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사항



재료 : 꽃갈피 + 하르페이아

소설 속 캐릭터의 묘사가 기존 캐릭터와 다를 수 있슴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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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 흐으으으음...?”

   

피가 생각나는 불쾌한 검붉은 색에 오늘 본 하늘처럼 쨍한 파랑을 섞은 것 같다.

섞이지 않은 색들이 불쾌하게 읽히면서도 묘하게 마음을 울리니, 그래서 더 기분 나쁘다.

   

그간 이 가사집을 읽은 소감이다. 그리고 책장이 아무리 넘어가도 이 책에 대한 소감은 바뀌지 않았다.

   

좋은 날이다.

오랜만의 비번이고 오르카도 때마침 연안에 닿았다.

여기저기 서로 모여 시끄러운 주둔지를 몰래 벗어나 걸으니 푹푹 발을 빨아들이는 모래사장의 뜨뜻함이 좋다.

그러다 발견한 비밀공원. 바다와 하늘이 탁 트인 풍경이 머리 위로, 등 뒤로는 나무 우거진 숲이 나를 가려주는 곳을 찾았다.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책을 읽다가도 피식피식 웃음이 샌다.

책을 펴면 다른 생각은 쫓아내는 편이지만 이번만은 질 수밖에 없다.

   

좋다. 오랜만의 비번. 너무 완벽해서 누군가 짜놓은 거라고 의심이 들 정도로. 완벽한 시간이다.

   

방금까지는. 방금까지는 정말 기분 좋았는데.

   

책은 보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에 끝을 알 수 없는 우주가 생기는 것 같다.

나는 어느 등장인물보다도 높은 곳에서 이야기를 훔쳐보는 것뿐인 방관자에 불과하지만, 책장을 넘길수록 그 안에 뛰어들고 싶은 충동을 말릴 수 없다.

누군가는 그저 만들어진 세상에서 누군가의 의도대로 흘러가는 연극일 뿐이라고 말하곤 하지만,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우리는 만들어진 세계를 보는 게 아니라 인물의 이야기를 보려 책을 꺼내는 거니까.

   

그런데 뭐랄까. 이 책은, 이 이야기는 조금 그렇다.

꾹 눌린 파랑처럼 먹먹하고 차가운 바다 속 가장 아래를 헤매는 것처럼.

곱씹을수록 무겁고 갑갑하다.

   

“한낮의 기억들은 어디론가 사라져. 꿈을 꾸듯 밤하늘만 기억하고 있어요.”

   

이 책은 멸망 전, 대한민국에서 정말 인기 많았던 가수의 노랫말을 옮겨적은 가사집이란다.

예전에 무대를 준비하며 작사에 도움이 될까 해서 읽은 책이 어느 순간부터 책장을 전혀 넘어가지 못하고 있다.

   

“새 삼푸를 사러 가야지. 아침하늘 빛의 민트향이면 어떨까.”

   

꽃갈피. 꽃으로 된 책갈피라는 이름을 한 이 가사집은 의미를 알 수 없는 말 투성이다.

그것들을 보고 있노라면 옛날 무지개는 서른 가지 색이었을까 하는 이상한 생각이 든다.

아니면 멸망 전의 인간들은 하루에도 기분이 우주와 심해까지 오갈 정도로 변덕이 심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해야만 노랫말의 의미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합니까. 홀로이 개여울에 주저앉아서...?”

   

인기 많았던 가수라더니. 뭐야 이게.

   

오늘도 이 골칫덩이는 사납게 덮힌다. 자꾸 가슴 안쪽이 울렁거리고 간지러운 게 참을 수가 없다.

   

“에이. 몰라. 나중에 봐야지.”

   

억지로라도 꼭 끝을 보고야 말겠다는 마음으로 매달린 게 벌써 몇 주째다.

그러면서도 책을 덮고 멍하니 정신을 놓으면 허공에 사령관의 얼굴이 아른거린다.

