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사령관, 부사령관이 각각 북미대륙 내에 고립된지 2박3일째, 그들은 마침내 집에 도착했다. 오르카호가 정박한 해안가에 수송기가 착륙하자마자 오르카호 바이오로이드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사령관, 주인님, 각하, 그대, 달링, 오빠 등등 제각각의 호칭으로 부르면서 사령관에게 달려들더니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수복실로 끌고가버렸다. 리리스와 메이는 사령관과 함께 바이오로이드의 파도에 쓸려갔고, 둠브링어 대원들도 질세라 뒤쫓아갔고, AGS들은 느긋히 승선하고 있었고, 남은 건 부사령관 일행이었던 자들 외엔 라비아타와 칸 뿐이었다


잠깐동안 소란스러웠던 착륙장이 잠잠해지자 강건너 불구경한 부사령관은 리디아와 함께 태평하게 수송기에서 내리며 킥 웃었다.


"이렇게 될거라고 대충 예상은 했지. 인기 많은 것도 참 피곤하겠어."


"형님도 남말 할 처지는 안될텐데?"


"얌마, 사령관 녀석이랑은 달리 나 좋다고 따르는 애들이 니들밖에 없는데 무슨-"


"작년에 오메가 본진에서 구한 펙스 난민들. 거기에 추가로 사흘 전에 구한 펙스 난민들"


"...아."


짧은 깨달음의 탄식이 나오자마자 조용해졌던 오르카호 안에서 다시 여러명이 갑판을 박차며 달려오는 발소리가 점점 선명하게 들려왔다.


"우리 동생! 드디어 돌아왔구나! 누나 무지무지 걱정했거든? 어디 다친데 있으면 빨리 말해줘야 하거든!?"


"야 부사령관!! 어딜 싸돌아다니다 이제야 돌아오는 거야!? 더는 못참아. 또 위험한 데 가려고 하기만 해봐, 철구 사슬로 꽁꽁 묶어버릴테다!"


"부사령관이... 정말로 있어...! 흑, 흐아아앙... 다신 떠나지 말아줘... 부탁이야..."


"잡았다! 보고싶었어요 부사령관님! 이제 절대 안놔줄거에요! 부사령관님은 무조건 가택연금형이에요!"


포츈, 바바리아나, 더치걸, 켈베로스 등 수백명의 펙스제 바이오로이드들이 쏟아져나오더니 순식간에 부사령관을 에워쌌다. 


"오, 음, 오랜만, 아니, 미안? 걱정시켜서? 그, 무사히 돌아왔으니까, 이제 좀 놔줘도, 아니 좀 놔줄래? 얘들아? 얘들아 나 걸을 수, 있거든? 아니, 얘들아? 애들아!? 리디아아아! 트레저어어어어어!"


"형님이 선택한 하렘임다! 악으로 깡으로 버티십쇼!"


"기억할게!"


"아니 도와달라고 이 놈들아아아아...!"


부사령관은 땅에 발도 디디지 못한 채 순식간에 사령관과 같은 꼴로 오르카호 안으로 끌려갔고, 남은 일행들은 그 모습을 남일처럼 느긋하게 구경했다. 유미만 빼고.


"저, 저기 여러분...? 부사령관님이 끌려가셨는데... 저대로 놔둬도 괜찮은 건가요...?"


"글쎄. 감격의 재회를 하면서 눈물바다가 됐거나 아님 못한만큼 하겠다며 좆물바다가 됐거나, 둘 중 하나겠지."


"ㅈ... 네에!?"


방금의 소란에 적응하지 못한 유미가 조심스레 물어보자 리디아가 태연하게 대답하고, 그녀의 뒤를 이어 다른 일행들도 제각각 자신의 생각을 내던졌다.


"예끼! 천박한 표현 좀 쓰지 말거라! 그건 그렇고... 으음... 역시 그이를 도와줘야 하지 않겠느냐?"


"아하핫! 그냥 양보해주자고, 쟤들은 우리보다 더 오랫동안 보스를 보지 못했었잖아."


"켁, 빨리 쫓아가지 않으면 니네 형님 다 빨려서 우리 먹을 게 안남는 거 아냐?"


"방금건 농담이니까 걱정마셔. 당분간은 원기회복 빌미로 밤일은 전혀 안할걸. 내가 당해봐서 알아. 이만 들어가자, 샤워하고 좀 쉬어야지."


리디아 및 다른 인원들이 발걸음을 떼자 유미가 잠시 우물쭈물하더니 이내 그들을 불러세웠다.


"저기, 잠시만요... 저같은 외부 인원도 그냥 들어가도 되는 건가요? 뭔가 검사라던가, 그런건...?"


