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arca.live/b/lastorigin/49543871 - 시리즈 모음집 











오르카의 사령관과 결전병기 그리고 최강 지휘관




이 3명이 한자리에 모여있다고 상상해보자. 누구든 위압감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들의 모습은 위압감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굳이 따지자면 우스꽝스러웠다.




좁은 격납고에 10m가 넘는 AGS 두 기가 쑤셔 넣어진 듯한 모양새에서는 위압감을 찾아볼 수 없는 법이다.




"사령관.. 지금 막 깨달은 거지만 이건 좀 아닌 것 같은데."


"…미안해"




조금전까지만 해도 감정이 복받쳐 오르는 상태였던지라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지만, 거대 AGS 두 기가 함께 있기에는 오르카의 격납고는 너무 좁았다.




"알바트로스 넌 왜 여기있냐."


"자네가 쓰러진 동안 사령관과 대화를 나눴다. 슬레이프니르가 알아낸 정보가 있었던 덕분에 수월하게 진행되었지. 결과적으로 오르카에 합류하기로 했다."




내가 물어본 것은 왜 가뜩이나 좁은 이곳에 들어온 것이냐였는데 받은 답은 오르카에 합류한 이유라니. 이런 녀석이 막상 전투가 시작되면 유능한 모습을 보여주니 나는 알바트로스의 대화 알고리즘에만 심각한 버그가 있는 게 아닐까 하는 합리적 의심을 시작했다.



애초에 알바트로스가 설명해 준 내용도 정황상 눈치 챌 수 있는 것이었다. 사령관이 실수는 했지만 좃간은 아니고 지휘 능력도 경험상 꽤 뛰어났으니 알바트로스가 합류하기한 것은 당연했다.


사령관도 알바트로스가 합류한다는데 거절할 이유는 없었을테고




"아니 내가 물어본 건 이 좁은 곳에 왜…"


"아미나 존스의 마지막 명령에도 부합하니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그런데 이건 눈치를 못 챘네




"잠깐 잠깐 잠깐! 너 인류연합 정부 소속이었어?"

 

"그러고 보니 자네에게는 말한적이 없었군. 나는 아미나 존스에게 만일 자신이 쓰러진다면 살아남은 세력을 이끌고 인류 부흥에 적합한 자를 찾아 그 혹은 그녀를 도우라는 명령을 받았다."




내가 갑작스럽게 들어온 놀라운 정보를 받아들이려 애쓰는 동안 알바트로스가 갑자기 내 허점을 찌르고 들어왔다.




"그런데 자네가 어떻게 인류연합 정부와 아미나 존스에 대해서 아는거지?"


"어? 그야.. 알고 있..으니까?"


"자네는 나에게 깨어난 것은 극히 최근이라고 말했다. 최전선에서 싸우는 타이런트 모델 특성상 생체회로 기술도 존재하지 않던 멸망전쟁에서 감염을 피했을 가능성은 거의 0에 수렴한다. 그렇다면 자네는 연합전쟁 시절에만 작동하다가 봉인되고 극히 최근에야 다시 가동을 시작한 모델이겠지. 그런데 연합전쟁과 인류 멸망 후의 정보밖에 접하지 못했을 자네가 어떻게 인류연합 정부와 아미나 존스에 대해서 알고 있는 거지?"




방금까지 내 말의 요지도 파악 못 하던 알바트로스가 맞는지 의심이 갈 정도로 날카로운 지적. 혼잡해지려는 머리를 가라앉히고 적당한 답변을 찾아보려 애쓰는 동안에도 알바트로스와 사령관의 시선이 나를 조준하고 있었다.




"어… 여기 애들한테 겸사겸사 전해 들었어"


"거짓말이 티가 나는군."




이걸 어떻게 하면 넘어갈 수 있을까. 난 사실 다른 차원의 인간이라서 이것저것 다 아는데 눈 떠보니 이 세상에 와있었다! 라고 말하면 이 융통성 없는 지휘관은 거짓말하지 말라고 하겠지.