책에 무슨 마법이라도 걸린 건지.

임무 중에도, 밥을 먹다가도, 심지어는 자는 와중에도 사령관의 얼굴이 나타나 정신을 흐트려놓는다.

   

그때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건, 요새 잠을 제대로 못 잔 탓이겠지.

   

“사령관은 뭐하려나. 보고싶다아.”

   

평소와 같이 바쁠 사령관을 떠올린다.

평소였다면 부끄러워도 눈 질끈 감고 안겼으면 됐는데.

이 책을 읽은 이후로 나도 모르게 사령관을 피하게 된다.

   

“아니다. 보기 싫다. 보기 싫다아아.”

   

무슨 마법이라도 걸린 건지. 또 몸 속 가장 깊은 곳에서 뭔가 꿈틀거린다.

방금 전보다 바닷바람이 습해진 것 같다.

날씨가 흐려진 것도 아닐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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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 휴양지 정찰 결과 철충 및 경계할만한 요소는 없다고 판단됩니다. 또한 특별히 지시하신 방주 내 손상돤 과거 기록 복원, 전일 대비 0.3% 진척됐습니다.”

“오늘 복원된 정보가...”

“네, 이게 전부입니다.”

“쉽지 않네... 공을 많이 들이고 있는데.”

“그만큼 기록 조작이 정교했다는 뜻이겠죠. 확실한 복원을 위해서라도 신중히 진행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야겠지”

“아, 그것 말고도 하나 더 있습니다.”

“뭔데?”

“도서에 부록으로 달려있던 CD 형태의 데이터입니다. 정보 오염이나 악성 코드는 발견되지 않아서 승인해주시면 방주 데이터베이스에 기록하려고 합니다. 스카디 님 말로는 멸망 전에 만들어진 음악이라고 하더군요.”

“노래는 언제나 좋지. 고생했어, 아르망.”

   

패널을 덮은 아르망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정신없이 움직이던 지휘실이 이제야 조금 한산해졌다.

시종일관 오르카 호를 침몰시킬 기세로 공격해오던 레모네이드 세력들의 추격을 떨쳐냈고,

정말 지구를 차지해버린 건지 어디에서도 이빨을 들이밀던 철충들도 휴식기인지 활동이 뜸하다.

어떻게 지났는지 모르게 하루하루 넘기기 바빴던 최근 한 달을 생각하면, 어떻게 살아있는지 용할 정도다.

   

“그럼, 사령관님. 모처럼의 휴식이니 즐겁게 보내시기 바랍니다. 그동안 업무는 특별 프로토콜을 적용할테니, 업무에 대해서는 일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겠습니다. 일. 절. 아시겠죠?”

“또...? 그럼 난 뭐하라고...”

“지휘관 만장일치로 결정된 사안입니다. 지금 쉬지 않으면 조만간 건강에 좋지 않을 거라는 의견이 다수였습니다.”

   

아르망이 내 손에 들린 지휘 패널을 뺏어들었다. 

   

”그러게 평소에 좀 쉬어두셨으면 얼마나 좋아요.”

   

특별 프로토콜. 오르카 호의 모든 결정권에서 사령관을 제외하는 특별 상황.

   

방주에서 처음 시작된 이후, 아르망과 알파를 비롯한 부관들은 때때로 내게서 패널을 빼앗아간다.

평소에 일 중독처럼 일하는 나를 쉬게 해주려는 배려인 건 알고 있지만 항상 패널을 쥐고 있던 손이 허전한 건 어쩔 수 없다.


이상하게 실직은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는단 말이지.

   

“그럼 정찰부대 보고까지만 받게 해 줘. 이... 일하는 건 아니잖아. 그냥 다들 고생했으니까 얼굴만 보는 건데. 그것까지는 괜찮지...?”

“그렇게 쉬는 게 싫으십니까? 하여간...”

