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마... 말도 안돼... 대체 어떻게... 분명... 감마가 있었을텐데...!"


오메가는 당혹감에 안색이 창백해진 데다 말도 제대로 못하고 있었다. 눈을 휘둥그레 뜨고 식은땀을 흘리는게 펙스 유미가 당황한 표정콘이랑 판박이었다.


"지금 네가 신경써야할건 감마가 아닐텐데?"


"아... 아냐...! 가짜가 틀림없어...! 니놈들 따위가 감마 몰래 지하벙커에 있는 회장님을 납치할 수 있을리가 없어!"


"그으래? 안에 들어있는 노인네의 얼굴이 잘 안보이는 모양인데, 뚜껑 한번 열어볼까?"


"뭣, 잠깐...!"


오메가는 억지로 현실을 부정하려했으나 살짝 압박을 넣자 바로 정신을 차렸다. 나는 좀 미지근해진 동면포드의 덮개를 손으로 퉁퉁 치며 말을 계속했다.


"내가 냉동수면 원리는 잘 모르지만, 제대로된 해동 절차를 거치지 않고 확 열어버리면 재밌는 일이 생길 거라는건 확신하거든? 과연 어떻게 될까? 얼음처럼 산산조각날까, 아니면 아이스크림처럼 흐물흐물하게 녹을까... 한번 열어서 어떤 결과가 나올지 다같이 구경이나 할까?"


"손 떼세요! 회장님의 육신이 조금이라도 잘못되면 당신네 사령관을 죽여버리는 수가 있습니다!"


"그래도 난 잃을 게 없지! 그놈이 죽으면 니가 말한대로 오르카호 사령관 자리가 굴러들어오거든."


"당신의 어리석은 선택으로 사령관을 잃게 된다면 과연 그 곳 바이오로이드들이 당신을 새 사령관으로 추대해 줄 것 같습니까?"


"그러는 넌? 느그 회장이 증발하고 난 뒤엔 어쩔거냐? 지 비서가 사라진 골든 폰 사이언스 회장이라도 새 주인으로 모시게? 머리도 자주색으로 물들이고?"


"당장 옆에있는 블랙 리리스만 해도 당신을 죽이려들텐데요!"


"그렇게 되도 니네 회장이 없어졌다는 결과는 바뀌지 않는다. 거기다, 나까지 죽으면 남은 회장들을 부활시킬 방법이 정말로 사라지게 될텐데, 괜찮겠나?"


"다른 회장따윈 부활하든 못하든 제 알 바 아닙니다!"


"그 점에 대해선 감마랑 델타가 할 말이 있을 것 같은데?"


"...!!"


"감당할 수 있겠어? 네 멍청한 선택으로 나까지 잃어버린다면 넌 분명 레모네이드 내전에 시달리게 될걸. 일종의 상호확증파괴지. 자, 그런 결말을 보고싶지 않다면... 포로 교환을 시작할까?"


"큭..."


오메가 휘하의 펙스 AGS 군대가 그녀의 뒤에서 대기하고 있지만, 그 군대를 보내 회장이 든 동면포드를 강탈하라는 명령을 내릴 순 없었다. 아무리 수가 많다한들 알바트로스의 방어막을 뚫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설령 알바트로스의 빈틈을 찾아 파고든다 해도, 저들이 동면포드에 손끝이라도 닿기 전에 우리가 먼저 동면포드를 내용물째로 파괴할테니까.


양측 다 돌이킬 수 없을 정도의 손해를 입고 공멸할테냐, 서로의 전리품을 포기하고 원점으로 되돌아갈테냐. 오메가는 분하다는 듯 이륵 빠득 갈며 노려보았지만 어차피 그녀가 낼 대답은 정해져있었다. 나는 오메가는 이 협상을 거절하지 못할거라는 걸 잘 알고있고, 아마 나보다 이 사실을 더 잘 알고있는 사람은 그녀 본인일 것이다.


"좋습니다... 서로 인간 한 명씩 교환하면 되겠죠? 당신네 사령관을 드릴테니 회장님을-"


"히루메!"


