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   우리집 브닐라 모음집 - 라스트오리진 채널 (arca.l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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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색한 대치 상태가 이어졌다. 내 옆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리리스와 꼼짝없이 얼어붙은 나 사이에는 실로 어색하다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그녀가 당장 나에게 적의를 품은 것 같지는 않았고, 나 또한 이비와 일행들의 행방에 대해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어째서인지 섣불리 말을 건네기가 어려웠다. 아직도 그녀가 귀기어린 표정으로 C를 산채로 찢어버렸던 광경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빈말로도 썩 건전한 장면은 아니었지.

 

리리스 쪽으로 눈을 돌려보니 그녀도 이 분위기가 어색하기는 매한가지였나보다. 자꾸 나랑 눈을 못 마주치고 괜히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려대고 있었으니까. 얼굴에는 죄책감이라고 해야하나, 하여간 뭔가 미안하다는 듯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하긴, 그간 서로한테 한 게 있는데 갑자기 자연스럽게 대하기엔 아무래도 무리가 있겠지.

 

그렇게 한참 동안 우리는 뻘쭘한 분위기를 이어갔다. 우리 사이의 물리적인 거리는 기껏해야 수십 센티미터 정도에 지나지 않았지만, 어째 심리적인 거리로만 따지면 지구 한 바퀴 정도는 될 것만 같았다.

 

“일어....나셨군요.”

 

마침내 리리스가 정적을 깨었다. 목소리에서 주저하는 마음이 그대로 묻어나오는 게, 아무래도 나름대로 용기를 내서 먼저 말을 꺼내 준 모양이었다. 

 

“.....응.”

 

좀 더 성의있게 대답했어야 했나. 내가 원체 기분을 숨기는 데 익숙하지 않은지라. 내 입에서 흘러나온 어색함이 뚝뚝 흘러 떨어지는 맥 빠진 목소리가 새삼 원망스러웠다. 그게 우리 둘의 (그나마 존재하던) 대화 의지를 차갑게 식혀버렸으니까. 그렇게 또다시 몇 초간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저기-”

“저-”

 

우리 둘이 동시에 운을 떼었다. 서로 “먼저 말씀하시죠” 하는 듯한 눈빛을 교환하기를 또 한 차례, 이번에는 내가 상황을 정리했다.

 

“그.....하고 싶은 말 있으면 먼저 말해.”

 

“네. 감사합니다. 저.....A님이라고 부르면 될까요?”

 

그게 내 이름이긴 하지.

 

“마음대로 불러도 난 상관없지만, 그게 편하면 그렇게 불러.”

 

“알겠습니다, A님. 그러면 잠시.....”

 

그녀가 손을 들어 내 배 쪽을 가리켰다.

 

“상의를 걷어주실 수 있을까요?” 

 

......

 

갈비찜 살 발라내듯 퍽퍽 떨어져 나간 C의 뱃살이 머리를 스친다.

 

설마하니 이젠 나까지.....아아 살려줏메....

 

누나 저는 맛없으니까 곱창 뜯지 마세요 으엉어

 

“네?”

 

“에?”

 

“네?”

 

나도 모르게 속마음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나 보다. 난데없이 눈이 동그래져서는 나를 쳐다보는 리리스. 그녀를 마주하는 내 얼굴도 멍하긴 마찬가지다.

 

“아, 저기.....다름이 아니라, 붕대를 갈아드려야 해서요.” 

 

“...아.”

 

뻘쭘하게 됐네. 멋쩍은 마음에 화끈거리는 얼굴을 애써 돌리며 윗옷을 들어 올렸다. 이비 말고 다른 여자 앞에서 이러려니 기분이 뭔가 거시기하네. 

 

리리스는 조심스러우면서도 신속한 손길로 내 배에 감긴 붕대를 풀고 거즈를 떼어냈다. 말라붙은 피 때문인지 거즈가 떨어지면서 주변 살갗이 당겨지는 게 느껴졌다.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 탓인지 통증이 은근히 심해서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꿰메진 부위가 어떤 모양인지는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봐봤자 괜히 더 아프기만 할 것 같으니.....안 보이는 게 차라리 다행이겠다 싶었다. 

 

상처를 소독하고 붕대를 갈아주는 리리스의 손길은 재빠르면서도 섬세했다. 어딘가 만화 속 간호사 같은 복장을 하고 있다 싶었더니, 과연 의학 관련 기술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군더더기 없는 동작에서는 전문가의 느낌이 물씬 날 정도였다.

 

“아까 하시려던 말씀은.....”

 

처치를 마친 리리스가 내게 물어왔다. 나는 목 너머로 조용히 침을 삼킨 후, 그녀에게 이비와 일행들의 행방을 물었다. 

 

“일행분들은 수복실에서 회복 중이세요. 다른 두 분은 엊그제쯤 의식을 차리셨고, 이비 씨와 소완 씨는 어제 일어나셨어요.” 

 

아, 그건 그나마 다행- 엥?.....엊그제? 어제?

 

“저기, 엊그제라고?”