"에이 무슨 말씀이세요! 저번 작전때부터 여태까지 해온 유미 씨의 헌신은 두말할 것도 없는데! 유미 씨는 이미 저희 동료라고요! 그쵸? 제 말 맞죠?"


"그렇고말고. 형님 대신해서 말해주자면 넌 프리패스야. 너도 어엿한 형님 팀의 맴버잖아? ...소속을 확실히 하지 않아서 아직은 임시 맴버지만."


"소속이라면... 오르카와 펙스 중에서요?"


"내 말은, 형님과 사령관 중에서 말이야. 리리스나 오렌지에이드같은 애들은 형님 팀에 임시로 들어온 거니까. 그러고보니 하이에나는..."


"꺄하핫! 난 니네 형님 따르기로 했어! 마음에 쏙 드는 거 있지! 아, 미안 대장. 호드도 끝내주긴 하지만 난 그... 자리 좀 옮길게?"


"괜찮다. 오랜 전우의 요청인데 어찌 거절하겠는가. 자네의 결정을 존중하도록 하지. 그렇지만, 어차피 전부 오르카 소속인데 굳이 나눌 필요가 있는건가?"


"당연한 거 아님까, 안그랬으면 난 아직도 전역 못해서 마리 대장 밑에서 굴렀을 테니까 말임다."


칸의 물음에 리디아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하자 칸은 의문스런 표정과 함께 다시 질문을 던졌다.


"음... 리디아 자네는 불굴의 마리를 싫어하는 건가?"


"아니아니, 그런 건 아님다. 마리 대장은 멋지고 훌륭한 분이시죠, 모든 브라우니의 우상이라고요. 머리 긴 브라우니라 해도 그건 마찬가지고요. 형님 건으로 실망했던 것도 이젠 사라졌고 말임다. 하지만 그거랑은 별개로, 매일같이 스틸라인 지옥훈련에 참가하는 건 사양임다."


"...그렇다면 그 실명된 왼눈을 아직까지 고치지 않은 이유도 혹시..."


"암요, 전선에서 빠지기 위한 핑계용임다."


"...그렇군. 그건 알겠고, 나와 통령은 부사령관에게 묻고싶은 것이 있는데 그도 수복실로 갔을 거라고 생각하나?"


"응? 댁들이 형님한테? 무슨 용건인지는 모르겠지만... 수복실은 아마 사령관이랑 걔 얼굴 보러간 애들로 꽉 찼을테니 형님이 실려간 곳은 아마-"



*



"내 방 안에 대체 몇명이나 들어와 있는거야!?"


수복실은 만원이라 들어갈 틈이 없다보니 날 들고 옮기던 바이오로이드들이 대신 날 내 방에 데려다준 뒤 침대 위에 눕혀다놨다. 어차피 크게 다친것도 없어서 쉬기만 하면 되니까 불만은 없다만 문제는 얘들까지 내 수발 들어주겠답시고 몰려들어와서 내가 올라와있는 침대를 제외하면 방이 발 디딜 틈도 없을 정도로 꽉 찼다는 점이지. 


심지어 문 밖에도 자리가 없어 못들어온 애들이 줄을 섰다. 지금도 밖에서 이제그만 교대하라느니 내 얼굴만 보자느니 하는 소리가 들리고있다.


사령관뿐만 아니라 나까지 이 과잉보호의 대상이 되다니 믿을 수가 없군. 그래도 사령관은 나보다 더한 꼴을 보고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웃음이... 나오지는 않네.


"우리 동생, 필요한 거 있으면 말만 하는 거거든! 누나가 뭐든 갖다줄 수 있거든?!"


"내게 필요한 건 조용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이야! 포츈 너도 AGS 애들이나 돌봐주러 가지 그래?" 


"지금쯤 사령관네 포츈도 쉬고있을텐데 누나한테만 일 시키다니 너무하거든?"


"아니 내 말은... 하아, 맘대로 해... 리디아는 어디있어?"


"미안, 실례한다, 좀 지나갈게, 발 밟히기 싫으면 알아서 비켜... 형님, 우리 왔어."


마침 리디아와 남은 일행들이 인파를 비집고 방 안에 들어왔다. 그런데 가만보니 우리 애들만 온 게 아니었었다. 다른 사람들보다 키가 훨씬 큰 여자의 얼굴이 눈에 확 띄었다.


"라비아타?"


"아, 안녕하세요. 부사령관님."


"사령관은 여기 없다. 번지수 잘못 찾았어."


"우린 부사령관 그대를 찾아온거다."