아니다. 이건 융통성이 문제가 아니구나. 상식적으로 말이 안되는 상황이니까.




"자네에 대해서는 의심 가는 것이 많다. 타이런트 특유의 호전성이 없는 것도 그렇고 인류연합 정부에 대해 알고 있는 것도 그렇다."


"나도 궁금한데. 말해줄 수 있어? 넌 어디서 온 거야?"




지휘관과 사령관의 눈빛이 너무 부담스럽다. 나는 머릿속에 담긴 온갖 설정과 창의력을 총동원해 납득할 수 있을만한 설정을 만들려 애썼다. 내 몸에 머리 식히는 냉각기가 내장되어 있었다면 지금쯤 미친듯이 돌아가고 있을 정도로


그렇게 돌아간 머리가 내뱉은 설정은 그럭저럭 괜찮은 수준이었다.




"타이런트에게 학습 시스템이 있는 건 알고있지…?  과학자들이 그 시스템에 이것저것 집어넣어서 폭주의 위험성을 낮추려고 실험을 하다가 만들어진 결과물이 나야. 에미나 존스나 인류 연합정부 같은건 내 머리에 들어간 수많은 데이터에 들어있던 거고"




좋아 내가 생각했지만 잘 지어냈어. 용캐 말도 떨지 않았고




"그렇다면 그 실험 과정은 어떻게 되는 거지? 그 실험의 과정을 알 수 있다면 자네와 같은 타이런트 개체를 생산할 수 있을테니 전력증강 면에서 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한다."





그냥 대충 넘어가 주면 안되냐 진짜! 뭐 이리 집요해 알바트로스가 아니라 거머리 아니야? 이렇게 말꼬리를 붙잡을 때는 가불기가 최고다. 알바트로스에게는 안 통하겠지만 사령관에게는 먹히겠지.




"그다지… 좋지 않은 기억이다. 억지로 감정을 부여받고 머릿속이 해집어지는 경험은 말하고 싶지 않군."


"그렇다해도…"


"알바트로스 그만해줘"




좋아! 사령관 그 기세다! 이 지휘관 나리 좀 멈춰달라고




"…알겠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나를 의심스럽다고 생각하는 티를 팍팍 내는 알바트로스의 시선이 따가웠다. 알바트로스가 용의 항공모함으로 자리를 옮기는 순간까지 그 눈초리가 나를 찔렀다.






***





알바트로스의 시선에서 해방된 나는 곧장 그렘린과 포츈과의 면담 일정을 잡았다. 거북함은 있었으나 그런 감정만으로는 넘어갈 수 없는 중요한 일이 있었다.




내 몸의 감염이 '일부만' 진행되었다는 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감기가 13.2% 감염되었다는 소리가 말이 되지 않듯 철충에게 일부만 감염되었다는 소리도 말이 되지 않는다. 이런 의문을 그대로 둘에게 물어보자  돌아온 답변은 단순명료했다.




"제대로 된 검사를 하지 못해서 그렇게 말했던 거거든. 그래서 우리가 아는 한에서 그나마 비슷한 용어로 설명한 거거든. 제대로 된 결과를 얻으려면 정밀검사를 해봐야 하거든"


"정비하는 김에 검사도 하면 되는거 아니었어?"


"엄청 싫어할 것 같았거든. 우리한테 몸을 맡겼다가 그런 일도 생겼으니까..."



내 몸에 폭탄을 심었던 작업에 이 두 명도 참여했을 것이다. 그것에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는 게 보였다. 하지만 당사자인 나에게는 남아있는 감정이 없다. 사령관이라는 자가 머리를 숙였으니 사과는 충분히 받은 셈이다. 그리고 나는 뒤끝을 남기는 걸 싫어한다.



"신경쓰지마. 부탁할게 포츈, 그렘린. 이것저것 뜯어내고 분해해서 살펴봐도 괜찮으니까 확실히 검사해줘."