오메가도 들으라는 듯 큰 목소리로 히루메의 이름을 외치자 그녀는 지팡이를 살짝 들어올렸다 그 끝으로 땅을 내려쳤다. 그러자 방울소리가 짤랑 울리더니 곧이어 거대한 화염구가 지팡이 위에 띄워졌다. 순식간에 주변 온도가 올라가며 동면 포드의 해동 속도가 더 빨라지자 오메가가 황급히 소리쳤다.


"무, 무슨 짓입니까!!"


"정말로 니가 나랑 동등한 위치에서 협상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이 늙은이가 펙스에 있어 그리 가치있는 인간이라면, 사령관과 라비아타 두 명은 내놔야겠어."


"이익...!"


오메가는 어떻게든 사령관을 넘기고도 이득을 남기려고 발버둥쳤지만 내가 강압적으로 나오자 그녀는 빠르게 꼬리를 내렸다.


"좋아요, 거래를 받아들이죠! 두 명 드릴테니 그 불덩이 좀 치우세요!"


협상이 성립됐다. 내가 히루메에게 불을 끄라고 시키자 오메가가 자신의 뒤에 있는 AGS들에게 뭔가 지시를 내리더니 커스텀 드론 두 대가 각각 사령관, 라비아타의 포승줄을 쥔 채로 나타났다. 이 순간부터 리리스의 시선은 사령관에게 고정됐다. 사령관 구할테니 얌전히 있어달라고 미리 언질을 줬었기에 사령관을 보자마자 뛰쳐나가는 사태가 일어나진 않았다. 한편 오메가로부터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선 사령관과 라비아타는 꽤나 놀란 표정으로 나랑 오메가를 번갈아서 보고있었다. 



저쪽은 교환할 준비가 됐다. 우리 쪽에선 누가 동면포드를 들고 옮겨야하나 하다가 리리스가 자진해서 가겠다고 했다. 두 손으로 동면포드를 번쩍 들어올리더니 로자 아줄로 허공에 수평 방어막을 생성하고선 그 위에 포드를 올려놓고 유유히 펙스 쪽으로 걸어갔다. 저걸 저렇게 쓸 수가 있네. 


리리스는 우리와 오메가 사이의 중간지점에 멈춰선 뒤 오메가를 향해 검지를 까딱거리며 사령관을 보내라는 제스처를 취하자 오메가 측의 커스텀 드론 두 대가 사령관과 라비아타를 데리고 중간지점으로 왔다. 마침내, 리리스는 그토록 보고싶었던 사람과 만나게 되었다.


"리리스..."


"뵙고싶었습니다 주인님. 이제부턴 저 블랙 리리스가 모시겠습니다."


두 드론이 동면포드를 들어 오메가에게 배송하기 시작하자 리리스는 사령관과 라비아타를 인솔해 우리에게로 돌아왔다. 마침내 자신의 주인과 재회했지만 눈앞에 펙스 세력이 떡하니 있는 만큼 보고싶었다며 방방 날뛰지 않고 프로답게 경계태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나와 일행이 있는 곳에 무사히 사령관과 함께 도착하자 리리스가 사령관 손목에 찬 수갑을 힘으로 부쉈고, 라비아타 또한 스스로의 힘으로 수갑을 끊어버렸다.


"안녕 사령관. 오랜만이야."


"부사령관... 아니, 아직이야...! 아직 칸이 저 안에..."


"나도 알아. 이제 재밌어질테니까 계속 보고있어."


사령관과 짤막한 인사를 마친 나는 다시 오메가가 있는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걱정스러운 눈길로 동면포드의 유리창을 어루만지던 오메가는 내 시선을 의식한건지 인상을 확 구기며 내게 고개를 돌렸다.


"이제 만족하십니까? 바라는대로 사령관에 라비타아 프로토타입까지 가져가고 절 엿먹이기까지 했으니!"


"아직 아니지. 그쪽에 한 명 더 남아있잖나?"


