스의 몸에는 완전히 회피하지 못해 생겨나는 작은 생채기들이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다.


"아까까지 그렇게 얻어터지고도 이렇게 휘두를 힘이 남아 있었다는거네?"


"히히히히히히!!!"


"하아, 말이 통할 리 없나. 뭐 아무렴 어때."


정수리를 노려 내려쳐진 두 개의 칼날을 좌우로 쳐내 빈 틈을 만든 리리스는, 가드조차 올라가지 않은 리제의 몸으로 순식간에 파고 들어


"나쁜 리리스가 간다."


왼발을 크게 내딛은 후, 복부를 향해 장타를 내질렀다.


-떠엉- 하는 소리와 함께, 리제의 뒤로 엄청난 충격파가 일었다.


"-----!!!"


리제의 동공이 작아지고 입이 크게 벌어졌지만 소리는 나오지 않는다.


비명조차 나오지 않을 정도의 충격. 이 일격을 본 자들은 본능적으로 대결이 끝났음을 직감했으리라.


"오늘은 나름 재밌었어 스토커. 수복실에서 좀 쉬고 있으라고."


허나,


"히히..헤..."


"!"


리제의 본능을 멈추기에는 얕은 일격이었나보다.


"히히히헤헤헤헤헤해충해충해충해충해충..."


알아듣지 못할 말을 반복하며, 입에서 피의 실을 늘어뜨리고 웃는 리제의 모습은 그야말로 광기 그 자체를 보는 듯 하였다.


"진짜 끈질기네. 근성 하나는 인정해줄게 스토커."


리리스는 리제를 계속 주시하고 있었다. 아까처럼 방심하다간 순식간에 치명상을 입을 우려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리스는 리제를 시야에서 놓쳐버렸다.


'뒤인가!'


그리 생각하고 뒤쪽을 향해 크게 회전하여 발차기를 했지만, 뒤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와 동시에 리리스의 몸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리리스의 위에서 유성과도 같은 속도로 낙하한 리제가 회전하며 회오리처럼 주위의 모든 것을 베어갈랐다.


하지만 동작이 너무 컸던 것일까.


"오른팔은 부숴놓을게. 좀 아플거야."


어느새 리리스에게 붙잡힌 리제의 오른팔이 불길한 파열음을 내며 비틀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리제는 웃으며 왼손으로 리리스의 머리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최소한의 이성조차 사라진, 본능이 지배하는 리제의 행동은 리리스의 머리 옆에 자신의 머리가 있는 것을 망각한 것일까.


이대로 리리스가 머리를 살짝 젖히기만 하면, 리제는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목을 쳐버리게 된다.


그럼에도 리제의 검은 멈추지 않았고----


"...하아. 더 이상 지속하긴 어렵겠는걸."


----멈주치 않았어야 했을 터이다. 현재 리제는 자의로 검을 멈추지 못한다.


그 검을 막은 것은 바다와도 같은 푸른색의 방패.


리제의 검은 한 장의 푸른 방패를 뚫지 못하고 불꽃을 내며 튕겨났다.


"내가 블랙 맘바는 안들고왔지만 혹시 몰라 로자 아줄은 들고 왔는데, 이렇게 쓸 줄은 몰랐어."


자신의 몸을 보호하기 위해 들고 온 방패로 상대를 지키다니.


이 어이없는 상황에 리리스는 피식 웃으며,


"이제 슬슬 쉬러 가라고."


----로자 아줄로 리제의 뒷목을 강하게 가격했다.


그와 동시에 리제의 눈이 위로 돌아가며, 마치 꼭두각시 인형의 실이 끊긴 듯이 바닥에 쓰러져 움직이지 않았다.


이리하여 막고라는 리리스의 승리로 끝났다.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라고 볼 수도 있었겠으나, 또 그렇게 당연한 승리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던 막고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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