그렇게 말한 순간 그렘린의 표정이 잠시 무섭게 변했다. 성공적인 반응을 보인 실험용 쥐를 바라보는 미친 과학자의 눈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새로 나온 장난감을 발견한 아이의 흥미로 가득 찬 눈이라고 해야 할까.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은 그녀를 보는 순간 없던 걱정도 생겨났다.


이거 괜찮은 거겠지?














"이것 봐요! 타이런트의 6번 척추에요!"


"그걸 굳이 내 눈 앞에 대야겠냐…?"


"에이, 살면서 자기 척추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얼마나 드문데요. 이 기회에 한 번씩 봐두라고요."




완전무장한 철충을 보고도 호기심에 접근하다가 많이들 죽어나갔다는 그렘린 모델답게 그녀는 내 몸을 즐겁게 해체했다.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내 몸의 정확히 어떤 부위를 해체하고 있는지 설명해주는 그렘린과 그런 그녀를 못 말리겠다는 듯 난처한 표정을 짓는 포츈


통각센서를 끈 것처럼 내 의식을 꺼버리는 것도 가능했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까지 의식을 잃었다가 다시 차렸을 때 생기는 일이 그다지 좋은 적이 없었던지라 괜히 거북했던 것이 이유였다.




"와! 포츈 언니 이것 좀 보세요! 타이런트의 코어가 드러났어요! 흐헤헤…"




지금 생각해보니 내장…아니 부품 해체 파티를 직관하는 것보다 의식을 잃는 게 더 현명한 처사였던 것 같다.




"굳이 해체당하고 있는 당사자 앞에서 그런 소리를 해야겠어..?"


"치.. 놀라운 걸 어떻게 해요. 살면서 타이런트 내부구조 같은 건 보기 힘들다고요."




당사자는 고통스러운 수다와 함께 이어진 2시간가량의 정밀검사 동안 나는 알고 싶지도 않던 내 몸의 내부구조에 대해 박식한 지식을 얻게 되었다. 해체 후 내 몸을 복구시키는 과정까지 끝이 나자 그렘린은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좀 더 만지작거리고 싶었는데…"


"절대 안 돼"





표정으로는 다소 실망스러워 하면서도 금세 기운을 차린 그렘린은 포츈과 함께 데이터를 정리했다. 심각한 표정, 걱정하는 표정을 지어가던 그녀들을 지켜보는 내 마음이 반 정도 걱정의 불길에 불타고 나서야 그녀들이 설명을 시작했다.




"이건 우리도 예상치 못한 결과인데…'


"뭔데 그래"


"전에 싸웠던 이상한 철충 있지? 타이런트랑 똑같이 생긴 녀석"


"아 그 악마자식…"




잊을 수 없는 놈


그 악마 같은 모습과 녀석이 가졌던 힘에 무릎 끓었던 과거가 아직도 기억에 선하다. 그런데 이제 와서 죽은 철충은 왜 언급하는 거지?





"타이런트 몸에 있는 철충하고 타이런트가 쓰러트린 철충이 남긴 파편이 완전 똑같거든?"


"에…?"


"그래서 내가 세운 가설은 이거야! 녀석이 타이런트의 몸에 들어갔다!"


"그게 가능하냐?"




내 물음에 그것도 몰라? 라고 말하는 것 같은 표정을 지은 그렘린이 잘난 듯이 설명을 하려는 순간 포츈이 선수를 쳤다.




"철충의 유충은 숙주의 몸이 파괴되면 몸에서 벗어나 도망치는 건 알고 있지?"


"어 그래서 본체를 처치하고도 유충까지 사살하는 게 철충과의 교전에서 기본 원칙이지"


"그 방식을 진화시킨 철충이 타이런트의 몸에 들어간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하고 있거든.  우리가 그날 살펴본 타이런트의 몸은 반파되었다가 회복된 흔적이 있었거든? 어디선가 재료를 수급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데… "



그렘린이 들뜬 표정으로 포츈의 말을 가로챘다. 흥분했는지 목소리가 평소보다 격양된 그녀는 물 만난 공돌이 그 자체였다.