"욕심도 참 과하시군요. 더이상 교환할 인질도 없는 주제에 뭘 더 바라십니까? 설령 다른 회장이나 레모네이드를 납치했다 한들 소용없습니다. 제게 협상을 시도할만한 가치가 있는건 저희 오메가 산업의 회장님 뿐이고, 그 분은 더이상 당신 수중에 없죠. 이제 협상은 끝입니다."


오메가는 회장을 도로 확보했으니 두려울 게 없다는 듯 큰소리쳤다. 하지만 내겐 아직 카드가 남아있다. 나는 한 손을 들어 검지로 동면포드의 뒷면을 가리켰다.


"오, 저게 뭐지? 저거 뒤에 뭔가 붙어있네?"


"무슨...!?"


동면포드 앞면의 유리창으로 회장 상태를 보느라 바빴던 오메가 그제서야 그 뒷면에 부착된 시한폭탄의 존재를 알아챘다. 하이에나가 시한폭탄을 만들 줄 안 덕에 이런 보험을 들어둘 수 있었다. 급조해서 만든 사제폭탄이라 큰 위력은 못내도 동면포드를 손상시켜 안에 든 내용물까지 영향이 갈 정도의 화력은 된다. 원랜 이렇게 협박용으로 쓰려고 달아놓은 건 아니지만, 상황이 이렇게 됐으니 무슨 수단이든 써야지.


"협상은 내가 끝났다고 말했을 때 끝난다. 칸을 이리로 넘겨라, 그러면 폭탄을 해제해주겠다."


"이... 빌어먹을 놈이...!"


오메가는 들릴듯 말듯한 소리로 날 욕하더니 이내 이해가 안간다는 듯 소리쳣다.


"대체 왜죠?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냔 말입니다! 당신은 다른 바이오로이드처럼 저 인간에게 복종하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이유가 뭡니까!? 충성심? 우정? 정의감? 아님 나중에 구출에 대한 댓가라도 요구하려는 겁니까!?"


"왜냐하면 이 씨X년아, 내가 너를 존나게 싫어하기 때문이지."


"겨우... 겨우 그런 이유로...!"


황당함에 말문이 막히자 나는 더 늦기전에 포로교환을 끝내기 위해 시한폭탄을 들먹이며 그녀를 재촉했다.


"째각째각, 시간이 계속 가고있다 오메가. 우리 하이에나가 손수 만든 사제폭탄인데 네가 해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어차피 네가 집에 도착하기 전에 터질테고 말이야. 칸을 내놓던가, 아니면..."


"그만! 알았어요, 당신이 이겼어요! 제가 졌다고요! 칸을 돌려드릴테니 폭탄을 해체하세요!"


이미 사령관까지 넘긴 마당에 오메가만 회장을 잃는다는건 명백히 그녀의 패배를 뜻했다. 오메가가 성질내듯이 조건을 수락하며 드론을 시켜 구속된 칸을 데려왔다.


"그렇게 나와야지. 하이에나, 해체 부탁해. 저격이나 그런 만일을 대비해 리리스도 같이 가줘."


"리리스는 주인님만의 경호원인데... 뭐, 좋아요. 당신 지시 따르는 건 이걸로 마지막이에요. 주인님, 금방 다녀올게요?"


이번엔 우리쪽에선 하이에나와 리리스가 가고, 저쪽에서 동면포드를 운반하는 드론 두 대, 칸과 그녀의 수갑에 연결된 포승줄을 쥐고있는 드론 한 대가 와서 중간 지점에서 만났다. 


"오랜만이야 대장! 나 기억해?"


"어떻게 잊겠는가, 817번 하이에나 병장. 자네는 하이에나 008로 불리기를 더 좋아했었지."


"캬핫, 정확히 맞췄잖아! 역시 우리 대장이야!"


"우리가 재회한다면 필시 저승일거라 생각했다만, 이건 기쁜 오판이군."


"하이에나 씨, 칸 소장. 잡담은 나중에 해주시겠습니까? 폭탄이 터지기까지 5분도 안남았습니다."