 

리리스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가 C를 산채로 해체해버렸던 게 아까 전 일 같았는데. 이제 보니 피범벅이 되어 있던 그녀의 옷도 머리칼도 거짓말처럼 말끔해져 있었다. 

 

“...나 여기 얼마나 누워있었어?”

 

“이제 102시간 정도 되셨을 거예요.”

 

102시간이면.....나흘을 넘게 이러고 있었다는 얘기구먼. 어쩐지 온몸이 찌뿌드드하다 했다. 

 

“그, 다른 애들은? 걔들은 괜찮아?”

 

“네, 수복장치 덕분에 많이 회복되셨어요. 소완 씨 경우는 특히 부상이 심각하셨지만, 기존에 상실된 안구를 제외하고는 모두 수복에 성공했답니다.” 

 

하긴, 소완은 한눈에 봐도 떡이 됐다 싶을 정도로 리리스랑 치고받고 했으니. 들어 보니 쓰러져 있던 우리 일행들을 돌봐준 것도 리리스요, 그들이 의식을 찾기 전까지 시설 내부를 혼자서 정리하고 있던 것도 리리스란다. 고생 참 많았겠다.

 

그러고 보니 내 앞에 있는 리리스도 부상이 꽤나 심각했을 텐데. 이 친구는 괜찮은 걸까. 약간의 걱정이 담긴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자, 리리스가 은빛 머리칼을 넘겨 귀 위쪽에 생긴 흉터를 보여주었다.

 

“저도 괜찮아요. 우리는 회복력이 아주 강하답니다? 이 정도는 하루 이틀만 쉬어도 금방 나아요. 아직 머리가 조금 어지럽긴 하지만요.”

 

그녀가 안심하라는 듯 눈웃음을 지어 보인다. 나는 그녀의 눈가가 살짝 부어올라 있는 것을 이제야 알아챘다. 아마도 다른 사람들 몰래 눈물을 많이 흘린 거겠지. 마음고생이 얼마나 심했을지는 구태여 상상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다. 

 

목이 말라 고생하던 내게 물을 가져다준 뒤, 그녀는 한동안 내 상태에 대해서 몇 마디를 덧붙였다. 이런저런 설명이 있었지만, 짧게 요약하자면 칼날이 내 장기를 거의 건드리지 않고 끝나서 다행이라는 이야기였다. 그녀는 다소 어설픈 봉합 실력에 대해서도 양해를 구했다. 시설에 있던 인간용 의료기기를 쓸 수 있었다면 더 깔끔하게 치료할 수 있었겠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나를 상대로는 작동하지 않아 별수가 없었다나. 

 

미안하게도 나는 그녀의 자세한 설명에 그리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내 관심은 주기적으로 꼼지락대는 리리스의 손을 향해 있었으니까. 말을 이어가면서도 그녀는 이따금씩 한쪽 손에 낀 반지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아마 그녀도 바니와 H처럼, 서로의 앞날을 약속한 상대가 있었던 모양이다. 짐작건대 아마 상대방은 이미 이승을 하직했겠지. 반지를 어루만지는 그녀의 손길이 문득 애처롭게 느껴진다. 

 

“저, A님?”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더니, 어느새 그녀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어-어어. 왜?” 

 

“일행분들께 의식을 차리셨다고 알릴까요? 다들 기뻐하실 것 같아서요.”

 

아 맞다. 다들 날 기다리고 있었겠구나. 나는 리리스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래 주면 고맙겠네. 부탁 좀 할게.”

 

그녀는 내게 살풋 미소지어주고는, 고개를 끄덕인 후 병실을 나섰다. 그녀의 모습이 문 너머로 사라지자, 나는 내 앞에 놓인 물을 목으로 넘겼다. 유달리 물이 달게 느껴지는 게, 아무래도 목이 마르긴 말랐던 모양이다. 

 

 

.......

.......

.......

 

 

얼마 지나지 않아 병실 문이 다시 열렸다. 누가 왔는지를 살필 새도 없이, 한 사람이 내게 달려들었다. 나름 무게가 실린 충격이 내 품을 파고들었지만, 그녀의 목소리가 내 귀에 들려오는 순간 아픈 느낌은 씻은 듯이 사라져버렸다. 

 

 

 

  

 

“주인님!”

 

익숙한 갈색 단발의 메이드였다. 야전상의와 군장이 없으니 한층 더 익숙한 모습이다. 내가 너무나도 사랑해 마지않는 그녀의 모습. 그녀의 콧등과 볼에 붙은 반창고는 안타까웠지만. 요 예쁜 얼굴에 흉이 지면 안 될텐데. 

 

“걱정 많이 했어요. 언제 일어나실까 계속 기다렸는데.....이대로 주인님을 잃을까봐.....”

 

그녀의 눈가에 방울져 맺히기 시작한 눈물을 살며시 닦아주었다.

 

“잃어? 나를? 내가 널 두고 어딜 가.”

 

나를 올려다보는 그녀와 시선이 맞닿는다.

 

“.....약속했잖아. 평생 너랑 함께하기로.”