"근처에 있어야 할 파괴된 철충의 잔해는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남지 않았어! 그러니까 여기서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지"




흥분했는지 팔 허리를 화려하게 움직이며 어떤 대머리 수학교사가 떠오르는 움직임을 하던 그렘린이 마침내 최종 막을 노래하는 성악가처럼 입을 열었다.



"유충만 탈출하는 방식에서 진화해서 유충이 숙주의 일부를 흡수해 더 성숙한 개체로 변태한 다음 탈출하는 방식이 되었다는 거지! 


탈출할때 가져온 숙주의 부품을 이용해서 반파된 너의 몸을 회복시켰다고 보면 상처가 복구되었던 이유도  설명되고. 13.2% 진행되고 멈춘 감염은 그때 철충의 잔해를 이용해서 몸을 수복하는 바람에 그런 수치가 나왔다고 볼 수 있어. 그러니까 이 가설이 맞는다면 모든 의문이 풀리게 되지."


"그런 게 가능한 건가?"


"드론을 미사일도 회피기동으로 피해버릴 수 있게 진화시키고 포트리스는 특정 조건에서는 무한히 재생할 수 있는, 물리법칙을 무시하는 성능으로 진화시키는 게 철충인데 이제 와서 그런 거에 놀랄 것도 없지."




그렘린이 해가 동쪽에서 뜬다는 말을 하듯 평탄한 어조로 덧붙였다. 그 어조와 다르게 내 마음은 거친 파도 그 자체였다.



"…"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되거든. 비록 철충이 몸에 딱 달라붙어서 제거는 불가능했지만, 생체회로를 침식시키는 것도 불가능하다는걸 확인했거든. 정 불안하면 그때마다 누나랑 그렘린 부르면 되거든. 언제든지 검사 해줄 테니까"



포츈이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가볍게 탕탕 쳤다. 자신만만하다고 해야 할지 포용력 있다 해야할지 모르겠는 모습이었지만 한 가지 확실한건 믿음직스럽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우리 타이런트 너무 걱정하지 말고 푹 쉬어"




끝으로 나를 안심시키려는지 다정한 미소를 짓는 포츈을 보자 괜히 가슴이 시큰거렸다.




"고마워.. 진심이야"



그럭저럭 감동적인 분위기가 흘렀다. 물론 공돌이 아가씨에게는 그런 분위기는 중요치 않은 것 같았지만




"잠깐잠깐잠깐 나는? 나한테는 고맙다고 안 해줘?"


"…70% 정도만 고마워"


"아 왜애애애!!"




투정부리던 그렘린이 포츈에게 뒷목을 잡혀 끌려나가기 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격납고의 문이 열린 순간 두 사람이 예상치 못한 인물을 만난 것처럼 잠시 멈춰 섰다.




"오오 타이런트 인기 많은데?"




또 비열하다 해야 할지 얄밉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는 표정으로 나를 보며 눈썹까지 씰룩거린 그렘린은 잠시 후 포츈에게 붙잡혀 다시 끌려나갔다. 




두 기술자가 떠난 자리에 그 둘과는 다른 인영이 들어왔다.




LRL과 에이미였다. LRL의 작은 손이 에이미의 손을 꼭 잡고 있는 모습은 그런 사이가 아님을 알고있는데도 둘 사이의 관계가 모녀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권속…?"




떨리는 목소리로 LRL이 나를 불렀다. 그 목소리에 응답해주지 않는다면 감정이 메마른 사람, 아니 기계겠지.




"오랜만에 뵙습니다. 저의 주인이시여.."




그 말에 밝은 표정이 된 LRL이 내 앞으로 달려왔다. 아장아장은 아니고 그렇다고 성큼성큼은 아닌 귀여운 발걸음으로 뛰는 모습이 참으로 보기 흐뭇했다.