"아 그렇지. 잠깐만 있어봐 대장..."


타이머에 표기된 카운트다운은 어느새 5분 미만으로 떨어젔으나 하이에나는 침착하게 동면포드 뒷면에 부착된 시한폭탄의 덮개를 열고, 그 안에 있는 수많은 전선 중 노란색 선을 두 손가락으로 집어 쏙 뽑자 타이머의 숫자가 그대로 정지됐다. 폭탄이 해체된 걸 확인한 드론들이 칸을 놓아준 뒤 동면포드를 집어들어 도로 오메가가 있는 쪽으로 천천히 날아가고, 하이에나와 리리스는 칸과 함께 우리에게 돌아왔다. 칸과 가볍게 눈인사를 한 뒤 옆에 있는 사령관에게만 들릴 정도로 목소리를 낮춰서 말했다.


"사령관아, 혹시 또 구해야하는 애 있냐? 이제 진짜로 패가 바닥났거든."


"아니, 없어... 장화와 더치걸은 로크가 무사히 데리고 도망치기만 했다면..."


"좋아 그럼... 오메가?"


"...또 뭡니까."


다시 오메가를 부르자 이중 인질극이 많이 불만이었는지 아주 눈빛만으로 죽일 기세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제 양쪽 다 원하는 걸 얻었으니 협상은 여기서 끝내도 될 것 같군. 그리고 너도 잘 알고있겠지만, 싸움을 재개하기엔 우리 둘 다 상황이 여유롭지가 못하지. 그러니 딱 한번만 말하겠다. 떠나라. 당장."


"..."


오메가는 대답하지 않고 이를 으득 갈며 잠깐동안 더 날 노려보다가 동면포드 안의 회장을 한번 보더니 우리에게서 등을 돌리고 자신의 휘하 AGS 군대를 향해 소리쳤다. 


"돌아간다! 회장님을 최대한 빨리, 안전하게 모시도록!"


동면포드의 온도가 더 올라가 회장의 시체가 소생불가능할 정도로 손상되기 전에 본부로 돌아가 동면포드에 다시 전력 케이블을 꼽아야 한다. 그녀는 우리와 더 싸우면서 시간을 지체할 여유가 없다는 걸 잘 알기에 분한 마음을 삭이며 얌전히 철수하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아무런 욕이나 저주를 퍼붓지도 않고, 다음을 기약하는 클리셰적인 대사도 남기지 않은 채 눈길만 힐끗 주고선 돌아가버렸다. 우리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거리를 둔 채 빙 돌아가는 AGS 행렬을 보며 트레저가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괜찮겠슴까 형님? 쫓아가서 끝장내지 않아도?"


"사령관을 안전하게 오르카호에 데려다주는게 먼저다. 오메가와 결판을 짓는 건 그 다음이야."


기나긴 AGS 군대의 행렬이 전부 우릴 지나쳐서 우리가 왔던 방향으로, 즉 오메가의 본진으로 갔다. 그 중 마지막 줄에 있던 AGS가 멀리 사라지자 나는 침묵을 깨고 말을 꺼냈다.


"좋아, 상황종료. 리리스야 이제 가서 니 주인 껴안아도..."


"주인님!!!"


"...돼."


"주인님주인님주인님주인님주인님주인님!!"


리리스는 여태 터질듯한 마음을 걸어잠그고 긴장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펙스 군대가 전부 간 걸 확인하자마자 더이상 참지 않고 사령관의 목을 양팔로 힘껏 끌어안고선 그의 뺨에 얼굴을 비비며 자신의 마음을 봇물 터뜨리듯 쏟아냈다.