 

눈썹으로는 서러움을 표현하면서도, 입으로는 미소를 띄우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녀의 연갈색 눈이 나를 향해온다. 그 부드러운 시선이 내 마음을 포근히 감싸왔다. 그렇게 우리의 입술이 맞닿으려던 순간, 

 

“으엑, 징그러.”

 

나와 이비의 시선이 그 소리의 진원지를 향했다. 스쳐 지나가듯 보였던 이비의 눈빛이 아주 사나워 보였던 건 기분 탓이었기를. 어쨌거나 우리의 따가운 눈빛이 도달한 곳은 바로 아라. 어느새 세탁까지 마쳤는지 새것처럼 말끔해진 교복을 입은 채였다.

 

“.....아-아니, 그게....제가 왜 그런 말을- 아니 그-”

 

이비와 눈이 마주치자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모른다. 눈동자는 핑핑 돌아가고 두 손은 마구 허공을 휘저어대는 게 우습기도 하고, 불쌍하게 보이기도 한다.

 

“.....에헤헤, 관리자님.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저도 엄청 걱정했는데. 히히.”

 

아라의 뒤에 선 유미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녀가 적당한 타이밍에 관심을 돌려준 덕분일까, 아라는 이비의 시야를 피해 슬쩍 소완의 뒤로 자리를 옮겼다. 

 

“소첩은 주인께서 쾌차하시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지요. 허나, 직접 이리 뵈게 되니 기쁘기 한량없사옵니다.” 

 

이어서는 소완이 우아한 동작으로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녀의 머리 뒤로 가짜 토끼 귀 두 개가 덜덜덜 흔들리는 것이 보였지만 (그것도 아주 잘), 애써 몬 봇 척하며 소완의 인사를 받아준다. 

 

수복장치로 다소나마 회복되었다는 것이 빈말은 아니었던 듯, 항상 창백하던 소완의 안색은 가볍게 혈색이 도는 것이 예전보다 한결 나아 보였다. 푸석푸석하던 머리칼도 비단결 같은 광택을 내고 있었고.

 

반면에 유미의 복실복실한 머리는 여전히 사방으로 뻗쳐있는 게, 수복이 되었다 한들 오래 묵은 만성 피로는 어디 가지 않는 모양이다. 그래도 눈 밑 다크서클은 조금 옅어진 것 같기도 하고. 아닌가. 나도 잘 모르겠다.

 

그렇게 다른 일행들과 안부를 주고받고 있었더니, 소완의 뒤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던 아라와 이비의 눈이 맞닿았다. 분홍머리 꼬맹이가 잔뜩 놀란 얼굴로 딸꾹질을 하고 있다. 불쌍하구만. 이비는 무겁게 내려앉은 눈썹을 하고서는, 아라에게 이리 오라며 손짓했다.

 

“Gross, huh? C’mere, you.”

(징그럽다고? 이리와 임마.)

 

“아...으...소위님...그.....”

 

“오라니까?”

 

쭈뼛쭈뼛 이비의 앞으로 걸어오는 아라. 흡사 형장으로 걸어가는 사형수같은 발걸음이다. 이내 그녀가 살기 등등한 전직 소위-현직 메이드의 앞으로 다가왔을 때, 나는 이 불쌍한 군필 중학생의 젓가락같이 가녀린 다리가 와들와들 떨리는 모습을 생생하게 볼 수 있었다.

 

“그렇게 징그러웠어?”

 

“아-아님ㄷ-”

 

“그럼 이거도 징그럽니?”

 

이비는 아라를 자기 품 안에 확 낚아채더니, 볼을 문지르거나 살살 잡아당기거나 하며 마구 괴롭히고 있었다. 예상하던 것과 달라서인지 당황하는 아라와, 짓궂은 표정으로 아라를 떡 주무르듯 가지고 노는 이비의 대조가 참 재미있었다. 

 

유미는 물론, 소완과 리리스까지 그 광경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지금까지 겪었던 것 중 가장 살벌한 상황을 –비교적- 무사히 빠져나온 탓일까, 모두의 얼굴에는 이전과는 다른 여유가 묻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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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녁, 리리스와 이비는 꼬박 하루 동안 유미가 매뉴얼을 붙들고 씨름한 끝에 겨우겨우 가동시킨 의료장비 앞으로 나를 데려갔다. 뭘 우회하고 뭐시기하고 하느라 애 좀 썼나 보더라. 여하간 그건 옛날 영화에서 보던 MRI 기계같이 생긴 커다란 물건이었는데, 안으로 몸을 집어넣으니 협소한 내부에서 수많은 기계 팔들이 펼쳐져 나와 내 상처 위에서 까딱거린다. 무슨 벌레 다리처럼 생긴 가느다란 것들이 환부를 분주히 오갈 때마다 조금은 간지러운 느낌이 들기도 했다. 

 

기계를 나와보니 어느새 부상은 약간의 흔적만 남긴 채 말끔히 사라져 있었다. 리리스 말로는 멀쩡해 보여도 완전히 회복된 건 아니라서 당분간 조심하라곤 했지만. 그래도 거의 신경 쓰이지 않을 정도로 남아있는 작은 이물감을 제외하면 완전히 나은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물론 두 메이드는 내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다. 어찌나 리리스가 성화를 부려대는지 필요도 없는 휠체어까지 타야 했으니까. 물론 나도 고집이라면 지지 않아서 결국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내 다리로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아무리 내가 환자라지만 그정도 엄살까진 부릴 생각 없단 말이지.