   

어색하게 웃는 나를 보며 아르망이 허탈한 듯 웃음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마침 복귀 중이라고 연락 받았으니 갑판으로 가시죠. 착륙장에 도착하면 아마 시간이 맞을 겁니다.”

   

아르망과 함께 갑판에 도착하니 지중해의 짭조름한 바다내음이 코를 찌른다.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싸움을 위해서 닿은 유럽이지만 수평선을 붉게 물들이는 노을을 보니 평화로운 것 같다는 착각이 든다.

아름다운 풍경에 나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자 아르망도 덩달아 웃는다.

   

“섬을 둘러보니 해변가가 예쁘다고, 하르페이아 양이 그러더군요. 쉬시면서 해변가를 산책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응, 괜찮을 것 같아. 같이 갈래?”

“저는 괜찮습니다. 누가 평소에 몸을 험하게 쓰는 바람에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거든요. 저 대신 다른 분과 같이 가시지요.”

“하하... 그걸 몰랐네.”

“그래도 여유가 된다면... 산책도 나쁘진 않겠군요. 유독 덥고 습한 걸 빼면, 아름다운 곳입니다. 휴양지에 온 것 같은 정도로요.”

“그러게.”

   

갑판 위 착륙장에서 아르망과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다보니 하늘 위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슬레이프니르와 린트블룸, 그리폰과 하르페이아가 급격히 활강하며 착륙장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빠르게 뛰어오는 슬레이프니르와 린트블룸을 시작으로, 모두 날개를 접고 서서히 나를 향해 가까워졌다.

   

주홍빛 노을빛을 받으며, 반대편으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걸어오는 그녀들이 별안간 멋져 보였다.

   

“무슨 일이야? 어차피 복귀하면 보고하러갔을 텐데.”

“그리폰도 참, 사령관은 린티 빨리 보고 싶어서 마중나온 거라구~”

“프로듀서가 스케쥴 끝난 아이돌 케어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니겠어?”

“하하... 다들 고생했어. 정찰은 어땠어?”

“이상 없어. 대장이 수시로 이탈해서 진영 흐트러진 것 빼면.”

“그래도 빨리 복귀했잖아~ 사령관! 나중에 월드 투어할 때 꼭 다시 오자. 휴양지로 아주 딱이야. 파파라치들의 플래시를 의식한 듯 안한 듯 해변을 걸으면... 꺄아!”

“음~ 이 정도 경치면 신혼여행 오기엔 나쁘지 않네~ 사령관. 린티랑 나중에 같이 오는 거야아?! 알겠지?”

   

그럼 그렇지. 이래야 내가 아는 스카이나이츠지. 맥이 풀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스카이나이츠 부대원들이 모여 이야기하는 걸 보고 있자면 절로 기분이 좋아진다.

모두들 비행을 시작하면 부대원들 중 누구 못지않게 확실히 임무를 해내지만,

무장을 해제한 그녀들은 걱정 따위는 여태 키워본 적 없는 것처럼 활기차다.

   

“당분간 이곳에 머물 거야. 언제 다시 쉴 수 있을지 모르니까 마음껏 쉬어 둬.”

“정말? 아싸! 그럼 다음 무대 컨셉 좀 생각해 볼까?”

“그럼 린티는 오랜만에 책이나 좀 읽어야겠다. 하르페! 재밌는 연애소설 좀 빌려줄 수 있어?”

“아? 으... 으응... 알겠어...”

   

그리폰의 어깨 뒤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어째 조금 조용하다 했더니.

   

평소 같았으면 당장 안기고 봤을텐데. 뭔가 불편한 듯 하르페이아는 우리들과 섞이지 않고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무슨 일 있나. 그리폰에게 몰래 눈짓을 보냈지만 그리폰은 힐끔 뒤를 돌아보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른 부대원들도 모른다면, 직접 물어봐야겠지.

   

고개를 빼꼼 내밀어 하르페이아에게 말을 걸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하르페이아의 얼굴이 순식간에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고생했어, 하르페이아.”