"감히 짐의 허락도 없이 어딜 갔던 것이냐! 진조의 프린세스와 나눈 계약을 위반한 자는 피의 저주를 받게 된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느냐!"



"죄송합니다. 어떤 벌이든 달게 받겠습니다. 합당한 처벌을 내려주시길…"



"그렇다면.. 음…"




아무래도 이 꼬마 공주님은 누군가에게 벌을 내리는 것이 익숙치 않아 보였다. 한참을 고민하던 LRL의 고민은 에이미가 해결시켜줬다.




"오늘 하루종일 놀아달라고 하는 건 어떨까요?"




다만 나에게는 다소 가혹한 방법이었다.




"그거 좋은 생각이구나! 권속이여 하루종일 나와 피의 유희를 즐기자꾸나!"




파멸의 마수인지 피의 군주인지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는 설정을 지어내며 중2 시절 노트에 끄적이던 수준의 대사를 하루종일 해야 한다는 것인가?




" …알겠습니다."




알바트로스와 사령관의 앞에서는 멸망 전부터 존재했던 타이런트를 LRL의 앞에서는 파멸의 군주를 연기해야 하다니. 이쯤되니 내가 전쟁병기인지. 덴세츠의 글라시아스같은 로봇 배우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내 항마력이 버틸 수 있기를 떠오르는 아무 신에게나 빌어봤다.






***






다행히 하루종일 중2병 냄새가 나는 말투를 쓸 필요는 없었다. 내 몸에 매달리고 올라가기도 하고 에이미까지 참가시켜 역할극을 하던 LRL은 얼마 가지 않아 에이미의 무릎을 베고 그대로 잠들어버렸다.


물론 장장 5시간을 놀았으니 짧다고는 할 수 없는 시간이었다.



"거참 제멋대로인 공주님이군"



"후후 그래도 착한 공주님이죠"



"그래.. 하지만 고작 몇 시간 함께한 기계를 그리워할 정도로 외로움을 타는 공주님인 줄은 몰랐는데."




에이미가 LRL의 입에 들어간 머리카락을 새끼손가락으로 살며시 치웠다. 잠시 미소를 보인 그녀가 내게 질문했다.



"칸 대장님께서 알려드렸다고 들었어요. 우리는 이별을 겪었다는 것을"


"그래 바닐라의 일이라면 알고 있다."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은 에이미가 모성애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사랑 뿐만 아니라 안타까움도 담겨있었다.




"바닐라 양을 잘 따랐거든요. 그래서 그날 이후 많이 변했어요. 전보다 과격한 방법을 쓰더라도 미래를 바꾸려 하게 된 아르망 추기경님보다도, 실수할까 두려워 서두르다 다른 실수를 하는 일이 생긴 호드의 대원들보다도, 자신에게 빈틈이 생길까 두려워 이 악물고 훈련하는 스틸라인의 병사들보다도. 모두 아이에게는 가혹한 일이에요."


"그러니 타이런트. 당신만큼은 이 아이에게서 떠나지 말아주세요. 당신이라면 제가 없어진다 해도 남을 수 있을 것 같긴 하지만. . ."




에이미가 그렇게 말하며 나를 올려다봤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사망 플래그 세우지 마라."


"사망.. 뭐라고요?"


"죽는다는 생각하지 말라고. 어린애한테는 엄마가 필요한 법이야."



엄마라는 단어에 눈에 띄게 반응한 에이미가 눈을 반쯤 감고 미소 지었다.



"엄마라… 후후 저도 조금 피곤한가 봐요. 말이 자꾸 헛나오네요."



이미 눈이 반쯤 감긴 에이미가 LRL을 조심스럽게 안아 들었다.



"기억해둘게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에이미와 LRL은 격납고에서 나갔다.