 

C놈의 곁에서 (우릴 비롯한) 무고한 사람들이 해를 당하는 광경을 낱낱이 지켜봐야만 했던 탓일까, 그녀는 필요 이상으로 나에게 정성을 쏟고 있었다. 본래 성격이 친절해서라기보다는 죄책감 때문에 잘해준다는 느낌에 가깝다고 할까. 지금도 그 예의 바른 미소 아래에 미안한 기색이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그녀의 이전 행적을 벌써 잊어버렸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래도 본인 입장에서는 불가항력이었으니 딱히 감정은 없다. 저번에도 C놈을 족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기도 했고. 어쩌다 보니 일이 틀어져 버려서 아쉽긴 하지만. 새삼스레 H와 바니가 그리워진다. 

 

내가 의식이 없던 동안 자기들끼리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비는 리리스를 그다지 경계하지 않는 눈치였다. 하긴, 이젠 (끔찍한 기억을 제외하면) 그녀를 속박하는 것도 없고, 핵심 모듈에 이상이 생겼다는 처지도 공유하게 되었으니. 어쩌면 직접 C를 산산이 분해해버린 행적을 높게 쳐줬을지도 모르겠다. 사람을 잘 믿지 않는 ‘진지 모드’의 이비가 리리스에게 내 간병을 거의 일임해 놓을 정도라면, 예전처럼 우리에게 총구를 들이댈 걱정은 놓아도 좋다는 거겠지. 어느 쪽이든, 지금의 리리스는 –그녀가 일전에 전화상으로 했던 말마따나- 우리 편인 것처럼 보였다.

 

 

......

......

......

 

 

리리스와 이비의 당부로 다음 날까지 몸을 추스르고 나서야 비로소 시설을 둘러볼 수 있었다. 곳곳에 즐비하던 인간들과 바이오로이드들의 시신은 모두 수습되어 있었는데, 이비 말로는 리리스가 혼자서 대부분을 정리했고, 이후엔 이비가 거들었다고 한다. 시신들은 시설 내에 설치된 바이오로이드용 소각장에서 처리했단다. 애초에 대피소에 테마파크 C구역에나 어울리는 게 왜 있는가는 둘째 치더라도, 인간이고 바이오로이드고 구분 없이 한 곳에서 재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이 참 묘하게 느껴졌다. 

 

피로 범벅이 되어 있을 때조차 화려함의 극치를 달렸던 대피소 내부는 혈흔이 지워지자 이전보다도 훨씬 더 반짝이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나 같은 놈은 들어갈 수도 없는 면세 백화점, 아니면 TV에서나 몇 번 봤던 초호화 크루즈선을 연상케 하는 인테리어가 내 망막을 가득 채운다. 처음 들어오는 길에는 긴장감 때문에 미처 보지 못했던 여러 디테일이 내 시각을 자극하고 있다. 아까 면세점 이야기를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여기 내부에도 면세점이 들어와 있었다. 재난 상황에 쇼핑할 생각들이 나기나 할까. 난 모르겠다. 부자들은 우리랑 사고방식 자체가 다른 모양이지. 

 

시설 내부 숙소는 하나같이 고급 호텔 스위트룸 이상 가는 수준이었다. 가구도 큼직하고, 내부도 널찍한 데다 침대도 상당히 크더라. 일행들이 머물고 있던 숙소는 그중에서도 특히 귀하신 양반들을 위한 숙소였던 듯, 널따란 개인 욕실까지 딸려있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뻗어있는 동안 일행들의 분위기에도 크고 작은 변화가 있었던 모양이다. 일례로, 그전까진 어딘가 데면데면하던 이비와 아라의 사이가 어느새 상당히 가까워져 있었다. 아라는 아직도 이비의 예전 계급이 신경 쓰이는지 조금은 눈치를 보고 있었지만, 그러면서도 간간이 먼저 말을 걸어오곤 했다. 이비는 아라에게 다소 짓궂은 농담을 건네고 있었지만, 동시에 어딘가 아련한 눈빛을 보내기도 했고. 

 

유미는 언뜻 모두와 겉도는 듯하면서도, 특유의 사회성을 바탕으로 적당한 친분을 유지하고 있는 듯 보였다. 일행의 유일한 기술자인 탓에, 이곳에 와서도 고생만 하는 모습이 조금 안쓰럽기도 했다. 하지만 어쩌랴, 이쪽 시설 시스템 관련 지식이 있는 건 그녀뿐인데. 어쩌면 며칠 동안 이런 식으로 고생하느라 피로를 풀 틈이 없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일면식이 있던 소완이 나름대로 간식도 챙겨주고 하는 분위기다. 그나마 챙겨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참 다행스러운 일이지. 