“어? 으응... 사령관도...”

“왜 그래? 어디 안 좋아?”

“아... 아니야! 괜찮아! 정말 괜찮아...!”

“...”

“어후, 너무 찝찝하다아! 나는 먼저 들어가 볼게! 얼른 들어가서 씻어야겠다아...!”

   

갑판을 빠르게 벗어나는 하르페이아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상하게 하르페이아와 읽은 책이 생각난다.

서로 좋아하는 남녀의 이야기.

서로가 서로를 좋아하는 걸 알고 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더더욱 마음을 꺼낼 수 없는 소꿉친구의 사랑 이야기.

친구라서 가질 수 있는 가까움과 연인이 되지 못한 거리 사이에서 고민하던.

평범한 연애소설이었다.

   

내 무릎을 베고 책장을 넘기던 하르페이아는 이야기가 무르익어가는 동안 답답한지 몇 번이고 내 다리를 두드렸다.

   

“에이! 그냥 얘기하면 되지! 나 같았으면 그냥 좋아한다 말했을 텐데! 사령관도 그렇지?”

“어... 음... 표현하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르니까. 부끄럽기도 하고, 혹시나 이어지지 않으면 지금보다 멀어지니까. 그게 무서울 수도 있겠지.”

“흠. 부끄러운 거라면 이해하겠는데...”

“만약 하르페이아가 이런 상황이었으면 어땠을 거 같아?”

“만약 내가 그랬으면? 흐음...”

   

하르페이아는 내 무릎을 살살 긁으며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너무 간지러워 피부를 긁는 손가락을 멈추고 싶었지만, 생각을 방해할 순 없으니 간지러움을 잊으려 하르페이아의 대답을 상상했다.

   

하르페이아가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라면 어떻게 할까.

하르페이아라면 마음이 앞선다면 부끄러움은 접어두고 좋아한다 말할 것 같다.

아마도 두 남녀가 몇 번이고 그랬던 것처럼 잠이 안 온다는 핑계로 전화를 걸어 아쉬움을 달랠 것 같다.

밤을 새워가며 통화하던 남녀의 보고싶다는 바램은 망설임으로 이뤄지지 않았지만,

하르페이아라면 망설이지 않고 책 한 권 집어들고 문을 나섰을 것 같다.

   

부끄러움보다 좋아하는 마음이 앞선다면 망설이지 않을 것 같았다.

확신은 없지만, 하르페이아라면 왠지 그럴 것 같았다.

   

“나도 똑같을 것 같아! 부끄러운 건 부끄러운 거니까. 그리고...”

   

하르페이아가 벌떡 일어나 내게 안겼다.

볼에 닿은 그녀의 얼굴이 평소보다 더 뜨겁게 느껴졌다.

   

“혹시나 고백했다가 멀어진다고 생각하니까 조금 그렇네. 사령관은 그렇지 않을텐데. 맞지?”

“그럼. 당연하지.”

“하핫. 역시 사령관이야.”

   

하르페이아가 갑판에서 완전히 모습을 감췄다.

붉게 바다를 물들이던 노을도 완전히 바닷속으로 잦아들어 주변은 빛 하나 없이 어두웠다.


해가 졌어도, 지중해의 여름은 열기를 거두지 않는다.

   

“사령관. 받아.”

   

갑판 난간에 앉은 채 얼마나 멍하니 있었을까.

별안간 뒤쪽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탄산음료를 건네는 그리폰이 보였다.

   

“아, 고마워.”

“왜 그러고 있어? 역시 하르페이아?”

“응.”

“그렇구나.”

   

그리폰은 더 묻지 않고 내 옆에 살짝 떨어져 앉았다.

   

캔이 열리며 탄산이 새는 소리와 꼴깍거리는 소리, 이따금 선체를 때리는 파도소리만 들릴 뿐. 바람 한 점 없는 여름밤은 참 조용하다.