"주인님 주인님 리리스가요 착한 리리스가요 주인님 마지막 명령 열심히 수행했어요 리리스가 부사령관을 계속 지켰어요 리리스는 정말로 정말로 주인님한테 달려가고싶었는데 참았어요 주인님 걱정에 리리스 마음이 찢어질 것 같았어요 그치만 부사령관의 말을 믿고 기다렸어요 부사령관과는 신체접촉도 최소한으로 하면서 부사령관과 함께 주인님을 구했어요 주인님 리리스 잘했죠 네 칭찬해주세요 착한 리리스에게 상을 주세요 두번다시 떠나지 말아주세요 두번다시 주인님 곁을 떠나게 시키지 말아주세요 리리스가 바라는 상은 그것뿐이에요 리리스는 주인님만 있으면 돼요 주인님 사랑하는 주인님 리리스를 그리 걱정시켰음에도 미워할수 없는 주인님 리리스는 앞으로 절대 주인님 곁을 떠나지않을거에요 사랑해요 주인님 사랑해요"


"아, 그, 그래.. 하하, 이래야 우리 리리스지."


리리스랑 사령관이 한박자 늦은 감동의 재회를 하는동안 나와 리디아는 오메가의 군대가 사라진 방향을 쳐다보며 말을 나눴다.



"오메가년, 정말로 우릴 건드리지 않고 집에 가버렸네. 그년이 제 화를 못이기고 덤비던가 해서 최후의 전투 같은게 벌어질거라고 생각했는데."


"만약 그랬었다면 그 년 본진에 남은 여섯 회장의 동면포드에 폭탄 설치해뒀다고 뻥쳐서 돌아가게 하려고 했었어. 실제로 먹힐지는 모르겠다만."


"쯧, 결국 오메가는 한 대도 못때렸네. 아쉽지 않아 형님?"


"하, 하, 하. 엿은 제대로 먹였으니 만족한다. 게다가 그 년이 본진에 도착하면 개박살난 지 집 보고 또 난리날걸. 그건 그렇고..."


시끄러운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사령관한테 엉겨붙은 리리스가 아직도 지치지않고 입을 재잘거리고 있었다.


"...사령관아, 미안한데 쟤 좀 조용히 시킬 수 없겠냐? 오렌지에이드도 이거보단 조용하겠다."


"왜 갑자기 제 이름을 꺼내세요!? 유미 씨 저거 들었어요? 솔직히 제가 그리 말 많은것도 아닌데-"


"아 그렇지. 오렌지에이드, 잠깐만, 나 먼저 얘기하고. 궁금한게 있어 부사령관. 오메가의 본진에 레모네이드 감마가 있다고 들었는데 대체 어떻게 펙스 회장을 훔칠 수 있었던 거야?"


"요점만 간략히 말하자면, 알바트로스가 하드캐리했지."


손으로 알바트로스를 가리키자 사령관은 아 하고 짧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역시 알바트로스가 강하긴 하구나..."


"그래, 솔직히 나도 놀랐다. 그동안 알바트로스가 출전할 기회가 얼마 없어서 실력이 검증되지 않았던 터라 감마랑 다이다이 뜨게 시키는건 반쯤 도박이었거든."


"...혹시 덴세츠 애들한테 연기 강좌라도 배웠었어? 아까 오메가랑 협상하는 거 들었을땐 진짜 무슨 악당같았는데."


"글쎄. 그냥 나름 위협적으로 보이려고 노력은 했지. 허세도 좀 부렸고. 사전에 리리스한테 협상하는 동안 조용히 있어달라고 언질을 줘서 다행이지, 안그랬음 니가 죽어도 잃을 게 없다는 투로 말했을 때 쟤가 태클걸어서 분위기 깨졌을걸. 아무튼 그 얘긴 나중에 하자, 더 중요한 일이 있으니까. 오르카호에 너 무사하다고 알리고 픽업 요청해야 되는데, 니가 전화할래 아님 내가 할까?"


"네 손으로 구했으니, 네가 그들에게 말해줄 자격이 있지."


"그렇게 말한다면야."


나는 빌린 패널을 들어 오르카호에 통신을 걸자 곧바로 무적의 용이 받았다.


[부사령관이오? 작전은 성공한 것이오? 현재 상황은...?]


"부사령관이 오르카 저항군 전원에게 알린다. 사령관 구출에 성공했다."