 

유미는 시설 중앙 통제실 메인프레임을 점검하느라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인간 이용객이 전부 사망’했다고 판단하고서는 스스로 작동을 정지했다나. 여기 아직 한 사람이 멀쩡히 살아있는데 말이지. 나는 고생하는 그녀의 옆에 조용히 자양강장제 한 병을 놓아두었다. 소완만큼 기깔나게 챙겨줄 자신은 없지만....그간 함께 거쳐온 게 있는 만큼, 적어도 중계시설에서 같이 일하던 때보다는 조금 더 잘 대해주고 싶은 마음이다. 

 

밝아진 안색만큼이나 한결 여유로워진 듯한 소완도 인상 깊었다. 요리하는 그녀의 뒷모습이 꽤나 흥겨워 보이기까지 했다. 자기 부군이라는 사람과 살았을 적에는 저렇게 밝은 성격이었나 궁금해질 정도로. 가장 특이했던 것은 그녀가 리리스와 굉장히 가까워 보였다는 점이었다. 그렇게 살벌하게 총과 칼을 주고받았던 사이인데도. 둘이 서로를 대하는 몸짓과 말씨에는 조금은 사무적인 격식이 묻어났지만, 막상 둘이서 마주 앉아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누거나 하는 모습을 보면 또 막역한 사이처럼 보이기도 했다. 뭔가 둘만의 공통 관심사라도 있는 걸까. 어쨌든 서로 잘 통하는 것 같아 다행이다. 

 

그런가 하면 이비는 계속해서 내 곁에 안겨 들어왔다. 나를 걱정했던 만큼 보상이라도 받고 싶은 건지, 무슨 강아지나 고양이처럼 자꾸만 내 옆에 붙어있으려고 한다. 나로서도 그게 싫은 건 아니다. 그래도 어딘가 부담스럽긴 한데..... 뭐 그래 봐야 애초에 떨쳐낼 생각도 없지만, 떨쳐내고 싶어도 그럴 기운조차 없다. 하는 거 보니 오늘 밤은 꼼짝없이 옆에 붙어서 자게 생겼네.

 

이후로도 나는 시설을 대강 둘러보고, 일행들이 하던 일을 돕기도 하며 나름 알찬 하루를 보냈다. 이비와 리리스는 내가 움직이지 않기를 바라는 눈치였지만, 아무래도 가만히 있기는 뭐해서 말이지. 

 

날도 늦었겠다, 할 일을 마친 나는 이비의 푹신한 침대에 몸을 뉘었다. 세상에, 침대가 이렇게 편할 수도 있구나. 그간 나랑 이비가 쓰던 침대랑은 비교가 안 되는 품질이었다. 세상에, 버튼을 눌렀더니 부위별로 각도 조절까지 된다. 내가 무슨 애도 아닌데, 그게 너무 신기하고 재밌어서 한참을 이리저리 조절해가며 놀고 있었더니, 어느새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고는 카트를 밀며 방 안으로 들어온다. 누군가 했더니 소완이었다. 다시 일어난 기념으로 특별히 룸서비스 느낌을 내어봤다나. 

 

그녀가 내 앞에 내놓은 것은 미음에다 자극적이지 않고 간단한 반찬 몇 가지 정도였다. 룸서비스라기엔 어딘가 초라하다 싶은 느낌도 없잖아 있었지만, 며칠을 혼수상태로 뻗어있다가 받는 첫 끼니로는 아주 훌륭했다. 역시 소완이다. 약간 과장을 섞어 어째 예전에 해주던 것보다도 더 맛있는 것 같다고 칭찬해주니, 그녀가 살풋 웃으며 “아마도 소첩의 미각이 돌아온 까닭일 것이옵니다.” 라고 대꾸한다. 일전에 들어간 수복장치 덕에 미각을 되찾았다나 뭐라나. (혀는 고치면서 왜 눈은 못 고치는지가 의문이긴 했지만) 그래서인지 그녀의 표정도 한결 부드러워 보였다. 

 

얼떨결에 야식처럼 되어버린 식사를 마친 후, 나는 가히 중독적일 정도로 편안한 침대에 다시금 몸을 눕혔다. 배부르고 등따숩다는 게 이런 기분을 두고 하는 말이게지. 한껏 나른하게 늘어져 휴식을 즐기고 있으려니, 이비가 양손을 등 뒤에 숨긴 채 슬금슬금 내 앞으로 다가왔다. 

 

“음? 할 얘기 있어?”

 

무슨 할말이 있나 싶어서 물어봤더니, 이비는 서서히 붉게 물들어가는 얼굴을 좌우로 저었다.

 

“딱히 말씀드릴 거리가 있는 건 아니에요. 단지.....”

 

“단지?”

 

그녀가 수줍은 표정으로 나와 눈빛을 마주했다.

 

“이런 때에 여쭈기엔 조금 이상할 수도 있겠지만.....”

 

잠시 우물쭈물하던 그녀가 감추고 있던 두 손을 앞으로 내보였다.

 

.......그녀의 손에는 작은 상자 두 개가 쥐여 있었다. 바니가 세상을 뜨기 전에 우리에게 주었던 콘돔과 피임약. 

 

“.....주인님이 일어나시고 나니까 조금, 그게...”