***








다음날 아침


이번에는 LRL이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바늘 가는 데 실 간다고 에이미도 당연하다는 듯 따라 들어왔다.



"일어났느냐!"


"자지도 않았습니다. 저의 주인이시여"




어제 놀아준 것으로는 부족했는지 아침 댓바람부터 나를 찾아온 LRL. 아침으로 오므라이스를 먹었다는 걸 입과 옷으로 표현하고 있는 LRL의 모습이 어딘가 웃겨서 웃음이 새어나왔다.




"크흐흐…"




이 몸에서 나오는 웃음에 사악한 버전밖에 없는 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어린애 보면서 이런 웃음소리를 내고 있으니 범죄자 같아 기분이 심히 나빠진다. 다행이도 이런 웃음소리는 들리지 않았는지 에이미와 LRL의 행동에는 큰 변함이 없었다.




"공주님 오늘은 타이런트와 산책이라도 하러 나갈까요?"


"좋다! 이 몸도 바깥의 신선한 공기가 그리웠던 참이었노라"


"산책? 내가 밖으로 나가도 되려나"


"그건 저에게 맡겨주세요."




에이미가 어딘가로 문자를 보내는 듯하더니 잠시 후 사령관이 잘 놀다 오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에이미와 LRL을 잘부탁한다는 메시지와 함께.




"허락이 떨어졌습니다. 가시지요."


"좋다! 앞장서거라!"




두 바이오로이드와 함께 간 항구에는 오르카의 대원들이 잔뜩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중에는 내 모습을 보고는 놀라거나 신기하다는 눈치로 구경하는 바이오로이드가 상당히 많았다. 그다지 기분좋은 경험은 아니었다. 동물원의 호랑이가 된 기분이랄까.




"여기는 시선이 너무 신경 쓰이는데… 다른 장소는 없나?"


"어머 미안해요. 좋은 장소가 있으니까 그곳으로 안내할게요. 아마 공주님도 좋아하실 거에요."




에이미가 말했던 좋은 장소는 아름다운 해변이었다. 갈매기 소리와 파도소리가 작게 들려오는 이상적인 해변 그 풍경을 바라보니 진정 평화가 무엇인지 느껴졌다. 그러고보니 이 세계에 떨어지고는 전투에 자주 참여하기는 했다. 철충 기지 공격, 철충 공세 방어, 이제는 내 몸에 들어간 악마와의 싸움, 알바트로스와의 싸움, 네스트와의 전투, 대규모 철충 공세 요격, 별의 아이와의 혈투. 여기에 심리적인 것까지 더하면 사령관과 이것저것 꼬인 관계청산까지




"인생 참 파란만장하네"




그렇게 생각하니 피곤이 몰려와 햇빛이 달군 모래사장 위로 몸을 눕혔다. 햇빛이 따스하다던가 모래사장의 모래가 몸을 간지럽힌다거나 하는 감촉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아쉬웠지만, 그럭저럭 괜찮은 기분이 들었다.




"타이런트! 물놀이 아..아니 짐과 함께 어…"


"공주님 물놀이는 저랑 할까요?"


"좋다! 덤벼 보아라. 짐의 힘을 보여주겠노라!"




물놀이라.. 이 몸 방수는 되겠지? 명색이 결전병기인데 방수조차 되지 않아서 바다에 빠져 고장 나면 얼마나 우스울까. 전에도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은데 그떄는 건물에 깔려있었지 아마?


이런 시답잖은 생각도 하며 평화를 즐겼다. 전투만 시작되면 타이런트의 본능이 깨어나 미쳐 날뛰는 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지만 평화는 참으로 달콤했다. 하지만 그리 오래가는 평화는 아니었다.




". . .이게 무슨?"


"에이미 무슨 일 있어?"




에이미가 표정을 찡그렸다. 지금까지 쌓인 경험이 있기에 나도 그 표정을 통해 무언가 좋지않은 일이 생기고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




"폭발음과 총성이 들렸어요."