   

한참을 말없이 음료수만 꼴깍거리던 그리폰이 침묵이 답답했는지 먼저 적막을 찢었다.

   

“숙소에서도 저래. 평소랑 다르게 내내 누워있고. 그 좋아하던 책도 폈다 덮었다가 해. 물어봐도 대답도 안 하고. 벌써 몇 주나 지났다고.”

   

그리폰이 힘껏 캔을 구겼다. 나도 착잡하긴 마찬가지지만, 나보다 훨씬 하르페이아와 가까이 있는 그리폰은 그보다 몇 배는 더할 것이다.

   

“아휴. 말이라도 해주면 어디 덧나? 걱정되게, 참.”

“풉. 푸핫!”

“뭐야? 뭐가 웃겨?”

   

그리폰의 짜증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나왔다.

   

“아니, 미안해. 하하하. 웃을 일은 아니지.”

“뭐가 웃기냐구!”

“그리폰도 많이 신경쓰고 있구나 싶어서.”

“다... 당연하지! 하루이틀도 아니고 일주일 째 그러니까! 신경 안 쓰는 게 이상한 거 아니야? 다른 부대원들은 걱정도 안 되나 봐!”

“하하. 오히려 걱정되니까 평소처럼 대하는 건 아닐까?”

“에잇... 몰라! 하여간... 가사집이라고 그랬나? 그 책 읽고 나서부터 그래. 책 읽으면서 한 번도 그런 적 없었는데...”

   

그리폰이 준 캔음료 뚜껑을 열었다.

탄산은 캔을 터뜨릴 기세로 요란한 소리를 내며 새어나왔지만 곧 김이 샐 정도로 싱거운 소리로 변했다.

목을 넘어가는 음료는 미적지근했고, 탄산은 있는 듯 없는 듯 싱겁게 식도를 간간히 찌를 뿐이었다.

   

걱정은 걱정일 뿐이다.

하르페이아가 평소와 다르게 축 처진 것도, 그 이유를 말하지 못하는 것도 이유가 있지 않을까.

발을 동동 구르는 쪽은 그 모습을 두고 볼 수 없는 그리폰과 나 같은, 하르페이아가 평소처럼 활기차길 바라는 사람들이다.

   

하르페이아와 밤을 새워 읽던 책은 당연하게도 해피엔딩이었다.

참 오랜 시간이 걸리긴 했어도 두 남녀는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고, 여름밤 어느 골목길을 비추는 가로등 아래서 손을 맞잡았다.

   

“역시 걱정은 하면 할수록 손해야.”

“응?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말이야?”

   

오랫동안 연락도 없이 각자의 일상을 보낸 남녀.

여주인공은 밤길 속에서 닿은 보랏빛 꽃의 향기에, 남주인공은 우연히 들은 노래에서 서로를 떠올렸다.

망설일 틈도 없이 방을 나섰고 숨긴 마음을 전했을 때, 하르페이아는 웃음 섞인 울음을 터뜨리며 내 무릎을 두드렸다.


“기다려주자. 먼저 얘기해줄 때까지. 책에서도 그랬으니까. 괜찮을 거야.”

“응? 책에서? 사령관 방금부터 무슨 말 하는 거야?”

“아, 비밀이었지. 맞다, 그리폰. 데이터베이스에 노래 추가됐으니까 숙소 가면 알려줘. 예전에 한반도 지역에서 유행했던 노래라고 하더라.”

“아, 응. 고마워. 가 아니지! 방금 그거 무슨 말이냐니까!”

“아아, 아아아아- 안 들린다아아아-”

“아잇! 진짜!”

   

바닷바람이 갑판을 훑고 지나간다.


한참을 투닥거리다 그리폰과 눈이 마주쳤고, 서로 먼저랄 것도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르페이아의 이유모를 우울도, 우리의 근심도 바람에 섞여 사라지기를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