 

어리둥절한 마음을 대변하듯, 내 시선은 그녀의 손과 얼굴을 분주히 오가고 있다. 

 

“그.....그동안 조금 참아왔던 만큼......”

 

그녀가 앞섬을 슬며시 풀기 시작했다. 

 

.....어어 잠깐만-

 

“자자자자잠깐 나 아직 다 안 나았는데? 아직 안정을-”

 

이비는 내 다급한 제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옷을 벗어가며 침대 위로 올라온다. 

 

“주인님은 가만히 계셔도 돼요. 오늘은 제가 모실 테니까요.”

 

아, 저 눈빛. 나는 저 눈빛을 안다. 이 시점에선 내가 뭐라고 씨부린들 약발이 안 들겠지.

 

......돌겠네 진짜.

 

.......

.......

.......

 

 

그 뒤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구태여 묘사하고 싶지 않지만, 한 마디만 하자면.....

 

중간 쯤 가서는 결국 내가 몸을 움직여 버렸다. 며칠을 꼬박 반송장이 되어있던 것 치고는 생각보다 팔팔하더라. 나도 꼴에 사내새끼라고 말이지, 허허 거 참. 어쨌든 이비는 만족한 것 같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재활 운동치고는 좀 괴상하긴 하지만, 덕분에 나도 땀 한번 시원하게 뺐다.

 

그렇게 거사를 끝내고 자리에 누웠더니, 아무렇게나 던져둔 콘돔 상자가 눈에 들어왔다. 어쩐지 바니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은 기분이다. 살아있을 적의 뾰로통한 목소리 그대로, 

 

“죽다 살아나자마자 하신다는 게..... 정말 꼴값들 하십니다.”

 

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그래, 유품은 고맙게 쓰고 있다 바니야. 둘 다 어디 가서 함부로 입에 올리기는 힘든 물건들이긴 하지만.

 

그립고도 반가운 마음에 절로 피식, 하고 웃음이 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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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로 며칠간, 우리는 이 거대하고도 사치스러운 지하 대피소 생활을 이어갔다.

 

시설 상층부에 가득했던 난장판은 다섯 명이 치웠다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상당 부분 수습되어 있었다. 곳곳에 널려있던, 깨진 유리나 다른 파편들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여기서 벌어졌던 일의 유일한 흔적이라곤 부서진 채로 구석에 치워진 경비용 AGS 정도뿐이었다.

 

제어실과 의료동만 오가느라 보지 못했던 다른 구획도 차차 구경할 기회가 있었는데, 메인 로비인 상층부와 우리 숙소가 위치한 심층부 사이에는 더 많은 매장과 오락 시설들이 즐비했다. 이게 대피소인지 쇼핑센터인지 구별이 안 될 정도였다. 이런 걸 지어놓을 자리에 숙소를 더 넣어왔으면 몇 명이나 더 수용할 수 있었을까? 복잡한 감상에 싱숭생숭해진 나와는 별개로, 이비는 화려한 물건들과 여가시설에 단단히 마음을 빼앗긴 모양이었다. 처음 그쪽 구획에 들어갔을 땐 이비랑 놀아준다고 꽤 힘들었었지. 아무렴 그 넓은 오락실에 있는 기계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해보겠다고 조를 줄은 누가 알았겠나.

 

이비 얘기를 꺼낸 김에 한 마디를 더 해보자면, 며칠이 지나도록 이비는 예전처럼 마냥 바보 같고 해맑은 모습으로 돌아오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항시 ‘진지 모드’로 머물렀냐 하면 또 그것도 아닌 게, 최근 보여줬던 살벌한 모습에 비하면 꽤나 부드럽고 살가운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아마 저게 이비의 본래 성격이었던 걸까. 이따금식 말꼬리도 뭉개거나 하는 게, 말투까지도 조금은 편해진 느낌이다. 

 

저녁이 되면 이비만이 아니라 다른 일행들과도 어울렸다. 아직도 시설 제어 시스템을 가지고 끙끙대는 유미는 물론, 매끼 식사를 도맡아 준비하는 소완, 이비와 함께 웬만한 업무에는 모두 보조로 참여하는 아라에.....나머지 일행들만큼이나 열심인 간호담당 리리스까지. 모두가 함께 둘러앉아 저녁 식사를 나누어 먹었다. 주요 구획과는 조금 떨어진, 이 아늑한 분위기의 라운지가 우리만의 다이닝 홀이었다. 

 

매 끼니마다 더할나위 없는 메뉴를 선보이는 소완이었지만, 그녀는 저녁 식사에 특히 더 정성을 쏟는 듯했다. 일행마다 각기 다른 메뉴를 내 오는 것은 물론, 그 내용물도 완전히 일류 레스토랑 일품 메뉴 저리가라 할 정도의 퀄리티였다. 게다가 (직접 이야기한 적 없는데도) 각자가 먹고 싶어 할 만한 음식을 귀신같이 내오는 게 독심술이라도 쓰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내 양옆에는 이비와 리리스가 앉아 있다. 이비는 소완이 내온 요리를 세 접시나 비운 후, 이제는 약선 수프를 떠먹고 있었다. 리리스는 나름 건강한 구성의 식단을 즐기는 모양이었다. 오늘의 경우 그녀의 접시 위에는 닭고기 배양육 스테이크와 채소 샐러드가 올라와 있다. 대만에서 처음 만들어졌다는 소완은 -출신지에 어울리는- 중국식 면 요리를 먹고 있다. 큼직한 주발에 담긴 진한 육수와 노란 국수가 꽤 맛있어 보인다. 소고기 국수랬나. 소완이 딸기 디저트 다음으로 즐기는 요리였다. 