라비아타에 이어 칸까지 모습을 드러냈다. 뜻밖의 방문에 나는 눕혀져있던 몸을 바로세운뒤 자세를 바꿔 침대 위에 양반다리로 앉았다.


"칸까지? 나한테 무슨 볼 일이 있다고? 사령관 보는 것보다 더 급한 일이야?"


"사령관이 무사하다는 건 이미 확인했는데다 당장은 보러가기 힘들 것 같아 여기부터 먼저 들린거다. 그리 급한 건 아니지만... 가능하다면 사람들을 물려줄 수 있겠나?"


"아, 되고말고! 얘들아 들었지? 지금부터 간부들끼리 중요한 얘기를 해야하니 난민 출신 여러분들은 방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줘!" 


과장해서 큰 소리로 말하며 훠이훠이 손짓하자 포츈을 포함한 다른 펙스제 바이오로이드들은 할 말이 있는듯 했으나 이내 알았다면서 순순히 밖으로 나간 뒤 문을 닫아줬다.


"마침 잘 말해줬어, 안그래도 방이 좀 좁아서 말이지. 포트리스 불러서 문 앞에 세워두던가 해야지. 그건 그렇고, 이제 애들 다 보내고 나니 방이... 여전히 좁네."


"그냥 문에다 면회 금지 펫말이라도 걸어두면 되잖아?"


"정말로 그게 먹힐거라고 생각하냐?"


"...흠."


"난민분들과는 제가 면식이 있으니 잘 설득해서 돌려보내볼게요. 오렌지에이드 씨, 저 좀 도와주실래요?"


"물론이죠! 여기 오길 잘 한 것 같네요 이번에도 제가 힘 좀 써보죠 솔직히 지금 사령관님은 다른 분들한테 겹겹히 둘러쌓여서 못갈 것 같으니 그냥 여기로 와본건데 마침 제가 필요한 무대였네요 이 오렌지에이드의 혀만 있으면 하멜른의 피리처럼 난민분들의 이목을 확 사로잡아서 이끌 수 있답니다 근데 사람들이 워낙 많아서 소리가 닿을지 걱정인데 확성기라도 가져와볼까요 그거 아마 시티가드 비품실에 있을텐데 아님 방송을 쓰는 건 어때요?"


"저기..."


"아 그러보니 저 라디오 방송 같은 거 하면 잘 할 것 같지 않아요? 이번에 들어왔으니 한동안 내근하면서 방송 일이나 해봐야겠어요 분명 재밌을거에요 유미 씨도 같이 해봐요 참 그렇지 일하니 생각난건데 사령관님은 언제 퇴원할 수 있을까요 아마 며칠은 더 강제로 휴식할 거라고 생각되는데 계속 지휘부가 마비된 상태면 오르카호도 회복되지 못한단 말이죠 지금쯤 용 중장님이나 알파님도 사령관님 보러 가서 임시 지휘부도 마비됐을 것 같은데 라비아타님이랑 부사령관님도 당분간은 일 못할테고 큰일이네 어쩌죠 이러다간 오르카호가 계속-"


"오렌지에이드? 그건 나중에 생각해고 눈앞의 일부터 처리해주지 않을래?"


"아 맞다. 또 저도 모르게 입에 시동이 걸려버렸네요 헤헷. 그럼 저랑 유미씨는 먼저 가볼게요!"


유미와 오렌지에이드마저 문 열고 나가고 나서야 방 안이 고요해졌다. 방 밖은 조금 시끄러워진 것 같지만.


"그래, 둘이 수고 좀 해줘... 우리 어디까지 했더라?"


"...아직 시작도 안했네."


"그럼 지금부터 시작하면 되겠군. 대충 아무데나 앉아줘. 그래서, 나한텐 무슨 용건이라고?"


"질문하기 전에, 먼저 전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의자에 다소곳이 앉은 라비아타가 나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말을 계속했다.


"진작에 했어야 하는 말이지만 수송기 안에선 피곤해보여서 말할 기회를 놓쳤기에 지금이라도 말씀드릴게요. 주인님뿐만 아니라 저와 칸 소장까지 구해주셔서 감사해요. 그리고 죄송해요, 제 힘이 부족했기 때문에 주인님이 붙잡혀버려 펙스를 몰락시킬 기회를 놓쳐버렸으니..."


"아, 그거? 신경쓰지마. 반대로 생각하면 너희들이 잡히느라 빈집털이할 각이 나온거지. 상황이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으면 나도 회장 시체 훔치기는 커녕 거기 가지도 않았어."