그 한 문장을 마치자 통신창 너머로 시끄러운 환호성이 흘러넘쳤다. 용 본인도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해 오르카호 안의 소란을 말리지 못하고있는 사이, 오르카호가 아닌 외부로부터의 통신요청이 들어왔다. 카메라는 켜져있지 않았으나 목소리와 건방진 말투로 누군지 바로 알 수 있었다. 바로 멸망의 메이로부터의 통신이었다.


[흥, 제법이잖아. 보기보다 배짱이 있는걸? 다시봤어.]


"메이? 왜 외부에서 통신을..."


[알바트로스한테 진작에 좌표를 전달받고 그쪽으로 가는 길이었지. 감히 내 앞을 막던 펙스 병력은 좀 전에 막 잿더미로 만들어버린 참이야. 그나저나 오메가를 상대로 협상하려한다고 들었는데, 벌써 끝났나봐? 조금만 더 지체됐다면 핵미사일 끼고 협상할 수 있었을텐데.]


"뭐 그렇지. 그보다 오메가의 병력도 반갈죽됐다는 거군. 멋지네. 그건 알겠고, 니 남친 바꿔줄까? 아니, 스피커폰이라 그냥 말해도 다 들리지만."


[읏... 아니, 됐어. 직접 만나서 얘기하면 돼. 마침 니들이 보이기 시작하네.]


하늘은 이제 막 동이 트면서 밝아오기 시작하고 있었다. 해가 뜨는 반대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둠 브링어 편대의 호위를 받고있는 수송기를 볼 수 있었다. 


몇 분 뒤, 수송기와 함께 둠 브링어 대원들이 우리 앞에 착륙하고, 메이를 가까이서 보게되자 왜 카메라를 끈 채 통신을 걸었는지 알 수 있었다. 머리는 그녀의 상징이었던 트윈테일로 묶지않고 풀어헤쳐서 새빨간 생머리가 바닥에 질질 끌리는 상태였으며 눈가에 붓기가 남아있는게 최근까지 울었던 것 같았다.


"메이!"


"사령관, 내가... 내가... 윽, 으아아아앙! 사령과아아아안! 이 바보! 바보바보바보! 걱정이나 시키고 말이야!"


사령관이 반가운 기색으로 이름을 부르자 메이는 도도한 척 하려했으나 그와 얼굴을 마주하자 얼마 버티지 못하고 울음보를 터뜨리며 심판의 옥좌에서 내려와 사령관에게 달려들어 껴안았다. 리리스가 아직도 사령관을 놓지 않은 상태라 그는 졸지에 두 명한테 끌어안기게 되었다.


"아.. 아하하... 메이 네가 이렇게까지 될 줄이야... 이제 다 괜찮아. 걱정시켜서 미안해. 아, 나앤도 왔구나?"


메이에 이어 그녀의 부관인 나이트앤젤 또한 사령관 앞으로 걸어왔다. 사령관을 보자 자연스레 표정이 풀어질 뻔 했으나 고개를 빠르게 몇번 휘젓고선 침착하게 표정관리를 하며 보고를 시작했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사령관님, 그리고 부사령관님. 둠 브링어, 지금 도착했습니다. 오르카호로 돌아가는 길의 호위는 저희에게 맡겨주십시오. 장화, 더치걸, 로크는 먼저 오르카호로 귀환했으니 그쪽은 안심하셔도 됩니다. 자, 메이 대장? 알았으니 이만 사령관님 좀 놔주세요. 집에 돌아가서 마저 끌어안든 뭘하든 하세요."


"...싫어. 안떨어질거야."


나이트앤젤은 메이를 말리려했으나 정작 메이는 사령관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고 웅얼거리듯이 거절의사를 밝혔다.


"아니 무슨 어린애도 아니고... 에휴, 됐습니다. 부끄럽다고 손도 제대로 못잡는 꼴 보는 것보단 훨씬 낫네요. 그대로 같이 수송기에 타세요, 의자 챙기는 거 잊지 마시고요. 둠 브링어? 돌아가는 동안의 호위는 제가 지휘합니다."