아라와 유미는 소파보단 그쪽이 편하다는 건지 굳이 바닥에 앉아 있었다. 주메뉴를 깔끔히 비워낸 아라는 커다란 아이스크림 통을 품에 안고 있다. 쟤도 이비처럼 참전 경력까지 있는 베테랑이라는데, 입맛만 보면 그냥 빼도 박도 못하는 어린애다. 유미는 피곤에 전 표정을 하고 음식을 우물거리고 있다. 유미가 이래저래 고생이 많긴 하지. 그녀의 무릎 앞에 놓인 에스프레소 잔이 어쩐지 짠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각자 먹는 음식은 달랐지만, 한 자리에 모여 담소를 나누는 이 분위기가 너무도 편안하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이곳이 죽음으로 얼룩진 장소였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집이란 건 역시 사는 사람 나름이구나 싶다.

 

수프를 떠먹던 이비는 어느새 우리에게 자기 군대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어느 날은 제가 차를 타고 가는 데 말임다. 저 앞에 아군 차량 하나가 진창에 처박혀 있는 검다. 바로 옆에다가 차를 대보니까- 세상에, 마리 대장님이랑 레드후드 대령이 타고 있었슴다! 

 

‘괜찮으십니까? 지금 당장 가서 본부에 연락하겠습니다. 대장님 차는 못 쓰게 된 것 같으니까요.’

 

제가 가서 이렇게 말했는데, 마리 대장님이 저를 딱 보시고는 제 쪽으로 걸어오셨슴다. 

 

‘귀관에게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게 있군.’ 그러시더니 제 손에 자기 차 키를 쥐여주시는 거 있지 말임다? 그러더니 저한테 뭐라고 하셨나면.....

 

‘못 쓰게 된 건 자네 차겠지.’”

 

(자기가 말 해놓고 자기가 빵 터진 이비를 제외하면) 아라를 시작으로 일행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피곤한 얼굴로 ‘헤헤’ 대는 유미는 물론, 저렇게 밝은 웃음을 지을 수 있으리라곤 생각도 못했던 소완까지. 

 

내 생각에 그리 재미있는 농담은 아니었지만, 다들 웃고 있는 모습을 보니 괜시리 내게도 심한 웃음기가 찾아왔다. 한가지 문제가 있었다면 리리스 경고가 사실이었다는 점. 웃기 시작하자 칼에 찔렸던 곳이 살살 아파오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푸흡-아야야....아으, 웃기지마 아퍼....흐흐흫....아야야....”

 

아라와 유미는 내 꼴을 보고 더 크게 웃어댄다. 찰나 동안 걱정되는 눈으로 날 바라보던 이비도 어느새 장난기 가득한 눈을 하고서는 깔깔 웃고 있었다. 옆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리리스도 마냥 웃고만 있다 아이고 믿을 사람- 아니 바이오로이드 하나 없네.

 

“아하하하!”

 

“아허허헣....”

 

아프다. 그래도 즐겁다. 아프지만 즐겁다. 싫지만은 않은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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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구 사양하는 소완을 도와 음식 재료를 손질하고 (그래 봐야 채소를 씻는 것 정도뿐이었지만), 그 뒤로는 아라를 도와 우리가 지내는 숙소를 청소하던 참이었다. 그러고서는 이비를 도와 빨래를 개고 있었는데, 갑자기 유미가 불쑥 우리 방으로 뛰어 들어왔다.

 

“과과과가ㅗ가ㅘㅘㅏ관리자니이이임!”

 

잔뜩 흥분해서는 말도 제대로 못하고 있다. 마음만 급해서는 언어라고 부르기도 힘든 소리만 횡설수설해대는 그녀를 간신히 진정시킨 뒤, 자초지종을 물어보았다.

 

“그거 켜졌어요!”

 

“그거? 그거라니?”

 

“그거요, 그거! 메인 시스템!”

 

그녀가 속사포처럼 뱉어대는 말들로 간신히 이해한 것을 추려보자면, 본인은 제대로 한 게 없는데 갑자기 메인 시스템이 알아서 다시 활성화했다는 이야기였다. ‘인간이 남아있지 않아서’ 자동으로 비활성화 되었다던 시스템이, 이제야 뒤늦게 나를 알아보고 켜지기라도 한 건가. 이것만 해도 이해가 안 될 지경인데, 유미가 이어서 한 말은 더더욱 가관이었다. 

 

“관리자님 이름을 말하더라니까요! A! A를 데리고 오라면서요!” 

 

“...뭐 나도 여기 VVIP 리스트에 있을텐데, 그게 그리 놀랄 일은 아니잖아?”