그 말에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시야가 높아지자 숲 속에서 폴른 부대가 접근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직감이 저것은 적이라 말한다.




"에이미! LRL 데리고 내 뒤로 물러서라!"




내 발 뒤로 두 바이오로이드가 몸을 숨기는 순간 폴른 부대의 사격이 시작되었다.




타다다다당! 




폴른 부대의 총알 세례가 내 몸에 쏟아졌다. 그래 봤자 빗줄기에 몸이 젖는 정도의 감각이 느껴질 뿐이다. 하지만 내 뒤에 있는 두 바이오로이드에게는 그렇지 않겠지. 바로 제거해야한다.




쾅! 쾅! 쾅!




등에서 미사일이 발사되자 폴른 부대는 한줌 재로 변했다. 폴른이 한 기도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고 내 다리 뒤에 숨어있을 둘을 불렀다.



"둘 다 무사해?"


"네 덕분에요."


'타이런트… 저것들은 무엇이냐?"




불길한 예감이 든다. 사령관을 포함한 연락 가능한 모든 이들에게 통신을 보냈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아니 통신이 보내지지도 않는다.




"이런.. 내가 아는 한 이런 상황은 딱 하나뿐인데"




요정마을의 아리아. 그 이벤트가 이렇게나 빨리 시작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폴른 부대가 이곳까지 온것을 보니 이미 진행된지 꽤 시간이 지난 듯 하다. 바꿔 말하자면 위기일발의 상황이다.




"에이미, LRL 데리고 오르카로 돌아가서 알바트로스를 불러. 용의 항공모함에 있을 거야. 그 녀석이라면 방해전파도 해결할 수 있겠지."



"알겠어요. 공주님 가죠"




에이미의 손을 잡은 LRL이 내가 자리에 가만히 서 있는 것을 보더니 말했다.




"타이런트는?"


"저는… 흠흠 감히 진조의 프린세스를 능멸한 이 하등 종자들에게 벌을 내리겠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등 종자들의 공격 따위 저에게는 통하지 않으니까요."




그럼에도 LRL의 표정에 불안이 가시지 않아 몇 마디 덧붙였다.




"반드시 돌아오겠습니다. 진조의 프린세스님"


"새끼 손가락 걸고 약속하거라!"


"…알겠습니다."




새끼손가락은 커녕 손도 없는 나였지만 대충 넘어가자. 중요한 건 새끼손가락이 있느냐가 아니라 마음이니까.





에이미와 LRL이 오르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숲으로 향했다. 모래사장은 내 무게를 견디지 못해 발이 푹푹 빠지는지라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나무 수십 그루를 꺽으며 이동하게 되더라도 숲이 훨씬 편하다.




"좋아 내가 지금 해야 하는 일은 무엇인지 정리해보자"




지금 상황에서 가장 위험한 존재는 역시 로버트와 타이런트다.


로버트는 마지막이 돼서야 등장할테니 일단 보류해두면 타이런트만 남는다. 내가 알고있는 한 타이런트는 잠시 사령관을 위협하다 사라졌을 뿐이었지만 이 세상은 내가 아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특히 요정마을 주요 인물 중 하나인 바닐라가 없는 상태이기도 하기에 어떤 변수가 생길지 모른다.




"기껏 화해했는데 죽게 놔둘 수는 없지."




방해전파는 알바트로스가 어떻게든 해줄 거다. 로버트의 기술력이 뛰어나다 해도 알바트로스 급일 가능성은 0에 수렴한다. 그렇다면 내가 해야 할 일은 하나만 남는다.




"항구에 있을 적의 방어선을 파괴해서 오르카의 대원들이 사령관을 도우러 갈 수 있도록 해야겠네."




방해전파 때문에 지원은 기대할 수 없겠지만 상관없다.


혼자서 날뛰는 것이 타이런트의 본래 싸움방식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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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3화 정도 쓰고 끝내려 했는데 어쩌다 여기까지 온거지