"그런가요... 그렇다면 왜 저희들을 구해주려고 결심하신 건가요? 오메가의 말대로 저흴 내버려둔채 오르카호로 돌아갔다면... 사령관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을 텐데."


"너도 그 자리에 있었잖아. 오메가를 싫어하기 때문이라고..."


"우린 진짜 이유를 묻는 걸세. 부사령관."


칸이 진지한 얼굴로 내 말을 끊고 자신의 말을 꺼냈다.


"잠깐, 이게 니들이 날 찾아온 용건이었어? 그보다 진짜 이유란게 대체 뭔 소리야? 그럼 내가 오메가를 좋아하기라도 한다는 뜻이냐?"


"물론 그렇진 않겠지. 하지만 그것만이 유일한 이유는 아닐거라고 생각하네. 그대를 움직이는 원동력이 정말로 증오심과 복수심이었다면 그대는 어떤 댓가를 치르더라도 오메가에게 피해를 입힐 수 있는 선택을 내렸을걸세. 하지만 그러지 않았지."


"착각하지 마, 전부 결과적으로 나를 위해 한 계산된 행동이니까. 내가 사령관과 니들을 구해준 이유는 첫째, 안그랬다간 오메가 말대로 오르카네 애들이 날 곱게 볼 리가 없고. 둘째, 걔가 아니면 철충의 지구정복을 막을 사람이 없고. 그리고 셋째, 내가 오메가를 싫어하기 때문이지."


"그리고 또...?"


"더 없어, 끝이야."


"거짓말이군. 오메가는 패닉에 빠져 그대를 제대로 관찰하지 못했었지만 내 눈은 속일 수 없지."


"아 그러세요? 무슨 근거로?"


"물론 사령관이 죽었더라면 직간접적으로 그대의 목숨에도 영향을 끼쳤을거다. 그러니 자신의 안위를 위해 사령관을 구했다고 하면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통령과 나부턴 얘기가 달라지지. 사령관만, 혹은 사령관과 통령을 구하고 그 동면포드를 파괴했다면 일부의 희생으로 값진 승리를 쟁취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해서 오르카호로 돌아갔다면 몇몇은 자네를 비난했을수도 있지만 대부분은 자네가 세운 공적을 칭찬했겠지. 그대의 생존과 오메가에게의 복수 두 가지 목적을 달성하려면 이것이 최선의 수였다. 하지만 그대는 그러지 않았지. 하물며 사령관이나 라비아타 통령과는 달리 나는 같은 칸 기종을 복원해서 대체가 가능한데도-"


"또 이 소리냐? 바이오로이드는 도구취급 받고 그랬는데 너는 우릴 사람으로 봐주다니 어쩌구 저쩌구. 이 패턴은 이미 작년에 써먹었다."


"내 말의 요지는 내가 아닌 부사령관 그대에게 있네. 그대의 행동은 이타심이 증오심을 이겼기에 나온 결과였다. 아니면 처음부터 복수는 크게 중요하지 않은 부가적인 목적이었을 수도 있지. 왜 그런 선택을 내린거지? 왜 복수심을 접고 나까지 구해준 것이지?"


"왜, 내가 내린 결정에 불만이라도 있나?"


"그런 게 아니다. 그저 순수하게 궁금할 뿐이지. 그러니 부디 진실을 들려주지 않겠나?"


아무리 대답하기 싫다는 티를 내도 칸은 진지한 표정으로 내 대답을 기다렸다. 라비아타도 마찬가지였고, 리디아를 포함한 내 휘하의 애들도 은근 내 입에서 무슨 대답이 나올지 기대하는 눈치로 나를 쳐다봤다.


"후우우..."


결국 난 한숨을 길게 한번 쉬고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생각을 정리했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칸."


"듣고 있네."


"내가 작년에 오르카호에서 쫓겨났을 때, 가장 고통스러웠던 게 뭔지 알아?"


뜻밖의 안건을 꺼내자 칸은 여기서 왜 그 얘기가 나오냐는 듯 한쪽 눈썹을 올리고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가 다시 무표정으로 바꾸고선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누명에 대한... 억울함인가...?"


"고독함이었어."


"...!"


나는 눈을 크게 뜬 채 침묵하는 칸을 마주하며 깊은 곳에 있는 감정을 끌어올렸다. 


"그 때의 나에겐 문자 그대로 내 편을 들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없어. 내가 밖에서 철충이나 무슨 위험에 마주쳐도, 오르카호의 그 많은 사람들 중 누구도 날 걱정해주지도, 구하러 와주지도 않을 상황이었다고. 그런데도 내가 살아남겠다고 결심한 이유는,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좌우좌가 걔 소방도끼랑 같이 건네준 격려 덕분이었어. 