그녀의 고집을 예감한 나이트앤젤은 말리는 걸 일찌감치 포기하고선 이 기세로 아다도 떼면 좋으련만 하고 들릴듯 말듯 중얼거리며 다른 둠 브링어 대원들에게 돌아갔다.


사령관이 사람 둘을 매단채 어기적거리며 수송기에 타고, 나를 포함한 다른 인원들도 뒤따라 한명한명 수송기에 몸을 실었다. 그러나 유미는 아직 타지 않고 마지막까지 남아서 오메가가 간 그녀의 본진 방향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기를 잠시, 땅이 진동하는 묵직한 발자국 소리에 유미가 뒤돌아보자 그 자리엔 거대한 셀주크가, 정확히 말하자면 셀주크 몸체를 쓰고있는 트레저가 서있었다.


"유미 씨, 빨리 타십쇼. 비행기 띄워야함다. 설마 이제와서 같이 못간다느니 하려는 건 아니죠?"


"아, 예? 아뇨, 그런 건 아니에요. 그냥... 정말로 오메가한테 이겼구나, 싶어서요. 물론... 오메가도 감마도, 회장들도 전부 건재하긴 하지만... 난민들도 모두 무사히 구출했고, 사령관님도 구했고, 부사령관님 본인도 무사히 돌아가게 됐고. 솔직히 난민 호송 작전을 시작했을 땐 죽을 각오를 했었는데... 누구도 죽지 않았다는 게... 정말... 믿기지가 않아서...


"맞슴다. 형님은 대단하신 분이니까 말임다! 그리고 유미 씨도 그렇지 말임다."


"예...? 제... 제가요?"


"그야 유미 씨가 이 일의 시작을 끊은 것 아님까! 난민들을 모아 오르카호로 향하게 한 건 유미 씨임다. 형님이나 다른 분들의 도움도 있기야 했지만, 어찌됐든 간에 유미 씨가 그 사람들을 구한검다. 그 늙은이 시체 훔치는 일도 유미 씨 도움이 없었으면 못했을테니 사령관이랑 형님도 유미 씨가 구한 셈임다. 거기다 전엔 저까지 구해주셨잖슴까! ...그러니까 그 뭐냐, 유미 씨는 좀 더 자신을 자랑스러워해도 됨다. 허리도 피고, 미소도 좀 짓고 그러십쇼. 그래야 더 예쁘지 말임다."


"엣... ㅇ, 예...!?"


"...어... 방금 말이 좀... 어색했슴까? 죄송함다, 제가 이런건 영..."


"아, 아뇨아뇨, 그냥... 그... 칭찬을 받아본 건 처음이라... 고, 고마워요...."


멸망 전부터 한번도 칭찬다운 칭찬을 받아본 적이 없어서였을까. 유미의 얼굴이 살짝 불그스름해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둘 사이의 어색한 침묵은 얼마 안가...


"...쟤네들 언제까지 저러고 있을거래? 내가 불러올까 아님 형님이 부를래?"


"야야 가만히있어봐 쟤네들 썸타고있다. 이런 건 날마다 오는게 아니라고."


...나랑 리디아가 수근거리는 걸 듣자 끝나버렸다.


"어, 아뇨, 기다리게 해서 죄송함다 형님! 유미 씨, 얼른 타십쇼, 나중에 봅시다!"


"네, 네! 오르카호에 가서 봐요!"


"아 젠장 리디아, 한창 재밌었는데 너때문에 들켰잖아!"


"시끄러워. 잠이나 자 형님."


마지막으로 유미까지 올라타고 나서야 수송기가 이륙했다. 트레저와 포트리스, 알바트로스는 둠 브링어 대원들과 함께 수송기 곁을 날아갔다. 수송기의 창문 너머로 미국 땅이 점점 멀어지는 걸 보자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사령관은 양옆에 찰떡같이 붙은 리리스, 메이의 정열적인 시선 속에서 잠들었고, 나도 옆에 앉은 리디아의 어깨에 기대 눈을 붙였다.


그렇게 우리는 오르카호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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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아 드디어 2부 끝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