 

“지금까지 뭘 들으신 거예요! 그거 AI가 아니었어요! 사람이었다구요! 누군지는 몰라도 그 사람이 원격으로 시스템을 다시 활성화한 거라니까요!”

 

또 또 흥분한다 저거. 유미의 작달막한 얼굴이 홍당무 마냥 새빨개진다. 말을 해도 좀 숨을 쉬어가면서 하지. 나는 그녀를 다시 진정시키려고 했지만, 녀석은 아예 내 손을 잡아당기며 나를 데려가려 하고 있다. 저 아담한 몸에서 어떻게 그런 힘이 나오는지는 몰라도, 훨씬 덩치가 큰 내가 맥없이 질질 끌려가는 요상한 광경이 연출되고 있다. 이비도 의아한 얼굴로 나를 뒤따랐다. 

 

....그나저나, 사람이라고? 시설 통제는 전부 AI와 AGS의 영역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

.......

.......

 

 

중앙 통제실에 도달하자, 그곳에서는 심각한 얼굴을 한 리리스가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 이게 무슨 일이냐고 물을 새도 없었다. 그녀는 곧장 통제실 정면에 놓인 커다란 유리판 같은 것을 가리켰다. 

 

 

 

 

 

푸른색 조명으로 은은히 빛나는 화면 위에는 실선으로 된 지도 같은 것이 떠올라 있었다. 하얀색으로 떠오른 지형도와 여러 기호가 어지럽게 얽혀 있었고, 화살표로 이어진 도형들은 아주 느린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이건 또 뭐야.”

 

“당신 상황이죠.”

 

나도 모르게 내뱉은 혼잣말. 그것에 반응해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내 주변에 선 이 친구들은 아니었다. 여지껏 들어본 적 없는 여자의 목소리였으니까.

 

“.....누구십니까? 혹시 삼안-”

 

“저분 맞아요! 저분이예요!”

 

대답을 듣기도 전에 내 옆의 유미가 호들갑을 떨어댄다. 그러자 스피커에서 울리는 목소리는 그녀를 매몰차게 나무랐다.

 

“너한테 끼어들어도 된다고 한 기억은 없는데? 입 다물고 있어.”

 

누군진 몰라도 싸가지는 밥 말아 먹었네. 하는 거 보니 사람이 맞긴 맞는갑다.

 

“....거 누구신지는 모르겠는데, 제 식구들한테 그런 식으로 말씀하지 말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허.”

 

기가 찬 건지 화가 난 건지, 짧은 한숨을 끝으로 잠시 말이 없던 상대방은 아까와 똑같은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예상했던 것과는 조금 다르네요. 뭐, 그런 방향도 나쁘지는 않겠죠.”

 

이게 무슨 뜬구름잡는 소리지. 더 생각할 틈도 없이 그녀는 자기 소개를 시작했다.

 

“오랜만에- 아니, 당신 입장에선 초면이려나요? 반가워요,  A. 제 이름은 에바. 지금은 그 정도만 알고 있으면 될 거예요.” 

 

마치 나를 오래전부터 알아왔던 것처럼 말하는 저 사람. 에바라.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에바라는 이름은 없다. 애덤 선생 전처 였다던 에바 존스라면 몰라도. 그런데 그 사람은 내가 태어나기도 훨씬 더 전에 죽었을테니 논외겠지. 


그럼 대체 이 사람은 누구냐. 그리고 어째서 구면인 것처럼 구는 것일까.


“...여쭙고 싶은 건 많지만 일단 이것부터 물어볼게요. 저 아세요?”

 

“후후, 알기만 할까요. 그보다 정말로 묻고 싶은 건 그게 아닐 텐데요?”

 

지도 한 구석에 [D] 라고 쓰여진 곳이 깜빡인다.

 

“지금 이곳이 당신들 위치예요.”

 

이어서 화살표로 연결된 도형들이 깜빡인다. 

 

“이건 외계 기생 생명체, 속칭 철충 무리의 이동 상황이고요.”

 

.....어어. 

 

그 말이 맞다면 지금 우리가 있는 이 곳 바로 근처까지 철충 무리가 지난다는 이야긴데....어쩌면 떨어져 나온 작은 무리가 지금도 대피소 문 앞에서 서성이고 있을지 모른다. 

 

“한 눈에 봐도 상황이 별로 좋지 않아보이죠?”

 

좋지 않아 보인다고? 좆됐다는 편이 더 정확하겠지. 조금씩이지만 실시간으로 움직이는 도형들이 우리를 옥죄고 있다. 화면상으로나 저 모양이지, 실제로는 수없이 많은 감염된 로봇들의 물결일 것이다. 

 

“그렇다고 너무 절망할 필요는 없어요. 자, 이제부터 잘 들어봐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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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더 길었는데, 분량상 잘라서 올립니다.


드디어 3부의 시작입니당

멸망 시기를 다뤄놓고 그 동안은 막상 철충 언급이 드물었지요.

이제는 아닙니다용 홓홓홓




다음화는 언제 올릴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부디 기다려 주세요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