(힘내, 절대 희망을 잃지 마. 살아남으면 두번째 인간도 분명 새 친구를 잔뜩 만날 수 있을 거야. 내가 장담할게)


언젠가 내 편을 들어줄 사람이 생길거라고 믿고선 오르카호 밖에서 살아남기 시작했지. 운 좋게도 하루만에 내 옆에 트레저가 생겼고, 다음날 리디아와 합류하긴 했지만, 오메가때문에 며칠 못가서 뿔뿔이 흩어졌지. 어쩌면 그 때 정신이 나가서 산 송장 꼴로 폐허를 돌아다니다 객사했을수도 있었지만, 내가 정신을 붙잡을 수 있었던 건 내 손에 남아있던 그 소방도끼 한 자루 덕분이었어.


그렇게 난 포기하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할 수 있는건 뭐든 했다. 날 추방했던 오르카호에 숨어들어가고, 그 다음엔 날 죽이려든 리리스한테도 반항했지. 그 덕에 히루메를 만나고, 애니도 만날 수 있었어. 그리고 살아남았지. 의지할 수 있는 친구들과 함께.


나는 누군가가 구해주기를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바깥에 고립됐을 때의 고통이 어떤지 잘 알아. 물론 그렇게 수십년을 살아온 리디아나 다른 애들한텐 명함도 못내밀지만... 그러니까 내 말은... 다른 누군가가 이 고통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았어.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고립되어도, 누군가가 도와줄거라는 희망을 잃지 말라고. 사령관도, 너희들도 모두."


내가 말을 마치자 방 안에는 어색한 고요함이 감돌았다. 심지어 문 밖에서도. 책상에 앉아있던 리디아가 다가와 침대 위에 걸터앉더니 팔을 뻗어 내 머리를 그녀의 어깨에 기대게 했다. 그녀는 평소에는 보기 힘든 평온한 미소를 짓고있었다.


"좀 늦은 감이 있지만... 지금이라도 형님이 우리한테 의지하고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어서 기뻐.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마워. 형님."

 

"보스가 그 때 오메가의 본진에서 펙스 바이오로이드들을 한꺼번에 구하겠다고 한 것도 그런 이유였구나..."


리디아에 이어 애니도 거들었다. 근데 그건...


"어... 분위기 깨서 미안한데, 그건 아냐. 그 땐 진짜로 오메가 엿먹일 수 있는 방법 중 할 수 있는 게 그거뿐이어서 그랬던 거고. 그 당시엔 남 걱정할 겨를이 없었거든."


"...에헤헤... 괜히 말 꺼냈네..."


애니가 머쓱해하며 머리의 노란 브릿지 부분을 만지작거렸다.


"이번에도 옆에 리디아랑 트레저 둘 밖에 없었으면 사령관 못챙기고 혼자서 도망쳤을거야. 하지만 알다시피 이번엔 달랐어. 내 편을 들어줄 사람이 많이 있었지. 리리스, 유미, 하이에나, 알바트로스 등 더 많은 사람들이 내게 손을 내밀어줬고, 그렇게 도움을 받은 나는 도움이 필요한 다른 사람에게 손을 내밀어줄 자격이 생기고, 마침 손 뻗으면 닿을 거리에 너희들이 있었던거지."


"...그렇군요. 그동안 저희 둘은 접점이 거의 없었지만, 직접 얘기를 나눠보니 알 수 있네요. 역시 당신은 좋은 사람이세요."


"고마워."


"긴가민가했다만, 정말로 부사령관 그대에게도 이런 면이 있을 줄은 몰랐군... 한 가지만 더 물어도 되겠는가? 왜 그동안 우리에게까지 이런 면모를 감추고 다녔던건가? 안그랬다면 우리들도 그대가 선인이란걸 진작에 인정하고 받아들였을텐데."


"내 맘이야. 내가 뭐하러 속마음 다 까발리고 다녀야 하냐? 딴데가서 내가 이 말 했다고 말하지 마라. 사령관한테도 말하지 말고"


"앗..."


"어..."


칸과 라비아타가 시선을 피하며 입에서 어색한 소리를 냈다.


"...왜?"


불길함을 느낀 내가 의문을 표하자 칸이 마지못해 다시 내게로 시선을 맞추면서 그간 내가 몰랐었던 진실을 얘기해주었다.


"말하지 않아서 미안하다만... 오래전에 탈론페더가 자신의 컬렉션에 사각지대가 있어선 안된다며 여기에도 카메라를 설치해놨다고 들었는데..."


































"씨발"



다음화가 마지막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